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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국공내전史] 장제스 타이완으로 향하다 - 17. 한국전쟁의 종식과 타이완 해협 위기 blog.naver.com/atena/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한 지배자의 무모한 야심이 불러온 전쟁은 3년 1개월 동안 군인, 민간인 합하여 2백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한반도의 대부분을 폐허로 만든 채 비로소 포성이 멈추었다. 중공의 손실 역시 컸다. 중국 정부는 지금까지도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얼마나 참전했고 얼마나 많은 사상자를 내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공개하고 있지 않다. 공식적으로는 연 인원 300만명이 전투, 비전투 요원으로 참전하여 14만명이 죽고 2만1천명이 포로가 되었다. 부상자와 병사자, 실종자까지 합하면 중공군의 사상자는 약 50만명에 달한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통계에는 누락된 사람들이 많아 서방 학계에서는 중공군의 손실이 최대 1백만명에 달한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한국전쟁에서 중공이 과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는 학자들마다 시각이 제각각이다. 하지만 결과론만 놓고 냉철하게 평가한다면 체면을 얻고 실리를 잃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선 한국전쟁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중공의 위상은 대단히 높아졌다. 당초 린뱌오를 비롯해 지도부의 대다수가 반대했을 때 홀로 출병을 외쳤던 마오쩌둥조차 속으로는 끝까지 망설이면서 스탈린이 지원에 소극적이자 몇번이나 결정을 번복하였다. 그조차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상대로 변변한 해공군도 없는 중공군이 고작 낡은 소총 몇자루에 의존해 과연 얼마나 싸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맥아더가 마지막까지도 중공군의 참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이유도 중공의 역량으로는 감히 미국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또한 북한군은 거의 와해된데다 만주에서 재편 중이던 약 4만명의 병력 역시 전의도 없고 전투력도 변변찮았다. 미국을 극도로 두려워 했던 스탈린은 공동 개입은 고사하고 극동 공군을 출동시켜 엄호해 달라는 마오쩌둥의 요청조차 거절하였다. 전투는 전적으로 중공군이 맡아야 했다. 만약 패배한다면 최악의 경우 미군이 중국 본토까지 침공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출병을 결정한 직후 저우언라이는 미국이 동북이나 중국 동해안을 침공하는 상황에 대비하여 전략물자와 공업시설을 내륙으로 이전하라고 지시했다. 마오쩌둥과 중국 지도부에게도 참전은 위험성이 너무나 높은 도박이었다.

하지만 막상 미군과 부딪쳤을 때 중공군의 전투력과 작전 능력은 미국과 전세계에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펑더화이는 미군의 항공정찰을 교묘하게 피하면서 후방으로 대규모 병력을 침투시켰고, 유엔군 전초부대를 소부대 단위로 포위한 후 사방에서 압도적인 숫자로 공격하여 괴멸시켰다.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미군과 남한군의 어린 신병들은 겁에 질려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근대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분명 중공군은 허약한 군대였다. 대부분 가난한 농민 출신에 문맹이었고 간부들은 근대 전술을 배우지 못하였다. 또한 무기의 대부분은 내전 중에 노획한 무기였고 소총조차 충분하지 않았했다. 병참능력은 원시적인 수준이었다. 대신 거친 지형과 형편없는 급식, 끝없는 행군에 익숙하였고 엄정한 군기와 규율을 자랑하였다. 은폐술과 위장술, 야간 기동은 어느 군대 못지 않았으며 특히 야습과 인해전술식 파상 공세에 매우 능숙하였다. 중공군의 저력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제1차 공세 당시 중공군은 15개 사단 20만명 정도였다. 유엔군 또한 20만명 정도에, 그 중에서 북한 지역에 진입한 병력은 약 13만명 정도였다. 중공군과 북한군을 합하면 숫적으로는 유엔군보다 두배 정도 우세했지만, 공군력과 기동력, 화력의 압도적인 차이를 생각한다면 결코 우세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맥아더의 전술적 오류가 중공군의 승리에 일조했다고 해도 분명 경이로운 것이었다.

