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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1979년 중월전쟁(中越戰爭) - 1. 전쟁의 배경 /blog.naver.com/atena

1979년 2월 17일 새벽 5시, 광저우 군구 사령관 쉬스여우(许世友) 상장이 지휘하는 중국군 6개군 12개 사단 15만 8천명, 전차 250여대가 일제히 중국-베트남 국경을 돌파하였다. 이른바 "3차 인도차이나 전쟁" 또는 중월전쟁의 시작이었다.

호치민이 프랑스를 상대로 베트남 해방전쟁을 시작했을 때부터 중국은 깊숙이 개입하였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장제스를 타이완으로 쫓아내고 대륙을 차지한 마오쩌둥은 1950년 1월 베이징을 비밀 방문한 호치민에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북베트남에서 파견된 수백여명에 달하는 베트민(Việt Minh, 베트남 해방전선) 간부들이 중국에서 훈련받았다. 또한 웨이궈칭(韋國淸)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고문단이 파견되고 중국-베트남 국경을 통하여 대량의 무기가 제공되었다. 프랑스와의 전쟁 중 중국이 제공한 규모는 5개 보병사단과 1개 포병사단, 1개 고사포 연대를 무장시킬 수 있었다. 무기도 빈약하고 엉성한 게릴라 무리에 지나지 않았던 호치민의 베트민 군대는 단숨에 비약적으로 증강되었다. 이로서 북부 베트남에서의 전황은 역전되면서 수세에 몰린 쪽은 프랑스군이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결정지었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중국 군사 고문단의 역할은 지대하였다. 당초 베트민군 총사령관 보 응우옌 지압은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 주변의 홍강 삼각주(紅河 三角洲) 평야지대에서 프랑스군과 결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웨이궈칭은 프랑스 공군과 기계화 부대에게 훨씬 불리한 북서쪽 산악지대에서 싸울 것을 제안하였다. 호치민은 보 응우옌 지압 대신 웨이궈칭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북서쪽의 전략적 요충지인 디엔비엔푸를 포위하였다. 프랑스군을 완전히 포위한 베트민 군대는 수만명에 달하는 주변 농민들을 동원한 것 외에도 중국 정부가 제공한 200여대의 트럭으로 물자와 식량, 탄약을 실어날으면서 포위망을 점점 압축하였다. 1954년 5월 7일 포위망 돌파에 실패한 프랑스군 1만6천여명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호치민은 독립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리고 1954년 10월 10일 하노이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 사령부를 점령하고 베트민의 깃발을 올리는 베트민 병사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호치민이 미국의 대규모 원조를 받고 있던 막강한 프랑스군을 꺾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중국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소련의 도움은 이 때만 해도 매우 미미하였다. 베트남 전쟁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데다 자신들이 관여할 경우 미국의 본격적인 개입을 야기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인들에 의해 훈련받은 베트민 병사들은 마오쩌둥의 인민전쟁식 교리에 따라 산악지대에서 게릴라 전쟁을 수행하였고 정면작전에만 익숙한 프랑스군을 괴롭혀 많은 손실을 입혔다. 결국 사기가 땅에 떨어진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손을 떼기로 하고 미국에게 공을 넘겼다. 원래 골수 사회주의자보다는 오히려 민족주의자에 가까웠던 호치민이 사회주의로 완전히 기울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 중국의 영향 때문이었다.

북위 17도 이북의 북부 베트남의 새로운 통치자가 된 호치민은 중국인 고문들의 지도 아래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방식은 단순했다. 부자로부터 모든 땅과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눠준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그러했듯 온갖 폭력과 유혈이 뒤따랐다.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자들은 인민의 적으로 매도되어 가차없이 처형되었다. 당시 토지 개혁 과정에서 살해된 사람은 적어도 5천여명에서 많게는 5만명까지 추산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농민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고 반발이 극심하자 호치민은 토지개혁을 일부 완화시키기도 했다. 어쨌거나 호치민 정권은 중국의 도움을 받아 국내의 정치적 반대 세력들을 제거함으로서 여전히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부와는 달리 빠르게 안정되었다.

한편, 남부에는 미국이 후원하는 응오 딘 지엠의 친미 괴뢰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것은 남북 베트남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 정권을 수립키로 했던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었지만 호치민으로서는 미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마오쩌둥도 "베트남의 통일은 당장 해결할 수 없다. 장기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라고 조언하였다. 호치민은 남부를 침공하는 것을 미루고 정치 투쟁과 무력 투쟁으로 서서히 응오 딘 지엠 정권을 무너뜨리기로 결심하였다. 1960년 12월 남부의 공산당과 여러 민족주의 세력을 아우르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소위 베트콩, 참고로 베트콩越共은 정식명칭이 아니라 남베트남에서 공비라는 뜻으로 붙인 멸칭이다)"이 결성되었다. 남베트남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응오 딘 지엠 역시 호치민과 마찬가지로 집권하자말자 국내의 불온 세력들부터 대대적으로 숙청했기 때문에 남베트남에서 공산당의 조직은 급격히 쇠퇴한 상태였다. 하지만 도시를 버리고 농촌을 집중적으로 파고 들어간다는 마오쩌둥 식 인민혁명전략에 따라 농민들을 포섭해 나가면서 세력을 빠르게 재건하였다. 특히 응오 딘 지엠의 "유상 토지개혁"이 철저하게 실패로 돌아간데다 부패한 관료들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은 폭발직전이었다. 1년 뒤인 1961년 가을 베트콩에 가담한 세력은 이미 전체 인구의 2%인 20만명에 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숫자는 급격하게 늘어갔고 1964년이 되면 남베트남 인구 1500만명 중 1천만명이 베트콩의 통제 아래 넘어갔다. 허약하기 짝이 없었던 응오 딘 지엠 정권은 당장 위기에 직면하였다. 결국 미국이 개입을 결정하였다.

