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의 입장에서 미 제7함대의 타이완 해협 진입은 그야말로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게다가 한동안 단절되었던 미국과 장제스 정권의 관계는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급진전하고 있었다. 7월 31일에는 맥아더가 타이완을 전격 방문하여 장제스와 회담을 가졌다. 또한 미 제7함대 사령관 아서 스트러블(Arthur Dewey Struble) 중장을 단장으로 하는 미국 조사단이 타이완군의 실태를 점검한 후 원조 방안을 본국에 제출하였다.
미국이 한국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고 장제스 정권과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한 지원을 시작하자 중공으로서는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월 국경에는 프랑스 식민지군 이외에도 약 10만명에 달하는 국민정부군 잔존 부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만약 미군이 이 지역에 들어와 프랑스와 국민정부군 3개 세력이 합한다면 적어도 20만명 이상의 대부대로 늘어나 중공에게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었다. 3개월 전 김일성이 베이징을 방문하여 남침계획을 알았을 때, 그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 것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대가를 비로소 치루게 된 것이다. 이유가 어떻든 풋내기에 불과한 김일성에게 마오쩌둥과 중공 지도부 전체가 휘둘린 격이 되었고 명백한 전략적 판단 미스였다.
덧붙여, 오늘날 중국 정부의 입장은 김일성의 남침 자체는 원칙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전쟁의 원인을 봐야지, 누가 먼저 총을 쏘았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면서 가장 큰 책임은 미국에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소위 "항미원조전쟁"으로 자신들이 "소총"과 "수류탄"만으로 강대한 미군을 꺾었다는 사실만 강조한다. 이는 실상 자신들도 자유롭지 못한 전쟁 책임을 교묘하게 덮기 위한 술수에 불과할 뿐이다.
트루먼이 한국전쟁 개입을 결의하고 미 제7함대가 타이완 해협에 진입한 다음날인, 6월 28일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8차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트루먼과 애치슨에 대해 "그들이 지난 1월에 중국에 영토적 야심이 없다고 했던 성명은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했다"며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동안 미국의 대중 화해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감추지 않았던 중공 지도부는 한국전쟁을 빌미로 가장 우려해 왔던 상황, 즉 미국의 중국 침략이 드디어 시작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 경로는 타이완과 베트남, 한반도가 될 것이며 이른바 "삼로향심우회(三勞向心迂回, 3방향에서 중국의 심장을 친다는 뜻)"의 전략을 취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 6월 28일에 열린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8차 회의에서의 마오쩌둥. 왼쪽은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주더, 오른쪽은 부주석 류사오치와 민주동맹계열인 장란(張瀾) 부주석.
7월 2일 마오쩌둥은 중앙정치국 서기처를 긴급 소집하였다. 저우언라이, 류사오치, 주더 등 공산당 최고 수뇌부 회의였다. 마오쩌둥은 "나는 이전부터 조선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미국이 개입하리라고 예상했다. 만약 미국의 간섭으로 조선인민군이 좌절할 경우를 대비해 조중 국경에 9개 사단을 배치하되, 미국이 38선을 넘지 않으면 그만두고 일단 38선을 넘으면 지원군의 형식으로 북한으로 넘어가 조선인민군과 힘을 합쳐 미국을 격퇴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미국의 북한 진입이 중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것으로 본다는 의미였다. 또한 유사시 한국전쟁에 개입할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주중 소련대사 로신을 만나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은 북한을 도울 것이며 소련 공군이 엄호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중공군은 주로 창장 이남에 집중되어 있었다. 1950년 5월 기존의 4개 야전군 체제를 대신해 전국을 6개 대군구(동북, 서북, 서남, 중남, 화동, 화북) 및 총사령부 직할부대(제20병단)로 개편하였다. 그 중에서 주력은 서남군구과 화동군구, 중남군구였다. 서남군구는 티벳 공격을 명령받았고 서북군구와 중남군구는 여전히 곳곳에서 준동하고 있는 국민정부군 잔당들과 토비를 토벌하고 있었다. 또한 화동군구는 타이완 침공을 준비하였다.
