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은 처음부터 홍콩 방어에 큰 비중을 두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일본이 남방작전을 시작할 경우 극동에 배치된 영국의 군사력으로는 어떻게 해도 홍콩을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광저우가 일본군의 손에 넘어가 중국과 홍콩의 육상 도로가 차단되면서 광둥성 북부에 주둔한 중국군과 협력할 수도 없었고, 애초에 그럴 생각도 계획도 없었다. 반면, 선전에 주둔한 일본군은 주룽반도를 완전히 포위한데다 광저우와 하이난다오에 배치된 일본 항공부대는 언제라도 홍콩을 공습하여 마비시킬 수 있었다.
더욱이 영국의 전략적 우선순위는 유럽 수복에 있는데다 북아프리카에서는 한줌에 불과한 롬멜의 기갑부대에게 정신없이 난타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극동에까지 눈을 돌릴 여유는 없었다. 따라서 영국은 홍콩을 소위 "말레이 방벽"의 최외곽기지로 삼아 가능한 오래 버틴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방어선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영국인과 인도인, 캐나다인, 중국인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약 1만4천여명 정도의 방어군 중에 전투 병력은 고작 1/3 정도인데다 태반은 갓 징집된 보충병이었다. 일부는 말라리아에 걸려 있었다. 얼마 안되는 야포에 탄약도 부족했다. 해공군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방공망도 빈약했다. 이런 모습은 홍콩만이 아니라 말레이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연합군은 일본군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데다 일본과의 전쟁이 임박하다고 여기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1941년 11월 26일, 쿠릴 열도의 히토캇푸만(單冠灣)에서 나구모의 기동 함대가 하와이 진주만을 향해 출동했다. 이와 동시에 일본 육해군 역시 일제히 공격 지점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홍콩 공략을 맡은 부대는 광저우를 점령하고 있는 제23군이었다. 제38사단을 주력으로, 제1포병대(중포 42문), 아라키 지대(荒木支隊), 군 직할 항공대(각종 항공기 56대), 제2견지함대(경순양함 이스즈, 구축함 3척, 어뢰정 4척 등) 등 약 4만여명에 달했다.
또한 영국군은 일본군의 규모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반면, 일본은 현지 중국인들을 매수하여 영국군의 방어 태세는 물론이고 정확한 지도까지 가지고 있었다. 싸움이 될 리 없었다.
1941년 12월 8월 새벽 4시. 대본영으로부터 제23군에 공격 개시 명령이 떨어졌다. 광저우에서 출격한 일본 폭격기들이 주룽반도 남쪽의 카이탁(啓德) 비행장을 폭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홍콩에 대한 공습이 시작되었다. 홍콩 해안에는 경순양함 이스즈를 비롯한 일본 함대가 포격하고, 지상에서는 일본군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영국군의 방어선을 분쇄하였다. 일본군의 진격은 파죽지세였다. 12일에는 주룽반도 전역이 일본군의 손에 들어갔다. 마크 애치슨 영(Mark Aitchison Young) 홍콩 총독은 결사 항전의 결의를 다지며 일본군의 항복 권고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일본군의 맹렬한 포격과 공습이 홍콩 섬 곳곳에 떨어져 섬 전체가 검은 연기로 뒤덮였다. 그 와중에도 영국군은 국지적으로 완강히 저항하면서 일본군의 소규모 상륙을 수차례 막아냈지만 어차피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18일 저녁 8시, 맹렬한 지원 포격 아래 일본군 제38사단 주력의 본격적인 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을 실은 다수의 정크선들이 일제히 해안으로 밀어닥쳤다. 이미 힘이 다한 영국군 수비대는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린 채 소수만이 섬 안쪽으로 퇴각하였다. 다음날에는 섬의 서쪽을 맡고 있던 서부 여단 사령부가 공격을 받아 존 로슨(John K. Lawson) 준장이 전사했다. 또한 급수 시설이 파괴되어 식수 공급도 끊기면서 병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섬의 동쪽을 맡고 있던 동부 여단 역시 일본군에게 쫓겨 점점 남동쪽으로 밀리면서 스탠리 반도에 고립되었다.
홍콩 섬의 중심가인 빅토리아 시티(Victoria City)가 일본군에게 포위되면서 더이상 저항이 불가능해지자 영국군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25일 오후 3시 30분 영 총독은 사카이 중장 앞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다. 지난 백여년 간 홍콩 식민정부 청사에 내걸려 휘날리던 영국의 깃발은 내려졌고 일장기가 올라갔다. 섬 여기저기에서 영국군이 소부대로 고립된 채 전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26일 새벽까지 잔존 부대가 무기를 들고 투항하였다. 이로서 홍콩은 일본군에 손에 완전히 넘어갔다. 진주만 기습 이래 18일만이었다.