마오쩌둥 역시 미국에 대항하여 호치민에게 대규모 경제 군사 원조를 약속하였다. 중국은 이미 1955년에 2억 달러에 달하는 경제 원조를 제공하였다. 이 돈은 발전소와 공장 등 북베트남의 산업시설을 건설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중국은 약 20여년 동안 1975년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정복할 때까지 대량의 식량과 무기를 아낌없이 제공하였다. 또한 남부에서 활동 중인 베트콩에 대해서도 약 6억 달러에 달하는 원조를 제공하여 이들의 "투쟁"을 후원하였다. 덕분에 미국이 대량의 무기와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여 남베트남군을 육성했음에도 군사적 주도권은 북베트남쪽에 넘어갔으며 베트콩들은 곳곳에서 남베트남군을 습격하여 많은 피해를 입히는 등 남베트남은 내전 상태에 직면하였다. 1963년 5월 중국의 2인자인 류사오치가 하노이를 방문했을 때 호치민은 "베트남과 중국은 동지 겸 형제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통킹만 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간섭 전쟁에 나선 미국이 북폭을 시작하자 호치민은 중국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1965년 4월 18일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부는 북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한 중국인민지원공정대의 조직을 결정하였다. 주변국 분쟁에 중국이 무력 개입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한국전쟁과 달리 전투 부대를 파견하지 않고 고사포, 공병 등 후방 지원 부대로 국한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은 미국이 북폭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을 직접 침공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1965년 6월 9일 소위 "중국후근부대(中國後勤部隊)"이라고 불리는 첫번째 중국인 의용부대가 베트남에 진입하였다.

베트남 전쟁 초기 북베트남의 하늘을 맡았던 중국 의용군 고사포 부대. 미국의 강력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경제적으로 열세했던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혼란에 빠뜨리고 전쟁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든든한 후방을 맡아준 덕분이었다.

중국인들은 주로 후방에서 비행장과 도로, 철도 건설, 진지 공사, 통신 선로 구축 등을 지원하고 미국의 폭격에 대항하는 임무를 맡았다. 베트남과 가까운 광저우 군구, 윈난 군구 외에도 베이징 군구, 지난 군구, 선양 군구 등 중국 전역에서 병력과 물자가 차출되었다. 1971년 7월 철수할 때까지 연인원 32만명이 참전했으며 그 중에서 1100여명이 전사하였다. 특히 약 2만명으로 구성된 제2지대 고사포 부대는 북베트남 방공망의 중추였고 미 공군의 폭격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중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북베트남의 후방를 맡자 호치민은 남쪽으로 군대와 물자를 꾸준히 보낼 수 있었다. 1961년부터 1975년까지 북베트남은 베트콩 병력의 절반, 무기와 장비의 80%를 지원하였다. 북베트남 정규군이 참전하면서 남베트남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게다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당초에는 주로 남부 출신으로 구성되어 북베트남에 대한 나름의 독자성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점차 북베트남의 꼭두각시로 전락하였다.

북베트남이 미국을 꺾고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승리하는데는 소련의 원조도 컸지만 중국의 역할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미국의 북폭이 절정에 달했던 1965년~67년만 해도 중국은 소총 50만정과 대포 1만1천문, 막대한 탄약과 포탄을 지원했다. 그 외에도 곳곳에 공장을 건설하고 식량과 의약품, 심지어 비누, 치약에 이르기까지 온갖 일상 용품도 제공하였다. 물자 수송을 위한 도로 건설도 중국이 맡았다. 중국이 중국-베트남 국경의 수송로를 맡으면서 호치민은 북베트남의 인력을 남쪽으로 돌려서 소위 "호치민 루트"를 건설할 수 있었다. 베트남전쟁 중에 중국이 제공한 경제적, 군사적 원조 금액은 모두 합하여 약 200억 달러에 달했다. 1500억 달러를 쓴 미국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은 수준이지만, 당시 중국의 열악한 경제 사정과 고립된 신세에서 그야말로 총력을 기울인 셈이었다. 또한 이를 위해 자신들의 경제 건설을 오히려 뒷전으로 미루기도 했다. 만약 중국의 원조가 없었더라면 호치민은 결국 그리스 내전에서 그러했듯, 프랑스와 미국의 막강한 힘 앞에서 여지없이 짓밟혔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밀접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근본적인 모순과 불화를 지울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북베트남은 중국의 원조에 기대면서도 이들에 지나치게 종속되는 것을 엄중하게 경계하였다. 북베트남 간부들은 필요 이상으로 중국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꺼렸으며 이들의 간섭과 조언을 불쾌하게 여겼다. 또한 북베트남의 언론들은 과거 중국의 봉건 왕조들이 베트남을 침략했던 역사를 지속적으로 상기시켜 베트남인들의 반중감정을 노골적으로 자극하였다. 미국이 남베트남에 지상군 전력을 대대적으로 증강하고 북폭을 강화하자 중국은 정규군의 파견을 제안했지만 호치민은 이를 거부하였다. 북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화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중국과 베트남의 협력 관계란 역사적인 신뢰와 양국의 뿌리깊은 유대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국의 안보 차원에서 베트남을 지원하였다. 따라서 첨예한 문제를 놓고 베트남인들의 이익을 고려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식이었다. 제네바 협정 당시 남북 베트남의 분할을 놓고 북베트남은 디엔비엔푸의 승리를 앞세워 북위 13도선을 요구했지만 결국 저우언라이의 압력으로 북위 17도선으로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중국은 남베트남에서의 무장 투쟁을 지원하면서도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무력으로 통일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견제하려 들었다.

