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시성에서 참패하여 관중을 잃은 후쭝난은 잔존 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그는 펑더화이가 추격해 올 것을 우려했지만 다행히도 방향을 서북으로 돌려 마가군의 토벌에 나섰다. 덕분에 후쭝난은 잠깐이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는 한중(漢中) 난정(南鄭)에 사령부를 설치하여 공산군의 쓰촨 침공을 막을 참이었다.
산시성과 쓰촨성의 경계에 있는 한중은 쓰촨의 관문으로 교통의 요지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 위로는 친링산맥이, 남동쪽은 다바산맥(大巴山脈)과 접하였다. 사방이 해발 2천m가 넘는 험준한 산맥이 한중 분지를 둘러싸고 있어 예로부터 "촉도난(蜀道難)"이라고 불릴 만큼 교통이 험난하였다. 항우에게 쫓긴 유방이 이곳에서 힘을 비축한 후 중원으로 나와 천하를 얻었으며 삼국지에서는 제갈량과 사마의가 대치하면서 몇차례나 지략 대결을 펼쳤던 곳이다. 당나라 말기에는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 현종이 이곳으로 들어와 난을 피하기도 했다.
특히 시안과 한중을 연결하는 통로인 검각(劍閣)은 험준하기가 이를 때 없어 산벼랑에 판자를 선반처럼 연결하여 간신히 인마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내었을 만큼 험준하기로 이름났다. 촉을 침공한 종회의 10만 대군은 검각에서 강유의 저지에 부딪쳐 한발짝도 전진할 수 없었고 그 사이 수천여명의 별동대를 이끌고 샛길로 넘어간 등애가 단숨에 성도를 장악함으로서 촉나라를 멸망시켰다. 1935년 촨산공로(川陝公路)가 개통될 때까지 산시성에서 쓰촨성으로 들어오려면 오직 이곳을 통과해야 했다.
후쭝난은 병력을 재편하고 신병을 모아 3개 병단 30만명의 대군을 재건하였다. 이 중 제5병단을 북쪽의 친링산맥을 따라, 제7병단은 동쪽의 다바산맥에, 제18병단은 서쪽의 룽난(朧南, 간쑤성과 쓰촨성, 산시성의 접경에 있는 요충지로 간쑤성에서 쓰촨으로 들어오는 관문이기도 하다)에 각각 배치하였다. 또한 어시(鄂西, 후베이성 서부) 방면에는 후베이성 이창(宜昌)-사시(沙市)의 방어에 실패하여 철수한 쑹시리옌(宋希濂)의 제14병단 10만명이 있었다.
화중 초비 부사령관 겸 촨샹어(川湘鄂, 각각 쓰촨성과 후난성, 후베이성을 가리킴) 수정공처 주임을 맡고 있던 쑹시리옌은 첸쳉, 후쭝난, 두위밍과 같은 황푸 군관학교 1기생으로 장제스의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북벌전쟁 이래 수많은 전쟁에서 전공을 쌓았으며, 중일전쟁 중에는 쑹후항전과 난징 방어전, 서주회전 등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1944년에는 스틸웰이 버마 탈환에 나서자 제11집단군을 지휘하여 버마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는 누장 강(怒江)을 건너 일본군 제56사단을 격파하고 북부 버마를 탈환하면서 미국 정부로부터 미국 자유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 미국 대통령이 수여하는 최고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그리고 쓰촨성에는 서남군정장관 장췬(張群)과 쓰촨군벌 양썬(楊森), 덩시후이(鄧錫侯) 등이 있었고, 윈난성에는 루한(盧漢)이, 구이저우 성에는 구정런(谷正倫), 시캉성(西康省, 1939년부터 1955년까지 있었던 옛 성으로 진사 강(金沙江)을 경계로 티베트 남서쪽과 쓰촨성 서부지역을 포괄하였다. 1932년 쓰촨군벌 류원후이가 티베트군을 격파하고 점령하였다. 1955년에 폐지되어 동쪽은 티베트 자치구에, 서쪽은 쓰촨성에 편입되었다.)에는 류원후이(劉文輝)가 각각 있었다. 병력은 모두 합하여 15만명 정도였다. 이것이 대륙에 마지막으로 남은 국민정부군의 전부였다.
