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인도가 국경 문제를 놓고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은 크게 세개로 나뉜다. 첫번째는 서부의 악사이친(Aksai Chin, 중국어로는 阿克赛钦) 지방이다. 악사이친은 인도 카슈미르 지방과 신장성, 티베트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경의 총길이는 600km, 면적은 약 3만 8천㎢에 달한다. 두번째는 네팔과 부탄 사이에 있는 시킴(Sikkim) 지방이다. 당시에만 해도 시킴은 네팔, 부탄과 마찬가지로 독립 왕국이었으나 1950년 이후 인도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1975년에 인도에 완전히 복속되면서 시킴 주라는 인도의 일개 주가 된다. 국경의 총길이는 400km에 분쟁면적은 약 2천㎢ 정도이다. 세번째는 동부 국경의 아루나찰 프라데시(Arunachal Pradesh) 지방으로, 국경의 총길이는 650km, 분쟁 면적은 약 8만4천㎢에 달한다. 따라서 양국의 분쟁지역을 모두 합하면 12만 4천㎢에 달하여 남한 면적보다도 크다.
양국이 국경분쟁을 일으키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청이 티베트를 복속한 뒤 중국과 인도 양국의 국경선은 히말라야 산맥의 여러 산봉우리와 남사면을 따라서 서로의 행정 관할이 미치는 선을 따라서 국경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그러나 국경선의 총 길이가 무려 3천여 km에 달하는데다 그 사이에는 험준한 히말라야 산맥이 있었기에 지형이 매우 험하고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지대도 많이 있었다. 따라서 양측의 경계선은 모호하기 짝이 없었고 많은 지역이 국경으로 확정하지 못했다.
그런데 19세기에 오면서 인도는 영국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1849년에는 영국-시크 전쟁으로 인도의 북서부를 다스리던 시크 제국이 영국령 인도에 복속되었다. 여기다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가 남하하자 영국은 완충지대로 삼을 목적으로 신장성과 티베트를 넘보았다. 1865년 인도 측량국의 측량사였던 윌리엄 존슨(William Johnson)은 인도의 서북부의 카슈미르 지방을 조사한 후 지도를 제작하면서 3만 8천㎢ 에 달하는 악사이친 지방을 멋대로 카슈미르의 일부에 편입시켜 영국령 인도의 일부로 표시하였다. 원래 인도와 티베트의 경계는 보다 서쪽에 있는 카라코룸 산맥이지만 동쪽에 있는 쿤륜산맥을 경계로 삼았던 것이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는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카라코룸 산맥보다 정찰과 경계 활동이 용이한 악사이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군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이른바 "존슨 라인(Johnson line)"은 영국령 인도 정부가 이 지역의 국경선에 대한 기준이 되었다. 1899년 3월 14일 청나라가 의화단의 난으로 혼란에 빠진 것을 이용하여 베이징 주재 영국 공사인 맥도널드(Claude Maxwell MacDonald)가 소위 "메카트니-맥도널드 라인(Macartney-MacDonald line)"을 그어서 정식으로 악사이친의 할양을 요구하였다. 청조는 수락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영국군을 쫓아내고 이 지역을 무력으로 회복할 힘 또한 없었다.
영국이 티베트의 영토를 멋대로 잠식하자 청조는 완강하게 항의했지만 태평천국의 난과 청불, 청일전쟁의 패배, 의화단의 난 등 거듭되는 혼란으로 왕조의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티베트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영국은 아예 티베트 전역을 자국의 식민지로 병합할 욕심도 있었지만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영러조약"을 체결하면서 약 100여년에 걸쳐서 중앙아시아를 놓고 벌인 양국의 "그레이트 게임"은 끝났다. 서로의 세력권을 정하면서 티베트는 중립지대로 놔두기로 한 것이다.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무너진 틈을 타서 달라이 라마가 라샤에서 티베트의 독립을 선언하자 대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는 윈난독군 차이어(蔡鍔) 등에게 서정(西征)을 명령하였다. 중국군은 티베트인들의 저항을 손쉽게 물리치고 라샤로 진군했지만 영국이 개입하자 위안스카이는 군대를 물릴 수 밖에 없었다.
