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 집단은 미 제국주의의 지지 아래 구차적 목숨을 부지하면서도 부단히 대륙에 도발하고 있다. 중국 인민은 반드시 타이완을 해방할 것이며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인민일보 1954. 7. 23일자 사설 "타이완을 반드시 해방시켜야 한다(一定要解放台灣)"에서
1954년 9월 3일 오후 2시경, 진먼다오 맞은편의 공산군 진지에서 2백여문의 야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진먼다오는 순식간에 포염에 휩싸였다. 이른바 "9.3포격전" 또는 "제1차 타이완 해협 위기"의 시작이었다. 그 날 저녁까지 진먼다오에 떨어진 공산군의 포탄은 5천발이 넘었다. 9개의 포병진지가 박살나고 7척의 군함이 손상을 입었으며 미 군사고문단 장교 2명이 전사했다.
보고를 받은 장제스 역시 반격을 명령했다. 진먼다오에 배치된 야포들이 포문을 열었다. 또한 다수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샤먼을 공습하여 공산군 진지와 병영, 창고를 폭격하고 항구에 집결해 있던 다수의 정크선을 격침시켰다. 중공 공군이 출동하지 않았기에 공중전은 없었지만 지상에서 쏘는 고사포 사격으로 국민정부 공군도 20여대의 항공기가 격추당하는 손실을 입었다. 5년 전 1만여명의 공산군이 구닝터우에 상륙했다가 전멸당한 이래 최대의 공세였다. 보름에 걸친 쌍방의 치열한 포격전은 9월 23일에 일단 멈추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종종 재개되어 포탄을 주고 받았다. 또한 진먼다오에 상륙하기 위해 샤먼 주변에 10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집결시켰지만 준비 부족으로 실제 상륙은 실시되지 않았다. 구닝터우 참패의 충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9.3포격전은 1960년대 말까지 진먼다오를 놓고 반복될 격전의 전초전일 뿐이었다.
▲ 9.3포격전 당시 진먼다오를 향해 포격 중인 공산군
한국전쟁이 끝나자 말자 마오쩌둥의 눈은 다시 타이완으로 향했다. 타이완을 점령하려면 관문에 해당하는 진먼다오와 마쭈도를 반드시 점령해야 했다. 1953년 10월 중공 중앙군사위원회에서 진먼다오 해방 계획이 제출되어 마오쩌둥의 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인도차이나 전쟁이 격화되면서 일시 유보되었다. 1954년 3월 13일 디엔비엔푸를 놓고 베트민과 프랑스군 사이에 두달에 걸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프랑스군 수비대 1만1천여명이 항복하였다. 7월 21일 제네바 정전 협정이 체결되어 인도차이나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중공은 다시 타이완으로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육군은 물론 해공군력에서도 양측의 군사적 균형은 중공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중공은 3천여대에 달하는 소련제 항공기 외에도 순양함, 구축함과 같은 대형 군함과 잠수함, 상륙함을 꾸준히 늘려나갔고 태반을 타이완 해협에 배치하여 타이완을 압도하였다. 반면, 미국은 장제스가 무모한 대륙 반공에 나서지 않도록 최소한의 수준으로 원조를 억제하였다. 1953년 6월에야 F-84 제트 전투기가 타이완에 배치되기 시작했지만 Mig-15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미 한반도의 상공에서 증명된데다 숫적으로도 압도적으로 열세했다. 한국전쟁에서 대활약을 했던 F-86F 전투기는 제1차 타이완 해협 위기 직후인 1954년 12월 말부터 공여되어 제2차 타이완 해협 위기 직전인 1958년까지 총 320대가 제공되었다. 여기에 신형 사인더 와인더 공대공 미사일이 배치되면서 비로소 타이완은 타이완 해협의 제공권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또한 유엔 감시단에 의해 휴전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한반도와 달리, 양안은 아무런 협정도 체결하지 않았기에 국공내전 이래 크고 작은 충돌이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일촉즉발의 긴장관계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태도는 미중공동방위조약의 체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애매모호하였다. 미국은 타이완 해협에 제7함대를 배치하면서도 진먼다오와 마쭈도의 방위는 보장하지 않았고 이 지역에 배치된 병력은 미국의 원조 계획에서 제외되면서 무기와 장비 또한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1955년 연초부터 중공의 공세가 점점 강화되면서 이장산다오와 다천다오가 함락되었다. 중공이 본격적으로 타이완을 위협하자 1월 24일 미 의회도 《타이완 결의안》을 선언하였다.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언제라도 타이완에 무력 개입할 수 있다는 일종의 엄포였다.
