* 두 거두 만나다
충칭 담판 동안 마오쩌둥의 숙소는 충칭 교외 서쪽에 있는 린위안(林園)이었다. 과거 국민정부의 최고 원로이자 국가 주석이었던 린썬(林森)이 중일전쟁 중에 공관으로 사용했고 1943년 5월 12일 린썬이 죽은 뒤로는 국가 주석을 겸임한 장제스의 것이 되었다. 3층으로 된 건물에서 1층은 장제스가, 2층은 그의 부인인 쑹메이링이 사용하고 있었지만, 장제스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위해 2층과 3층을 통째로 내주었다. 중국의 두 거두가 한 건물, 한 지붕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첫 사흘만 이곳에서 보냈고 이후로는 보안을 우려해 "충칭의 홍구紅區"라 불리는 홍엔춘(红岩村)의 중공 대표부에서 지내며 업무를 보고 휴식을 취했다.

▲ 홍엔춘의 전경. 1937년 9월 2차 국공합작 이후 중국 대표부가 상주하면서 10년 동안 충칭과 옌안을 연결하였다.
8월 28일 저녁, 린위안에서 열린 환영 만찬회는 도무지 그동안 서로를 그토록 비난하며 총부리를 겨누었던 상대라고는 누구도 믿을 수 없을 만큼 화기애애했다. 이 날의 분위기에 대해 중공 기관지 신화일보(新華日報)는 "정말 유쾌했다"라고 썼다. 평화는 당장이라도 올 것같았다. 하지만 다음날 정오, 린위안 3층에서 열린 협상 자리에서는 그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졌다. 본격적인 신경전이 시작된 것이다.
회담장에는 장제스 외에 국민정부측 대표로 외교부장 왕스제(王世杰), 정치부장 장즈중(張治中), 쓰촨성 주석 겸 총통부 비서장 장췬(張群), 국민참정회 비서장 사오리쯔(邵力子)가 앉아 있었고, 테이블 건너편에는 중공측 대표로 마오쩌둥을 비롯해 저우언라이와 중공 중앙 비서장 왕뤄페이(王若飛)가 있었다.
회담이 시작되자 장제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정부측은 구체적인 방안을 먼저 제시하지 않겠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번 담판에 대해 어떤 선입견도 가지지 않다는 것과, 중공측의 의견을 솔직하게 듣고자 함입니다. 중공측은 성의껏 기탄없이 얘기해 주기를 원합니다." 마오쩌둥이 말했다. "중공은 이번 담판으로 내전을 완전히 끝내고 영구적인 평화가 실현되기를.." 그 순간 장제스가 마오쩌둥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중국에는 내전이 없습니다." 순간 회의장에는 냉랭한 긴장감이 흘렀다.
장제스의 말투는 위압적이었지만, 마오쩌둥도 그 정도로 기가 죽을 위인은 아니었다. "918사변(만주사변) 이래 중국 인민들은 화평 단결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항전 8년, 모두가 일본과 싸웠습니다. 하지만 내전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만약 중국에 내전이 없다고 말한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이 날 회의는 이것으로 끝났다. 회담은 잠시 소강 상태가 되어 마오쩌둥 일행은 중공 대표부 건물을 비롯해 충칭 여기저기를 돌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9월 2일에는 장제스가 다시 연회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는 천궈푸(陳果夫), 슝스후이(熊式輝), 보충시(白崇禧), 펑위샹(馮玉祥), 천청(陳誠) 등 국민정부의 고위 관료들과 정치가, 군 지휘관들이 참석하여 마오쩌둥과 인사를 나눴다.
9월 3일 회의는 다시 열렸다. 중공은 8가지의 원칙적인 요구사항을 내놓았다.
첫번째, 국공 담판에서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각당파와 무당파 대표 인사들이 참가하는 정치회의를 소집한다.
두번째, 국민대회(国民大会, 우리의 국회에 해당)의 개최를 놓고 만약 국민당이 기존 대표가 유효하다고 고집한다면 중공은 국민당과 협의할 수 없다.
세번째, 민주주의 국가의 원칙에 따라 모든 인민에게 자유를 부여하기 위해 현재의 모든 법령을 폐지하거나 수정한다.
네번째, 각 당파에 합법적인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
다섯번째, 모든 정치범을 석방한다.
여섯번째, 해방구 및 모든 수복지구에 대해 인민이 뽑은 정권을 승인한다.
