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4월 1일부터 베이핑에서 열린 남북의 평화담판 회의는 결국 결렬되었다. 장제스를 대신해 총통을 맡고 있던 리쭝런은 사실상 무조건 투항을 요구하는 마오쩌둥의 최후 통첩을 거절했다. 그리고 수도를 난징에서 광저우로 옮겼다. 이로서 국공 내전은 최후 국면으로 돌입하였다.
4월 20일 저녁 7시 30분. 마오쩌둥과 주더는 중앙군사위원회 명의로 전군에 <전국에 내리는 진격명령>을 하달했다. "그대들은 이 전보를 받는 즉시, 창장(양쯔강)을 도하하여 모든 국민당 반동파를 단호하게 섬멸하여 전국 인민을 해방시키고, 중국 영토 주권의 독립과 보전을 지켜라!" 우익군인 제2야전군 제3, 4, 5병단 9개군 35만명이 안후이성 서남쪽에서 도강하고, 중앙군인 제3야전군 제7병단과 제9병단 7개군 30만명이 안후이성 동남쪽에서 도강할 것을 명령하였다.
공세의 주력은 좌익군인 제3야전군 제8병단과 제10병단 8개군 35만명이었다. 이들은 장인(江陰)에서 푸커우(浦口)에 이르는 선에서 창장을 도하하여 상하이와 난징을 일거에 제압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제4야전군 2개군(제40군, 제43군) 등 20만명은 우한을 압박하면서 제2야전군을 측면에서 지원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날 자정, 덩샤오핑과 천이의 총지휘 아래 약 백만명에 달하는 대병력이 창장 전역에 걸쳐 일제히 도하했다.
장제스와 리쭝런 역시 공산군의 도강에 대비해 지난 3개월 동안 필사적으로 진지를 구축하고 약 70만명에 달하는 병력과 대소 군함 170여척, 항공기 230대를 배치하였다. 방어 진지의 규모는 전례가 없을 정도였다. 창장을 따라 철근 콘크리트로 된 1만개에 달하는 보루가 늘어서 있었고 각 보루는 지하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또한 진지 앞에는 전기 철조망과 지뢰가 설치되었다. 리쭝런은 그동안 국민정부군이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전투에 참전하지 않은 자신의 계계(광시파)의 군대는 상처를 입지 않은 채 남아 있기에 화남에서의 싸움은 아직 승산은 있다고 여겼다. 장제스 역시 각국 외교관과 기자들 앞에서 "공비들은 결코 창장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장시성 후커우(湖口县)를 경계로 광시성 출신의 명장 보충시가 우한에 사령부를 두고 15개군 40개 사단 25만명으로 창장 서쪽을 맡았다. 항일전에서 명성을 떨쳤던 백전노장 탕언보가 경호항(京滬杭, 난징-상하이-항저우의 통칭) 경비 사령관에 임명되어 상하이에 사령부를 두고 25개군 75개 사단 45만명으로 창장 동쪽을 맡았다. 또한 장제스의 오른팔인 천청이 타이완과 주산열도, 푸저우 등 동남연해의 방어를 맡았다. 그 외에도 산시성에는 "서북왕" 후쭝난이 지휘하는 61개 사단 40만명이 펑더화이의 제1야전군 40만명과 대치하고 있었다.
방어의 핵심은 상하이였다. 중국에서 가장 발달된 국제 도시 상하이는 중국 경제의 중심이었으며 난징 정부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또한 난징정부가 보유한 황금과 백은의 대부분이 상하이의 금고에 보관되어 있었다.상하이가 함락되면 난징 정부도 끝장이었다. 광시파 군벌로 리쭝런과 가까운 보충시 대신, 장제스가 가장 신임하는 탕언보에게 상하이 방어를 맡기고 직계 부대의 대부분을 배치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과연 적벽대전과 비수대전이 또 한번 재현될 것인가?!" 전 세계의 이목이 창장으로 집중되었다. 만약 공산군을 창장에서 저지할 수만 있다면 리쭝런이 원하는대로 20세기판 남북조 시대가 열릴 참이었다.
공산군의 사전 포격이 시작되었다. 창장 북안에서 날아오는 포탄이 국민정부군 진영에 비처럼 쏟아졌다. 창장 남안은 거대한 검은 연기로 뒤덮였다. 공격군 제1진 30만명은 주로 급조된 바지선과 뗏목으로 구성된 1만척이 넘는 대선단을 타고 약 600km에 걸쳐 개미떼처럼 창장의 강상을 메웠다. 이들 앞에서 국민정부군의 해공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군함들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수비대 역시 대부분 저항하는 시늉만 내다가 공산군이 도강하자말자 와해되어 태반이 도주하거나 투항하였다. 그동안 구축한 거대한 방어진지도 한낱 무용지물이었다. 일부 수비대는 포문을 아군의 포함에게 돌려 포격했다.

