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난다오의 함락은 장제스는 물론이고, 미국과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50년 1월 대륙에 남은 마지막 거점이었던 시창이 함락되자 쉐웨는 장제스에게 공산군이 본격적으로 하이난다오를 공격한다면 끝까지 지켜낼 도리가 없다며 하이난다오를 스스로 포기하고 모든 전력을 타이완에 집중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대륙 반공(反攻)을 고집하던 장제스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이난다오는 타이완과 맞먹을 만큼 면적이 넓고 군사적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힘이 있을 때의 얘기였다. 타이완을 지킬 병력조차 부족한 형편에, 수백km나 떨어져 있는 하이난다오에 증원할 병력은 없었다. 결국 장제스가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그럴 역량이 없다면 한낱 힘의 분산이요,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나 고립되었다고 해도 하이난다오를 고작 보름만에 빼앗긴 이유는 무엇인가. 수비군은 숫적으로 침공군보다 결코 열세하지 않았고 해공군은 월등히 우세했다. 그럼에도 패배한 이유는 첫째로 여러 잡다한 부대가 뒤섞여 있어 지휘계통이 문란했고, 둘째로 사전에 공산군 부대가 하이난다오에 침투하여 곳곳에서 유격전을 벌임으로서 국민정부군의 역량이 분산될 수 밖에 없었다는 점, 셋째로 중일전쟁 당시 하이난다오의 태반이 신4군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에 주민들 중에는 이른바 "제5열", 즉 공산군에 동조하는 세력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장제스는 끝까지 "사수"를 고수하는 대신, 전군이 괴멸하기 전에 신속하게 철퇴령을 내려 수비부대의 반수 이상을 탈출시킨 것이 유일한 성과였다. 6만명이 넘는 철수 병력은 대부분 무기와 장비를 그대로 지닌 채 타이완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즉각 타이완 방어에 투입되었다.
하이난다오는 타이완, 저우산 열도와 함께 장제스 측에게 남은 마지막 거점이었다. 1949년 12월 장제스가 청두에서 탈출하여 타이완으로 온 이래, 비록 대륙은 빼앗겼지만 국민정부군이 장악하고 있던 도서연안은 그럭저럭 지켜내면서 숨돌릴 시간을 벌고 있었다. 1949년 10월 24일부터 27일까지 진먼다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국민정부군은 그 직후인 11월 3일 저우산열도에 있는 덩부다오(登步島)에서도 승리하였다. 공산군 제21군 제61사단 1만여명이 상륙을 시도하자 국민정부군 제67군(제67사단, 제75사단)과 제87군(제221사단) 8천여명의 수비대가 사흘에 걸친 전투 끝에 괴멸시켰다. 공산군은 5천여명이 전사하고 1천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국민정부군의 사상자는 약 3천3백여명 정도였다. 또한 1949년 말부터 시작된 하이난다오에 대한 공산군의 수차례에 걸친 공격 역시 매번 국민정부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격퇴당했다.
장제스는 국민정부군이 우세한 해공군력으로 하늘과 바다를 지키는 이상 막강한 "바다의 만리장성"은 유지될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하지만 하이난다오가 함락되면서 장제스가 자랑하던 해상 만리장성도 일각이 무너졌다. 분명한 사실은 공산군의 실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250km의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 타이완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장제스로서는 발등에 불 떨어진 셈이었다. 또한 하이난다오의 함락은 미국과 필리핀 등 태평양 연안의 국가들에게도 중대한 안보적 위협이었다. 이제 중공은 인도차이나와 남중국해로 마음놓고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5월 17일에는 저우산 열도가 공산군의 손에 넘어갔다. 항저우만 입구에 위치한 저우산 열도는 1,300여개의 크고 작은 섬과 3,300여개에 달하는 암초로 구성된 군도로, 육지 총면적은 1,440km²에 달한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섬이자 주도는 저우산다오(舟山島)이며 면적은 거제도의 1.2배 크기인 476km² 정도이다. 저우산 열도는 상하이와 항저우를 마주보고 있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였다. 그동안 국민정부군은 이곳에 군항과 비행장을 건설하고 13만명에 달하는 수비대와 해공군을 배치하여 상하이와 항저우를 봉쇄하고 수천여명의 유격대와 특무부대를 해안가에 침투시켰다.
