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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국공내전史] 장제스 타이완으로 향하다 - 5. 샤먼 함락, 풍전등화의 타이완 /blog.naver.com/atena

샤먼 동쪽에 있는 다진먼다오(島)를 비롯한 50여개의 크고 작은 섬을 통칭하지만 통상 진먼다오(金門島)라고 하면 가장 큰 섬인 다지먼다오를 가리킨다. 동서 20km, 남북 5~10km, 전체 면적은 131.7㎢ 로 거제도의 1/3 정도이다. 당시 인구는 약 5만명으로 주로 농사와 어업에 종사하였다. 샤먼과는 직선거리로 10km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마주보고 있다. 최단거리로 본다면 2.3km에 불과하다. 반면, 타이완과는 최단거리라고 해도 196km에 달하며 타이완 남부의 군항 가오슝과는 296km 떨어져 있다. 전략적으로 우리의 서해 5도에 비견될 만큼 중요한 곳이지만, 군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훨씬 방어에 불리한 셈이다.

▲ 샤먼시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진먼다오. 맑은 날씨에서는 한눈에 들어올만큼 가깝다고 한다.

샤먼의 입구인 진먼다오는 명대부터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왜구가 창궐하자 홍무제 시절 이들을 방어하기 위해 섬 한가운데에 천호소성(千戶所城)이라는 성을 짓고, 섬의 이름을 "굳건한 문"이라는 뜻에서 진먼다오라고 불렀다. 명나라가 멸망한 뒤 반청운동을 벌였던 정성공은 진먼다오를 기반으로 삼아 당시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있던 타이완을 공략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에서 진먼다오는 한낱 변방의 작은 섬일 뿐이었다.

그러나 1949년 4월 공산군의 총공세로 창장 방어선이 무너지고 장제스가 타이완을 최후의 보루이자 반격의 거점으로 정하면서 자연스레 진먼다오의 가치 또한 주목받게 되었다. 진먼다오는 지형적으로 방어에 불리한 샤면의 후방 거점이면서, 샤먼이 무너질 경우 자연스레 진먼다오가 타이완의 최후 방벽이 되어야 했다. 만약 타이완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진먼다오가 함락된다면 타이완 방어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샤먼에서 타이완까지는 하루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1949년 초부터 장제스는 타이완의 방어를 부랴부랴 강화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방비 태세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1949년 10월 기준으로 타이완에 배치된 병력은 4개군(제6군, 제52군, 제54군, 제80군) 7개 사단 1개 여단 등 3만명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현지민들을 급조하여 만든 신병 부대이거나 상하이에서 철수한 패잔병들의 무리들이었다. 사기도 형편없었고 훈련과 무기, 장비도 모두 부족한 오합지졸이었다. 심지어 제52군과 제54군은 예하 병력이 고작 여단 규모인 5, 6천명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병력은 타이완 남쪽의 타이남(臺南)과 북쪽의 타이페이(臺北)에 주로 배치되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약 1400km에 달하는 타이완 해안선 전체를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타이완의 해안가는 지형적으로 매우 험준하여 대규모 공격군이 동시 다발적으로 상륙을 감행하기에 매우 불리하지만, 일단 교두보를 빼앗긴다면 타이완 전역이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따라서 장제스로서는 진먼다오는 어떤 댓가를 치뤄서라도 지켜내어야 할 거점이었다. 반대로 중공 입장에서는  타이완 공략을 위해 반드시 점령해야 했다. 장제스는 예하 지휘관 회의에서 진먼다오와 샤먼이 타이완의 울타리라면서 "동남지역의 군사적 성패는 오직 이 두섬에 달려 있다"며 국민정부의 사활이 걸려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중요한 곳이지만 1949년 6월까지도 진먼다오에는 변변한 방어시설도, 수비 병력도 없었다. 본격적으로 진먼다오의 방어가 강화되고 병력을 배치하기 시작한 것은 6월 말이었다. 진먼다오의 방어계획을 수립 지휘한 사람은 일본군 예비역 중장 네모토 히로시(根本博)였다. 1936년 일본 최대의 군사 반란이었던 2.26사건 당시 육군성 신문반장으로 있었던 그는 반란군을 향해 "병사들에게 고한다"라는 천황의 토벌령을 방송하여 한명의 유혈도 없이 반란군을 원대복귀시키는데 성공하여 군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를 국민적으로 유명하게 한 사건은 일본의 패망 직후였다. 1945년 8월 8일 만주를 침공한 소련은 관동군을 단숨에 격파한 후 내몽골로 밀고 들어왔다. 주몽군 사령관이었던 그는 소련군이 도처에서 강간과 약탈을 저지르자 끝까지 싸우기로 결심하였다. 이미 일본 수뇌부는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기로 결정한 뒤였다. 네모토는 소련군에게 정전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자 내몽골에 거주하는 4만명의 일본인 거류민을 안전하게 철수하기 위해 부하들에게 항전을 지시했다. "이유를 불문하고 아군 진지를 공격하는 소련군을 단호하게 격멸하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그는 만약 이로 인해 국제적인 문제가 될 경우 할복하겠다는 각오로 끝까지 항전하면서 민간인 보호에 최선을 다했다. 덕분에 4만명의 일본인들과 주몽군, 북지나방면군 35만명 모두 무사히 열차를 타고 8월 23일 톈진에 도착하였고 일본으로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었다. 이는 소련군이 쳐들어오자 변변히 싸우지도 않고 수십만 민간인을 버린 채 제 가족만 챙겨 도망쳤던 관동군의 추태와는 대조되었기에 일본 사회에서 큰 찬사를 받았다.

