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9일 새벽 0시, 바실로에프스키 원수가 지휘하는 소련의 대군이 만주를 전면 침공하였다. 나중에 "8월 폭풍작전"이라고 불리게 되는 소련 최후의 공격에 투입된 병력은 3개 전선군 80개 사단, 1개 전차군, 3개 항공군 등 157만명의 병력에 야포 2만6천문, 전차 및 돌격포 5300대, 항공기 4500대에 달했다. 이는 1944년 6월 동부전선 최대의 공세이자 나치 독일군을 거의 괴멸 상태에 내몰았던 "바그라티온 작전"에 투입된 병력과 맞먹는 규모였다. 약해질대로 약해진 관동군이 어떻게 막을 것인가. 전쟁 막바지에 스탈린이 극동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얻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소련군의 참전은 일본 지도부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4년 전인 1941년 4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이 태평양에서 미국과 치열하게 싸우고 소련이 독일과 혈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두 나라는 서로 다른 적을 상대로 했기에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4개월 전 소련은 갑작스레 5년 기한의 일소중립조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통보하였다. 스탈린과 몰로토프 외무인민위원장(외무장관)이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회담에 참석하여 트루먼과 처칠을 만나고, 만주 국경에는 소련군 병력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소련의 침공은 임박했다.
그럼에도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 총리를 비롯해 우유부단하고 현실감각이 결여되어 있던 일본 지도부는 애써 그 사실을 외면해 왔었다. 일소 중립 조약이 만료되려면 아직 1년은 남았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종이 한조각에 불과한 조약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들은 파국에 직면하자 비로소 꿈에서 깨어났다. 또한 이날 오전 11시 나가사키에 두번째 원자폭탄 "팻맨(Fat Man)이 떨어졌다.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4만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 그동안 "1억 옥쇄"를 외치며 본토 결전을 준비해 왔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원자폭탄의 위력과 사방에서 좁혀오는 연합군 앞에서 조잡한 무기와 죽창으로 맞선다는 것은 집단 자살일 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즈키의 주재로 항복을 논의하는 각의가 열렸다. 스즈키는 이제는 무조건 항복을 수락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군부는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연합국이 다음 세가지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우겼다. 첫째로 일본군이 스스로 점령지에서 물러나고 둘째로 전범 처벌 또한 일본이 알아서 할 것이며 세번째로 연합국은 일본을 점령하지 않는다. 물론 연합국이 이런 조건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하루 종일 회의를 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자 최종 결정을 그들이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하는 천황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밤 11시 50분, 천황 히로히토가 참석한 가운데 어전회의가 열렸다. 아나미 고레츠카(阿南惟幾) 육군대신과 도요타 소에무 연합함대 사령관 등 군부 강경파들은 여전히 본토 결전을 고집했다. 무익한 갑론을박을 하는 와중에 히로히토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소위 하늘의 아들이자 태양신의 후손이라는 히로히토는 살아 있는 신은 커녕, 지치고 여윈데다 겁에 질린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동안 소련을 통해 종전 협상의 중재를 기대했던 그는 최후의 희망마저 사라지자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지 않으면 안된다" 이로서 회의는 결정되었다. 천황이 항복을 명령한 것이다. 강경파들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본 외무성은 중립국인 스위스와 스웨덴을 통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고 전달하였다. 하지만 한가지 조건이 달려 있었다. "국체호지(國體護持)" 즉, 천황에는 손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포성이 당장 멈춘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완강하게 버티던 일본이 급작스레 저항 의지를 상실한 것은 연합국으로서도 뜻밖이었다. 가미가제 자살 공격 등 전쟁 후반으로 가면서 점점 패색이 짙어지는 와중에도 일본군은 끈질기게 저항하였고 큐슈에서는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해 방어 준비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뒤에도 일본 지도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러했다. 트루먼이 "일본이 즉각 항복하지 않으면 여지껏 한번도 보지 못한 파멸의 비가 하늘로부터 쏟아질 것"이라는 성명을 재차 발표했지만 일본은 묵묵부답이었다.