결국 중국이 바라는 것은 베트남과 미국이 끝없는 소모전을 펼쳐서 다같이 약화되는 것이었다. 중국에게 북베트남이란 대등한 동맹국이 아니라 북한과 마찬가지로 자국의 안보적 완충지대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큰 걸림돌은 마오쩌둥이었다. 그는 간부들에게 "베트남인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뿌리깊은 중화사상을 버리지 못했다. 또한 종주국으로 행세하면서 사사건건 간섭하고 훈계하는 식이었다. 전통적으로 反외세 성향이 강한데다, 자력으로 프랑스를 쫓아내었다고 여기는 북베트남 지도부로서는 북베트남 지도부는 오만하고 이기적인 중국 지도부의 행태에 반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베트남 노동당 서기장이었던 레 주언은 마오쩌둥에 대하여 "베트남을 이해하지도 못할 뿐더러, 고집불통에 타협도 안되며 한족 우월의 쇼비니즘에 빠져 있는 인물"이라며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런 양국 지도부의 모순과 불신감이 베트남전 당시의 밀월 관계에도 불구하고 결국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점점 중국에 대한 불신감을 가지게 된 북베트남 지도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에 접근하였다. 그동안 베트남에 무관심했던 소련 지도부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무력 개입하자 베트남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1965년부터 본격적인 원조에 나섰다. 1964년까지만 해도 중국에 비하여 미미했던 소련의 원조는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중국을 두배 이상 압도하였다. 북베트남 역시 외교의 축을 중국에서 소련으로 옮겼고 하노이와 모스크바를 오가는 횟수가 하노이와 베이징을 오가는 횟수보다 훨씬 많았다. 소련의 원조는 주로 전차와 대포, 미사일, 군함 등 현대식 중화기와 산업 기계류인 반면, 중국의 원조는 식량과 트럭, 소총과 같은 소화기였다. 북베트남은 소련제 전투기로 공군을 창설했고 소련제 탱크로 편성된 기갑부대를 편성하는 등 경무장한 보병 군대에서 현대적인 군대로 거듭났다.

북베트남이 소련에게 기우는 것에 비례하여 중국과 베트남의 갈등은 점차 심화되었다. 게다가 스탈린 사후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고 있었고 1969년 3월에는 만주 우수리강 전바오다오(珍寶島)에서 무력 충돌까지 벌어지는 등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다. 중소의 불화는 북베트남에게는 결코 좋을 것이 없었다. 소련의 원조 물자가 북베트남에 들어오려면 중국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매우 비협조적이었다. 1960년대 말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북베트남에 비교적 우호적인 류사오치가 몰락하였다. 류사오치를 대신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쥔 린바오는 동맹국에 대한 물적 원조를 반대하고 "자국의 혁명은 자국의 자원에 의존해야 한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격려 뿐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홍위병들은 베트남으로 향하는 철도를 파괴하고 소련의 원조 물자를 약탈하기도 했다.

양국의 첨예한 갈등은 정치만이 아니라 군사 전략과 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공의 교리는 소위 마오쩌둥 식 인민전쟁과 지구전이었다. 소위 "적을 인민의 바다에 빠뜨린다"라는 마오식 전략은 단기 결전을 회피하면서 소규모 게릴라전으로 적을 끝없이 괴롭히고 지치게 하여 최종적인 승리를 얻어낸다는 것이었다. 인민전쟁 교리를 통하여 장제스를 꺾고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은 북베트남에 대해서도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였다. 하지만 북베트남 입장에서는 인민전쟁이란 엄청난 희생과 고통이 뒤따르는 일이기도 했다. 또한 중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베트남전쟁을 의도적으로 질질 끌려는 목적으로 일부러 전차나 전투기와 같은 현대적인 무기 대신 시대에 뒤떨어진 경화기만 베트남 사람들에게 주고 있다며 불만을 품었다. 이들은 "타국의 경험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면서 반발하면서 미국과 견줄 수 있는 소련제 최신 무기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점차 소련식 교리를 수용하였다. 덕분에 미군이 철수하자말자 북베트남은 소련제 중전차를 앞세워 남베트남을 침공하였고 두달만에 승리할 수 있었다.