국공내전 말기인 1949년 6월 그는 사비를 털어 타이완으로 밀항하였다. 중국이 일본군 포로들을 인도적으로 대해주고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장제스의 큰 은혜라면서 그것을 갚겠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장제스는 미국이 중국에 대해 완전히 손을 떼기로 결정하고 바아 준장을 비롯한 모든 군사고문단을 일방적으로 철수시키자 이들을 대신할 전문가들이 필요했다. 허잉친과 옌시산은 전 지나파견군 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 대장에게 구 일본군 장성들을 타이완으로 비밀리에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오카무라는 중국 전선에서 지휘 경험이 있는 구 일본군 장성들을 대상으로 17명을 모아서 9월 1일 도쿄에서 이른바 "백단(白團)"이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중공 즉, 적비(赤匪)에 대항하는 조직이라는 의미였다.

사실 국공내전 중 쌍방이 일본군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써먹는 것은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진 일이었다. 공산군에는 약 3만명의 일본군이 있었고 산시군벌 옌시산은 과거 관동군 고급참모로 황고툰 사건을 일으켜 만주 군벌 장쭤린을 살해했던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 전 만철 이사를 전범 재판에서 몰래 빼주는 대신 경제, 군사 고문으로 활용하였다. 그는 산시성의 성도 타이위안이 함락될 때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공산군의 포로가 되어 1955년 옥사하였다. 

1949년 11월 1일 오카무라를 단장으로 하는 ​백단 요원들은 타이페이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모두 이름과 신분을 중국식으로 바꾸어 중화민국 육군의 장성으로 대우받으며 타이완군의 재편과 훈련을 맡았다. ​장제스 정권으로서도 부득이하게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그렇다고 과거 중국을 침략했던 원흉들을 군사고문으로 고용하는 것은 어쨌거나 숨기고 싶은 치부였다. 또한 대일강화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 일 정부의 공식 승인도 받지 않았기에 자칫 국제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미국과 일본 정부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사적인 행동"이라는 이유로 애써 문제시 삼지는 않았다. 이들은 1951년 1월 타이완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가 재개된 뒤에도 여전히 남아서 활동하였고 1969년에야 완전히 철수하였다.

▲ 장제스와 그의 일본인 군사고문단 "백단". 1949년말부터 1969년까지 총 83명이 참여하였다. 미국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오합지졸인 타이완군을 훈련시키기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기는 했으나 어쨌든 중국 민중의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일이었기에 장제스 정권은 이 사실을 끝까지 함구하였다. 미국 군사고문단이 들어온 뒤에도 장제스는 여전히 이들을 중용했는데, 물량과 화력 중심의 미군 교리 보다는 오히려 소수 정예를 추구하는 일본군의 방식이 타이완의 여건에 맞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장제스는 네모토의 종군 요청을 쾌히 수락한 후 푸저우수정구공처 대리주임(푸젠성 방면 총사령관) 탕언보의 군사고문으로 임명하였다. 계급은 중장 대우였다. 린바오위안(林保源)이라는 중국식 이름으로 바꾼 그는 8월 18일 샤먼에 도착했다. 그는 탕언보에게 샤먼이 지키기 어려우니 포기하고 진먼다오의 방어에 집중할 것을 건의하였다. 탕언보는 거부했지만 대신 빈약한 진먼다오의 방어를 강화하는 역할을 맡겼다. 그는 무기와 물자를 대거 수송하여 비축하는 한편, 곳곳에 동굴을 파서 탄약과 식량, 식수를 저장하였다. 또한 요해지에 포병진지와 200여개의 토치카를 구축하고 해안가에 지뢰를 살포하는 등 진먼다오 전역을 짧은 시간 동안 신속하게 요새화하였다. 장제스 역시 직접 진먼다오와 주변 섬을 순시하면서 병력을 대대적으로 증원하였다.

