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10월부터 11월까지 약 한 달여 동안 히말라야의 고도에서 벌어진 중국과 인도 양 대국의 싸움은 인도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중국군의 공격 앞에 인도군은 변변히 싸우지도 못한 채 완전히 붕괴하였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사상자를 내었다. 인도군의 손실은 제62여단장 호샤르 싱 준장을 포함하여 4천여명이 전사했고 실종자 1700여명 등 약 1만여명에 달했다. 이것은 일선에 투입된 전체 인도군의 거의 1/3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또한 제7여단장 존 달비 준장을 비롯해 약 4천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반면, 중국군의 손실은 전사 700여명, 부상자 1700여명에 불과하여 인도군의 1/4도 되지 않았다. 또한 포로가 된 병사는 단 한명도 없었다.
패배의 소식이 알려지자 수도 뉴델리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중-인 국경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렸고 인도는 중국군의 전진을 저지할 수 있는 병력이 없었다. 만약 중국군이 여세를 몰아서 파죽지세로 남하한다면 무엇으로 막을 것인가. 중국과 인접한 인도 동북부의 도시들에 소개령이 내려졌다. 또한 네루는 그동안 고수해 왔던 비동맹의 원칙을 스스로 깨뜨리고 미국 케네디 대통령에게 즉각적인 개입과 폭격기 부대의 파병을 요청했다. 절대절명의 와중에 중국군은 전진을 멈추었다. 마오쩌둥이 전투 중지 명령과 철수를 명령한 것이다. 공세를 개시한 지 꼭 한달 째였다. 그는 깊숙이 추격하여 인도에게 더 큰 굴욕을 주는 대신, 중국의 관대함을 보여주겠다고 세상에 천명하였다.
전쟁은 끝났지만 인도가 받은 충격은 컸다. 국방장관을 비롯하여 육군참모총장, 제4군단장 등 군부의 주요 인사들이 지휘 실패의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인도 독립의 아버지"인 네루 역시 책임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전쟁을 직접 주도했던 그는 정치적인 곤경에 빠졌고 절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약 1년 8개월 뒤인 1964년 5월 27일 서거하였다.
이야기를 처음으로 돌려보자. 흔히 중국을 "용", 인도를 "코끼리"에 비유한다. 이는 두 나라의 파워를 상징한다. 중국과 인도는 많은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 단순히 큰 나라가 아니라 대륙이라고 할 만큼 광대한 영토와 세계에서 1, 2위를 다투는 방대한 인구, 풍부한 자원, 무궁무진한 잠재력, 그리고 빛나는 전통 문화 유산을 가졌다는 점이다. 또한 핵무기와 ICBM, 항공모함을 보유한 군사 대국이기도 하다.
양국은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국가로서 5천년 이상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각각 동북아와 서남아에서 대제국을 건설하고 종주국으로서 주변 지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오랫동안 패권 국가의 지위를 누렸다. 하지만 두 대국이 직접 무력으로 충돌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지리적으로 양국의 가운데에는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해발 4천m가 넘는 험준한 히말라야 산맥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국과 인도는 자신의 헤게모니를 억지로 강요하기보다는 서로 동등한 지위를 인정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업과 문화를 주고 받으며 번창하였다. 소설 서유기의 모티브가 된 당나라 고승 현장 법사가 불경을 찾아 인도를 여행한 후 <대당서역기>를 저술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마르코 폴로는 인도를 거쳐서 중국으로 들어가서 칸이었던 쿠빌라이에게 인도의 정황을 알려주기도 했고 명나라 시절 정화가 지휘하는 중국의 대함대는 실론섬과 캘리컷을 비롯해 인도의 여러 항구를 방문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두 나라 사이에 부침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원을 정복한 청나라는 18세기에 와서 티베트를 복속시키고 수도 라샤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중국과 인도 양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국경을 맞대게 된 것이다. 18세기 말 청군과 네팔 왕국 사이에서 두차례의 전쟁이 일어났고 1841년 5월에는 인도 북서부를 지배하던 시크 제국(Sikh Empire)이 티베트 서남부를 침공하였다. 조라와르 싱(Zorawar Singh)가 지휘하는 5천명의 시크 군대는 험준한 지형과 희박한 산소, 추위와 눈, 비 등 혹독한 환경을 어렵사리 극복하면서 진격했지만 청-티베트 연합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결국 시크 군대는 참패하여 조라와르 싱도 전사하고 7백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청-티베트 연합군은 여세를 몰아서 인도 북서부의 라다크(Ladakh) 지방을 침공했지만 이번에는 시크 군대의 반격으로 격퇴당하였고 양국은 1842년 9월 추슐(Chushul) 조약을 체결하여 정전에 합의하였다.
