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가장 친밀했던 두 나라가 결국 갈등을 회피하지 못한 채 최악의 무력 충돌로 이어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중-인전쟁은 일차적으로는 불명확한 국경선으로 일어난 전형적인 영토 분쟁이지만 1969년 전바오다오((珍寶島)에서 벌어지는 중-소 분쟁이나 1982년 포클랜드 전쟁과는 성격이 다르다. 또한 20년 뒤 덩샤오핑이 소위 "징벌"이라고 말하며 자국의 헤게모니를 베트남에게 강요하려 했던 중월전쟁과도 다르며, 후세인의 영토욕에서 비롯된 이란-이라크 전쟁과도 다르다.
중-인전쟁은 히말라야 산맥 남단에서 인도-티베트 국경의 공백지역을 잠식하는 네루의 "전진정책"이 마오쩌둥을 자극하면서 일어났다. 하지만 네루는 국경을 넘어서 아예 티베트까지 침공할 의사는 없었고 마오쩌둥 역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인도군을 국경에서 몰아낸 것에 만족하고 오히려 스스로 군대를 20km나 후퇴시켰다. 또한 승자로서 패자에게 거액의 배상금과 같은 굴욕적인 조건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 그냥 아무 일도 없는 양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어느 쪽도 상대를 굴복시키거나 새로운 영토를 차지하겠다는 등의 야욕은 없었다는 점에서 침략 전쟁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것이 중-인전쟁의 독특함이다.
또 한가지, 중-인전쟁의 원인이 된 악사이친과 아루나찰 프라데시는 과연 역사적으로 어느 쪽의 영토로 보아야 하는가. 인도와 중국은 서로 자국의 고유한 영토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분쟁의 소지를 만든 맥마흔 라인이나 메카트니-맥도널드 라인은 제국주의 시절의 영국이 멋대로 그은 것에 불과하기에 인도가 단순히 영국의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논리로 자국령이라는 주장은 어떻게 보더라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인도의 좌파 학자인 카루나가 굽타(Karunakar Gupta)는 중국 정부가 영국이 그은 국경선을 정식으로 인정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점에서 인도측의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다고 일축한다.
하지만 인도의 영토가 아니라고 해서 그럼 중국의 영토인가.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티베트의 실체를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심라 조약의 당사자는 영국과 티베트였다. 당시 티베트 정부는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영국의 원조가 필요하였고 국경 문제에서 양보하였다. 이를 근거로 인도는 심라 조약이 국제법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중국은 티베트가 중국의 지방 정부에 불과했기에 외교권이 없으므로 무효라고 주장한다. 티베트는 티베트대로 자신들이 비록 중국의 정치적 영향권 아래에는 있었지만 결코 중국에 복속된 지방 정부가 아니었으며 중국의 논리는 "단월공시(檀越供施)"라는 양국의 특수한 관계를 무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서로 워낙 첨예하기에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갈등이 있다고 해서 총부리를 겨눌 수 밖에 없었던가. 모든 분쟁이 반드시 전쟁으로 이어지는 법은 아니다. 오늘날 국제 사회의 질서와 현대전의 양상상, 이기고 지고를 떠나서 일단 싸우게 되면 어느 쪽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전쟁은 그야말로 최후의 수단이다. 중국과 인도가 티베트 문제와 국경 문제로 인하여 갈등이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관계가 나쁘지는 않았다. 분쟁 지역은 대부분 쓸모없는 황무지에 불과했고 자국의 존립을 위협하거나 반드시 확보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경제적 이익이 크거나 안보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또한 인도는 "비동맹"을 외치면서 중국의 주적인 미국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오히려 공산진영인 소련에게 접근하는 등 국경 문제를 제외하고는 중국에 그다지 적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중국 역시 인도를 직접 위협하거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양측이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대화와 양보를 통하여 원만하고 합리적으로 풀어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싸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이미 심각한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는 얘기라고 할 수 있다.