미국의 대다수 전략 기획가들은 베를린이 함락될 때까지 싸웠던 나치 독일처럼 일본 역시 최후까지 싸울 것이며 일본을 완전히 점령하려면 적어도 1년에서 수년은 걸리리라고 예상하였다. 미 합참은 일본본토상륙을 강행키로 결정하고 다운폴작전(Operation Downfall)을 수립하였다. 첫번째 단계는 올림픽 작전(Operation Olympic)으로, 1945년 11월 1일 큐슈 남부에 14개 사단 30만명의 미군이 상륙하고, 이어서 두번째 단계인 코로넷 작전(Operation Coronet)에서 1946년 3월 도쿄 근교에 70만명이 상륙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고 있던 장제스의 심경은 복잡하였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 이래 8년에 걸친 고통스러웠던 전쟁도 이제 종지부를 찍으려는 참이었다. 전쟁은 이겼다. 하지만 승리의 열매는 누가 차지할 것인가. 중국 전선에서 반격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여전히 중국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일본군 백만명의 항복을 받아내는 일,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고 붕괴된 통치 기반을 회복하는 일, 파탄 지경에 내몰린 채 기아에 허덕이는 중국 경제의 부흥,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소련군의 남하를 멈추고 이들을 철수시키는 일 등. 장제스 정권은 어느 것에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특히 가장 큰 위협은 나날이 세력을 더해가는 중공이었다.
일본이 항복 의사를 내비추었다는 소식은 전세계로 빠르게 전파되었고 중국 서북의 산간오지에 있는 중공도 이 정보를 놓치지 않았다. 이 날 팔로군 총사령관 주더의 명의로 작전명령 제1호가 전체 예하 부대에 하달되었다. "모든 공산군은 기한을 정하여 일본군에게 투항을 권고하라. 그들이 기한 내에 항복하지 않는다면 무장 해제를 시켜라. 그들이 무장 해제를 거부한다면 단호히 전멸시켜라!"
다음날 오전 작전명령 제2호부터 제6호까지 연달아 떨어졌다. 각 공산군 부대는 소련, 몽골의 군대와 협력할 것과, 주요 철도와 도로를 신속하게 탈취할 것, 만주로 진격하라는 것이었다. 저녁 6시, 작전명령 제7호가 떨어졌다. "일본군과 친일괴뢰군이 장악하고 있는 일체의 보급기지와 군사 기지, 열차, 선박, 군수품, 차량, 방송국, 관공서를 장악하라!"
물론 장제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군사위원회 명의로 다음 세가지 명령이 하달되었다.
첫번째 명령, 국민정부군은 신속하게 주요 요지를 점령하고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킬 것이며 만약 공산군이 방해한다면 모든 수단을 다하여 공격하라!
두번째 명령, 제18집단군(공산군) 총사령 주더 및 펑더화이는 현 위치에서 차후 명령을 기다릴 것, 일본군 및 친일괴뢰군을 명령 없이 공격하거나 무장 해제시키는 것을 금지한다!
세번째 명령, 일본군과 친일괴뢰군은 국민정부군이 접수할 때까지 주둔 지역의 치안을 책임질 것이며 국민정부의 허가 없이 주둔지를 벗어나거나 공산군에게 투항해서는 안된다!
물론 그동안 "국가 속의 국가"로서 사실상 독자적으로 행동해 왔던 중공이 이제와서 장제스의 명령에 순순히 복종할 리 없었다. 이미 내전을 향한 경쟁은 시작되었다. 특히 양측이 가장 눈독을 들이는 곳은 만주였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변방이었던 만주는 청말까지만 해도 대부분 미개발지의 황무지였다. 하지만 일본이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만주에 한발을 내딛었고 이후 만주 군벌 장쭤린을 후원하면서 만주를 경제적 반식민지로 만들었다. 만주 사변 이후에는 곳곳에 철도와 대규모 공업 지대를 건설하고 탄광을 개발하였다. 시베리아와 중국 본토를 침략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앞장 선 사람이 전후 일본 총리를 지냈고 아베 신조(安倍晋三) 현 총리의 외조부이기도 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였다. 1936년에 만주국의 고문으로 부임한 그는 1939년 3월 "만주의 자급자족"을 목표로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의 주도로 일본은 만주국의 재정과 경제, 산업 전반을 장악하고 일본인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또한 배타적인 경제 블록으로 만들어 중국 본토와의 연결 고리를 끊는 한편, 군수 산업 중심의 거대한 병참 기지로 만들었다. 외화 확보를 위해 농민들에게는 콩을 강제로 심게 한 후 해외로 수출케 했다. 따라서 만주의 경제는 오직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한 철저한 수탈 경제로 변모하였고 대다수 농민들은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생활고에 허덕였다.
