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9월 24일 베이징 톈안문 인민대회당(人民大会堂)에서 양국의 지도자가 만났다. 마거릿 대처 영국 수상의 맞은 편에는 자오즈양(趙紫陽) 당 중앙위 부주석과 그리고 중앙군위 주석으로 중국 최고 실력자였던 덩샤오핑이 앉아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철의 여인(The Iron Lady)" 마거릿 대처는 그녀를 회상하는 동료들의 말대로 누구보다 강한 의지와 카리스마를 갖추었으며 독선적이고 위압적이면서 지배당하기보다 지배하기를 좋아하는 여성이었기에 어떤 이들은 "마녀"라고도 불렀다. 그녀의 리더쉽은 20세기의 수많은 영국 정치가들 중에서도 오직 처칠만이 비견될 수 있었다.
덩샤오핑 역시 20세기 중국 혁명사의 산 증인이었다. 그는 마오쩌둥의 오랜 동지였으며 대장정과 중일전쟁, 국공내전에서 함께하였다. 대약진운동 이후 마오쩌둥의 눈 밖에 난 그는 세번 숙청 당하고 세번 복귀하는 등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을 경험해야 했다. 마오쩌둥이 죽자 덩샤오핑은 당 주석 화궈펑과 군의 원로인 예젠잉과 손을 잡고 4인방을 하루 아침에 숙청하여 정권을 차지하였다. 둘 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정치 9단에다, 고집불통이기도 했다. 즉, 이 날의 회담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위대한 두 지도자 철의 여인과 작은 거인의 기 싸움이었다.
회담은 처음부터 첨예한 설전으로 시작되었다. 대처는 협상의 주도권을 쥘 생각으로 먼저 덩샤오핑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그녀는 과거 청조 시절 체결한 3개의 조약(난징조약, 베이징조약, 신계조차조약)은 국제법 상 유효하므로 협상을 통해서만 수정할 수 있으며 한쪽이 일방적으로 폐지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중국의 홍콩 회복 의지는 이해하지만 현재 홍콩이 누리는 안정과 번영은 전적으로 영국의 통치 아래에서 유지되고 있기에, 만약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경우 대혼란이 일어나 홍콩의 번영은 하루 아침에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따라서 중국 정부가 영국과 홍콩 주민들이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을 때 비로소 영국 정부 또한 중국의 주권 문제를 고려하겠다고 말하였다. 바꾸어 말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홍콩을 돌려줄 생각이 없다는 얘기였다.

▲ 1980년대 초반의 홍콩. 금융과 제조업의 중심지로 도쿄, 싱가포르와 함께 아시아에서 가장 발달된 도시이자 전략적으로도 중요했던 홍콩을 내놓기에는 영국으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덩샤오핑은 그녀의 말을 한마디로 일축하였다. "홍콩의 주권 문제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1997년 7월 1일 반드시 홍콩을 돌려받을 것이다. 그것이 주권국가로서의 할 일이다. 만약 그것이 안 된다면 인민들은 우리 지도자들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 단, 홍콩은 자체의 자본주의를 유지하고, 우리는 우리들의 사회주의를 실시할 것이다. 당신들은 돌아가서 투자자들을 안심시켜라.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또한 그는 반드시 영국이 다스려야만 홍콩이 번영한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홍콩의 번영은 홍콩 주민들의 희생과 노력 덕분이다, 1997년 이후 홍콩이 계속 번영할지는 중국이 어떤 정책을 할 것인가에 달려 있을 뿐이라고 반박하였다. 덩샤오핑은 이 자리에서 논의할 문제는 홍콩을 반환할지 안할지가 아니라, 1997년까지 남은 15년 동안 중국이 홍콩을 회수하는데 필요한 준비와 양국의 협력 방안이라고 말했다.
▲ 덩샤오핑과 대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지만 두 맞수의 싸움은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았다.
물론 대처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만약 홍콩이 혼란에 빠지면 덩샤오핑이 추진하고 있는 중국 현대화에도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맞섰다. 이는 이른바 "백묘흑묘론"을 내세워 개혁개방을 막 시작한 덩샤오핑이 제일 먼저 현대화의 실험도시로 선정한 곳이 바로 홍콩, 마카오와 인접한 선전이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던 선전은 경제 특구로 지정된 후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홍콩, 동남아의 화교들과 외국 기업가들을 대거 유치하여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즉, 선전의 발전은 홍콩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당내 보수파들의 공격에 자유롭지 못했던 덩샤오핑으로서는 선전의 성공 여부가 곧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좌우하는 것이었다. 대처는 덩샤오핑의 아킬레스를 정확히 찌른 셈이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중국의 현대화는 홍콩과는 상관없다. 그리고 홍콩 회수 후 외국인들이 떠난다고 해도 중국의 정책이 옳다면 다시 되돌아올 것이다"라고 대꾸하였다. 또한 중국은 어떤 상황이든 검토했으며 모든 수단을 다해 대응할 것이라고 엄포하였다. 심지어 마음만 먹는다면 홍콩을 1997년 이전에도 회수할 수 있다며 은근히 위압하기도 했다. 그는 중국의 당면 목표는 홍콩이며, 다른 어떤 것도 이보다 중요하지 않다, 이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큰 손해도 감수하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른바 공산주의 특유의 벼랑 끝 전술이었지만 대처는 꼬리를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중국의 주권은 인정하되, 홍콩의 혼란을 막기 위해 조차기간을 10년 연장하고 행정권을 영국이 유지하는 식으로 단계적으로 반환하는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역시 거부당했다.