춘계 공세(제5차 공세, 1951년 4월~5월)에서 중공군은 비로소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전에 부딪쳐 엄청난 손실을 입고 격퇴당하고 38도선으로 후퇴하였다. 하지만 그  후에도 중공군은 한국전쟁 내내 전쟁의 대부분을 도맡았다. 유엔군은 공산군이 38도선을 넘지 못하도록 저지했지만 반대로 북쪽으로 밀어붙이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전투는 38도선 주변에서 교착상태가 되었고 어느 쪽도 승리가 아니라 단지 정전 회담에서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얻기 위해서 2년이 넘도록 소모전을 벌어야 했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신생국가인 중공은 예상 외의 선전을 했고 결국 한국전쟁은 무승부로 끝났다. 이로서 북한이라는 한반도의 완충지대를 지켜내어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미국과 국제 사회는 중공의 역량을 재평가하게 되었고 사회주의 진영에서 소련 다음의 2인자의 지휘를 굳혔다. 군사적으로도 미국과 소련 다음이었다. 1950년 초만 해도 중공은 4개 야전군 산하 20개 병단 70개군 210개 사단 560만명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육군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계화부대는 없고 하나같이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와 같은 경화기만 갖춘 알보병이었다.

1950년 9월에야 최초로 2개 기갑사단과 2개 독립 기갑연대가 편성되었다. 편제상으로는 1개 군에 해당하지만 실제 병력은 도합 1만2천6백명에 375대의 전차와 272대의 장갑차에 불과하였고, 모두 국공내전 중에 국민정부군에게 노획한 구식 전차였기에 실전에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1950년 10월부터 12월 말까지 소련으로부터 500여대의 전차와 자주포(T-34, IS-2, SU-100, SU-122 등)를 넘겨받아 추가로 10개 기갑연대를 편성하였다. 한국전쟁 동안 소련은 약 3천여대에 달하는 전차와 자주포를 원조하였으며 1956년에는 당시 최신형 중전차인 T-54의 생산공장을 중국에 건설하여 중국이 자체적으로 전차를 생산할 수 있도록 도왔다.

 

특히 괄목할 부분은 공군의 발전이었다. 1950년 초만 해도 국공내전 초반에 소련이 넘겨준 일본제 항공기와 국민정부군에게서 노획한 항공기 등 약 150여대의 잡다한 항공기가 전부였고 대부분 부품 부족과 정비 불량, 심한 노후화로 쓸모가 없었다. 1950년 6월 16일 난징에서 편성된 공군 제4 혼성여단(Mig-15 제트 전투기 38대, La-11 프롭 전투기 39대, Il-10 공격기 25대, Tu-2 폭격기 39대 등으로 편제)은 소련제 항공기로 편제된 중공의 유일한 전술 항공부대였지만 보병 사단(제90사단)을 근간으로 한데다 파일럿과 정비사들의 기량이 매우 낮아 마오쩌둥은 제공권의 열세를 우려하면서도 이 부대를 한반도에 즉각 투입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에서 소련의 막대한 원조 덕분에 공군은 빠르게 늘어나 전쟁이 끝날 즈음에는 28개 비행사단(56개 연대)에 각종 항공기 3천대(대부분 제트 전투기)와 5천여명의 파일럿을 보유했다. 이는 세계 3위의 공군력이었다. 또한 스탈린은 한국전쟁 동안 동북과 베이징, 상하이 등지에 소련 공군을 배치하였고 이들이 철수하면서 기체를 모두 중공에 매각하였다. 중공은 소련 군사 고문단의 협조 아래 파일럿을 훈련시키는 한편, 한국전쟁에도 다수의 파일럿들을 참전시켜 한반도 상공에서 치열한 공중전을 벌였다. 압도적인 기량 차이로 미 공군의 대등한 상대는 되지 못했지만 중공군 파일럿이 조종하는 최신예 Mig-15 제트 전투기는 미 공군의 폭격기나 구식 프롭기에게는 중대한 위협이었다.

▲ 한국전쟁 당시 중국 공군의 에이스였던 장치훠(张积慧). 그는 1952년 2월 10일 군우리 부근의 공중전에서 미 공군의 에이스 데이비스(George Andrew Davis, Jr.) 준장이 탑승한 F-86E 전투기를 격추시켜 명성을 떨쳤다.

​해군의 육성은 상대적으로 뒤로 밀렸다. 마오쩌둥은 미공군에 대항하기 위해 원래 군함 구입에 쓰기로 했던 예산을 공군력에 전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1952년 다롄항에서 철수하는 소련군을 통해 여러 척의 고속 경비정과 포정, 어뢰정과 같은 소형 군함을 넘겨 받았다. 1954년 6월에는 로미오급과 위스키급 디젤 잠수함 각 2척을 구입하여 산둥성 칭다오에서 최초의 잠수함 부대가 창설되었다. 1954년부터 57년까지 소련이 제공한 군함은 고르디(Gordyy)급 구축함 4척을 비롯해 15척의 잠수함과 어뢰정, 초계함, 포함 등 백여척이 넘었고 다수의 기술자와 군사 고문단도 파견하였다. 덕분에 중공의 해군력은 비약적으로 강화되었고 자체적으로 군함과 잠수함을 건조할 기술력까지 갖추게 되었다.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신형 군함과 전투기를 거의 획득하지 못하고 있던 타이완과는 천양지차였다.