1968년 1월 30일 남베트남 전역에서 이른바 "구정대공세(뗏 공세Tet Offensive)"가 시작되었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한때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베트콩들은 1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만 낸 채 이렇다할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패주하고 말았다. 기대했던 남베트남인들의 봉기도 없었다. 중국 지도부는 북베트남이 마오식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적이 충분히 약화되기 전에 너무 일찍 공세로 전환했다면서 비판하였다. 이로 인하여 양국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고 중국은 원조를 대폭 삭감하였다. 1969년도 원조 금액은 전년에 비하여 20%가 줄었고 1970년에는 50%나 줄어들었다. 북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도 모두 철수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북베트남 길들이기인 셈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북베트남의 반중 감정과 친소 노선만 더욱 강화한 셈이었다. 게다가 1969년 9월 2일 호치민이 사망하고 친소반중파인 레 주언이 주도권을 쥐면서 중국과 북베트남의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악화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은 베트남에 완전히 손을 뗄 수도 없는 처지였다. 만약 손을 뗀다면 북베트남은 소련의 영향력에 편입될 것이고 소련과 대립하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남북으로 포위되는 형국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중국은 양국의 관계를 개선하고 북베트남 지도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1971년부터 다시 원조를 대폭 늘렸다. 그러나 양국의 근본적인 불신과 갈등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미국과의 평화 협상을 놓고도 중국은 북베트남이 미국과 타협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하는 등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는 점이었다. 여전히 미국과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던 북베트남 지도부로서는 완전히 허를 찔린 셈이었다. 닉슨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 저우언라이가 부랴부랴 하노이를 방문하여 양해를 구하였다. 또한 "우리는 닉슨에게 베트남에서 미군의 철수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미국과 화해를 선택한 마오쩌둥. 그러나 북베트남은 이를 "배신"으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북베트남 지도부는 저우언라이의 말을 한낱 상투적인 공치사로 치부하였다. 이들은 중국이 닉슨을 상대로 베트남 문제를 적극적으로 거론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타이완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협상카드로 베트남 문제를 이용한 것이 아니냐, 라고 의심하고 분개하였다. 따라서 "베트남은 우리나라이다. 중국이 미국과 우리 문제를 논할 권리가 없다"라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중국은 북베트남를 달래기 위하여 원조 금액을 대폭 늘렸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1972년 2월 21일 하노이 주재 중국 대사관에서 구정 연회를 열고 북베트남 인사들을 초대했지만 단 한사람도 참석하지 않았다. 중국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베트남 사람들의 분노는 컸던 것이다.

실제로 닉슨은 방중 이후 미군의 철수를 시작했다. 베트남에서 손을 떼기로 한 것이다. 1973년 1월 23일 파리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고 두달 뒤 미군은 철수를 완료하였다. 미국에 의한 베트남전쟁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중국 지도부는 이것이 전적으로 자신들의 공이라며 자화자찬하였다. 또한 남베트남을 즉각 침공하려는 북베트남을 저지하고 "남베트남에 대한 통합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서서히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북베트남은 중국이 베트남의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여길 수 밖에 없었다.

북베트남의 경제 원조에 대해서도 1973년 6월 베이징을 방문한 레 주언이 81억 위안에 달하는 경제 원조를 요구했지만 저우언라이는 지나치게 많다면서 대폭 삭감하여 25억 위안을 제시하였다. 당시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의 혼란으로 중국의 경제는 거의 파산 직전이었다. 따라서 중국으로서는 부득이한 면이 있었다. 반면, 소련은 1965년부터 1972년까지 제공한 10억 달러에 달하는 유상 차관을 탕감해 주었으며 추가로 10억 달러의 원조를 약속하였다. 북베트남이 소련으로 기울자 중국은 "소련이 동남아에 패권을 추구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북베트남을 제쳐놓고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 직접 원조를 제공하였다. 이것은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열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북베트남이 중국의 술책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말할 것도 없다.

결국 베트남전쟁에서 중국의 원칙없는 외교 전략은 돈은 돈대로 쓰고 실익은 없는 총체적인 실패였다. 비록 "사회주의 동지들을 돕는다"라는 순수한 의도는 아니라도 어쨌거나 중국의 원조로 북베트남이 큰 도움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를 전적으로 자국의 이기주의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또한 북베트남을 돕기 위해 중국은 자국의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도 할 수 있는 선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양국의 실질적인 우호로 이어지기는 커녕, 역효과만 낸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역사적으로 중국의 침략에 시달렸던 베트남 사람들의 뿌리깊은 반중 감정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의 미숙함 때문이었다.

국가와 국가의 관계 또한 기본적으로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 자기 필요에 따라 남을 돕는다는 식은 상대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진정한 관계는 물질이 아니라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교적 경험이 없었던 마오쩌둥은 베트남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철저하게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좌지우지하는 식이었다. 오직 자신의 경험에서 상대를 가르치려고 하였다. 그게 설령 선의였다고 해도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반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였다. 이런 오만한 태도가 결과적으로 북베트남이 친소노선으로 기울게 만든 가장 큰 이유였다.