약 2시간에 걸쳐 진행된 회담의 승자는 누가 보더라도 덩샤오핑이었다. 자신이 자랑하는 언변으로 홍콩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생각이었던 철의 여인은 완전히 한방 먹은 셈이었다. 다음날 중국과 홍콩의 일간지들은 인민대회당의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주저앉은 대처의 모습을 톱기사로 실었다.
하지만 회담 장소에서 누구 이겼건, 홍콩은 고작 문서 한장으로 간단하게 주고 받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홍콩은 서구의 어느 도시 못지 않게 발달한 인구 600만명의 거대도시였다. 또한 대륙에 속한 유일한 자유 무역항이자, 대륙과 타이완에서 정치적 탄압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도피하는 피난처이기도 했다. 1981년 홍콩 주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륙이건 타이완이건 홍콩 주민의 호감도는 낮았고 중공으로 편입되었을 때 "이민가겠다"라는 응답이 60%에 달했다. 또한 60% 이상이 조차 기간 연장을 원했고 중국이 제시하는 이른바 "일국 양제"에 따른 특별 행정구를 지지하는 목소리는 20%에 불과했다. 따라서 중영 회담이 결렬되자 홍콩은 대혼란에 빠졌다. 당장 부동산과 주식이 폭락했고 외화가 유출되면서 미 달러와 홍콩 달러의 교환율이 9월 19일부터 24일까지 5일 만에 1:7에서 1:9.7로 치솟았다. 홍콩 곳곳에서 사람들이 식량과 생필품을 사재기하고 미국 달러를 구매하려고 줄을 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다수 홍콩 주민들은 백오십여년 전 제국주의 영국이 함포 외교로 홍콩을 중국으로부터 빼앗은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공산주의 중국의 통치를 받는 것 역시 불안해 하였다. 한마디로 중국을 신뢰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홍콩의 여론은 둘로 갈라져, 젊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반영 운동과 현재의 안정을 원하는 여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영국 정부도 홍콩의 부정적인 여론을 내세워 "홍콩인들은 여전히 영국의 통치를 원한다"라며 중영 회담 이후 홍콩 달러의 가치 하락과 증시 폭락, 자본 유출 등을 들어 중국측을 압박하는 한편, 홍콩 주민들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며 회담에 홍콩 인사들이 참여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또한 지도에서 홍콩을 "영국 식민지"가 아닌, 영국의 정식 영토로 표시하였다.
하지만 중국측 입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전인대 상무위원 랴오청즈(廖承志)는 성명을 발표하여 "설령 홍콩에 동란이 일어난다고 해도 중국의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라고 못을 박았다. 또한 홍콩은 중국의 영토이며, 영국의 통치도, 그렇다고 홍콩이 독립하는 것도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는 홍콩 회수에 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영국을 압박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1983년 3월 9일, 대처는 홍콩의 반환은 없다는 기존의 입장에서 한발 물러서 과거 청조와 영국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 유효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홍콩 반환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였다. 그리고 6월부터 양국의 협상은 재개되었다. 하지만 협상은 난항의 연속이었다. 영국의 입장은 중국이 홍콩에 대한 명목상 주권을 가지되, 행정권은 여전히 영국이 유지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물론 중국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영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섰다. 대처는 중영 협상의 장기화로 인한 손실을 따졌을 때 영국보다 중국이 훨씬 크므로 애써 서두를 필요는 없다는 식이었다. 협상은 수개월 째 교착 상태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10월 6일 대처를 대신하여 前 영국 수상 히스(Edward Heath)가 베이징을 방문했다. 덩샤오핑은 히스에게 "중국은 1년 동안 기다릴 것이다. 그 동안 영국이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중국은 결국 일방적인 행동을 취할 수 밖에 없다"라면서 자신의 뜻을 대처에게 똑똑히 전달해 달라고 요구했다. 사실상 최후 통첩이었다. 덩샤오핑으로서도 당내 원로들과 보수파들로부터 "미온적이다"라는 공격을 받고 있었기에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었던 것이다.
