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억 중국과 4억 인도의 싸움은 중국의 완승으로 끝났다. 하지만 인도에게 히말라야에서의 패전은 단순히 국지적인 패배가 아니었다. 동북 전선에서 후퇴 중이던 인도군은 우회한 중국군에게 퇴로가 차단되어 괴멸하였다. 서부 국경에서도 인도군은 패주하였고 중국군은 43개소에 달하는 인도군 전초 거점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급히 최일선으로 향하던 인도군의 증원부대 역시 격퇴당하였다. 인도군은 전 전선에서 말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사단장, 여단장들은 부하들을 버리고 제 혼자 살자면서 비행기를 타고 도망쳤다. 그야말로 추태였다. 맥마흔 라인의 방어선을 돌파한 중국군은 브라마푸트라강 너머의 아쌈 평원을 눈 앞에 두었다. 이제 인도 본토의 침공도 시간 문제였다.
인도군이 패주했다는 소식에 인도 대륙 전체가 공황 상태에 직면하였다. 발등에 불 떨어진 꼴이 된 네루는 11월 19일 급히 케네디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어 개입을 요청하였다. 그동안 어느 진영에도 속하기를 거부한 채 소위 "비동맹"의 맹주를 자처하던 그로서는 체면이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있는가. 서방의 원조 없이는 인도의 빈약한 군사적 역량으로는 도저히 중국군을 저지할 수 없었다.
소총과 탄약, 박격포탄을 잔뜩 실은 미 공군의 수송기가 연일 캘커다 공항에 착륙하였다. 영국 역시 대량의 무기를 보내는 한편, 인도 정부의 정식 요청이 있으면 군대를 보내어 무력 개입할 것을 약속하였다. 미, 영 등 서방 진영이 인도에 대한 군사 원조에 나서고 인도 전역에서 국가 존망의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지에 불타는 지원병들이 쇄도하였다. 이들은 막 도착한 서방제 무기로 무장한 후 최전선으로 항하였다. 네루는 반격을 준비하였다.
이제 중국과 인도의 충돌은 세계 전쟁으로 확대될 판이었다. 여기다 같은 시기 지구 반대편에서는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가 일어났다. 소련이 쿠바에 핵 미사일을 배치하려 하자 케네디 대통령은 미 해군을 출동시켜 쿠바를 침공할 준비를 하였다. 양측은 호전적인 발언을 쏟아내면서 조금도 물러설 수 없다는 식으로 맞섰다. 핵전쟁은 시간 문제였다. 인류는 그야말로 존망의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바로 이 순간이었다. 중국군이 전진을 멈춘 것은. 개전 한달 째인 1962년 11월 21일 자정, 베이징에서는 "중국군은 이 시각을 기하여 모든 전투를 중지한다"는 기습적인 선언을 발표하였다. 인도의 도발로 부득이 자위 반격전쟁을 실시했을 뿐 "징벌"의 목적을 달성한 이상 그동안 점령한 모든 영토를 반환하고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되 후방 20km까지 물러나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모든 포로와 노획한 무기의 반환도 약속하였다. 한마디로 그동안의 일을 모두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얘기였다.
중국의 깜짝 발표는 또 한번 인도와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여지껏 흠씬 두들겨 놓고 그만 싸우자는 것이 있을 법한 일인가. 기만인가, 진심인가. 마오쩌둥의 진짜 속셈은 무엇인가. 혼란스러웠던 네루는 중국이 시간을 벌기 위해 상투적인 기만 전술을 쓰고 있다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실제로 중국군은 신속하게 철수하기 시작하여 10일 뒤인 12월 1일 모든 지역에서 철수를 완료하였다. 또한 4천여명의 포로와 노획 무기도 인도군에게 빠짐없이 반환되었다. 인도군이 되돌려 받은 무기는 대포 150여문, 기관총 220여정, 소총 2500여정, 포탄 2만발, 차량 120여대, 경전차 2대, 실탄 200만발에 달했다.
왜 이 시점에서 마오쩌둥은 멈춘 것인가. 역사상 히틀러 못지 않게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었던 마오쩌둥은 히틀러만큼이나 호전적이면서 허세의 달인이자,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인물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현명하게도 자신이 언제 멈추어야 하는지 정도는 잘 안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에게는 이 때가 바로 멈추어야 할 순간이었다. 비록 중국군이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미 병참선은 늘어질 대로 늘어져 있었다. 험준한 히말라야 산맥을 통과하여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것은 중국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인도군은 비록 패배했지만 서방의 원조를 통하여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만약 승리에 도취되어 더 깊숙이 진격한다면 인도군의 반격에 직면할 것이 틀림없었다.
