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장이 돌파되고 상하이와 난징이 함락되었으며 양호(후베이성, 후난성)의 방어선도 무너졌다. 하지만 공산군의 상황도 좋지만은 않았다. 과거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병참난에 허덕이고 북방 출신 병사들은 남방의 토질과 기후에 맞지 않아 전염병이 만연했다. 북에서 남으로 동에서 서로 쉬지 않고 수천km를 강행군한 병사들은 지칠대로 지친데다 굶주림에 시달려 많은 이들이 쓰러지면서 손실이 날로 늘어났다. 일단 진격을 멈추고 병력 보충과 재정비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미국의 개입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만약 여기서 멈춘다면 장제스 역시 병력을 정비하고 방어선을 강화할 것이다. 그럼 이후의 승부는 알 수 없게 된다.
"항우를 본받지 마라!" 마오쩌둥은 지휘관들을 질타했다.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서초패왕이라 불리며 천하를 호령했던 항우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지고도 잠깐의 방심으로 유방과 홍구의 맹약을 맺었다가 결국 패망하고 말았다. 마오쩌둥이 늘 손에 들고 다녔던 손자병법에는 군쟁편(軍爭篇)에 "적의 사기를 꺾고 적장의 마음을 흔들어야 한다. 적이 나태하고 해이할 때 공격해야 한다. 다스려진 것으로 혼란스러운 적을 상대하며 안정된 것으로 소란스러운 적을 친다. 이것이 마음을 이용하는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이는 심리전의 중요성을 뜻한다.
13년 전, 산시성의 벽촌에 고립된 중공은 궁지에 몰려있었다. 비참한 대장정의 과정에서 지도부는 분열되었고 서로 책임 논쟁과 주도권 싸움에 열을 올렸다. 장제스는 손가락만 갖다대어도 굴러들어올 승리였다. 하지만 장쉐량이 시안사건을 일으키면서 다 이긴 싸움을 그만둔 채 마지못해 국공합작에 동의하였다. 말하자면 항우가 유방과 "홍구의 맹약"을 맺은 것과 같았다. 그것이 오늘의 결과이지 않은가. 스스로 무너지고 흩어지는 적에게 구사회생의 기회를 줄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손자와 조조의 철저한 추종자였던 마오쩌둥은 우물쭈물하다 호기를 놓칠 인물이 아니었다. 여기서 장제스와의 오랜 투쟁에 마침표를 찍을 셈이었다.

▲ 뛰어난 지모로 작은 제갈량이라 불리며 북벌과 중일전쟁, 국공내전에서 활약했던 보충시(가운데앞) 뒷날 마오쩌둥은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웠던 적"이라고 평하였다.
스틸웰이 중국 제일의 전략가라고 격찬했고 '작은 제갈량(小诸葛)'이라 불리며 지략을 자랑했던 보충시는 우한에 사령부를 두고 창장을 따라 빈틈없이 방어선을 구축했다. 마오쩌둥은 보충시에게 투항을 권유했다. "만약 투항한다면 현재의 지위와 권한을 인정하고 30만 계군의 지휘를 그대로 맡기겠다." 보충시는 단칼에 거절했다. 5월 14일부터 제4야전군 선두병단이 우한 동쪽에서 창장을 도하하여 장시성 주장(九江)을 점령했다. 제2야전군도 이에 호응하여 난창을 점령했다. 이로서 보충시의 동쪽 측면이 열렸다. 또한 후베이성 북쪽에서 쑹시리옌(宋希濂)의 제14병단을 격파하고 이창(宜昌) 과 사시(沙市)를 점령하였다. 보충시는 양면 공격을 받을 판이었다. 여기다 우한 남쪽을 방비하던 제19병단이 반란을 일으켜 공산군에게 넘어갔다. 앞으로는 전광석화같은 공격을 퍼붓고, 뒤로는 적을 회유하여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것이 마오쩌둥의 방식이었다.