특히 저우산 열도에서 출격한 전투기는 북으로는 산둥성, 서로는 장시성, 남으로는 푸젠성까지 작전 반경에 넣을 수 있어 수시로 난징과 상하이, 난창 등 동남 연해의 대도시와 군사 기지를 폭격하였다. 1949년 12월 6일 B-24 폭격기 2대가 난징을 폭격하여 4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1950년 1월 8일 B-24 폭격기 8대가 상하이를 폭격하여 사상자 60여명에 200여채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2월 6일에는 B-24 17대가 상해를 대대적으로 폭격하여 1400여명이 죽거나 다치고 발전시설이 대파되는 등 3월 말까지 국민정부군은 저우산 열도를 반격의 거점으로 삼아 압도적인 공군력을 활용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변변한 공군력이 없던 중공으로서는 그야말로 눈의 가시였다.
하지만 하이난다오가 함락되면서 국민정부군의 사기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5월 초부터 저우산 열도를 놓고 쌍방의 격렬한 포격전이 반복되고 상하이에서 다수의 선박과 군수품이 집결하는 등 공산군의 대규모 상륙 준비가 포착되었다. 게다가 중공의 요청을 받은 스탈린이 1950년 3월 말에 1개 항공 사단을 상하이에 배치하자 공중 우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숙련된 소련인 파일럿이 조종하는 최신예 미그-15 제트 전투기는 P-40, F-51 전투기, B-24 폭격기와 같은 국민정부군의 구식 프로펠러 항공기를 간단하게 유린하였다. 또한 소련은 대량의 고사포와 항공기 외에도, 수백여명의 파일럿과 교관, 정비 기술사를 파견하여 중공이 공군을 육성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로 인해 국민정부군은 더이상 폭격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고 오히려 저우산 열도가 폭격당하는 것을 우려해야 하는 입장에 놓였다.
장징궈는 직접 비행기를 타고 저우산다오로 날아가 수비대를 격려하고 방비 태세를 점검하기도 했지만 결국 5월 11일 장제스는 참모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저우산열도의 포기와 전면 철수를 명령했다. 중공이 본격적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제공권과 제해권마저 점차 넘어가고 있는 이상, 저우산 열도를 사수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5월 13일부터 16일 밤까지 12만 5천여명의 수비대와 주민 1만 3천여명 등 약 15만명이 수송선을 타고 타이완으로 철수하였다. 다음날 공산군은 제21군과 제22군, 제23군을 즉각 저우산다오를 상륙시켜 무혈 접수하였다.
▲ 저우산 열도에서 철수 중인 국민정부군과 섬 주민들
저우산 군도에 이어 국민정부군은 완산군도(萬山群島)에서도 패퇴하였다. 주장 강(珠江) 하구에 위치한 완산군도는 마카오와 홍콩, 광저우의 입구에 해당하며 약 15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민정부군에게는 남중국해에 마지막으로 남은 거점이었다. 수비대는 육전대 제2여단 제4연대와 지식청년군 제208사단 1개 대대 등 약 3천여명 정도였으며, 하이난다오에서 중상을 입은 왕언화를 대신해 치지훙(齐鸿章)이 지휘하는 해군 제3함대가 주변 해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하이난다오를 점령한 린뱌오는 제44군에 완산군도 공략을 명령했다. 쭝산현(中山县, 마카오 북쪽에 있는 현)에 주둔하고 있던 제131사단과 1개 포병연대 등 1만여명 정도였다. 주목할 점은 공산군이 내전 이래 처음으로 정규 편제된 해군을 동원했다는 사실이었다. 국공내전 과정에서 해군의 중요성을 인식한 중공은 1948년 말부터 각 야전군 산하에 4개의 해군 지대(동북해군, 화북해군, 화동해군, 화남해군)를 창설하였다. 1950년 4월 14일에는 해군을 독립시키고 초대 해군 사령관에 샤오진광(萧劲光)을 임명하였다. 공산군은 국민정부군으로부터 노획한 소형 군함 180여척 외에 민간에서 징발하거나 마카오와 홍콩 등을 통해 구입한 무장 상선 등 200여척 등을 보유하였다. 하지만 하나같이 심각하게 노후된데다 부품도 결여되어 있었고 수병과 해군 기술자 또한 매우 부족하여 실제 작전 능력은 결여된 형편이었다.