8월 29일 장제스가 광저우를 거쳐 충칭으로 날아왔다. 그는 서남 5성(쓰촨성, 윈난성, 구이저우성, 광시성, 시캉성)을 지키며 권토중래한다는 생각이었다. 특히 쓰촨성은 인구가 많고 토지가 비옥하며 사방이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공격은 어렵고 지키기는 쉬운 곳이었다. 또한 중일전쟁 중에 건설한 대규모 군수산업도 있었다. 비록 중원을 모두 잃었지만 서남만 수중에 있다면 타이완과 동남 연해에 배치된 병력과 함께 양면에서 협공하여 전세를 뒤엎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 아직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서남군정장관공서에서 열린 회의에서 후쭝난과 쑹시리옌은 상황이 매우 비관적임을 지적하면서 충칭-청두 방어선을 지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공산군 제2, 제4야전군이 보충시를 격파하고 양호(후베이성, 후난성)의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양광(광시성, 광둥성)마저 위태로운 판에, 만약 공산군이 남북에서 공격해 들어온다면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후쭝난은 "예로부터 쓰촨은 앉아서 지킬 수 없는 곳"이라면서 촨베이(쓰촨성 북부)를 포기하고 시창(西昌, 쓰촨성 동남부에 있는 도시)을 근거지로 삼아 촨시(쓰촨성 서부)와 촨남(쓰촨성 남부)으로 퇴각한 후 지연전을 펼치며 주력부대를 보존한 채 지형이 험준한 시캉성과 구이저우-윈난-버마 국경지대로 물러나 최후 방어선을 구축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에는 티베트와 버마로 들어가 싸운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에 격분한 장제스가 소리쳤다. "너희들은 나를 배신하고 서남을 공비들에게 거저 바치려는 속셈이냐!" 그동안 믿었던 심복들이 연이어 배반하여 중공 진영으로 넘어가면서 장제스의 편집증과 조울증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어이 없는 말에 후쭝난은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다시 장제스를 달래며 쓰촨군벌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기에 이들을 배후에 두고 싸우다가 언제 등에 비수를 꽂을지 모른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충칭과 청두에 남아 공산군과 싸우게 하고 주력부대는 뒤로 물러날 것을 다시 간청하였다.
하지만 장제스는 서남은 인력과 물자가 풍부하기에 절대 포기할 수 없으며, 이곳을 반드시 지켜야 장래에 중원을 되찾을 수 있다며 반대했다. 또한 쓰촨군벌들이 이익에 밝고 그동안 배신을 밥먹듯 해 왔지만, 공산군과는 오랜 원한이 있기에 결코 양립할 수 없으니 서남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쨌든 이들과 손을 잡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대는 이곳에서 6개월만 버텨라! 그러면 반드시 국제 정세가 바뀌어 미국이 무력 개입할 것이다."
하지만 백전노장인 후쭝난이 보기에는 한낱 허황된 낙관론과 막연한 기대일 뿐이었다. 이미 손을 끊은 미국이 이제와서 뭐하러 군대를 보낸단 말인가. 게다가 지휘관들은 하나같이 패배주의에 빠져 있는데다 지킬 병력도 무기도 부족했다. 하지만 이미 두뇌가 흐려져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상실한 장제스에게는 뭐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나의 30만 군대는 이 곳에서 뼈를 묻겠구나" 그는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보며 홀로 탄식했다.
장제스는 펑더화이의 제1야전군이 친링산맥을 넘어 촨산공로를 따라 쓰촨성을 침공하리라 판단하고, 한중에서 결전할 생각으로 주력부대를 친링산맥과 검문관, 다바산맥에 걸쳐 배치토록 하였다. 또한 황푸1군관학교 4기생인 러우광원(羅廣文)의 제108군과 쓰촨군벌 양썬의 제20군을 증원하여 방어선을 보강하였다. 이 때문에 막상 남쪽의 방어선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더욱이 장제스의 방어계획은 이미 공산군에게 모조리 새어나갔다. 바로 장춴의 참모장이었던 리우쭝꽌(劉宗寬)이 공산당의 첩자였던 것이다. 그는 황푸군관학교 3기생으로 서북군벌 양후청의 참모를 지냈으며 시안사변 이후 장제스의 휘하에 들어와 제38군 참모장과 잠편 제15사단장을 역임하였다.
시안사변 이전부터 저우언라이와 친분이 있었던 그는 국공합작 이후에도 중공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고 1943년에는 친공단체인 이른바 "중화민족해방행동위원회(中華民族解放行動委員會, 현재의 중국농공민주당으로 중국내 공산당 어용 정치단체인 민주8파 중의 하나)"에 몰래 가입하였다. 그는 서남의 방위 태세와 병력 배치 등 각종 군사 기밀과 공산군이 어디를 공격하고 어디를 통해 진군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까지 빠짐없이 류보청의 제2야전군 사령부로 보냈다. 류보청은 그에 대해 "서남 해방의 일등공신"이라고 칭찬했을 만큼, 서남전역에서 공산군이 손쉽게 승리하는데는 그의 공헌이 결정적이었다.
