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3월 19일, 시안수정구공처 주임(서북초비사령관) 후쭝난이 이끄는 국민정부군 25개 사단 20만명의 병력이 중공의 심장부인 옌안을 점령했다. 전차와 항공기를 앞세워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밀고 들어오는 국민정부군의 공격에 마오쩌둥은 싸우지 않고 물러났다. 장제스에게는 국공내전이 시작된 이래 그야말로 절정의 순간이었다. 후쭝난은 '서북왕'이라 불리며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산속으로 들어간 공산군의 유격전 앞에서 후쭝난은 고전의 연속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 펑더화이의 서북 야전군(제1야전군)의 맹렬한 반격 아래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국민정부군 잠편 제17사단이 옌안을 버리고 퇴각했다. 1948년 4월 21일 옌안은 도로 중공의 손에 넘어갔다.
후쭝난은 첸쳉, 쑹시렌, 탕언보, 두위밍 등과 함께 장제스의 최측근 중의 하나이자 국민정부군에서 가장 유능한 지휘관 중의 한 사람이었다. 황푸 군관학교 1기생으로 장제스의 북벌전쟁부터 중원대전과 중일전쟁 등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청렴하고 강직했으며 적이었던 저우언라이조차 "장제스 휘하의 수많은 장군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다"라고 평하였다. 장제스가 옌안 공략이라는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백전연마의 그도 농민 출신의 맹장 펑더화이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1948년 9월 28일 네룽전(徐向前)의 화북야전군 산하 제1병단 8만명이 산시성을 침공했다. 산시성은 신해혁명 이래 산시군벌 옌시산이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어 30년 이상 통치하고 있었다. '산시의 토황제'라 불리던 그는 교활하고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중공의 거점이었던 옌안과 가까워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팔로군은 옌시산의 군대에 편입되어 그의 지휘를 받아 싸웠다. 만리장성을 넘어 침공한 일본군 제5사단을 상대로 국민정부군과 팔로군이 힘을 모아 핑신관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이른바 "핑싱관 대첩(平衡關 大捷)"은 비록 국지적인 승리였지만 중일전쟁 발발 이래 중국이 거둔 첫번째 승리였다.
하지만 그런 밀월관계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일본과 비밀리에 협정을 맺고 공산주의자들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특히 1939년 12월 3일 산시성에서 활동하던 친 중공 단체인 "희생구국회"와 "산시청년항적결사대"를 기습하는 진서사변(晋西事变)을 일으켰다. 600여명이 넘는 공산당원들이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일본이 항복한 뒤에는 산시성에 주둔했던 일본군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공산군을 공격했다. 그에게 고용된 일본군은 1만명이 넘었다. 중공으로서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춘추시대 5패의 하나였던 진(晋)나라가 있었던 산시성은 타이항 산맥 서쪽, 황허 중류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만리장성과 접하고 있다. 면적은 한반도의 70% 정도인 15만7천k㎡에 달한다. 주로 해발 1~2천m의 험준한 산악지대와 구릉과 분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철광석과 석탄이 풍부하다. 옌시산은 통치 기간 동안 산시성의 교육과 근대화에 많은 투자를 하여 성도 타이위안에는 대규모 군수공장과 중화학 공업단지가 있었고 중국 내륙에서는 가장 발달된 지역이었다.
산시성이 뚫린다면 서북 전체가 흔들린다. 공산군이 산시성으로 쇄도하자 옌시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타이위안 주변을 견고하게 요새화하는 한편, 7개 사단 8만명으로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10월 5일 타이위안 남쪽의 샤오디엔(小店)에서 화북야전군 제8종대와 제13종대의 공격 앞에 2개 사단(제44사단, 제45사단)이 전멸했고 사단장들도 포로가 되었다. 10일에는 타이위안 비행장이 함락되었다. 공산군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국민정부군은 도처에서 항복했다. 옌시산은 투항한 일본군과 후쭝난이 수송기로 급히 공수한 중앙군 제83여단을 증파하여 타이위안 외곽에서 보름에 걸쳐 치열한 혈전을 벌였지만 결국 패퇴했다. 국민정부군의 손실은 2만명이 넘었고 공산군 역시 1만6천여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또한 제30군 군장 황챠오쑹(黄樵松)이 반란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타이위안 함락이 초읽기에 들어가자 옌시산은 자결할 생각으로 독약을 준비하였다. 또한 타이위안을 공산군에게 내주지 않으려고 곳곳에 가솔린을 준비하여 여차하면 폭파시켜 시가지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산군도 타이위안 주변에 설치된 수많은 토치카를 이용한 국민정부군 수비대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막대한 사상자를 내었고 더 이상 한발짝도 전진할 수 없었다. 