하지만 린뱌오는 과감하게 광둥군구 산하 강방함대의 투입을 결정하였다. 주장 강의 경비를 맡은 강방함대는 1949년 12월에 창설되었고 300톤급의 보병상륙함 3척과 5척의 포정, 30톤급 상륙정 8척, 민간 어선을 개조한 수송선 8척 등 도합 24척의 선박과 육전대 1개 대대를 보유하였다. 모두 합해도 총톤수는 고작 1천톤을 조금 넘기는 수준이었다. 1200톤급 미국제 호위함 타이허(太和)를 비롯해 호위함 3척과, 4천톤급 전차 양륙함 쭝하이(中海), 어뢰정 3척 등 30여척의 대소군함을 보유한 국민정부군 제3함대와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5월 25일 새벽 2시. 공산군 강방함대는 1만명의 침공군을 실고 완산군도를 향해 출동하였다. 두시간 뒤, 완산군도 최북단에 위치한 니우터우다오(牛頭島) 인근에서 선두에 섰던 25톤급 포정 지에팡(解放)이 순찰 중이던 국민정부군 함대와 마주쳤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미처 적함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국민정부군 군함이 발광신호를 보내오자 지에팡은 즉각 포격을 시작했다. 이를 신호로 다른 군함들 역시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그야말로 기습을 당한 국민정부군 군함들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지에팡은 적 기함 타이허를 집중적으로 포격하여 함대 사령관 치지훙이 중상을 입었다. 지에팡 역시 쭝하이의 사격을 받아 대파되었다. 또한 공산군 포정 샨펑(先锋)이 국민정부군 포정 포25정(炮25艇)을 대파했다. 포25정은 정장이 전사하자 백기를 들어 투항하였다. 공산군의 기함인 385톤급 상륙함 구이산(桂山)은 난전 중에 여러 발의 포탄을 맞아 함장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방어선을 뚫고 라지위(垃圾尾, 지금의 구이산다오(桂山島))에 상륙하였다. 해안가로 올라온 승무원과 병사들은 수비군과 싸웠으나 100여명이 전사하고 150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1시간에 걸친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국민정부군은 전의를 상실한 채 무질서하게 퇴각하였다.

▲ 완산 해전을 묘사한 판화
5월 28일에는 타이완에서 제1함대가 완산군도로 출동했으나 공산군의 반격을 받아 재차 격퇴당하였다. 이후에도 6월 내내 몇 차례에 걸쳐 군함을 증원하여 치열한 해전을 벌였지만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공산군의 손실은 포정 1척과 소형 상륙함 1척이 대파되었을 뿐이지만, 국민정부군은 타이허를 비롯한 호위함 2척이 대파되고 포정 4척이 격침, 11척의 군함이 노획당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여러 척의 미국제 대형군함을 보유하고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가진 국민정부군 함대가 창설된지 얼마되지 않은데다 변변한 군함도 없는 공산군에게 참패한 이유는 상대를 얕본 것도 있지만 사기가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함장들부터 말단 수병까지 싸울 의지가 없었고 지휘체계는 경직되어 있었다. 따라서 사령관이 부상을 입자 그대로 전의를 상실한 채 도주해 버렸다. 우세한 전력을 가지고도 이럴 진데 중공이 본격적으로 소련으로부터 군함과 전투기, 기술자를 원조받아 해공군력을 강화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반면 미국의 원조가 끊어진 국민정부군은 더 이상 군함도 전투기도 확보할 도리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타이완 해협의 제해권조차 빼앗기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제해권을 확보한 공산군은 완산 군도의 여러 섬을 하나씩 장악해 나갔다. 많은 섬이 산재해 있는데다 고립된 수비대가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을 고집하면서 전투는 길어졌다. 하지만 8월 4일 완산 군도 최남단의 미아오완다오(庙湾島)와 베이잔다오(北尖島)마저 함락되면서 완산 군도는 장장 72일에 걸친 전투 끝에 공산군의 손에 넘어갔다.
하이난다오와 저우산 열도, 완산 군도마저 빼앗기면서 공산군의 타이완 공략은 최종 단계에 돌입하였다. 마쭈도와 진먼다오에 대한 공격도 임박하자 타이완은 전시총동원 체제에 돌입했다. 해외로의 도주는 엄중히 금지되었고 당국의 철저한 심사를 받은 사람만이 타이완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병사들과 주민들을 동원해 상륙 예상지점에 진지를 건설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장징궈의 총정치부는 "피로서 맹세하고 죽음으로서 충성하자"라는 구호를 전군에 전달하고 정치요원들을 배치하여 동태를 감시하였다. 심지어 일본의 자살특공대와 유사한 반공결사대까지 조직하였다.
그렇다고 해도 과연 타이완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을지는 장제스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었다. 6월 말에는 정찰을 통해 약 15만명의 병력과 다수의 군함과 목선들이 샤먼을 비롯한 푸젠성 연안에 집결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타이완 침공의 일차 부대였다. 공산군의 공격이 초일기에 들어가자 장제스는 이에 대비하는 한편, 비밀리에 특사를 베이징으로 보내어 '제3차 국공합작'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타이완은 그야말로 바람 위의 등불 신세였다. 그 와중에 상황을 급반전하는 사건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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