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티베트 문제는 중국 공산당의 소수 민족 정책이 가진 근본적인 모순과 부조리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중국 정부는 자신들이 티베트를 비롯한 소수민족들을 탄압한다는 외부의 비난은 부당한 것이며 중국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 없이 서양 세계의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또한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은 다른 나라의 경우에 비하여 매우 관용적이고 포용적이라고 주장한다.
수십개의 다민족으로 구성된 중국 사회에서 소수 민족 문제는 국가의 안정과 통합과 결부되기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이다. 중국 전체 인구에서 소수 민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9% 정도이다. 구 소련에서 非 러시아 민족의 비중이 20%에 달했던 것이나 미국 사회에서 모든 백인계열을 합해도 60% 정도에 불과한 것에 비하면 중국에서 소수 민족은 말그대로 소수 민족인 셈이다. 하지만 비록 "소수 민족"이라고 해도 이들의 전체 인구는 1억 3천만명에 달하여 세계 12위의 인구 대국인 멕시코보다도 많다. 또한 소수 민족들이 차지하는 자치 지역의 면적은 616만㎢에 달하여 중국 전토의 2/3에 해당하며, 대부분 중국의 변방에 위치하기에 안보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만약 소수민족들의 불만과 갈등이 커질 경우 자칫 중국의 해체로 이어질 위험도 있다. 중국 정부가 이들의 분리 운동을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건국 초기부터 소수 민족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실제로 중국 정부가 한족과 소수민족을 구분하고 소수민족에 대하여 차별 철폐와 다양한 경제적 재정적 특혜를 제공하는 등 나름대로 정책적으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로, 신중국의 건국 초기 토지 개혁이나 각종 사회주의 개혁에서도 소수민족의 반발을 우려하여 한족 지역을 먼저 실시하고 소수민족 지역은 늦게 실시하는 등 정책성 융통성을 발휘하였다. 1978년 강력하게 실시된 산아 제한 정책에서 한족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한 자녀" 정책을 고수한 반면, 소수민족에게는 "두 자녀"를 허용함으로서 이들의 반발을 줄이고 중국 내 소수민족의 비중을 확대하는데 기여하였다. 또한 소수민족 지역에 대한 자치권을 부여하고 감세 정책이나 세금 우대, 대학 입학에서 소수민족을 우대한다.
또한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티베트, 위구르 등의 예를 성급하게 일반화하여 중국 내 모든 소수 민족들이 독립의 의지를 가지고 있고 독립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이란 어디까지나 중국 정부가 편의상 정한 것일 뿐, 실제로 각각의 민족들이 한족이나 다른 민족과 구분되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지거나 외모에서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100년 전만 해도 중국의 지배자였던 만주족(1천만명)들은 두번째로 많은 소수민족이지만 인종적으로 한족과 차이가 없으며 자신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 역시 거의 사라진 채 한족에 완전히 동화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한족이 아닌 소수민족인 이유는 오직 한가지 중국 공산당이 그렇게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소수민족들은 한족과의 오랜 항쟁 속에서 중화 문명권에 자연스레 흡수되었기에 피부색이나 언어, 문화에서도 한족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또한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어 민족적 정체성과 동질감이 약하여 독립국가를 세울만한 역량이나 환경적인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20세기 중국의 격동기에 정치적 혼란을 이용하여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애초에 중국인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족 역시 따지고 보면 우리나 일본처럼 단일한 뿌리가 아니라 수천년에 걸쳐서 주변의 다양한 민족들이 서로 부대끼는 가운데 하나가 된 다민족 사회이다.
오늘날 중국에서 실제로 분리 독립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소수 민족은 티베트의 장족(藏族)과 신장성의 위구르족 정도이다. 뿔뿔이 흩어진 채 한족과 섞여서 사는 다른 민족들과 달리, 이들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대대로 모여 살고 있다. 중국 문명권에 편입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므로 한족에 거의 동화되지 않은 채 고유의 종교와 언어,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다른 소수 민족에 비하여 동질감 또한 상당히 높기 때문에 이들이 한족의 통치에 불만을 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도 본질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을 우대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뿌리깊은 한족 우월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 승리하여 대륙을 장악한 뒤, 사회주의 개혁 과정에서 당 지도부에서는 소수민족을 차별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지만 막상 실무를 맡은 하부 조직의 간부들은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은 소수민족에게 불평등한 정책을 강요하거나 소수민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합당한 직책을 부여하지 않는 등 온갖 차별로 불만을 샀다. 또한 그 과정에서 소수민족들이 오랫동안 지켜왔던 전통 문화와 생활 양식은 일률적으로 "봉건 잔재"로 규정되어 철저하게 파괴되기 일쑤였으며 이에 대한 반발은 가차없이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이런 모습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룩했지만 소수 민족들은 철저하게 배제당하였고 소수 민족이 주로 거주하는 서부 지역은 상대적으로 매우 낙후되어 있다. 이 때문에 중앙 정부는 2000년대 이후 이른바 "서부 대개발"이나 "흥변부민(興邊富民)"이라 하여 소수민족 지역에 대한 경제 발전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러나 주요 수혜자는 여전히 중앙에 연줄을 대고 있는 한족 관료들과 당 간부, 국공유기업 관리들이며 대다수 소수민족들은 소외당하고 있다. 또한 소수민족 자치지역의 성장이나 시장과 같은 행정 관료들은 소수민족 출신을 뽑더라도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공산당 서기와 같은 핵심 요직은 한족이 철저하게 독점한다. 따라서 소수민족들의 불만과 갈등이 해소되기는 커녕,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지는 실정이다.