약 540만명에 달하는 중공군 중 서북군구가 60만명, 서남군구가 100만명, 중난군구가 150만명, 화동군구가 130만명에 달했다. 반면 수도 베이징을 비롯한 화북과 동북의 방위 태세는 매우 취약하였다. 중공에 가장 먼저 복속된데다 장제스 정권이 타이완으로 밀려가면서 이 지역에 대한 위협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제20병단 산하 3개군(제66군, 제67군, 제68군) 30만명이 베이징-톈진의 방위를 맡고, 화북군구(내몽골, 허베이성, 산시성)에는 약 40만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한국전쟁 직전에 와서야 제1야전군 산하 제19병단과 제4야전군 산하 제13병단 등 공산군 최강 부대라 할 수 있는 두 병단을 "국방전략예비대"로 지정하여 유사시 언제라도 위급 지역에 투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50년 6월 당시 동북에 배치된 병력은 제42군 이외에 지방군과 경비부대를 합해 22만 8천여명 정도였다. 지방군은 무장과 훈련 상태가 빈약한 2선급 부대인데다 유일한 기간부대인 제42군 역시 동원 해제되어 군사훈련 대신 생산활동에 투입되어 노동과 농업에 종사하였다. 도저히 북한에 투입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또한 중공은 1949년 12월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과 재정의 피폐함을 내세워 "타이완과 티벳을 해방시키고 국가 안보를 지킬 수 있는 선"에서 약 140만명에 달하는 대대적인 병력 감축과 함께 군대가 생산 활동에 종사할 것을 결정하였다. 한국전쟁의 발발에도 불구하고 1950년 6월 30일부터 "1950년 제대계획 결정"에 따라 군축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한반도에 미군이 증파되고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군의 편성과 유엔군 총사령관에 맥아더를 임명하자 마오쩌둥은 더이상 쉽사리 북한이 이기리라고 낙관할 수 없었다. 만약 상황이 악화된다면 동북은 더 이상 안전한 후방이 아니라 최전선이 될 판이었다. 발등의 불이 떨어진 중공으로서는 급히 병력의 전략적 재배치에 나섰다.
7월 7일 마오쩌둥은 당중앙정치국 회의에서 동북변방군의 창설과 유엔군의 38선 돌파시 출병한다는 방침을 처음으로 결정하였고, 제1차 중앙군사위원회 국방군사회의에서 구체적인 실무 계획인 "동북변방 보위에 관한 결정" 초안이 수립되어 마오쩌둥의 승인을 받았다. 주요 내용은 4개 군과 3개 포병사단을 동북으로 파견하고 제3야전군 부사령관인 쑤이(粟裕)를 동북변방군 사령관에, 해방군 총정치부 부주임 샤오화(蕭華)를 부사령관에 임명할 것, 후방 병참을 준비할 것, 병력 자원을 확보할 것, 인민들의 정치 동원을 전개할 것 등 동북의 방비를 강화하여 만약을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7월 13일 제2차 국방군사회의에서는 동북변방군의 창설과 이동계획이 결정되었다. 동북으로 이동할 부대는 위에서 언급한 "국방전략예비대" 중의 하나인 제4야전군 제13병단이었다. 제13병단은 총 3개 군(제38군, 제39군, 제40군) 12개 사단으로 편성되었고 병력은 15만9천명 정도였다. 제4야전군에서도 가장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훈련과 장비가 충실한 최강 부대였다. 원래 광둥군구에 배치되어 광둥성과 하이난다오, 중월 국경지대에 주둔하고 있다가 전략예비대로 지정되면서 한창 허난성으로 이동 중이었다.
또한 3개 포병사단(제1, 제2, 제8 포병사단, 각 사단인원수는 9천~1만명 정도)과 1개 기병연대, 1개 공병연대, 3개 수송연대, 4개 고사포 연대 등도 파견될 예정이었다. 여기에 동북에 주둔하고 있는 제42군도 제13병단 산하에 편입되어 동북변방군의 병력은 총 25만명에 달하였고 8월 말까지 배치가 완료되었다. 바로 이들이 마오쩌둥의 명령만 떨어지면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들어갈 부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중공의 타이완 침공이 당장 중단되거나 한반도에 개입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중공의 일차적 당면 과제는 타이완이었다. 동북의 병력 증강은 저우언라이의 "비이불용(備而不用, 준비하되 쓰지 않는다)"라는 말대로 만약을 대비하기 위함일 뿐이었다. 따라서 동북변방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지만 한국전쟁 출병을 탐탁게 여기지 않았던 쑤이는 그대로 화동군구에 남은 채 타이완 침공을 준비하였고, 동북행정위원회 주석 겸 동북군구 사령관인 가오강(高崗)이 임시로 동북변방군의 지휘를 맡았다. 제13병단의 상태도 형편없었는데, 급히 동북으로 가라는 명령받았지만 그동안 농사에 종사하느라 군마는 짐수레를 끌었고 무기는 녹이 슨데다 심지어 대포의 포신에는 새 둥지가 있는 형편이었다. 이들은 명령이 떨어지자말자 가족들과 변변한 송별조차 하지 못한 채 부랴부랴 열차에 탔고 8월 중순에야 조중 국경 일대에 집결할 수 있었다.
