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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국공내전史] 장제스 타이완으로 향하다 - 12. 하이난다오를 빼앗기다 /blog.naver.com/atena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한지 수개월. 마오쩌둥의 신정권은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과거 장제스는 북벌전쟁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두어 베이징을 비롯한 중국 전토를 통일했지만 그 이후에도 수년 간 정권은 안정되지 못한 채 혼전의 연속이었다. 이는 장제스 정권이 여러 군벌들이 뭉친 연합정권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제스는 여러 군벌들 중에서 조금 더 강했을 뿐 다른 군벌들을 완전히 억누를 힘이 없었다. 따라서 그가 추진하는 중앙화에 반발하는 군벌들의 격렬한 저항에 끝없이 직면해야 했다. 게다가 일본의 거듭된 침략에 직면하면서 역량은 분산되었고, 장제스는 정권을 개혁하고 내부를 다질 겨를이 없었다.

반면, 마오쩌둥은 그와 같은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정권 역시 다양한 계파가 이합집산으로 뭉쳤다는 점에서는 장제스 정권과 태생적인 유사성이 있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내전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반대파들을 모조리 숙청하거나 권력의 핵심에서 밀어내고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결속력을 갖춘 정권을 만들어냈다. 8년에 걸친 일본과의 전쟁은 그에게 권력을 장악하고 힘을 비축할 시간적인 여유를 주었다. 지리적으로 험준한 산베이의 산속에 위치한 옌안은 일본의 공격에서 비켜나 있었고 게다가 충칭처럼 타락하지도 않았다. 장제스의 노회한 군벌들과 국민당 관료들과는 달리, 젊고 활기있는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신념을 가지고 당의 명령을 우직하게 따랐다. 바로 이 점이 장제스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마오쩌둥은 장제스와의 승부에 종지부를 찍는데 결코 조급하게 굴지 않았다. 그의 과제는 취약한 정권의 안정과 국민의 지지를 확보하는데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소위 "신민주주의(新民主主義)"를 내세웠다. 신민주주의란 1939년 12월 마오쩌둥이 직접 작성하고 발표한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에서 "중국의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부르조와 민주주의 혁명이며 우리는 이를 신민주주의 혁명이라고 불러야 한다"라고 한데서 나온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 혁명의 과도적인 단계로서 모든 계급을 망라하는 통일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온건 노선이었다. 투쟁 대상을 소수의 대지주와 대자본가로 국한시키되 기존 질서를 지탱하고 있던 지주와 자본가를 투쟁 대상이 아닌 연합의 대상으로 규정하여 이들의 반발을 최소화하고 공산당의 새로운 질서를 수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의 유화정책은 그동안 내전을 관망하던 중립파 인사들은 물론, 장제스 정권에 가담하고 있던 정치가, 관료들까지도 장제스에게 등을 돌리고 자발적으로 중공 정권에 참여하도록 만들었다.

경제적으로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여 자본가들이 생산 활동을 그대로 유지토록 하면서 인구의 80%가 종사하는 농촌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토지 개혁을 추진하였다. 중일전쟁 중에는 해방구에서 지주들의 반발을 최소화할 목적으로 그들의 토지 소유권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대신 "감조감식(減租減息)"이라 하여 소작료와 이자 감면이라는 온건적인 정책을 시행했던 중공은 1946년 5월 4일 이른바 《감조감식문제와 토지문제 청산에 관한 지시》를 발표하여 그동안 미뤄두었던 지주 타도와 토지 몰수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내전 승리 직후인 1950년 6월 30일에는 《중화 인민 공화국 토지 개혁법》을 선언하여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슬로건으로 소수의 부농과 지주들이 독점하고 있던 토지는 모두 몰수되어 빈농과 소작농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었다. 착취를 일삼던 악질 지주는 대중에 의해 처벌받았다. 이 과정에서 부농과 빈농의 구분이 모호했기에 억울한 사람들이 악질 지주로 몰려 마녀 사냥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자 당 중앙이 "투쟁의 대상을 오해하고 있다"며 직접 개입하기도 했다. 토지 재분배는 농민들의 생산성을 자극하여 1952년의 곡물 생산량은 1949년 대비 무려 1.5배나 늘어났다.

