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당의 동북 진입을 저지하라!
충칭회담이 끝난 뒤부터 마셜이 오기 전까지 중국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내전을 중단키로 합의한 쌍십협정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 국공의 충돌은 오히려 더욱 격화되어 중국 곳곳에서 치열한 영토 쟁탈전이 벌어졌다. 또한 양측은 경쟁적으로 일본군과 현지 괴뢰군을 포섭하여 우군으로 편입시키고 무기를 확보하는 등 내전을 준비하였다. 그렇다고 어느 쪽도 정식으로 협상 결렬과 전면전을 선언하지도 않았다. 양측은 국내외 정세를 지켜보면서 상황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되, 필요하다면 무력 충돌 또한 마다하지 않았다. 유리한 지점을 선점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내전을 앞두고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여기서 누가 이기는가가 곧 중국의 지배자를 의미했기에 어느 쪽도 수단과 방법을 가릴 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폭풍 전야인 셈이었다.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오는 소위 "험프루트"와 스틸웰이 1년에 걸쳐 미얀마 북부에서 건설한 "스틸웰 공도"를 통해 미국이 보내오는 막대한 군수물자가 매일같이 수송되었다. 1943년 내내 월 2천톤을 넘지 못했던 물자는 1945년 8월이 되자 월 10만톤이 넘었다. 덕분에 원장(援蔣)루트의 종착점인 쿤밍은 온갖 미국제 물자로 넘쳐났다. 오랜 전쟁으로 큰 타격을 입은 채 쿤밍에서 재편 중이던 국민정부군은 이제 미군 군복을 입고 미제 철모와 미제 무기로 무장한 정예부대로 거듭났다. 또한 중국원정군은 미얀마와 북부 베트남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은 뒤 중국으로 돌아왔다. 내전이 시작될 경우 이들이 공격의 선봉에 설 참이었다. 이들의 화력과 풍부한 전투경험은 변변한 실전도 경험하지 못한 오합지졸에 불과한 공산군과는 감히 비교도 되지 않았다.
내전의 불길은 중국의 어느 곳 할 것 없이 급속도로 번져나가고 있었지만, 폭풍의 눈은 역시 동북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장제스는 자신의 최측근인 슝스하이를 동북행정 주임으로, 동북보안사령관에 두위밍을 임명하여 동북으로 파견하였다. 또한 주력 부대는 여전히 윈난성과 쓰촨성, 광시성 등 서남부에 있었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아 대량의 수송기와 선박을 이용해 북쪽으로 쉬지 않고 수송했다. 늘 중국의 유일한 최고 지도자라고 자부했던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화북과 동북에 대한 통제권을 중공에게 넘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국민정부군은 막상 핑한철도나 진푸철도, 핑수철도 등 중국의 대동맥이라 할 수 있는 주요 철도를 단 하나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철도들이 관통하는 허베이성과 허난성, 내몽골, 산둥성 등 중국 북부 지역의 태반을 공산군이 장악한 채 국민정부군의 이동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장제스 정권의 기반은 화중과 화남에 있었기에 아무리 미국의 도움을 받아 동해 연안의 항구를 통해 병참선을 확보한다고 해도 막상 이들 철도를 장악하지 못한다면 화북과 동북의 광대한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또한 소련군은 동북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국민정부가 이 지역에 대한 주권을 원만히 회복하려면 소련의 협력이 절실하였다. 하지만 스탈린은 중국에서의 장제스의 위상을 인정하면서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만주를 중국과 소련의 완충지대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는 장제스와 마오쩌둥에 양다리를 걸친 채 장제스가 만주 전체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중공의 만주 점령을 교묘하게 지원하였다. 물론 마오쩌둥도 기회를 놓칠 위인이 아니었다.
이미 펑전(彭眞)과 린뺘오 등이 지휘하는 동북중앙국 산하 수만명의 간부들과 병력이 동북을 향해 한창 진군하고 있던 10월 19일,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이 지시를 내렸다. "국민당은 급히 군대를 동북으로 파견하여 우리와 투쟁하려고 한다. 우리는 주력을 첫째로 진저우(錦州), 잉커우(營口), 선양(瀋陽)에 집중시키고, 둘째로 좡허(庄河, 랴오둥 반도 남쪽에 있으며 다롄항과 연결되는 요충지), 안둥(安東)에 방어선을 쳐서 국민당군의 상륙을 저지하고 이들의 진격을 막아 전 동북을 장악하라!" 그는 23일에도 재차 전문을 보내어 "전력으로 동북을 장악하라. 만약 동북 전체를 장악하지 못하고 대치상태가 되더라도 장래의 담판에 이로울 것이다."라고 강조하였다.