애초에 마오쩌둥은 중국의 이익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베트남 문제에 어째서 깊숙이 관여했는가. 일차적으로는 소위 "세계 혁명"을 추구하는 사회주의 특유의 방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외세에 대한 마오쩌둥의 병적인 공포심 때문이기도 했다. 평생 중국 밖을 나가 본 적이 없었던 그는 아집만 강할 뿐 지성에서 매우 불균형했다. 또한 국제 질서의 변화나 외교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마오쩌둥은 아편전쟁 이래 중국은 항상 외세의 침략에 놓여 있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자 말자 죽의 장막을 치고 미국과 구미 국가들과의 모든 대외 관계를 차단하였다. 그가 한국전쟁에 무력 개입하기로 결정한 것도 미국이 한반도를 발판으로 중국을 침략할지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베트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호치민을 비롯한 북베트남 지도부의 희망은 통일이지만, 마오쩌둥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힘을 빼놓는 것이 목적이었고 정작 베트남 통일에 대해서는 미온적인 태도였다. 통일 베트남은 언젠가 중국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결국 베트남을 동맹자가 아니라 잠재적인 적으로 본다는 의미였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반사적 행동이다. 하지만 상대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자신의 좁고 편협한 가치관에서 접근하는 강요하는 태도는 결과적으로 중국을 국제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시켰다.
더욱이 이런 식의 일방적인 외교는 마오쩌둥이 죽은 뒤, 덩샤오핑이나 이후 지도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중국은 미국처럼 자국의 헤게모니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대신 주변국들을 상대로 자국의 국경과 안보 문제에 대하여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자기들 뜻대로 길들이려고 한다. 실제로 마오쩌둥이 신중국을 건국한 이후 지난 70여년 동안 중국 정부는 주변국들과의 분쟁을 대부분 외교보다는 무력으로 해결하려 들었으며 그 비율은 미국이나 러시아 등 다른 강대국들보다 훨씬 높다. 중국 지도부는 이를 "자국을 지키기 위한 자존자위의 부득이함"이라고 하지만 주변국들 입장에서는 중국이 매우 호전적인 국가이며 "중국식 지역 패권주의"로 비추어질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파리 협정의 체결로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소련이 원조를 대대적으로 늘리면서 북베트남으로서는 더 이상 중국에 기댈 필요가 없어졌다. 북베트남이 친소 노선으로 완전히 기울어지자 중국-베트남의 관계는 급격하게 경색되었다. 당장 양국의 국경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1,347km에 달하는 중국-베트남의 국경은 1895년 청불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뒤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의 조약에 따라 결정되었다. 북베트남이 독립한 후 국경 문제가 부각되었지만 중국의 원조가 절실했기에 일단 덮어두고 나중에 의논한다는 식으로 미루어졌다. 1974년 8월 통킹만의 해상 경계를 놓고 중국과 북베트남 사이에서 회담이 열렸다. 하지만 서로의 주장만 고집하다가 결국 결렬되었다.

1974년 1월 19일에는 광둥성 하이난섬에서 남쪽으로 310km 떨어진 시사군도(西沙群島, 베트남은 호안사군도라고 부른다)를 놓고 중국 해군과 남베트남 해군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20여개의 작은 산호초로 구성된 시사군도는 육지 면적은 작지만 중국과 동남아를 연결하는 해상 교통로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중국이 남쪽으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또한 주변 해역에는 대량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는 등 경제적 가치도 크다.

당시 시사 군도는 남베트남의 수중에 있었다. 1974년 1월 15일 남베트남 해군이 시사 군도 서쪽 해역의 간취안도(甘泉島) 인근에서 조업중이던 중국 어선에 발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중국은 다음날 남해 함대 소속의 어뢰정 2척을 출동시켰고 간취안도를 점령하였다. 남베트남은 4척의 군함을 동원하여 간취안도에서 중국군을 몰아내고 재차 점령하였다. 19일 중국 해군은 코마급 미사일 고속정 4척을 비롯해 군함 14척을 출동시켰고 남베트남 해군도 7척의 군함을 출동시켜 일대 격전을 벌였다. 시사해전에서 중국 해군은 남베트남 해군 소속의 650톤급 초계함 1척을 격침시키고 3척이 대파시켰다. 중국 해군의 손실은 어뢰정 2척이 중파된 정도였다. 그리고 500여명의 중국군이 포함과 Mig-21 전투기의 지원 아래 섬에 상륙하였다. 남베트남군은 90여명이 전사하고 50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것은 신중국 건국 이래 연안 작전에만 국한하던 중국 해군의 첫번째 원양 작전이기도 했다.

시사 해전에서 활약했던 소련제 코마급 미사일 고속정. 세계 최초의 미사일 고속정으로 1959년에 최초 취역하였다. 선체는 목제로 만들어졌으며 배수량 80톤에 엔진 4800마력, 최고 속력은 37.5노트, Styx 함대함 미사일이 선수와 선미에 각각 1기씩 장착되어 있고 25mm 2연장 기관포 1문, 레이더 등이 탑재되어 있었다.