▲ 중국인민해방군 소속 고르디급 구축함 "안샨호(鞍山号)" 1940년에 건조되어 소련 극동 함대에 배치된 후 1954년 10월 중국에 인도되었다. 1992년 임무에서 해제되어 칭다오에서 해군 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 만재배수량 2500톤에 최고 속도 34노트, 130mm 주포 4문, 76.2mm 부포 2문 등을 탑재하였다. 중공이 획득한 최초의 대형 군함이었다.  

한국전쟁을 통해 아편 전쟁 이래 구미 열강들에게 약소국으로 취급받으며 끊임없는 외침에 시달렸던 중국은 비로소 자신에 걸맞는 지위를 되찾았다. 중국인들이 목숨 이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체면이다. 마오쩌둥은 그 체면을 회복하였고 오늘날까지도 중국 사회에서 마오쩌둥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 체면이란 전적으로 대다수 민중의 희생 아래 세워진 것이었다. 막대한 군비 지출과 재정 적자를 매꾸기 위해 엄청난 수탈이 뒤따랐고 가장 큰 고통을 감수해야 한 이들은 바로 농민이었다. 중국은 국공내전 말기에 이미 극심한 경기 침체와 하이퍼 인플레이션, 전국적인 기근으로 심각한 식량난에 허덕였다. 국가 재정 역시 파탄 상태였다. 게다가 동북변방군의 창설과 한국전쟁 참전으로 1950년 국가 예산에서 국방비의 비중은 43%에 달했다. 파병 규모가 커지고 소련으로부터 무기 수입이 늘어나자 군비 지출 또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951년에는 국방비는 전해의 1.7배로 달하면서 전체 예산의 2/3를 차지했고 연간 총세입보다도 더 많았다.


이로 인한 재정 적자는 소련의 원조와 지주,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농촌에 대한 수탈로 메꾸어야 했다. 늘 입버릇마냥 "농민의 아들"이라고 말했던 마오쩌둥은 실제로는 농업이 아니라 공업, 그것도 막강한 중공업과 군수공업의 건설에 중점을 두었다. 부국강병과 서구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공업화가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또한 중공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무기와 군수품, 탄약은 전적으로 소련에서 빌려야 했다. 스탈린은 총알 한발까지도 공짜로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저우언라이의 회고에 따르면 한국전쟁 중 소련의 원조는 13억 4천만 달러에 달했고 모두 몇년에 걸쳐 갚아야 했다. 결국 중국 인구의 80%를 차지하던 농민들을 뼛속까지 착취하여 마련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농민의 이익은 작은 것이며 전체 인민의 이익은 큰 것이다"라며 중국을 현대적인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농민들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였다. 반발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반혁명 세력이라며 호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국공내전에서 농민들이 장제스 대신 마오쩌둥을 지지한 이유는 부국강병이 아니라 농민이 잘사는 세상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마오쩌둥은 농민들에게 공산당은 농민의 당이며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막상 정권을 잡자 이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모두 뒤집었다. 공업화와 우방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농민들로부터 엄청난 양의 곡식을 추가 징수하고 반강제적인 재산 헌납 운동을 벌였다.


군비 지출은 매년 팽창했음에도 1952년부터는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오히려 격감하여 1952년에는 27%, 1953년에는 22% 로 줄어들었다. 재산 몰수와 수탈을 통해 세수가 급격하게 늘어난 덕분이었다. 당시 정부 세수의 80% 이상이 현물(쌀)이었다. 마오쩌둥은 "농민들이 너무 많이 먹는다"라면서 모든 곡식을 정부가 저가로 일괄 수매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고가에 판매하여 막대한 차익을 남겼다. 이는 폭력을 활용한 국가적 약탈이었다.

이런 식으로 식량과 물자를 확보하고 공업화에 필요한 기계류와 소련제 무기를 구입하기 위한 대금으로 사용했다. 한국전쟁에서 중공의 총 전쟁비용은 62억 위안에 달했다. 소련이 제공한 원조는 대부분 전비와 무기 구입에 사용되었고 공업화에 사용된 돈은 1/5도 채 되지 않았다. 그만큼 국민들의 고통은 컸다. 마오쩌둥이 원한 것은 부강한 중국이지, 부강한 인민이 아니었다. 당과 일선 관료들은 그들이 비판했던 장제스 정권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였고 대다수 인민의 생활은 이전보다 더욱 어려워졌다. 