1914년 3월 24일에는 티베트와 영국 정부 사이에 체결된 심라 조약(Simla Accord)이 체결되었다. 영국령 인도식민정부 외교장관이었던 맥마흔(Sir Arthur Henry McMahon)은 중국을 배제한 채 몰래 티베트 정부와 인도 양국의 국경에 대한 비밀 협박을 맺었다. 이 과정에서 맥마흔은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히말라야 산맥의 봉우리들을 연결하여 국경선을 자의적으로 그었고 히말라아 산맥 남쪽에 있었던 티베트의 동남부가 인도령으로 포함되었다. 이것을 소위 "맥마흔 라인(McMahon Line)"이라고 부른다.
맥마흔은 "만약 수락하지 않으면 중국이 무력으로 티베트를 복속시키는 것을 묵인하겠다"면서 협박하여 티베트 대표단의 승락을 얻어내었다. 물론 중국은 심라 조약의 조인이 강압에 의한 것이라며 조인을 끝까지 거부하였다. 이로 인하여 양국의 국경은 원래의 국경에서 북쪽으로 약 140여km나 올라갔다. 또한 영국은 티베트 정부와 직접 조약을 체결함으로서 티베트를 독립국가로 인정하고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영토적 주권을 부정하였다. 물론 위안스카이 정권은 티베트는 여전히 중국의 영토라고 강조하면서 영국이 일방적으로 정한 맥마흔 라인을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1927년 북벌 전쟁 이후 북양 정권을 대신하여 중국의 정통 정부가 된 장제스 역시 똑같은 입장을 고수하였다.
결국 중국과 인도 양국 사이에 벌어진 국경 분쟁의 기원은 제국주의 시절의 영국이 뿌려놓은 셈이다. 양국의 분쟁 지역은 12만 4천㎢에 달하며 전 세계의 여러 분쟁 지역 중에서도 가장 큰 사례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심라 조약과 맥마흔 라인은 영국인들의 머릿속에서 금새 잊혀졌다. 심라 조약 체결 직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에만 해도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인도-티베트 국경을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것은 30여년이 지난 뒤인 제2차 세계대적 말기였다. 버마를 점령한 일본군이 1944년 5월 인도까지 점령하겠다는 욕심으로 임팔작전을 실시했기 때문이었다. 영국군은 일본군을 저지하는 한편, 맥마흔 라인 이남의 주요 지역을 점령한 채 인도령에 편입시켰다. 장제스 정권은 강력하게 항의했으나 이를 저지할 힘이 없었다.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하였다. 신생 인도는 기존의 국경선을 그대로 계승한다고 선언하였다. 물론 장제스 정권은 영국이 멋대로 그어놓은 맥마흔 라인을 인정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국공내전이 발발하면서 인도를 상대로 국경 문제를 거론할 상황이 아니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쫓겨갔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 1950년 10월 장궈화가 이끄는 공산군 제18군단이 진사강을 넘어 티베트로 진격하였다. 1951년 5월 23일 중국 부주석 주더와 티베트 대표단, 중국에 망명 중이던 판첸 라마 사이에서 "17개조 협정"이 체결되었다. 티베트는 중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것은 국경 문제에 있어서 인도의 상대가 더 이상 만만한 티베트나 군사적으로 무력하고 내전의 혼란에 빠져 있던 장제스 정권이 아닌, 마오쩌둥이 통치하는 훨씬 강력한 신생 중국이 되었다는 얘기였다.
인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티베트는 중국과의 전략적인 완충지대였다. 따라서 중국이 무력으로 티베트를 정복하는 것은 인도에게도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네루는 절실하게 인도의 도움을 요청하는 티베트 정부를 무시한 채 마오쩌둥이 차지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다. 오히려 미국이 티베트에 개입할 의사를 밝히면서 인도의 협력을 요청하자 거부하기도 했다. 영국의 지배로부터 막 독립한데다 사회주의에 매우 우호적이었던 그는 마오쩌둥을 서방에 대항하기 위한 좋은 파트너로 여겼던 것이다. 또한 非사회주의 국가로서는 가장 먼저 중공 정권을 승인하고 국교를 체결하였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네루가 선택한 가장 최악의 실수인 셈이었다.