일곱번째, 중공의 모든 군대는 16개군 48개 사단으로 개편한다. 또한 베이핑(베이징)에 행영(行營)과 정치위원회를 설치하고 중공의 지휘관이 화북에 주둔한 군대의 지휘권을 행사한다.
여덟번째, 중공도 일본군의 투항과 무장해제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양당이 앞으로 논의해야 할 주요 현안으로 11개 항목을 제시하였다. 주요 내용은 삼민주의 원칙에 따른 화평건국과 민주통일의 확정 방안, 각 당파의 합법적이고 평등한 지위에 대한 승인, 장제스의 영도적 지위에 대한 인정, 해방구 정권 및 항일 군대의 승인, 한간 처벌과 괴뢰군의 해산, 민주 정치의 실현과 군대의 국군화 등이었다.
장제스도 3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현 정부의 법통을 유지하고 정부 개조를 논하는 것은 불가하다. 둘째, 기간을 나누거나 국부적 해결은 불가하며 반드시 현재의 모든 사안을 일괄 타결해야 한다. 셋째, 정령과 군령의 통일을 모든 문제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회담 기간 동안 총 5번(8월 29일, 9월 2일, 9월 4일, 9월 12일, 9월 17일) 직접 독대하면서 협상을 벌였지만 의견을 쉽사리 좁히지 못했다. 그는 중공이 제시하는 화평 건국과 민주통일, 각 당파의 합법화는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해방구에 대해서는 결코 인정할 수 없으며 공산군에 대해서는 12개 사단이 최대 상한치라고 못박았다. 이는 중공이 요구하는 48개 사단의 1/4에 지나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장제스에게 적어도 국민정부군이 보유한 263개 사단의 1/6인 43개 사단은 되어야 공평하다고 주장했다. 장제스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군대를 줄이고 해방구를 취소하지 않겠다면 지금 당장 옌안으로 돌아가시오. 그리고 병력을 끌고 와서 싸웁시다." 팽팽한 신경전 가운데 협상은 도무지 진전이 없었다.
그렇다고 장제스도, 마오쩌둥도 이대로 회담을 끝낸 채 내전에 돌입할 생각은 없었다. 중국은 물론이고 온 세계가 국공의 담판을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도 할리 대사를 통해 내전은 불가하며 국공이 양보하여 타협하라고 연일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스탈린 역시 마오쩌둥에게 "소련은 내전에 찬성할 수 없다"는 전문을 보냈다. 이는 중국의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 질서가 미국과 소련 양 대국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은 미국대로 소련은 소련대로 만약 담판이 결렬되어 내전이 본격적으로 격화될 경우 이를 명분으로 상대가 무력 개입하여 극동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나설지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중국 대륙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는가에 따라 세력 균형을 깨뜨릴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두 나라가 직접 충돌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회담이 지지부진하자 중공은 당초 요구안에서 다소 후퇴하여 해방구에서 인민에 의한 선거를 다시 실시하고 선출된 정부를 중앙정부가 임명한다는 것과 창장 이남의 부대를 창장 이북으로 철수시킨다는 것, 전국의 군대를 감축한다는 전제 아래 공산군을 24개 사단으로 하되 1:6의 비율을 유지한다는 양보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장제스는 최대 20개 사단 이상을 넘을 수 없다는 점과 일본이 항복한 이상 해방구는 반드시 해체되어 국민정부의 행정 체계 안에 편입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또한 중공은 산시성을 비롯해 중공이 거대한 해방구를 구축하고 있는 서북과 화북 일대의 5개 성에 대해 주석직을, 8개 성에 대해서는 부주석 자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사실상 중국을 양분하자는 의미였다. 장제스는 행정경험과 그간의 공적을 보아 임명 여부를 고려할 것이나 구체적으로 어느 성을 중공에게 할당하겠다고 명시할 수는 없다며 맞섰다.
회담에서 국공의 가장 첨예한 문제는 해방구의 인정과 공산군의 개편이었다. 장제스로서는 중공이 독자적인 무력을 가진 채 중국 곳곳에 할거하면서 민중에게 혁명을 선동하는 현실은 정권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위협이었기에 도저히 묵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산당은 언제라도 정부를 부정하고 내전을 일으킬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중공이 할거를 중단하고 해방구를 포기할 것과 모든 무력을 국가에 반납하는 것을 협상의 전제로 내세웠다.