중공은 북한의 재건을 위해서도 막대한 원조를 제공하였다. 전쟁 중에도 북한에 약 560만톤에 달하는 막대한 물자를 무상으로 제공했던 중공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대로 북한에 남아 재건을 도왔다. 오랜 전쟁과 미 공군의 폭격으로 북한 지역이 완전히 초토화되면서 1953년의 북한의 명목 GDP는 1949년 대비 30%에 불과하였다. 중공은 1954년부터 1957년까지 8억 위안(3.2억 달러)에 달하는 무상 원조를 제공하는 한편, 연 인원 160만명의 병력이 농업과 토목, 도로 건설 등에 투입되었다. 덕분에 북한의 재건은 급속도로 이루어져 농공업의 생산력은 전쟁이 끝난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1955년에 이미 1949년 수준을 능가하였다.

하지만 이런 원조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한 중공의 영향력은 미미하였다. 김일성 정권은 태생적으로 중공이 아니라 소련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은 중공의 원조에 기대면서도 정치적으로 예속관계가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였다. 게다가 38선 돌파를 놓고 펑더화이가 그동안의 희생이 컸다는 것 때문에 더 이상의 남하를 거부하자 주먹다짐까지 벌였고 이후에도 "중국 동지들은 조선을 해방시킬 생각이 없다"라며 불신감을 품었다. 그는 전쟁 내내 일부러 중국 지원군 사령부를 방문하지 않았고 중공군과의 협력 역시 은근히 거부하였다.

또한 1956년 8월 이른바 "8월 종파사건"이 일어나자 옌안파의 거두 김두봉, 부수상 박헌영을 비롯한 친중파 지도부를 모조리 숙청하였다. 그 중에는 조중연합군 부사령관을 지낸 김웅(金雄)과 정치 위원 박일우(朴一禹)도 있었다. 김일성이 박헌영을 체포하자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직접 석방하라고 압력을 가했지만 김일성은 오히려 서둘러 처형하였다. 이 때문에 한동안 심한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도 북한은 경제적으로는 중국에 의존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자유로운 관계이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 지원군의 역할에 대해서도 의미를 축소하고 전쟁의 주체는 "조선 인민과 조선 인민군"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 하는 중국의 입장과는 대조된다.


한국전쟁으로 중국의 자부심은 드높였을지 몰라도, 서방과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미국은 20년 가까이 중국을 봉쇄하였다. 또한 마오쩌둥의 "소련 일변도" 정책으로 중국은 竹의 장막을 두른 채 말그대로 누구도 나갈 수 없고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철저하게 고립된 세계가 되었다. 스탈린 사후 소련과의 관계마저 악화되자 마오쩌둥은 자력갱생을 외치며 무계획적인 대약진 운동을 전개하다가 중국 경제를 거의 파산으로 내몰았고 무려 3,500만명이 아사하는 최악의 기근을 초래했다. 1960년대 세계 경제의 황금기 시대에 중국만이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뒷걸음질쳐 중국 역사상 가장 궁핍한 시대를 감내해야 했다. 한국전쟁에 개입한 대가를 톡톡히 치룬 셈이었다. 마오쩌둥은 출병의 불가피성을 외쳤지만 과연 정말로 불가피했는지, 그로 인한 대가가 합당했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해 볼 주제이다.


그럼 마오쩌둥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가. 그는 장남 마오안잉을 잃었다. 마오쩌둥의 두번째 부인 양카이후이(楊潤慧) 사이에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에 스스로 지원하여 참전하였고 러시아어 통역을 맡았다. 참전 한달 후인 1950년 11월 25일 미군의 B-29 폭격기 4대가 평안북도 동창군의 산속에 있던 중국 지원군 사령부를 습격했다. 펑더화이는 운 좋게 피했지만 마오안잉은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채 불타 죽었다. 그의 나이 28살이었다. 펑더화이가 직접 마오쩌둥에게 마오안잉의 죽음에 대해 사죄하면서 시체를 중국으로 송환하겠다고 하자 마오쩌둥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그동안 조선에서 수많은 전사들이 피를 흘렸고 그곳에 묻혔는데 내 아들이라고 특별한 대우를 받을 필요는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뒷날 펑더화이가 몰락했을 때 마오쩌둥은 새삼스레 마오안잉의 죽음을 거론하면서 "나는 대를 이을 후손이 없다"라며 해묵은 감정을 드러냈다.

가정적으로 그다지 행복했다고 할 수 없는 마오쩌둥은 혈육에 대한 정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다. 열명에 달하는 마오쩌둥의 자녀들 중에서 그나마 장수한 사람은 마오안칭과 리민, 그리고 장칭이 낳은 막내딸 리너 세사람 뿐이었다. 또한 그는 6번 결혼했지만 하나같이 평온하지 못했으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낡은 봉건 사상을 때려부셔야 한다고 외쳤지만 정작 자신은 전형적인 봉건적인 중국 남성이었다. 평생 모순적인 인생을 살았던 그는 오직 자신의 삶만 중시했고 가족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그 대가는 고스란히 가족들이 치루어야 했다.