하지만 중공이 미국과의 일전을 각오하고 총력을 기울여 타이완을 침공한다면 미국은 어디까지 개입할 것인가. 한국전쟁에서 끝까지 중공과의 정면대결을 회피했던 미국이 타이완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미국은 타이완 때문에 제3차 세계대전조차 불사할 각오가 있는가. 타이완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아이젠하워의 성명은 진심인가, 단순한 허세인가. 중공이 도발을 반복한 이유는 바로 이런 미국의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미국이 타이완을 방위하는 이유는 공산주의 세력이 동중국해와 필리핀을 위협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함이지 장제스의 대륙 수복을 돕기 위함이 아니었다. 인구는 고작 1천만명에 면적은 네덜란드보다 작은 섬에 고립되어 미국의 원조 없이는 자력으로 버티지도 못하는 장제스가 세계에서 인구는 가장 많고 3번째로 큰 나라를 정복하겠다는 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허황된 소리였다. 결국 자신의 망상을 미국의 힘을 빌려 실현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진먼다오와 마쭈도는 그 망상의 첨병이었다. 하지만 대륙에서는 너무 가까운 반면 타이완과는 너무 멀었다. 공격받기는 쉽지만 지키기는 어려웠다. 군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포기되어야 마땅했다.
아이젠하워를 비롯한 미 행정부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섬을 위해 전쟁을 하는 것은 미국의 이익에 위배된다"며 장제스에게 진먼다오와 마쭈도를 포기할 것을 꾸준히 요구하였다. 또한 뉴질랜드는 유엔에 "타이완 해협 휴전안"을 제출하고 영국은 중공과 타이완 양측에 "타이완은 진먼다오와 마쭈도를 포기하고 중국은 타이완에 대한 무력 사용을 포기한다"는 상호 양보안을 제안하였다.
반면, "대륙 반공"을 내세워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장제스에게 두 섬은 대륙과 타이완을 정치적으로 잇는 마지막 연결 고리였다. 이 곳마저 포기한다면 대륙 반공의 구호 또한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대륙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그로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었다.
따라서 장제스는 국제 사회의 강력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내정간섭"이라고 일축하면서 오히려 진먼다오, 마쭈도의 수비병력을 꾸준히 늘렸다. 1958년 6월 진먼다오에 주둔한 수비대는 6개 사단, 8개 포병 대대, 5개 고사포 대대, 3개 기갑 대대 등 약 10만명에 달했고 마쭈도에도 4만명의 병력이 주둔하였다. 약 30만명 정도였던 전체 타이완군의 절반에 달하는 병력이었다. 또한 해안가에는 전기 철조망과 견고한 콘크리트 보루가 설치되고 그 앞에는 지뢰가 매설되었다. 섬 지하에는 대규모 갱도가 건설되는 등 섬 전체가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다.
▲ 진먼다오 곳곳에 건설된 지하 갱도. 타이완은 공산군의 공격에 대비해 1950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섬 전체를 그물망마냥 연결하고 탄약과 식량을 비축하는 등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12개소의 대형 대피소와 지하 사령부, 화생방 방호시설에 지하 비행장까지 갖추었다. 물론 중공이 총력을 다하여 공격을 했다면 결국에는 점령했겠지만 엄청난 사상자와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그 사이 미국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수차례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중공이 끝까지 상륙작전을 시도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제1차 타이완 해협 위기 이후 한동안 소강 상태가 되었다. 중공은 장제스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진먼다오와 마쭈도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데다 "중미공동방위협정"이 체결되면서 자칫 미국의 개입을 불러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공과 미국의 신경전은 더욱 첨예해졌다. 한편으로 중공과 소련의 관계 또한 악화되었다. 마오쩌둥은 중공을 푸대접하며 서방과의 평화 공존을 추진하는 흐루쇼프(Nikita Khrushchyov)에게 서운한 감정을 공공연히 드러내면서 그를 겁쟁이라고 불렀다. 1962년 10월 세계가 핵전쟁의 문턱까지 갔던 쿠바 미사일 위기 역시 마오쩌둥이 흐루쇼프에 대해 같은 사회주의 형제인 쿠바를 포기하려고 한다며 비난하자 압력에 못이긴 흐루쇼프가 대미 강경책으로 전환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중공은 소련더러 "수정주의"라고 비난하고 소련은 중공더러 "교조주의"라고 날을 세웠다.