한편으로 중국군이 티베트를 점령하는 동안, 네루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는 인도의 몫을 챙길 생각이었다. 과거 영국의 식민 정부가 티베트 정부를 윽박질러 맥마흔 라인을 일방적으로 그었지만 그렇다고 이 지역을 실효적으로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51년 2월 인도 군인들이 무력으로 부탄 동쪽에 있는 타왕을 점령하고 티베트인 관료들을 쫓아낸 후 자국령이라고 선언하였다. 이곳은 인도-티베트 국경의 요충지로서 나중에 중인전쟁이 발발했을 때 가장 먼저 총성이 울린 곳이기도 하다. 또한 부탄과 네팔 사이에 있는 중부 접경지대에 대해서도 군대를 보내어 점령한 후 약 2천여 ㎢에 달하는 영역을 자국령에 편입시켰다. 맥마흔 라인 이남은 비로소 인도의 수중에 들어왔다. 인도군은 맥마흔 라인을 따라서 수십여개의 초소를 세우고 경계를 강화하였다.
네루는 맥마흔 라인이 중국과 인도의 국경이며 히말라야 산맥 이남은 전적으로 인도의 세력권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엄연한 독립국인 네팔과 부탄까지도 자신들의 세력권에 넣겠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네루는 1949년 6월 히말라야 산속에 있는 작은 소국 시킴 왕국에 군대를 보내어 점령한 후 1950년 12월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인도의 보호령으로 삼았다. 또한 네팔과 부탄에 대한 제3국의 위협은 인도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선언하였다. 물론 중국을 겨냥한 것이었다. 1975년 4월에는 시킴 국왕 팔덴 된둡 남걀을 강제로 폐위시킨 후 형식적인 국민 투표를 실시하여 인도에 완전히 복속시켰다. 쫓겨난 시킴 국왕 남걀은 미국으로 망명한 후 1982년 1월 뉴욕에서 사망했으며 그 뒤를 이은 왕세자 왕추크 텐진 남걀은 여전히 인도의 시킴 점령은 불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주변 소국에 대한 횡포는 인도 역시 중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인도가 맥마흔 라인 이남을 점령하는 동안 중국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중국의 침묵에 대하여 네루는 맥마흔 라인을 묵인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네루의 착각일 뿐이었다. 마오쩌둥은 영토 문제에 관한한 조금도 양보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가 나서지 않은 것은 인도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된 신세였다. 한반도에서는 미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다 중국 동남부에서는 장제스의 타이완과 대치하고 있었다. 티베트를 복속시킨지도 얼마되지 않았기에 통치 권력을 공고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게다가 인도는 중국을 타이완을 대신하여 유엔 상임이사국으로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등 소련을 제외하고 중국에게 가장 우호적인 국가였다. 인도가 중국의 안보를 직접적으로 위협하지 않는 이상 서두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공산주의 특유의 전술적인 후퇴에 지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양국이 밀월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에는 국경 문제는 뒤로 미루어졌다.
양국의 국경 문제가 처음 논의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 12월이었다. 12월 31일부터 다음해 4월 29일까지 베이징에서 티베트에 대한 양국 회담이 개최되었다. 그리고 8년 기한의 "중국 서장(티베트)과 인도 간의 통상 및 교통에 관한 중-인 협정"이 체결되었다. 여기서 저우언라이는 이른바 "평화를 위한 다섯가지 원칙"을 제창하면서 양국의 우호를 강조하였다. 또한 중국은 네팔과 부탄에 대한 인도의 종주권을, 인도 대표단은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양측은 서로의 세력권을 정한 셈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국경 문제는 합의하지 못했다. 네루는 여기서 인도가 원하는대로 국경을 정한 후 완전히 못박음으로서 다시는 중국이 거론하지 못하도록 할 생각이었으나 저우언라이는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인도가 인정했다"는 사실만 강조하고 막상 인도가 요구하는 국경 문제에 대한 논의는 교묘하게 회피하였다. 회담은 결과적으로 인도의 참패였다.