당시 마오쩌둥은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미국의 진짜 속내는 무엇인가. 장제스와 손을 잡고 중국 대륙의 회복에 나설 것인가. 하지만 중공의 뒤에는 소련이 있다. 미국이 중국의 동남연해를 공격한다면 중소동맹에 의거, 소련도 반드시 개입할 것이다. 미국이 쉽사리 이런 선택을 하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또한 타이완 침공 준비를 그대로 추진하면서 동시에 한국전쟁에 개입하는 것은 중공의 역량 밖이었다. 그렇다고 타이완 침공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중공 지도부는 명확한 입장을 결정하지 못한 채 일단 상황의 추이를 지켜본다는 식이었다.
중공으로서는 다행이었던 것이 미국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남침이 예상외로 순조로왔다는 점이었다.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540명으로 편성된 스미스 부대는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4사단의 압도적인 공격에 60명이 전사하고 82명이 포로 또는 실종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여지없이 격퇴당했다. 미 제24사단 본대 역시 19일부터 20일까지 벌어진 대전 방어전에서 참패하고 사단장 윌리엄 딘(William Frishe Dean) 소장이 포로가 되었다. 미군의 손실은 4천여명 중 1,150여명에 달한 반면, 북한군의 손실은 미미했다. 유엔군은 남한의 90%를 상실한 채 낙동강까지 단숨에 밀려나 최후의 방어선을 준비하고 있었다.
▲ 오산에서 포로가 된 미군 병사들.
상하이와 샤먼에는 대규모 침공부대가 집결하고 전초작전으로 6월부터 타이완의 관문인 진먼다오에 대한 포격과 소규모 침투작전이 반복되었다. 또한 저우언라이는 쑤이에게 저장성 연해 도서에서 활동 중인 국민정부군을 소탕할 것과 저우산 열도에 해군기지와 비행장을 건설하라고 지시하였다. 중국 인민해방군 건군일인 8월 1일 마오쩌둥은 "해방군의 임무는 타이완 해방"이라 선언하였고 주더 또한 "타이완을 반드시 해방시킬 것임"을 재차 강조하였다. 반면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을 반대한다"라는 원론적인 언급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런 중공의 입장은 8월 초에 접어들면서 바뀌었다. 첫번째 이유는 낙동강 전선이 교착상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북한군의 공세는 여전히 맹렬했지만 피해가 심각해진데다 유엔군의 전력이 급속히 증강되면서 상황이 점차 유엔군쪽으로 유리해지고 있었다. 만약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한다면 전세는 순식간에 뒤집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이 사실을 경고했지만 묵살되었다.
또 한가지는 타이완 공격이 현실적으로 여의치 않다는 점이었다. 하이난다오와 저우산 열도에서 국민정부군이 끝까지 싸우지 않고 쉽게 물러난 이유는 뒤에 타이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타이완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장제스는 끝까지 싸울 것이 틀림없었다. 타이완에는 약 60만명의 병력이 남아 있었다. 비록 태반이 신병이고 무기와 훈련상태도 빈약했지만 이들의 저항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었다. 타이완 해협에서 국민정부군 함대를 제압하고 수십만명의 병력과 군수품을 250km의 바다를 건너 타이완에 상륙시킨다는 것은 해공군이 빈약한 중공으로서는 이전의 그 어떤 작전보다 어려움이 컸다. 여기에다 미국이 어떻게 나올지도 의문이었다. 따라서 타이완 침공 준비는 적어도 수년은 걸릴 일이지, 구호마냥 2, 3달 안에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8월 4일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중앙정치국 회의가 열렸다. 마오쩌둥은 "조선을 도와야 한다. 반드시 도와야 한다. 만약 미 제국주의가 승리한다면 다음은 우리를 위협하고 도발할 것이다. 우리는 조선을 돕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발언하였다. 저우언라이 역시 "조선이 승리하려면 우리의 힘이 더해져야 한다. 우리가 가세한다면 국제적인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라며 한국전쟁 개입이 불가피함을 강조하였다. 한반도 출병이 우선순위에 놓이면서 자연스레 타이완 침공은 뒤로 밀리게 되었다. 8월 11일 중앙군사위원회는 쑤이에게 타이완 침공이 잠정적으로 보류되었으며 추후 상황을 보아 다시 결정할 것이라고 지시하였다.
