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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국공내전史] 장제스 타이완으로 향하다 - 10. 대륙을 떠나며 /blog.naver.com/atena


덩샤오핑과 저우언라이는 서남 전역을 시작하기 전부터 루원후이, 루한, 덩시후이 등 서남 군벌들을 포섭하기 위해 집요하게 시도하였다. 이들은 오래 전부터 서남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는 장제스와 반목하였다. 물론 장제스도 서남 군벌들을 믿지 않지 않았지만, 이들과 중공은 서로 원한이 깊다. 그동안 봉건적인 서남 군벌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잔혹하게 살해하였다. 설마하니 이제와서 해묵은 감정을 버리고 손을 잡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장제스의 크나큰 오판이었다. 이미 벼랑 끝으로 내몰린 상황에서 살길을 찾아 중공으로 갈아타지 않는다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루원후이의 장남 류위안완(劉元彦)은 이미 중공에 포섭되어 아버지에게 중공으로 투항할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서남군정 부장관 판원화(潘文華)는 이전부터 저우언라이와 친분이 있었고 홍콩으로 망명한 롱윈 역시 루한의 반란을 부추겼다.

물론 장제스의 위세가 여전했다면 감히 배반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겠지만, 몰락을 눈앞에 둔 그와 운명을 같이 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더욱이 저우언라이는 "과거의 죄는 묻지 않는다"라고 장담하였다. 이는 중공에 순응한다면 지위와 재산, 목숨을 보장하겠다는 의미였다. 군벌에게는 이념이나 의리 따위보다 이쪽이 훨씬 중요했다. 저우언라이는 류원후이에게 편지를 보내어 "서두르지 말고 적당한 ​기회를 보아 기의할 것"을 지시하였다. 공산군이 서남을 침입하면 때에 맞추어 결정적인 순간에 반란을 일으키라는 의미였다. 

구사일생으로 충칭을 탈출하여 청두로 도망쳐 온 장제스는 서남에서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서남 군벌을 등 뒤에 두고 싸울 수 없다는 후쭝난의 말에 찬동하면서도 그들과 협력하지 않으면 서남을 지켜낼 수 없다며 다독였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장제스가 아니었기에 류원후이와 덩시후이, 판원화, 제20병단장 천커페이(陣克非)를 불러 말하였다. "너희들의 가족을 안전한 타이완으로 보내줄테니 협조하라" 한마디로 인질을 내놓으라는 말이었다. 게다가 청두의 수비대를 장제스 직계부대로 교체한다는 소식도 이들을 자극하였다.

12월 7일 장제스는 정부를 타이페이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 날 밤 마오런펑이 지휘하는 장제스 직속의 특무대가 수감 중이던 민주동맹 쓰촨성지부장 양보카이(楊伯愷) 등 36명의 정치범을 끌어내어 청두 교외에서 총살하였다. 이들은 쓰촨성에서 활동하던 중공 지하조직원과 민주당파(중공과 국민당 어느 쪽도 속하지 않는 중도파 정치세력으로 주로 상공인과 문화, 교육계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인사들이었다. 이른바 "청두 12교 사건(成都十二桥惨案)"이었다. 광기 어린 분위기로 청두의 민심은 흉흉하였다. 공산군은 북쪽과 남쪽, 동쪽에서 쓰촨성을 밀고 들어오고 있었고 국민정부 관료들은 홍콩과 타이완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서로 잡아타는 판이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더는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한 루한과 루원후이는 결행을 결심하였다.

12월 9일 밤, 시캉성 주석 루원후이, 윈난성 주석 루한, 서남군정 부장관 판원화와 덩시후이 등이 연명으로 "베이징의 마오 주석과 주더 총사령관 및 전국 인민에게 보내는 성명"이라며 중공으로의 귀순을 선언하였다. 그날 루한을 감시할 목적으로 쿤밍으로 날아왔던 서남군정장관 장췐과 제8군장 리미(李彌), 제26군장 위청완(余程萬)은 체포되었다. 육군중앙군관학교의 관사에 묵고 있던 장제스는 보고를 듣고 아연실색했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이 그 자리에 올려주었기에 배신감과 분노는 더욱 컸다. 이로서 장제스는 결전은 커녕 청두에도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었다.


​장제스는 관사를 떠나기 전 후쭝난과 지휘관들, 군관학교 학생들에게 고별식을 했다. "삼민주의, 우리 당의 근본..." 그는 아들 장징궈와 함께 비통한 목소리로 중화민국 국가를 불렀다. 다음날 아침 청두 북쪽 교외의 펑황산(鳳凰山) 비행장으로 향했다. 길은 멀지 않았지만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 길목에 루원후이 휘하의 제24군 1개 연대가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한과 롱윈은 루원후이에게 비밀전보를 보내어 장제스를 습격하여 포로로 잡아 "일등공신"이 되리고 했다. 시안사변을 청두에서 재현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비가 철통같은데다 청두에 주둔한 쓰촨군 부대들이 호응하지 않아 실패하였다. 그 사이에 후쭝난은 전차와 군대를 보내어 루원후이 부대를 단숨에 쓸어버렸다.