네루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지 못한 채 물러설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미국이 점점 중국에 밀착하는 인도를 견제할 목적으로 파키스탄에 접근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바로 한달 뒤인 1954년 5월 19일 미국과 파키스탄은 공동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인도로서는 미국-파키스탄의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협력을 더욱 강화하는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국경 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여 우호를 깨뜨리는 대신, 서로 한발짝 물러난 셈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덮어둘 수는 없으며 언젠가는 양국의 뜨거운 감자가 부상하리라는 것은 불보듯 뻔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1954년 6월 2일 약 30여명의 인도군 병사들이 중부 접경 지대의 테롱쭝(Terong Rdzong)이라는 국경 마을을 점령하였다. 이곳은 맥마흔 라인 남단에 속했지만 실제로는 중국과 인도 어느 쪽의 통치도 받지 않는 "공백 지대"였다. 650km에 달하는 동부 국경에는 이런 공백 지대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국경마을을 점령하고 초소를 세웠다. 이로서 인도가 새로이 확보한 면적은 약 5백여㎢ 정도였다. 하지만 인도 입장에서는 자국의 영토라도 중국에게는 도발이나 다름없었다. 사건 직후인 1954년 6월 27일 뉴델리를 방문한 저우언라이는 네루에게 맥마흔 라인은 과거 제국주의 영국이 멋대로 그어놓은 선에 불과하기에 중국 정부는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원론적인 발언에 불과할 뿐, 굳이 인도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등 강력하게 문제 제기를 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과거 위안스카이나 장제스가 티베트 문제를 놓고 한치의 양보도 없다는 식으로 대응했던 것에 비하면 매우 소극적인 반응이었다.
당시 중국과 인도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별개로, 네루가 중국의 반발을 무릅쓰고 강경하게 "북진 정책"을 밀어붙였던 이유는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지배력이 점점 강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루가 중국의 티베트 침공을 묵인한 것은 서구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인도의 전략적인 이해 관계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그는 중국이 티베트를 병탄할 수는 있어도 지배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어차피 티베트의 역량으로는 중국군의 침공에 저항하여 독립 국가로 남기는 어렵다. 그러나 티베트는 "하늘과 맞닿은 곳"이라고 불릴 만큼 사람이 살기 어려운 험준한 고지대가 대부분이었다. 변변한 도로도 없고 산소도 희박한 티베트에 1천km가 넘는 병참선을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티베트인들의 독립적인 성향을 고려한다면 중국은 결국 티베트의 자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네루는 중국이 티베트를 직접 지배하기보다는 인도와의 완충지대로 남겨놓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동안의 역사가 그러했지 않았던가.
그러나 네루의 생각은 마오쩌둥을 얕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이전의 원나라나 청나라처럼 티베트를 대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는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면서 티베트인들을 분열시키고 저항을 가차없이 진압하면서 빠른 속도로 티베트 사회를 개조하였다. 오랫동안 티베트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중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지만 문화적으로는 인도 문명권에 속하는 나라였다. 하지만 사회주의 체제에 편입된 후 인도의 영향력은 사실상 소멸하였다. 또한 티베트에서 누리던 인도의 이권 역시 모두 중국에게 넘겨야 했다. 여기다 인구 과잉에 허덕이는 중국인들이 티베트에 몰려오면서 티베트의 "중국화"는 시간 문제였고 더 이상 중국과 인도의 완충지대가 아니라 오히려 인도를 위협하는 중국의 발판이었다. 인도 입장에서는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동부와 중부의 국경에서 인도가 북진 정책을 고수하면서 맥마흔 라인 이남의 국경 마을들을 장악하는 동안, 서부 국경에서는 중국이 비밀리에 신장성과 티베트를 연결하는 군용 도로인 신장 공로(新藏公路)를 건설하여 1957년 9월에 완공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로라고 불리는 신장 공로는 총 길이 1,170km에 달하며, 신장성 예청(葉城)에서 출발하여 티베트 스추안허진(狮泉河镇)을 연결한다. 티베트에 대한 물자 보급은 대부분 이 도로를 통하였다. 티베트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함이었지만 문제는 양국의 분쟁 지역 중 하나인 악사이친을 경유했다는 점이었다. 인도와 사전 협의한 것이 아니므로 당연히 인도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또한 1959년에는 신장성에서 카라코람 산맥을 지나서 파키스탄의 카슈미르 지역과 연결하는 카라코람 공로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양국의 국경 문제가 점점 첨예해지는 가운데, 중국이 악사이친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겠다는 의미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네루는 중국의 도발이라며 격분하였다. 또한 신장 공로의 건설을 정찰하려던 인도 순찰대는 중국측에게 발각되어 억류당하는 등 인도의 대응은 너무 늦었고 건설을 막을 수 없었다. 때마침 달라이 라마가 불교 행사 참석차 뉴델리를 방문한 후 네루와 회담을 개최하였다. 중국은 가뜩이나 티베트의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네루가 달라이 라마와 회담을 가진 것을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여기다 미국 CIA도 티베트 저항 세력을 은밀하게 지원하고 있었다. 네루와 마오쩌둥은 서로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고 양국의 관계는 급격하게 경색되기 시작했다.