또한 그의 불우한 가족사는 소위 "마오가 10열사"라 하여 우상화의 도구로 사용되어 중국 민중의 동정심을 유발하였다. 여기에는 마오쩌둥의 자녀 5명과 1명의 아내, 1명의 누이, 2명의 남동생, 1명의 조카가 포함되었다. 마오쩌둥의 온갖 실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다수 중국인들에게 우상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혁명에 자신의 혈육을 바쳤기 때문이다. 냉철하게 말하면 마오쩌둥의 무심함의 결과이지만, 중국 사회에서 영웅이 대업을 내세워 처자식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도덕적인 비난이 아니라 오히려 존경의 대상이다. 마오쩌둥은 노년에 와서야 고독감을 드러내며 젊은 시절 자신이 버렸던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죄의식을 솔직하게 토로하였다.


▲ 국공내전 말기 베이징 샹산(香山)에서의 마오쩌둥과 마오안잉. 어린 시절에는 상하이의 뒷골목에서 구걸하며 살았던 마오안잉은 1936년에야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났지만 바로 소련으로 보내졌다. 1946년 1월 그는 비로소 옌안으로 돌아왔지만 마오쩌둥은 그를 다시 농촌으로 보냈다. 두 사람이 가족으로 보낸 시간은 거의 없었고 마오안잉은 점점 전제 군주로 변해가는 아버지를 종종 비판하였다. 마오쩌둥은 두번째 아내 양카이후이와 세아들을 낳았지만 둘째 마오안칭은 어린 시절에 겪은 고통과 영양실조 때문에 평생 정신병 환자로 살았고 막내는 실종된 채 끝까지 종적을 알 수 없었다. 

장남을 잃은 대신, 마오쩌둥은 절대 권력을 확립하고 자신을 무오류의 인간으로 신격화하였다. 그는 한반도 출병을 결정한 지 이틀 후인 1950년 10월 10일, 이른바 "쌍십 지시"를 하달하였다. 미국의 위협을 내세워 국내의 반동세력을 처단하라는 것이었다. 그럼 마오쩌둥이 말하는 반동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노선에 복종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였다. 또한 이전에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라고 하였던 그는 이제와서 "내가 하고 싶지 않을 일을 남에게 시켜야 한다(己所不欲, 要施於人)"라고 말을 완전히 뒤집었다. 마오쩌둥의 대표적인 수족이었던 류샤오치는 한술 더 떠 "조선 출병은 여러모로 이로운 점이 많다. 덕분에 토지 개혁과 반동 세력 등 많은 일들을 쉽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과도기적인 타협 노선이었던 "신민주주의" 이론은 폐기되었고 사회주의 혁명의 완전한 이행이 강조되었다. 언론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 출판 결사의 자유 모두 부정되었다. 비판 세력들은 소위 "호랑이"라 하여 반동 반혁명 부패세력으로 매도되어 숙청당했다.

이른바 "마오식 민주주의"란 서구식 선거가 아니라 오직 그와 소수의 엘리트들의 절대적 통제 아래에서 형식적으로만 허용된 것이었다. 서구처럼 인민에 의해 당의 권위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당에 의해 인민의 권리가 나왔다. 모든 것은 당이 판단하고 당이 결정하였다. 민중은 결코 중국 사회의 주동적인 세력이 될 수 없었다. 마오쩌둥의 말대로 권력은 인민이 아니라 총구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전쟁 내내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 미국에 맞서 조선을 원조하고 가정과 국가를 지키자)"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군중 대회를 전국 각지에서 개최하여 대중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대중의 불만에 대해서는 교묘하게 조종하여 정적들을 처단하는 수단으로 악용하였다. 많은 이들이 국가 권력이 아닌 가족과 이웃, 동료의 손으로 집단 린치당했다. 대중을 조종하는 능력에서 마오쩌둥만큼 고단수는 없었다.

▲ 베이징에서 군중 대회를 지도하고 있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그의 통치 방식은 앞으로는 대중을 선동하고 뒤로는 비밀 경찰을 운영하여 반대 세력을 처단하는 식이었다. 히틀러와 유사하면서도 히틀러보다 훨씬 교묘하였다. 류사오치를 비롯한 지도부 역시 마오쩌둥의 비위를 맞추고 그의 신격화에만 급급한 나머지 결과적으로 자신들마저 망치고 말았다. 

