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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홍콩, 중국으로 반환되다. - 6. 홍콩, 마카오 반환에 합의하다

근 2년에 가까운 홍콩 반환 회담의 승자는 누가 보더라도 승자는 중국이었다. 사실 협상은 한동안 지지부진했고 몇번이나 결렬 직전에 직면하기도 했다. 한낱 남대서양의 작은 섬 포클랜드조차 지키기 위해 전쟁마저 불사했던 영국에게 하물며 홍콩의 가치는 감히 포클랜드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1960년대 글로벌 경제의 황금기 이래 고도 성장을 누렸던 홍콩은 뉴욕, 런던과 함께 세계 3대 금융 중심지이자 유럽과 아시아 태평양을 연결하는 경제 거점이었다. 전 세계 주요 은행이 홍콩에 지점을 두었으며 매일의 거액의 외환이 오고갔다.

1982년 기준으로 홍콩의 총 GDP는 당시 가치로 335억 달러로 싱가포르(195억 달러)의 약 두배였으며, 1인당 GDP에서는 6176 달러로 영국(9058 달러)의 70%, 중국의 21배에 달했다. 1990년대에 오면 일시적이나마 홍콩의 1인당 GDP는 경제 침체에 허덕이던 영국조차 능가할 정도였다. 영국이 어떻게든 홍콩을 놓지 않으려는 것은 당연했다.


​※ 자료출처 : 세계개발지표(세계은행, http://www.worldbank.org/)


영국은 150년에 걸쳐 이룩한 자신들의 치적을 자랑하며 홍콩은 번영은 전적으로 서구식 민주주의와 효율적이고 양심적인 통치가 이루어 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중국도 할 말은 있었다. 중국은 "영국의 식민 통치가 그렇게 우수하다면 어째서 인도나 말레이시아와 같은 다른 식민지는 못 사는가?"라고 반박하였다. 홍콩의 번영은 중국이 값싼 원자재를 제공하고 내륙과의 활발한 교역 덕분이라는 것이 중국의 주장이었다. 실제로 중국과 홍콩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여 중국의 홍콩 수출액은 50억 달러에 달했고 전체 수출액의 1/4을 차지했다. 홍콩 역시 중국을 통해 들어오는 값싼 노동력과 원자재로 국제 시장에서 다른 경쟁국가들에 비해 월등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으며, 홍콩에게 중국 시장의 비중은 일본 다음이었다.


어쨌거나 장장 14개월 22차례에 걸친 밀고 당기기 끝에 1984년 12월 19일, 베이징에서 중국 자오쯔양(趙紫陽) 총리와 대처 영국 수상 사이에 홍콩 반환 협정이 조인되었다. 철의 여인은 백기를 들었다. 1997년 7월 1일자로 99년 조차 기한이 끝나는 신계는 물론, 원래 반영구 임대였던 홍콩섬과 남부 주룽반도 역시 중국에게 반환키로 동의하였다. 총면적 1,078㎢ 의 홍콩 식민지에서 신계가 면적에서 90%, 인프라의 대부분이 집중되어 있는데다, 고작 126㎢ 에 불과한 홍콩섬만으로는 도저히 자립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속내는 중국에 반환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기를 원했지만 중국의 완강한 입장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여기서 만약 대처가 홍콩의 반환은 없다며 무력 충돌조차 불사한다는 식으로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면 어떠했을까. 인구 550만명의 홍콩에 배치된 수비대는 5천여명의 네팔 구르카족과 1600여명의 중국인으로 구성된 3개 대대를 중심으로 약 9천여명 정도였으며 모두 경무장한 부대로 정규전보다는 치안 유지에 걸맞았다. 더욱이 홍콩은 포클랜드와 달리, 중국 본토와 인접하여 육지에서 공격할 수 있어 공격은 유리한 반면, 수비는 불리했다. 그 점은 1941년 12월 일본의 공격에서 이미 증명되었다. 중국과의 긴장 관계가 높아진다면 영국 또한 수비대를 증강하겠지만 그 위험도는 포클랜드 전쟁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중국은 광둥군구만 해도 전차와 항공부대를 포함해 30만명 이상이 배치되어 있었다. 고집 센 대처가 먼저 타협을 제안하고 협상장으로 나온 이유 또한 이 때문이었다.

▲ 홍콩에 주둔한 제2 구르카 소총부대의 열병식. 홍콩 수비대의 중핵이기도 했다.


하지만 덩샤오핑 역시 무력에 호소할 생각은 없었다. 강압적인 방법은 간단하지만 홍콩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을 것이며 닉슨의 방중 이래 모처럼 신뢰를 쌓고 있던 서방과의 관계 또한 최악으로 치닫았을 것이다. 그가 여지껏 개혁개방을 위해 노력했던 모든 것 또한 수포로 돌아갔을 것이며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되었을 것이다. 그는 현명하게도 인내심을 가지고 영국과의 협상에 임하였다. 그의 외교 역량은 분명 탁월했다. 영국과 국내의 보수 세력 사이에 끼여 있던 그는 원칙에 대해서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라며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세부 내용에서는 실사구시의 관점에서 탄력적인 유연성을 보였다.

