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가 타이완으로 눈을 돌린 것은 국공내전의 전세가 극도로 악화되는 1948년 말부터였다. 본토에서 100km 떨어진 곳에서 푸젠성을 마주보고 있는 타이완은 3만6천㎢의 작은 섬이지만,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면서 타이완을 일본에게 할양하였다. 이후 타이완은 일본의 중국 침략을 위한 발판으로서 중국의 턱밑을 위협하는 비수가 되었다. 제1차 상하이 사변과 중일전쟁 당시 타이완에서 발진한 일본 폭격기들은 상하이와 난징, 항저우 등 창장 하류의 도시들을 쉴새 없이 폭격하였다. 장제스 정권은 타이완이 중국의 영토임을 꾸준히 제기하여 카이로 회담과 포츠담 회담에서 타이완의 중국 귀속을 인정받았다. 일본이 패망한 뒤인 1945년 10월 25일 중국군 제70군과 행정 기구들이 타이완에 상륙하면서 50년만에 중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때까지는 타이완의 지위란 망망대해에 떠 있는 일개 외성(外省)에 불과했다.

▲ 1946년 10월 21일 자신의 전용기인 C-47 메이링호를 타고 타이완을 방문한 장제스 부부.
장쑤성 화이수이(淮水)를 놓고 벌어진 국공내전 최대의 결전 화이허 전역(淮海战役)에서 패배하고 50만명의 병력으로 베이핑-톈진을 방어하고 있던 푸줘이(傅作意)마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공산군과 투항을 놓고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이로서 국민정부는 창장 이북 전체를 상실하였다. 장제스는 창장 방어선을 강화하는 한편,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다. 타이완을 최후의 보루로 삼은 것이다. 1949년 1월 5일 자신의 오른팔인 전 참모총장 첸쳉(陳誠)을 타이완 주석 겸 경비 총사령으로 임명하였다. 보름 뒤인 21일 장제스는 총통직을 리쭝런에게 넘긴 후 부인 쑹메이링, 장남 장징궈와 함께 저장성 펑화현(奉化縣)에 있는 옛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사면초가에 몰려 마지못해 하야한 것일 뿐 진심으로 물러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여전히 그를 따르는 군대와 관료들은 많이 있었다. 리쭝런은 명목상의 총통일 뿐이었다.
그는 겉으로는 일선에서 물러난 것처럼 하면서도 국민당 총재라는 지위를 앞세워 리쭝런을 무시하고 창장에 배치된 직계 부대에 계속 작전 지시를 내렸다. 또한 2월부터 상하이의 중앙은행에 비축한 3억 달러 상당의 금은과 외화, 물자, 탄약, 군수품, 공장 설비 등을 안전지대로 옮기다는 명목으로 리쭝런의 동의없이 타이완과 샤먼(厦門)으로 수송했다. 그 중에는 예전에 베이핑에서 난징으로 옮겨두었던 60만점이 넘는 온갖 유물과 보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막대한 양의 문화재는 현재 타이페이 교외에 있는 국립박물관인 고궁보우위안(故宮博物院)에 전시되어 세계 4대 박물관의 하나로 꼽힐 정도이다.
당시 타이완은 인구 600만명에 아열대성 기후로 1년에 두번 이상 쌀을 수확할 수 있어 식량이 풍족하고 자원도 풍부하였다. 약 50년 동안 통치하면서 일본은 타이완을 구석구석까지 개발하였다. 중화학공업 위주였던 만주와 달리, 경공업이 발달하였고 전기와 도로, 철도, 항만 등 인프라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1945년 8월 당시 일본의 해외 전체 자산 중 약 7%를 타이완이 차지하였다. 만주가 42%, 조선이 23%였으니 면적 대비로 본다면 일본은 타이완에 막대한 투자를 한 셈이다. 전반적인 교육, 의료, 생활 수준에서도 본토에 비해 훨씬 높았다. 또 한가지 특징은 일본의 오랜 지배 아래에 있었기에 공산당 동조 세력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 해방 직후의 타이베이 기차 역사(驛舍)의 모습
그러나 장제스의 통치 정책이 가장 실패한 곳이 동북과 함께 타이완이었다. 일본의 항복으로 타이완을 돌려받기는 했지만 행정과 통치에 필요한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타이완을 회복했다는 사실만 중요시했을 뿐, 어떻게 다스릴지까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해방 직후만 하더라도 대다수 타이완인들은 일본의 오랜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준 장제스를 경애하였고 본토에 대해서도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일본인들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신들의 손으로 통치하는 자치권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는 금새 깨졌다.