사실 국공합작 이후 국민정부군 지휘부 내에는 중공에 포섭된 첩자들이 곳곳에 있었고 바로 이들의 존재가 장제스가 패배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사전에 철저한 숙군을 하지 않은 채 내부의 적을 두고 내전을 시작한 것이 장제스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 내전 이후 리우쭝꽌은 류보청 휘하에서 서남군구 고급참의와 서남인민감찰위원회(西南人民監察委員會) 위원 등 고위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티벳 침공에도 참전하여 현지 선무와 정치 공작 등을 맡았다.
9월 22일 장제스는 충칭을 출발해 광저우로 돌아가던 중 쿤밍을 예고없이 방문하였다. 윈난성 주석 루한의 동태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약 20년 동안 윈난성을 통치하면서 "윈난왕"으로 불리었던 전 주석 롱윈(龍雲)은 중일전쟁 내내 장제스의 동맹자로서 협력했지만 윈난성 통치를 놓고 장제스와 대립하면서 중공에 접근하였다. 격분한 장제스는 결국 1945년 10월 두위밍을 시켜 쿤밍을 기습 점령하고 롱윈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롱윈의 오랜 심복이자 의형제였던 루한을 그 자리에 앉혔다.
장제스는 루한이 충성을 다하리라 생각했지만 1948년 12월 홍콩으로 탈출한 롱윈은 루한과 연락하여 중공측으로 넘어올 것을 거듭 설득하였다. 전세는 점점 기울어지는 상황에서 루한은 장제스와 마오쩌둥 중 어느 진영에 설지를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한이 반란을 일으키고 윈난성 독립을 선포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장제스는 그를 군사회의 참석을 명목으로 충칭으로 올 것을 명령했다. 루한은 병을 핑계로 버티다가 마지못해 충칭으로 갔다. 옌시산은 장제스에게 즉각 그를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장제스는 거절하고 쿤밍으로 돌려보냈다.
장제스가 쿤밍을 방문하려고 하자 장징궈가 루한의 속내를 믿을 수 없어 "스스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며 반대했지만 장제스의 뜻을 꺾지 못했다. 하지만 장징궈의 예상대로 루한은 이미 중공과 내통하여 장제스를 배신할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를 의심 많은 장제스가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루한을 가차없이 차단하지 않은 것은 절박한 상황에서 그의 협조가 절실했기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장제스의 모순적인 성격 탓도 있었다. 그는 성미가 급하고 난폭하면서도 막상 잔혹하거나 모질지 못한 면이 있었다. 사람을 완전히 믿지도 못하면서 믿으려고 하고, 또한 믿으려고 하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장제스의 타고난 성품이었다. 곁에 있는 사람을 쓰지 않고 쓰지 않는 사람을 내치지 않는다. 어찌 불만이 나오지 않겠는가. 이것이 장제스의 가장 큰 단점이었다.
루한은 쿤밍 비행장까지 직접 나가 환대하였다. 장제스는 루한과 식사를 한 후 서남의 방어에 대해 논의한 후 곧 떠났다. 롱윈이 비밀리에 장제스를 체포할 것을 루한에게 지시했지만 루한은 포기했다. 윈난성에는 루한의 직계 2개군(제74군, 제93군) 외에 중앙에서 파견된 2개군(제8군, 제26군)이 있었다. 공산군은 멀리 있는데다 자기 실력만으로 중앙군을 제압할 자신이 없었기에 감히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장제스는 아무 일 없이 광저우로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리는 전보는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펑더화이가 닝샤성의 성도 인촨을 점령한데다 신강성에서는 타오쉬유어가 투항하였다. 이로서 서북 전역이 중공의 손에 들어갔다.
10월 27일 푸젠성 진먼다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모처럼 국민정부군이 그야말로 대승리를 거두었다. 약 1만 여명의 공산군 상륙부대는 문자 그대로 전멸했다. 승리는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동안 적만 보면 도망치거나 무기를 들고 항복하기 급급했던 국민정부군이었지만 진먼다오에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불굴의 의지로 싸웠고 승리를 일구어냈다. 며칠 뒤 진먼다오를 방문한 장징궈는 참혹한 전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현장을 보면서 "대단한 감동을 받았다"라고 일기에 썼다. 만약 국민정부군이 이런 승리를 좀 더 빨리 해냈다면 중원의 승패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진먼다오의 승리는 이미 기울대로 기운 전쟁을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서남지구에 대한 최후 공세를 결정한 마오쩌둥과 주더는 리우쭝꽌이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성동격서(聲東擊西, 삼십육계에 나오는 말로 동쪽을 치는 듯 하여 적을 속인 다음 서쪽을 공격한다는 뜻)"의 전략을 쓰기로 했다. 제1야전군 제18병단이 친링산맥에서 후쭝난의 주력부대를 공격하여 국민정부군의 관심을 이쪽으로 쏠리게 하는 한편, 광동성에 주둔한 제2야전군 제4병단이 동남쪽에서, 또한 후난성에 주둔한 제2야전군 제3병단, 제5병단과 제4야전군 제49군이 동쪽에서 각각 구이저우성을 거쳐 쓰촨성 남부를 침공함으로서 퇴로를 차단하고 남북으로 포위 섬멸한다는 계획이었다. 서남전역의 통일된 지휘를 위해 10월 13일 후난성 창더(常德)에 중공중앙 서남국(西南局)을 창설하고 덩샤오핑과 류보청, 허룽(賀龍)을 각각 제1, 2, 3 서기로 임명하였다.