7월 2일 천이의 제3야전군이 푸젠성 북부를 침공하자 상황은 점점 급박해졌다. 장제스는 우선 제22병단 산하 제25군 사령부와 제45사단을 다진먼다오에, 제5군 산하 제166사단과 제200사단을 샤오진먼다오(小金門島)에 배치하였다. 또한 다진먼다오 북쪽에 있는 다덩다오(大嶝島)와 샤오덩다오(小嶝島)에 제40사단을 배치하였다. 9월 3일에는 직계 정예부대인 지식청년군 제80군 제201사단을 증원하였다.

10월 초 광둥성이 함락되자 산터우(汕頭)를 통해 철수한 제12병단 산하 제18군 3개 사단(제11, 제43, 제118사단) 1만명 또한 진먼다오로 수송하였다. 또한 10월 17일에는 샤먼마저 함락되면서 제22병단 잔존병력 역시 진먼다오로 철수하였고 주산열도로 이동중이던 제12병단 산하 제19군 3개 사단(제13, 제14, 제18사단)도 급히 진먼다오로 선수를 돌렸다. 이로서 진먼다오와 그 주변 도서에 배치된 총병력은 약 8만명에 달했고 그 중에 다진먼다오에 4만명, 소진먼다오에 2만명 정도였다. 탕언보가 진먼다오 방어의 총지휘를, 진먼다오 서쪽은 제22병단 사령관 리량룽(李良荣)이, 동쪽은 제12병단 사령관 후리안(胡璉)이 각각 맡았다. 또한 해군 제2함대와 제1비행대대(폭격기 25대, 전투기 50대)가 진먼다오 주변을 초계하면서 공산군의 동태를 살폈다.

그러나 각 사단들은 각지에서 철수한 패잔병을 재편하거나 신병들이 대부분이었다. 제40사단과 제45사단은 인원수가 4천명 정도인데다 원래 공군 경비부대를 재편했기에 지상 전투 경험은 별로 없었다. 또한 ​샤먼에서 철수한 제166사단은 고작 1100명이었고, 제200사단 역시 1900명 정도였기에 샤오진먼다오를 방어하는 제5군 전체를 통틀어도 연대 규모인 3천명에 불과했다. 제5군은 이른바 장제스의 "5대 주력"이라 불리며 국민정부군에서도 손꼽히는 정예 부대였지만 전년의 화이허 전역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입음으로서 껍데기만 남은 셈이었다. 제201사단은 중일전쟁 말기에 미국식으로 편제된 부대로 2개 보병연대와 1개 전차 대대(M5A1 스튜어트 경전차 21대)를 보유했지만 1개 연대가 부족했고 나머지 2개 연대 역시 타이완에서 징집된 어린 청년들을 긁어 모은 보충병들이었다. 인원수도 6천여명에 불과했다. 무기도 극히 빈약하여 연대 화력이 고작 박격포 4문이 전부였다.

▲ 훈련 중인 타이완 출신 신병들. 이들은 장제스에 대한 충성심은 없었으나 자기 고향을 지키겠다는 의지는 있었고 진먼다오 전투에서 그것을 증명하였다.


한편, 타이완 공략의 임무를 맡은 제3야전군은 7월부터 이미 예하 부대에 상륙 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타이완 공격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예페이의 제10병단이 샤먼을 점령하면서 마지막 남은 걸림돌은 진먼다오였다. 진먼다오만 점령하면 타이완으로 가는 길은 열리는 셈이었다. 타이완 공략의 전초전이 될 진먼다오 상륙작전의 임무는 제10병단 3개군(제28군, 제29군, 제31군) 10만명에게 부여되었다. 제10병단은 샤먼에 사령부를 두고 진먼다오를 병풍처럼 둘러쌌다. 쌍방의 병력 배치는 다음과 같았다.

 



​공산군은 진지를 구축하는 한편, 고지에 포병을 배치하여 9월 16일부터 진먼다오를 향해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물론 국민정부군도 대응사격을 하면서 이미 진먼다오의 혈전은 시작되고 있었다. 10월 9일에는 제84사단과 제87사단 각 1개 연대가 다덩다오와 소덩다오를 공격해 국민정부군 제40사단을 격파하고 11일까지 두 섬을 완전히 점령했다. 제40사단은 다지먼다오로 철수하였다. 10월 15일에는 광저우가 함락되고 17일에는 샤먼이 함락되었다. 국민정부로서는 그야말로 공전의 위기였다. 타이완마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리자 장제스는 충칭에서 급히 타이완으로 날아와 첸쳉과 진먼다오 방어를 논했다. 그리고 탕언보에게 급전을 보내어 "다시 진먼다오까지 내줄 수는 없다. 아우(탕언보)는 반드시 현지에서 전투를 독려하여 책무를 다하라. 다른 장수로 교체하는 일은 없다."라며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마오쩌둥은 예페이에게 전문을 보내어 10월말까지 진먼다오를 점령하라고 직접 독려하였다. 뛰어난 지략과 용맹을 자랑하는 "상승장군" 예페이 역시 샤먼을 점령한 여세를 몰아 단숨에 진먼다오를 공략할 생각이었다. 그는 영구적인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는 샤먼에서도 3일만에 승리를 거두었는데 변변한 방어시설도 없고 고작 2만명 남짓한 패잔병이 몰려 있는 진먼다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또한 제12병단 사령관 후리안이 장제스에게 보낸 전문을 캐치했다. 타이완으로의 철수를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후리안이 광둥성 산터우에서 철수할 때 장제스에게 보낸 전문이었다. 장제스는 이를 거부하고 제12병단을 이미 진먼다오에 배치한 상태였다. 하지만 예페이는 충분히 확인하지 않은 채 성급하게 "적은 이미 싸울 의지가 없다"라고 판단하였다.