19세기에 오면서 중국과 인도는 서구 세력의 거센 침략에 시달리면서 쇠락하였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중국 역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한 채 반식민지 신세였다. 아편전쟁에서 영국은 약 7천여명에 달하는 인도 출신의 세포이 병사들을 청군과의 전투에 투입하였고 1899년 의화단의 난 당시 중국으로 출동한 영국군도 대부분 인도인들이었다. 이후에도 베이징과 상하이, 광저우, 홍콩 등 중국의 주요 도시에는 인도인 병사들이 영국 조계의 경비를 맡았고 중국인들이 반영 민족주의 투쟁을 벌일 때마다 진압에 나서야 했다. 서구의 중국 침략에 인도인들은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첨병에 서게 된 것이다.
당시 인도 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를 주도하던 간디, 네루는 반영 독립 운동과 함께 영국 정부가 인도인들을 중국 침략에 이용하는 것을 반대하고 중국 내 영국 군대의 전면 철수를 요구하였다. 또한 광저우로 내려온 쑨원이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자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상호 협력 방안을 강구하였다. 1927년에는 인도 국민회의의 요청을 받아서 쑨원의 미망인인 쑹칭링이 인도를 방문하려 했으나 영국의 입국 거부로 무산되기도 했다.
20세기 중국-인도 양국의 역사에 크나큰 획을 그은 사람은 다름아닌 장제스이다. 그는 중인문화학회의 설립을 지원하고 문화와 학술, 종교의 활발한 교류를 후원하였다. 1937년에는 인도의 시인 타고르의 요청을 받아서 인도 북서부 벵갈 지방의 도시 산티니케탄(Shantiniketan)에 대형 도서관을 건립하는데 5만 루피에 달하는 거금을 내놓기도 했다. 덕분에 중국 국민당과 인도 국민회의의 우호는 한층 두터워질 수 있었다. 1937년 7월 7일 이른바 일본의 "7.7 사변"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네루의 측근인 페로즈 간디(Feroz Gandhi)가 네루에게 의료 지원단을 조직하여 중국으로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참고로, 페로즈 간디는 우리가 잘 아는 마하트마 간디와는 직접적인 혈연 관계는 없지만 인도의 명문 가문 출신으로 네루의 딸이자 훗날의 인도 총리가 되는 인디라 간디의 부군이기도 하다.
또한 인도 국민회의는 일본을 침략국으로 규정하고 인도 사회에서 대대적인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을 전개하였다. 인도인들은 장제스의 대일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고 의료품을 비롯한 각종 물품과 후원금의 기부가 전국에서 쏟아졌다. 이는 국제 연맹과 구미 열강들이 일본과의 마찰을 우려하여 개입을 주저하는 상황에서 국제적으로 고립된 중국에 큰 힘이 되었다. 또한 인도인들이 의용 부대를 조직하여 중국을 지원하자는 제안도 나왔으나 네루는 의용부대의 파견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대신 5명의 인도인 의사로 구성된 의료지원단이 파견되었고 이들은 처음에는 한커우와 충칭에서 활동하다가 나중에는 중공의 심장부인 옌안으로 가서 인도와 중공 간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당시 중국 내 국공 양당의 껄끄러운 관계에도 불구하고 인도인 의사들이 옌안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만 해도 국공합작이 유지되고 있었고 이들이 좌파 계열이었기 때문이었다.
1939년 8월에는 네루가 중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서 중국을 방문하였다. 8월 20일 캘커다를 출발한 그는 버마를 거쳐서 23일 오후에 중국의 전시 수도인 충칭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27일에 장제스와 회담을 한 후 9월 9일 인도로 귀국하였다. 네루의 중국 방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국 정부는 반영 투쟁의 지도자인 네루가 중국을 방문하는 것을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썩 달갑지 않게 여겼으며, 충칭은 연일 일본의 폭격을 받고 있어 신변적으로 매우 위험하기도 했다. 실제로 충칭 방문 중 일본의 폭격으로 네루는 여러차례 방공호로 대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양국의 교류를 증진시키고 인도 독립에 중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반드시 중국을 방문해야 한다고 여겼다.