중-인전쟁이 발발하게 된 원인이 티베트를 놓고 중국과 인도의 패권이 충돌한 것으로 바라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그보다는 마오쩌둥과 네루 두 지도자의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마오쩌둥이 티베트 침공을 할 때만 해도 "중국인과 인도인은 형제"라던 네루는 막상 티베트에 대한 압제가 점점 심화되자 중국의 팽창주의라고 여겼다. 또한 언젠가는 중국이 티베트를 발판으로 삼고 파키스탄과 손을 잡아 인도까지 위협할 지 모른다는 공포심을 가졌다. 네루가 인도-티베트 국경의 공백지대를 잠식해 나가면서 국경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 것이나 라사에서 탈출한 달라이 라마와 10만명이 넘는 티베트 난민들을 받아들인 것은 티베트에 패권적 욕심이라기 보다는 중국의 남진에 대항하려는 방어적인 목적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마오쩌둥대로 네루가 인도식 팽창주의로 점점 중국의 목줄을 죄려한다고 겁을 먹었다. 중국의 선전 매체들은 인도가 영국보다 더 한 제국주의 국가이며 또한 티베트 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부당한 내정 간섭이라고 비난하였다. 중국과 인도의 갈등은 단순히 두 나라의 모순보다도 중국과 소련의 갈등에서 초래된 면이 크다. 중-소 관계가 악화된 것에 비례하여 중-인 관계 또한 급속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주변국들에게 사면이 완전히 포위당한 신세였다. 한국전쟁 당시만 해도 중국의 뒷배를 봐주던 소련은 1950년대 말에 오면 오히려 인도를 중국에 대한 대항마로 삼고 협력 관계를 강화하였다. 타이완 해협에서는 미국의 도움을 받는 장제스 정권이 "대륙반공"을 외치며 도전을 서슴치 않고 있었다. 여기다 신장성과 티베트에서는 분리주의자들에 의한 반중 무장 투쟁이 격화되었고 미국 CIA의 손길이 미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만약 소련, 인도가 개입할 경우 가장 먼저 티베트와 신장성이 무너질 것이고 결국에는 중공 정권 전체가 붕괴될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히말라야는 티베트는 물론, 중국의 서부를 지키기 위한 천연의 만리장성이었다. 중국으로서는 결코 물러날 수 없었다. 비록 네루는 히말라야를 넘어서 티베트까지 북상할 의사가 없었지만 마오쩌둥은 네루의 도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철저하게 응징하기로 결심하였다. 즉, 두 사람은 서로를 정복할 의사도, 자신의 헤게모니를 강요할 생각도 없었지만 극도의 불신감과 편집광적인 공포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상대방의 그림자에 지레 겁을 먹은 셈이다. 오늘날까지도 중국과 인도 양국은 서로 상대가 먼저 침략했으며 전쟁의 정당성은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서로에 대한 비난 수위가 점점 격화되는 와중에, 1960년 4월 19일 저우언라이가 뉴델리를 방문하여 네루와 정상 회담을 개최하였다. 하지만 국경 문제에 대한 협상을 요구하는 저우언라이에게 네루는 어떠한 타협도 없다는 식으로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로서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창구마저 닫혔다. 네루가 강경하게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이 "필요하다면 모든 수단을 다하여 원조하겠다"라면서 인도의 편에 섰기 때문이었다. 미국 역시 인도의 편이었다.
반면, 중국은 고립된데다 대약진운동의 참담한 실패로 마오쩌둥은 최악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네루는 비록 마오쩌둥이 불쾌하게 여기겠지만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직면한데다 중국 또한 여전히 인도의 협력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점에서 변경의 쓸모없는 땅을 위해서 굳이 전쟁까지 불사하지는 않으리라 낙관하였다. 만약 중국이 인도를 공격한다면 미국과 소련 또한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텐데 그런데 어떻게 인도를 공격할 것인가, 네루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이는 마오쩌둥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가 중국의 경고를 일축했다가 호되게 당한 것도 마오쩌둥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막연하게 자신의 선입견에서 상대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네루 역시 똑같은 실수를 한 셈이었다.