이와 같이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정책적 괴리는 무엇 때문인가. 마오쩌둥을 비롯하여 공산당 지도부가 진정한 의미에서 소수 민족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중국 사회의 결속력을 유지하고 이들의 분리 독립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한족과 소수민족이 어떻게 다른지, 수많은 소수민족의 다양하고 복잡한 민족적인 특성에 대하여 아무런 이해도 없었을 뿐더러, 이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도 않았다. 즉, 공산당이 말하는 "소수민족 우대정책"이란 실제로 소수민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들에 대한 공산당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함일 뿐이다. 중앙 정부의 정책에 고분고분하게 순종하는 소수 엘리트들만 수혜를 누릴 뿐, 대다수 소수민족들에게는 남의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말로는 "소수민족을 위한" 정치라고 하지만 과연 무엇이 "소수민족을 위한" 정치인가. 이것은 당사자들이 직접 정할 부분이지 남이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국민을 위한" 정치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정치를 배제하고는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정책이란 자신들이 정해놓은 법과 제도적 테두리 내에서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강요하는 식이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중국의 폐쇄적인 정치 구조 속에서 소수민족들이 정부 정책에 반하여 제 목소리를 내거나 중앙 정부와 소통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소수민족의 자치권이라는 것도 중앙에서 권력을 독점하는 중국의 여건상 실질적인 자치와는 거리가 멀다. 또한 소수민족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생활 수준의 향상이나 종교적 자유, 한족과의 소득 격차 해소, 문화적 정체성의 보장 등은 중국 정부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 정책은 다른 다민족 국가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과는 다르며 상당히 모호하다. 터키나 이라크에서 쿠르드 족의 사례처럼 국가가 대놓고 소수민족들을 철저하게 차별하거나 아예 말살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이들의 자결권을 충분히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중국 정부의 진짜 목적은 소수민족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통합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 정부의 소수 민족 정책은 어디까지나 이들이 중국에서 분리하는 것을 억제하는데 있다. 따라서 입으로서는 소수민족을 우대한다면서도 실제로는 소수민족들을 2등 국민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특히 티베트나 위구르의 분리 운동을 유혈진압하는 모습은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행태와 다르지 않다. 소수 민족들을 동등한 자국민이 아닌 식민지로 취급하고 있는 셈이다.
더욱이 중국 정부는 1990년대 이후 이른바 "중화 민족주의" "애국주의"라 하여 중국 내 민족간의 경계를 없애고 모든 민족을 하나로 만들 것을 제창하고 있다. 원래 "중화"란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주변 이민족과 구분짓기 위하여 만들어낸 말이다. 19세기 말에 와서 쑨원, 량치차오 등 중국의 지도자들은 중화민족이니 5족 공화이니 하는 말로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중국 사회가 민족간의 대립과 갈등을 버리고 하나로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국가를 지키기 위한 일종의 저항적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지배자가 된 마오쩌둥은 중화 민족주의를 공산당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외부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에서 내부를 단속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또한 중화 민족주의라는 말로 한족과 소수민족의 구분을 없애고 다같이 평등한 세상을 열자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절대 다수인 한족의 방식에 소수민족들이 알아서 맞추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소수민족들의 고유 생활방식이나 문화, 가치관, 언어, 정체성을 모두 부정하겠다는 의미다.