1958년 10월 18일 네루는 인도 정부 명의의 외교 문서를 저우언라이에게 보내어 중국측이 멋대로 악사이친을 관통하는 군용 도로를 건설한 것에 대하여 정식으로 항의하였다. 또한 중국 정부가 자국의 지도에 악사이친 지방과 맥마흔 라인 이남 지역을 중국의 영토로 표시한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는 이 지역은 자국의 영토이며 인도가 주장하는 국경선을 수락할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또한 과거 티베트 정부가 영국, 인도와 체결한 조약은 중국의 승인을 받지 않았으므로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근본적으로 양측의 첨예한 모순은 티베트의 실체를 어떻게 보는가에 있었다. 인도는 당시 티베트가 외교권을 가진 엄연한 독립국가이며 따라서 비록 티베트가 중국에 병합되었다고 해도 중국은 티베트가 체결한 조약을 계승할 의무가 있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일 뿐, 외교권이 없으며 따라서 타국과 조약을 체결할 권리 자체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더욱이 악사이친을 비롯한 양국의 분쟁 지역은 안보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서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처지였다. 저우언라이는 협상을 통하여 절충점을 찾자고 제안했으나 네루는 거절하였다. 왜냐하면 중국의 타협안이란 악사이친은 중국이 차지하고 맥마흔 이남의 아루나찰 프라데시 지방은 인도가 차지하자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네루로서는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양측의 입장은 서로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었다. 때마침 1959년 3월 티베트에서 일제히 중국의 지배에 대항하는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또한 달라이 라마가 라샤를 탈출한 후 인도로 망명하였고 그를 따라서 10만명이 넘는 티베트인들도 중국의 탄압을 피하여 인도에 들어왔다.
인도가 달라이 라마 일행을 환대하고 인도 영내에 망명정부를 수립하자 마오쩌둥은 분노하였다. 그는 인도가 달라이 라마의 망명을 받아준 것은 중국에 대한 내정 간섭이며 친구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비난하였다. 네루 역시 티베트인들이 봉기를 한 것은 중국이 강압적으로 티베트의 식민지화를 추진한 폭거 때문이라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그는 저우언라이가 말로는 "평화 공존의 5원칙"이라면서 소수 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한다고 하고서 스스로 깨뜨렸다면서 티베트에 대한 무력 진압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인도는 티베트인들의 자치를 지지한다고 선언하였다. 양국의 매체는 서로에 대하여 감정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상황은 일촉즉발이나 다름없었다.