대외적인 상황도 중국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 11월 2일 소련은 쿠바에서 결국 물러났다. 미국과 소련은 전쟁 대신 타협을 선택한 것이다. 중-인 전쟁 내내 말로만 중국을 지지했던 흐루시초프는 그나마 쿠바 미사일 위기가 지나가자 아예 태도를 바꾸고 중립을 선언하였다. 소련은 끝까지 중국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반면, 더 이상 소련과의 충돌을 우려할 필요가 없게 된 케네디는 네루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량의 무기를 제공하는 한편, 본격적으로 무력 개입할 태세를 보였다. 인도의 뒷배에는 서방이 있었지만 중국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비동맹 국가들까지도 중국을 비난하고 나섰다. 중국은 침략 국가로 낙인이 찍혀서 국제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되었다. 중국이 인도의 수렁에 빠진 사이 미국이 "대륙 반공"의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는 장제스를 부추겨 중국 동남부를 침공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애초에 마오쩌둥의 목적은 인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굴복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첫째는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전례없는 대기근으로 완전히 땅에 떨어진 자신의 위신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국가 주석의 자리를 류사오치에게 넘기고 한동안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던 그는 인도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정치적 위상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두번째는 서남 아시아의 대국을 자처하는 인도의 콧대를 꺾어버림으로서 다시는 중국의 패권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인도는 전투에서도 패배했지만 심리적으로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였고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네루는 북진 정책을 포기해야 했다.
중국의 급작스러운 휴전 제안에 네루는 국민들 앞에서는 "중국군의 철수가 결코 전쟁의 종결은 아니다"라면서 중국의 휴전 제안에 결코 응하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싸우겠다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중국군의 위력을 충분히 절감했던 인도군 수뇌부는 중국군이 알아서 물러나는 이상 굳이 싸울 의지가 없었다. 따라서 일선 부대에 중국군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선제 공격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이 때문에 야당 정치인들은 "굴욕"이라면서 네루와 군부를 항햐여 비난을 퍼부었다. 강경파들은 중국과의 협상을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하였다.
겉으로는 체면 때문에 강경한 발언을 일삼던 네루는 막상 뒤로는 저우언라이와 서신을 주고 받으면서 이미 물밑 협상에 착수하고 있었다. 중동전쟁에서 그야말로 무자비했던 이스라엘과 달리, 마오쩌둥은 훨씬 관대하였다. 영토를 할양하라거나 배상금의 요구도 없었고 포로 송환에 대한 조건도 없었다. 만약 승자로서 이런저런 무리한 조건을 달았다면 협상은 당장 결렬되었을 것이고 전쟁은 재개되었을 것이다. 마오쩌둥은 오히려 인도군을 포로로 취급하지 말 것과 무기도 깨끗하게 닦아서 아무 조건 없이 돌려주라고 지시하였다. 인도는 중국의 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덕분에 네루는 땅에 떨어진 체면을 추스리고 중국과의 협상에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군이 인도에서 철수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국경 문제였다. 영토에 관한한 어느 쪽도 결코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저우언라이는 네루에게 보낸 편지에 "중국군이 국경에서 20km 후방으로 철수했으니 인도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국측이 요구하는 국경은 네루가 "북진정책"에 착수하기 이전인 1959년 11월 7일의 경계선이었다. 반면, 인도는 중국군이 공격에 나서기 전인 1961년 9월 8일의 경계선을 고집하였다. 이것은 양국의 국내 민족주의와 결부되어 있었기에 어느 쪽도 쉽사리 양보할 수 없었다. 이미 전쟁까지 벌인 판에 상대의 요구에 굴복하여 물러난다면 당장 엄청난 여론의 역풍에 직면할 판이었다.
네루는 중국측이 제안한 "국경에서 쌍방이 20km씩 철수할 것"을 공식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렇다고 다시 군대를 보내어 맥마흔 라인을 회복하거나 서부 지방의 악사이친을 점령한 중국군을 쫓아낼 용기도 없었다. 티베트 문제에 개입하여 중국을 자극할 베짱도 없었다. 그는 국경 지대의 인도군에 중국군과의 충돌을 회피하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스리랑카를 통하여 저우언라이에게 밀서를 보내어 "더 이상 맥마흔 라인을 침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네루는 심리적으로 마오쩌둥에게 완전히 패배한 셈이었다.