장제스도 이런 중공의 움직임을 모를 리 없었다. 장제스는 10월 18일, 전 중국원정군 부사령관이자 제5집단군 사령관 겸 윈난성 쿤밍 위수 사령관 두위밍을 동북보안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동북에서의 작전 총지휘를 맡겼다. "그대는 즉시 창춘으로 날아가 현지 소련군과 교섭하여 국군이 뤼순과 다롄, 잉커우, 후루다오(葫蘆島)에 상륙할 수 있게 하라." 두이밍은 동북에서 공산군의 세력이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적어도 10개군은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당장 10개군은 줄 수 없다. 우선은 제1군과 제52군을 지휘하라"라고 말했다. 또한 동북행영주임 슝스하이는 동북의 정치, 경제, 행정 시스템의 접수를, 국민당 조직부장 천리푸(陈立夫)는 동북에서 국민당부의 재건을 맡았다.
성장과 시장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 중에는 동북 출신으로 항전기간 동안 국민정부와 연계해 동북에서 지하 항일활동을 했던 이들도 많았지만, 마오쩌둥을 정점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중공과 달리 국민정부는 국민당, 삼민주의 청년단, 군통국(비밀경찰), CC단 등 수많은 기관들이 경쟁적으로 동북에 들어가면서 파벌 싸움을 벌였다. 따라서 업무가 중복되고 활동 방향도 분명하지 않은데다 협조도 결여되어 반목과 마찰이 심각했다.
게다가 슝스하이는 장제스의 신임 하나로 그 자리에 앉았을 뿐, 행정 경험도 부족한데다 동북을 어떻게 접수하고 현지민들의 협조를 얻어낼지에 대한 비전도, 계획도 없고 부하들을 제대로 통제할 역량조차 없는 무능한 자였다. 그야말로 혼란과 무질서의 극치였다.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 가오강 등 유능한 지도부에 의해 치밀한 준비를 했던 중공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동북의 민중들이 국민정부에게 등을 돌린 것은 중공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국민정부의 무능함 탓이었다. 즉, 장제스는 동북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았지만 막상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던 것이다.
평톈군벌로서 과거 "동북왕"이라 불리었고 여전히 동북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장쉐량을 연금에서 해제하고 대신 동북으로 보내어 민심을 위무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장제스는 단칼에 거절했다. 장쉐량을 동북으로 보내는 것은 호랑이를 들판에 풀어주는 것과 같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장쉐량을 여전히 불신했던 장제스는 그가 자신을 위해 일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고 동북을 자신의 독립된 왕국으로 만들거나 자칫 중공과 결탁할 가능성마저 있었다. 따라서 장제스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군사적 우위 뿐이었다.
* 소련의 간섭
10월 28일, 슝스하이와 두위밍 등은 창춘에 도착하여 남만주를 장악하고 있던 자바이칼 전선군 사령관 말리노프스키(Rodion Yakovlevich Malinovsky)원수를 만나 담판을 열었다. 두위밍은 중소우호조약에 따라 다롄항과 뤼순항은 중소 양국이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말리노프스키는 아직 일본과의 강화회담이 마무리되지 않은 이상 소련의 전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는 억지 궤변을 늘어놓으며 중국군의 상륙을 거절했다. 대신 랴오둥 반도 북단에 있는 잉커우에 대한 상륙은 허락하지만 안전은 보장하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잉커우에는 이미 소련군이 철수하고 그 자리를 공산군의 대부대가 차지한 채 국민정부군의 상륙에 대비하고 있었다. 소련의 기만이었다. 결국 두위밍은 다시 뱃머리를 돌려 산하이관 이남의 친황다오까지 내려가야 했다. 친황다오는 9월 말에 미 해병대 제3사단 1만8천여명이 상륙하여 항만과 병영 등 주요 시설을 장악하고 일본군을 무장해제시켰다. 그 주변으로 500여명 가량의 공산군 유격대가 활동하고 있었지만 두위밍은 이들을 공격해 쫓아냈다. 하지만 동북으로 향하는 병참선은 훨씬 길어졌고 이는 국공내전 내내 국민정부군을 괴롭히는 문제가 되었다.