장제스는 타이완 주석에 현지인 대신 저장성 출신의 군인이자 관료인 천이(陳儀)를 임명하였다. 그는 일본 육사 출신으로 원래는 남방군벌 쑨촨팡 휘하에서 제1사단장을 지냈으나 장제스가 북벌을 시작하자 투항하여 제19로군의 지휘를 맡아 난징 공략 등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장제스와 같은 저장성 출신이었기에 깊은 신임을 받아 푸젠성 주석과 육군대학 교장 등 요직을 맡았다. 1935년 일본 타이완 총독부의 초청을 받아 타이완을 방문한 그는 타이완의 발전된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 1943년 9월 카이로 회담에서 루즈벨트, 처칠이 타이완의 중국 귀속을 승인하자 국민정부 역시 뒷날 타이완을 접수할 때를 대비해 1944년 4월 행정원 산하에 타이완 조사 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천이는 위원장을 맡아 타이완에서 일본의 통치 방식과 경제, 정치, 생활, 군사 등을 연구하였다. 나름대로는 국민정부 안에서 타이완 통인 셈이었다.
그러나 막상 타이완에 들어온 그는 무능함과 무지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타이완 총독부의 일본인 관료들은 중국인들에게 행정사무를 인계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막상 천이는 일본 자산을 접수하는데만 열을 올렸다. 일본인 소유의 기업체와 토지, 설비는 모두 본토에서 넘어온 관리들과 상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공공기관과 주요 기업에서 간부를 맡고 있었던 타이완인들은 모조리 쫓겨나 본토인들이 차지했다. 정치 참여의 기회도 없었다. "개가 물러가더니 돼지가 몰려왔다." 지배자가 일본인에서 본토인으로 바뀌었을 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천이와 본토 관료들은 정복자처럼 행세했다. 타이완인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더욱이 경제 불황으로 생산력은 격감하면서 많은 사람이 실업자가 되었고 인플레이션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본토에서 넘어온 사람들로 인해 인구는 급격히 늘어난 반면, 대량의 식량이 본토로 수송되면서 이 풍요로운 섬에 전례없는 기근이 닥쳐왔다. 1947년에는 30년만에 콜레라가 창궐했다. 타이완인들은 오히려 일본이 지배할 때가 더 좋았다고 공공연히 말하며 천이 정부와 본토인들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을 드러내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참사가 2.28사건이었다.
1947년 2월 27일 저녁, 타이페이의 한 빌딩건물에서 담배 노점을 하고 있던 40대 여인이 단속반원과 경찰에게 적발되었다. 담배는 정부의 전매품이었기에 무허가 판매는 불법이었다. 하지만 연약한 여성을 총신으로 때리는 등 본보기 식으로 과격한 폭행을 가하자 주변 행인들이 항의하였다. 하지만 경찰은 오히려 발포하여 학생 한명이 사망했다. 이로 인해 그동안 팽배해 있던 타이완 주민들의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선언하고 타이페이에서 수천여명이 도로를 점거한 채 "타이완은 타이완인의 손으로 통치하게 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타이완 전역에 걸쳐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었다. 타이중에서는 시민들에게 호응하는 일부 병사들의 반란도 일어났다. 천이는 자신의 힘만으로 진압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시위대에게는 평화적 해결을 제안하면서 장제스에게 상황을 과장하여 신속한 병력 증파와 무력진압을 요청했다.
국공내전이 전면전으로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타이완 사태의 배후에 중공의 개입이 있다고 생각한 장제스는 타이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3척의 구축함과 제21사단, 헌병 제4연대 2개 대대 등 5천여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이들은 대대적인 유혈진압을 실시하여 약 한달에 걸쳐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사망자는 최소 3만명 이상으로 추정되었고 10만명이 넘는다는 설도 있다. 상황은 3월 17일 국방부장 보충시가 타이완을 방문하여 사태를 직접 수습하면서 비로소 진정되었다. 천이는 사건의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고 외교관 출신의 웨이다오밍(魏道明)이 신임 타이완 주석으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타이완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어 타이완 사회를 내성인과 외성인으로 나누게 하는 갈등의 요인이 되었다.