12월 10일 오후 2시 장제스는 후쭝난에게 고별인사를 한 후 장징궈와 참모총장 구주퉁과 함께 전용기에 올랐다. 그가 대륙을 밟아보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날로부터 정확히 13년 전에 장제스는 시안의 사령부에서 산베이(陝北)에 고립되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중공에 대한 최후의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틀 뒤에 일어난 시안사건이 없었다면 중공이라는 존재는 중국에서 완전히 소멸했을 것이었다. 한번 품은 원한은 절대 잊지 않는 성격인 장제스는 시안사건의 음모자였던 양후청과 그 가족을 3개월 전인 9월 17일 충칭 교외에서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총살시켰다. 또 한 명의 음모자인 장쉐량은 죽이지 않았다. 그는 1946년 11월에 이미 타이완으로 이송된 채 철저한 감시 속에 갖혀 있었다. 죽을 때까지 그곳에 가두어 둔 채 산송장마냥 놔둘 생각이었다.

장제스를 태운 비행기는 안개가 자욱한 청두를 한바퀴 선회한 후 저녁 6시 30분 타이완 쑹산 비행장에 도착했다. 타이완에 자리 잡은 그는 25년 뒤 1975년 4월 5일 심장마비로 죽는 순간까지 대륙으로 돌아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지만, 끝까지 그 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장제스가 떠났다고 해서 서남 전역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청두와 쓰촨성, 윈난성 대부분은 여전히 국민정부의 손아귀에 있었고 후쭝난이 지휘하는 20만명의 병력이 건재하였다. 장제스는 반란군에 대한 응징을 명령했다. 장췐과 함께 체포되었던 리미가 탈출한 후 직접 선두에 서서 쿤밍을 몰아쳤다. 상황이 다급하자 루한은 공격을 중지하는 대신 장췐과 위청한을 석방할 것을 제안했다. 리미 역시 뒤에서 공산군이 몰려오는 상황이었기에 쿤밍 공격에나 전념할 겨를이 없었다. 12일 장췐과 위청한은 풀려났다. 장췐은 홍콩을 거쳐 타이완으로 달아났고 리미와 위청한은 병력을 수습해 남쪽으로 퇴각하였다.

구이저우성을 거쳐 쓰촨성 남부를 침공한 공산군 제2야전군 제5병단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후쭝난은 급히 다바산맥과 친링산맥에 배치된 3개 병단을 남쪽으로 철수시켰다. 하지만 북쪽의 방비가 약해지자 제1야전군 제18병단이 일제히 친링산맥을 건넜다. 12월 11일 제60군이 멘현(勉县)을, 제61군이 한중을, 제62군이 룽난(武都)을 점령했다. 같은 날 남쪽에서는 제22병단 사령관 제72군장 궈루구이(郭汝塊)가 청두 동남쪽의 요충지 이빈(宜宾)에서 기의를 선언하여 중공에 투항했다. 이로 인해 청두의 방어선 한쪽에 큰 구멍이 뚫렸다.

▲ 험준한 다바산맥을 건너고 있는 공산군 병사들  


14일에는 공산군 제60군이 광위안(广元)을 거쳐 쓰촨성의 관문이자 젠먼관(劍門關)을 공격했다. 이른바 "천하의 요충지"라고 불리며 주변이 깎아지른 협곡으로 둘러싸여 새도 넘기 힘들다는 천험의 요새였다. 이곳을 놓고 국민정부군 제55사단 1천명과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압도적인 전력으로 밀고 들어오는 공산군을 상대로 국민정부군은 물러나지 않고 사흘동안 저항했으나 결국 18일 오후 함락되어 500명이 전사하고 3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로서 청두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남쪽에서는 ​제5병단이 루저우와 이빈을 거쳐 16일에는 러산을 점령한 후 러산 서쪽에서 다두허 강(大渡河)을 건너 후퇴하고 있던 쑹시리옌의 제14병단 잔여병력 1만여명을 괴멸시켰다. 쑹시리옌은 미처 달아나지 못한 채 포로가 되었다. 또한 동쪽에서는 제3병단이 서진하여 20일 젠양(简阳)과 다이(大邑)를 점령했다. 청두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21일 장제스는 후쭝난에게 포위망을 돌파하여 시캉성과 윈난성으로 후퇴하라고 지시했다. 다음날 후쭝난은 제5병단은 시창(西昌)으로, 제7병단은 구위저우성으로, 제18병단은 윈난성으로 각각 탈출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제15병단과 제20병단은 양동작전으로 충칭을 공격하는 척 한다음 방향을 돌려 구이저우성 비제(毕节)로 퇴각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예하부대를 버마로 탈출시킬 생각이었다. 그는 지휘권을 제5병단 사령관 이원(李文)에게 넘기고 비행기를 타고 시창으로 향했다. 하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비행기는 방향을 잃고 하이난 다오(海南島)의 싼야(三亞) 비행장에 불시착했다.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후쭝난이 자신의 명령에 불복하고 멋대로 적전도주했다며 격분하였다. 그리고 하이난 다오로 구주퉁을 급히 보내어 죄를 묻도록 했다. 물론 성급한 판단이었지만 그 정도로 장제스는 극도의 편집증과 신경과민에 시달리고 있었다. 구주퉁은 후쭝난의 성품을 알기에 솔직하게 얘기하고 후쭝난에게 시창으로 돌아가서 서남의 병력을 수습하라고 말했다.
 