오카베 마키오(岡部牧夫)의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에 따르면, 만주 사변부터 일본 패망까지 일본이 만주에 투자한 금액은 총 17억56백만엔에 달했으며 일본 전체 해외자산의 42%를 차지했다.(참고로, 조선이 23%, 타이완이 7%, 중국 본토가 21%) 만주의 인구는 전체 중국의 8%에 불과했지만, 생산력은 중국 본토를 훨씬 능가했다. 석탄이 풍부하게 매장된 푸순(撫順)의 석탄 액화 연료 공장에서는 연간 4만톤의 생산능력이 있었고, 만주의 제철소들은 정점기였던 1943년에 선철 130만톤을 생산하였다.
또한 1943년 기준으로 만주의 콩 생산량은 중국 전체의 70%에 달했고 석탄 생산량은 36%, 철도는 41%, 전력 생산량은 61%, 시멘트는 71%, 철강은 91%, 중공업은 90%를 차지했다. 일본 본토의 피폐와 연합군의 대규모 전략 폭격으로 만주의 생산성이 급속도로 저하되는 1944년 이후에도 중국 본토에 비해 선철은 8.5배, 전력은 2.5배에 달했다. 따라서 만주는 그 자체로 자립 역량을 갖춘 중국 최대의 공업지대였다. 중공업의 중심지라는 만주의 지위는 신중국 건국 이후에도 소련, 북한과 가깝다는 이점 덕분에 1980년대까지 변함이 없었다.
따라서 장제스나 마오쩌둥에게 만주는 그야말로 노른자위였다. 1945년 4월 중국 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만주가 산업의 중심이자 병참의 요지임을 상기하면서 "동북은 특별한 곳이다. 만약 우리가 모든 근거지를 잃어도 동북만 있으면 중국 혁명의 기초는 견고하다. 물론 다른 근거지도 잃지 않고 동북도 있다면 중국 혁명의 기초는 더욱 공고할 것이다."라면서 만주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장제스 역시 "동북을 탈취하지 못하면 중국은 근대 산업국가로 발전할 수 없다"라면서 "동북이 없으면 화북도 없고 화북이 없으면 중국도 없다"라고 하였다. 만주는 국공 어느 쪽도 물러설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불리한 쪽은 장제스였다. 우선 중공의 근거지는 만주에서 가까운데다 1930년대 말 관동군의 대대적인 토벌전에 쫓겨 팔로군에 합류한 구 동북항일연군 출신의 간부들이 있었다. 이들은 만주의 지리나 상황에 밝았다. 선견지명에서 남달랐던 마오쩌둥은 5월부터 이미 한발 앞서 이들을 만주에 침투시켜 지하조직을 건설케 하였다. 소련군이 남하하고 일본의 항복이 코앞에 다가오자 린뱌오의 지휘 아래 산시성과 내몽골, 산둥성에 있는 병력을 화북을 거쳐 만주로 진격시켰다. 또한 가오강(高崗), 장원톈(張聞天) 등 중앙 정치국 주요 멤버들과 간부들도 만주로 갔다. 8월부터 11월까지 만주로 진입한 공산군 부대는 간부 2만명에 병력은 13만명에 달했다.
반면, 국민정부는 주력부대가 서남부로 밀려난 상태였기에 거리적으로도 불리했고 만주와 화북에서의 통치 기반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또한 장제스가 만주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현실적으로 만주를 신속하게 장악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그는 일본이 항복한 뒤인 8월 말에야 동북행영을 설치하고 슝스후이(熊式輝)을 행영주임에 임명하였다. 또한 미군의 도움을 받아 10월 이후부터 해상과 항공 수송으로 병력을 만주로 진입시켰다. 하지만 한발 늦은 대응이었다. 그 사이 공산군은 이미 만주에 상당한 기반을 구축하였고 이 차이가 훗날 국공내전의 승패를 가르게 된다.