중국은 네루의 방문에 매우 호의적이었으며 정부 각계의 주요 인사들이 나와서 그를 성대하게 환영하였다. 또한 네루의 자서전은 중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중국 대학생들은 그를 反외세 反제국주의의 우상으로 떠받들기도 했다. 네루는 중국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일기에 자신이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고 소감을 남겼다. 그는 옌안을 비롯하여 중국의 많은 곳을 방문할 생각이었지만 때마침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부랴부랴 귀국할 수 밖에 없었고 쑹칭링을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매우 아쉬워했다. 하지만 네루의 중국 방문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이에 고무된 그는 인도와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 여러 국가들이 서로 연계하여 서구에 대항하는 동양 연합을 만들겠다는 구상을 하기도 했다. 네루가 귀국한 뒤 간디 역시 뒤이어 중국을 방문하려 했으나 인도의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고 영국 정부가 비자 발급을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1940년 9월 네루가 반영투쟁을 벌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구금되자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은 영국 외교부를 통하여 그의 석방을 호소하였다. 또한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뒤인 1942년 2월에는 장제스, 쑹메이링 부부가 직접 인도를 방문하였다. 영국 정부는 마지못하여 장제스 부부의 인도 방문을 허가하면서도 간디와 네루를 비롯한 인도 지도자들과 만나지 못하도록 온갖 술수를 꾸미기도 했지만 결국 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영국 입장에서는 장제스가 인도 독립 운동에 불을 지피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처칠은 장제스에게 대놓고 "중영 양국 군대의 협력 관계가 갈수록 커지는 마당에 이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또한 인도-버마의 방위를 위해서 중국의 군사적인 도움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중국이 영국의 인도 지배를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다고 못을 박았다.
장제스는 이런 처칠의 태도에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루즈벨트에게 서신을 보내어 "전쟁 상태에서도 영국은 중국과 인도를 이렇게 대하는데 평화가 오면 과연 어떻겠는가"라고 하면서 인도와 영국의 불화는 전적으로 영국의 오만한 태도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인도를 떠나면서 고별사에서 "나는 우리의 친구인 영국이 하루라도 빨리 인도 독립에 찬성할 것이라고 확신한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인도를 방문하는 도중에 타고르 기념관 건립 등을 위하여 8만 루피의 거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장제스, 쑹메이링과 네루는 공식적인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우정을 긴밀하게 쌓을 수 있었다. 특히 쑹메이링은 이후에도 네루가 투옥될 때마다 매번 그의 석방을 위해 영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등 도움을 주었다.
장제스가 인도에 우호적인 이유는 첫번째는 장제스 자신이 민족주의자로서 같은 아시아 국가이자 피침략국으로 영국의 압제에 시달리는 인도의 처지에 동정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대일전쟁에서 인도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전쟁 초기에 상하이와 톈진, 광저우 등 중국 동부의 주요 항구도시를 모조리 상실한 중국으로서는 그나마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는 영국령 버마였다. 당시 중국은 랭군 항을 통해 무기와 군수품을 철도와 버마 로드를 통해 윈난성으로 수송하여 군대를 무장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전략적 축을 유럽에 두고 있었고 대일작전에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동남아의 식민지에 주둔한 영국군 역시 대부분 2선급 부대로 사기가 매우 형편없었고 싸울 의지가 결여되어 있었다. 실제로 1942년 3월부터 5월까지 진행된 버마 방어전에서 장제스는 3개군 10만명에 달하는 최정예 부대를 파병하여 영국군을 도왔으나 영국군은 중국군에 사전 통보도 없이 일방적으로 버마에서 철수하면서 중국군은 병력의 2/3를 상실하는 대참패를 당했다. 미국 역시 유럽 전쟁에만 모든 관심을 쏟으면서 중국을 일본군의 전진을 지연시키는 방패로만 여기고 있었다. 따라서 장제스로서는 신뢰할 수 있는 강력한 동맹국이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인도였다.
인도 방문 과정에서 장제스가 네루에게 묻기를, 인도의 독립 운동에 일본을 이용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연합국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도 않느냐고 하자 네루는 1차대전당시 영국이 자신들의 전쟁에 협조한다면 전쟁이 끝난 뒤 인도를 독립시키겠다고 굳게 약속했음에도 결국 이를 저버렸다면서 또다시 속을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장제스는 "그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라면서 인도 독립에 대한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자 네루는 인도인들을 확신시킬 명확한 보증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네루와의 회담을 통하여 장제스는 인도를 대일 전쟁에 참전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영국의 지배에서 독립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인도 독립에 앞장서게 되었다.
