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쟁군사이야기

1962년 중인전쟁 - 6화. 인도군 무너지다 /blog.naver.com/atena

10월 20일 새벽 5시, 인도군의 진지를 향해 중국군의 포격이 일제히 쏟아졌다. 잠에 빠져 있던 인도군으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고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게다가 포격으로 전화선이 모두 끊어지면서 후방 사령부와의 통선마저 차단되었다. 6시 30분, 중국군 보병들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오는 파상 공세 앞에 인도군 병사들은 변변한 저항도 없이 무너진 채 뿔뿔이 흩어졌다. 해발 4천m가 넘는 고산지대에서 고립된 채 보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이들은 식수와 식량, 연료도 바닥이 난데다 며칠 전 내린 폭설로 추위에 떨어야 했고 많은 병사들이 동사하였다. 이렇다보니 싸울 의지가 있을 리 없었다. 항공을 통한 물자 공수도 신통치 않아서 수송기에서 떨어뜨리는 물자는 엉뚱한 곳에 떨어지기 일쑤였다.

최초 공격에 나선 중국군은 전체 병력에서는 겨우 1만명 정도로 인도군보다 오히려 열세했음에도 약 6백km에 걸쳐서 점점이 흩어져 있던 인도군과 달리, 주요 지점에 병력을 집중시킴으로서 숫적 우위를 확보하였다. 또한 현지에 오랫동안 주둔하여 지형지물에 익숙하였고 산악적응훈련을 충분히 받았다. 후방으로 향하는 도로를 건설하여 보급품의 수송도 비교적 원활했다. 전술에서도 중국군은 인도군보다 한수 위였다. 단순히 인도군을 뒤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양익에서 공격하여 적의 최일선을 돌파한 후 퇴로를 차단하여 포위 섬멸하겠다는 것이었다.

반면, 인도군은 구태의연한 선방어에 치중하여 대부분의 병력을 맥마흔 라인을 따라 일자로 길게 포진시켰고 후방에는 예비 병력을 거의 두지 않았다. 따라서 방어선 어느 한 곳이라도 돌파되면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인도군의 방어선은 느슨하기 짝이 없었다. 전초 거점에는 철조망도, 지뢰, 부비트랩도 없었다. 산세가 워낙 험준한데다 변변한 도로가 없다보니 후방에서 물자를 운송할 수도 없었고 진지를 구축할 충분한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도군 진지를 향해 돌격하는 중국군 병사들. 소부대 단위로 흩어져 있던 인도군 병사들은 사방을 메우며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오는 중국군의 모습에 겁을 먹고 변변히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거나 투항하기 일쑤였다.

중국군의 첫번째 공격을 받은 것은 인도군 제7여단이었다. 맥마흔 라인 서부 최일선을 맡고 있던 제7여단 3천명은 인도군에서도 손꼽히는 정예부대이다. 하지만 중국군 제419부대 산하 3개 연대(제154, 제155, 제157연대)의 맹공으로 하루만에 전멸했다. 여단장 존 달비 준장도 포로가 되었다. 또한 제11사단 산하 3개 연대(제31, 제32, 제33연대)가 인도군 제4사단 사령부를 공격하였다. 인도군 제4사단은 전의를 상실한 채 싸우지도 않고 남쪽으로 퇴각하였다. 일부 병사들은 중국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되자 부탄 국경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군은 이들을 애써 추격하여 부탄 국경을 넘지는 않았다.

같은날, 인도 북서부와 신장-티베트 접경지역에서도 신장군구 산하 중국군 제10연대와 제11연대, 기병 제3연대가 인도군 제114여단을 공격하였다. 악사이친 지구에서 인도군을 완전히 몰어내고 신장공로에 대한 위협을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광범위한 국경에 걸쳐서 소규모로 분산 배치된 채 추위와 기아에 허덕이던 인도군은 중국군의 공격을 받자말자 붕괴되었다. 이들은 싸우는 대신 도망치거나 무기를 머리 위에 들고 투항하였다. 중국군은 10월 24일까지 인도군의 전초 거점 43곳을 모두 점령하였고 인도군을 모조리 소탕한 후 전진을 멈추었다.