또한 국공내전 말기의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재정 적자도 어느 정도 해결하여 한국전쟁 참전 직전인 1950년 3분기에는 재정 균형 상태를 회복하였다. 생산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통화 팽창과 투기 자본을 억제하면서 물가는 안정되었고 경제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1949년부터 1952년까지 연평균 GDP 증가율은 약 20%에 달했다. 공산당의 통치를 피해 홍콩으로 달아났던 기업가들도 대륙으로 돌아와 투자를 재개하였다. 이는 심각한 재정난과 경제 불황으로 미국의 원조에만 매달려야 했던 타이완과는 대조되었다.

군사적으로는 여전히 전국 각지에서 준동하고 있던 국민정부군의 잔당을 소탕했다.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도주한 뒤에도 약 100만명에 달하던 국민정부군이 대륙에 흩어져 있었지만 빠르게 소멸하였다. 소수만이 티베트와 베트남, 태국, 버마, 라오스 등지로 도주할  수 있었다. 공산군은 이들을 추격해 북베트남 경내까지 진군하여 프랑스군과 충돌하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던 호치민의 베트민과 북한 정권을 후원하는 등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오랜 기간 혼란스러웠던 중국은 중공의 통치 아래 짧은 시간내에 안정을 누리게 되었다.

▲ 태국으로 도망친 뒤, 태국군의 용병이 된 국민정부군 병사들. 태국 북부에서 내전이 벌어지자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남의 나라 내전에 참전해야 했고 수백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러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마오쩌둥식 개혁의 한계이다. 중공이 짧은 기간에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내고 농촌에서 강력한 동원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은 바로 토지 개혁의 성공에 있었다. 같은 시기 장제스 정권 역시 농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소수에게 토지가 집중된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토지법과 지세 조례 등 관련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는 등 나름대로 토지 개혁을 추진하였다. 장제스 정권의 토지 개혁은 쑨원의 평균지권사상(平均地權思想)과 서구식 토지 단일과세론에 기반했는데, 누구나 공평하게 토지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다. 중공과의 차이점은 국가 권력을 앞세워 강압적인 방법으로 강제 몰수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토지 소유량에 제한을 두어 초과분을 국가가 정한 표준 지가 금액으로 정부가 구입하고, 지가에 의거해 과세를 부과하여 지주들이 스스로 토지를 환매토록 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확보한 공유지는 소작농들에게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또한 수확량의 70~80%이상을 납부하던 과도한 소작료를 37.5%로 제한하여 소작농들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장제스 정권은 법과 제도를 통해 국가 폭력이 뒤따르지 않고 합리적이면서 점진적인 방법을 추구했으나, 당장 현실의 부조리함에 불만을 품고 있던 농민들로서는 그들의 입맛에 맞는 쪽은 중공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중공은 농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강압적인 토지 개혁을 추진했지만 애초에 왜 토지가 소수에게 독점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간과하였다. 바로 개개인마다 생산력에서 차이가 있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토지 소유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무상으로 분배해도 생산력이 우수한 ​소수가 그렇지 않은 다수에게 잉여 재산으로 새로운 토지를 구입한다. 따라서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일정 기간마다 토지 몰수를 반복한다면 그것대로 불만을 초래하고 농민들의 생산 의욕을 떨어뜨린다.