▲ 2.28 사건 당시 시위대의 모습. 제주 4.3 항쟁과도 비견되는 2.28사건은 한동안 타이완에서는 언급 자체가 금기되었으나 1995년에야 리덩후이 총통은 희생자 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
이 사건은 왜 벌어졌는가. 첫째로는 영토는 회복했지만 막상 이 지역을 다스릴 어떠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경험있는 관료도 부족했고 통치 기반을 운영할 행정기구도 없었다. 두번째는 국공내전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던 장제스는 타이완을 군사 전략적인 필요성으로만 바라보았다. 현지민들의 감정은 고려하지 않은 채 무지한 군인들을 보내어 강압적인 군정을 실시했다. 게다가 타이완 주석으로 행정과 군정을 책임진 천이는 장제스의 기대와 달리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타이완인들을 2등 국민으로 취급하면서 정복자 행세를 했고, 그의 관료 조직은 이권다툼과 파벌 싸움만 벌였다. 불만이 터져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북에서 저질렀던 실수가 타이완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 셈이었다. 이런 모습은 장제스가 대륙을 잃고 타이완으로 쫓겨온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타이완을 오직 대륙 회복을 위한 발판으로만 여겼다.
창장 방어선이 무너지고 상하이와 난징이 함락되면서 화남 전체가 위기에 빠지자 타이완의 가치는 더욱 중요해졌다. 당시 타이완 주석은 장제스의 오랜 심복인 첸쳉이었고 방위 사령관은 친미파인 쑨리렌이었다. 2.28사건의 장본인이었던 천이는 그 공으로 저장성 주석을 맡았다. 하지만 중공의 회유에 넘어가 반란을 일으킬 생각으로 탕언보에게 접근했다가 그의 밀고로 체포되어 1950년 6월 18일 타이페이 교외에서 총살당했다.
친이처럼 장제스와 오랜 관계를 맺고 있던 자들조차 등을 돌리는 판에 장제스로서는 비록 오랫동안 자신에게 충성을 했지만 이들이라고 배반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들이 미국과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쑨리렌에게 사람을 보내어 넌지시 자신이 타이완으로 오고자 하나 만약 쑨 장군이 불편하게 여긴다면 필리핀으로 망명하겠다는 말을 전달토록 했다. 깜짝 놀란 쑨리렌은 직접 장제스를 만나 충성을 맹세하면서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그동안 장제스와 미국 사이에서 갈등하던 첸쳉 역시 전보를 보내어 장제스를 결코 배신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비로소 안심하게 된 장제스는 상하이 함락 직전에 전용기로 탈출하여 5월 26일 타이완 남서쪽의 항구도시 가오슝(高雄)에 내렸다. 쑨리렌을 비롯해 영접나온 부하들에게 장제스의 첫마디는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안전한가?"였다. 쑨리렌은 "우리들이 보호해 드리는데 무엇이 안전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타이페이 교외의 한 별장에서 한동안 머물었지만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거하여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타이완을 시찰하면서 방비태세를 점검하고 6월 21일에는 푸젠성의 성도 푸젠으로 가서 지휘관들을 만났다. 그리고 첸쳉을 동남군정장관(東南軍政長官)으로 임명하여 주산열도와 펑후제도, 타이완, 푸젠성, 저장성 등 동남 연안의 방어를 맡겼다. 또한 쑨리렌(孫立人), 탕언보, 린웨이(林蔚), 뤄줘잉(羅卓英) 등을 부장관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 때만 해도 타이완에 대해 어디까지나 반격의 거점일뿐, 권토중래를 위한 도피처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주력부대는 여전히 서남부와 서북부의 광대한 지역에 산재해 있었고 국민정부는 광저우에서 충칭으로 이전했다. 장제스는 일본이 침략했을 때처럼 험준한 서부 내륙에서 적을 저지하고 병력을 재정비한 후 공세로 전환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제동을 걸고 넘어진 나라가 있었다. 바로 미국이었다.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후퇴하려는 것을 알게된 트루먼 행정부는 대일강화조약이 완료되지 않은 이상 타이완의 법적 지위가 아직 결정나지 않았기에 중국의 영토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는 그야말로 억지로,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과 중국이 합의했던 내용을 일방적으로 뒤엎겠다는 것이었다. 장제스 역시 성명을 발표해 중국은 과거 부당하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한 것이며 타이완의 주권은 전적으로 중국에 있음을 강조했다.
