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8월 6일 장제스가 남한에 왔다. 이승만의 초청을 받아 비공식적으로 방문한 것이다. 극동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급격하게 확대되자 필리핀 퀴리노(Elpidio Quirino) 대통령은 이른바 "태평양 동맹(Pacific Pact)"을 제창하였다. 중국과 필리핀을 중심으로 태국, 인도네시아, 인도, 호주, 뉴질랜드 등 태평양 국가들이 뭉쳐서 나토(NATO)를 모방한 반공 집단안보체제를 결성하고 정치 경제 군사 협력을 강화하자는 것이었다. 장제스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여기에 가장 쌍수를 들고 환영한 나라가 남한이었다.
이승만 입장에서 장제스의 몰락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38선에서는 연일 격렬한 충돌이 반복되고 있었고 1949년 5월에는 개성과 옹진에서 쌍방이 연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해 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게다가 국공내전에 중공과 결탁하여 직간접적으로 깊숙히 개입하였던 북한은 마오쩌둥과 협상하여 중공군 내 조선인 부대를 넘겨받기로 했다.
만주 선양에 주둔하고 있던 방호산의 제166사단이 1949년 7월에, 창춘에 주둔한 김창덕의 제164사단이 8월에 차례로 입북하였다. 1950년 5월까지 입북한 병력은 3만7천명이 넘었다. 이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한 남한군과 달리 잘 훈련되고 풍부한 실전경험을 정예부대였다. 소련 역시 1949년 6월부터 야크 전투기 30대, T-34/85 중전차 87대를 비롯해 막대한 무기를 원조하고 대규모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였다. 이로 인해 일시적으로 남한이 차지하고 있던 군사적 우위는 순식간에 북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동안 "마음만 먹으면 3일이면 북한 공비들을 때려잡고 무력 통일을 할 수 있다"라고 호언장담하던 이승만과 남한군 수뇌부는 당장 김일성의 남침을 우려해야 할 판이었다. 대륙에서 장제스가 완전히 밀려난다면 다음 차례는 남한이었다.
필리핀 역시 상황이 심각했다. 태평양전쟁 중 일본을 상대로 무장 투쟁을 전개했던 공산주의 게릴라들은 전쟁이 끝나자 퀴리노 정권을 위협하면서 중부 루손섬에서 반미, 반정부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다. 인도차이나에서는 호치민의 베트민이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 전쟁을 시작하였다.
장제스는 우선 필리핀의 퀴리노 대통령을 방문한 다음, 다음으로 남한을 찾았다. 애치슨 국무장관이 장제스의 남한 방문을 비난하면서 "만약 남한이 중국 국민당과 손을 잡는다면 미 의회는 한국원조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장제스의 남한행을 막지는 못했다.
장제스 쑹메이링 부부는 진해의 덕산 비행장에 내렸다. 총통직을 리쭝런에게 넘겼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국민당 총재였고 중화민국의 실세였다. 그는 해방 이래 남한을 방문한 최고의 외국 귀빈으로서 이승만과 정부 각료들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장제스가 향한 곳은 과거 일본이 건설한 진해 요항부(要港部, 일본 해군 편제에서 군함의 정박과 수리, 보급 등의 시설을 갖춘 지상 거점. 함대가 상시 배치된 진수부의 아래) 사령부였다. 해방 이후에는 우리 해군이 사용하고 있었다. 철통같은 보안 아래 영빈관에서 한중 회담이 열렸다. 이틀 뒤인 8일 오전 10시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전용기에 다시 올라 중국으로 되돌아갔다.

▲ 이승만-장제스의 진해회담을 알리는 동아일보 1949년 8월 9일자 1면 기사
회담은 철저하게 비밀로 진행되었고 어떠한 공식적인 외교 문서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장제스와 이승만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순히 양국의 우호와 반공 협력을 강화하자는 뻔한 얘기나 오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방 이전만 해도 이승만은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고, 장제스는 그의 정적인 김구를 적극적으로 후원했으니 서로에 대해 특별히 호감이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생면부지의 두 사람은 만나자말자 마음이 통했다. 주변의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공산주의는 불구대천의 원수였고, 둘 다 매우 호전적인데다 자신들만큼이나 호전적인 적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또한 오직 자신만이 민족의 지도자에 걸맞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미국에게 버림받은 신세였다.