하지만 마오쩌둥도 이는 포기할 수 없는 수단이었다. 장제스로부터 중공의 안전을 지켜주는 것은 오직 무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포기한 채 장제스 정권에 참여한다는 것은 한낱 허울에 불과할 뿐이었다. 결국 양측의 근본적인 모순을 해결하지 않는 한 타협은 불가능했다.
* 일본의 항복과 유엔 창설
충칭에서 국공 담판이 진행되는 가운데, 9월 2일 도쿄만에서는 일본의 항복 조인식이 열렸다. 380척에 달하는 군함이 요코하마 앞바다를 완전히 메우고 상공에는 400대의 B-29 대형 전략폭격기와 1,500대의 함재기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날아가면서 일본을 위압했다.
전함 미주리 호의 함상에서 태평양전구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와 니미츠 제독, 스틸웰 대장 등 9개국 연합국 대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와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미치로(梅津美治郞) 대장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수락하는 문서에 서명하였다. 그 뒤를 이어 연합국 대표들이 차례로 서명하였다. 그 중에는 장제스를 대신해 중국 대표로 참석한 군령부장 쉬융창(徐永昌) 이급 상장도 있었다. 그는 미국 대표인 니미츠 제독에 이어 두번째로 서명하였다. 이는 연합국들이 태평양전쟁에서 중국이 미국 다음으로 기여했음을 인정한 것이었다.
일주일 뒤인 9월 9일에는 난징의 중앙군관학교 강당에서 지나파견군의 항복 조인식이 거행되었다. 육군 총사령관 허잉칭 일급상장이 중국을 대표하여 105만 지나파견군 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 대장의 항복을 받았다. 이로서 8년의 중일전쟁은 완전히 끝났다. 또한 1940년 이래 일본의 점령 아래 있었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해서도 프랑스군이 복귀할 때까지 북위 16도를 경계로 이남은 영국이, 이북은 중국이 맡았다. 이를 위해 제1방면군 총사령관 루한(盧漢)의 지휘 아래 제9집단군과 제60군, 제93군 등 약 18만명의 중국군이 1945년 9월부터 북부 인도차이나로 진입하여 일본군 제38군을 무장해제시키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이들은 필립 르클레르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군 극동원정군단이 인도차이나에 상륙하고 1946년 2월 중국-프랑스 사이에 충칭협정이 체결되면서 철수하였다.
또한 장제스 정권은 제2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으로 참전한 뒤 꾸준한 협상을 통해 그동안 열강들이 차지하고 있던 모든 조계와 이권을 회수하고 치외법권과 같은 치욕스러운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는데 성공하였다. 유일한 오점은 홍콩이었다. 영국의 강력한 반발 때문이었다. 전후에도 강대국의 지위를 누릴 것을 원했던 처칠은 본토와 동남아의 식민지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홍콩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루즈벨트가 여러 차례 홍콩 반환을 권유했지만 처칠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게다가 중국에 비교적 호의적이었던 루즈벨트와 달리, 트루먼은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처칠의 후임자인 애틀리는 그를 설득하는데 성공하였다.
일본이 항복하자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를 비롯해 항모 5척과 전함 2척, 순양함 3척 등으로 편성된 영국 태평양함대가 8월 27일 필리핀 수빅만을 출발했다. 그리고 30일 빅토리아 항에 진입하여 병력을 상륙시킨 후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는 한편, 홍콩 전역을 접수하여 재점령하였다. 9월 16일 영국 태평양 함대 사령관 하코트(C.H.Harcourt) 소장의 주재로 홍콩 주둔 일본군의 항복 조인식이 열렸다. 장제스는 어떻게든 중국이 홍콩을 회복한다는 이미지를 부여할 생각으로 하코트 소장을 중국 전구 총사령관인 자신의 명목상 대리로 임명하고, 중국 대표로 판화궈(潘華國) 소장을 파견하여 조인식에 참석토록 했으나 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홍콩은 영국의 손에 다시 넘어갔다.
한편, 미국은 이전의 국제연맹을 대체하기 위한 새로운 집단안보체제로서 유엔의 결성을 추진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유 체제에 의해 탄생했던 국제연맹 또한 열강들이 주도하는 집단 안보와 평화 유지를 추구했지만, 주도 세력이 없고 유럽 열강들의 구태의연한 밀실 외교 아래 1930년대 내내 위기 때마다 변변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따라서 루즈벨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집단권 자위권을 행사하여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새로운 기구의 창설을 주장하였다.