게다가 화북야전군 산하 제2병단과 제3병단이 베이핑 포위를 위해 장자커우로 이동하면서 일시적으로 전선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1948년 말 동북과 화이허에서 벌어진 내전 최대의 결전에서 국민정부군은 대참패를 당하여 100만명이 넘는 정예부대를 상실했다. 이로서 국공내전 이래 2년 반 동안 팽팽했던 전황은 공산군에게 결정적으로 기울었다. 1949년 1월 21일 장제스가 하야를 선언하고 31일에는 베이핑-톈진에서 린뱌오의 동북야전군(제4야전군)과 네룽전의 화북야전군 90만명에게 겹겹이 포위된 화북초비 사령관 푸쭤이가 50만 대군을 들어 항복하였다. 창장 이북 전역이 공산군의 손에 들어가자 서북의 전황도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동북과 화북 전선에서 풀려난 공산군의 일부가 서북으로 이동하면서 상황은 더욱 급박해졌다. 화북야전군 주력과 또한 서북 야전군 1개 군(제7종대), 동북야전군 제1 포병 사단 등이 증파되었다. 타이위안을 포위한 공산군은 30만명이 넘었다. 반면, 타이위안을 방어하는 옌시산 측은 10만명이 채 되지 않은데다 무기와 물자도 궁핍했고 사기도 땅에 떨어져 있었다. 옌시산은 비행기를 타고 난징으로 날아가 대리총통 리쭝런을 만났다. 타이위안 함락이 시간 문제라며 증원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리쭝런으로서도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국민정부군은 창장을 방어할 병력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그 와중에 공산군의 공세가 시작되면서 옌시산은 타이위안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공산군은 총공격에 앞서 타이위안의 수비를 맡은 제10병단 사령관 왕징궈(王靖国)에게 공산당 지하조직원이었던 그의 딸 왕루이쉬(王瑞書)을 통해 항복을 권고했다. 하지만 푸쭤이와 달리, 옌시산의 충실한 심복이었던 왕징궈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끝까지 싸우기로 하였다. 네룽전은 투항한 진군(晋軍, 옌시산 직계의 토착 부대) 장군들을 보내어 재차 설복하려고 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그는 오히려 타이위안에서 지하 활동을 하고 있던 공산당원들을 색출해 처형하였다. 국민정부군 지휘관들이 도미노처럼 항복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날은 추운데다 오랜 포위로 식량이 떨어지면서 수비대는 기아와 영양실조에 허덕였고 동상자가 속출했다. 후쭝난이 항공기로 식량과 군수품을 공수했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4월 15일 공산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3개 포병사단 1,300문에 달하는 각종 야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내전 이래 최대의 화력이었다. 모두 동북과 화북에서 항복한 국민정부군으로부터 노획한 일본제, 미제 야포였다. 포탄도 충분했다. 네룽전이 직접 지휘하는 제18병단(구 제1병단, 제60군, 제61군, 제62군 9개 사단)이 동쪽에서, 양더취(楊得志)의 제19병단(제63군, 제64군, 제65군 및 서북야전군 제7군 등 13개 사단)이 서쪽에서, 양청우(楊成武)의 제20병단(제66군, 제67군, 제68군 8개 사단)이 동북쪽에서 공격하였다. 국민정부군의 저항을 격파하며 타이위안 외곽 거점들을 하나씩 무너뜨렸다.
4월 20일 창장 도하에 맞추어 타이위안에 대한 최후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22일 타이위안 교외 남쪽의 요충지 쌍다시(双塔寺)와 워후샨(卧虎山)이 함락되었다. 이곳은 타이위안 방어의 핵심이었다. 수비대의 손실은 80%가 넘었다. 네룽전은 재차 투항을 권고했다. 이미 함락은 시간문제였지만 수비대는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였다. 24일 아침 재차 공격이 시작되어 공산군 선두부대가 타이위안의 성벽을 돌파하고 성내로 돌입했다. 만 하루 동안의 시가전 끝에 타이위안은 함락되었다. 왕징궈는 포로가 되어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채 1952년 전범 수용소에서 옥사했다. 산시성 주석 량화지(梁化之)는 자살했으며 3만명의 수비대도 전멸했다.

▲ 타이위안을 점령하고 승전 퍼레이드를 하는 공산군. 산시 전역은 국공내전 중 가장 치열한 전투였으며 다른 군벌 군대와 달리, 공산군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옌시산의 산시군은 항복을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싸웠다.
포로가 된 사람 중에는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 대좌도 있었다. 전 관동군 고급참모로서 1928년 6월 4일 황구툰 사건을 일으켜 만주군벌 장쭤린을 폭사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는 군에서 예편한 후 남만주철도 이사와 산시산업주식회사(山西産業株式会社) 사장으로 재직하다가 일본이 패망한 뒤 옌시산과 교섭하여 전범으로 체포되는 대신 공산군과의 싸움에 협력하는 대가로 옌시산의 군사고문이 되었다. 국공내전 중 1200여명에 달하는 일본군을 지휘하여 공산군과 싸웠으나 결국 타이위안이 함락되면서 붙잡혔고 1955년 옥사하였다. 그는 옥사하기 직전에 황구툰 사건에 대한 회고록을 남겨 자신이 황구툰 사건의 장본인임을 밝히면서도 "국가를 위한 희생"이었다며 끝까지 반성을 거부하였다.
산시 전역과 타이위안 전투는 국공내전을 통틀어 가장 치열한 혈전 중의 하나였다. 국민정부군은 9만명 이상이 전사했으며 부상자와 포로, 투항자를 합하면 13만명이 넘었다. 공산군의 손실도 전사자만 4만5천명에 달했다. 이제 대륙에 남은 세력은 오직 후쭝난 밖에 없었다. 장제스는 충칭으로 가서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