이로서 마오쩌둥의 시선은 타이완에서 한반도로 옮겨졌다. 타이완에 대해서는 국민정부군의 반격에 대비해 동남 연안의 방비를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침공에서 수비로 방침을 바꾼 것이다. 또한 베트남의 상황도 유리해졌다. 보응우옌잡(Võ Nguyên Giáp)이 지휘하는 베트민 게릴라군은 중공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급속도로 키우며 베트남 북부 산악지대에서 점차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다. 반면, 프랑스군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9월 18일에는 베트민 2천여명이 중월 국경의 요충지인 동케(Đông Khê)를 공격해 점령하였다. 마오쩌둥은 북베트남에 파견된 중국 군사고문단의 보고를 통해 프랑스군은 베트민을 막기에도 급급하여 당장 중국 서남부를 위협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또 한가지 과제인 티벳 병합 역시 순조로왔다. 티벳 병합의 임무는 덩샤오핑의 서남국과 류보청(劉伯承)의 제2야전군이 맡았다. 1950년 1월 마오쩌둥이 "극복할 수 없는 곤란이 없는 한, 금년 5월에 티벳으로 진군하여 10월까지 해방하라" 라고 지시하자, 덩샤오핑은 티벳 정부에 대한 정치 공작과 함께 군사적 침공을 준비하였다. 1950년 3월부터 제14군과 제18군 선견부대가 진사강(金沙江)을 건너 남쪽과 동쪽에서 티벳 영내로 진격하였다. 티벳은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무원인데다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또한 주전론자와 주화론자로 분열되었고 끝까지 항전해 봐야 소용없다는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게다가 일부 귀족들은 이미 중공에 포섭되어 항복을 외치는 실정이었다.
티벳군은 1만7천여명에 불과했고 무기도 소량의 박격포와 영국제 브렌 경기관총, 구식 리-엔필드 소총을 보유했을 뿐이었다. 지휘관들은 봉건적인 세습제로 자리에 올랐을 뿐, 근대 군사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티벳 지도부는 티벳의 광대하고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장기전을 수행하는 대신, 요충지인 참도(昌都)에 주력부대를 집결시켜 결전을 감행할 생각이었다. 참도는 중국 국경과 가깝기에 이는 중공이 바라는 바였다. 결국 10월 5월부터 19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티벳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참도 총독 아페 아왕 직메(Ngapoi Ngawang Jigme)을 비롯한 6천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일부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덩샤오핑의 티벳 공격은 중공의 한국전쟁 참전에도 변함없이 진행되었다. 오히려 미국과 국제사회의 시선이 한국전쟁에 집중된 덕분에 아무런 장애물도 없었다. 결국 1951년 5월 23일 베이징에서 주더와 티벳 대표단, 판첸 라마 사이에 중국과 티벳의 관계를 규정하는 "17개조 협정"의 조인식이 열렸다. 이로서 티벳의 주권은 중국에게 완전히 넘어갔다.

▲ 1951년 10월 26일 라쌰에서 사열식을 거행하고 있는 중국군 제18군.
티벳은 아직 9천명 이상의 병력이 남아 있었지만 정부가 항복한 이상 저항할 생각은 없었다. 9월 9일 제52사단 선견대가 라쌰에 진입하였다. 10월 26일에는 장궈화(張國華)의 제18군 사령부가 라쌰에 들어왔다. 당, 정, 군 요원 합해 약 2만명에 달했다. 이로서 라쌰는 중국에 점령되었고 주권국으로서의 티벳은 사라졌다. 중국군은 1951년 12월말까지 티벳 전역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중공 지도부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한국전쟁의 향방이었다. "이승만을 바다에 쳐넣겠다"라던 김일성의 호언장담과 달리, 낙동강 전선은 시시각각 악화되고 있었다. 8월 26일 저우언라이는 주더와 린바오를 비롯한 최고 군 수뇌와 동북변방군 주요지휘관들에게 "조선 인민들을 지원하고 타이완 해방을 미뤄야 한다"라면서 한반도 출병을 사실화하고 8월 말까지 출동 준비를 완료하라고 지시하였다.
1949년 7월에 창설된 중공 공군은 1950년 6월 19일 최초의 항공부대인 "공군 제4혼성여단"이 편성되었고 159대의 각종 항공기(P-51 전투기 31대, C-46 수송기 18대, PT -19 훈련기 22대, Ki-55 훈련기 23대 등)와 200여명의 조종사, 2300여명의 정비병 등 약 7천여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체가 파손된데다 노후가 심하고 기술자의 부족으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한 채 소수의 기체만이 베이징의 하늘을 지키고 있었다. 이런 전력으로는 감히 막강한 미공군은 커녕 국민정부군 공군을 상대하는 것조차 벅찬 일이었다. 그동안 타이완 침공에 신중을 기하며 일정을 늦춘 것도 공군력의 빈약함 때문이었다. 따라서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소련 공군의 파견을 여러차례 요청하였다. 8월 11일 소련 극동 공군 제151 비행사단이 동북으로 들어와 랴오양(遼陽)에 주둔하였다. 동북의 방위를 돕고 중공군이 한반도로 출병했을 때 지원하기 위함이었다.