10월 22일 오후 12시, 맥마흔 라인 동쪽 끝에 있는 요충지 와롱(Walong)에서도 맹렬한 박격포 사격과 함께 중국군 2개 대대가 공격에 나섰다. 이 지역을 방어하는 인도군 시크 제4대대 역시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응사하면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다른 지역과 달리, 인도군의 저항은 완강했고 중국군은 이틀 만에 200여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낸 채 격퇴되었다.  

중국군은 도처에서 인도군을 격파하며 파죽지세로 남하하였다. 인도군의 최일선은 무너졌고 10월 25일에는 맥마흔 라인 서부의 요충지인 타왕(Tawang)이 함락되었다. 타왕은 티베트에서 탈출한 달라이 라마가 인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머문 도시로 정치적 의미가 컸다. 타왕의 함락과 함께 중국군은 일단 전진을 멈추었지만 약 일주일에 걸친 전투에서 맥마흔 라인을 넘어서 최고 60km까지 진격하였다. 또한 맥마흔 라인 선상에 구축된 수십여개에 달하는 인도군의 전초 거점은 모두 중국군의 손에 넘어왔다. 20여년 후 덩샤오핑의 베트남 침공이 베트남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4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면서도 한달 동안 고작 20km도 전진하지 못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중-인전쟁 당시 중국군의 역량은 최고조였다. 국공내전과 한국전쟁에서 쌓은 경험과 소련으로부터 획득한 최신 무기를 십분 발휘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인도군의 전력이 비록 열세했다고 해도 만약 네루가 공군력을 동원하여 중국군의 병참선을 폭격했다면 중국군 또한 막대한 손실을 입은 채 공격을 중지해야 했을 것이다. 또한 2만톤급 영국제 경항모 "빌크란트(Vikrant)"와  1만톤급 중순양함 "델리(INS Delhi)" 등 23척의 주력함을 보유한 인도 해군은 당시 아시아 최강이었다. 구닥다리 소형 선박만 보유한 중국 해군을 손쉽게 제압하고 광저우를 비롯한 중국 남단의 도시들을 충분히 위협할 수 있었다.

인도 해군이 보유한 호위 항모 빌크란트(INS Vikrant). 영국에 의해 건조되어 2차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5년 9월 22일 취역하였고 1957년 인도가 구매하여 인도 해군에 편입되었다. 총배수량 2만톤에 전장 210m, 최고 속력 25노트, 씨호크(Hawker Sea Hawk) 전투기 20여대를 탑재하였다. 포르투칼령 고아 침공 때 투입되었으나 중인전쟁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항구를 지켰다. 인도 해군은 하드웨어에서는 아시아 최강이었지만 막상 작전 능력과 숙련도 등 소프트웨어가 뒤따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3년 후의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는 동부 파키스탄(방글라데시)의 주요 항구인 콕스 바자르와 치타공 항을 폭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승리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1971년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도 파키스탄 해군을 제압하고 동인도양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인도 최초의 항모인 빌크란트는 1997년에 퇴역한 후 뭄바이에서 해상 박물관으로 운영되었으나 2013년 스크랩 처리되었다.

인도 공군은 영국제 호크 헌터 전투기 100대, 캔버라 경폭격기 90대를 비롯하여 약 800여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소련과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1960년에는 AN-12 수송기 8대, IL-14 수송기 24대, Mi-4 헬리콥터 16대가 전달되었다. SA-2 공대공 미사일을 탑재한 소련제 최신 초음속 요격기인 미그-21 전투기도 도입키로 결정했으나 실제로 초도분이 전달된 것은 중인전쟁이 끝난 뒤였다.