▲ 워게임 레드 드래곤(Wargame: Red Dragon)에서는 실제로 홍콩을 두고 영국과 중국이 전쟁을 벌이는 시나리오도 있다.  

 

물론 현실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정치개혁과 고도의 자치권 부여, 홍콩의 민주화 등 영국이 내미는 요구 사항은 중국 입장에서는 매우 민감한 부분도 있었다. 또한 실제 반환까지는 13년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 남았다는 점에서 향후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그 때가서 또 어떻게 바뀔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욱이 이미 80살의 고령이었던 덩샤오핑에게는 남아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느 독재자들이 그러하듯, 당장 눈앞의 치적이나 자신의 체면에만 매달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홍콩을 죽이지 않았다. 이것이 중국식 외교법이자, 구소련 붕괴 후 완전히 몰락했던 러시아와 달리 거대한 경제 대국이 된 원동력이기도 하다.

 

국제 사회에서 영토 반환 문제가 대부분 복잡한 이해관계와 힘의 역학 구도 아래에서 극심한 갈등과 분쟁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홍콩의 평화적 해결은 이유가 어떻든 실로 보기 드문 사례였으며 국제 사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는 첫째로 중국이 그만한 실력을 갖춘 강대국이기도 했지만, 덩샤오핑과 대처 양쪽 모두 자기 입장만 고수하면서 체면에만 매달리는 대신 상대방의 전략을 이해하고 조금씩 양보한 결과이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인내심과 지혜를 갖춘 보기 드문 지도자였던 것이다. 중국의 오랜 숙원을 해결한 덩샤오핑은 회담장에서 대처에게 "13년 뒤 홍콩이 우리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을 때까지 살았으면 한다."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그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홍콩 반환 시한이 겨우 4개월 남은 1997년 2월 19일 작은 거인은 눈을 감았다.

  

▲ 홍콩 반환을 축하하는 중국 정부의 홍보 포스터


1990년 4월 4일, 베이징에서 열린 제7기 전국인민대표회의 제3차 회의에서 "홍콩 기본법"이 결의되었다. 홍콩에 대해 명목상 중국에 복속하되, "일국양제"의 기본 원칙 아래 다음 세가지를 내세웠다.

첫째, 설립투구(設立特區, 홍콩을 특별행정구역으로 자치를 실시한다)

둘째, 제도불변(制度不變, 홍콩의 기존 체제는 건드리지 않는다)

셋째, 보지번영(保持繁榮, 홍콩의 번영을 유지 발전시킨다)


홍콩은 국가 속의 국가로서 특별 행정구로서 50년 동안 고도의 자치권이 부여되며 독자적인 행정과 사법, 입법권이 보장되었다. 홍콩 경제와 금융은 본토와는 독립적으로 운용되고 화폐 또한 위안화 대신 홍콩 달러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또한 각종 국제 대회나 기구에도 별도로 가입할 수 있었다. 언론의 자유와 공산당을 비판하는 것 또한 허용되었다. 국방과 외교권에 대해서만 중앙 정부가 행사하되, 홍콩의 독립이나 두개의 중국을 주장하는 등의 국가를 분열시키는 행동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는 중국이 본격적으로 홍콩 회수를 앞두고 향후 통치 원칙을 공식적으로 제시한 것이기는 했으나, 당사자인 홍콩 주민들로서는 100%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원칙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뭘 해도 좋고 뭘 하면 안된다는 가이드라인이 분명하지 않았고 말로는 자치권을 최대한 보장하고 간섭을 최소화하겠다고 약속하면서도 실제로는 얼마든지 중앙정부가 이런저런 핑계로 개입할 여지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중요한 홍콩 최고 통치 책임자인 행정 장관의 선출에 대해서도 "선거로 뽑는다"고만 명시했을 뿐, 선거를 어떤 식으로 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즉, 덩샤오핑은 서방과의 외교에서는 유연성을 보였지만 국내 통치에서는 여전히 보수적인 사고를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1989년 톈안먼 사태에서 무차별적인 유혈 진압을 명령했던 덩샤오핑 식 통치의 한계이기도 했다.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를 폭력으로 진압한 톈안먼 사태는 TV와 미디어를 통해 생생하게 외부로 알려지면서 서방은 물론, 홍콩 주민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중국이 경제 개방과 서방과의 관계 개선과는 별개로,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일당독재의 폐쇄적인 국가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증명한 것이었다. 따라서 입으로는 제아무리 자치권과 민주화를 약속해도 막상 중국으로 반환된 후에 과연 중국 정부가 어디까지 약속을 지킬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따라서 홍콩 일각에서는 대륙에 불신을 버리지 않은 채 "홍콩은 홍콩 사람들이 다스려야 한다"라는 항인치항(港人治港, 港=香港) 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영국식 통치에 익숙한 부유한 홍콩 주민들 중에는 해외로 이민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고 외국 자본 또한 계속 유출되었다. 하지만 홍콩 내부에서도 더 많은 자치권과 홍콩 행정장관의 직선제와 같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와, 홍콩의 안정을 위해서는 지나친 민주화는 성급한 일이며 중앙정부와의 마찰만 야기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보수파의 갈등이 빚어졌다. 한편, 타이완은 타이완 대로 홍콩 반환을 예의 주시하면서 홍콩 주민들과 자본을 타이완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지만 홍콩 주민들은 여전히 장씨 일가의 철권 통치가 유지되고 있는 타이완에 대해서도 대륙만큼 불신하고 있었기에 타이완의 노력은 그다지 성과가 없었다.