1958년 7월 31일 흐루쇼프가 베이징을 방문하였다. 흐루쇼프는 마오쩌둥을 달래려고 했지만 오히려 불신감만 샀다. 게다가 흐루쇼프가 타이완에 대한 무력 사용을 포기하라고 종용하자 마오쩌둥은 극도의 불쾌감을 드러내었고 그가 돌아간 후 측근들에게 "이것은 우리 집안의 문제인데 왜 남이 간섭하느냐" "그가 미국과 잘 지내고 싶다면 우리가 축포를 터뜨려 주겠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막상 십수년 뒤 서방과의 관계 개선에 성공한 쪽은 중공이었고 소련은 1980년대까지도 극한 갈등에 유지했다는 점은 실로 아이러니일 것이다.
흐루쇼프가 돌아가자말자 중공은 더욱 호전적인 발언을 일삼으며 "어떤 대가를 치루어서라도 진먼다오와 마쭈도를 탈환하고 타이완을 해방시키겠다"고 선언하였다. 푸젠성 일대의 비행장에 전투기들이 발진 준비를 하고 군함들이 집결하여 대대적인 상륙작전을 준비하였다. 장제스 역시 모든 장병들의 휴가를 취소하고 전군에 전시 경계태세를 명령하였다. 타이완 해협에는 다시 긴장감이 감돌았다.
중공의 국내 정세도 썩 좋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야심찬 "대약진운동"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1958년부터 중국 역사상 최악의 대기근이 덥쳐왔다. 수천만명이 굶어죽었다. 이는 자연재해 때문이 아니라 무지한 지도자의 잘못된 정책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흐루쇼프가 집권한 뒤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소련인 기술자들이 철수하고 더 이상 원조를 받을 수 없게 되자 마오쩌둥은 감정적으로 자력 갱생식 경제 건설과 농업 생산 향상을 지시하였다. "농민의 아들"이라고 자처했던 그는 막상 평생 농사를 지어본 적도 없었고 농촌에 대한 기초 상식도 없었다. 무리한 성과 경쟁 속에서 통계 조작과 허위 보고가 만연했다. 뒤늦게 펑더화이와 천이가 직접 현장을 돌아본 후 충격을 받고 중앙에 솔직하게 보고했지만 마오쩌둥은 도리어 그들을 호되게 비판하고 입을 막았다.

▲ 대약진운동 당시 철강증산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중국 농민들. 마오쩌둥은 "7년 내에 영국을, 10년 내에 미국을 따라잡겠다"는 거창한 구호 아래 전 국민들을 무계획적으로 철강 생산에 투입했다. 하지만 여기서 생산된 철은 아무 쓸모도 없었다. 이 때문에 농사는 제대로 짓지 못한 반면 관료들이 수확량을 터무니없이 부풀여 보고하면서 수탈량은 오히려 늘어나 유례없는 전국적인 대기근이 시작되었다. 마오쩌둥은 수탈한 식량을 해외에 무상 원조했지만 막상 국민들의 굶주림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지도자로서 그의 인식 부족과 허식에만 매달리는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8월 17일에 열린 중앙 정치국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진먼다오와 마쭈도를 포격하라고 지시하였다. 위기 상황을 조장하여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상투적인 수법이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미국과의 정면 충돌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따라서 진먼다오를 포격하더라도 미국 항공기나 군함에 대한 공격은 금지시켰다. 샤먼과 그 주변으로 18개 사단 21만명과 각종 항공기 800여대가 집결하고 동해 함대와 남해 함대가 출동 준비를 마친 채 명령만 기다렸다.
