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회심의 미소를 지었던 장제스는 전쟁 내내 집요할 정도로 한국 파병을 추진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을 보고 받은 그는 그날 저녁 서울에서 샤오위린(邵毓麟) 주한대사가 보낸 전문을 통해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샤오위린은 한국전쟁의 전황을 설명하는 한편, 미국은 반드시 개입할 것이며 남북한 어느 쪽이 이기던 간에 타이완에게 이득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남한이 이기면 남북한은 통일될 것이며 우리는 압록강을 통해 대륙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설령 전쟁이 남한에 불리하더라도 미국의 경각심을 일으켜 남한과 타이완에 대한 원조를 강화할 것입니다."
그의 정세 보고는 장제스의 희망사항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한국전쟁을 대륙 수복의 기회로 보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도 발을 깊숙이 담굴 필요가 있었다. 만약 타이완이 한반도에 대규모 병력을 보낸다면 중공도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그럼 한국전쟁은 남북한 두 세력의 전쟁에서 미국과 타이완을 비롯한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것이며 타이완군은 미군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동북으로 들어가 대륙을 회복할 기회가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장제스는 부총통 첸쳉, 외교부장 왕스제(王世杰), 참모총장 겸 공군 총사령관 저우저러우(周至柔), 육군 총사령관 쑨리런(孫立人), 장징궈, 허잉친, 구정강(谷正綱) 등 당과 정부, 군의 주요 인사들을 모두 모아 한국 파병을 논의하였다. 그는 장징궈의 건의를 받아들여 최정예 부대인 제52군을 파견키로 결정하였다. 다음날인 26일 오후 도쿄의 연합군 총사령부에서 파견된 존 필드(John Field) 준장 등 9명의 미군 장교로 편성된 주 타이완 군사 연락조가 타이페이 비행장에 내렸다. 이들은 맥아더의 친서를 장제스에게 건네주었다.
친서에는 한국전쟁의 전황이 점차 악화되고 있으며 타이완이 한국으로 병력을 보내 줄 것과, 중공의 동태를 감시하고 대륙 연안도서에서의 활동을 강화해 달라는 요청이 적혀 있었다. 장제스는 즉각 이승만과 맥아더에게 전화하여 제52군 3개 사단 3만3천명을 파견하겠다고 약속했다. 대신 미국이 이들의 수송과 한국 주둔에 필요한 군수품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맥아더가 장제스에게 파병을 요청한 이유는 아직 본국에서 지상군을 한반도에 투입하라는 명령이 없었는데다, 남한군이 급속도로 무너지면서 부족한 병력을 가까운 타이완에서 얻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독단일 뿐, 본국 정부의 승인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맥아더로부터 장제스의 제안을 보고받자 이를 수락할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존슨(Louis A. Johnson) 국방장관과 브래들리 합참의장 등 군부 쪽은 찬성했지만 여전히 장제스 정권에 대한 원조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던 국무장관 애치슨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는 타이완이 스스로를 지킬 힘도 없기에 제7함대와 제13항공대를 파견했다는 점에서 타이완군이 남한을 지원하는 것을 어불성설임을 지적하고 타이완군은 남한군보다도 전투력이 낮아 이들을 지원하느니 차라리 남한군을 지원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자칫 중공이 북한을 지원하는 구실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트루먼 역시 장제스의 의도가 미국의 더 많은 원조를 얻고 전쟁을 중국 대륙으로 확대하기 위한 술수라고 생각했다. 결국 6월 30일 장제스의 제안은 거부되었다.
맥아더 역시 이 문제로 본국과 과도한 정치적 마찰을 빚기를 원치는 않았다. 따라서 장제스에게 타이완군의 전투력이 미비하다는 이유를 들어 "당분간 파병 요청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거절하였다. 대신 트루먼은 타이완 방위를 강화하여 중공의 침공을 저지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는 동의하고 대규모 경제, 군사 원조 계획을 승인하였다. 7월 31일 맥아더가 타이베이로 날아가 장제스를 만났다.

▲ 타이베이를 방문한 맥아더와 장제스
장제스는 맥아더에게 '대륙 반공' 계획을 강력히 설득하자 맥아더 역시 찬성했다, 그는 만약 중공이 한국전쟁에 참전한다면 중국 대륙 전역으로 전쟁을 확대하고 미국과 타이완이 힘을 모아 대륙을 탈환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맥아더는 대표적인 미 군부 내 반공 매파이기는 했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이전만 해도 그의 관심사는 오직 일본에 있었고 국공 내전이나 타이완에 대해 이렇다할 관심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이 문제에 주목한 것은 바로 이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한국전쟁을 한반도로 국한시키려는 트루먼의 생각과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고, 몇달 뒤 중공군 참전이 현실화되자 전장 확대를 놓고 트루먼과 격렬하게 싸우다 결국 유엔군 사령관에서 해임당한다.