소련군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공산군의 만주 접수를 교묘하게 지원하였다. 자신들의 철수 시기를 미리 중공측에 흘리고 소련군이 철수하면 그 뒤를 따라 공산군이 재빨리 진입하는 식이었다. 또한 관동군과 만주군으로부터 접수한 대량의 무기 중 대부분을 린뱌오의 동북인민자치군에게 넘기고 이들을 훈련시켰다. 자료마다 차이는 있지만, 소련이 넘긴 무기는 대략 소총 30만정, 기관총 5천정, 야포 1200여문, 전차 350여대, 항공기 1천여대, 차량 2300량, 군마 1만7천여 필에 달했다.
물론 국민정부군은 그 몇배에 달하는 무기를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획득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소련이 중공을 지원했기 때문에 국민정부군이 패배했다면 지나친 비약이지만, 그 때까지 2, 3명이 구식 소총 한정을 나누어야 했던 린뱌오의 군대는 비약적으로 강화되었다. 만약 소련이 이들 무기를 넘기지 않았다면 린뱌오는 아예 싸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트루먼의 개인 특사로 중국에 파견되어 1945년 10월부터 11월까지 약 한달 간 화북과 동북의 정세를 살폈던 웨드마이어는 "소련이 중소우호조약을 위반하고 중공군을 지원하고 있다"라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한편, 두위밍에게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일단 소련군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친황다오를 통해 산하이관을 넘어 동북으로 진격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41살로 린뱌오보다 겨우 3살 많은 두위밍은 황푸군관학교 1기생으로 4기 생인 린뱌오와는 선배이자 북벌전쟁 이래 풍부한 경험을 갖춘 역전의 장군이었다. 또한 대한 광복군 前 참모장이자 지식 청년군 부참모장이었던 김홍일 소장도 두위밍의 고급참모가 되어 동북으로 향했다.
반면, 린뱌오는 중일전쟁 초기 타이위안 전역에서 제115사단을 이끌고 일본군 수송부대를 격파하여 이른바 "핑싱관 대첩"으로 명성을 떨친 뒤, 아군의 오인 사격으로 중상을 입고 소련 모스크바에 가서 몇년 동안 요양해야 했다. 옌안으로 돌아온 뒤에도 더 이상 최일선에 나서지 않은 채 항일군정대학 교장을 맡는 등 후방에서만 근무했을 뿐이었다. 두위밍과 린뱌오는 군 경력이나 실전 경험, 대부대의 지휘 역량 등 누가 보더라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 산하이관 전투
산하이관은 공산군이 한발 빨랐다. 산하이관에는 산둥군구에서 북상한 제7사단과 제19여단, 제22여단 등 약 2만 7천여명에 달하는 공산군이 지키고 있었다. 또한 중공 중앙군사위원회(중앙군위)에서는 이들을 지휘하여 국민정부군의 동북 진입을 막기 위해 진차지변구 산하 지러랴오군구(冀热辽军区, 진차지변구 산하의 2급 변구로 허베이성 북부와 러허성, 랴오둥성 일대를 총괄) 사령관 리윈창(李运昌)을 급파하였다. 그는 1927년 9월 마오쩌둥과 함께 추수봉기에도 참여했던 골수 공산주의자이자 유격전의 경험이 풍부한 노련한 지휘관이었다.
산하이관에 배치된 공산군은 여기저기서 급히 병력을 끌어모은 오합지졸이었으나, 산하이관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한 채 두위밍의 전진을 가로막았다. 국민정부군은 2개군(제13군, 제94군) 5개 사단 5만명에, 그 외에도 9500여명의 일본군 투항병과 친일 괴뢰군 1만7천여명도 있었다. 총병력은 약 7만5천여명에 달했다.
산하이관 전투는 동북으로의 관문이었기에 국공이 동북을 놓고 벌이는 첫번째 전투였다. 따라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전문을 번갈아 보내며 모든 수단을 다하여 적을 격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0월 25일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국민정부군은 병력과 화력에서 월등히 우세했지만 공산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약 22일에 걸친 일진일퇴의 치열한 격전을 벌이며 제52군을 추가 증원한 끝에 11월 16일 결국 산하이관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서 동북으로 향하는 길은 열렸다. 다음 목표는 진저우(锦州)였다.

▲ 산하이관을 점령하고 행진 중인 국민정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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