한편, 삼면에서 만주를 침공한 소련군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관동군의 최일선 방어선을 무너뜨린 후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 일부 병력은 두만강을 도하하여 한반도 북부로 진입했다. 관동군의 전력은 24개 보병사단, 11개 독립여단, 제2항공군 등 약73만명에 달했지만 주력 사단은 모조리 본토나 남방전선으로 이동하면서 사실상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무기도 빈약했고 군기도 엉망이었다. 노몬한 사변 이후 항일 유격대 토벌 이외에는 이렇다할 전투 한번 겪지 않았기에 기강은 땅에 떨어졌다. 고위 장성들은 본연의 임무에 충실히 하는 대신 만주국의 정치에 관여하는데 열을 올렸고 장교들 또한 축재에만 혈안이 되었다. 병사들의 태반은 현지에서 급조한 예비역 출신의 중장년들이었다. 독일군을 상대로 혈전을 벌였던 소련군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 다롄에 입성한 소련군.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뒤에도 소련군은 멈추지 않고 남하하며 만주와 북중국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관동군과 괴뢰 만주군이 빠르게 와해되자 만주에 미리 침투해 있던 공산군은 그 공백을 신속하게 장악하면서 영역을 확대해 나갔고 막대한 군수품과 무기를 손에 넣었다. 8월 14일 모스크바에서 중소우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소련군은 국민정부의 만주 접수를 적극적으로 도울 의무가 있었지만, 스탈린은 교활하게도 소련군의 이동과 철수 계획을 국민정부에게는 비밀로 하면서 공산군에게 흘렸다. 덕분에 공산군은 소련군의 철수에 맞추어 국민정부군이 진입하기 전에 재빨리 주요 도시와 전략적 요충지를 선점할 수 있었다.
국공 양측의 갈등과 충돌은 점점 격화되었다. 일본이 정식으로 항복을 선언하기 전날인 8월 14일, 장제스는 옌안의 마오쩌둥에게 한통의 긴급 전문을 보냈다.
"왜구(일본)가 투항하여 세계에 영구적인 평화가 실현되는 국면을 맞이하여, 국내외의 각종 중요한 문제를 급히 해결코자 특별히 마오쩌둥 선생을 충칭으로 모시어 국가 대사를 나누고자 청하니 와주시기 바랍니다. - 장제스"
이는 장제스가 평생 "비적"이라고 불렀던 중공을 처음으로 대등한 협상 상대로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그동안 국공의 협상에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서로 뒤로 물러난 채 국민정부측 대표는 왕스제(王世杰) 외교부장이, 공산당 대표는 저우언라이가 맡았다. 하지만 장제스는 양 진영의 최고 지도자들이 직접 회담장으로 나와서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마오쩌둥으로서도 뜻밖이었기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고민 끝에 이틀 뒤인 16일에야 주더의 명의로 공산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지 못하도록 한 것에 항의하는 전문을 보낸 다음, 자신은 아직 옌안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니 좀 더 논의를 거친 연후에 가겠다고 답하였다.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천왕의 소위 옥음 방송이 일본 제국 전체로 울러 퍼졌다. 일본과의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국공의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장제스는 마오쩌둥이 지연 전술을 쓰자 8월 20일에 또 한번 전문을 보냈다. "항전 8년, 전쟁이 겨우 끝난 지금 우리끼리 다시 싸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국가의 어려움을 몸으로 느끼고 인민의 어려움을 불쌍히 여기어 함께 힘을 합쳐야 합니다. 건국의 공으로 항전의 과일을 거둡시다. 이는 선생의 호의에 달려 있습니다. 같이 대계를 정하고 수혜를 받음이 어찌 한 사람으로 이루어지겠습니까! 특별히 다시 전문을 보내니 승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팔로군 사령부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전문을 보냈다.
공산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지 못하도록 한 것은 태평양 방면 연합국 최고 사령관 맥아더의 일반명령 1호(General Order No.1)에 의한 것이다, 장제스는 연합국이 승인한 중국 전구 총사령관이며 중국과 버마를 비롯해, 만주와 한반도를 제외한 북위 16도 이북의 모든 전쟁 구역을 총괄하였다. 국제 사회에서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이자 중앙정부로 승인받은 것은 국민 정부이며 장제스의 명령은 곧 연합국 사령부의 명령이기에 모든 공산군이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공산군은 자신의 이익만 앞세울 것이 아니라 국군으로서 군령을 준수하라고 명령하였다. 만약 이를 거부하겠다면 중국의 지도자인 자신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반란군으로 규정할 수 밖에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어쨌거나 장제스가 먼저 협상을 제안하자 그동안 장제스에 대해 대화와 타협을 할 의지가 전혀 없다며 비난을 퍼부었던 마오쩌둥은 매우 당혹스러웠다. 만약 자신이 충칭에 가지 않는다면 장제스는 중공이 거짓말쟁이라고 선전할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간다면 시안사변 당시 장제스와 함께 난징에 갔던 장쉐량처럼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체포되지는 않을 것인가. 또한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가장하여 암살되지는 않을 것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이었다. 마오쩌둥은 8월 22일 답신을 보내어 자기 대신 저우언라이를 먼저 보내겠다고 전했다. 그러자 장제스로부터 세번째 전문이 왔다. 비행기를 이미 준비했으니 마오쩌둥이 직접 충칭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이는 최후 통첩이었다.