장제스는 트루먼이 파병 제안을 거부하자 출동 준비 중이던 제52군에게 일단 본래의 임무로 돌아갈 것을 지시했다. 그러면서도 "동아시아의 전쟁에서 동아시아 국가인 중국을 배제한 채 유엔군처럼 여러 나라에서 복잡하게 파병된 군대를 가지고 북한군과 싸워 이길 수는 없을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런데 인천상륙작전 이후 순조롭게 북진 중이던 유엔군의 앞에 중공군이 나타났다. 10월 25일 평안북도 운산에서 백선엽의 제1사단이 중공군과 최초의 접촉을 한 이래, 도처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패주하였다. 중공군은 급격히 증강되어 유엔군을 압도하기 시작했고 11월 25일부터 시작된 제2차 공세에서 유엔군은 전면 붕괴에 직면하였다. 청천강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12월 3일에는 평양을 도로 빼앗겼다. 중공군의 대공세에 직면한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중국 폭격을 승인해 달라고 요구하는 한편, 장제스에게도 제52군의 급파를 요청하였다.
11월 28일 오전 장제스는 급히 회의를 열어 제52군을 24시간 이내에 한국으로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것과, 중공의 타이완 공격에 대비하여 대륙에 대한 정찰을 강화하고 진먼다오와 마쭈다오에 대한 경계를 엄중히 하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군사 대표단을 급히 서울로 보냈다. 이들은 29일 새벽에 김포 비행장에 도착하여 미 제8군 참모장을 만나 전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참전문제를 논의하였다. 제52군은 늦어도 12월 초까지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출동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트루먼은 맥아더의 요구를 재차 거부하였다. 전장이 중국으로 확대될 경우 애치슨이 자칫 소련이 참전할 지 모른다고 주장하고, 영국 애틀리 수상 역시 홍콩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맥아더는 장제스에게 본국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무리하게 대륙 반공을 주장한다면 되려 국제 여론만 악화시킬 수 있다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결국 타이완의 파병 계획은 또다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1951년 4월 9일 만주 폭격과 원자폭탄의 사용을 주장했던 맥아더가 전격 해임되었다. 이후 한국전쟁은 중공과 미국의 전쟁이 되어 3년이나 끌었지만 장제스가 어떤 식으로든 끼어들 기회는 끝까지 없었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철저하게 방관자로 남아야 했던 것이다. 또한 미국의 원조는 여전히 제한적이었고 약간의 방어용 무기를 제공받은 것 이외에 전차와 대포, 항공기, 군함은 극심한 노후화와 부품 부족으로 절반도 채 가동되지 않는 실정이었다. 반면, 중공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소련의 막강한 원조를 받아 세계 3위의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대륙 반공은 고사하고 오히려 중국의 타이완 침공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1953년 1월 20일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가 대통령이 되었다. 공화당이자 골수 반공주의자였던 그가 대통령이 되자 장제스는 주 타이완 미군 군사고문단장인 윌리엄 체이스(William C. Chase) 준장을 통해 한반도에서의 정전 협정을 반대하고 3개 군을 한국으로 파병하겠다고 제안했다. 아이젠하워 역시 이전부터 트루먼의 대소, 대중정책을 소극적이라며 비판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통령이 되자말자 타이완 중립화 해제를 선언하였다. 이는 장제스의 대륙 반공을 지지하겠다는 의미였다. 장제스는 즉각 고무되어 "정치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미국의 가장 합리적인 조치"라고 환영했다.
하지만 이는 아이젠하워의 고도의 정치적 술수였다. 공산군의 전술로 한반도에서의 정전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져 지지부진하자 장제스 정권을 지원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여 중공이 스스로 협상 테이블로 나오도록 심리적 압박을 가하기 위함이었다. 막상 장제스에게는 대륙을 공격하는데 필요한 어떤 수단도 제공하지 않았다. 원조는 타이완 방위에 필요한 최소한의 선으로 유지되었다. 장제스의 파병 제안에 대해서도 한반도보다 하이난다오를 탈환하고 중국 남부에 제2전선을 형성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장제스의 역량을 넘어서는 것이었기에 우회적으로 거부한 셈이었다.
1953년 3월 5일 한국전쟁의 가장 큰 조종자였던 스탈린이 죽었다. 스탈린은 미국을 극동에 묶어두고 최대한 힘을 뺄 생각으로 정전에 반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죽자 휴전회담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휴전회담의 최대 걸림돌은 포로 송환 문제였다. 공산군은 전원송환을, 유엔군은 포로 개개인의 희망에 따른 자유 송환을 주장했다. 17만명에 달하는 공산군 포로 중에서 중공군은 약 2만 1천여명 정도였다. 이들은 모두 부산과 제주도 모슬포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었다.
그들 중에는 국민정부군 투항병 출신들도 많이 있었기에 중공과 타이완은 또 하나의 전쟁을 방불케 할 만큼 경쟁적으로 이들의 회유에 나섰다. 그런데 6월 18일 이승만이 전격적으로 반공 포로 석방을 단행했다. 약 2만 7천여명의 반공포로가 풀려났고 그 중에는 중공군 포로도 100여명이나 있었다. 일부는 도로 미군들에게 체포되었지만 63명이 부산에 거주하던 화교들의 도움을 받아 숨어 있었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10월 8일 2대의 여객기를 타고 타이페이에 도착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 타이완에 도착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받는 반공 포로들.