1959년 8월 26일. 롱쥐(Longju)라는 국경 마을에서 양국군대의 초소끼리 총격전이 발생하고 중국군이 인도군의 초소를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양국 사이에 벌어진 첫번째 총성이었다. 네루는 저우언라이에게 서신을 보내어 롱쥐를 점령한 중국군을 즉각 철수시키라고 요구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지도부에게 중국과의 충돌이 확대되지 않도록 무력 대응을 자제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양측의 감정이 점점 격앙되는 가운데 10월 21일 인도 순찰대가 콩카(KongKa)라는 곳에서 중국군과 재차 충돌하여 9명이 사망하였다. 인도 정부는 중국이 불법적으로 콩카를 침략했다면서 비난을 쏟아내었다. 12월 21일에도 재차 콩카에서 양국 순찰대 사이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양측의 충돌이 점점 격화되는 사이, 1960년 4월 19일 저우언라이가 뉴델리를 방문하였다. 그는 네루와 마라톤 협상을 벌이면서 국경 문제를 논의하였다. 저우언라이는 당초 요구한 바대로 현 시점에서 양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지역을 서로 인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즉, 중국이 서부의 악사이친을, 인도가 동부의 아루나찰 프라데시를 각각 차지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양국 군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서로 현재의 국경선에서 물러나서 비무장 지대를 설치하는 방안도 내놓았다. 그러나 네루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면서 거절하였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중국과 인도는 공통적으로 "대국"이라는 의식이 있었다. 중국이 스스로 동아시아의 맹주로 여기듯, 인도 역시 자신을 서아시아 7개국의 맹주로 여겼다. 결과적으로 양국이 전쟁까지 불사하게 된 것도 단순히 국경이나 티베트 때문만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뿌리깊은 경쟁심과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어느 쪽도 물러설 생각은 없으므로 남은 것은 결국 무력에 의한 해결 밖에 없었다. 중국은 인도 최대의 숙적인 파키스탄에 접근하는 한편, 네팔에 대해서도 손을 내밀어 인도와의 이간질에 나섰다. 인도 역시 1959년 9월 12일 소련과 협정을 맺고 15억 루피에 달하는 원조를 얻는 등 대중 포위망의 구축에 나섰다.
1961년 인도군 지도부는 "온카르 작전(Onkar Operation)"을 수립하고 국경지대에 대한 병력 증강과 순찰 강화에 나섰다. 그러나 국방부 일각에서는 신중론도 제기되었다. 인도는 현실적으로 중국을 상대로 대규모 전쟁을 수행할 여건이 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동안 중국은 분쟁에 대비하여 국경 지대에 대한 도로를 정비하여 유사시 신속하게 병력과 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반면, 인도는 변변한 도로조차 없는 실정이었다. 즉, 중국과의 전쟁을 한다면 승산이 없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인도 사회에서 이미 "중국이 인도의 영토를 부당하게 점령하고 있다"라는 반중 여론이 격앙된 상황에서 신중론은 힘을 얻기 어려웠다. 인도 지도부에서 대중 강경을 주장하는 쪽은 외교부였고 오히려 중국과의 전쟁을 피해야 한다는 쪽은 군부였다. 외교부는 중국과 싸워도 이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신감의 이유는 인도가 포르투칼령이었던 고아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포르투칼의 세력을 쫓아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에 처음으로 도착한지 10여년 뒤인 1510년 포르투칼은 무력으로 고아를 차지하였다. 또한 인도 서북부 해안에 있는 항구 도시 다만(Daman) 과 디우(Diu)도 점령하여 포르투칼령 인도를 건설하였다. 면적은 약 4천㎢정도였다.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에도 여전히 포르투칼은 이 세개의 항구 도시를 쥐고 있었다. 인도가 포르투칼 정부에게 식민지의 반환을 요구하자 포르투칼 정부는 인도 내 포르투칼의 영토는 식민지가 아니라 정당하게 차지한 영토라면서 거부하였다. 또한 병력을 증파하는 등 지배권을 더욱 강화하고 인도인들의 시위를 탄압하였다.