그의 구상은 4대 연합국인 미국과 영국, 소련, 중국 네 나라가 전후에도 동맹 체제를 유지하면서 향후 분쟁이 발생할 경우 주도적으로 군사력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또한 4대 연합국은 유엔을 구성하는 핵심이자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으로서 영구적인 지위와 총회 의결에 대한 절대 거부권이라는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고 구상하였다.
하지만 총회의 권한이 취약하고, 4대 연합국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거나 이들이 직접적인 분쟁 당사자가 될 경우 유엔이 무력화되어 어떤 역할도 할 수 없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루즈벨트의 구상에 대해 미 국무부 일각에서는 평화로운 분쟁 조정은 4대 연합국의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하되, 무력 사용은 안보리 상임 이사국 중 세 나라 이상의 찬성과 총회 회원국 2/3의 승인을 얻는 방안을 건의하여 상임 이사국 중의 어떤 나라가 자국의 이익만 내세워 무분별하게 거부권을 남용하는 상황을 방지하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친소 유화론자였던 루즈벨트는 자신이 죽은 뒤 소련과 냉전이 시작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1945년 4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 창설을 위한 회의가 개최되어 50개국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6월 26일 유엔 헌장이 비준되면서 10월 24일 유엔이 창설되었다. 유엔 안보리 상임 이사국에는 프랑스가 추가되어 최종적으로 5개국이 되었다. 이는 국제 사회가 인정하는 강대국의 지위를 의미하였다. 또한 중국은 비백인 국가로서는 유일한 유엔 안보리 상임 이사국으로서 미국, 영국, 소련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장제스로서는 최대의 외교적 성과이자 영광의 절정이었다. 중화민국 초대 유엔대사로는 궈타이치(郭泰祺)가 임명되었다. 그는 주영 대사와 외교 부장을 지낸 원로 외교관으로 젊은 시절에는 1919년 파리 강화회담에 중국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당시 약소국으로서 열강들의 횡포에 무력함과 설움을 절감해야 했던 그로서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 쌍십 협정의 선포
근 한달에 걸친 협상은 끝없는 평행선만 달리며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장제스도, 마오쩌둥은 서로를 설득할 방법도, 굴복시킬 방법도 없었다. 그렇다고 자기 주장만 일방적으로 밀어붙인들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회담은 결렬될 것이다. 그럼 국내외의 엄청난 비난을 피할 길이 없었다. 회담 내내 장제스는 마오쩌둥에게 "당신들은 군대에서 손을 떼고 정치로만 경쟁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마오쩌둥 또한 지지않고 "우리 홍군은 인민의 것입니다."라고 응수했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 덮어둔 채 원칙적인 것에만 합의키로 의견을 모았다.

▲ 쌍십협정 체결 당시의 헐리 대사와 장제스, 마오쩌둥.
1945년 10월 10일. 중화민국 건국 34주년 기념일인 이날, 국공 양측은 협정서에 조인하고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음을 중국 전역에 선포하였다. 이것이 "정부와 중공대표 회담 기요(政府與中共代表會談紀要)", 이른바 "쌍십협정(雙十協定)"이다. 마오쩌둥이 8월 28일 충칭에 도착한 이래 43일만이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내전 중지와 일체의 분쟁을 대화로 해결하는데 동의한다.
둘째, 삼민주의 원칙 아래에서 부강한 중국의 건설에 상호 협력한다.
셋째, 훈정을 끝내고 헌정을 실시한다.
넷째, 정치협상회의(政治協商會議)를 조속히 개최하여 정부의 개조와 신헌법의 제정을 추진한다.
다섯째, 중공은 장제스와 국민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인정한다.
이로서 5억 중국 민중과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던 국공의 평화 조약은 체결되었다. 그동안 국민정부가 유지해 오던 이른바 "훈정(訓政)"을 중단하고 헌법을 제정하여 "헌정(憲政)"을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1936년 5월 5일에 선포되었던 "중화민국헌법초안", 이른바 "5.5 헌초(五五憲草)"을 기본안으로 하되, 총통에게 과도한 권력이 집중되는 등의 일부 내용은 향후 논의를 거쳐 수정 보완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쌍십협정은 한낱 미봉책일 뿐, 그동안 첨예하게 대립했던 정치적 현안들에 대해서는 그대로 덮어버렸다. 헌정의 실시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제 누가 어떻게 한다는 내용은 없었고 해방구와 군대의 감축 문제 역시 합의점이 없었다. 중공은 그동안 이룩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장제스 정권의 한쪽을 차지하는데 만족할 생각이 없었고, 장제스 역시 중공이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한 채 자신의 통치 기반을 야금야금 무너뜨리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 더욱이 어느 한쪽이 합의를 깨뜨릴 경우 누가 무슨 수로 제재할 것인가.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충칭 회담은 어떤 결실도 내놓지 못했다.