당시 중국 해군의 주력은 타이완을 마주 보고 있는 저장성 닝보에 주둔한 동해 함대였다. 남해 함대에는 구식 군함만 있을 뿐, 미사일을 탑재한 최신 군함이 없었다. 따라서 미국제 군함으로 무장한 남베트남 해군을 제압하리라는 보장이 없을 뿐더러, 자칫 미 해군이 개입할 경우 속수무책이었다. 마오쩌둥은 남해 함대의 출동을 명령하면서 동해 함대에서도 군함을 남쪽으로 내려보내라고 지시하였다. 그런데 동해 함대가 남쪽으로 내려오려면 타이완 해협을 통과해야 했다. 하지만 타이완 해협은 타이완 해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자칫 남베트남 해군과 붙기 전에 타이완 해군과 한판 싸워야 할 지도 모르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장제스는 "시사의 전황이 급박하지 않은가"라면서 이들을 그대로 통과시키기로 하였다. 비록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지만, 시사군도는 중국 전체의 문제이므로 양안의 갈등과는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제스의 결정은 이후 양안의 대립 구도를 완화하고 상호 신뢰를 쌓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반면, 북베트남은 중립을 지켰다. 아직은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을 점령하고 무력 통일에 성공하자 베트남의 태도는 돌변하였다. 가장 먼저 중국과 남베트남이 분쟁을 벌이고 있었던 난사군도(南沙群島, 스프래틀리 군도)를 신속하게 점령하고 시사군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 것이다. 통일에 성공한 베트남은 더 이상 중국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사이공  함락 직후 레 주언은 "베트남은 두개의 어려움이 있다. 하나는 기아이고 또 하나는 중국의 반동분자들이다"라면서 중국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또한 베트남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소련 덕분이라고 칭송하면서 중국의 희생에는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다. 1975년 9월에는 레 주언을 단장으로 하는 베트남 대표단이 베이징을 방문했다가 일방적으로 철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중국 지도부가 베트남이 친소 정책을 버리지 않는 한 더 이상의 원조를 제공할 수 없다고 하자 반발한 것이다. 중국도 보복조치로 베트남에 있는 자국 전문가와 기술자들을 모두 철수시켰고 모든 경제 협력과 원조를 중단시켰다. 대신 베트남과 대립하고 있던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에게 접근하여 경제 협정을 체결하고 10억 달러의 원조를 약속하였다.

이로서 30여년 동안 이어져 온 양국의 혈맹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베트남 지도부에서 친중파들은 쫓겨났고 친소파들이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또한 중국에서도 마오쩌둥이 죽고 덩샤오핑이 4인방을 제압하면서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하지만 베트남에 대한 강경한 태도는 실용주의자라는 덩샤오핑도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이상으로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베트남의 "불손한" 태도를 손봐주어야 한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1974년부터 시작된 국경 분쟁은 점점 확대되었고 1975년에는 439회, 1976년에는 986회, 1977년에는 752회에 달했다. 중국은 1978년 한해 동안 베트남이 약 1천회 이상의 무력 도발을 하였고 이로 인하여 300명 이상의 중국인이 죽었다고 주장하였다. 베트남도 같은 기간 중국이 2천회가 넘는 무력 도발을 했다고 주장했다.

국경 문제와 함께 또 하나의 첨예한 문제는 화교였다. 동남아에는 청말 이래 새로운 터전을 찾아 이주한 수많은 화교들이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경제 건설을 위해 많은 자금을 필요로 했던 덩샤오핑은 동남아의 화교들을 상대로 중국 화교의 단결과 지지를 호소하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실시하였다. 중국은 화교를 이용하여 동남아의 정치에 관여할 의도는 없다고 했지만 동남아 국가들로서는 자국의 분열을 유도한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중국과 첨예하고 대립하고 있는 베트남은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베트남에는 120만명에 달하는 화교가 있었고 대부분은 북쪽이 아닌 남쪽에 있었다. 베트남 정부는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농촌으로 강제로 이주시키는 한편, 베트남 국적을 강요하였다. 탄압에 못 이긴 화교들은 이른바 "보트 피플"이 되어서 대거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중국은 "베트남이 소련에 아부할 목적으로 화교를 핍박하고 있다"며 비난하였고 베트남은 이들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의 의지로 베트남을 떠난 것일 뿐"이라며 일축하였다. 또한 소련은 베트남에게 대량의 최신 무기를 제공하고 극동 함대의 일부를 남하시켜 베트남과 가까운 공해상에 배치하는 등 대중 포위망을 점점 강화하였다. 중국의 위기 의식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중국 지도부는 소련이 과거 미국의 턱밑인 쿠바를 하수인으로 삼았듯, 베트남을 "동양의 쿠바"로 만들어 중국을 위협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보트 피플은 남베트남 패망 후 탈출에 나선 남베트남의 상류 계층과 군인, 관료들도 있었지만 베트남 정부의 탄압에 못 이겨 탈출한 화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또한 일부는 2천~3천 달러에 달하는 거금을 내고 출국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베트남 정부로서는 국제 사회의 인도주의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화교들을 국외로 쫓아냄으로서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하고 국가의 결속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양국이 충돌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이었다. 폴 포트가 이끄는 캄보디아 공산당인 크메르 루즈는 사이공 함락 직전인 1975년 4월 17일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고 소위 "민주 캄보디아"를 건설하였다. 폴 포트는 한때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1971년부터 북베트남과의 관계를 끊고 중국에게 의존하였다.