실상 중공의 토지 개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중국 5천년 역사에서 왕조 교체기나 농민 봉기 때마다 반복된 포퓰리즘적인 구호를 그대로 답습한 것에 불과했다. 마오쩌둥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개혁의 폐단이 드러나자 자신이 제창한 신민주주의를 스스로 부정하고 류사오치, 덩샤오핑, 천이 등 사유 재산과 시장 경제를 옹호하는 온건파를 "우파"라고 매도하여 지도부를 분열시켰다. 또한 대규모 집단 농장인 인민공사(人民公社)를 창설하여 아예 농민들로부터 모든 토지와 우마, 농기구 등 생산수단을 강제로 몰수하고 공동 소유, 공동 분배를 실시하였다. 농민들은 "이제 겨우 품었는데 따뜻해지기도 전에 빼앗아간다"며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총칼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반면, 대륙에서 실현되지 못한 장제스 정권의 토지개혁은 타이완에서 제대로 자리잡았다.

▲ 1950년대 중반부터 마오쩌둥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시작된 인민공사 캠페인. 농민들이 스스로 토지를 국가에 반납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에 저항하는 농민들을 가차없이 처단했다. 마오쩌둥의 이중성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마오쩌둥 사후인 1981년에야 중국 정부는 "대표적인 마오쩌둥식 노선의 오류"라며 실패를 인정했다. 지금도 중국 정부는 개인끼리의 토지 거래를 인정하지 안되, 농토를 소유한 농촌집체(인민공사를 대신하는 집단농장)들과 결탁해 저가로 구매한 후 개발자들에게 고가에 팔아 막대한 차액을 얻고 있다. 반면, 농민들은 농토에서 강제로 쫓겨나 도시의 가난한 농민공으로 전락하면서 중국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마오쩌둥의 사회주의식 노선을 신민주주의의 후퇴라며 부주석 쑹칭링을 비롯해 당내의 반발이 거세자 마오쩌둥은 1951년 말부터 "삼반, 오반운동(三反五反運動)"이라는 정치 투쟁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부패, 관료주의, 낭비를 척결하여 당을 깨끗이 한다는 이 운동은 실상 문화대혁명의 전초나 다름없는 것으로, 자신의 노선에 철저하게 복종하지 않는 정치가와 관료들을 우파라고 몰아 반대파의 입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는 모든 조직에서 5%는 무조건 숙청해야 한다는 가이드 라인을 내려보냈다. 당과 정부의 하급 직원들과 기업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상사를 마녀 사냥대 위에 올려놓고 집단 린치와 인격적 모욕감을 주는 등 비판을 퍼부었다. 수십만명이 처분을 받고 수천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일단 사냥에 걸려들면 누구도 빠져 나갈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기업은 국가의 손에 넘어갔고 한때 "중국 자산계급의 황금기"라 불리던 번영은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중국 경제는 도리어 후퇴하였다.

​마오쩌둥이 궁극적으로 추구한 목표는 중국식 사회주의 혁명과 부국강병이었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을 마무리하고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군수산업 중심의 거대한 공업화가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주도하는 강력한 권력을 필요로 하였다. 다만 내전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 중공의 기반이 취약했기에 과도기적인 측면에서 신민주주의를 내걸었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필요에 따른 "전술적 후퇴"였다. 충분히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되자 비로소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누구도 마오쩌둥의 지도력에 도전할 수 없게 되면서 집단지도체제는 사라지고 마오쩌둥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했다. 이전에 장제스가 했던 것 이상의 철권 통치를 시작한 그는 교묘한 대중운동으로 국민들을 억압하였다. 농민들은 한국전쟁과 공업화를 위해 엄청난 수탈을 감내해야 했다. 대다수 중국 민중은 새로운 시대를 기대했지만 그들에게 좋았던 시절은 고작 수개월에 불과했다. 이는 뒷날의 일이다.

1950년 3월 공산군의 하이난다오 침공이 시작되었다. 광둥성 레이저우 반도 남단에 위치한 하이난다오는 타이완보다 조금 작은 3만4300㎢의 면적에, 아열대 기후로 "중국의 하와이"라고 불린다. 하이난다오에는 광둥성과 광시성에서 후퇴한 보충시와 쉐웨의 잔존병력 5개군(제4군, 제32군, 제62군, 제63군, 제64군) 19개 사단 10만명과 항공기 40대, 제2함대 산하 대소함정 50여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항공기와 군함 태반은 가동 불능 상태였고 수비대 역시 패잔병과 경찰, 자경대가 뒤섞여 있어 전투력이 형편없었다.

