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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국공내전史] 장제스 타이완으로 향하다 - 8. 펑더화이, 서북을 차지하다//blog.naver.com/atena

1948년 내내 산베이(陕北, 산시성 북부를 가리킴)에서 벌어진 전역에서 후쭝난은 결국 펑더화이에게 완패했다. 옌안을 빼앗긴 그는 1948년 10월 5개 사단 및 2개 여단 등 약 9만명의 병력으로 반격에 나섰으나 시안 동북쪽의 다리현(大荔县)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또 한번 패배했다. 사상자는 2만5천명에 달했다. 이로서 산시성의 성도이자 후쭝난 사령부가 있는 시안의 방어조차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후쭝난은 다른 전구의 부대들과 달리 결정적인 타격을 입지 않은 채 주력부대를 보존하여 남쪽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친링산맥(秦嶺山脈)과 웨이허(河)를 천연의 방어선으로 삼았다. 시안과 그 주변의 평야는 예로부터 "관중(關中)"이라 불린다. 농산물이 풍부하고 황허의 수로와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목공은 셴양(咸陽)을 차지하고 수도로 삼음으로서 천하를 얻을 수 있었고, 유방과 항우는 관중을 놓고 패권을 다투었다. 제갈량은 관중을 얻기 위해 몇번이나 대군을 이끌고 출병했으나 사마의에 의해 저지되어 결국 중원 진출의 꿈을 포기해야 했다. 20세기에 와서는 룽하이 철도(隴海鐵道, 장쑤성 렌윈에서 쉬저우, 정저우, 카이펑, 시안 등 주요 도시를 지나 간쑤성 란저우까지 연결되며 중국을 동서로 관통하는 길이 1,747km의 철도, 중국 대륙의 대동맥 중 하나로 일컬어짐)가 건설되면서 시안은 서북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였다.

후쭝난은 시안을 중심으로 산시성(陕西省) 중부에서 간쑤성 동부, 쓰촨성 북부에 이르는 공간에 주력부대를 배치하고 방어 태세를 강화하였다. 병력은 13개군 33개 사단에 지방군까지 합해 약 20만명 정도였다. 또한 서쪽에는 회족(回族, 이슬람교를 믿는 투르크계 민족) 출신의 마부팡(馬歩芳)과 마훙규(馬鴻逵), 마훙빈(馬鴻賓), 마부칭(馬步青) 등 토착 군벌들이 공산군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주로 서북지방에 사는 회족들은 당나라 시절 중국으로 유입되어 한족화된 민족으로, 이슬람교의 성자 마호메트의 마를 따서 마씨 성을 사용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른바 "마가군(馬家軍)"이라 불린 토착 군벌들은 신해혁명 이후 닝샤성과 칭하이성, 간쑤성을 회족들이 통치하는 반독립된 왕국으로 만들었고 장제스의 난징 정권에 충성하는 대가로 "국가 속의 국가"로서의 지위를 누려왔으며 중일전쟁 중에는 제8전구로 편성되어 후방 역할을 맡았다. 중공과는 1930년대 대장정 당시 서북으로 들어온 공산군 부대를 잔혹하게 토벌하는 등 오랜 해묵은 감정이 있었다. 병력은 24개 사단 20만명 정도였으나 대부분 오합지졸인데다 장비와 훈련 상태가 매우 빈약했다. ​그리고 신강성에는 성도 우루무치를 중심으로 타오즈웨(陶峙岳)가 지휘하는 제42군 4개 사단 7만명이 주둔하였다.

한편, 중공 중앙군사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1949월 1월 15일자로 펑더화이의 서북 야전군은 제1야전군으로 개칭되었다. 병력은 2개 병단(제1병단, 제2병단) 6개군 18개 사단 및 2개 기병사단 등 15만 5천명 정도였다. 나머지 3개 야전군에 비해 병력과 무기에서 가장 취약했다. 그동안 후쭝난과의 일진일퇴의 싸움이 그만큼 치열했다는 의미였다. 2월 중순 공산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후쭝난은 화이허 전역에서 두위밍이 맹목적으로 진지를 고수하다가 퇴로가 차단되어 괴멸된 것을 교훈으로 삼아 성급한 결전을 벌이는 대신, 소규모 지연전을 펼치며 뒤로 물러났다. 덕분에 공산군은 친링산맥 북쪽과 웨이허 동쪽을 손쉽게 장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후쭝난의 강력한 방어선에 부딪친데다 마푸방이 지휘하는 마가군 기병 4개 연대가 공산군의 측면을 기습하면서 큰 타격을 입고 물러나야 했다. 중공 중앙군위도 펑더화이의 제1야전군만으로는 후쭝난을 제압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황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펑더화이가 후쭝난을 견제하는 한편, 우선 타이위안을 공략하는데 전력을 집중하였다. 타이위안은 4월 25일 함락되었다. 이 때문에 서북의 전황도 역전되었다.