8월 16일 가오강이 동북변방군의 병력만으로는 한반도 출병이 어렵다며 급히 증원을 요청하자 해방군 총참모장 네룽전(聂荣臻)은 마오쩌둥에게 상하이에 배치된 쑹쉬린(宋時輪)의 제9병단(제20군, 제26군, 제27군)과 후베이성의 제50군을 동북으로 수송할 것과, 추가로 서북방면에 배치된 제19병단을 산둥성으로 증원할 것을 건의하여 승인을 받았다. 제9병단은 타이완 침공을 위한 부대였기에 동북으로 보낸다는 것은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타이완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제9병단은 9월 20일부터 이동을 시작하여 11월 초 조중국경에 집결을 완료한 후 그대로 한반도 동부를 향해 진격하였다.
또한 제3야전군 사령관 천이(陳毅)는 쓰촨성에서 항복한 국민정부군 제16병단 투항병 1만 5천여명을 제9병단의 각 사단에 편입시켜 병력을 보강하였다. 그 외에도 서남군구에서 3개 군 9개 사단을, 중남군구에서 2개 군 6개 사단을 선발하는 등 타 군구에서도 병력과 장비를 빼내어 동북으로 수송하였다. 동북변방군은 당초 25만명에서 출병 직전에 오면 11개 군 36개 사단 약 70만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는 당시 390만명으로 감축된 공산군의 약 1/5에 달하는 규모였다. 중공은 군의 정예화를 위해 노약자와 부상병, 국민정부군 출신 항병들 중심으로 대거 제대시키는 한편, 실전 경험이 풍부한 고참병에 대해서는 오히려 제대를 중지하고 복귀를 명령하였다.
마오쩌둥이 출병을 방침으로 정했지만, 여전히 반대하는 의견도 많았다. 출병이 과연 필요한가에 대한 의문부터 미군과의 압도적인 화력 차이, 중공군의 준비 부족과 작전 능력 부족 등 비관적인 견해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가오강은 중앙군사위원회에 도저히 8월말까지 출동 준비를 완료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빨라도 9월말까지 연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제13병단의 보고에 따르면, 동북변방군이 보유한 야포의 35%가 고장났고 비축된 포탄은 1회분도 되지 않으며 차량과 말, 심지어 소총과 군용 삽조차 부족한 실정이었다. 마오쩌둥은 낙동강 전선에서 교착 상태일 때 준비를 완료하여 조속히 출병하기를 원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충분한 준비 없이 참전한다면 승리는 커녕, UN군에게 간단하게 격퇴당할 것이 뻔했다. 결국 마오쩌둥은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제13병단이 7월부터 서둘러 이동하지 않았다면 중공군은 10월에도 출병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 사이 한국전쟁은 유엔군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의 출병 결심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9월 5일 열린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9차 회의에서 그는 더욱 호전적인 자세로 "미국이 제3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려고 한다면 마음대로 해라. 그들이 원자폭탄을 사용하면 우리는 수류탄으로 대항할 것이다. 상대의 약점을 찔러 끝내 무찔러 주겠다"라며 자신만만해 하였다. 최고 지도자인 마오쩌둥이 출병을 주도하는 이상 회의는 요식행위일 뿐, 다른 사람들의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9월 8일에는 동북에 주둔한 제13병단으로부터 북한군은 낙동강에서 한국군과 미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방어선을 돌파할 능력이 없으며 미군의 반격이 임박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낙동강에 배치된 유엔군은 17만 9천명에 달한 반면, 북한군은 12만명에 불과했고 태반은 남한에서 징집된 신병이었다. 제공권은 상실한지 오래였고 전차와 차량, 야포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김일성은 8월 31일부터 모든 병력을 총동원해 "9월 공세"를 감행했지만 결국 파멸적인 피해만 입었을 뿐이었다. 또한 미국은 대규모 상륙을 준비하고 있으며 상륙 예상 지점은 인천이나 군산, 원산이 될 것이라는 보고도 있었다. 상황은 점점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9월 16일 아침, 충격적인 뉴스가 들어왔다. 전날 새벽 5시 맥아더가 지휘하는 7만 5천명의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한 것이다. 중앙판공청(中央辦公廳)의 비서관인 리즈성(李知勝)이 한장의 전보를 들고 급히 마오쩌둥의 침실로 달려왔다. 잠에서 깨어나 전보를 읽은 마오쩌둥은 담담하게 말했다. "마침내 상륙했다는 말인가"