그의 계획은 제28군과 제29군의 각 사단에서 7개 연대를 차출하여 혼성부대를 만들어 다진먼다오에 상륙하는 한편, 제31군이 샤오진먼다오를 공격할 생각이었으나 선박 부족으로 샤오진먼다오 공격은 일단 보류하였다. 주변에서 350여척의 목선을 징발했지만 시간이 촉박하여 그 정도로는 2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한꺼번에 수송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대신 병력을 둘로 나누어 3개 연대를 제1진으로 상륙하여 교두보를 마련한 후 제2진 4개 연대를 투입할 생각이었다. 공격 개시일은 10월 24일이었다.

국민정부군 역시 공산군의 공격이 임박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예상 상륙 지점은 진먼다오 북서쪽의 갯뻘지대였다. 진먼다오의 동쪽은 지형적으로 산악지대에다 해안가가 절벽이었다. 또한 섬의 남쪽에는 국민정부군 해군이 상시 초계하고 있었다. 또한 진먼다오 주변 해역은 파도가 높고 물살이 거칠었다. 결국 진먼다오에서 대규모 병력을 상륙할 수 있는 지점은 구닝터우와 룽커우(壟口)에 걸친 북서쪽 밖에 없었다. 이곳에는 제201사단 6천여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방어지역은 넓은 반면, 방어시설은 콘크리트가 아닌 흙으로 된 400여개의 보루가 전부였다. 또한 제201사단은 전투경험이 없는 신참부대였고 무기와 화력도 매우 빈약했다.

따라서 주변 고지에 포병을 배치하는 한편, 제118사단과 전차 대대를 제18군 직할 기동 예비대로 운영하여 유사시 신속하게 증원할 수 있도록 대비하였다. 또한 해공군과의 협력 체계를 강화하고 각지에서 모여든 혼성 부대라는 점을 고려해 지휘계통을 일원화하였다. 그동안 연전연패로 의기소침해 있던 국민정부군으로서는 전에 없이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적의 대규모 상륙에 대비한 합동 훈련을 실시하고 병력 배치를 완료한 것은 공산군의 공격 7시간 전이었다.

10월 24일 저녁 7시. 선박 운행을 위해 인근 지역에서 징발된 350여명의 선원을 포함해 제1진 9천여명을 태운 350여척의 선박들이 일제히 롄허(蓮河)와 다덩다오에서 출발하였다. 파도가 높고 바람은 추웠지만 날씨는 맑았고 밀물과 강한 북동풍 덕분에 항해는 순조로왔다. 25일 새벽 1시 30분. 진먼다오 500m 근처까지 접근하였다. 사방은 조용하여 오직 바람과 파도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새벽 2시. 제253연대가 가장 먼저 진먼다오 북서쪽 끝트머리에 있는 구닝터우에 상륙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곳의 수비대는 제201사단 제601연대였다. 그런데 한 전차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해안을 향해 접근하고 있는 적의 선단을 우연히 발견했다. 전차는 당일 기동 훈련으로 고장나 마침 수리하는 중이었다. 움직일 수 없었지만 어쨌든 포는 쓸 수 있었다. 전차포가 불을 뿜었다. 물기둥이 치솟자 깜짝 놀란 중공군도 응사했다. 사격 소리가 들리자 주변 진지에서 일제히 조명탄을 쏘아 올렸다. 단숨에 대낮같이 밝아졌다. 사방에서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이 집중되었다. 맹렬한 탄막이 쏟아졌지만 공산군 병사들은 용감하게 배에서 뛰어내려 돌격했다.

 


같은 시간, 구닝터우 동쪽에서도 제244연대가 룽커우에, 제251연대가 호웨이샹(湖尾鄕)에 각각 상륙을 시도하면서 국민정부군 수비대와의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