​중공 중앙군위는 후쭝난의 격멸과 시안 공략을 목표로 하여 화북야전군에서 2개 병단(제18병단, 제19병단 6개 군 18개 사단)을 펑더화이의 제1야전군에 배속시켰다. 제1야전군의 전력은 비약적으로 강화되어 병력이 4개 병단 35개 사단 약 40만명에 달했다. 하지만 이들이 타이위안에서 시안까지 오려면 적어도 한달의 시간이 필요했으나 펑더화이는 기다리지 않고 5월 3일 공격을 시작했다. 제1병단과 제2병단 산하 제6군이 남쪽의 후쭝난을 공격하고 제2병단 산하 제4군이 서쪽의 마푸팡을 각각 공격했다. 후쭝난은 시안을 버리고 서남쪽으로 후퇴했다. 5월 20일 제6군이 웨이허를 건너 시안을 점령하는 한편, 후퇴하는 후쭝난 군의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로 인해 전선이 길어지고 각 부대의 간격이 벌어지면서 측면이 노출되었다.

후쭝난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푸팡, 마홍규가 지휘하는 마가군의 지원을 받아 30개 사단 20만명으로 반격했다. 센양 주변에서 6월 9일부터 14일까지 격전이 벌어졌다. 펑더화이는 후쭝난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셴양과 시안으로 후퇴했다. 또한 서진 중이던 제18병단과 제19병단에게 행군 속도를 높이라고 재촉했다. 마가군이 셴양을 포위하고 맹렬하게 공격했지만 기병이 주력인 그들로서는 쉽사리 셴양의 두꺼운 성벽을 넘어 성내로 돌입할 수 없었다. 11일에 선두부대인 제60군과 제61군이 시안에 도착하고 이어서 제18병단, 제19병단 주력부대가 차례로 도착하면서 쌍방의 균형은 단숨에 공산군에게 기울었다.

​결국 6월 16일 후쭝난은 시안 탈환을 포기하고 후퇴 명령을 내렸다. 국민정부군의 손실은 4만명에 달한 반면, 공산군은 1만2천여명에 불과했다. 또한 공산군은 룽하이 철도를 완전히 장악함으로서 시안에 병력과 물자를 원하는대로 실어나를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압도적 우위로 주도권을 쥐게 된 펑더화이는 사령부를 셴양으로 옮기는 한편, 산시성에서 신장성에 이르는 광대한 서북 전토를 단숨에 장악할 생각으로 후쭝난과 마가군의 추격에 나섰다. 후쭝난군은 시안 남쪽에, 마가군은 간쑤성과 산시성 경계로 퇴각하면서 양군은 완전히 둘로 쪼개졌다. 후쭝난은 펑더화이의 공격을 피해 주력부대를 간쑤성으로 퇴각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펑더화이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제19병단이 서쪽으로 진격하여 마푸팡을 견제하면서 제18병단 산하 제61군이 시안 남쪽의 쯔우전(子午镇)으로 남하했다. 또한 제2병단을 비롯한 제1야전군 주력은 7월 11일 치수이하(漆水河)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웨이허 주변에 배치된 후쭝난의 제18병단 3개군(제38군, 제65군, 제119군)이 완전히 포위되었다.

7월 12일부터 14일까지 공산군 제1병단과 제2병단의 포위 공격으로 제18병단은 완전히 전멸하고 말았다. 또한 바오지(寶鷄)를 점령하여 후쭝난과 마가군의 연결을 끊고 후쭝난의 서쪽 퇴로를 차단했다. 6월말부터 7월 중순까지 한달 동안 벌어진 이른바 "관중회전"에서 국민정부군의 손실은 후쭝난 제18병단과 마푸팡의 1개군 등 4만4천명에 달했으며 공산군은 야포 180문, 기관총 960정, 말 1500필을 노획하였다. 공산군의 손실은 전사자, 부상자 합해 4,700여명에 불과했다. 엄청난 타격을 입은 후쭝난은 고작 10만 여명의 잔존부대를 이끌고 산시성에서 쫓겨나 쓰촨성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8월이 되자 화남의 대부분이 중공의 손에 떨어지는 등, 공산군은 파죽지세로 휩쓸고 있었다. 경쟁자들의 성공을 보면서 펑더화이 역시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는 남쪽으로 달아난 후쭝난을 추격하는 대신, "금년 안에 서북을 해방시키겠다"고 공언하면서 계속 서진하였다. 다음 목표는 간쑤성의 성도 란저우(蘭州)였다. 서북군정장관과 부장관으로 각각 임명된 마푸팡과 마홍규는 칭하이성과 닝샤성으로 후퇴한 후 런산허(任山河)에서 톈수이(天水)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곳은 높은 산맥과 골짜기가 첩첩이 이어져 지형이 매우 험준하고 길은 좁아 천험의 요지였다. 마푸팡은 제82군과 제129군 및 2개 기병사단, 지방 보안대 등 4개 사단 및 1개 여단, 2개 기병 여단 약 5만명을 란저우 주변의 요충지에 배치하였다. 또한 런산허 일에는 제81군과 제91군, 제120군 8개 사단 3만명이 배치되었고 톈수이 주변에는 2개 기병 여단 등 2만명이 있었다.