▲ 국민정부군의 포격을 뚫고 창장을 건너는 바지선들. 해군은 커녕, 변변한 군함도 상륙정도 없었던 공산군은 화이허 전역 승리 직후인 1949년 연초부터 도강 작전에 대비해 창장 북안에서 나무를 베어 목선들을 만들었다. 이 고색창연한 선박들이 방어력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국민정부군이 우세한 해공군으로 반격에 나섰다면 공산군의 도강을 막을 수도 있었으나 이미 전의를 상실한 국민정부의 해군과 공군은 제대로 싸우지 않고 물러났다.
상하이 서쪽의 장인 요새에서만 격렬한 저항이 있었다. 전투는 22일 하루종일 이어졌다. 하지만 그날 밤 요새 수비대장인 다이룽광(戴戎光) 소장이 1천명의 부하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황푸군관학교 6기생으로, 젊은 나이에 출세 가도를 달리며 지식청년군의 고급참모를 지내는 등 장제스의 총애를 받던 자였다. 1948년 6월 장제스는 그를 믿을만한 인물이라고 보고 창장 방어의 핵심인 장인 요새의 수비대장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장제스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는 중공측에 포섭된 수많은 국민정부군 고위 지휘관들 중의 하나였다. 이로 인해 수비대 전체가 혼란에 빠지면서 장인요새는 함락되었다.
창장을 항해하던 영국 군함도 공격을 받았다. 난징의 영국 대사관 직원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급파된 슬루프함(sloop, 2차대전 중 상선 호위를 위해 건조된 1천톤급의 호위함) 애미시스트(Amethyst)가 장인항 근처에서 공산군의 포격을 받아 대파되었다. 함장을 비롯해 10명이 죽고 23명이 부상을 입은 채 공산군에게 나포되었다. 중순양함 런던과 슬루프함 블랙스완이 구조하러 왔다가 마찬가지로 공격을 받고 후퇴해야 했다. 영국 동양함대 부사령관도 부상을 입었고 3명이 죽고 14명이 부상을 입었다.

▲ 슬루프함 애미시스트호. 1350톤급의 호위함으로 2차대전 당시 독일 유보트의 공격으로부터 상선단을 호위하기 위해 대량건조된 군함 중의 하나였다. "애미시스트호 사건"으로 100일 가까이 억류당하다 7월 30일 풀려나 홍콩으로 갔다.
중공은 이들이 국민정부군 해군과 함께 도강중인 공산군을 포격하여 250여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부득이한 자위로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중공의 속셈은 중일전쟁 당시 난징 전투에서 일본이 미국을 시험하기 위해 파나이 호 사건을 일으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고 과연 서방이 중국의 내전에 개입할지를 시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전수상이자 보수파의 거두인 처칠은 당장 항공모함을 파견해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애틀리는 거절했다. 그들의 예상대로 미국과 영국, 프랑스는 내전에 개입하는 대신 중국에 배치된 모든 군함과 병력, 자국 국민의 철수를 결정했다. 애미시스트호와 승무원들은 3개월이 지난 7월 30일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12년 전, 중일전쟁 초반 "아시아의 마지노선"이라 불리며 일본군이 20만 대군과 항공모함, 수백대의 탱크와 전투기로 3개월을 공격한 끝에 겨우 점령했던 창장 방어선. 하지만 공산군이 도강을 시작한지 겨우 이틀만인 4월 23일 완전히 무너졌다. 난징의 미국 대사관은 본국에 "국민정부군의 혼란과 분열로 인해 공산군의 도하작전은 어처구니 없을 만큼 쉽게 성공했다"라고 보고했다.
리쭝런은 창장의 수비대에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미 패배주의에 빠진 국민정부군은 심리에서 지고 있었다. 적의 총공격을 눈앞에 두고 지휘부는 힘을 모으기는 커녕, 장제스파와 리쭝런파로 분열되면서 작전은 엉망진창이었다. 장제스가 창장 방어 구역을 둘로 나눈 것부터 실수였다. 사이가 아주 나빴던 보충시와 탕언보는 협력은 커녕 병력을 어떻게 배치했는지조차 몰랐고 덕분에 제2야전군은 양 부대의 경계선을 유유히 돌파할 수 있었다. 그동안의 연전연패로 많은 정예부대를 상실하면서 패잔병과 신병으로 재편성된 군대는 싸울 의지라곤 없는데다 무기도 부족했다. 국민정부 역시 장제스파와 리쭝런파, 그리고 행정원장(우리의 국무총리에 해당)인 쑨쿼(쑨원의 장남)의 광둥파로 분열되어 서로를 비난하고 탄핵했다.