사실 장제스는 우세한 군사력으로 공산군을 즉각 공격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준비 부족 탓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눈치 때문이었다. 그동안 트루먼은 헐리를 주중 미국 대사로 임명하여 장제스가 공산군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국공의 타협을 종용하였다. 우유부단한 면이 있었던 장제스는 헐리에게 "중국 내부의 문제"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할 베짱이 없었다. 그동안 미국이 내미는 달콤한 원조에 길들어진 탓이었다. 따라서 한쪽으로는 협상하는 시늉을 하면서 한쪽으로는 내전을 준비하였다. 협상이 실현되어 내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좋은 것이고, 결렬되어 결국 내전이 일어난다고 해도 손해는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 또한 결과적으로는 오판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오랜 회의 끝에 장제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가지 않는다면 장제스의 책략에 빠져드는 것이고, 신변 문제는 헐리와 같이 가는 이상 감히 장제스가 어떻게 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 따위는 없다. 내가 없는 동안에는 류사오치 동지가 내 직무를 대신하라." 주더와 펑더화이도 찬성했다. "마오 주석이 충칭으로 간다면 우리 당이 주동이 되어 전국 인민의 사기를 진작시킬 것입니다."

▲ 충칭에 도착한 마오쩌둥과 헐리 대사.
마오쩌둥이 헐리가 신변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충칭에 오기로 했다는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그동안 옌안의 토굴에만 틀어박혀 있던 주제에 중공이 온갖 비난을 퍼부었던 헐리를 방패막이로 삼느냐면서 겁쟁이라고 비웃었다.
8월 28일 이른 아침.
마오쩌둥은 헐리의 전용기에 헐리와 장제스의 비서인 장즈중과 함께 올랐다. 그는 간부들의 배웅을 받으며 옌안을 떠났다. 1935년 대장정에서 옌안에 자리 잡은 이래 처음으로 옌안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오후 3시 충칭 비행장에 도착했다. 그가 내리자 먼저 와 있던 저우언라이와 국민정부 측 주요 인사들이 환영하였다. 또한 그의 앞에는 장제스가 준비한 검은색 방탄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체포하기는 고사하고, 장제스는 그를 위해 최고의 예우를 준비하였다. 마오쩌둥을 타운 승용차는 장제스의 별장으로 향했다. 저녁 8시 그곳에서 성대한 환영회가 열렸다.
두 맞수는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대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악수를 나누었다. 장제스 58세, 마오쩌둥 52살이었다. 1927년 국공이 분열된지 꼭 8년 만이었다. 20여년 전 아직 쑨원이 살아 있었고 국공합작이 한창일 때, 장제스는 황푸 군관학교의 교장이었고 마오쩌둥은 국민당 선전부장이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의 대부분은 여전히 군벌들의 것이었다. 국민정부는 광저우만을 겨우 차지한 채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쑨원이 죽은 뒤 1년 후 장제스는 북벌을 시작했다. 북벌군은 소련의 원조와 중공의 적극적인 협력 아래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4년도 채 되지 않아 중국을 통일하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서로 양립할 수 없었던 국공은 그 과정에서 권력을 놓고 격렬한 투쟁이 벌어졌다. 승자는 장제스였다. 중공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지만 말살당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몇번을 싸웠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던가. 8년 항전이 끝나고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지 13일이 지난 이날, 두 사람의 만남은 중국 최대의 사건이자,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일이기도 했다.

▲ 환영회에서 담소를 나누는 장제스와 마오쩌둥.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지만 적진 한가운데에 온 마오쩌둥은 애써 긴장감을 감추려는 듯 연신 줄담배를 피었다. 마음이 진정되자 장제스를 향해 말했다. "장 선생!" "우리는 18년 동안 만나지 못했습니다." 장제스는 마오쩌둥이 자신에게 아무런 직함도 붙이지 않고 그냥 "선생"이라고 불렀지만, 개의치 않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동안 비적의 수괴라고 불렸던 상대에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18년이면 중국을 건설하고도 충분한 시간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충칭담판(重慶談判)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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