하이난다오 공략의 임무는 제4야전군 제12병단 제40군과 제15병단 제43군에게 주어졌고 광둥군구 부사령관 겸 제15병단 사령관 덩화(鄧華)가 총지휘를 맡았다. 그는 만주와 화북전선에서 활약했던 역전의 맹장으로 전술적인 역량이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수개월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펑더화이 휘하에서 지원군 부사령관을 맡아 유엔군에 대한 대공세를 기획 실행했고 정전회담이 시작되자 중국군 대표로 참석하였다. 하지만 펑더화이와 가까웠다는 이유로 문혁이 시작되자 홍위병들에게 우파로 몰려 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마오쩌둥이 죽고 4인방이 몰락한 뒤에야 복권되었지만 정신적 육체적 상처는 지우지 못한 채 몇년 뒤 죽는다.

공산군의 하이난다오 공격은 이미 1950년 연초부터 산발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공산군은 소대, 중대 규모로 야음을 틈타 상륙을 시도했다. 태반은 하이난다오 주변을 순찰하는 국민정부군 해군에게 걸려 전멸을 면치 못했지만 일부는 경계를 뚫고 해안가에 상륙하는데 성공했다. 이들은 내륙의 산악지대로 침투하여 게릴라전을 수행하였다. 국민정부군도 군함과 전투기를 동원해 레이저우 반도와 광저우 일대를 폭격했다. 또한 다수의 선박을 격침시키고 침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상륙을 완전히 저지할 수 없었다. 3월 5일부터는 수백척의 선박을 동원해 웨이저우다오(潿洲島)를 비롯해 레이저우 반도와 하이난다오 주변의 국민정부군의 손에 있는 여러 섬에 상륙하여 하나씩 장악했다. 주변 거점들을 모두 내주면서 하이난다오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덩화는 한달간의 전초작전에서 이전에 참담한 실패로 끝난 진먼다오 전투와는 달리 국민정부군의 전의가 매우 빈약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정면에서 강력한 공세로 밀어붙어 단숨에 하이난다오를 공략하기로 하였다. 또한 공산군은 하이난다오 침공에 앞서 여러 섬에 상륙작전을 실시함으로서 작전 경험을 쌓았으며 대부대를 상륙시키는데 충분한 선박도 확보하였다. 이 모두 진먼다오에서 뼈저리게 깨달았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4월 16일 공산군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저녁 7시 30분, 상륙 제1진으로 제40군과 제43군 휘하 8개 연대 2만5천명이 400여척의 목선에 나눠타고 레이저우 반도를 출발하였다. 하이난다오의 수비를 맡은 쉐웨 역시 북벌전쟁 이래 풍부한 경험을 갖춘 명장으로, 중일전쟁 중에는 창사에서 일본군을 3번이나 격퇴하여 "창사의 호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제3함대로 하여금 하이난다오 주변 해역을 철저하게 감시토록 하고 해안가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17일 새벽 국민정부군 함정들이 공산군의 대규모 선단을 발견했다. 군함들이 포문을 열고 불을 뿜자 선단 주변에 다수의 물기둥이 치솟고 여러척이 포탄에 맞아 침몰했다. 공산군도 반격했다. 철제 군함이 아닌 낡은 목선이라 속도와 방어력은 빈약하지만 대전차포와 박격포 등을 탑재하여 화력은 만만치 않았다. 예상치 못한 강력한 반격을 받은 국민정부군 함정들은 혼란에 빠졌고 제3함대 사령관 왕언화(王恩華)는 일단 물러날 것을 명령했다. 공산군은 여세를 몰아 새벽 3시 하이난 정북쪽의 린가오쨔오(臨高角)에 상륙했다. 해안을 방어하고 있던 국민정부군의 포화는 맹렬했다. 공중에서는 전투기들을 날아와 기총 소사를 가했다. 공산군도 고사포와 박격포로 반격하면서 뭍으로 뛰어들어 방어 진지를 향해 돌격했다.

