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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홍콩, 중국으로 반환되다. - 2. 홍콩, 국제 금융의 중심지가 되다


1843년 6월 26일을 기하여 홍콩의 영유권은 중국에서 영국으로 넘어갔다. 헨리 포팅커(Henry Pottinger)가 홍콩 식민지 초대 총독이 되었다. 총독의 권한은 막강했다. 영국 여왕을 대신해 입법, 행정, 재정에 대한 모든 권한은 총독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오직 여왕에게만 복종하였다. 물론 총독은 영국 정부의 감독을 받으며 홍콩에 거주하는 상류층 인사들의 의견을 참고하기는 했지만 홍콩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중국인들이 입법이나 행정에 관여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특히 포팅커를 비롯해 19세기 말까지 초기 총독들은 중국 주재 전권 대표를 겸임하면서 중국에 대한 외교와 통상업무를 맡았고 때로는 본국 정부의 묵인 아래 홍콩에 주둔한 육해군을 지휘하여 중국에 무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런 구시대적이고 인종차별적인 통치 제도는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대영제국이 약화되어 더이상 기존의 방식을 고수할 수 없게 되면서 비로소 점진적으로 변화하였다.

 

총독의 임기는 5년이었으나 실제로는 짧게는 1년에서 10년 동안 통치한 사람도 있었다. 1843년부터 중국에 반환되는 1997년까지 총 28명의 총독이 홍콩을 통치하였다. 홍콩 안에서 총독의 권위는 말그대로 "하나님 다음의 지위"였다. 봉급은 미국 대통령 다음으로 많았고 영국 총리의 두배에 달했다. 영국의 식민지 통치방식은 대단히 보수적이었으며 중국인을 멸시하였다. 입법기구인 입법부는 형식상 식민지 의회에 해당되지만 총독의 명령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행정국 역시 정책 결정기구이지만 총독의 자문 역할에 머물렀다. 더욱이 중국인들은 여기에 참여할 권리조차 부여받지 못했다. 19세기 말에 와서 중국인에게도 조금씩 의석이 할당되었지만 상징적일 뿐 권한은 없었다. 홍콩 주민들의 꾸준한 정치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입법국 의원이 직선제로 선출된 것은 중국에 반환되기 직전인 1995년이었다.

 

또한 홍콩은 부정부패와 범죄의 온상이었다. 애초에 아편전쟁 과정에서 아편밀매의 근거지로 사용하기 위해 획득했기에 당연한 것이었다. 총독을 비롯해 관료들은 자질이 매우 부족했고 현지에 대한 지식도 없을 뿐더러 뇌물과 아편 밀수로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었다. 국공내전으로 장제스 정권이 타이완으로 쫓겨가고 대륙을 중공이 장악한 뒤 문화대혁명과 기근을 피해 많은 중국인들이 끊임없이 홍콩으로 탈출하였다. 홍콩 관료들은 이들로부터 막대한 금품을 갈취하였다. 특히 경찰은 가장 대표적인 부패 집단으로, 흑사회와 같은 거대 범죄 조직들과 결탁하였다. 이런 범죄도시로서의 모습은 과거 홍콩 영화의 가장 흔한 소재이기도 하다. 관료 사회의 뿌리깊은 부정부패는 1971년에 부임한 제25대 총독 메클호스(Murray Maclehose)가 강력한 반부패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점차 줄어들어 1990년대에 오면 사실상 척결되었다.


▲ 1960년대의 홍콩. 대륙에서 난민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홍콩은 판자촌으로 뒤덮히기도 했고 일부 지역은 그야말로 무법천지였다.

 

당초 아편 무역의 근거지로 시작한 홍콩이지만, 중국이 문호를 개방하면서 대중무역이 확대됨에 따라 영국은 홍콩을 중국의 관문으로 삼았고 점차 중국과 인도, 일본, 동남아 등 유럽과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자유무역항이자 국제 금융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1845년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해 동방여여(東方麗如) 은행이 처음 설립되었고, 일본, 프랑스, 미국 등 여러 열강들도 홍콩에 지점을 개설하였다. 그 중에는 중국인이 경영하는 은행도 있었다. 더욱이 수에즈 운하 개통 이후 유럽과 아시아 무역이 확대되면서 홍콩 금융은 발전하였다. 또한 해외의 화교들은 홍콩을 경유하여 송금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국제 금융 중심지로서 홍콩의 위상은 1990년대에 오면 뉴욕, 런던과 함께 세계 3대 금융권의 하나가 된다.