비록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유엔군이 한반도의 허리에 상륙할지 모른다는 것은 이미 예견한 바였고 김일성에게도 수차례 경고하였다. 그럼에도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스탈린과 김일성의 무책임함과 무능함에 대해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분노는 저우언라이를 통해 소련 대사 로신(N. V. Roshin)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중국 지도부는 언론과 평양의 라디어 방송 이외에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으며 북한과의 관계 또한 매우 좋지 않다. 또한 그동안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 요원을 파견하려고 했지만 오늘까지 평양은 아무런 대답도 없다." 또한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이 해준 충고를 북한은 전혀 듣지 않았으며 소련과의 관계만 중시할 뿐 중국을 무시하고 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로신의 전보를 받은 스탈린은 부랴부랴 변명을 늘어놓으며 중공이 이해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북한이 중국에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것은 평양과 최전선의 통신이 곤란했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군은 많은 면에서 아직 미숙하고 경험이 부족하다. 김일성과 일선 부대와의 관계도 튼튼하지 못하다" 스탈린이 김일성을 변호한 것은 중공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김일성도 유엔군의 상륙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해안에 진지를 구축하고 주민들로 자위대를 편성할 것과 무기와 탄약을 비축하라는 원론적인 지시를 내렸을 뿐이었다. 오히려 눈앞의 낙동강 전선에만 집중하여 인천상륙작전 직전인 9월 13일에는 서울과 인천에 주둔한 병력까지 모두 낙동강으로 내려보낼 것을 지시했다. 따라서 인천에는 고작 2천여명 정도만이 남아 있었다. 인천이 유엔군의 손에 넘어간 뒤에야 부랴부랴 낙동강으로 내려가던 제18사단과 철원, 사리원에 배치된 부대를 서울로 이동시켰지만 9월 28일 서울은 유엔군에게 탈환되었다. 이로서 낙동강 전선에 있던 북한군 주력부대가 완전히 포위당했다. 그들 중에서 무사히 38선 이북으로 도주한 병력은 3만명이 채 되지 않았다.
북한군이 전면 붕괴에 직면하면서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마오쩌둥은 그동안 미국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큰소리쳤지만 막상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오자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희망사항은 미국이 38선에서 진격을 멈추어 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럼 중공은 개입하지 않아도 된다. 트루먼 역시 유엔군이 38선을 넘었을 때 중공과 소련이 개입하는 상황을 우려하였고 이승만과 맥아더의 강력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거듭 망설였다. 9월 29일 유엔군은 추격을 중지한 채 38선에서 멈추고 북진 명령만 기다렸다.
다음날인 9월 30일 드디어 38선을 돌파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맥아더는 김일성에게 무조건 항복을 권고했고 10월 1일 이종찬(李鍾贊) 준장이 지휘하는 한국군 제3사단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재개하였다. 이는 소련과 중공이 참전하려는 어떠한 징후도 보이지 않으며 또한 중공은 내부적으로 불안정한데다 오랜 전쟁으로 지쳐 있고 미국과의 전쟁을 두려워 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중국은 미국이 38선을 넘는 것을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는 저우언라이의 경고는 단순한 허풍이라고 단정하였다. 설령 참전하더라도 변변한 해공군력도 없고 무기와 장비도 빈약한 중공의 군사력은 미국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트루먼 행정부는 유엔군의 38선 돌파가 중공을 자극하지 않도록 유엔군은 결코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이며 국경지대 부근에는 한국군만 투입할 것, 미 공군기가 압록강 북안을 오폭하여 발생한 손실을 배상하겠다는 의사를 인도 네루 수상을 통해 중공 지도부에 전달토록 하였다. 하지만 미국의 일방적인 통보였을 뿐, 마오쩌둥이 그동안 미국에 품고 있던 불신감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또한 예상을 깨고 중공이 본격적으로 참전한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았고 중공의 실력을 지나치게 얕보았다. 막연한 예측만으로 낙관한 것이다.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한 날, 스탈린으로부터 전보가 들어왔다. "나는 모스크바를 벗어나 휴가중이라 한반도의 정세를 제대로 모른다. 오늘 받은 보고서에서 조선의 동지들이 절망적인 곤경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귀하가 만약 그들을 위해 5, 6개 사단이라도 좋으니까 의용군을 구성해 조속히 38선으로 보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것을 조선의 동지들에게 알릴 생각은 없지만 만약 그들이 중국의 출동을 알게 되면 매우 기뻐할 것이다."