1962년 10월 20일부터 11월 21일까지 꼭 한달 동안 벌어진 전쟁은 중국의 완승으로 끝났다. 그 중에서 실제로 전투가 벌어진 기간은 10여일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중국군은 그 십여일 동안 150km를 진격하였으며 약 9만㎢에 달하는 광대한 아루나찰 프라데시 대부분을 석권하였다. 그야말로 중국식 전격전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중국군은 인도군 제7여단과 제62여단, 제4포병여단을 전멸시켰으며 제11여단과 제48여단, 제65여단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제67여단과 제70여단, 제114여단, 제161여단도 많은 손실을 입었다. 인도군의 손실은 제62여단장을 비롯하여 4천여명이 전사하였다. 또한 제7여단장을 비롯하여 4천여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1700여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총 손실은 거의 1만명에 달하였다. 이로서 중국-인도 국경에서 모든 인도군 부대는 말그대로 일소되었다. 반면, 중국군의 전사자는 722명에 불과하였다. 부상자를 합해도 2300여명 정도로 인도군에 비하면 1/4에 지나지 않았다. 4억 인도인들의 정신적 지주를 자처하던 네루에게는 치욕스러운 패배였다.
네루는 왜 패하였는가. 적어도 양국의 국력이나 외형적인 군사력에서는 결코 인도가 밀리지 않았다. 1962년 당시 양국의 GDP는 각각 중국이 460억 달러, 인도가 420억 달러(2015년 가치, 출처 : 세계은행)로 큰 차이가 나지 않았으며 1인당 GDP에서는 중국이 70달러인데 인도는 90달러로 오히려 20% 이상 높았다. 오히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극심한 경제난에 허덕이던 중국에 비하여 인도는 네루의 계획 경제 아래 연간 3~4%의 비교적 안정적인 발전을 누렸다. 냉전 내내 엎치락뒤치락하던 양 대국의 격차가 벌어진 것은 중국이 본격적으로 개혁개방에 착수하는 1990년대에 와서이다. 또한 국제 사회에서 고립된 채 미국, 소련 양쪽 모두와 반목하던 중국과 달리, 인도는 모든 진영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당초 네루가 중국에 대하여 강경한 자세를 고수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우위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미, 소와 대치하고 있는 중국이 감히 인도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한달 동안 중국이 투입한 병력은 모두 합해봐야 3~4만명에 불과한 반면, 인도가 투입한 병력은 추가로 증원된 병력까지 합하여 32만 4천명에 달하였다. 더욱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야 하는 중국으로서는 대규모 부대의 투입에 심각한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물자 수송도 인력과 가축에 의존해야 했다. 무기와 장비에서도 중국이 결코 우위에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해군력에서는 고작해야 어선을 개조한 낡은 연안용 경비정으로 구성된 중국 해군은 항공모함과 순양함까지 갖춘 인도 해군에 감히 견줄 바가 아니었으며 공군력에서도 변변한 비행장이 없는 티베트의 열악한 환경 때문에 중국 공군이 열세에 놓여 있었다. 인도 공군은 지금까지도 "만약 당시에 네루가 공군을 출동시켜서 중국군의 병참선을 차단했더라면 틀림없이 승리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네루가 해공군력의 투입을 거부했던 것은 현대적인 작전 역량이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인도 해군과 공군은 외형적인 전력은 상당했으나 훈련 상태나 교리는 형편없었다. 물론 네루의 지도력에도 문제가 있었다. 중-인전쟁은 사실상 마오쩌둥과 네루의 싸움이었다. 네루는 스스로 "전쟁 준비가 부족했다"고 반성하였다. 또한 서부 사령관이었던 다우레트 싱 중장은 네루에 대하여 "이 어리석은 행동은 지성을 상실한 무모한 도박이었다"라고 혹평하였다. 인도군 수뇌부는 히말라야 산맥에 병력을 투입하라는 네루에게 중국군의 반격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음에도 네루는 중국이 처한 불리한 상황에만 주목하여 막연하게 공격에 나설 수 없을 것이라고 낙관하였다. 기대와 예측은 엄연히 다른데도 혼동한 것이다.