결국 중화 민족주의란 한족 민족주의와 다를 바 없다. 또한 중국 정부는 티베트인들을 비롯한 일부 소수민족들의 불만에 대하여 사회 안정을 해친다는 이유로 철저하게 탄압한다. 현지 간부들은 하나같이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중앙의 눈치를 보면서 강경하게 진압한 후 적당히 덮는 식이다. 이는 티베트나 위구르같은 낙후된 지역만이 아니라 홍콩처럼 발달된 지역도 마찬가지이다.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홍콩 주민들의 반발은 날로 거세지고 있다. 말로는 "특별구"라 하여 최대한의 자치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실제로는 독자성을 무시한 채 공산당이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틀 안에 맞추기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국 사회 전반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오늘날 중국 사회에서 불만과 갈등이 나날이 커지는 것도 공산당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중국의 낙후된 정치 체제가 만들어낸 산물이며, 근본적으로 중국 사회가 민주화되지 않는 한 해결 방법은 없다.
이야기를 다시 앞으로 돌려보자. 1951년 5월 23일, 중국과 티베트 사이에 체결된 이른바 "제17개조 협정"은 우리의 을사보호늑약과 다를 바 없었다. 이로서 티베트는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한 채 중국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 라사를 비롯한 티베트 내 요충지마다 중국군이 주둔하였다. 티베트군은 달라이 라마의 호위를 맡은 소수 부대를 제외하고는 강제로 해산되거나 일부는 중국군에 편입되었다. 중국은 달라이 라마를 구심점으로 하는 티베트 정부의 행정적 자치권을 인정하고 티베트인들의 종교와 전통 문화, 생활 양식에 대한 간섭을 일체 하지 않기로 약속했음에도 막상 티베트를 손에 넣자말자 약속을 깨고 "중국식 사회주의화"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중국에서 파견된 군인과 행정요원을 합하면 약 10만명에 달했다. 이들은 티베트의 통치 기반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물론 중국 덕분에 근대 의료 체계가 도입되고 무상 교육이 실시되는 등 수혜를 본 면도 없지 않았지만 대다수 티베트인들은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기근, 강제 노역 등으로 큰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애초에 마르크르-레닌의 유물론에 따라서 종교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중국의 사회주의는 종교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일상 생활 구석구석까지 미치는 정종일치의 티베트 사회에 맞을 리가 없었다. 중국인들의 눈에 티베트인들은 수백년 전의 봉건적이고 낙후된 세계에서 살고 있는 미개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군림했다. 티베트인의 의사를 존중하고 자치를 인정하겠다는 17개조 협약 또한 무시되었다. 토지 개혁과 집단 농장으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티베트인들이 처형되거나 박해받았다. 또한 사회주의식 교육을 시켜준다는 명목으로 15~20세 사이의 많은 젊은이들이 강제로 차출되어 중국으로 보내졌고 다시는 티베트로 돌아올 수 없었다. 이는 납치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중국의 압제가 강화되자 티베트인들 앞에는 세가지 선택이 놓였다. 첫번째는 자신의 무력함을 이유로 체념한 채 중국의 지배에 철저하게 순응하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자신들의 터전을 버리고 해외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세번째는 직접 무기를 들고 저항에 나서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중국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포스터와 반중 시위에서 1955년에 오면 티베트 동부지방을 중심으로 무장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캄과 암도 지방은 티베트 영토였다가 중국에 의해 점령된 후 강제로 분할되어 각각 쓰촨성과 칭하이성으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티베트인들의 불만은 매우 컸다. 반중 게릴라들은 중국의 압제에 분노한 티베트 정부의 관료들과 귀족 계층, 지주, 상인, 승려, 현지 민병대, 구 티베트군 출신들까지 전 계층을 망라했다. 1956년 말에 오면 티트인들에 의한 유격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반중 게릴라에 가담한 숫자는 1만명에 달했다. 이들은 주로 중국군의 보급부대를 습격했기에 중국군은 티베트로 들어가는 길을 "죽음의 도로"라고 부를 정도였다.
중국군은 약 6만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또한 항공기를 동원하여 사원을 폭격하는 등 무차별적으로 진압하였다. 무기와 장비가 빈약한 티베트인들은 여지없이 박살난 채 티베트 남부의 산악지대에 숨었다. 당시 티베트의 반중 저항을 주도하는 지도자 중에는 달라이 라마의 형인 걀로 톤둡(Gyalo Thondup)도 있었다. 그는 황푸군관학교 출신으로 장제스 정권과 관련이 있는 명문가의 중국인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는 중국군이 티베트를 점령하자 티베트 독립을 외치면서 미국, 인도, 영국 정부와 접촉하여 서방 세계의 원조를 호소하였다. 걀로 톤둡의 호소로 미국 CIA는 이들을 지원키로 결정했고 네팔 국경을 통해서 자금과 무기, 군수품을 제공하였다.