이유가 어떻든, 양 대국은 히말라야 산맥을 사이에 두고 건곤일척의 싸움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인구 6억의 중국과 인구 4억 5천만명의 인도. 게다가 두 나라 모두 거대한 재래식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핵은 없었다. 중국은 이로부터 정확하게 2년 뒤인 1964년 10월 16일 첫번째 핵실험을 실시하였다. 인도는 10년 정도 늦었다. 1974년 5월 18일에야 첫번째 핵실험을 하여 핵보유국의 대열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히말라야 산맥은 전쟁을 하기에는 결코 용이한 장소가 아니었다. 해발 수천m에 달하는 험준한 산맥과 깎아지른 듯한 지형, 끝없이 펼쳐진 만년설, 울창한 산림과 황무지는 인간의 접근을 어렵게 하였다. 게다가 양쪽 모두 자국의 중심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군대의 병참선에 심한 제약을 받았다. 중국은 티베트의 라사를 후방 기지로 삼았지만 식량도 매우 부족했고 군대의 기동에 필요한 유류와 차량, 병기의 부속품은 티베트에서는 공급할 수 없으므로 2천km도 더 떨어진 중국 본토에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서 최일선까지 운반해야 했다. 따라서 일선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인도 역시 다를 바 없었다. 후방에서 최일선까지 연결하는 변변한 군용 도로를 건설하지 않은데다 약간의 비포장 도로조차도 걸핏하면 쏟아지는 폭우로 인하여 물이 범람하고 산사태가 일어나면 차량은 커녕, 사람조차 통행이 불가능하기 일쑤였다. 또한 인도군은 수송기와 헬리콥터가 매우 적은데다 지형상 마땅한 착륙 장소는 고사하고 수송 물자를 공중에서 투하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따라서 필요한 군수품을 오직 인력과 야크, 당나귀로 며칠에 걸쳐서 소량씩 실어날라야 했다. 전차나 중포와 같은 중화기의 수송은 거의 불가능했고 식량과 탄약조차 충분히 수송할 수 없었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였지만 인도군의 사정이 더욱 심각했다. 무기와 탄약도 매우 부족했으며 1인당 지급된 탄약은 50발에 불과했다. 식량은 10일치에 불과한데다, 기온은 초겨울의 영하임에도 병사들은 얇은 여름용 군복에 단화를 신고 있었다. 심지어 3천명으로 구성된 제7보병여단에게 공급된 모포는 고작 200개에 불과했다. 식수도 땔감도 부족했고 추위를 피할 곳도 없었다. 따라서 폭설 속에서 많은 병사들이 모포도 없이 추위에 떨다가 동상에 걸리거나 얼어 죽어서 황량한 설산에 아무렇게나 버려졌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싸우기도 전에 사기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충분한 사전 준비도 없이 무작정 네루가 군대를 전진시킨 결과였다.
또한 인도군의 수준은 매우 형편없었다. 당시 인도가 보유한 상비군은 약 50만명에 달했다. 그러나 식민지 시절의 유산을 물려받은 인도군은 전근대적인 봉건 문화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병사들은 주로 부랑자와 소작농과 같은 사회적 최하층민들을 모병한 것이었고 훈련과 사기가 형편없는 오합지졸이었다. 구타와 욕설은 일상적이었다. 장교들 역시 인도 사회 특유의 특권 의식만 가지고 있을 뿐, 전투 경험이 없는데다 지휘능력과 적극성 또한 찾아볼 수 없었다. 인도군은 단지 치안 유지에나 걸맞을 뿐이었다. 게다가 네루는 열악한 경제 여건을 고려하여 군비를 최소한도로 억제한 덕분에 무기와 장비는 2차대전 당시에 사용되었던 구식이었고 소총조차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전차와 야포, 차량은 대부분 가동 불능인데다 포탄도 부족했다. 현대적인 군수 시스템도 없었고 가뜩이나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군수품을 제대로 수송할 방법도 없었다. 한마디로 인도군은 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애초에 인도는 그때까지 제대로 된 전쟁을 경험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인도가 여지껏 전쟁이라고는 독립 당시 파키스탄을 상대로 짧은 국지전을 치루어 본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네루는 전쟁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인도군 수뇌부 역시 현대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며 중국군의 전투 방식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다. 반면, 평생을 전쟁으로 보낸 마오쩌둥은 누구를 상대로건 언제라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징집군으로 구성된 중국군은 한국전쟁에서 미군을 상대로 현대전을 경험했으며 장비는 여전히 빈약했지만 전쟁의 경험이 풍부하고 잘 훈련되어 있었다.