▲ 진해회담에서의 이승만과 장제스
물론 장제스의 진짜 속셈은 남한이나 필리핀과 손을 잡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지키기도 급급한 태평양의 약소국들이 아무리 힘을 모은들,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마오쩌둥의 공산군을 막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오직 칼자루를 쥔 쪽은 미국이었다.
동유럽에서는 전해에 소련이 베를린을 봉쇄하고 서방의 철수를 요구하면서 제3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가기도 했고, 한반도와 그리스, 인도차이나, 이란, 터키 등 여기저기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준동하였다. 전 세계는 이미 미국과 소련 양진영으로 갈라져 서로 철의 장막을 치며 상대를 봉쇄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장제스는 미국을 향해 "극동의 친구를 버리지 말라"고 외치면서, 이른바 "차이나 로비"라 불리는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윌리엄 노우랜드(William Knowland)와 같은 미 의회 내 친중파 의원들의 지지를 받아 미국이 발을 빼지 못하도록 만들 셈이었다. 퀴리노와 이승만이 제창한 "태평양 연맹"은 미국을 움직일 수 있는 좋은 명분이었다. 자력으로는 더 이상 마오쩌둥을 막을 수 없는 그의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하지만 장제스의 계산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미국은 오히려 퀴리노를 설득하여 장제스와 손을 끊도록 했고, 미국의 경제 원조가 우선이었던 대다수 아시아 국가들은 집단안보체제의 결성 따위에는 무관심했다. 또한 중공에 우호적이었던 인도의 네루 수상은 "아시아는 아직 나토와 같은 조직을 만들기에는 시기상조이다"라며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장제스 정권과 남한을 다른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고립시키려고 하였다. 북한의 위협에 직접 직면하고 있던 남한만이 반공 연맹의 창설을 끝까지 고집했다. 결국 1950년 5월 26일 필리핀 바기오(Baguio)에서 열린 태평양 연맹 예비 회담에서 7개 나라가 참가했지만 타이완과 남한은 초청받지 못한데다, 회담에서는 경제 문화 협력만 논의했을 뿐 군사 문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퀴리노가 미국의 압력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장제스 정권에 대해 극도의 불신감과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현재의 위기는 전적으로 장제스 정권이 초래한 결과였다. 국공협정이 체결되었음에도 결국 공산군을 선제 공격한데다 마셜 원수가 직접 나서서 여러 차례 중재했지만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화북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병참은 고려하지도 않고 무리한 만주 원정을 강행한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그동안 미군에 의해 훈련된 최정예 사단들은 모조리 괴멸되었고, 게으르고 이기적인 지휘관들은 미 군사고문단의 조언을 한귀로 흘려 공산군의 승리를 도왔다. 미국이 제공한 막대한 물자와 무기의 80%를 상실한데다 적어도 그 중의 3/4은 고스란히 공산군의 손에 들어갔다는 보고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 많은 원조는 밑빠진 독의 물붓기였다.
장제스 정권은 창장 방어선이 무너짐으로서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공산군은 연전연승으로 사기도 충천했고 병력은 400만명에다 대부분 전투병력이었다. 게다가 국민정부군에게 노획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반면, 국민정부군은 고작 100만명도 채 남지 않은데다 절반은 비 전투부대거나 갓 징집된 신병들이었다. 패배주의에 빠진 지휘관들은 싸울 의지가 전혀 없었다. 병사들은 완전히 사기가 땅에 떨어져 도처에서 반란과 탈영이 빈번했다. 1949년 2월 25일에는 상하이에 정박해 있던 제2함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중국 해군 최강의 주력함 충칭호에서 함장 덩쟈오샹(鄧兆祥)과 승무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군함을 장악하고 공산군에게 넘어가려다 결국 격침당했다. 이처럼 싸우러 나갔던 군함과 비행기가 도주하여 공산군 쪽에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하자 수뇌부에서는 해공군을 출동하는 것조차 겁을 낼 정도였다.