인도군 수뇌부 역시 다를 바 없었다. 해발 4천m의 고산지대는 평지에 비하여 공기가 1/3에 지나지 않는다. 충분한 산악 적응 훈련 없이는 당장 고산병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된다. 하물며 극심한 운동량을 요구하는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상식임에도 군 수뇌부는 네루의 지시에 따라서 사전 준비도 없이 평야 지대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을 무작정 현장에 투입하였고 겨울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기에 얅은 군복을 입고 있던 병사들은 행군 과정에서 수없이 동상에 걸리거나 죽어나갔다. 게다가 병력은 수백km에 걸쳐서 분산시켰고 방어선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고립된 지형에 병력을 배치했기에 상호 연계나 후방 지원도 불가능하였다. 중국군에게 각개격파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인도군이 가지고 있던 봉건적인 잔재 때문이었다. 인도군의 문제점은 그야말로 총체적이었다. 중국군의 포로가 되었던 제7여단장 달비 준장은 "중국군 병사들이 몸을 굴려서 지뢰밭을 통과하고 가슴으로 총구를 막는 것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마찬가지로 포로가 되었던 한 인도군 하사는 "별 세개가 달린 중국군 고위 지휘관이 나같은 일개 하사 포로에게 약을 직접 가져다 주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 지휘관들은 식사와 취침, 흡연은 물론이고 심지어 화장실까지도 사병들과는 구분하여 사용한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그들은 자동차를 타고 가장 먼저 달아났다."라면서 특권 의식에 사로잡힌 인도군 장교들을 향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장교들에게 노예 취급을 받는 것이 당연하였던 인도군 병사들은 장교와 사병의 구분 없이 함께 웃고 함께 식사하면서 격의없이 어울리는 중국군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인도군이 패배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2차 대전 당시 200만명에 달하는 인도인들이 참전하여 북아프리카와 유럽, 버마, 동남아 등 세계 각지의 전선에서 싸웠다. 따라서 인도인들에게 전쟁의 경험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도군은 어디까지나 영국인들의 지휘를 받았을 뿐, 주도적으로 싸운 것이 아니었다. 인도군 부대에는 수천여명에 달하는 인도인 장교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하급 지휘관에 불과하였다. 또한 영국인들은 인도를 통치하면서 민족간의 갈등을 이용하였고 시크족, 구르카족 등 영국에게 충성하는 몇몇 소수 부족들에게만 장교의 길을 열어주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했을 때 인도군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무슬림 출신들은 파키스탄으로 넘어갔고 전체 인구의 2%가 채 되지 않는 시크족이 인도군의 30%를 차지하였다. 군 상층부 또한 시크족이 대부분 장악하였다. 특정 민족, 특정 카스트가 인도군의 중핵을 차지하는 현실은 여기에 속하지 못한 계층의 반발로 이어지면서 인도군의 결속력을 근본적으로 약화시켰다. 인도군은 영국 식민 시대의 잔재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중인전쟁은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던 마오쩌둥에게는 재기의 기회를, 네루에게 치명타가 되었다. 또한 국방장관 크리쉬나 메논 역시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육군참모총장, 제4군단장 등 군 수뇌부 역시 줄줄이 문책성 인사로 사임하거나 좌천되었다. 네루는 인도군이 얼마나 허약한지 절감하였고 필사적으로 군의 재건에 착수하였다. 그는 "군사력 강화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산악 전문 부대의 창설, 최신 전투기와 전차의 도입 등 현대화에 나섰다. 또한 미국, 소련, 영국, 유고슬라비아 등 서방과 공산진영을 가리지 않고 군사협정을 체결하여 원조 획득에 매진하였다.
그동안 경제 건설을 위하여 군비 투자를 최소한도로 억제했던 인도의 국방비는 1961년 28억 루피에서 1964년에는 81억 루피로 3배 이상 늘어나는 등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인도군의 군사력은 비약적으로 강화되었다. 중인전쟁 3년 후인 1965년 9월 카슈미르를 놓고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인도군은 파키스탄의 선제 공격을 받았음에도 금새 전쟁의 주도권을 되찾은 후 반격하였다. 비록 전투에서는 인도군이 파키스탄군을 압도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으나 전쟁에서는 우세하였고 유리한 입장에서 정전 협정을 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71년의 전쟁에서는 인도가 완승을 거두었다. 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네루는 이를 보지 못하였고 패전에 따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실의에 빠져 살다가 결국 2년 뒤인 1964년 5월 27일 뇌출혈로 죽었다.