당시 영국은 독일, 일본과의 전쟁에 인도인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절실한 처지였다. 따라서 참전을 대가로 인도 독립을 논의하고 전쟁이 끝난 뒤 자치권 부여와 단계적인 독립을 추진하겠다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이미 한번 속은 바 있는 인도 국민회의는 영국의 진정성을 의심하면서 제안을 거부하고 즉각적인 독립을 요구하였다. 또한 장제스는 루즈벨트에게 서신을 보내어 인도가 즉각 독립할 수 있도록 미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요청하였다. 루즈벨트 역시 이에 공감하면서 1942년 3월 10일 처칠에게 우선 인도에 임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허용하고 향후 1년 안에 인도를 독립시키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또한 그는 인도가 독립한다면 영국에 더욱 충성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영국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제국주의자로서 인도를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었던 처칠은 미국과 중국이 "부당한 내정간섭"을 하고 있다면서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영국으로서는 장제스가 인도 문제에 관여하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영국 외무부는 충칭으로 전문을 보내어 중국 정부가 인도 국민회의와 접촉하는 것은 인도의 치안을 어지럽히는 행위이므로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하였다. 또한 에머리히 외무 장관은 런던 주재 중국 대사에게 강력하게 항의하는 한편, 네루가 뭐라고 하건 그의 관심사는 오직 인도인들의 이익에 있을 뿐 중국에는 관심이 없으며 오히려 중국의 가장 큰 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처칠은 장제스에게 "서로의 내정간섭을 하지 않는" 것이 연합국들이 따라야 할 가장 중요한 규칙이라면서 인도 문제에 관한한 미국, 중국의 관여를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고 경고하였다. 또한 장제스의 간섭이 "우리가 중국 내 국공 문제에 개입하는 것과 같다"면서 그의 가장 민감한 아킬레스를 건드리기도 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인도의 독립 문제를 꾸준히 거론하여 전쟁 내내 영국과 극심한 마찰을 빚었다. 또한 인도 국민회의를 인도를 대표하는 정통 정부로 정식 승인하였다. 이는 우리의 상하이 임시정부에 대하여 우호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치면서 끝까지 승인을 미루어 우리를 실망시켰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만큼 장제스는 인도를 매우 중요한 이웃 국가이자 전략적인 파트너로 보았던 것이다. 비록 미국의 미온적인 태도와 중국의 역량 부족으로 인도 지도자들이 바라는 대로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인도 독립과 인도군의 중일전쟁 참전을 실현하지 못했지만, 전쟁이 끝난 뒤 영국은 결국 인도에서 손을 떼기로 하였고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독립을 쟁취하였다. 장제스의 기여가 인도 독립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렇듯 장제스는 현대사에서 중-인 양국의 중요한 가교 역할을 했지만 막상 그 열매를 쟁취한 것은 장제스가 아니라 마오쩌둥이었다. 국공내전에서 장제스가 마오쩌둥에게 패배하여 타이완으로 쫓겨가고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인도는 장제스 정권과 단교하고 1950년 1월 1일 非사회주의 국가로서는 가장 먼저 마오쩌둥의 신중국과 수교하였다. 장제스로서는 서운한 일이지만, 이미 중국의 주인이 바뀐 상황에서 네루는 장제스와의 개인적인 친분보다는 중국, 인도 양국의 관계를 더욱 중시한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에 우호적이었던 네루는 공산주의가 세계의 평화를 위협한다는 미국의 인식에 찬성하지 않았고 공산주의 중국과 인도가 대립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고 여겼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7월 14일 네루는 미 국무장관 애치슨에게 서신을 보내어 무력 응징의 자제와 평화적인 해결을 호소하고 장제스의 타이완을 대신하여 마오의 중공에 유엔 대표권을 줄 것을 건의하였다. 이는 마오쩌둥에게 타협책을 제시함으로서 김일성을 지원하는 것을 막고 중국이 유엔 안보리의 평화적인 해결에 동참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스탈린에게도 중국의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보장하고 중국과 소련이 한국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김일성의 배후에 소련과 중국이 있다고 믿고 있었던 미국으로서는 네루의 제안이 지극히 이상주의적이며 그렇게 한다고 해서 김일성의 군대가 38선 이북으로 복귀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 공산진영의 도발에 스스로 굴복하는 꼴이 된다고 생각하고 "타협은 없다"면서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또한 중국을 안보리에 참여시키는 것보다 북한이 군대를 철수시키는 것이 먼저라고 못을 박았다. 네루는 포기하지 않고 그 후로도 중국의 안보리 참여를 통한 평화적인 해결을 꾸준히 주장하였다. 한편으로 인도는 이와 별개로 인도적인 차원에서 남한에 350여명에 달하는 야전 의료진을 파견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물론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미국이 네루의 요청을 수락하여 중국의 안보리 가입에 동의했다고 해서 당장 마오쩌둥이 김일성에게 군대를 철수시키도록 적극적으로 압박을 가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김일성의 남침은 마오가 아니라 스탈린이 기획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 소련을 재쳐놓고라도 적어도 미국과 중국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과 적대심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 대화의 창구를 열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을 한반도로 국한시키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중국의 참전을 막음으로서 결과적으로 한반도 통일을 실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오쩌둥의 참전은 다양한 국내외적인 원인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 야욕보다는 미국에 대한 극도의 불신감과 "한국전쟁이 끝난 뒤 미국이 장제스와 함께 중국을 남북으로 침공할 지 모른다"라는 안보적인 공포심 때문이었다. 물론 미국은 그럴 의사가 전혀 없었지만 양국의 대화 창구가 차단된 상황에서 마오쩌둥으로서는 미국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특유의 편집광적인 공포심에 휩싸인 나머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병을 결의하였고 한국전쟁은 미국과 북한의 싸움에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싸움으로 확대되게 된다.