▲ 1948년 5월 영국으로부터 공여받은 경순양함 충칭호(원래 함명은 HMS Aurora). 1937년 11월에 취역했으며 2차 대전 중에는 주로 지중해에서 활동하였다. 만재배수량 6,500톤에 최대 속력 32노트, 152mm 이연장 주포 3문, 102mm 부포 4문 등을 무장하였다. 1949년 2월 25일 선상 반란을 일으켜 북상하다가 칭다오 비행장에서 출격한 국민정부군의 B-24 폭격기 7대의 공습을 받아 3월 20일 후루다오(葫蘆島) 인근에서 침몰하여 6명이 죽고 22명이 부상을 입었다.
바아 준장(David G. Barr)을 비롯해, 중국에 체류하고 있던 군사고문단은 본국의 국무성에 "지금의 국민정부군은 대일전쟁때와 같은 의지를 찾아 볼 수 없다. 장제스는 국민의 지지를 거의 상실했다. 미국이 총력을 투입하지 않는 한 상황을 뒤집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 그가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단지 전쟁의 종식을 지연시킬 뿐 결국 무너질 것이다."라고 보고하면서 군사고문단의 전면 철수를 건의하였다.
그렇다면 미국이 직접 개입해야 하는가. 트루먼 행정부는 고심하였다. 이미 미국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전쟁을 지원하고 그리스 내전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대륙은 인도차이나와 그리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하다. 얼마나 많은 물자와 병력이 소요될 것인가. 또한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1400만명에 달했던 미군은 총동원령이 해제되면서 1/10로 줄어들었다. 중국을 위해 다시 미국의 젊은이들을 징집하여 피를 흘릴 이유가 있는가. 지상군의 투입 이외에도, 장제스가 원하는대로 핵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1949년에 미국은 약 200여발의 핵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각각의 위력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사용된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걸 전부 쓴다고 해도 마오쩌둥의 공산군을 저지한다는 보장이 없을 뿐더러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다. 소련과의 마찰은 물론이고, 영국을 비롯한 동맹국과 아시아 국가들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할 것이었다.
근본적으로 미국으로서는 장제스 정권이 붕괴되는 것을 반드시 막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는 트루먼 행정부의 눈에 비친 아시아 국가들은 대등한 동맹국이 아니라 미개하고 열등한 세계였다. 만약 그들이 미국의 도움을 받기 원한다면 마땅히 고분고분해야 했다. 독자노선을 고집하면서 미국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정권은 한낱 걸리적거리는 존재일 뿐이었다. 실제로 한국전쟁 중 이승만이 휴전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반공포로 석방을 강행하자 에버레디 플랜(Ever Ready Plan)을 수립하여 이승만 제거를 계획하기도 했고, 베트남전쟁 중에는 응오딘지엠이 미국과 마찰을 빚자 군부 쿠테타를 사주하여 그를 제거하였다.
장제스는 철저한 중화주의자에다 외부의 어떤 간섭도 불쾌하게 여겼으며 미국에게 예속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게다가 매우 호전적이면서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누렸던 전통적인 지위를 회복하기를 원했다. 이런 인물이 과연 미국에 순응할 것인가. 일본과의 전쟁에서 큰 희생을 치룬 끝에 태평양을 장악한 미국으로서는 일본을 대신해 아시아의 새로운 맹주에 중국을 앉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또한 일본이나 남한, 베트남과 달리, 중국은 미국이 지배하기에는 너무 크고 너무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였다. 또한 유럽을 중시하는 미국의 전략에서 중국의 가치는 매우 낮았다. 미국의 동맹국들 중에서 중국의 중요성은 고작 13번째, 군사 원조의 우선순위에서는 17번째에 불과했다. 미국인들의 시각에서 이 가난하고 낙후된 나라가 가까운 장래에 고도로 발전하거나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강대국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이 바라는 중국의 역할이란 소련에 대한 완충국가이면 충분하였다. 