공격은 11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 제2야전군 제3병단과 제4야전군 제49군은 충칭 동쪽의 유양(酉阳)에서 쑹시리옌의 제14병단과 천커페이(陣克非)의 제20병단을 삼면에서 공격하여 대파했다. 국민정부군의 손실은 전사 3만명에 포로가 7만명에 달하여 괴멸이나 다름없었다. 쑹시리옌은 소수의 잔존병력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도망쳤고 천커페이는 우장 강(乌江)을 건너 구이저우 성으로 달아났다. 공산군은 촨어공로(쓰촨성-후베이성을 연결하는 도로)와 촨샹공로(쓰촨성-후난성을 연결하는 도로)를 따라 충칭으로 진격했다. 또한 제2야전군 제4병단과 제5병단이 구이저우성을 침공하여 11월 14일 성도 구이양을 점령했다. 21일에는 쭌이가 함락되었다. 구이저우 성 주석 구정런은 쿤밍을 거쳐 홍콩으로 달아났다. 사기가 하늘을 찌르며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공산군에게 험준한 지형이나 병참의 곤란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 쓰촨성을 향해 진격 중인 공산군
상황이 급박하자 장제스는 다시 타이완에서 충칭으로 날아왔다. 10월 14일 광저우가 함락되면서 충칭이 다시 임시수도가 되었지만 이미 패닉 상태였고 공산군이 코앞까지 진격해 오면서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그는 급히 후쭝난군을 비롯해 모든 병력에 대해 청두로 후퇴를 지시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명령이었다. 남쪽에서 공산군은 맹렬한 기세로 북상하여 국민정부군의 방어선을 엉망진창으로 만들면서 도처에서 격파되거나 투항하는 판이었다. 11월 24일에는 후쭝난의 제1군이 충칭으로 쇄도하는 공산군 제2야전군 제3병단 제11군을 일시적으로 저지하고 큰 피해를 입혔으나 그 정도로는 어림없었다.
11월 29일 장제스는 관료들과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충칭 포기를 선언하였다. 공산군은 이미 충칭 교외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그날 밤 10시 그는 측근들과 함께 충칭 비행장으로 향했다. 시가지는 대혼란이었다. 사방이 차로 막히고 폭도들이 약탈하였다. 그는 차를 버리고 직접 걸어서 시가지를 빠져나와 지프로 갈아탄 다음 비행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음날 새벽 6시 장제스의 전용기 "메이링호"가 이륙했다. 30분 뒤 공산군 선두부대가 충칭에 들어왔다. 충칭으로 후퇴하던 제1군은 퇴로가 차단당하여 섬멸당하고 말았다. 충칭 위수 사령관 양썬은 청두로 도망쳤다. 이로서 중일전쟁 당시 장제스가 7년 동안 임시수도로 삼아 일본의 침공에 맞서 싸웠던 충칭은 공산군의 손에 넘어갔다. 같은 시간 광시성에서도 참패하여 보충시는 얼마 안되는 잔존병력만 데리고 하이난 섬으로 후퇴했다.
후쭝난은 장제스에게 재차 잔존병력을 윈난성과 시캉성으로 철수한 후 다시 베트남과 미얀마로 후퇴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무조건 청두를 사수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는 직접 지휘봉을 들고 병력을 청두 주변에 배치하여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였다. 병력은 7개 병단 약 30만명이었다. 하지만 이미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동남쪽에서는 충칭을 점령한 제2야전군 제3병단이, 북쪽에서는 제1야전군 제18병단이, 남쪽에서는 제2야전군 제5병단이 점점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다.
게다가 더욱 장제스의 허를 찌른 사건이 일어났다. 12월 9일 밤, 윈난성 주석 루한과 시캉성 주석 류원후이, 서남군정 부장관 덩시허우 등 쓰촨과 윈난의 군벌들이 일제히 '기의'를 선언하여 중공에 귀순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