네루는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그렇다고 마오쩌둥이 얻은 것은 있었던가.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국경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국경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양국의 분쟁 지역 중에서 맥마흔 라인 이남의 9만㎢는 인도가, 서부 악사이친의 3만㎢는 중국이 차지하였다. 공식적으로는 쌍방 모두 서로의 국경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지도, 더 이상 무력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양국 정부는 서로의 군대가 주둔한 지역을 따라서 소위 "실제 통제선"이라 하여 묵인키로 하였고 중간 지역은 비무장지대가 되었다. 인도는 패하고도 패하지 않은 셈이었고 애매모호한 상태에서 그냥 전쟁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간 셈이었다. 마오쩌둥의 유일한 성과는 신장성과 티베트에 대한 인도의 위협을 적어도 한동안은 제거했다는 것이었다. 그로서는 그 이상을 요구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승패와 상관없이 중국이 치룬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았다. 국제사회에서 중국은 침략자로 낙인이 찍혔다. 또한 인도와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티베트 문제 역시 해결되지 못했다. 티베트인들은 외부의 원조를 받으면서 독립 투쟁을 이어나갔고 중국의 탄압으로 지금까지 약 100만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한다. 달라이 라마는 인도에 망명한 채 티베트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면서 국제 사회에 티베트의 독립을 호소하고 있으며 1989년 10월에는 중국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노벨 평화상을 시상하기도 했다. 오늘날까지도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는 여전히 중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이다.
마오쩌둥은 중인전쟁을 "자위반격전쟁"이라고 불렀지만 일정 부분은 마오 특유의 편집광적인 히스테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항상 외세의 침략을 두려워했고 어떠한 위협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국은 북한을 제외한 모든 주변국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중인전쟁에서 흐루시초프가 중국의 편에 서지 않았던 것도 마오쩌둥이 그를 여러번 모욕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1964년 10월 쿠테타로 쫓겨난 흐루시초프를 대신하여 새로운 소련 지도자가 된 브레주네프(Leonid Brezhnev)는 중국과의 관계를 아예 단절하였고 1969년 중-소 국경분쟁이 일어나면서 양국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았다. 비록 싸움에서는 이겼을지 몰라도 매사 무력에 호소하는 마오쩌둥의 방식은 중국을 더욱 고립으로 몰아넣었고 상대의 깊은 증오심을 불러왔을 뿐이었다.
중인전쟁으로 지난 수백년 동안 유지되어 온 양국의 우호적인 관계는 하루아침에 증오심으로 바뀌었다. 인도는 중국을 주적으로 삼아 복수의 칼을 갈았다. 중국 역시 파키스탄에 접근하였고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을 때 파키스탄을 지원하였다. 1971년 12월 21일 인도 의회는 분쟁 지역 중 하나인 아루나찰 프라데시를 중앙 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정식 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100만명에 달하는 주민을 이주시켜 자국의 통치권을 강화하였다. 인도 외무장관 스와란 싱(Swaran Singh)은 "인도는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은 인정하지만 영토적 주권은 인정한 적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한마디로 티베트는 중국의 영토가 아니라는 뜻이다. 중국 역시 아루나찰 프라데시에 대한 인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중인전쟁이 끝난지 꼭 2년 후인, 1964년 10월 16일 신장성 위구르 지역의 소금 호수인 로프노르에서 거대한 섬광과 함께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중국이 첫번째 핵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위력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보이와 비슷한 22kt. 이미 수소폭탄 실험까지 한 미국이나 소련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이로서 중국은 다섯번째 핵보유국의 반열에 들어갔다. 중국의 핵개발 성공에 자극을 받은 인도 역시 핵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1974년 5월 18일 인도 서부의 구자라트 사막에서 첫번째 핵실험에 성공하였다. 위력은 15kt 정도. 인도는 중국에 이어 여섯번째 핵보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중국 전역에 불어닥쳤다. 중국 사회에 엄청난 상처를 남긴 문화대혁명은 군대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국방장관 린뱌오는 국공내전에서 "한신의 재림"이라고 불릴 만큼 펑더화이와 함께 중국군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이었으나 이 시점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군대의 현대화 대신 구태의연한 인민전쟁을 고집하였다. 게다가 권력욕에 혈안이 된 나머지 본연의 임무보다 정치 투쟁과 마오쩌둥의 우상화에만 열을 올렸고 군내의 파벌 싸움을 격화시켰다.