▲ 린가오쨔오의 해안가로 돌격하는 공산군 병사들.

날이 밝자 국민정부군 해군도 다시 포격을 가하며 해안가로 접근했다. 왕언화의 기함 타이핑(太平號)은 제2차세계대전 중 건조되어 국공내전 중 미국으로부터 공여받은 호위 구축함으로 배수량 1,150톤에 최고 속도 20노트, 75mm 주포 3문, 40mm 부포 4문, 20mm 기관포 12문 등을 탑재하였다. 군함으로서는 크다고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작은 어선과 거룻배 따위에 몸을 실고 있던 공산군 병사들의 눈에는 그야말로 거대한 산처럼 엄청난 위압감으로 다가왔다. 공산군의 목선 따위는 부딪쳐 부수겠다는 태세였다. 그러나 공산군은 하나같이 백전연마의 병사들이었고 국민정부군 군함들이 포격을 해도 가만히 기다렸다. 이들이 가까이 접근하자 공산군은 비로소 포문을 열고 포격을 가했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국민정부군 군함들은 여러발의 명중탄을 맞았다. 기함 타이핑도 피탄되어 왕언화가 중상을 입자 지휘체계가 무너져 퇴각하였다.

 

​새벽 6시 공산군은 해안가를 수비하던 국민정부군 제64군 2개 연대를 격퇴하고 린가오쨔오를 완전히 점령하면서 교두보를 마련했다. 이어서 공산군 제118사단이 내륙으로 진격해 메이타이(美臺)에서 국민정부군 제64군 제156사단과 격전을 벌여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19일에는 제43군 제127사단이 위바오 항(玉包港)에 상륙하였고 다음날 푸산(福山)에 돌입하여 국민정부군 제62군을 격파했다. 쉐웨는 메이타이 남쪽의 메이팅(美亭)에 제62군 주력과 제32군 1개 연대, 교도사단 등​을 집결시켜 전투기의 엄호 아래 메이타이 탈환에 나섰다. 하지만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막대한 손실만 입고 격퇴당했다. 22일 공산군은 메이팅을 포위하여 점령하였고 23일 아침에는 하이난다오 최대의 도시인 하이커우(海口)를 점령했다.

​공산군은 해안가에 여러곳의 교두보를 마련하고 제해권을 확보하였다. 또한 증원군을 계속 투입하여 최대 10만명으로 늘어나 국민정부군을 점차 압도해 나갔다. 4월 22일 장제스의 하이난다오 포기 명령이 내려졌다. 쉐웨는 예하 부대를 4개로 나뉘어 섬을 버리고 탈출하라고 지시한 다음 제일 먼저 비행기를 타고 타이완으로 도주했다. 국민정부군이 철수를 시작하자 공산군은 둘로 갈라져 추격했다. 제43군은 섬의 서쪽으로 진격하여 27일 제127사단과 제129사단이 바이사(白沙)를 점령하고 5월 1일 국민정부군 제4군 286사단을 괴멸시키고 섬 서쪽끝에 있는 베이리(北黎)를 점령했다. 또한 제40군은 남쪽으로 진격하여 국민정부군 방어선을 돌파했다. 30일에는 제119사단과 제128사단이 섬 남단의 위린(榆林)과 싼야(三亞)를 점령했다. 5월 1일 국민정부군 잔존부대가 항복하면서 하이난다오 전역이 공산군의 손에 들어갔다.

 

2주 동안의 전투에서 공산군의 손실은 고작 4500여명 정도인 반면, 국민정부군의 손실은 전사, 부상, 포로 등 3만 3천명에 달했다. 또한 전투기 2대와 군함 1척을 잃었고 야포 115문을 노획당했다. 장제스로서는 참담한 패전이었다. 그는 쉐웨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지휘권을 박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