따라서 적대적이지만 않으면 누가 지배하건 무슨 상관이 있을 것이며, 중국의 통치자가 장제스가 아닌 마오쩌둥이라고 해서 반드시 미국에게 해가 될 것인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중 옌안을 오가면서 중공의 지도자들과 친분을 쌓았던 미 국무부 관료들은 그들에 대해 호의감을 가지고 있었고 오히려 호락호락하지 않은데다 고집불통인 장제스에 비해 마오쩌둥 쪽이 좀 더 말이 통한다고 여겼다. 그동안 미국이 국공 양쪽에 양다리를 걸치며 장제스에게 중공을 포용하는 연합정권을 수립하라고 거듭 강요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장제스측의 패색이 짙어지는 1948년 10월 13일, 국무부는 NSC-34(대중국정책)에서 "중공을 적대시하기보다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라고 보고하였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는 반소 독자노선을 고수하여 코민포름에서 제명당했다. 이는 공산주의 진영의 결속력이 상당히 취약하다는 증거였다. 중공 역시 유고와 마찬가지로 소련에 종속된 괴뢰가 아니라 독자성을 가지고 강력한 군사력과 광대한 영토를 가진 세력이었다. 국공내전의 승리는 소련의 도움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들의 역량이었다. 따라서 중공도 얼마든지 "아시아의 유고"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애치슨은 중국의 공산화를 받아들이되, 중공과 소련 사이에 "쐐기"를 박는다는 전략(Wedge strategic)을 수립하였다. 장제스 정권에 대한 원조를 삭감하는 한편, 스튜어트(John Stuart) 주중대사에게 중공과 물꼬를 트일 방법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난징의 미국 대사관은 난징이 공산군의 손에 넘어간 뒤에도 그대로 남아서 업무를 보는 한편 중공에 지속적으로 접촉을 시도하다 트루먼 행정부가 중국 철수를 결정한 8월 6일에야 폐쇄되었다. 이는 난징 대사관을 즉각 폐쇄하고 국민정부를 따라 충칭으로 옮겨간 소련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트루먼의 대중유화정책은 소련과 중공의 관계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미국이 3억 달러 상당의 경제적 원조를 제안하자 "중국 인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장제스 정권에게 그러했듯, 원조를 미끼로 우리를 예속시키려는 것"이라고 단칼에 거절하였다. 그는 장제스만큼이나 철저한 중화주의자인데다, 장제스 이상으로 서구에 대한 적개심과 불신감을 품고 있었다. 또한 국공내전에서 미국이 양다리를 걸친 채 장제스 정권을 원조하고 자신들을 여러번 물 먹였던 일에 대해서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미국이야 "원래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는 것이 국제관계"라고 해도 당사자로서는 하루 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그동안의 원한 관계를 잊을 수는 없다. 애초에 마오쩌둥은 냉철한 현실주의자라기보다 격정적인 감성주의자였다. 그는 루즈벨트나 스탈린보다는 피엘 카스트로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류샤오치를 비롯한 중공 지도부 역시 대부분 젊은 시절 소련에서 유학했고 소련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스탈린이 중공을 수없이 냉대했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오늘의 소련이 내일의 중국이다"라고 말했고, 소련 근처도 가보지 못했고 마르크스 이론을 어깨 너머로 배웠을 뿐인 마오쩌둥조차 소련을 공산주의 종주국이자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우방으로 여겼다.
게다가 매파와 비둘기파로 나누어진 미국의 태도는 여전히 애매했다. 군부를 대표하는 합참의장 브래들리는 장제스 정권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반면, 비둘기파인 애치슨 국무장관은 장제스와 손을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일전쟁 당시 주중대사였고 개인적으로 장제스와 매우 가까웠던 패트릭 헐리 장군과 육군참모총장 로튼 콜린스(Lawton Collins)를 비롯한 행정부와 미 의회의 공화당 의원들 역시 중국에 미군을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트루먼은 국무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장제스가 진해를 방문하기 전날인, 8월 5일 《중국백서》를 발표하여 중국이 공산화된 이유가 전적으로 장제스 정권에게 있다며 실패의 모든 책임을 돌리고 모든 원조의 중단을 선언했지만 그렇다고 마오쩌둥의 신정권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지도 않았다.