트루먼 행정부가 네루의 요청을 거절한 것은 간접적으로는 장제스 때문이기도 했다. 원래 장제스를 극도로 미워했던 트루먼은 대륙에서 쫓겨난 채 실패자로 전락한 그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버트 후버 전 대통령을 비롯한 공화당 진영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장제스와의 우호를 강조하면서 트루먼 행정부에게 장제스를 지원하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미국 정계에서 장제스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했던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매파인 맥아더가 타이완을 방문하고 민주당에서도 우호적인 여론이 고조되었다. 결국 트루먼도 미 의회의 압력에 못 이긴 나머지 마지못하여 장제스에 대한 지원을 재개하였고 타이완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9월 16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유엔군은 북한군을 무너뜨리고 38선을 넘어 북상할 태세를 갖추었다. 저우언라이는 인도를 통하여 유엔군의 북상을 반대하고 중국이 이를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임을 경고하였다. 서방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어 고립 신세였던 중국으로서는 인도를 통해서만이 국제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한낱 허세로만 여긴 미국이 무시함으로서 양국은 결국 한반도에서 충돌하였고 미국은 최악의 패배를 당하게 되었다.
냉전의 격화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인도의 관계는 갈수록 공고해졌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1953년 12월 31일 인도 대표단이 베이징 중난하이를 방문한 자리에서 저우언라이는 이른바 "평화공존을 위한 5개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가 말하는 5개의 평화공존 원칙이란 "상호 우호 합작의 취지 아래 평등, 호혜, 국가 주권과 영토의 보전, 내정 불간섭, 경제 협력"이었다. 이것은 1950년 2월 저우언라이가 소련과의 우호조약을 체결할 때 제시했던 것과 같은 내용이며 중국 정부의 대외 정책의 기본 원칙이자 전 세계 모든 나라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1954년 6월에는 저우언라이가 인도를, 그리고 이에 대한 화답으로 10월에는 네루가 중국을 방문하여 정상 회담을 개최하였다.
1955년 4월 18일에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29개국 지도자들이 모여서 제1차 아시아-아프리카 회의, 이른바 "반둥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것은 저우언라이가 인도를 방문했을 때 네루의 제안에 의한 것이었다. 장제스는 특무 부대를 보내어 반둥 회의에 참석하던 저우언라이를 제거하려고 그가 탑승 예정이었던 비행기에 시한폭탄을 설치했지만 저우언라이가 다른 비행기를 타면서 실패하였고 자신의 입장만 곤란하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네루는 저우언라이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 미국, 소련 양 대국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이른바 "비동맹" 진영을 결성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양국의 결속력은 매우 탄탄해 보였지만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없는 모순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티베트 문제였다. 청말 이래 중국과 인도 사이에는 티베트가 존재하여 양국이 직접 맞딱들일 일이 없었다. 그런데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뒤 군대를 보내어 티베트를 정복하였다. 양국을 나누던 완충 지대가 사라진 것이다. 중국과 인도는 2천km에 달하는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고 그 중 많은 지역의 국경이 분명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당장 시급한 국내 현안과 오랜 우호국가인 인도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당장 이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으나 양국의 관계가 악화된다면 언젠가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게 될 것은 불보듯 뻔했다.
195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티베트를 놓고 양국의 관계는 급격하게 경색되면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959년 3월 티베트의 정신적인 지주인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중국의 핍박을 못 이겨 라싸를 탈출하여 인도로 망명한 것이다. 그리고 티베트 전역에서 티베트인들이 일제히 봉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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