또한 지도부에 대해서도 파벌을 조장하고 서로를 경쟁시켜 마오쩌둥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을 그들 스스로 제거토록 만들었다. 마오쩌둥은 직접 나설 필요도 없이 막후에서만 조종하면 되었다.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중공은 명목상으로나마 집단 지도 체제를 유지했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며 그는 더 이상 다른 사람과 의견을 나눌 필요가 없었다.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였고 어떤 제약도 받지 않았다. 다른 지도자들은 수족일 뿐이었다.

당의 2인자였던 류사오치조차 지도부 회의에서 "마오 주석의 식견은 우리의 두배이다. 우리는 그를 배워야 한다"라며 앞장서서 입에 발린 아첨을 늘어놓았다. 그러니 누가 마오쩌둥을 감히 비판할 수 있겠는가. 그의 전제 정치는 2천여년전의 진시황을 연상케 할 정도였고 스스로도 자신을 진시황에 비교하였다. 더욱이 그의 종잡을 수 없는 변덕으로 가오강, 류사오치, 덩샤오핑, 펑더화이, 린뱌오 등 수많은 지도자들이 수모를 겪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마오쩌둥의 후계자를 꿈꾸었던 그들이 하루 아침에 몰락한 이유는 마오쩌둥의 비위를 맞추기에만 급급했을 뿐 내면의 변덕을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반우파 투쟁으로 지식인 사회가 과도하게 위축되자 마오쩌둥은 ​1956년 5월 이른바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을 내세우고 "언자무죄(言者無罪)", 즉 "무엇을 말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라고 방침을 정하였다. 백가쟁명이란 춘추전국시대의 제가 백가라 불리던 수많은 학파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사상과 학문을 펼쳐 중국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던 것을 의미한다. 즉, 그동안 금지시켰던 언론 출판의 자유와 민주 정치를 허용하겠다는 의미였다. 지식인들이 눈치를 보며 "지도부도 비판할 수 있는가?"라고 조심스레 묻자 마오쩌둥은 흔쾌히 "비판을 두려워 하는 자는 약점이 있다는 것이고 약점이 있는 자는 비판받아야 한다. 비판이 정당하면 좋다. 비판이 정당하지 않아도 좋다. 말한 사람은 무죄이다. 인민은 비판의 권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공산당의 서슬 퍼런 통치 아래 숨죽이고 있던 지식인들은 마오쩌둥의 말에 고무되어 온갖 비판을 쏟아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그들의 비판이 자신이 허용한 선을 넘는다고 판단하자 1년도 채 되지 않아 본색을 드러내며 말을 바꾸었다. 그는 자신을 비판한 지식인들에 대해 소위 "反 주자파 운동"를 선언하고 "이들은 백화쟁명운동을 공산당과 노동자 계급을 쓰러뜨리고 사회주의 근간을 무너뜨리기 위한 구실로 이용하고 있다"라고 비난하였다.

또한 "뱀을 굴에서 나오게 유인하라", "가장 반동적인 말을 유발한 다음 포위하여 소탕하자"라며 지식인 타도를 선동하였다. 마오쩌둥의 말만 믿고 순진하게 비판에 나섰던 자들은 모조리 끌려가 조사받고 자아비판을 해야 했으며 심지어 살해되기도 했다. 보다 못한 쑹칭링이 직접 편지를 써서 "공산당은 국민당 800만 대군도, 미 제국주의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왜 인민을 두려워하는가? 그들이 당을 전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일침을 가했지만 공포와 아집에 사로잡힌 마오쩌둥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애초에 그는 남의 비판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오쩌둥의 통치 방식은 이런 식이었다.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저질렀던 것처럼 지식인들을 탄압하였던 그는 실상 중국 민중 전체에 대한 불신감을 드러냈다. "전국의 6억 인민 중 사회주의를 찬성하지 않는 자는 10%, 즉 6천만명이다. 이 중에서 4,800만명은 교육이 필요하다. 나머지 1,200만명은 진압을 해야 한다" 여기서 6천만명이라는 숫자는 어떤 구체적인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상상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는 숙청해야 할 숫자를 스스로 정하고 대중을 움직여 수많은 무고한 이들을 마녀 사냥식으로 참혹하게 살해하였다.