인도 정부는 최후 통첩을 보낸 다음, 1961년 12월 18일 인도군 제17사단과 제50 공수 대대, 제63 보병 대대 등 약 4만5천명의 병력과 2만톤급 영국제 경항모 "빌크란트Vikrant"를 비롯한 해공군을 동원하여 고아를 포위한 후 일제히 공격하였다. 포르투칼 수비대는 겨우 4천여명에 불과했다. 따라서 인도군의 무력 시위나 다름없는 짧은 전투 끝에 다음날 19일 고아와 다만(Daman), 디우(Diu) 등 포르투칼령 인도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포르투칼 총독은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한 후 추방되었다. 이로서 장장 450여년에 걸친 포르투칼의 식민 지배는 끝났다. 또한 인도에게는 오욕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서구 세력을 몰아내고 무력으로 영토를 회복했다는 사실은 인도인들의 자부심을 크게 고취시켰다. 설령 그게 한물간 유럽 변방의 소국에 지나지 않는 포르투칼이라도 말이다. 그러나 중국을 상대로도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 중국은 차원이 다른 상대였다. 하지만 사기가 고무된 네루는 강경파들의 손을 들어서 군부에게 보다 공세적으로 나갈 것을 지시하였다. 1961년 말 영하의 혹한 속에서 중국이 순찰을 중지한 틈을 타서 인도군 순찰대는 양측의 통제선을 넘어서 수십여개의 초소를 설치하였다. 대부분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무인지대였기에 중국이 이를 발견한 것은 다음해 봄이었다. 중국 역시 초소를 증설하고 순찰을 강화하면서 양측은 통제선을 따라서 서로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네루가 강경하게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인도의 군사력에 자신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중국이 내부적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어서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마오쩌둥은 1952년부터 1957년까지 제1차 5개년 계획으로 연 평균 10% 이상의 고도 성장을 하자 고무된 나머지, "7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고 10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자"는 거창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것이 바로 소위 "대약진 운동"이다. 그러나 실적 경쟁에 지나치게 매달려 현실을 도외시하면서 3년 만에 경제는 거의 파산 지경에 내몰렸다. 중국의 GNP는 1958년 950억 달러에서 1960년에는 890억 달러로 약 7% 정도 감소하였고 식량은 2억 톤에서 1.4억톤으로 30%나 감소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국 전체가 유례없는 기근에 허덕이게 되었다. 중국 정부는 대약진 기간 동안 사망한 사람은 3천5백만명에서 4천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6억명 정도였던 중국 인구의 5%가 넘는 숫자였다. 이로 인하여 1959년 7월에 열린 루산 회의에서 펑더화이가 마오쩌둥을 공격하는 등 중국 지도부까지 분열되는 처지였다. 결국 루산 회의가 끝난 뒤 마오쩌둥은 일선에서 물러나고 2인자인 류사오치가 국가 주석이 되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스탈린을 대신하여 흐루시초프가 집권한 후 중소 관계가 악화되고 있었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과 서방과의 화해 무드에 마오쩌둥이 반발한 것이다. 양측이 서로를 비난하는 가운데 1960년 7월 16일 흐루시초프는 중국에서 활동 중인 소련 기술자 1390명을 일방적으로 귀국을 명령하였고 기술 합작과 설비, 물자의 공급 또한 중지시켰다. 이로서 1950년 2월 이래 10여년 동안 유지되어온 중소우호동맹조약은 사실상 휴지조각이 되었다. 중국은 미국과 서방은 물론이고, 소련과도 등을 지게 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직면한 중국이 서남까지 신경쓰지는 못하리라 네루는 낙관하였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누구를 상대로도 물러서는 법이 없는 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더욱이 그는 외세에 대한 편집광적인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인도를 상대로 물러난다면 다음에는 티베트 차례가 될 것이며 중국은 미국과 소련, 인도에게 완전히 포위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우선 인도를 철저하게 짓밟아서 기세를 꺾어버림으로서 대중 포위망의 한 축을 무너뜨리기로 결심하였다.
1962년 여름 이후 중국과 인도 양측의 충돌은 점점 격화되었다. 도처에서 쌍방의 군대가 상대방의 초소에 총격을 가하거나 포위한 채 비난하는 방송을 하기도 했고 전투가 벌어져서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9월 20일에는 남카 추(Namka chu)라는 곳에서 양측 군인들이 충돌하여 인도군 5명, 중국군 2명이 부상을 입었다. 10월 3월 드디어 마오쩌둥은 공산당 지도부를 소집하고 인도와의 전쟁을 결정하였다.
"우리는 장제스와 전쟁을 치뤘다. 일본과도 싸웠고 미국과도 싸웠다.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두려워 하지 않았다. 또한 어떤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이제 인도가 우리와 일전을 겨루고 싶어 한다. 우리는 두렵지도 않고 물러설 수도 없다. 만약 우리가 물러선다면 푸젠성과 맞먹는 땅을 그들이 차지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네루가 위험을 자초하면서까지 우리가 싸우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상 우리가 그를 상대해 주지 않으면 친구로서의 도리가 아닐 것이다."
출동 부대는 서장 군구 산하 중국군 3개 사단(제11사단, 제55사단, 제130사단) 등 약 3만 5천명에 달했다. 아시아의 양 대국이 일전을 겨룰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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