10월 11일 오전 9시, 마오쩌둥은 장제스와 마지막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왕뤄페이와 장즈중과 함께 장제스의 전용차를 타고 주룽포(九龍坡) 비행장으로 향했다. 저우언라이는 충칭에 남아 국민정부측과 계속 협상을 진행하였다. 9시 45분, 마오쩌둥을 태운 비행기가 충칭의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두 거두의 만남은 이렇게 끝났고 죽을 때까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회담이 끝난 뒤, 장제스와 마오쩌둥 모두 서로 나름의 성과가 있었으며 중국의 앞날은 무한히 밝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양쪽 모두 국내외의 여론을 살피면서 상대가 협상하는 척하면서 온갖 도발을 일삼으며 내전의 기회만 노리고 있다며 선전 공세를 시작했다. 서로 정치적으로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한손으로는 대화를 계속하면서 한손으로는 공격을 더욱 강화했다. 총성이 멈추기는 커녕, 싸움은 점점 격화되었다.
* 샹당전역, 옌시산 참패하다
충칭회담 중에 산시성(山西省) 남부 일대에 벌어진 "샹당전역(上党戦役)"은 중일전쟁이 끝난 뒤 국공간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산시성은 신해혁명 이래 오랫동안 산시 군벌 옌시산(閻錫山)이 통치하였다. 전형적인 봉건 군벌이었던 그는 타이위안을 수도로 산시성을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어 주변의 군벌 세력이나 공산당의 침입을 막아내었다. 산시성의 절대 권력자였던 그는 산시왕이라 불리었다. 옌시산이 있는 한, 장제스도 산시성은 손을 댈 수 없었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 일본군이 만리장성을 넘어 산시성을 침공하자 옌시산은 자신의 영토 대부분을 빼앗긴 채 남쪽으로 후퇴하였고 타이위안에는 일본군 북지나파견군 제1군 사령부가 주둔하였다.
옌시산의 관심사는 항일도, 반공도 아니라 자신의 지반을 유지하는데 있었다. 그는 현지의 일본군에 몰래 뇌물을 먹이고 휴전을 맺어 더 이상의 남하를 막는 한편, 산시성(陝西省) 북부의 중공이 산시성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막는데에만 총력을 기울였다. 한때 타이위안 방어전에서 옌시산과 협력 관계를 유지했던 중공 역시 태도를 바꾸어 희생이 큰 일본군과의 전투보다는 산시성의 변경으로 침투하여 지하 근거지 건설에 노력하였다. 옌시산으로서는 중공이 자신의 옛 영토를 잠식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당장 중공과 손을 끊고 총부리를 돌렸다. 따라서 중일전쟁 내내 산시성의 전황은 일본군과의 전투는 소강상태를 유지한 반면, 오히려 옌시산과 중공의 전투가 훨씬 더 격렬했다. 양측의 갈등과 증오심은 중국 어느 곳보다도 골이 깊었다.
일본이 항복하자말자 옌시산은 제19군에 명령하여 타이위안을 장악하고 산시성에 주둔한 일본군과 친일 괴뢰군을 무장해제시켜 무기와 군수품을 접수하라고 지시했다. 중공 역시 덩샤오핑과 류보청의 진지위루변구(晋冀魯豫辺区, 중일전쟁 당시 중공이 산시성, 허베이성, 허난성, 산둥성 등 화북 일대에서 근거지의 건설과 행정, 군사작전을 총괄하기 위해 설치한 변구. 사령부는 허베이성 우안武安)에 똑같은 명령을 내렸다. 양측의 충돌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었다.