만약 마오쩌둥과 장제스를 비교한다면 두 사람 모두 당대 유일한 호적수이자 지도자로서의 기량을 갖추었으며, 편협하고 고집불통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장제스는 마오쩌둥만큼의 배짱과 과단성이 없었다. 마오쩌둥은 과도한 공포정치로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눈치를 본다고 싶으면 적당히 풀어주었다가도 자신의 권위가 침해받는다고 판단하면 이전보다 더 옥죄었다. 장제스는 반대였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겁을 먹고 움츠러드는 식이었다. 장제스의 철권 통치는 마오쩌둥에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타이완 사람들은 장제스에 대해 "독재를 하려니 배짱이 없고 민주를 하려니 도량이 없다"고 비꼬았다. 이 차이가 승자와 패자를 나누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쪽이건 남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자신이 틀렸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용기가 없기는 다를 바 없었다.






마오쩌둥은 적색 테러를 저지르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한편, 한국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타이완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그의 혁명은 타이완을 정복함으로서 비로소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한국전쟁 중에도 중국 연안의 도서를 놓고 양측의 소소한 충돌은 반복되고 있었다. 1952년 10월 국민정부군 제75사단 6천여명이 푸젠성의 난르다오(南日島)를 기습 공격하여 공산군 제83사단을 격파하고 포로 8백여명과 소총 1천정, 각종 야포 40여문을 노획한 후 타이완으로 철수하였다. 하이난다오 함락 이후 수세에 몰려있던 장제스로서는 모처럼의 승리였다. 다음해 2월에는 국민정부군 유격대 3천여명이 난르다오 남서쪽에 있는 메이쩌우다오(湄州岛)를 공격하여 수비대를 전멸시키고 90명을 포로로 한 후 철수하였다.


한국전쟁 휴전 조인을 앞둔 1953년 7월 16일, 푸젠성 구국방공총사령 후롄(胡璉)이 지휘하는 1만여명의 국민정부군이 둥샨다오(東山島)를 공격하였다. 이전의 소규모 기습작전과는 달리, 포병과 전차 중대, 해공군도 동원된 대규모 공격으로 대륙에서 쫓겨난 이래 최대의 반격이었다. 해상에서의 맹렬한 포격과 항공 지원 아래 해안가에 국민정부군 해병대가 상륙하고 하늘에서는 C-47 수송기 17대에서 2개 공수 중대 500여명이 낙하하였다. 하지만 공산군의 강력한 저항에다 증원군이 투입되면서 3일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국민정부군은 진먼다오로 철수하였다. 국민정부군의 사상자는 약 3천명에 달했고 7백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특히 공수부대의 손실은 80% 이상에 달했다. 야심찬 공격치고는 참담한 실패였다. 반면, 공산군은 2천여명이 죽거나 다쳤고 5백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둥샨다오의 공격은 장제스의 오기에 불과했다. 이미 중공과 타이완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많은 희생을 치루어 대륙 연안의 작은 섬을 탈환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며 지킬 역량은 있는가. 타이완을 방비하기도 벅찬 판에 병력과 물자를 낭비할 뿐이었다. 단지 "대륙 반공을 포기하지 않았다"라는 심리적인 위안을 얻기 위함이었다.


대륙에서 마오쩌둥이 전제화되는 동안, 장제스 역시 타이완에서 전제화되어 갔다.장제스는 총통 임기를 초법적으로 연장하면서 사실상 종신 총통이 되었다. 타이완 정계는 그와 함께 넘어온 외성인(대륙 출신)들이 독점했고 내성인(타이완 현지인)들은 철저하게 배척되었다. 장징궈는 장제스의 오른팔로서 정보 기관과 비밀 경찰을 장악하고 타이완에 사는 모든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였다. 또한 장제스는 훗날 장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기로 마음먹고 장징궈의 집권에 훼방이 되는 자들을 하나씩 제거하였다. 그 중의 한명이 외교부장이자 3대 타이완 주석을 지낸 우궈청(吳國楨)이었고 또 한명은 육군 총사령관 쑨리런이었다. 두 사람 모두 미국 유학파로 미국 정부와 친분이 있었다. 그들은 타이완의 민주화를 내세우며 미국을 등에 업고 장제스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결국 총통의 심기를 건드린 우궈청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다시는 타이완으로 돌아올 수 없었고 쑨리런은 쿠테타를 기도했다는 모함을 받아 체포되어 38년이나 가택 연금되어야 했다. 이로서 타이완은 "장씨 왕국"이 되었다.