▲ 1941년 12월 28일 홍콩 시가지에서 승전 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일본군.
영국군은 전체 병력 1만 4천여명 중에서 2천여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350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1만1천명이 포로가 되었다. 탈출에 성공한 것은 몇척의 포함과 극소수의 병력만이었다. 반면, 일본군은 전사 678명에 부상 1400여명에 불과했다. 또한 일본군의 공습과 포격으로 1만여명 가까운 민간인들이 죽거나 다쳤다.
홍콩을 점령한 일본군의 만행은 중국 전선과 다를 바 없었다. 사카이 중장은 부하들에게 노고를 축하한다는 뜻에서 사흘 동안의 "자유행동"을 허락하였다. 이는 병사들에게 마음껏 약탈과 강간을 허용한다는 뜻이었다. 또한 포로들은 모두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다. 포로에 대한 대우는 최악이었고 이들은 학대와 영양실조에 허덕이면서 1500여명이 사망했다. 또한 일부는 강제 노동을 위해 화물선을 타고 일본으로 수송되었다. 수송선의 여건은 너무나 열악했기에 "지옥선"이라고 불릴 정도였고 항해 과정에서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몰살당하기도 했다. 일본에 도착한 뒤에도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며 기아와 질병으로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 영 총독은 스탠리 강제 수용소에 갇혔고 수비군 사령관 몰트비(Christopher Maltby) 소장은 만주국 수도인 신징의 수용소로 끌려갔다.

▲ 일본이 항복한 뒤 수용소에서 해방된 생존자들의 모습. 태평양전선에서 연합군 포로의 사망률은 독소전쟁에 비할 바는 아니라도 독일군에게 붙잡힌 포로들보다 훨씬 높았다.
전쟁이 끝난 뒤, 사카이 다카시 중장은 전범으로 중국으로 송환되어 중국 군사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1946년 9월 30일 난징 근교 위화타이(雨花台) 형장에서 총살당했다.
일본은 홍콩을 중국의 점령지와는 별도로 취급하여 홍콩 군정처를 설치하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말로는 "대동아 공영권" 운운하면서 서구인들의 오만한 우월감을 타도하고 동양인이 서양인과 동등한 권리를 회복하는데 일본이 앞장 설 것이라고 떠들었지만, 실제로는 해방자가 아니라 점령자로서 군림하였다. 더욱이 일본의 통치는 영국보다 훨씬 가혹하고 포악했으며 부정 부패하여 뇌물 없이는 어떤 일도 처리되지 않았다. 또한 전쟁과 수탈은 홍콩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일본은 막대한 군표를 마구잡이로 유통시켜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였다. 따라서 반일감정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태평양전쟁 내내 많은 중국인들이 중국 본토와 연계해 게릴라전을 수행하며 관공서와 경찰서, 항구를 습격하는 등 일본군과 싸웠다. 또한 홍콩을 폭격하다 격추당한 연합군 폭격기 승무원을 구조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중국은 미국,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1941년 12월 31일 장제스는 중국과 인도차이나, 미얀마, 인도를 총괄하는 중국전구의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여기에는 홍콩도 포함되었다. 연합국의 일원이 된 중국은 구미 열강을 상대로 기존의 모든 불평등조약의 폐기를 추진하였고 루즈벨트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1942년 10월 10일 미국과 영국은 상하이와 난징, 톈진 등 중국 내 모든 치외법권 지역을 포기하는데 원칙적으로 동의하였다. 또한 의화단의 난으로 체결된 신축조약(조계 설치, 군대 주둔권, 배상금 지불 등)도 무효화하였다.
최대의 쟁점은 홍콩이었다. 중영 신조약의 체결을 놓고 처칠은 "대영제국의 영토는 한치도 포기할 수 없다"며 홍콩 섬과 신계, 주룽반도의 반환을 거부하였다. 장제스는 영국이 홍콩을 반환하지 않겠다면 신조약의 체결 또한 없다고 맞섰다. 쌍방이 첨예하게 대립하자 중국 대표였던 쑹쯔원은 대일전쟁에 승리하려면 영국의 협력이 불가피하므로 부득이 양보할 수밖에 없다며 장제스를 설득하였다. 장제스는 동의하되, "홍콩 반환 문제는 장래에 계속 논의한다"라는 문구를 문서에 넣으라고 지시하였다. 쑹쯔원은 주중 영국 대사 세이모어(H. J. Seymour)를 통해 서면으로 중국의 입장을 통보하였다. 하지만 영국이 끝까지 굽히지 않는 이상 상징적인 의미 이외에는 없었고 결국 아무런 결론이 나지 않은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루즈벨트는 영국의 식민정책을 시대 착오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카이로 회담에서 삼국 정상이 만난 자리에서도 처칠에게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라고 건의하는 한편, 장제스에게는 "중국이 홍콩을 반환받은 후 국제 자유항으로 선포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처칠은 오히려 화를 내면서 자신이 영국 총리로 있는 동안에는 대영제국을 해체할 생각이 없다고 대꾸하였다. 카이로 회담이 끝난 직후인 1943년 12월 13일 영국 전시 내각은 "영국은 전후 어떠한 영토도 포기할 계획이 없음"을 결의하였다.