트루먼이 어정쩡한 태도를 고수하는 이상, 중공에 대한 유화정책을 성공할 가능성은 있을 리 없었다. 중국백서가 발표된 직후인 1949년 8월 14일, 마오쩌둥은 중공 선전방송인 신화사(新華社)를 통해 그동안 미국이 장제스 진영에 무기를 공급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으며 미국을 상대로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말하였다. 즉, 그는 미국이 던지는 추파를 뿌리쳤으며 오히려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냈다. 중국에 체류하고 있던 스튜어트나 바아 장군 역시 "이들은 철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이기에 이들과 연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마오쩌둥과 중공의 실체에 전혀 알지 못했던 트루먼 행정부는 여전히 막연한 기대감을 버리지 않았다.
1950년 1월 5일 트루먼은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은 타이완에 대한 어떤 권리나 군사기지를 세울 의사가 없으며 중국의 내전에 무력으로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장제스 정권에 대한 어떤 원조나 협력도 일체 중단한다고 선언하였다. 12일에는 애치슨이 <아시아의 위기>를 연설하면서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남한과 타이완을 제외시켰다. 하지만 이 두 나라는 결코 같은 선에 놓여있지 않았다. 애치슨은 동시에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책임은 더욱 직접적이다"라고 강조하면서 미국이 남한의 방위를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님을 명확히 하였다. 미국의 방위선에서 쫓겨난 것은 타이완 뿐이었다. 중공이 타이완 해협을 넘어 타이완을 침공한다고 해도 미국은 방관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로서 미국과 장제스의 밀월 관계는 끝장난 것이었다.

▲ 이른바 애치슨 라인. 이는 중공에 대한 유화 제스쳐이자 소련에게는 미국의 세력권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사실 애치슨의 연설은 기존의 정책을 재차 확인하는 것에 불과했으나 그 직후에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했기에 한국전쟁을 간접적으로 유발했다는 식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미국의 바램과는 달리 마오쩌둥이 선택한 것은 소련이었다. 1950년 2월 마오쩌둥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중소동맹과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했다. 또한 북한과도 조중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면서 중공과 소련, 북한 삼국의 결속은 더욱 강화되었다. 김일성이 중공군 출신 부대를 선봉에 세워 전면남침을 하자 트루먼은 즉각 타이완 해협에 제7함대의 급파를 지시했다.
그럼에도 미국의 대중정책은 끝까지 이중적이었다. 트루먼은 타이완 해협에 제7함대를 배치하면서도 "장제스에게는 동전 한닢도 주지 않겠다"라며 장제스 정권에 대한 어떤 지원도 없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는 한편, 중공에 대해서도 "중공이 진먼다오나 타이완을 공격해도 미국은 이에 간섭할 생각이 없다"라고 전달했다. 그렇다면 중국의 턱밑에 함대를 보낸 목적이 뭐란 말인가. 또한 트루먼의 공언과 달리 막상 미국의 무기와 물자를 실은 선박들은 미국 정부의 묵인 아래 여전히 타이완을 오가고 있었다. 중공 지도부로서는 미국의 속셈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오히려 불신감만 더욱 증폭시켰다. 이런 어정쩡한 유화정책이 중국에서 실패하고 대륙을 상실한 가장 큰 이유였다. 그 대가는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의 역습을 받음으로서 치루게 되었다. 그제서야 꿈에서 깨어난 미국은 타이완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장제스 정권에 대한 원조를 재개하는 한편, 1954년 12월 2일 미중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의 방위선에 타이완을 포함시켰다. 이로서 중공과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다.
1949년 4월 21일 창장을 도하한지 5개월이 지난, 9월 말. 중국 전토의 대부분이 공산군의 손에 들어갔다. 여전히 장제스의 손에 남은 지역은 광시성과 광둥성, 쓰촨성, 구이저우성, 윈난성에다 타이완과 하이난, 주산 열도 등 동해안 연안의 일부 섬 정도였다. 더이상은 전투라기보다 잔적에 대한 소탕전이나 다름없었다. 탕성즈와 청치엔이 배신하여 공산당에게 투항하면서 후난성의 방어선이 무너졌고 임시수도인 광저우의 함락도 시간문제였다. 리쭝런과의 갈등 역시 나날이 격화되었다. 그는 장제스와 결별할 생각으로 망명을 준비하였다.