 

금융업과 중계 무역 외에, 20세기 초반부터는 근대 공업도 발전하였다. 조선소와 제당공장, 방직공장, 비누공장 등 주로 경공업을 중심으로 다수의 공장이 들어서 이곳에서 생산된 물품은 중국 내지는 물론 동남아로도 수출되었다. 특히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상하이와 중국 내륙의 많은 자본가들은 전쟁을 피해 중립지대인 홍콩으로 공장을 옮겼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노동집약에서 기술집약으로 변화하면서 전자산업과 완구류, 의류 등이 발달하여 "세계의 공장" 또는 "장난감 왕국"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1970년대 연평균 GDP 성장률은 13%에 달하였고 1인당 생활 수준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이었다. 마오 식 공산주의가 지배하던 대륙이 퇴보하는 동안, 홍콩은 남한과 타이완, 싱가포르와 함께 고도의 경제적 성장과 번영을 누리며 "아시아의 네마리 용"이라고 불리었다. 이렇듯, 중국에서 가장 낙후되었던 작은 어촌 마을이 한세기만에 "동양의 진주"로서 세계에서 가장 번화하고 발전된 도시가 된 것이다.

 

한편, 1911년 우창 봉기를 시작으로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조가 몰락했다. 중국에 혁명이 일어나자 영국은 홍콩에까지 영향이 미치지 않을까 우려하여 중립을 지키면서 중화민국에 대한 승인을 보류하였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보수파와 쑨원의 혁명파가 대립하면서 중국은 다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또한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극동에서 영국의 영향력은 일시적으로 줄어들었고 신흥 세력인 미국과 일본의 도전에도 직면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과 손을 잡고 산둥성의 독일 조차지를 공격해 점령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 주의를 제창하는 가운데, 파리 강화회담에서 중국 대표단은 아편전쟁 이래 열강에게 빼앗긴 영토와 이권의 반환과 불평등조약 개정을 요구하였다. 그 중에는 홍콩과 주룽반도의 반환도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웨이하이웨이(威海衛)를 비롯해 독일에게 빼앗은 영토는 반환하되, 홍콩 등 이전부터 영국이 가지고 있던 이권은 강화회담의 논의 대상이 아니라며 거부하였다. 미국도 영국의 편을 들었다. 미국 역시 아시아에 많은 이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중국에 동조해 봐야 자국의 이익도 침해받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중적인 행태였다.

 

위안스카이에게 패배하여 소수의 측근만 데리고 광저우로 내려온 쑨원은 광둥 군벌들과 연합하여 호법정부(濩法政府)를 수립하였다. 광저우는 홍콩과 인접한데다 영국의 대중 무역에서 중요한 곳이었기에 광저우의 복잡한 정세에 영국도 무관심할 수 없었다. 중국 북부에서는 베이양 군벌들이 내전을 벌이고 광저우에서는 쑨원이 북벌을 준비하는 등, 중국의 정치적 상황이 갈수록 혼란에 빠져들었다. 영국 정부는 원칙적으로 중국 내전에 불간섭을 천명하면서도, 광둥성의 이권을 놓고 쑨원의 호법정부와 홍콩 식민지 정부가 충돌하면서 광저우 앞바다에 군함을 보내어 무력 시위를 하고 쑨원과 대립하고 있던 광둥 군벌 천중밍(陳炯明)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레지날드 스텁스(Reginald E. Stubbs) 홍콩 총독은 본국 정부에 쑨원의 혁명 세력이 반영 운동을 주도하여 영국의 이익을 침해한다며 적대적으로 보고하였다. 결국 제국주의 행태를 버리지 않는 서방에 실망한 쑨원은 소련과 손을 잡았다.

또한 홍콩의 중국인 노동자들 사이에는 혁명 사상과 민족주의가 점차 고조되었다. 1925년 5월 30일 상하이의 국제 조계에서 중국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조계 반환 시위가 벌어졌다. 게다가 영국 경찰이 발포하여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5.30사건"이 벌어졌다. 중국 전역에서 반제국주의 반군벌 시위가 일어났다. 특히 광저우와 홍콩의 노동자들은 가장 큰 규모의 파업과 시위를 벌였다. 6월 23일 광저우 영-불 공동조계에서 10만명의 노동자가 모여서 대규모 시위를 하였다. 영국 주둔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고 해안가에서는 프랑스 포함이 포격을 퍼부었다. 황푸군관학교 생도 27명을 포함해 100여명이 죽고 수백여명이 부상을 입는 "사지참안(沙基慘案)"이 일어났다. 광저우 정부와 영국의 갈등은 최악으로 치닫으면서 광저우 정부는 홍콩에 대한 무역 봉쇄를 선언하였다.