보충시는 변변히 싸우지도 못한 채 우한을 버리고 재빨리 후난성의 성도 창사로 퇴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창사의 방어를 맡은 청치엔과 천밍런이 변절하여 창사를 린뱌오에게 바쳤다. 후난성의 북부가 돌파되고 린뱌오의 제4야전군은 웨한철도(粤漢鐵道, 우한과 광저우를 연결하는 길이 1,100km의 철도)를 따라 파죽지세로 남하하였다. 보충시는 헝양으로 물러났다. 창사 남쪽 190km 떨어진 헝양은 중일전쟁 말기 압도적인 일본군을 상대로 40여일을 버티며 혈전을 벌였던 요충지였다. 이곳마저 무너지면 양광(광시성과 광둥성)이 위태로와진다. 그는 12개군 20만명의 병력으로 둥팅호(洞庭湖)와 미뤄강(汨羅江)을 따라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또한 이창에서 철수해온 쑹시리옌(宋希濂)의 제14병단이 좌익을 맡고, 광저우 수정공서 주임(廣州绥靖公署主任) 위한모우(余漢謀)의 광동군이 우익을 맡았다. 또한 리쭝런은 타이완에서 장제스를 만나 타이완으로 수송 중인 무기, 군수품의 일부를 헝양 지구에 투입키로 하였다. 보충시는 헝양에서 공산군의 선두부대를 격파한 후 지연전을 펼치면서 광시성으로 물러나 장기전을 수행할 생각이었다.

▲ 리쭝런과 보충시. 같은 광시파 군벌로 평생을 함께 한 정치적 동지였다. 하지만 리쭝런은 장제스가 결별한 채 미국으로 망명했던 반면, 보충시는 타이완으로 가서 장제스에게 끝까지 충성하였다.
린뱌오는 보충시의 주력부대를 일거에 포위 섬멸할 생각으로 부대를 셋으로 나누었다. 청쯔화(程子華)의 제13병단이 좌익을 맡아 헝양 서쪽으로 우회하고 샤오진광(蕭勁光)의 제12병단이 중앙으로, 덩화(鄧華)의 제15병단은 장시성을 거쳐 광둥성으로 향했다. 총병력은 무려 90만명이었다. 모두 합해봐야 40만명 정도인 국민정부군을 완전히 압도했다. 하지만 보충시의 방어도 만만치 않아 전진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8월 15일 사오양(邵陽)에서 제13병단 제49군 제146사단이 국민정부군 제46군 제236사단과 조우하여 격전이 벌어졌다. 보충시는 급히 제7군 2개 사단(제171사단, 제172사단)을 증원하여 제146사단을 포위하였다. 급보를 받은 린뱌오도 제49군에 제145사단을 급파시키고 제146사단에게 즉시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17일 제146사단은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다. 900여명이 죽고 2천여명의 부상자를 냈다.
그동안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국민정부군으로서는 모처럼의 승리였고 린뱌오는 일시적으로 헝양 공격을 중지했다. 광저우의 국민정부는 승전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다수의 무기를 노획했으며 대부분이 소련제"라고 발표했다. 국공내전에 소련이 개입하고 있음을 강조하여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반짝 승리일 뿐이었다. 문제는 제14병단 사령관 쑹시리옌과 보충시의 갈등이었다. 애써 포위한 제146사단을 전멸시키지 못한 채 놓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보충시는 국방부장을 지냈고 화중과 화남지구를 맡은 총사령관이었다. 일개 병단사령관(우리의 야전군에 해당)에 불과한 쑹시리옌은 보충시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보충시의 명령은 받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행정원장이자 국방부장인 허잉친이 직접 쑹시리옌에게 전화를 걸어 보충시와 협력하여 공산군을 격퇴하라고 명령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행정원장이니 국방부장이니 따위 모른다. 오직 노총(老總, 장제스)의 지시만 따른다!" 쑹시리옌은 황푸군관학교 1기생으로 중일전쟁 당시 버마 원정군을 지휘하여 승리를 거둔 명장이었다. 하지만 백전노장의 그도 이 때에 이르자 제 정신이 아니었다. 황푸 출신의 지휘관들은 장제스에 대해 광신에 가까운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광시파의 음모로 인해 자신들의 총통이 끌어내려졌다고 여기고 있었다. 따라서 광시파의 영수인 리쭝런과 보충시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품고 철저하게 비협조로 일관하였다. 여기다 정계 복귀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장제스가 작전에 마구 간섭하면서 더욱 혼선이 빚어졌다. 이런 적전 분열이 결과적으로 창장 이남마저 지켜내지 못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10월 2일 제4야전군 제15병단이 제2야전군 제4병단과 합세하여 광둥성을 침공했다. 위한모우 휘하의 3개 병단(제12, 제13, 제21병단) 10개군 15만명이 광둥성을 지키고 있었지만 사기도 형편없고 무장도 빈약한 지방군이 태반이었다. 공산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0월 7일 제4병단이 샤오관(曲江)을, 제15병단은 원위안(翁源)을 점령하면서 웨한철도가 차단되었다. 이로 인해 위한모우와 보충시 사이의 연락선이 끊어져 임시수도 광저우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위한모우는 잔존 병력을 서쪽으로 퇴각시켰다. 일부 부대는 광저우 동쪽의 산터우에서 해상으로 탈출했다. 광저우 수비대는 공산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취장강(曲江)에 놓인 철교를 폭파시켰지만 사방에서 몰려오는 공산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10월 10일 리쭝런은 광저우를 포기하고 충칭으로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광저우 비행장은 서로 비행기를 잡아타려는 사람들로 아비규환을 일으켰다. 이들은 타이완으로 도망쳤다. 10월 14일 밤 광저우가 함락되었다.