1958년 6월 16일 티베트 각지에서 몰려든 64개의 반중 무장 조직들이 연합하여 '추시 강둑(Chushi Gangdrug)'을 결성하였다. 여기에는 라사의 티베트 정부에서 파견된 대표도 참여하였다. 추시 강둑이란 티베트어로 "4개의 강, 6개의 산"이라는 뜻으로, 캄과 암도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들의 목적은 달라이 라마를 지키고 레지스탕스 전쟁을 벌여서 중국군을 티베트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것이었다. 이들의 지도자는 구 티베트군의 지휘관이었던 아둑 곰보타시(Andruk Gonpo Tashi)였다. 숫자는 약 3만명에 달했다. 게릴라들은 중국군으로부터 노획하거나 미국 CIA가 제공한 무기, 인도와 네팔 등지에서 구입한 무기로 무장하였다. 또한 타이완에서도 국민정부 요원들이 파견되었고 1959년 5월에는 1만 5천달러의 자금이 제공하기도 했다.
티베트인들의 반중 봉기는 점차 확산되면서 1958년 6월에는 창두를 비롯한 남부와 동부 티베트의 대부분을 장악했으며 도처에서 중국군 수비대를 공격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마오쩌둥은 우선 內 티베트에 대한 사회주의화를 잠시 중지시키는 등 타협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캄과 암도를 비롯한 중국에 편입된 外 티베트에 대해서는 그대로 사회주의화를 추진했으며 반발하는 목소리를 가차없이 짓밟았다. 이것은 마오쩌둥이 현지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자기 편의대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현지와의 소통에 노력하지 않았다. 중앙의 명령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었으며 현지 간부들은 질책을 우려하여 미봉책에만 급급하였다. 공산당의 구조적인 문제였다.
따라서 티베트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는 커녕 오히려 반란의 불길은 티베트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티베트인들은 거국적으로 참여하였다. 중국군은 가차없이 유혈 진압에 나섰다. 티베트인들의 촌락과 사원들은 무차별적인 폭격과 포격을 당했다.1958년 3월부터 8월까지 암도 지방에서 약 13만명의 티베트인들이 반중 저항에 참여했다가 그 중에서 무려 11만명이 살해되었다. 인종 청소나 다름없었다. 또한 수만명이 체포되었고 2만명 이상이 고문과 학대로 살해당했다.
당초 달라이 라마는 중국과 마오쩌둥에 대하여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라사의 궁전 깊숙한 곳에서 자라난 그는 외부의 현실이나 사회주의에 대한 아무런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54년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을 만난 달라이 라마는 그를 "찬란한 태양"이라며 칭송하기도 했고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는데 흥미를 드러내기도 했다. 심지어 자신이 공산당에 가입하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달라이 라마는 마오쩌둥의 이중성을 절감했다. 또한 중국군이 티베트인들을 얼마나 탄압하는지에 대해서도 깨달았다. 그는 1956년 인도를 방문하는 도중 네루에게 망명 의사를 밝히기도 했으나 중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한 네루의 반대와 저우언라이의 압력으로 결국 포기하고 라사로 돌아와야 했다. 이는 마오쩌둥에게 달라이 라마에 대한 의심을 품기에 충분하였다.
1959년 3월 1일 라사 주재 중국 당국은 달라이 라마에게 연극 관람을 명목으로 라사 교외에 있는 중국군 사령부로 초청하였다. 또한 티베트인 경호 부대의 호위는 필요없으며 단신으로 오라고 요구하였다. 이것은 마음만 먹으면 중국이 얼마든지 달라이 라마를 살해하거나 강제로 납치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당장 라사 시민들 사이에는 달라이 라마가 살해될지 모른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또한 그동안 억압되고 있던 중국의 압제에 대한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하였다.
달라이 라마가 중국군 사령부로 가기로 한 3월 10일 새벽. 수천여명의 티베트인들이 달라이 라마의 여름 거처인 노르브링카 궁전 앞에 모여들었다. 그 수는 삽시간에 3만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중국은 물러나라"고 외치면서 인간 바리케이트를 형성하고 달라이 라마가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중국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면서 상황은 더욱 겆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시위대와 중국군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달라이 라마는 중국군을 달래기 위해서 "지금은 나갈 수 없으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달라"고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라사 주재 인도 영사관에 티베트 정부 대표를 보내어 티베트는 독립국이며 인도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한편, 티베트 동부와 남부에서는 티베트의 독립을 외치는 반중 게릴라들이 활동을 강화하고 있었다. 티베트의 상황은 그야말로 폭풍전야였다.