진먼다오와 마쭈도의 하늘에서는 이미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1958년 7월 29일 산터우 상공에서 공중전이 벌어졌다. 공산군의 신형 Mig-17 전투기 4대와 공중전이 벌어져 F-84 전투기 2대가 격추되고 1대가 손상을 입었다. 소련의 막대한 군사 원조를 받은 중공은 타이완 해협 주변에 Mig-15/17, Tu-2 중폭격기, Il-28 경폭격기 등 1천여대 이상의 항공기를 배치하여 타이완을 완전히 압도하였다. 제공권에서 열세에 놓인 타이완은 미국에 F-86 전투기의 공여를 요청하였다. 미국은 당장 150대의 전투기를 원조하였다. 중공군의 공격에 대항해 타이완군도 반격에 나서 진먼다오 맞은편의 샤먼과 푸저우를 포격하고 공습하였다.
8월 15일 마쭈도에 대한 공산군의 포격과 미그기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이날 마쭈도 상공에서 벌어진 공중전에서는 타이완 공군의 F-86 전투기가 한대도 잃지 않고 중공군 Mig-17 전투기 3대를 격추시켰다. 반면, 진먼다오는 조용하였다.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와 같았다. 이는 장제스의 눈을 마쭈도로 돌리기 위한 소위 "성동격서(聲東擊西, 동쪽에서 소란을 피운 다음 서쪽을 친다는 뜻)"의 전략이었다. 8월 18일 장제스는 군함을 타고 직접 진먼다오와 마쭈도를 순시하며 방어 태세를 점검하였다.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8월 23일 아침 8시 국방부장 위다웨이(兪大維)가 진먼다오를 방문하여 진먼다오 위수 사령관 후롄(胡璉)과 함께 방어 시설을 시찰하였다.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서도 진먼다오는 평온하였고 농민들은 평소처럼 밭에서 농사에 여념이 없었다. 저녁 6시 위다웨이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참모들과 함께 타이우산(太武山)에 있는 사령부 주변을 산책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공산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560여문에 달하는 야포가 위장막을 걷고 일제히 불을 뿜었다.
2시간 동안 공산군이 발사한 포탄은 5만7천발에 달했다. 진먼다오의 통신선로, 주요 진지, 비행장, 탄약고, 유류창고, 항구가 파괴되었다. 사상자는 500여명에 달했다. 사령부 주변에도 포탄이 떨어져 위다웨이는 목숨은 건졌지만 중상을 입었다. 또한 함께 있던 세명의 부사령관 중 두명이 현장에서 절명하고 한명은 3일 뒤에 죽었다. 2명의 미군 군사 고문도 죽었다. 이른바 "8.23포격전" 또는 "제2차 타이완 해협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후롄이 위다웨이를 부축하여 간신히 사령부로 돌아온 후 반격 명령을 내렸지만 전화기는 불통이었다. 포격으로 통신선이 모두 끊어진 것이다. 그는 포병진지로 전령을 보내어 명령을 전달했다. 공산군의 최초 포격이 시작된 지 20분 후 국민정부군 포병들도 응사에 나섰다.
▲ 지하 갱도에서 공산군을 향해 105mm 야포를 발사하는 국민정부군 포병
다음날에도 양측의 맹렬한 포격이 이어졌다. 공산군은 진먼다오의 국민정부군 포병진지를 집중 강타했고 국민정부군도 반격하여 공산군의 포병진지를 파괴하면서 공산군의 포격은 일시적으로 기세가 줄어들었다. 또한 해상과 상공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7척의 국민정부군 군함이 증원군과 물자를 실고 진먼다오에 접근하다가 공산군의 어뢰 공격을 받아 전차 양륙정 "타이셩(台生)"이 격침되어 200여명이 죽었고 "쭝하이(中海)" 또한 대파되어 2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공산군도 여러 척의 어뢰정을 잃었지만 포격전은 갈수록 격렬해졌다. 8월 27일 공산군 푸젠 전선사령부 명의로 진먼다오의 수비대에 대한 항복 권고문이 전달되었다. "진먼다오는 절망상태이다. 중국군의 진먼다오 상륙은 이미 시간문제이다. 우리는 귀하가 결단을 내려 투항할 것을 권고한다." 물론 후롄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진먼다오 포격을 보고받은 아이젠하워는 즉시 "미국은 중공의 진먼다오 공격을 결코 묵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합참의장 트위닝(Nathan Farragut Twining)도 미군을 파견하여 타이완군과 함께 진먼다오를 끝까지 사수할 것이며 중공은 즉시 진먼다오 주변에서 해공군을 철수시킬 것과 여차하면 핵무기의 사용조차 불사하겠다고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9월 2일 진먼다오 인근의 해상에서 이른바 "9.2 해전"이 벌어졌다. 전차 상륙함 1척과 3척의 포함으로 편성된 국민정부군 해군과 12척의 공산군 어뢰정 사이에 벌어진 해전에서 국민정부군은 포함 2척이 대파되어 3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공산군 역시 다수의 어뢰정이 격침당했다.