국공내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역전의 노장들이 어린 홍위병들에게 끌려나와 구타와 모욕을 당하였다. 펑더화이, 허룽 등 개국에 큰 공을 세웠던 군부의 원로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국 군사학교의 교관들의 80%이상이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 와중에 살해되거나 자살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1955년에 처음 제정된 계급 제도 또한 부르조아의 잔재라는 이유로 폐지되었다. 무기와 장비는 시대에 뒤떨어졌고 태반이 사용 불능이었다. 장교들과 병사들은 군사 훈련 대신 마오쩌둥 어록을 외워야 했다. 린뱌오 자신도 변덕스러운 마오쩌둥의 눈 밖에 나면서 가족을 데리고 소련으로 망명하려다 비행기가 추락하여 1971년 9월 13일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문화대혁명 10년은 마오쩌둥이 죽음으로서 끝났지만 중국군은 약화될대로 약화되었다. 1979년 덩샤오핑은 "베트남에게 한수 가르쳐주겠다"라고 큰소리쳤지만 허약해진 중국군은 4만명 이상의 사상자만 내고 망신을 당한 채 허둥지둥 물러나야 했다.
중인전쟁 이후 극도로 냉각되었던 양국의 관계는 마오쩌둥이 죽고 덩샤오핑이 권력을 쥐면서 점차 개선되었다. 1993년에는 나라심하 라오(P. V. Narasimha Rao) 인도 총리가 베이징을 방문하여 국경 문제에 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여기서 양국은 1962년 이래 암묵적으로 유지되어 온 "실제 통제선"을 서로 존중키로 합의하였다. 이는 엄밀히 말하여 국경 문제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다기보다는 그저 훗날에 해결하자는 식으로 덮었다고 할 수 있다. 양국의 입장이 워낙 첨예하고 평행선만 달리고 있다보니 부득이한 선택이지만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서 언제라도 분쟁이 재발될 여지를 남겨둔 셈이었다.
21세기인 지금, 중국과 인도는 세계 최대의 인구와 방대한 영토, 풍부한 자원을 가진 신흥 강대국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20세기가 미, 소가 주도하던 시대라면 21세기는 중국, 인도가 주도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중국은 G2의 하나가 되어 미국을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으며, 비록 중국의 눈부신 부상에 가리기는 했지만 인도의 성장세 역시 만만치 않다. 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중국과 인도를 묶어서 <친디아(Chindia)>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오늘날 중국과 인도가 경제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이상 1962년과 같은 무력 충돌이 재현되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막강한 재래식 군사력 외에도 핵무기까지 보유하고 있는 두 강대국이 싸우는 것은 서로 잃는 것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또한 양국은 최고위급 인사들이 활발하게 왕래하면서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2006년 11월에는 후진타오 주석이 인도를, 2008년 1월에는 만모한 싱(Manmohan Singh) 인도 총리가 베이징을 방문하여 정상 회담을 개최하고 양국 현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2013년 기준 양국의 무역 규모는 665억 달러에 달하는 등 해마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양국에 아무런 갈등도 없는가. 국경 문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으며 티베트 문제 역시 첨예하다. 달라이 라마와 망명 정부는 1959년 이래 근 50년이 넘도록 인도에 체류한 채 티베트 독립을 외치고 있다. 중국 입장에서는 심기가 불편할 수 밖에 없다. 중국 역시 인도의 주적인 파키스탄에 대한 경제, 군사 원조를 확대하고 있으며 스리랑카, 방글라데시에 대해서도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등 서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 확대에 나서고 있다. 더욱이 시진핑 집권 이후 "일대일로"라 하여 과거 유럽과 중국을 경제적으로 연결하던 실크로드를 재건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런 중국의 행보는 당연히 인도를 긴장시킬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인도는 미국과 더욱 밀착하면서 미국의 대중 포위망 한축을 맡고 있다. 양국은 경제적인 협력과는 별개로 정치, 안보적으로 불신과 경계를 늦추고 않고 있는 것이다. 지난 4월 14일에는 중국 정부가 새삼스레 아루나찰 프라데시 지방을 자국령이라고 주장하면서 중국식 지명을 발표하여 인도 정부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마오와 네루 두 사람이 죽은 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양국의 대립과 갈등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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