옌시산의 명령에 따라 국민정부군 제19군 4개 사단 1만 7천여명이 북상하여 산시성 남부로 진격하여 샹당지구(上党地区, 창즈長治를 중심으로 산시성 동남부를 가리키는 옛 이름)를 점령했다. 마오쩌둥은 충칭으로 떠나기 전에 이미 자신의 대리인 류사오치에게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국민당 세력을 격멸하고 적의 항복을 받아내라."라고 지시하였다. 8월 26일 중공 중앙위는 덩샤오핑에게 샹당지구의 점령을 명령했다. 8월 31일 덩샤오핑은 타이항(太行)、타이위에(太岳)、지난(冀南) 3개 종대에 대해 공격 명령을 하달하였다. 병력은 2만 8천명에 달했다.
충칭 회담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9월 10일, 공산군의 공격이 일제히 시작되었다. 10일에 걸친 전투 끝에 제19군은 연전연패를 당한 채 창즈성에 고립되었다. 옌시산으로서도 여기서의 패배는 산시성 전체가 중공의 손아귀에 넘어간다는 의미였기에 제19군에 끝까지 싸우라고 지시하는 한편, 급히 증원부대로 제23군과 제83군을 급파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전력과 이동 경로는 모두 중공측에 속속이 간파되었다. 덩샤오핑은 제19군의 포위를 늦추지 않는 한편, 창즈로 향하는 길목 주변에 병력을 매복시켜 옌시산의 증원부대를 모조리 격파하였다. 옌시산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제19군에 창즈를 버리고 포위망을 돌파하라고 지시했지만 결국 10월 12일 창즈 동남쪽에서 제19군은 공산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전멸하였다. 제19군 군장 스저보(史沢波)도 포로가 되었다. 충칭에서 쌍십협정이 체결된지 이틀 뒤였다.
한 달에 걸친 샹당 전역에서 옌시산은 3개군 11개 사단을 격멸당하는 대손실을 입었다. 전사자 3천여명에, 군장 1명을 포함해 27명의 장군과 3만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 또한 공산군은 산포 24문, 기관총 2천정, 소총 1만6천여정을 노획하였다. 공산군의 손실은 약 7천여명 정도였다. 옌시산에게는 실로 참담한 통격이었다. 그동안 장제스에게 한번도 손을 벌인 적이 없었던 그도 더 이상 자기 힘으로는 공산군을 이길 수 없음을 절감하고 중앙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충칭 회담과 쌍십협정의 체결에도 불구하고 총성이 멈출 기미는 없었다. 충칭에서는 장제스와 마오쩌둥 두 지도자가 직접 얼굴을 맞대고 협상을 하는 동안, 그 밖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화약 냄새가 진동하였다. 두 사람 역시 이를 막으려는 대신 더욱 가차없이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오직 싸워서 이기는 것만이 협상장에서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낼 수 있으며, 자신의 안전 또한 보장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국공의 근본적인 모순을 해결하지도, 해결할 생각도 없었다. 그보다 두 사람에게 애초에 진정성은 있었던가.
서구처럼 시민 계층이 충분히 형성되지 못한 중국으로서는 지배와 피지배라는 수천년 동안 이어져 온 뿌리 깊은 봉건 문화의 잔재를 극복하기가 너무나 요원하였다. 일찌기 난창 봉기 당시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며 유혈 혁명을 부르짖었던 마오쩌둥의 말대로 총이 곧 권력이었다. 바꾸어 말해서 총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파멸을 의미했다.
또 하나의 선택은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서로의 세력권을 정하고 중국을 둘로 나누는 것이었다. 내전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상반되는 두 사람에게 유일한 일치점을 찾는다면 바로 하나의 중국, 한 사람의 통치를 원한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오직 자신이 주도해야 했다. 결국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굴복하지 않는 한 어떤 대화도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내전의 불길은 점점 중국 대륙 전체로 퍼져 나갔다.
'전쟁군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국공내전, 천하를 다투다 - 5. 국민정부군 산하이관을 돌파하다/blog.naver.com/atena (0) | 2018.01.06 |
|---|---|
| 국공내전, 천하를 다투다 - 4. 마셜, 중국에 오다/blog.naver.com/atena (0) | 2018.01.06 |
| 국공내전, 천하를 다투다 - 2. 동북으로 향하라/blog.naver.com/atena (0) | 2018.01.06 |
| 국공내전, 천하를 다투다 - 1. 일본 제국 패망하다/blog.naver.com/atena (0) | 2018.01.06 |
| 국공내전, 장제스와 마오쩌둥 천하를 다투다(1945~1949) - 서문/blog.naver.com/atena (0) | 2018.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