폴 포트 정권과 베트남의 관계는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와 마찬가지였다. 중국이 베트남을 대등한 동맹자로 보지 않는 것처럼 베트남 역시 폴 포트 정권을 대등하게 보지 않았고 당장의 도움은 받더라도 언젠가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 잠재적인 적이라는 사실은 잊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캄보디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폴 포트는 베트남을 "침략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본격적으로 베트남계 주민들에 대대적인 숙청에 나섰다. 이 또한 베트남이 중국계 화교들에게 했던 행동을 그대로 반복한 꼴이었다. 이것이 인도차이나의 특수성이었다.

중국은 베트남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자연스레 캄보디아에게 접근하였다. 캄보디아를 이용하여 베트남을 견제하겠다는 것이었다.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을 승인하고 1977년에는 1500명에 달하는 군사 고문단과 3개 사단을 무장할 수 있는 무기와 탄약을 제공하였다. 폴 포트의 군사력은 중국의 원조를 받으면서 비약적으로 강화되었다. 또한 중국-베트남 국경에서 무력 충돌이 반복되는 동안 베트남-캄보디아 국경에서도 무력 충돌이 반복되었다. 북쪽에서 중국의 위협이 가중되는 가운데, 베트남 정부는 당면한 위협인 캄보디아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폴 포트는 캄보디아 사람 1명이 베트남 사람 30명과 맞먹는다며 호기를 부렸지만 기껏해야 중국제 경화기로 무장한 폴 포트의 군대는 소련제 중전차와 미그 전투기, UH-1 헬기, 중포를 앞세운 막강한 베트남 군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1977년 12월 베트남군 8개 사단 6만명이 국경을 돌파하여 30km 정도 진격하였다. 크메르 루즈군은 총병력 8만명 중 2만 5천명을 투입하여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1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격퇴당했다.

베트남군은 일단 진격을 멈추고 평화 협상을 제안했으나 거부되자 1978년 12월 25일 18개 사단 및 15개 독립 여단, 1개 비행사단 등 20만명에 달하는 병력으로 재차 침공을 시작하였다. 개전 2주만인 1979년 1월 7일 베트남군은 별다른 전투도 없이 프놈펜을 점령하고 폴 포트 정권을 붕괴시켰다. 그리고 헹 삼린을 수반으로 하는 소위 "캄보디아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말로는 해방자를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정복자나 다름없었고 헹 삼린 정권은 사실상 베트남의 괴뢰 정권이었다. 모든 정책은 베트남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으며 캄보디아 전역에서 "베트남화"가 시행되었다. 이는 캄보디아인들의 반발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베트남군은 1982년부터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1989년 9월에 완료했지만 그 후로도 한동안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인도차이나의 종주국 행세를 하였다.

수도 프놈펜을 점령 중인 베트남군. 폴 포트의 농촌화 전략으로 도시는 이미 텅비어 있었고 저항도 없었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은 중국으로서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그 전부터 이미 기회를 보아서 베트남을 손봐줄 생각이었다.이미 1978년 9월부터 중국 지도부는 베트남 침공을 거론하고 있었다. 11월 5월부터 14일까지 덩샤오핑은 동남아를 순방하면서 태국 수상과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에게 베트남을 "쌍놈"이라고 원색적으로 표현하면서 만약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한다면 결코 묵과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그의 동남아 순방 목적은 겉으로는 경제 협력을 강화한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상 反베트남 공동 전선을 구축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그는 중국과 인접해 있으면서 "감히" 친소반중노선을 고수하는 베트남을 그대로 둔다는 것은 자신의 위신 문제라고 여겼다.

국제 정세에서도 예전과 달리 결코 중국에 불리하지 않았다. 미국과의 관계는 개선되었고 소련의 하수인에 불과한 베트남을 침공한다고 해서 미국이 간섭할 가능성은 없었다. 오히려 미국은 소련의 개입을 견제해주리라 기대하였다. 동남아 순방에 이어서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은 미중 수교를 체결하는 자리에서 카터 대통령에게 베트남을 응징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추었다. 카터는 도와주겠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대하지도 않았다. 카터는 이 문제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덩샤오핑은 암묵직인 지지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동남아 국가들 역시 베트남의 팽창주의를 경계하였다.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했을 때 동남아 국가들이 베트남을 후원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럼에도 덩샤오핑이 즉각 행동에 나서지 않은 이유는 지도부 내부의 권력 투쟁 때문이었다. 당시 덩샤오핑은 당내 최대의 경쟁자인 화궈펑의 주도권 싸움을 한창 벌이고 있었다. 