9월 3일 7척의 항모와 130여척의 군함, 해병대 4천여명으로 편성된 미 제7함대가 타이완 해협으로 출동했다. 마오쩌둥은 즉각 3일간 포격 중지를 지시했다. 또한 12해리 영해를 선언하고 외국 선박과 항공기의 침입을 용인하지 않겠다고 경고하였다. 이대로라면 진먼다오도 중공의 영해에 포함되었다. 이는 미국이 어디까지 개입할 것인지를 시험하기 위한 술수였다. 물론 미국은 이를 무시하고 국민정부 해군과 함께 진먼다오 인근 해상을 장악한 채 병력과 물자 수송을 호위했지만 중공은 묵인하였고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다.

▲ 타이완 해협을 순찰 중인 미 제7함대 군함들
9월 11일 진먼다오의 국민정부군 포병이 샤먼을 향해 대대적으로 포격하여 공산군 포병 진지와 병기창, 막사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면서 잠시 멈추었던 포격전은 다시 시작되었다. 장제스는 중공과 미국이 타이완을 배제한 채 협상 테이블에 앉아 타협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 했다. 따라서 긴장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공격의 재개를 명령한 것이다. 하지만 9월 15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미-중 간에 대사급 회담이 개최되었다. 미국은 중공이 진먼다오 포격을 즉시 중지하고 타이완에 대해 무력 사용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것을 요구하였다. 중공은 타이완은 중국의 영토이며 장제스가 진먼다오와 마쭈도에서 철수하는 것이 선결 과제라고 맞섰다.
양측의 주장은 팽팽하게 맞섰지만, 한편으로 미국은 장제스에게 미 육군 5개 사단에 해당하는 군사 무기를 제공할테니 진먼다오, 마쭈도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라고 권고하였다. 하지만 장제스는 거부하고 미국을 강력히 비난하는 한편, 미국의 도움이 없더라도 진먼다오와 마쭈도를 끝까지 지키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덜레스 국무장관은 "장제스가 두 섬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는 것은 어리석고 조심스럽지 못한 행동"이라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중국과 타이완을 분리시키고 타이완을 별도의 국가로 독립시키는데 있었다. 이는 마오쩌둥도 장제스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하나의 중국"을 원했다. 중국인 특유의 "중화사상"을 알지 못했던 미국으로서는 타이완에 고립된 장제스가 대륙 수복을 그토록 고집하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장제스가 고집을 부리는 이상 타이완을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장제스를 지원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미국이 진퇴양난에 빠진 채 두 세력의 싸움에 마지못해 끌려들어간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9월말까지 진먼다오를 놓고 양쪽의 포격전은 반복되었고 해상과 공중에서도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9월 18일 진먼다오 상공에서 Mig-17 5대를 격추시켜 제공권에서 우위를 확보한 타이완은 9월 24일에는 124대의 F-86F 전투기와 14대의 RF-84F 정찰기로 구성된 대편대를 출격시켜 푸젠성과 저장성 일대에 대한 무력 시위와 강행 정찰을 실시하였다. 중공 역시 250대의 Mig-15/17 전투기를 출격시키면서 최대의 공중전이 벌어졌다.