한편, 중국 최대의 현안이었던 홍콩 반환 문제가 해결되자 마카오 반환 역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영국의 함포 외교와 달리, 명나라 시절 포르투칼 상인들이 거주처로서 형성된 마카오는 아편전쟁으로 청조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 1845년 11월 20일 포르투칼 정부가 일방적으로 마카오를 포르투칼 령으로 선언하였다. 그리고 1887년 3월 26일 중국-포르투칼 리스본 조약이 체결되어 마카오는 포르투칼의 정식 식민지가 되었다.

마카오는 홍콩과 달리, 언제까지 조차한다는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에 사실상 반영구적인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을 선언했던 포르투칼 정부는 마카오에서 일본 군함의 정박을 허용하고 식량과 물자를 보급하는 등 사실상 중립을 어겼다. 따라서 장제스 정권은 중일전쟁이 끝난 뒤 마카오를 강제로 회수하기로 결정했다. 마카오는 고작 총면적이 26.8㎢ 에 불과한데다 자급자족도 불가능했다. 광둥성장 겸 제2방면군(구 제4전구) 사령관 장파쿠이는 병력을 동원해 마카오를 봉쇄하고 식수와 식량의 공급을 중지시켜 마카오가 스스로 항복하기를 유도했다. 포르투칼 정부는 손을 들고 협상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 국공내전이 시작되면서 마카오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마오쩌둥의 신중국이 건국된 후에도 마오쩌둥은 홍콩와 마카오를 서방과의 교섭 창구로 남기기로 결정하였다. 덕분에 마카오는 그대로 포르투칼의 통치 아래 남았다.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2년 7월 마카오 반도 북쪽의 관문인 꽌잡(關閘)에서 쌍방의 경비병들이 무력 충돌하는 이른바 "꽌잡사건"이 일어났지만 중국군은 포르투칼군의 도발을 격퇴했을 뿐 더 이상 사태를 악화시키거나 문제 삼지는 않았다.


▲ 마카오와 주하이(珠海) 시를 연결하는 관문인 꽌잡(關閘).


중국은 마카오에 대해서 과거 서구의 함포 외교에 의한 불평등 조약의 상징이라고 비난하면서도 굳이 회수를 서두르지는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한창 번영을 누리는 홍콩과 마카오를 서둘러 회수하는 것은 중국에게 이득이 되지 않을 뿐더러 향후 서구과의 교역을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또한 문혁의 후유증으로 혼란을 겪고 있던 중국으로서는 홍콩과 마카오를 안정적으로 통치할 역량이 없었다.

1974년 4월 이른바 "카네이션 혁명"으로 40여년에 걸친 군부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문민 정권이 수립된 포르투칼은 모든 해외 식민지의 포기를 선언하였다. 또한 타이완 정부와의 단교를 선언하고 중국과의 국교 수립을 추진하여 1979년 2월 8일 정식으로 국교가 성립되었다. 마카오에 대해서는 중국의 주권을 인정하되, '특별 자치령'으로서 중국이 적당한 시기가 될 때까지 포르투칼에 잠시 맡겨둔다는 식으로 타협하였다.

홍콩 반환이 결정되자 마카오 문제 또한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어졌다. 양국 모두 반환하는데는 원칙적으로 이견이 없었지만 문제는 언제 반환하는가였다. 포르투칼은 2017년에 반환하는 안을 제안했지만 중국은 정치적 상징성을 고려해 적어도 2000년 이전에 돌려받아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결국 1987년 4월 13일 양국 정부는 1999년 12월 20일에 마카오를 중국에 반환하는데 서명하였다. 마카오의 지위 역시 홍콩과 동일하게 일국 양제의 원칙 아래 50년 동안 기존의 제도를 유지하면서 고도의 자치권을 누릴 수 있었다. 이로서 중국은 식민지 문제를 완전히 청산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