협상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대처는 다음 선거를 앞두고 있는데다 더 이상 중국을 압박할 협상 카드도 없었다. 덩샤오핑 역시 무리하게 중국의 입장만 고집하기보다는 실사구시의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이 점이 1950년대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에만 급급하여 수에즈 국유화를 일방적으로 선언했다가 제2차 중동전쟁과 서방과의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켰던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나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던 아르헨티나의 갈티에리(Fortunato Galtieri Castelli) 대통령과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강경함과 유연성을 병행하여 국익을 최대한 챙기면서도 서방과의 관계 또한 악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중국식 합리주의였다.
영국은 홍콩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인정하고 중국이 요구하는 일국 양제, 통치권의 이양에 동의하였다. 중국은 홍콩을 특별구로서 현재의 모든 정치, 사회, 경제 구조를 50년간 인정할 것과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자치권 보장, 독립된 홍콩 사법부의 설치, 언론 집회의 자유에 동의하였다. 경제적으로도 중국은 홍콩에 여전히 싼 값에 식량과 원자재를 제공하였다. 또한 홍콩에 많은 돈을 투자하여 1984년 초에 홍콩 내 중국 투자액은 40억 달러에 달했으며 두번째 무역 상대국이었다. 이는 중국의 발언권을 강화하여 향후 홍콩 회수에 대비하기 위함이자 홍콩 주민들의 신뢰를 얻기 위한 장기적인 포석이었다.
더욱이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서방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미국과 일본, EU 등 각국에 대한 지지를 얻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하지만 영국을 지지하는 국가는 없었다. 영국이 제국주의 시절의 함포 외교로 획득했던 홍콩을 21세기까지도 끌고 가려는 행동은 누가 보더라도 시대착오적인 식민 정책이자 이기적인 행태로만 비추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영국 기업들도 세계에서 가장 잠재성이 높은 중국 시장에 뛰어들기를 원했고 홍콩 문제로 발목을 붙잡히기를 원치 않았다.
그럼에도 대처는 홍콩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특별구라는 지위를 이용해 고도의 자치권을 누리도록 하여 간접적으로나마 영국이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했다. 또한 오랫동안 영국인이 배타적을 독점했던 정치 권력을 홍콩 주민들에게 개방하여 홍콩의 민주화를 강화하고 반공의식을 고취시켰다.
협상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 중 하나는 중국군의 홍콩 주둔이었다. 중국은 군대의 주둔은 주권의 상징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영국은 중국군이 홍콩에 진입할 경우, 홍콩의 자치권에 심각한 침해가 될 것이라고 반발하였다. 결국 중국이 홍콩 방위 부대를 파견하되, 홍콩의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치안은 홍콩 특별 행정구가 맡고 군대는 중앙정부가 책임진다는 타협안에 합의하였다.
또 하나는 홍콩 특별 행정구의 총책임자인 행정장관의 선출이었다. 양국은 원칙적으로 선거 또는 협상을 통해 선출시키로 합의했지만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결정하지 못했다. 이 점이 훗날 홍콩 주민들의 불만으로 이어지면서 경기 불황에다 갈수록 도를 더하는 중앙 정부의 간섭에 반발하여 작년 9월부터 12월까지 10만명 이상이 참여하는 이른바 "우산 혁명(Umbrella Revolution)"이라 불리는 민주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1984년 9월 18일 드디어 양국은 홍콩 반환에 합의하고 26일에 "홍콩문제에 관한 중화인민공화국과 영국의 공동성명서"가 채택되었다.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은 1997년 7월 1일을 기하여 홍콩에 대한 주권 행사를 회복한다"를, 영국은 "홍콩을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한다"를 발표하였다. 대신 반환 이전까지는 영국이 현재 상태를 유지하면서 통치권을 행사하고 중국 정부는 이에 협력키로 하였다. 처음 담판을 시작한 이래 무려 14개월 22번에 걸친 첨예한 줄당기기의 결과였다. 최종 승자는 중국이었지만, 영국도 나름대로 경제적인 면에서 중국의 몇가지 양보를 얻어냈다는 점에서 실익이 없지는 않았다.

▲ 1984년 12월 홍콩 반환 문서에 서명하는 마가렛 대처 수상.
홍콩 반환 성명은 총 8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주요 내용은 첫째로 홍콩의 반환에 대한 것이고 두번째는 홍콩 반환 후 중국 정부의 기본 원칙으로, 일국 양제의 원칙에서 홍콩 특별구 설치와 고도의 자치권 부여, 재정권과 사법권의 독립, 행정장관은 현지에서 선출한 후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는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유혈 충돌을 빚었던 포클랜드 전쟁과 달리, 홍콩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자 국제 사회에서도 환영하였다. 대처는 "국제 외교에서 하나의 이정표"라고 말했고, 영국 외무장관 역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자 진정한 업적이다"라고 자평하였다. 이로서 홍콩의 중국 반환은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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