인도 공군의 주력 전투기 중 하나였던 영국제 호크 헌터 전투기. 영국 식민지 공군에서 시작한 인도 공군은 허리케인, 스피트파이어 등 2차대전 당시 영국 공군이 사용하던 기체를 넘겨받았다. 호크 헌터 전투기는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 개발된 기체로 최고 속력이 마하 0.94의 아음속 전투기였다. 중국 공군이 보유한 Mig-15/17/19의 맞상대가 되기는 어려웠다. 또한 조종사들의 기량이나 작전 능력 또한 낮았다. 네루가 겁을 먹은 것도 인도 공군의 전투기들이 한 세대 이전의 구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네루는 공군력의 투입을 거부하고 오히려 북부 지방에 배치된 공군을 남쪽으로 철수시켰다. 만약 인도가 공군을 투입한다면 중국도 공군을 동원할 것이고 구식 기체가 대부분인 인도 공군의 역량으로는 한국전쟁에서 미 공군과 맞짱을 떴던 중국 공군을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또한 중국 전폭기들이 뉴델리를 비롯한 인도 북부의 대도시들을 폭격할지도 모른다고 겁을 먹었다. 하지만 변변한 비행장이 없는 티베트에는 공군력이 거의 배치되지 않았기에 네루의 지나친 기우였다. 마오쩌둥과 달리 전쟁의 비참함을 몸소 체험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그로서는 전쟁에서 이기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또한 현대전에서 공군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된 제7여단장 존 달비 준장 역시 인터뷰에서 인도의 패전은 공군이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호되게 비판하였다. 중인전쟁 발발 50년이었던 2012년 10월 5일 인도 공군 참모총장 브라운(N.A.K. Browne) 원수는 "만약 당시에 공군이 출동했더라면 전쟁의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따라서 네루에 의해 손발이 묶인 인도 공군은 중인전쟁 내내 별다른 활동을 할 수 없었고 수송기와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물자를 공수하는 제한적인 임무만을 맡았을 뿐이었다.

또한 저우언라이는 네루에게 서한을 보내어 쌍방의 군대를 국경에서 20km씩 후퇴시키고 국경 문제를 평화적으로 논의하자고 제안하였다. 이것은 동부 국경의 아루나찰 프라데시 지방을 인도령으로 인정하되, 서부 국경의 악사이친 지방은 중국령으로 하자는 기존의 요구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네루는 거절하였다.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중국군의 선제 공격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전쟁에 패배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전선으로 향하는 인도군 병사들.

네루는 급히 2개 사단 9개 여단 등 3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증원하는 한편, 국민들에게 결사 항전을 호소하고 미국과 영국, 이스라엘 등 서방 진영에게도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것은 그동안 네루가 천명했던 "비동맹"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상황은 급박했다. 10월 24일 영국 공군의 수송기 2대가 첫번째로 도착하였고 이를 기회삼아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이스라엘도 무기와 군수품을 실은 수송선을 보내왔다.

미국도 개입할 태세를 갖추었다. 11월 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라인마인 미공군 기지에서 10대의  c-135 수송기가 원조물자를 실고 출동하여 다음날 캘커다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때마침 국제 사회의 모든 이목이 집중되는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났다. 이른바 "쿠바 미사일 사건"이었다. 중국군의 공세가 시작된 지 다음날인 21일, 미국의 턱밑인 쿠바에 소련이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는 모습이 미 공군의 정찰에 포착되면서 미-소의 관계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이나 다름없었다. 사태가 어디까지 확대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시적으로 소강 상태가 된 전투는 11월 14일 인도군의 반격으로 재개되었다. 이 날은 네루의 74세 생일이었다. 인도군 지휘부는 네루에게 생일 선물로 승전보를 알려줄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와롱에서의 국지적인 반격은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막대한 사상자만 낸 채 격퇴당하고 말았다. 이것은 중인전쟁 동안 인도군의 유일한 공세 작전이었다. 인도의 어줍잖은 공격은 중국을 자극했을 뿐이었다. 중국은 즉각 응징에 나섰다. 중국군 제419부대와 제11사단 등 약 2만명의 병력이 남하하여 인도군 제4 가르왈 소총 대대를 격파하고 17일 인도군의 보급 거점인 세라(SeLa)와 봄디라(Bomdi La)를 점령했다. 같은 날 와롱도 함락되었다. 인도군 제4군단장 하르박쉬 싱 중장은 수송기를 타고 도망쳤다.