이전부터 국민정부와 중공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反 장제스 파 정치가들은 국민 정부는 이미 끝났다며 현지 지휘관들을 설득하여 공산군에게 싸우지 않고 투항하도록 하였다. 관료들과 장교들은 가족과 재산을 챙겨서 남쪽이나 해외로 도망쳤다. 폭도로 변한 군중과 탈영한 군인들이 도처에서 약탈을 저질렀다. 난징의 총통부도, 리쭝런의 관저도 약탈당했다. 난징 시민들은 곧 들어올 공산군을 환영할 준비를 하였다.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보여준 투지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총체적인 붕괴였다.
22일 저녁, 난징의 총통부를 지키고 있던 리쭝런에게 탕언보의 전화가 왔다. "곧 공비들이 난징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지금 난징을 떠나셔야 합니다." 밤새 뜬눈으로 지낸 리쭝런은 다음날 새벽 난징 비행장으로 향했다. 그의 전용기가 날아올라 상공을 한바퀴 돌았다. 난징 교외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지만 그 속으로 포화가 수없이 작열하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리쭝런은 비서에게 말했다. "구이린으로 가자!" 구이린은 리쭝런의 정치 기반이었다. 그곳에서 광서파 장군들을 불러모아 작전을 논의한 다음 임시 수도 광저우로 갈 생각이었다.
4월 24일 새벽, 장샤오산이 지휘하는 제3야전군 제8병단 제104사단의 선두 부대가 난징에 입성하였다. 총통부에 걸려 있던 청천백일기가 끌어내려지고 홍기가 매달렸다. 시가전은 없었다. 난징에는 제6병단 산하 3개군(제28군, 제45군, 제99군)이 있었지만 리쭝런은 난징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이들을 철수시켰다. 베이핑에 있던 마오쩌둥은 난징 함락의 보고를 듣자 흥분에 휩싸였다. 그는 유방과 항우의 고사에 비유한 축하 전문을 덩샤오핑에게 보냈다.
반면, 같은 시간 저장성 펑화현의 고향집에 있던 장제스는 아들 장징궈에게 절망을 토로하면서 가족들을 타이완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좋은 강산에 송곳 하나 꽂을 곳이 없구나." 또한 중앙은행에 비축된 2억 달러 상당의 금은과 외화 역시 타이완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군비가 절실했던 리쭝런이 뒤늦게 알고 격렬히 반대했지만 이미 평정심을 잃어버린 장제스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 난징의 총통부를 점령한 공산군. 27일 천이는 총통 집무실에서 장제스가 쓰던 가죽 의자에 앉아 마오쩌둥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저는 지금 장 총통의 의자에 앉아서 주석님께 보고드립니다."
27일에는 쑤저우가, 5월 3일 항저우가 함락당했다. 국민정부군 5개 군이 포위당하여 8만명이 항복했다. 이로서 상하이도 포위되었다. 탕언보가 지휘하는 8개 군 20만명과 해군 제1함대가 상하이를 방어하고 있었다. 상하이 주변은 1930년대에 독일 군사고문단에 의해 건설되었고 수개월 전부터 복구를 시작한 강력한 방어시설들이 있었다. 두텁게 깔린 지뢰 지대 뒤로는 전기 철조망과 콘크리트로 된 3천개가 넘는 토치카와 보루(堡壘)가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누가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인가. 탕언보는 "상하이는 제2의 스탈린그라드가 될 것"이라고 승리를 장담했지만 막상 뒤로는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내는 곧 공산군이 들이닥칠 거라며 유언비어가 범람했다. 상하이는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다.
5월 12일 제3야전군 제9병단과 제10병단 8개군 40만명이 상하이 외곽에서부터 공격을 시작했다. 제9병단이 남쪽에서, 제10병단이 북쪽에서 집게형으로 상하이를 압박하면서 포위망을 점차 좁혀 나갔다. 5월 24일 상하이의 옛 프랑스 조계에 공산군의 선두부대가 진입하였다. 27일 상하이는 함락되었다. 국민정부군은 1만5천명이 전사하고 4만5천명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10만명이 항복하였다. 겨우 5만명만이 배를 타고 주산열도와 타이완, 푸젠성으로 탈출하였다. 탕언보 역시 푸젠성 샤먼으로 도망쳤다. 공산군의 손실은 전사 8천명에 부상 2만5천명 정도였다.