한국전쟁 동안 장제스의 공세에도 수세로만 일관하던 공산군은 한국전쟁이 끝나자 강대해진 해공군력을 남쪽으로 돌렸다. 그동안 장제스가 시중에 남은 몇 개의 섬을 밑천삼아 겁없는 도전을 한 것에 대해 응징할 시간이 온 것이었다. 첫번째 목표는 국민정부군의 대륙 반공 거점인 다천다오과 이장산다오였다. 1954년 5월 6일, 공산군은 육해공군 합동으로 다천다오 주변의 섬을 공격해 점령하고 포대를 설치하여 다천다오를 고립시켰다. 11월 1일에는  IL-10, Tu-2 13대로 구성된 폭격기 편대가 Mig-15 전투기 10대의 호위를 받으며 다천다오를 공습했다. 게다가 주변 섬에서 공산군이 쏘아대는 맹렬한 포격을 뒤집어쓴 다천다오는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4일에는 국민정부군 해군의 주력함 가운데 하나인 타이핑호가 위샨열도(渔山列島) 주변을 순찰하던 도중 공산군 어뢰정 4척의 기습 공격을 받아 격침당했고 24명이 전사했다.

장제스는 아연실색하였다. 육군은 말할 것도 없고 그동안 믿어왔던 해공군력에서도 열세에 놓인 것이다. 중공군은 소련제 최신예 제트 항공기와 신형 군함으로 무장한 반면, 국민정부군은 여전히 P-40, F-51과 같은 내전 중에서 사용했던 구식 전투기와 낡은 군함이 전부였다. 숫적으로도 열세였고 질적으로도 열세였다. 믿을 구석은 미국 밖에 없었다. 1954년 12월 2일 예궁차오(葉公超)대만 외교부장과 존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중미공동방어조약(中美共同防禦條約)』에 정식으로 서명하였다. 이로써 타이완은 미국과 정식 군사동맹국이 되어 미국의 보호 아래 들어간 것이다. 1955년 11월에는 미 해군의 제7함대 사령관이 지휘하는 미군 타이완 방위사령부(美軍協防臺灣司令部)도 창설되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이미 미국과 진검 승부를 벌였던 중공이 그런 정도로 꼬리를 내릴 리 없었다. 또한 마오쩌둥은 정치적으로 복잡한 미국이 이제와서 타이완을 위해 중공과 전면전을 선택할 리 없다고 판단하였다.

1955년 1월 초 공산군은 150척의 군함과 항공기 250대를 투입하여 이장산다오 주변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하고 보급선을 끊었다. 많은 피해를 입은 국민정부 함대는 속수무책으로 물러나야 했고 낡은 프롭 항공기만 보유한 공군은 거리가 너무 멀어 출동할 수도 없었다. 18일 오전 8시, 함포와 맞은편의 해안포대에서 맹렬한 포격을 시작하였다. 하늘에서는 소련제 제트 폭격기들이 날아와 쉴새없이 폭탄을 떨어뜨렸다. 4만발에 달하는 포탄이 쏟아지자 손바닥만한 이장산다오는 순식간에 섬 전체가 포연에 휩싸였고 진지와 참호, 방어시설의 태반이 파괴되었다.

오후 2시 반 공산군 제60사단 7천명이 이장산다오에 상륙하였다. 수비대는 고작 720여명에 불과했고 완전히 고립되었다. 약 50시간에 걸친 치열한 격전 끝에 1월 20일 오후 4시 함락당했다. 하지만 국민정부군은 끝까지 싸워 압도적으로 우세한 공산군에게 1500여명에 달하는 손실을 입혔다. 수비대 또한 지휘관 왕셩밍(王生明) 상교(대령)를 포함해 대부분 장렬하게 전사했고 극소수만이 포로가 되었다.

▲ 이장산다오를 공격 중인 공산군. 전투는 전에 없이 치열하였다. 

이장산다오가 함락되는 동안 미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강건너 불구경만 하였다. 중미공동방위조약에서 미국이 보장하는 보호 구역은 타이완과 펑후열도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외의 진먼다오나 마쭈도, 다천다오(大陳島)와 같은 대륙과 인접한 도서는 예외였다. 미국으로서는 이 섬들은 지킬 가치가 없었기에 오히려 다천다오에서 철수하라고 강요하였다. 장제스는 물러날 수 없으며 자력으로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공산군이 공격하면 어차피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결국 장제스는 다천다오를 포기하였다.

2월 6일, 항모 6척을 포함해 대소 군함 130여척에 달하는 미 제7함대가 타이완 해협에 전개하여 장대한 무력 시위를 하는 가운데, 주둔군 1만 4천명과 주민 1만 7천명 등 약 3만여명이 해상으로 철수하였다. 장징궈는 이들을 격려하면서 "우리는 곧 이곳으로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말했지만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미국과 공동방위조약을 체결하면서 한때 의기양양했던 장제스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반면, 마오쩌둥에게는 또 한번의 승리였고 미국과 장제스에게 중공의 실력을 증명하였다. 타이완이 미국과 어떤 조약을 맺건 중공은 상관하지 않고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보여준 셈이었다. 다음 목표는 진먼다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