▲ 5.30 사건으로 시작된 광저우와 홍콩의 파업은 장장 16개월이나 진행되었고 홍콩의 영국 식민지배에 큰 타격을 가했다. 결국 홍콩 식민정부가 굴복하여 광저우 정부의 부과세 징수와 노조의 임금 인상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파업은 종료되었다.

장제스가 주도하는 북벌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영국은 우페이푸 등 베이양 군벌을 후원하고 중국 내전에 간섭하였다. 북벌군이 영국 조계가 있는 우한과 주장을 점령하자 영국은 군함과 병력을 파병하여 무력 시위를 벌였지만 오히려 반영운동과 국민정부의 강력한 항의에 부딪치자 외교부장 천유런(陳友仁)과 담판하여 1927년 2월 19일 두 곳의 조계를 중국에 반환하였다. 중국이 외세의 강압 아래 체결했던 불평등조약을 처음으로 회복한 사건이었다.

 

1927년 3월 24일에는 북벌군 제6군 제17사단이 난징을 점령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정체불명의 군인들이 외국 영사관과 상점을 습격하고 여러명의 외국인을 살해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과 영국 군함이 난징 시내를 무차별 포격하여 군인과 민간인 4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른바 "난징참안(南京慘案)"이다. 하지만 당시 국민정부는 파벌 싸움이 격화되어 장제스파와 왕징웨이파로 분열되면서 좌중지란에 빠져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고 결국 열강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배상금 지불과 책임자 처벌을 받아들여야 했다.

 

1928년 12월 장제스가 북벌에 성공하면서 신해혁명 이래 처음으로 중국에 통일 정부가 수립되었다. 장제스 정권의 일차적 당면 과제의 하나가 불평등 조약의 개정과 관세 자주권 회복, 조계의 반환 등 주권의 회복이었다. 이를 위해 열강들과 적극적으로 교섭에 나섰다. 하지만 일본과 함께 가장 완강한 국가가 영국이었다. 더욱이 장제스와 反장제스파 간의 내전과 반란, 만주사변 발발 등 1930년대 내내 혼란이 끊이지 않으면서 교섭은 지지부진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예가 주룽채성(九龍寨城)의 반환 문제였다. 

▲ 19세기 말 주룽채성의 모습

주룽반도 남쪽에 있는 주룽채성은 송나라 시절부터 해적들을 감시하기 위해 군사 기지로 활용되었다.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는 이곳에 순검사(巡檢司, 행정과 치안을 맡은 기관)를 두어 성채와 포대를 쌓고 병력을 배치하여 홍콩의 영국군과 아편 밀수선을 감시하였다. 성내의 주둔병력과 주민들을 합해 약 700여명 정도가 있었다. 1861년과 1898년의 조약으로 영국이 주룽반도를 조차한 뒤에도 이곳만은 여전히 중국의 관할로 남았다. 하지만 영국은 1900년 2월 20일 일방적으로 주룽채성도 홍콩 식민지의 일부로 편입되었다고 선언한 후 병력을 동원해 청나라 행정관과 주둔 부대를 쫓아버렸다. 청조는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더욱이 신해혁명과 이후의 혼란으로 이 문제는 한동안 양국의 관심에서 벗어나 버렸다.