1949년 10월 1일 오후 3시,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30만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린보취(林伯渠)가 개국대전의 개시를 알렸다. "일어나라! 노예가 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여!" 중일전쟁 당시 팔로군이 애창했던 군가 <의용군 행진곡>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톈안먼 성루 위로 오성홍기가 올라갔다. 바로 전날 열린 전인협(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정한 신중국의 새로운 국기였다.

▲ 톈안먼 광장에 모인 군중들. 이날 원나라 이래 중국의 오랜 수도였던 베이징은 다시 신중국의 수도가 되었다.
마오쩌둥이 단상 위에 올라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가 지금 성립되었습니다!(中华人民共和国中央人民政府今天成立了!)" 54문의 예포가 28발을 발사했다. 중공이 창당된지 28주년이자, 내전에서 승리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주덕의 주재 아래 성대한 열병식이 거행되었다. 주더가 <인민해방군총부 명령>을 낭독했다. "중국인민해방군 전 장병들에게 명령한다. 위대한 인민의 영도자 마오 주석의 명령을 굳건히 실행하여 국민당 반동군대의 잔여부대를 섬멸하고 모든 국토를 해방한다." 그의 말이 끝나자 군중들 앞으로 중무장한 보병과 일본제 97식 전차, 야포, 장갑차들이 끝없이 행진하고 하늘에는 17대의 항공기가 축하 비행을 하였다.
중앙인민정부 조직 대강도 발표되었다. 마오쩌둥이 주석으로, 주더와 류사오치, 쑹칭링, 리지선, 장란, 가오강이 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장란과 쑹칭링, 리지선은 反장제스파 정치인이기는 했으나 공산당의 핵심 멤버도, 내전 승리에 이렇다할 기여를 했던 것도 아니며 애초에 공산당원도 아니었다.(쑨원의 두번째 부인으로 중국 인민의 추앙을 받고 있던 쑹칭링은 그녀가 죽기 2주 전인 1981년 5월 15일에야 공산당에 입당서를 냈다.) 이들을 정권에 포함시킨 것은 국민당에도, 공산당에도 속하지 않은 채 내전의 결과를 관망하고 있는 민주동맹을 비롯한 중도파 인사들을 포섭하기 위한 정치적인 포석이었다.

▲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하는 마오쩌둥
마오쩌둥의 나이 55세. 장제스보다 6살 연하이다. 이 순간 그의 마음 속에는 온갖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28년전인 1921년 7월 23일 상하이 망지로에서 열렸던 중국공산당 제1회 전국대회에 참석했던 창당인원은 고작 13명이었다. 마오 역시 이 날 후난성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로부터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가. 참담하게 실패로 끝난 창사 기의에서는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소수의 추종자와 함께 징강산(井岡山)으로 도주했다. 이후 장제스의 토벌전과 2만6천리의 비참한 후퇴. 그 와중에 열린 쭌이 회의에서 저우언라이와 장원톈(張聞天), 류사오치 등의 도움을 받아 소위 "28인의 볼세비키"라 불리던 소련파 지도부를 꺾고 처음으로 당권을 장악하였다. 그동안 한낱 "후난의 촌놈"으로 무시당하던 마오쩌둥이 중공의 최고 지도자가 된 것이다.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의 시안 사건과 뒤이은 일본의 침략은 산시성의 산간벽촌으로 쫓겨간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기사회생의 기회였다. 중일전쟁 8년 동안 마오쩌둥은 와신상담하며 장제스과의 일전만을 준비하였다. 1945년 10월 충칭에서 열린 국공의 평화회담에서 그가 장제스와 동등하게 설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 덕분이었다. 후난성의 성도 창사 남쪽에 있는 벽촌 마을 샤오산(韶山)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일개 촌부에서 오늘로서 5억 중국인을 통치하는 최고 영도자가 되었다.
개국대전 다음날 소련이 제일 먼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 정통정부로서 승인하였다. 북한과 미얀마, 동독 등 공산국가들도 뒤따랐고 비공산권 국가 중에는 인도와 영국이 가장 먼저 타이완과 관계를 끊고 중국과 수교했다. 1950년 6월까지 17개 나라가 신중국과 수교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1949년 11월 17일 신중국의 승인을 보류한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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