후퇴 도중 중국군의 기습으로 불타는 인도군 전차부대. 산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인도군의 행렬은 중국군의 좋은 먹이가 되었다. 중국군은 우회 전술과 침투 작전으로 인도군을 도처에서 기습하여 분단시킨 후 각개격파하였다. 현대 전쟁의 경험이 전혀 없는 인도군에게 전쟁이란 어떤 것인지 톡톡이 가르쳐 준 셈이었다.

11월 18일에는 봄딜라(Bomdila)가 함락되었고 인도군 제62여단이 포위 섬멸당하였다. 중국군이 우회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제62여단장 호샤르 싱(Hoshiar Singh) 준장은 급히 철수하려 했지만 중국군의 포위망을 돌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일부 지휘관들이 무단으로 도주하면서 인도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하르박쉬 싱 중장은 제4사단의 철수를 지시하는 한편, 후방에 있던 제48여단을 구원부대로 급히 투입했지만 이들 또한 중국군 제11사단에게 격퇴당했다. 또한 인도군 제4사단은 철수하는 도중 사방에서 중국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토막토막난 채 괴멸했으며 5천명 이상의 사상자와 포로를 냈다. 호샤르 싱 준장 역시 부탄 국경으로 도망치다가 중국군 수색대에게 발각되어 사살당했다. 중국군은 인도군 전차 10대와 차량 400여대, 야포 170문을 노획하였다. 이로서 자무나(Jamuna) 강 이북에서 인도군의 지휘계통은 완전히 붕괴된 채 병사들은 소부대로 흩어진 채 정신없이 패주하는 실정이었다. 서쪽의 악사이친에서도 중국군의 공격으로 11월 20일 요충지인 추술(Chushul)이 함락되고 제114여단이 전멸하였다.

19일 밤, 뉴델리의 인도 의회 회의장에서는 인도군의 승전보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의원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들 앞에 나타난 네루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와롱이 함락되었습니다! 세라가 함락되었습니다! 봄딜라가 함락되었습니다!" 이 시간 제4사단을 비롯하여 인도군 주력이 모두 전멸하고 있었다. 분노한 야당 의원들의 질타와 비난이 네루에게 쏟아졌다. 네루는 묵묵히 자리에 앉아서 입을 굳게 다문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인도 북부 전체가 공황에 빠졌다. 수도 뉴델리에서는 중국군 공수부대가 항공기로 침투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또한 동북부 지방의 주민들에게 소개령이 떨어지면서 수많은 난민들이 고향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쳐야 했다. 미국을 비롯한 외국 정부들도 이 지역에서의 자국 교민의 철수에 나섰다. 중국군이 아루차날 프라데시 전역을 석권하고 자무나 강을 도하하여 아삼 지방까지 침공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수도 뉴델리도 위태로왔다. 인도에게는 더 이상 이들을 저지할 역량이 없었다. 네루는 급히 케네디 대통령에게 전문을 보내어 공군력의 파견을 요청했다. 미국의 개입을 요구한 것이다.

바로 이 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11월 21일 0시 중국 국영 방송국인 신화통신(新華通訊社)이 중국군은 모든 전투 행위를 중지할 것이며 스스로 물러날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중국군은 퇴각하는 인도군에 대한 추격을 포기 한 채 북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