중국이 타이완을 회복한지 4년이 지난 뒤에야 미국이 느닷없이 걸고 넘어진 이유는 대륙 상실이 시간문제가 되면서 타이완을 중국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함이었다. 타이완을 오키나와와 함께 서부 태평양의 방어거점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온다면 타이완 역시 중공의 손에 넘어갈 위험이 있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타이완을 중공에도, 장제스에도 속하지 않는 완충구역으로서 친미정권을 수립할 생각이었다. 우선 타이완 주석 웨이다오밍에게 비밀리에 접근하여 장제스와 결별할 것을 거듭 권유하였다. 이 사실을 안 장제스는 평소 미국과 가까웠던 웨이다오밍이 미국의 공작에 넘어갈 것을 우려해 즉각 그를 소환하고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첸쳉으로 교체하였다. 그러자 미국은 첸쳉과 쑨리런에 대해서도 회유의 손길을 뻗쳤지만 결국 실패했다. 결국 미국은 타이완에 대한 미련을 버리면서 극동 방위선에서도 제외시켰고 대신 마오쩌둥에게 접근하였다.
한편, 창장을 돌파한 중공은 다음 목표로 타이완 해방작전을 준비하였다. 5월 23일 마오쩌둥은 천이(陳毅), 쑤위(粟裕)가 지휘하는 제3야전군에 대해 7월까지 저장성과 푸젠성을 '해방'시킬 것을 지시했다. 구 화동야전군을 재편한 제3야전군은 과거 창장 중하류를 무대로 유격전을 펼쳤던 신4군 출신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병력은 4개 병단(제7병단, 제8병단, 제9병단, 제10병단) 16개군 58만명에 달했다.
여기에 대항하는 국민정부군은 푸저우에 제6병단을, 장저우에 제8병단을, 온저우와 샤먼, 진먼섬 등에 제22병단을 배치하고 있었다. 또한 주산열도에는 상하이에서 철수한 3개군 5만명이 주둔하였다. 또한 장제스는 탕언보를 푸젠성 주석으로 임명하여 타이완 입구의 방비를 맡겼다. 총병력은 약 30만명 정도였다. 하지만 대부분 신병과 패잔병들의 무리에 불과했다. 식량과 무기, 탄약도 부족했고 사기 또한 형편없었다.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공산군을 상대로 싸움이 될 리 없었다.
상하이를 점령한 예페이(葉飛)의 제10병단 3개군 15만명이 7월 2일 푸젠성을 침공했다. 푸젠성을 방어하고 있던 국민정부군은 리옌년(李延年)의 제6병단 5개군 6만명에 불과하였다. 공산군은 국민정부군의 방어선을 도처에서 돌파하고 푸저우를 향해 포위망을 좁혀들어갔다. 또한 마쭈도의 입구에 해당하는 민장커우(閩江口)를 점령해 국민정부군의 해상 탈출로를 차단했다. 극소수만이 샤먼으로 철수했을 뿐 2만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 8월 17일 푸저우는 함락되었다. 9월 16일에는 푸저우 남동쪽의 핑탄다오(平潭島)가 함락되었다. 이로서 주산열도와 마쭈도만이 국민정부군의 손에 남았다.
예페이는 그 여세를 몰아 푸젠성 남쪽으로 진격하여 장저우와 샤먼 공격에 나섰다. 국민정부군은 뤼우러밍(劉汝明)의 제8병단, 리량룽(李良荣)의 제22병단 13개군 7만명 정도였다. 탕언보는 모든 병력에 대해 샤먼으로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덕분에 공산군은 장저우와 온저우 등 푸젠성 대부분을 별다른 전투없이 장악한 후 샤먼을 완전히 포위했다.
10월 15일 오후 3시 맹렬한 포격과 함께 공산군 제29군과 제31군이 삼방향에서 공격을 시작하였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국민정부군도 탕언보의 지휘 아래 전에 없이 결사적이었다.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나 17일 결국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탕언보는 잔존병력을 진먼섬으로 후퇴시켰다. 국민정부군의 손실은 전사자 2천여명에 2만 5천명이 포로가 되었다. 공산군의 피해 역시 컸다. 전사 4천 5백명을 포함해 약 8천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샤먼이 함락되면서 이제 타이완마저 풍전등화에 놓였다.

▲ 1949년 5월~10월 푸젠성의 전황도. 샤먼이 함락되면서 타이완의 운명은 진먼섬에 달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