후쭝난은 28일에 다시 비행기를 타고 시창으로 갔지만, 그 동안 지휘계통이 마비되면서 전황은 절망적이었다. 공산군에게 포위되어 도처에서 퇴로가 차단된 부대들은 투항하였다. 21일 더양(德阳) 서쪽에서 제16병단이 공산군에게 투항하였다. 24일에는 러우광원의 제15병단과 천커페이(陣克非)의 제20병단이 투항했고 다음날에는  페이창후이(裴昌会)의 제7병단이 투항했다. 27일에는 청두 동쪽의 징탄(金堂)에서 제20군과 제127군이 투항했다. 제5병단은 이안(雅安)으로 철수하는 도중에 공산군 제3병단 산하 제12군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고 이원은 포로가 되었다.

▲ 청두에 입성한 공산군. 이로서 사실상 4년에 걸친 국공내전의 종지부를 찍었고 장제스의 20년 통치도 허망하게 막을 내렸다.

27일 청두 수비를 맡고 있던 제18병단 사령관 리전(李振)은 공산군의 투항 요청을 받아들여 수비대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하였다. 그 날 오후 공산군 제18병단 제5군의 선두부대가 무혈 입성하면서 청두는 함락되었다. 쓰촨성 주석 왕링지(王陵基)는 변장하여 도주하다가 공산군에게 체포되었다. 후쭝난은 시창에서 전군이 괴멸했다는 보고를 듣고 목놓아 울었다. 그는 잔존병력을 모아서 끝까지 싸웠으나 결국 1950년 3월 27일 시창이 함락되면서 타이완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시캉성과 쓰촨성 남부에서 국민정부군 잔존부대에 대한 소탕전은 4월 말까지 계속 되었다.

한편, 윈난성에는 리미의 제8군과 위청완의 제26군 등 약 6만명 정도의 병력이 남아 있었다. 리미와 위청완은 타이완으로 날아가 장제스에게 하이난다오로 철수를 건의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리미를 윈난성 주석으로, 위청완을 윈난수정공처 주임으로 각각 임명하여 누장 강(怒江)을 건너 버마 국경의 산악지대로 후퇴한 후 계속 싸울 것을 지시하였다. 울창한 밀림에다 해발 2천m가 넘는 험준한 산악과 협곡이 연이어 펼쳐져 있는 오지였다. 버마전역에서 일본은 1개 사단만으로 중국군 15개 사단을 근 1년 가까이 저지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1월 20일 윈난성 남쪽의 위안장 강(元江)에서 공산군 제4병단의 추격을 받아 양군은 완전히 괴멸하였다. 리미는 하이난다오를 거쳐 타이완으로, 위청완은 홍콩으로 도망쳤다. 버마와 베트남, 라오스 국경의 삼각지대로 도주한 병력은 제8군 제237사단 700여명과 제26군 제93사단 600여명 등 1천5백여명 남짓에 불과했다. 하지만 버마의 국경수비대에 의해 버마 진입에 차단되면서 이들은 국경지대에 머물며 고립되었다. 장제스는 리미를 다시 보내어 "윈난방공구국군"을 결성하고 미국 CIA의 지원을 받아 무기와 증원병력까지 보내어 한때 1만명까지 늘어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리미는 쿤밍 탈환을 외치며 윈난성 남부를 침공하였고 4개 현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공산군의 반격을 받아 단숨에 격퇴당했다. 

장제스는 이들 잔여부대를 계속 남겨 윈난성에서 유격전을 펼치며 대륙 회복의 첨병으로 쓰기를 원했으나 이들은 더 이상 싸울 의사도 없었고 보급은 끊긴데다 중국과 버마군의 토벌에 시달렸다. 게다가 리미는 싸움보다 아편 재배에만 열을 올리며 자신의 "독립왕국"을 만들자 분개한 장제스는 즉시 그를 타이완으로 소환하였다. 유엔에서도 결의를 통해 이들의 철수를 압박하자 결국 1950년대 중순 대부분 타이완으로 철수하였다. 소수만이 잔류한 채 몇개의 자립촌을 만들어 아편을 재배하면서 여지껏 남아 그들의 후손은 무려 6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 중의 한명이 골든 트라이앵글을 40년이 넘도록 지배했던 마약왕 쿤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