또한 제2야전군 3개 병단이 후커우를 방어하고 있던 탕언보의 제8병단을 격파하고 장시성을 침공했다. 공산군이 저간철도(浙贛鐵道, 저장성과 후난성을 동서로 연결하는 941km 길이의 철도)를 장악하자 보충시와 탕언보는 양쪽으로 분단되었다. 국민정부군으로서는 중앙돌파당한 셈이었다. 탕언보가 급히 보낸 증원군은 도중에서 격파당했다. 5월 21일에는 제4병단이 장시성의 성도 난창을 공격하여 다음날 점령하였다. 국민정부군은 와해되어 소수의 잔존부대만이 남쪽으로 퇴각했다.
보충시의 주력부대가 있는 우한의 공략을 맡은 것은 린뱌오의 제4야전군이었다. 초한지의 한신에 비견되는 공산군 제일의 맹장 린뱌오가 지휘하는 제4야전군은 만주와 화북에서 승리하여 그동안 팽팽하던 내전의 승부를 일거에 공산군 쪽으로 기울게 하였다. 병력은 약 70만명에 달하는데다 소련이 건네준 막대한 일본제 무기로 무장한 덕분에 무장 또한 충실하여 공산군 최강의 전력이었다. 그 중에는 약 6만명에 달하는 조선인 의용군들도 있었다.
린뱌오의 제4야전군은 징한철도(京漢鐵道, 베이징과 한커우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1220km 길이의 철도)를 따라 우한을 향해 남하하였다. 선두부대인 제12병단이 창장 상류의 북안지역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노련한 린뱌오는 성급하게 도강에 나서지 않고 기회를 기다렸다. 제2야전군이 난창을 점령하여 보충시의 측면을 위협하면 그때 단숨에 도하하여 보충시를 포위 섬멸할 생각이었다. 보충시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기 탕언보처럼 가만히 앉아서 양면 포위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결전을 뒤로 미룬 채 퇴로가 차단되기 전에 잽싸게 우한을 버리고 창사로 물러났다. 5월 15일 우한은 린뱌오의 손에 넘어갔다.
보충시가 싸우지 않고 퇴각하자 린뱌오는 추격에 나섰다. 보충시는 창사에서 방어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후난성장 청치엔(程潜), 창사를 지키고 있는 제1병단 사령관 천밍런(陳明人), 후난인민위원회 주임 탕성즈 등이 중공에 포섭되어 반란을 꾀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들은 모두 장제스의 오랜 측근이며 중일전쟁에서 활약했던 항일 명장들이었다. 보충시는 이들에 체포명령을 내렸지만 그 전에 반란이 일어나자 헝양으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8월 4일 탕성즈와 청치엔 등 후난성 지도부와 주요 인사 100여명이 국민정부로부터의 이탈과 중공에의 "기의(起義, 의로서 일어선다는 뜻)"를 선언하였다. 이로서 후난성은 무혈함락되었다.
서북에서도 펑더화이의 제1야전군이 후쭝난을 격파하고 서쪽으로 맹렬하게 진격하여 5월 20일 시안을 점령하였다. 8월 26일에는 란저우가 함락되었고 9월 25일 신강성의 성도 우루무치에 무혈 입성하였다. 후쭝난의 잔존부대는 쓰촨성으로 퇴각했다.
그동안 약 70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현금과 무기, 물자를 지원하며 장제스의 전쟁을 뒷받침해온 미국은 리쭝런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무기와 자금 원조를 거절하고 중국 내전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로 결정하였다. 상하이 함락 이틀 전인 5월 25일, 산둥성 남쪽 칭다오에 주둔한 채 공산군과 대치하고 있던 미 해병대와 제7함대는 칭다오에서 철수했다. 마오쩌둥은 이미 1948년 9월에 산둥성을 장악했으나 칭다오만은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성급한 공격을 한다면 미국에게 개입의 명분을 제공한다. 마오쩌둥은 미국이 이미 장제스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서두를 이유 따위는 없었다.
8월 5일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이른바 "중국백서(CHINA WHITE PAPER, 정식명칭은 United States Relations with China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Period 1944~1949)"를 발표했다. 1000페이지에 달하는 이 내용은 장제스와 국민당 정권의 타락, 부패, 무능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내전에서 패배한 가장 큰 책임은 장제스에게 있다면서 국민당 정권과의 모든 관계를 끊겠다는 뜻이었다. 또한 맥아더는 기자들 앞에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은 얄류산 열도와 일본,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며 타이완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반년 뒤 애치슨은 <아시아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이 사실을 다시 확인하였다.
장제스로서는 그야말로 결정타였다. 미국마저 등을 돌린 이상 전세를 뒤엎을 방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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