펑더화이는 제18병단 산하 제62군을 시안과 바오지에 주둔시켜 후쭝난의 반격에 대비하고 제1야전군 주력을 총동원하여 란저우 공략에 나섰다. 그는 마푸팡과 마훙규를 둘로 분단시킨 다음 마푸팡을 먼저 격파한 후 마훙규를 격파할 생각이었다. ​제19병단 산하 제64군이 마훙규를 견제하면서 제1병단은 시낭으로, 제2병단과 제19병단이 천수를 거쳐 란저우로 진격했다. 8월 1일 제64군이 폭우와 지형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런산허의 관문인 싼꽌커우(三關口)를 공격해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마훙규는 방어를 포기하고 닝샤성으로 후퇴했다. 이로 인해 마푸팡의 측면이 비게 되었다. 퇴로를 위협받은 마푸팡은 모든 병력을 란저우에 집결시켰다. 그는 항복을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싸울 생각이었다.

​공산군은 3로로 나누어 란저우 공략에 나섰다. 제19병단이 북쪽에서, 제2병단이 중앙에서, 제1병단 산하 제62군이 남쪽에서 란저우를 향해 포위망을 좁혀갔다. 산악지대에서 마가군 기병들이 지형지물을 활용한 유격전을 펼치며 거세게 저항을 했지만 펑더화이의 대군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8월 19일 란저우가 삼면에서 포위당했다. 펑더화이는 4개군(제4군, 제6군, 제63군, 제65군) 9개 사단으로 란저우 외곽의 거점들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압도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공격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해발 1,500m의 험준한 산속에 위치한 란저우는 3개의 요해지로 보호받고 있었다. 남쪽에는 윈판링(營盤嶺)이, 동쪽에는 마쨔샨(馬家山)이, 서쪽에는 천쨔링(沈家岭)이 란저우를 둘러싸고 있어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도시였다. 따라서 공산군은 제65군만 800여명이 전사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물러나야 했다.

펑더화이는 일단 공격을 중단한 후 전열을 재정비하고 25일 재차 총공격에 나섰다. 맹렬한 사격 포격을 퍼붓고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였다.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마가군도 마도(馬刀)를 휘두르며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진지가 하나씩 점령되면서 점점 뒤로 밀려났다. 특히 혈전이 벌어진 곳은 천쨔링으로 제4군 제11사단은 새벽 5시부터 오후 5시까지 12시간에 걸친 전투에서 마가군의 최정예부대인 제190사단을 상대로 4천여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며 간신히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 란저우에서 공산군의 포로가 된 마가군 병사들 

25일 밤이 되자 란저우 외곽의 모든 방어선이 무너졌다. 마가군의 패잔병들은 흩어져 탈출하거나 투항하였다. 마푸팡은 서쪽의 시닝으로 탈출했다. 26일 아침 란저우 전역이 공산군의 손에 넘어갔다. 란저우에서 마가군의 손실은 사상자 1만3천명에 1만 4천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공산군은 전사자만 8천700명이 넘었고 2만 7천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었다. 공산군은 쉬지 않고 여세를 몰아 시닝으로 진격했다. 마푸팡은 27일 시닝을 버리고 충칭으로 탈출했지만 장제스가 그에게 서북으로 돌아가 계속 싸울 것을 명령하자 반발하여 소수의 측근만 데리고 사우디 아라비아로 망명하였다. 9월 6일 시닝에 남은 마가군은 항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닝샤성의 마훙규 밖에 없었다. 그는 3개군(제11군, 제81군, 제128군) 9개 사단과 1개 기병사단 등 7만명으로 닝샤성을 방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푸팡이 괴멸하고 후쭝난의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제19병단 3개군(제63군, 제64군, 제65군) 10만명이 북상해 오자 싸울 의지가 있을 리 없었다. 9월 1일 마훙규는 사촌인 마훙빈에게 군대를 맡기고 충칭으로 달아났다. 9월 16일 제81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북 독립 제2군으로 개편되어 총부리를 돌렸다.

9월 19일부터 21일까지 닝샤성의 성도인 인촨 남쪽의 칭퉁샤(青铜峡)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제19병단은 마가군 제11군과 제128군을 전멸시켰다. 공산군이 인촨으로 진군하자 마훙빈은 항복했다. 그는 닝샤성 부주석과 간쑤성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등 고위직을 역임하며 1960년 10월에 사망했다. 9월 23일 펑더화이는 인촨에 입성함으로서 닝샤성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또한 9월 25일에는 우루무치에서 신장성 주석 부르한(Burhan Shehidi)과 경비총사령 타오즈웨가 장즈중의 항복 권고를 받아들여 "기의(起義)"를 선언하였고 공산군은 10월 말까지 신장성 전역을 무혈 장악하였다. 반항적이거나 분리 독립을 꾀하는 위구르족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모조리 체포되어 처단되었다. 이로서 펑더화이는 서북을 완전히 평정하였다.

내전도 이제 막바지였다. 중국 대륙에서 장제스에게 남은 것은 쓰촨성과 윈난성 밖에 없었다. 중공은 최후의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