또한 아직도 구식 영국제 엔필드 소총을 사용하던 인도군과 달리 중국군은 소련제 AK-47 자동 소총을 라이선스한 56식 보총으로 무장하였다. 비록 미군이나 소련군을 상대하기에는 화력에서 역부족이라도 그 이외의 어떤 군대도 중국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는 없었다. 국공내전 이래 중국의 군사적 역량은 그야말로 절정이었다. 지휘관들 또한 자신감이 넘쳤다.
국경지대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 양측 군대들의 차이도 컸다. 해발 평균 3천m가 넘는 고산지대는 공기가 희박하여 평지에서의 전투와는 전혀 다르다. 현지의 풍토와 기후에 익숙하지 않으면 격렬한 전투는 커녕 생존을 유지하는 것조차 어렵다. 하지만 인도군은 하나같이 평야지대인 파키스탄과 대치하다가 이동한 일반 부대들로 산악 훈련과 고지대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반면, 중국군은 후방에서 급히 증원된 부대가 아니라 이미 티베트에서 10년 이상 주둔한 부대들이었다. 1951년 이래 티베트인들을 상대로 싸워온 그들은 티베트의 특수한 혹독한 환경에 충분히 적응하였고 아무리 험준한 산악 지대라도 얼마든지 민첩하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만약 백병전이 벌어진다면 어느 쪽이 이길 지는 뻔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인도군 지휘부는 싸우기도 전부터 이미 겁을 먹고 있었다. 앞으로 주요 전장이 될 동부 국경 지대에 배치된 인도군은 동부 사령부 산하의 제33군단 제4사단(제5, 제7, 제11여단)과 4개 독립 여단(타왕 여단, 제48여단, 제62여단, 제65여단), 제4 포병여단, 펀잡 제9대대, 구르카 대대, 시크 대대, 기타 국경수비대까지 합하여 약 2만 6천명 정도였다. 제4사단은 인도군 최강 부대 중 하나로 손꼽히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인력과 장비가 불충분했으며 병력도 광범위한 지역에 여기저기 분산된 채 방어선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마오쩌둥이 전쟁을 결심하기 한달 전인 9월 9일, 네루는 국경지대에서 선제 공격을 실시하여 중국군을 몰아내라고 지시하였다. 인도군 수뇌부는 "레그혼 작전(Operation Leghorn)"을 수립하였다. 공격은 달비(John Dalvi) 준장이 지휘하는 제7여단이 맡았다. 이들은 중국군의 공격이 시작되기 직전인 10월 초까지 전진하여 맥마흔 이남에 남아 있던 중국군 전초 거점들을 모두 제압하였다. 중국 수비대는 전투를 회피한 채 북쪽으로 물러났기에 별다른 전투는 없었지만 따뜻한 평야 지대에서 주둔하다가 산악 적응 훈련도 없이 갑자기 투입되면서 추위와 굶주림, 식수 부족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고 많은 병사들이 동상에 걸렸다. 또한 이들이 배치된 전초 기지들은 변변한 도로도 없는 곳에 수백km에 걸쳐서 분산되어 있어 방어선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고 예비 부대를 투입하기도 어려운 등, 만약 공격을 받는다면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인도군 수뇌부는 방어선을 강화하거나 보급을 개선하기보다는 차후 작전을 놓고 서로 싸움을 벌이자 네루는 10월 18일 군단장과 사단장, 여단장에 이르기까지 현지 지휘관들에 대한 대규모 문책성 인사를 단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혼란은 더욱 커졌고 막상 새로 임명된 지휘관들은 현지 사정에 전혀 알지 못하였다. 인도군의 모습은 그야말로 1940년 9월 무솔리니가 북아프리카 공격을 명령했을 때의 이탈리아군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이틀 뒤에 중국군의 전면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인도에 대한 공격 작전은 마오쩌둥이 주도하였다. 그는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책임지고 스스로 국가 주석을 류사오치에게 넘기는 등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상황이었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막후에서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화려하게 재기할 기회를 꿈꾸고 있었다. 1958년부터 61년까지 약 3년에 걸쳐서 중국 전역을 휩쓸었던 극심한 기근과 대약진운동의 상처는 류사오치, 덩샤오핑의 노력으로 1962년에 오면 어느 정도 회복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이 인도과의 전쟁을 결심한 것은 이미 1962년 5월이었다. 