정치적으로나, 군사, 경제적으로도 큰 가치가 없는 홍콩을 미국과 대립하면서까지 처칠이 애써 고수하려는 이유는 홍콩 반환이 곧 대영제국의 해체로 이어지리라는 공포심 때문이었다. 유럽의 작은 섬에 불과한 영국이 강대국의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식민지 덕분이었다. 골수 제국주의자로서 전후 세계에서 미국, 소련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를 원했던 처칠로서는 식민지가 없으면 대영제국도 없다는 것이 신념이자 고집이었다.
루즈벨트는 얄타 회담에서도 홍콩 문제를 다시 언급하였고 4월 5일에는 패트릭 헐리 주중 대사를 런던으로 보내어 처칠에게 홍콩을 포기할 것을 권유하였다. 하지만 처칠은 화를 내면서 "영국의 단 한 조각의 영토에서도 영국 국기를 내리지 않겠다"라며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더욱이 그는 사전에 홍콩을 재점령할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두고 있었다. 추축국의 패배가 점차 가시화되는 1944년 7월, 영국 전시 내각은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홍콩을 비롯한 동남아의 모든 식민지를 회복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필요한 통치 기구의 마련, 일본군이 중국군에게 먼저 투항하지 않도록 신속한 병력 파견과 일본군을 무장 해제할 계획도 준비하였다.
1945년 7월이 되자 일본의 항복이 초 읽기에 들어가면서 영국 또한 발빠르게 움직였다. 중국 역시 광시성을 탈환하고 광저우와 홍콩으로 진격할 준비를 하였다. 홍콩의 미래는 어느 쪽이 먼저 홍콩에 들어가는가에 달려 있었다. 장제스는 북위 16도 이북의 모든 지역을 관할하는 연합군 총사령관이었기에 장제스의 동의 없이 영국군이 홍콩에 진입하는 것은 엄연한 협정 위반이었다. 따라서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태평양지역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만주를 제외한 북위 16도 이북의 모든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투항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영국은 이에 반발하여 "홍콩의 통치권은 중국이 아니라 영국에 있으며 마땅히 영국군이 홍콩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처칠을 대신해 신임 총리가 된 애틀리는 트루먼에게 비밀 전보를 보내어 영국의 입장에 동의해 달라고 요구하는 한편, 필리핀 수박 만에 정박하고 있던 영국 태평양함대에 지시하여 즉각 홍콩에 함대를 파견하라고 지시했다. 친소, 친중국이었던 루즈벨트와 달리 트루먼은 이전부터 중국을 멸시해 온데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영국의 손을 들어주어 "미국은 영국군이 홍콩에서 항복을 받는데 반대하지 않는다"라고 답신을 보내고 맥아더에게도 홍콩은 중국의 관할권 밖이라고 전달하였다.
이 사실을 안 장제스는 격노하여 헐리를 통해 트루먼에게 "영국군은 마땅히 명령을 지켜야 하며 홍콩에 상륙하거나 홍콩의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켜서는 안된다"라는 항의성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트루먼은 "이미 영국에게 통지했다"라며 거절하였다. 그렇다고 영국보다 먼저 홍콩으로 병력을 보낼 처지가 아니었던 장제스로서는 결국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를 비롯해 항모 5척과 전함 2척, 순양함 3척 등으로 편성된 영국 태평양함대는 8월 27일 수빅만을 출발했다. 30일 빅토리아 항에 진입하여 병력을 상륙시킨 후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포로 수용소를 해방시키는 한편 홍콩 식민지 전역을 접수하여 재점령을 완수하였다.
9월 16일 영국 태평양 함대 사령관 하코트(C.H.Harcourt) 소장의 주재로 홍콩 주둔 일본군의 항복 조인식이 열렸다. 장제스는 어떻게든 중국이 홍콩을 회복한다는 이미지를 부여할 생각으로 하코트 소장을 중국 전구 총사령관인 자신의 명목상 대리로 임명하고, 중국 대표로 판화궈(潘華國) 소장을 파견하여 조인식에 참석토록 했으나 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3년 8개월 동안 스탠리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영 총독이 1946년 5월 1일 홍콩 총독에 복직하여 식민 통치를 재개했다. 이로서 홍콩은 영국의 손에 다시 넘어갔다.

▲ 1945년 9월 16일 홍콩 빅토리아 항에서 열린 항복 조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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