특히 원저우(温州) 상공에서 F-86F 전투기 18대와 Mig-17 전투기 32대 사이에 벌어진 공중전에서는 타이완 공군은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당시로는 최신형 공대공 미사일이었던 사인더와인더 미사일을 사용하여 아무런 피해없이 Mig-17 전투기 10대를 격추시키는 대전과를 올렸다. 또한 해상에서도 진먼다오로 향하는 국민정부군 보급선단을 공산군이 어뢰정과 포정으로 기습하는 등 진먼다오 위기 동안 총 18차례의 해전과 10차례의 공중전이 벌어졌다. 지상과는 달리, 제해, 제공권에서는 타이완측이 확실하게 우위를 차지했다. 이는 중국 해공군이 양적 우세에 비해 기술적으로나 숙련도에서 한 수 아래 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공산군은 구축함 이상의 대형군함이나 잠수함은 한번도 출동시키지 않았다. 잘 훈련된 간부와 수병을 육성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다 소련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작전 능력이 매우 낮아 전투에 투입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교리상으로도 마오쩌둥은 적극적인 함대 결전으로 제해권을 확보하기보다는 인민전쟁 식의 "게릴라전"을 지시하였다. 지도부가 해전에 대한 이해가 낮다보니 해전 역시 지상 전투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였고 해군 수뇌부 역시 주로 홍군 시절의 간부들이 해군으로 넘어왔기에 구태의연한 유격전식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당초 손쉽게 끝나리라 생각했던 예상과 달리 전세가 좀처럼 유리하지 못하자 10월 6일 중공 국방부장 펑더화이는 "타이완 동포에 고함(告台灣同胞書)"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는 미국은 중국과 타이완 공통의 적이며 언젠가는 타이완을 버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7일 동안 포격을 중지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였다. "우리는 모두 같은 중국인이다. 36계에서 평화가 가장 상책이다. 미국은 중국과 타이완을 분리시키려는 음모를 꾀하고 있다 하지만 두개의 중국은 있을 수 없다. 미 제국주의는 공동의 적이다. 우리는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상투적인 평화 공세였다. 13일에도 마오쩌둥은 재차 성명을 발표하여 포격 중지를 2주 더 연장한다고 선언하였다.
소강 상태를 이용해 미국은 장제스에게 진먼다오와 마쭈도의 포기를 재차 강요하였다. 하지만 장제스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고 또한 10월 20일 오후 진먼다오로 향하는 보급 선단이 미 군함의 호위를 받으며 접근하자 공산군이 포격을 하면서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포격은 5일만에 멈추었지만 미국은 장제스의 고집에 손을 들었고 더 이상 두 섬에서 철수하라고 압박하지 않았다. 대신 장제스도 양보해야 했다. 10월 23일 미국과 타이완은 연합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은 진먼다오와 마쭈도의 방위를 보장하고 장제스는 대신 대륙에 대한 무력 사용을 포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장제스는 그동안 고수했던 "대륙 수복"을 사실상 포기하였다.
이에 대해 펑더화이는 10월 25일 "타이완 동포들에게 다시 고함(再告台灣同胞書)"을 발표하여 두개의 중국 정책을 재차 반대하는 한편, 소위 "쌍일정화(雙日停火)"라 하여 홀수날은 포격하고 짝수날은 쉰다고 선언하였다. 국공내전 이래 최대의 무력 충돌이었던 진먼다오 포격전은 이렇게 흐지부지하게 막을 내렸다. 이는 중공의 당초 목적이 첫째로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둘째로 미국의 반응을 시험하기 위함이었지, 본격적인 "타이완 해방"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공산군은 타이완은 커녕, 진먼다오조차 점령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또한 미국이 중공의 공격을 결코 묵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중공은 사실상 무력으로 타이완을 점령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였다.
이후에도 공산군이 진먼다오를 향해 포격하고 국민정부군이 반격하는 양상은 1970년대 말까지 되풀이 되었지만 일종의 무력 시위일 뿐 서로 무인지대를 겨냥했기에 인명 손실은 없었다. 물론 해상과 공중에서는 양측 군함과 전투기 사이에 전투가 간간히 벌어졌다. 하지만 직접적인 대규모 무력 충돌은 없었다. 1979년 1월 1일 미중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진먼다오 포격전은 완전히 멈추었다. 타이완 문제는 더 이상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