1933년 6월 홍콩 식민정부는 주룽채성에 거주하고 있던 400여명의 주민들에게 강제 이주를 명령했다. 얼마 안되는 보상금만 받고 쫓겨날 판이 된 주민들은 광둥성 정부에 호소했다. 중국 외교부는 영국 공사에게 주룽채성이 비록 영국에 의해 점거되기는 했지만 엄연히 중국의 영토라는 점을 지적하고 강제 이주를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홍콩 식민정부는 주룽채성에 대한 관할권을 행사한지 30년이 넘었고 그동안 중국도 묵인해 왔는데 이제와서 주권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양국은 수차례 협의를 거듭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1935년 12월 홍콩 식민정부는 물리력을 동원해 이들을 쫓아내고 일부 가옥을 철거하였다. 더욱이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이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주룽채성 관할 문제는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이 끝나고 마오쩌둥의 신중국이 수립된 뒤에도 해결되지 못하였다. 그 사이 주룽채성은 영국의 주권도, 중국의 주권도 미치지 못하는 애매모호한 치외법권으로 남게 되었다. 게다가 난민들이 우후죽순으로 몰려들어 8천평(0.03㎢) 남짓한 좁은 공간에 몰렸다. 여의도 면적의 1/100에 불과한 공간에 무려 5만명 이상이 밀집해 살면서 홍콩 최대의 슬럼가가 되어 그야말로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는 무법지대가 되었다.

 

▲ 홍콩 최악의 슬럼가였던 주룽채성. 수많은 빈민들이 몰려들어 마구잡이로 건물을 난립하고 증축하면서 내부는 미로나 다름없었다. 생활 여건과 위생도 엉망이었고 온갖 불법업소와 범죄집단의 온상이었다. 1990년에 와서야 중국과 영국 양국이 협의하여 이곳을 철거하였고 현재는 주룽채성 공원이 들어서있다.

 

​주룽채성 관할 문제는 1984년 12월 19일, 중-영 양국 정부가 홍콩반환에 합의하면서 비로소 해결되었다. 주룽채성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는 보상금을 주어 이주시키고 모든 건물을 철거하여 공원으로 만들기로 하였다.

 

아편전쟁 이래 홍콩은 영국의 통치 아래 약 백여년 간 안정을 누렸지만, 최악의 위기가 닥쳤다. 바로 태평양전쟁의 발발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오전 일본 나구모 기동함대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미 태평양함대를 괴멸시켰다. 이와 동시에 말레이와 필리핀, 싱가포르, 괌 등 태평양의 연합군 거점들이 일제히 일본의 공습을 받았고 도처에서 일본군이 상륙하였다. 사실 이런 상황은 결코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일본은 이미 독일, 이탈리아와 추축동맹을 맺은데다 1941년 초부터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긴장감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일본이 동남아에 대해 군사 행동을 취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유럽에서 독일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영국은 극동에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더욱이 처칠과 영국 전쟁 지도부는 일본의 군사적 역량을 과소평가했다. 극동의 방비를 강화하지도, 미국, 중국, 네덜란드 등 동맹국들과의 공조 체제에도 무관심했다. 게다가 전통적인 대영제국의 자존심만 앞세워 고압적으로 행동하여 동맹국들의 반감만 샀다. 1940년 9월 처칠은 루즈벨트에게 진주만에 배치된 미 태평양함대를 싱가포르로 전진배치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싱가포르는 비행장과 대형 항만, 수리시설을 갖추고 중포와 강력한 대공방어시설로 보호되고 있어 진주만에 비견되는 최대의 군사 요새였다. 그러나 이곳에 배치된 영국 동양함대는 전함 1척과 순양함 1척이 전부였다. 영국은 미 태평양함대가 싱가포르에 배치된다면 일본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을 때 홍콩에는 중국에서 난민들이 밀려오면서 약 17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말트비(Christopher Maltby) 소장이 지휘하는 방어병력은 4개 대대로 구성된 홍콩 주둔군에다 인도와 캐나다에서 증원된 캐나다 여단(2개 대대), 포병여단(2개 포병연대), 현지민로 편성된 의용방위군단까지 합하여 약 1만4천여명 정도였다. 또한 대구경 9인치 포 8문 등 29문의 해안포와 구식 구축함 3척이 있었다.

병력의 태반은 변변한 훈련도 받지 않은 신병들이었고 무기와 장비 또한 매우 빈약했다. 항공기는 구식 복엽기 3대와 연습기 5대가 전부였다. 게다가 광둥성에 주둔한 일본군은 언제라도 홍콩을 공격할 수 있음에도 경계 태세는 그야말로 형편없어 12월 초 일본군 부대가 주룽반도 주변에 집결하고 공격이 곧 시작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고서도 등화관제와 비상경계령은 내려지지 않았다.

12월 8일 새벽 4시(하와이 시간으로 8시 25분). 진주만 기습이 시작된지 34분이 지난 시간. 사카이 다카시(酒井隆)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군 제23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