양광이 침공받아 퇴로가 차단될 위기에 처하자 10월 6일 보충시는 부득이 헝양을 버리고 전군에 구이린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좌익을 맡고 있던 쑹시리옌은 멋대로 충칭으로 물러났다. 이로 인해 헝양 서쪽에 큰 공간이 생겼다.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린뱌오가 즉각 추격에 나섰다. 정면에서는 뒤쫓고 별동대가 크게 원을 그리며 우회하여 포위하는 식이었다. 국민정부군 제7군과 제48군이 헝양 서남쪽의 치양(祁阳县)에서 공산군 제13병단의 기습을 받아 포위당했다. 2개 사단이 전멸하고 2개 사단이 타격을 입었다. 보충시 휘하의 계군 최강부대였다. 그야말로 치명타였다.
보충시는 린뱌오의 추격을 교묘하게 피하며 주력부대를 구이린으로 철퇴시키기는 했으나 장비의 태반을 상실한데다 사기가 극도로 떨어진 병사들의 반란과 탈영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병력은 15만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또한 광둥성에서 쫓겨난 위한모우의 잔존부대 4만명도 보충시와 합류했다. 공산군의 선두부대가 헝양을 거쳐 후난과 광시의 접경에 있는 융저우(永州)에 도착했다. 구이린과는 지척이므로 구이린 함락도 시간 문제였다. 보충시는 구이린을 포기하고 남쪽 120km에 있는 류저우로 이동했다. 구이린은 11월 22일에 함락되었다.
서북쪽에서는 공산군 제13병단 2개군이, 북쪽에서는 제12병단 3개군, 동남쪽에서는 제4병단 4개군과 제15병단 1개군이 진격해 왔다. 보충시는 삼방향에서 거대한 포위망에 갖혔다. 11월 15일 제13병단은 광시성과 구이저우성을 연결하는 첸난(黔南)을 점령하였고, 또한 제2야전군이 구이저우성을 침공하여 11월 14일 성도 구이양(貴陽)를 점령했다. 이로서 보충시가 윈난성과 구이저우성으로 철수할 퇴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남쪽에서는 레이저우 반도 북쪽을 점령하여 하이난으로 향하는 해상 탈출로를 막았다.
도처에서 방어선이 무너지며 포위망이 좁혀오자 '작은 제갈량' 보충시도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위한모우는 하이난 섬으로 가서 하이난의 방어를 맡고 있던 쉐웨와 천지당(陳濟棠)을 만나 회의를 열었다. 보충시는 두가지 안을 내놓았다. 베트남 국경으로 탈출하여 싸울 것인가, 하이난으로 물러날 것인가. 네 사람은 후자만이 살 길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레이저우 반도가 함락되면서 군대를 하이난으로 철수시킬 방법이 없었다. 결국 보충시는 절충안을 선택했다. 제1병단과 제10병단은 중불 국경의 난닝으로, 제11병단 잔존부대는 친저우(钦州)에서 해상으로 탈출하라고 지시했다.
12월 3일 난닝이 함락되고 12월 7일 제1병단과 제10병단 전체가 항복했다. 공산군은 12월 14일 중불국경의 친난꽌(镇南关)에 도착함으로서 광시성 전역을 장악하였다. 국민정부군은 사상자 1만2천명에 15만명이 포로가 되었다. 보충시와 위한모우를 비롯해 하이난으로 퇴각하는데 성공한 병력은 고작 2만명에 불과했다. 구이린 수정공서 주임(桂林綏靖公署主任, 수정공서 주임 = 국공내전 중 한개 또는 여러 개의 성을 한개의 수정구로 할당하고 군정과 행정, 공산군 토벌을 총괄하는 책임자. 통상 이급 상장(우리의 중장과 대장 사이에 해당) 이상이 맡았음. 타국의 전구 사령관에 해당) 리핑샨(李品仙)은 타이완으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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