전보에는 스탈린 특유의 교활함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양 오만하게 말하면서, 또한 중국을 치켜세워주는 척하며 출병을 권유했다. 막상 그동안 약속했던 소련 공군의 지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김일성한테도 압록강 북안에 대기중인 제13병단을 북한으로 신속하게 출동시켜 달라는 전문이 들어왔다. 이는 스탈린의 지시 때문이었다. 김일성은 마오쩌둥이 아니라 스탈린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스탈린은 오히려 중공과 먼저 의논하라고 지시하였다. 자신은 발을 빼고 뒤로 물러나 있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마오쩌둥은 스탈린과 김일성의 출병 요청과 상관없이 이미 참전을 결심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1년 전 장제스와 연합 전선을 구축하는 등 친 장제스 반공 국가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미국이 아무리 압록강을 건너는 일은 없다고 선언해도 반공 국가와 국경을 맞대는 것 자체가 중공의 존립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미국과의 대결은 불가피하다는 전제 아래, 어차피 싸워야 한다면 중국의 심장부를 지키고 국내의 전장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반도를 전장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360여년 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출병을 외쳤던 명나라 관료들의 논리를 그대로 반복한 격이었다.
하지만 준비 기한을 9월말로 연기했음에도 여전히 동북변방군의 준비 태세는 불충분하였다. 따라서 10월 2일 오후에 열린 중앙정치국 서기처 회의에서 참석자 대부분이 출병 반대파와 신중파였다. 반대파들은 미국이 설령 북한을 장악해도 당장 중국을 침공할 리는 없으며 동북을 침공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니 그동안 국내 안정과 경제 건설이 우선이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반대의 목소리를 높인 사람은 린뱌오였다. 린뱌오는 첫째로 중공의 정권이 안정되지 않았다는 점, 둘째로 쌍방의 실력차이가 너무 크다는 점을 들었다. 해공군의 열세는 물론이고, 미군의 1개 보병사단이 보유한 야포는 500문에 달하는 반면, 중공군 1개 군(3~4개 사단)이 보유한 야포는 고작 198문에 불과한데다 대부분 일본과 국민정부군에게 노획한 것이라 구식이고 규격조차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구경도 모두 75mm 이하였고 155mm 이상의 대구경 중포는 하나도 없었다. "미군 1개 사단은 우리의 1개 군보다 훨씬 강하다. 경솔하게 출병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것과 같다. 미군은 장제스 군대가 아니다. 그들은 막강한 해공군도 있고 원자탄도 있다. 막강한 공업능력도 있다. 설령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는들 원자폭탄을 터뜨리거나 대규모 폭격을 가한다면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또한 린뱌오는 김일성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 영내로 들어와 망명정권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도 미국을 자극할 수 있다며 반대하고, 북한 산악지대에서 유격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린뱌오는 중공군에서 가장 뛰어난 명장인데다 한반도로 출병할 부대가 대부분 그의 휘하에 있고 동북에 대해서도 잘 알았기에 마오쩌둥은 그를 지원군 총사령관을 임명할 생각이었지만 되려 예상치 못한 반대에 부딪치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워낙 반대가 거세다보니 아무리 마오쩌둥이라도 쉽사리 최종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냉전 이후 공개된 러시아 측 문서에 따르면, 마오쩌둥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에서도 "준비가 부족하여 미국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자신이 없다. 적은 우리를 격퇴할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마오쩌둥이 주저하자 다급해진 쪽은 스탈린이었다. 그는 며칠전의 태평스러운 태도를 버리고 급히 답신을 보냈다. 그동안 중공은 미국이 38선을 넘으면 즉각 한반도로 출병할 것을 약속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한반도가 미국의 손에 넘어가면 중국 침략의 교두보가 될 것이라며 협박하였다. 또한 미국은 전면전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지 못하고 일본 역시 미국을 도울 여력이 없다는 점, 소련이 중공의 배후에 있는 한 미국을 물러날 수 밖에 없다고 강조하였다. 마지막으로 "설령 미국이 전면전을 한다고 해도 두려워 할 것은 없다. 우리는 미국과 영국을 합한 것보다 강하다"라며 마오쩌둥에게 겁쟁이가 되지 말라고 은근히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마오쩌둥은 서북을 맡고 있던 제1야전군 사령관 펑더화이를 급히 베이징으로 불렀다. 52세의 한창의 나이였던 그는 수많은 인민해방군 지휘관 중에서도 린뱌오와 함께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맹장이었다. 또한 매사 계산적인 린뱌오와 달리, 우직하고 성실했으며 불같은 성격에 필요하면 누구한테라도 직언을 서슴치 않는 성격이었다. 린뱌오가 한신이라면 펑더화이는 장비였다. 두 사람은 경쟁 관계이기도 했다.