반공 포로는 전체 포로의 70%에 해당하는 14,850명에 달했다. 바꾸어 말하면,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약 300여만명의 중공군 중에서 태반이 국민정부군 투항병 출신이라는 의미였다. 또한 모두 대륙에 고향과 가족을 두고 있고 타이완에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데도 굳이 타이완행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한때 마오쩌둥 정권에 열광했던 민심이 점차 실망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이들은 1954년 1월 23일 새벽 전원 석방되어 10여척의 수송선에 나눠타고 타이완 지롱항(基隆港)을 통해 입국하였다. 국공내전 말기 도미노처럼 수많은 병사들이 공산군에게 넘어가 총부리를 돌리던 때를 기억하고 있던 장제스는 매우 감격하면서 일기에 "최근 5년간 거둔 중대한 승리"라고 적었다.
타이완으로 돌아온 반공 포로들은 그대로 타이완 국군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진먼다오, 마쭈도 등 최일선에 배치되었고 1958년 8월 23일에 있었던 "8.23포격전"에도 참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은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그들 중에 간첩이 섞여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일거수 일투족을 항상 정부 당국의 감시를 받아야 했고 실제로도 간첩이 발견되기도 했다. 하지만 말로는 '반공 의사'라고 부르면서 제 발로 품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한번 배신한 자는 또 다시 배신할 수 있다며 잠재적인 위협으로 취급하는 것은 엄연한 모순이었다. 반공을 내세워 국민들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억압했던 것이 이른바 "자유중국"을 내세웠던 장제스 정권의 참된 모습이었다. 그의 공포 정치는 마오쩌둥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뒷날 일부 포로들은 타이완에 온 것을 후회한다며 장제스 정권의 푸대접에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래 장제스는 해가 바뀔 때마다 "금년은 반격의 해, 내년은 승리의 해"라는 구호를 내세워 대륙 반공을 부르짖었다. 그는 한국전쟁이 "제2의 시안사건"이라고 부르며, 시안사건이 국공의 운명을 바꾼 것처럼 한국전쟁으로 자신의 운명 또한 바뀌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시안사건과 중일전쟁을 재기의 기회로 삼았던 마오저뚱과 달리, 장제스는 한국저전쟁 내내 스스로 힘을 기르는 대신 미국에만 기대하고 국제 정세가 알아서 바뀌기만 바랬다.
또한 마오쩌둥 정권의 부조리함을 파고들어 정치 체제의 우월로 승부하여 대륙의 민심을 얻으려고 하기보다 오직 전쟁으로 대업을 이루려고 하였고 타이완을 안식처로 삼아 이에 만족했다. 반격이라고 할 만한 행동이라고는 다천다오(大陳島)에 "유격지휘소 사령부"를 두고 동남 연해의 여러 섬을 통해 소수의 특무 부대를 침투시키는 것이 전부였다. 대부분 상륙도 하기 전에 일망타진당하기 일쑤였다. 타이완을 지키기도 급급한 판에, 가뜩이나 부족한 인력과 물자를 낭비하는 셈이었다. 그 사이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을 이용해 국민들을 결속시키고 반대파를 숙청하여 정권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양안의 분단은 점점 고착화되어 갔다.
미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장제스는 성가신 짐이었다. 미국은 장제스의 대륙 수복이라는 허황된 야망을 지원하여 소련과 대결하거나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장제스는 타이완에서 자신의 작은 독립 왕국을 지키며 가만히 있는 것이 가장 좋았다. 미국으로서는 장제스 정권을 교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따라서 대륙 반공은 구호 뿐이었고 오직 장제스의 환상 속에만 있었다. 그를 제외하고는 대륙 반공이 가능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측근들은 공공연히 "늙은이의 노망"이라며 쑥덕대었다. 타이완의 빈약한 재정은 늘 적자로 허덕였고(연간 8억 달러에 달했다) 연간 미국의 원조 덕분에 겨우 메꿀 수 있었다. 미국의 원조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장제스가 미국에게 기대면 기댈수록 양국의 종속적인 관계는 더욱 심화되었다. 유엔에서는 미국과 대등한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었지만 소련의 보이콧 때문에 제대로 권리를 행사하기는 커녕 오히려 언제 쫓겨날지 모를 판이었다.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타이완 대신 중공을 중국의 정통정부로 인정하려는 결의안을 반복하여 제출하고, 그때마다 미국은 거부권으로 맞섰다. 타이완은 주권국이 아니라 미국의 위성국으로 전락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나자말자 중공의 시선은 다시 타이완으로 돌아왔다. 소련의 원조로 중공은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고 양측의 전력 차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컸다. 한동안 소강상태였던 타이완 해협은 다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장제스로서는 대륙 반공은 커녕, 또다시 존립을 위협받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