1979년 1월 1일 중미 수교 당시의 덩샤오핑과 카터, 닉슨. 이로서 중국과 미국은 오랜 적대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였다.

 중국이 베트남 침공을 최종 결정한 것은 덩샤오핑이 미국, 일본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1979년 2월 11일이었다. 공격일은 2월 17일이었다. 베트남은 4월부터 본격적인 우기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 전에 작전을 끝낼 필요가 있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소련의 개입이었다. 하지만 동유럽에 대부분의 병력을 배치한 소련군이 당장 중국 국경으로 병력을 이동시켜서 대규모 보복 행위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핵에 의한 보복 역시 가능성은 낮다고 여겼다. 만약 소련이 핵을 쓸 경우 중-소 간의 핵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며 미국 역시 묵과할 리 없었다. 소련이 "고작" 베트남을 위해 세계 파멸의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베트남과 인접한 광시 군구와 윈난 군구의 전력은 20개 보병사단 30만명과 항공기 1천대, 전차 1천문, 야포 1500문 정도였다. 베트남은 25개 보병사단, 35개 독립 포병여단, 40개 방공포 대대, 20개 지대지 유도탄 포대, 15개 독립 기계화 연대 등 지상군 60만명에 전차 900대, 항공기 300대를 보유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 12개 사단 20만명은 캄보디아에, 5개 사단 10만명은 라오스에 주둔하고 있었다. 하노이 등 베트남 북부를 방어하는 전력은 5~6개 사단에 불과했고 최일선 부대는 대부분 무장이 빈약한 지방 민병대에 불과했다.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하리라는 것은 베트남으로서도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덩샤오핑이 여러차례 경고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베트남 지도부는 중국의 침공을 소련이 묵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덩샤오핑이 그런 리스크를 안으면서까지 강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베트남이 중국의 반발을 무릅쓰고 캄보디아 침공을 강행할 수 있었던 것도 소련을 은근히 믿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소련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반면, 덩샤오핑의 의지는 과소평가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상대의 의지를 오판하기는 덩샤오핑도 마찬가지였다.

덩샤오핑의 목적은 베트남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중국이 결코 "종이 호랑이"가 아님을 세상에 보여주겠다는데 있었다. 또한 중국군이 베트남을 침공한다면 베트남군도 캄보디아에서 철수하리라 기대하였다. 즉, 베트남에 대한 제한적인 군사 작전으로 동맹국인 캄보디아를 구원하고 중국의 위신을 살리겠다는 일종의 간접 접근 전략인 셈이었다. 이는 그동안 침략전쟁을 부정해 온 중국으로서는 주변국을 침략한다는 이미지를 주지 않기 위함이자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어 다른 강대국들의 간섭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국력에서 우월해도 미국을 상대로 20년 동안 싸운 베트남은 결코 만만치 않은 존재였다. 또한 중국-베트남 국경은 기계화 부대가 기동하기 어려운 험준한 산악지대인데다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병참에서 매우 열악한 중국군으로서는 수렁에 빠져서 고전을 면치 못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덩샤오핑의 일방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았고 베트남의 군사력과 전투 의지를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중국이 정한 목표가 과연 베트남에 대한 충분한 응징이 될 수 있는지, 만약 베트남이 중국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을 경우 그대로 전쟁을 중단할지, 아니면 확전할지, 확전한다면 어디까지 할 것인지, 중국이 그만한 역량이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방침도 없었다. 상대의 전투 의지를 꺾으려면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보여준 것처럼 압도적인 공군력과 지상군 전력으로 상대의 군사력을 일방적으로 궤멸시키고 더 이상 싸워봐야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만들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중국에게는 그런 역량이 전혀 없었다. 막연한 계획만 있을 뿐, 전략이 부재했다. 게다가 전쟁의 명분도 불분명하였고 처음부터 제한 전쟁이니, 교훈을 주기 위한 전쟁이니 공언하면서 병사들의 적극성을 떨어뜨렸다. 굳이 열심히 싸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덩샤오핑과 보수파 지도자들의 위신을 세우기 위한 전쟁에 지나지 않았다.

1979년 2월 17일, 중국군은 3방향에서 국경을 일제히 돌파하였다. 지휘관은 항일전쟁부터 국공내전과 한국전쟁에서 잔뼈가 굵은  쉬스여우(许世友) 상장이었다. 주력은 6개 사단이 투입된 카오방 방면이었다. 그리고 조공으로 랑손과 라오카이 방면에 각각 3개 사단이 투입되었다. 작전은 어디까지나 지상에 국한되었고 해공군은 초계 외에 직접 전투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개전과 함께 중국 정부는 "베트남이 그동안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중국 영토를 침범하여 중국 국경수비대원과 국경 주변의 주민들을 습격하였다. 국경수비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반격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온전히 정의의 행동이다"라고 발표하였다. 베트남 역시 중국이 기습적으로 침략을 개시했으며 "베트남 국민들은 정의의 자위권을 행사하여 침략자들을 단호히 격퇴할 수 밖에 없다"라고 발표하였다. 서로 자신들이 침략의 피해자이며 정의 또한 자신들에게 있다는 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