10월 4일에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도 참전 반대의 목소리가 거셌다. 이들은 오랜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재정의 열악함, 국내 문제 해결이 우선이라는 점, 토지 개혁이 완성되지 못하고 정권의 기반이 취약하여 전쟁이 한반도를 넘어 중국으로 확대될 경우 정권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는 점, 무기와 장비가 빈약하여 미국에게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점, 전쟁 준비가 충분하지 못하고 오랜 전쟁에 지친 병사들 사이에는 염전사상이 퍼져 나가고 있다는 점을 들면서, 소련도 출병하지 않는데 왜 중국이 출병해야 하는가를 신랄하게 꼬집었다.
이날 회의에서 펑더화이는 침묵만 지켰다.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무작정 베이징으로 불려와 전후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덩샤오핑이 펑더화이의 숙소를 찾아가 펑더화이에게 상황을 설명한 다음 마오쩌둥의 집무실로 데려갔다. 마오쩌둥은 단도직입적으로 "상황이 매우 급박하다. 우리는 당장 조선으로 출병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린뱌오는 병 때문에 맡지 않겠다고 한다. 지도부의 여러 사람들과 의논한 결과 이 중대한 책임은 당신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한다. 당신의 몸은 어떤가?"라고 물었다. 펑더화이는 웃으며 "저는 황소처럼 건강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중앙의 결정에 따라 지원군 총사령관의 자리를 맡겠다고 흔쾌히 승락하였다.
그날 오후 중난하이에서 다시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린뱌오는 자리에 없었다. 마오쩌둥이 일부러 참석자 명단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물론 린뱌오도 끝까지 고집을 부려 마오쩌둥의 심기를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이제와서 자신이 반대한다고 해서 마오쩌둥이 생각을 바꿀 리 없는데다 마오쩌둥은 한번 원한을 품으면 두고두고 기억하는 성격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전날에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펑더화이는 태도를 바꾸어 "조선을 도와야 한다. 설령 큰 손해를 입더라도 단지 해방 전쟁의 승리가 몇 년 늦어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만약 미국이 압록강과 타이완에 주둔한다면 언제라도 핑계를 찾아 우리를 침략할 수 있다"며 출병 불가피론을 외쳤다. 마오쩌둥도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즉각 출병해야 한다"라면서 펑더화이를 지원군 총사령관에 추천한다고 말했다. 마오쩌둥이 결정한 이상 더 이상은 누구도 반대할 수 없었다. 미리 입을 맞춘 두사람에 의해 중공군의 참전은 결정났다.
중공의 참전이 김일성에게 통보된 날은 10월 8일이었다. 주북한 중국 대사 니즈량(倪志亮)이 평양 모란봉에 있는 지하 지휘소에서 김일성을 만나 마오쩌둥의 전보를 전달했다. 김일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잘됐다! 잘됐어!"라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마오쩌둥에게 북한 인민을 대신해 깊은 감사를 전해달라고 하면서 잔에 술을 가득히 따라 "중국 동지들의 승리를 기원하며 건배!"라고 외쳤다. 그동안 김일성은 중공과 소련의 태도가 미적지근하여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자 마지막으로 함경도의 험준한 산악지대로 들어가 최후의 게릴라전이라도 벌일 생각이었다. 그에게 마오쩌둥의 전보는 그야말로 파멸의 구렁텅이에서 구사회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트루먼과 맥아더가 웨이크 섬에서 만나 "중공은 결코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지 4일 후인 10월 19일 오후 5시 30분. 선두부대인 제40군을 시작으로 펑더화이가 지휘하는 "인민지원군" 제1진인 제13병단 4개군 12개 사단 25만명이 압록강을 일제히 건넜다. 이어서 10월 25일 제50군과 제66군도 압록강을 도하하였다. 같은 시간 베이징의 집무실에서 마오쩌둥은 안절부절해 하고 있었다. 네룽전이 들어와 경례를 했다. "주석에게 보고합니다. 의용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네룽전의 보고가 끝나자 마오쩌둥은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이제부터 자겠다." 그는 눕자말자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졌다. 이로서 한반도에서는 더 참혹한 전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