3월 11일 티베트 정부는 티베트 독립임시정부의 수립과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전격 선언하였다. 또한 "16세부터 60세까지 모든 남자는 무기와 탄약, 식량을 휴대하고 지체없이 라사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처벌하겠다고 지시하였다. 중국과 전쟁을 선언한 것이다. 중국군에 편입된 티베트군인 3천여명도 이탈하여 시위대에 가담하였다. 라사에 주둔한 중국군은 적진 한가운데 고립된 신세가 되었다. 이들은 시위대의 공격에 대비하여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대포를 끌어다가 노르브링카 궁전을 겨냥한 채 여차하면 발포할 태세를 갖추었다.
당시 난창에 머무르고 있었던 마오쩌둥은 보고를 받고 일단 무력 대응을 자제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정치 공세를 강화하여 달라이 라마를 비롯해 반중적인 티베트 지도자들을 고립시키고 티베트 민중을 중국의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베이징에 남아 있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3월 17일 정치국 회의를 개최하고 티베트 봉기를 "반란"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현지에 병력을 증파하여 반란을 신속하게 평정키로 결정하였다. 이는 무력으로 진압하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베이징의 지도자들이 마오쩌둥의 지시를 정면으로 어기고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양측의 감정이 격앙된 가운데 이미 그 전부터 티베트를 손봐주어야 한다는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티베트에 대한 사회주의 개조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티베트의 무력 진압은 마오쩌둥의 묵인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이 날 밤 달라이 라마는 소수의 측근들을 데리고 라사를 탈출했다. 중국군이 티베트인들을 무차별로 공격하고 자신의 궁전에 대해서도 공격이 임박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라사를 탈출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티베트 시위대의 반중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다. 3월 19일 밤 중국군의 박격포 두발이 노르브링카 궁전에 떨어졌다. 전투 시작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3월 20일 새벽 3시, 3천여명의 티베트군을 비롯하여 티베트 시위대는 무장한 채 중국군을 일제히 공격했다.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중국군은 포문을 열고 티베트인들을 향하여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였다. 노르브링카 궁전에만 800발의 포탄이 떨어졌다.공중에서는 중국군 전투기들이 라사 시내를 폭격했고 거리에는 기관총탄이 쏟아졌다. 어린이를 포함하여 수천여명의 티베트인들이 죽었다. 결국 이틀만에 티베트인의 봉기는 완전히 진압되었다. 3월 10일부터 22일까지 라사를 비롯한 티베트 전역에서 일어난 반중 봉기에서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숫자만 해도 최소 9만명 이상이 죽었다. 또한 8천여정의 총기와 기관총, 박격포 등이 중국군에게 노획되었다. 3월 28일 중국 정부는 티베트 정부의 해산과 서장 자치구 위원회가 티베트를 통치한다고 선언하였다. 티베트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중국식의 "서장(西藏)"이라는 명칭이 대신한 것이다. 또한 8개 사단 15만명에 달하는 병력이 투입되어 티베트 저항세력들을 가차없이 진압하였다. 티베트인의 저항운동은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한편, 라사를 탈출한 달라이 라마와 그의 가족, 티베트 정부의 각료들은 수백여명에 달하는 경호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남쪽으로 내려갔다. 또한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금은이 비밀리에 수송되었다. 이것은 앞으로 달라이 라마가 이끄는 티베트 망명 정부의 독립 자금으로 쓰여질 것이었다. 달라이 라마는 3월 24일 인도 국경에서 약 100km 떨어진 룬체종에 도달하였다. 그는 여기서 티베트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언하고 티베트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천명하였다. 달라이 라마의 탈출은 금새 전 세계의 빅뉴스가 되었고 모든 시선이 이곳으로 집중되었다. 3월 30일 달라이 라마는 인도 국경의 타왕(Tawang)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중국의 손에서 벗어난 것이다. 4월 18일 달라이 라마는 중국이 그동안 티베트와 체결한 17개 협정을 무시했다고 비난하면서 티베트의 독립을 회복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를 따라서 약 8만 여명에 달하는 티베트인들이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의 망명정부는 히말라야 산맥 남쪽의 작은 마을인 다람살라에 세워졌고 그 주변에는 티베트인들의 난민촌이 형성되었다.
1951년 당시에만 해도 친중노선을 유지하면서 중국의 티베트 편입을 묵인했던 네루가 달라이 라마의 망명을 받아들인 것은 인도주의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중국과의 관계가 점차 미묘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경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던 양국은 점차 무력 분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갈수록 빈번해지는 국경 충돌에다 달라이 라마의 망명은 결국 마오쩌둥의 보복을 부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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