그러나 만약 인도를 공격했을 때 중국 동남부에서 장제스가 미국을 등에 업고 반격에 나서지는 않을 것인가. 또한 미국과 소련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마오쩌둥으로서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오쩌둥이 흐루시초프에게 넌지시 인도를 공격하겠다는 뜻을 전달하자 흐루시초프는 만약 중국과 인도 사이에 충돌이 벌어진다면 소련은 중국의 편에 서겠다고 말하였다. 대신 그 대가로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을 지지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 때만 해도 양국의 관계는 완전히 파국에 이르지는 않았던 것이다. 물론 흐루시초프는 중-인전쟁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인도의 편을 들지 않는 채 중립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중국에게는 유리하였다. 중-소 양국이 결정적으로 파탄난 것은 오히려 서방과의 유화를 주장하던 흐루시초프가 쿠테타로 쫓겨나고 보다 보수적인 브레즈네프가 집권한 뒤였다.
미국 역시 장제스 정권의 "대륙 반공"을 지지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하였다. 1962년 7월에는 제2차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었다. 라오스는 중립지대가 되었고 라오스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은 모두 철수하였다. 더 이상 중국은 아랫도리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로서 마오쩌둥이 우려하던 문제거리는 해결된 셈이었다. 그리고 10월 5일 린뱌오의 주도로 인도군의 "전진"에 대한 중국의 "반격" 작전이 수립되었다. 자위적인 목적에서 기습 공격하여 인도군의 전초 거점들을 제거하되 인도군을 국경 밖으로 쫓아낸 후 즉시 북쪽으로 철수한다는 제한전이었다. 인도의 영토를 군사적으로 점령한다는 계획은 없었다. 대신 압도적인 전력으로 철저하게 때려 눕히고 기세를 꺾은 다음 인도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한편, 적어도 한동안은 인도가 다시는 중국에 도전하겠다는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10월 10일 인도와의 전쟁이 최종 결정되었다.
동원 병력은 티베트에 주둔한 서장군구 소속의 제54군 산하 3개 사단(제11사단, 제55사단, 제130사단) 외에 제419부대(사단급 편제), 3개 포병여단(제306, 제308, 제540), 제153독립여단, 기타 독립 대대 등 약 3만 5천명 정도로 양적으로 인도군에 비하여 1만명 정도 우세하였다. 그 중에서 첫번째 공격에 투입된 병력은 제11사단과 제308 포병여단 등 약 1만명 정도였다.
10월 10일 오전 8시, 인도군 제7여단이 방어하는 전초 거점에서 중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주공을 앞에 둔 전초 작전인 셈이었다. 중국군의 규모는 1개 대대 800여명 정도였다. 약 4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인도군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거점을 버리고 후퇴하였다. 인도군의 손실은 전사 6명에 부상자 11명에 불과한 반면, 중국군은 전사자, 부상자 합하여 약 200여명에 달했다. 중국군의 손실이 예상 이상으로 컸기에 중국 수뇌부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오쩌둥은 병력을 집중시켜 압도적인 전력으로 상대를 격멸할 것을 지시하였다. 10월 18일 일선 부대에 공격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리고 10월 20일 아침 5시 14분, 전 전선에 걸쳐서 중국군 야포들의 일제히 불을 뿜었다. 인도군의 전초 거점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천지를 흔드는 포화가 쏟아지면서 야전 전화선은 죄다 끊어졌고 후방 사령부와의 통신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그리고 한 시간 후 중국군 보병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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