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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홍콩, 중국으로 반환되다. - 7. 홍콩, 과연 중국의 여의주가 될 것인가.(完)

홍콩 반환 1년 6개월이 남은 1996년 1월 26일, 홍콩 인수를 위한 홍콩특별행정구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중국인사 56명, 홍콩인사 94명 총 150명으로 구성된 준비 위원회는 홍콩 식민정부와 협력하여 각종 업무를 인수인계하고 통치 기구를 설립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드디어 홍콩-차이나 시대의 '카운트 다운'이 시작된 것이다. 

영국 식민지군을 대신하여 홍콩의 방위를 맡을 홍콩 주둔군(駐香港部隊)도 편성되었다. 홍콩 주둔군은 총 인원은 여단급인 약 8천여명으로(이후 감축되어 현재는 4,300명 규모를 유지하고 있음), 육,해,공군으로 혼성 편성되었다. 이들은 홍콩과 인접한 선전에서 대기하면서 1997년 7월 1일 새벽 0시를 기하여 홍콩으로 진입할 부대였다.  

홍콩 회수 2년을 앞둔 1995년 7월 1일, 톈안먼 광장을 비롯한 중국 주요 대도시마다 대형 전광 시계가 설치되었다. 시계는 홍콩 반환까지 남은 시간을 초단위로 표시하였다. 그 좌우에는 "迎接97香港回歸(97년 홍콩반환을 맞아들이자)", "保持香港穩定繁榮(홍콩의 안정과 번영을 유지하자)" 등의 구호가 적혀 있었다. 또한 중국 전역에 영화《아편전쟁》이 상영되고 관영 매체들은 홍콩의 장미빛 미래를 게재하는 등, 온갖 선전과 경축 행사가 열렸다. 이런 모습은 홍콩의 반환이 가까워 질수록 더욱 부산해졌다. 중국 정부는 홍콩 반환을 과거 백년 굴욕의 역사를 청산했다는 사실과 함께, 앞으로 열릴 중국의 찬란한 미래를 강조하는 정치적인 상징이자, 프로파간다로 활용한 것이다.

​▲ 톈안먼 입구에 매달린 홍콩 반환 시계탑. 1999년 마카오 반환 당시에도 똑같이 하였다.


물론 중국이 진짜 노리는 것은 단순히 과거사 청산도, 손바닥만한 땅을 되찾는 것도 아니라 홍콩이 가진 어마어마한 부였다. 1996년 기준으로 세계 제일의 자유 무역항이자, 외환 보유고 세계 7위(660억 달러), 전체 GDP 1,587억 달러, 1인당 GDP 2만 4천달러, 외환시장 규모 세계 5위, 실업율 2.5%, 연평균 성장율 6%, 국제 종합경쟁력 2위(1위는 싱가포르), 해외 투자 규모 세계 4위. 또한 선진국 못지 않은 사회 인프라, 각종 하이테크 산업,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 세계에서 가장 낮은 부정부패 지수 등 홍콩의 잠재성은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할 만큼 무궁무진했다. 홍콩과 인접한 선전 경제 특구 역시 홍콩과의 교역을 통해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되었고 광저우와 홍콩, 주하이, 마카오, 산터우(汕頭)등을 연결하는 중국 최대의 경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샤오핑의 개혁개방 이래 광둥성의 경제 특구들을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중국과 '아시아의 작은 용'이라 불리는 홍콩이 결합한다면 어떠할 것인가. 중국의 외화 보유량은 1997년 초를 기준으로 1,140억 달러로, 1위인 2,182억 달러인 일본 다음이었다. 홍콩의 660억 달러가 합해진다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인 일본과도 거의 맞먹는다. 여기다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양안의 해빙 무드가 열리고 있던 타이완과, 싱가포르를 비롯한 동남아의 화교 경제권이 하나가 된다면 전 세계 무역량의 1/5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거대한 중화 경제권이 형성되는 것이다. 중국 언론들은 연일 "홍콩 반환은 용이 발톱을 세우는 기회가 될 것이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중국이라는 대형기관차에 홍콩이라는 고성능 로켓엔진을 장착시킨 격이다."라고 떠들었다.

흥분의 도가니인 중국과는 정반대로, 영국의 심기는 편치 않았다. 홍콩 투자액의 1위는 영국(2위는 중국)이었고, 홍콩의 금융과 부동산의 1/3은 영국계 자본이 장악하고 있었다. 영국의 한 언론은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홍콩섬을 쉽게 내준 이유는 원래 죄수들을 가두던 쓸모없는 유형지였기 때문이었다."라고 비꼬았다. 1984년 홍콩 반환 협정에 서명하는 자리에서 대처는 여전히 아니꼬운 표정으로 "우리는 홍콩에서 단 1페니도 가져 가지 않았다. 만약 중국이 홍콩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도 낙후된 시골 어촌이었을 것"이라며 홍콩의 번영이 전적으로 영국 덕분인양 말했다.

하지만, 대다수 홍콩인들은 인종차별적인 영국의 식민정책과 급변하는 중국 대륙의 정치적 상황에 끼인 채 고달픈 식민 생활을 겪어야 했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그 이후로도 수십만명의 난민들이 홍콩으로 끝없이 몰려들어 슬럼가를 형성하였다. 또한 영국인들로부터 온갖 모욕을 감수해야 했으며 1963년 반영 운동에서는 영국 경찰들의 발포로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홍콩의 발전은 영국의 "은혜"가 아니라 불간섭주의와 글로벌 경제의 호황에 운좋게 편승한 결과였다. 또한 영국이 무역 적자의 상당부분을 홍콩을 통해 보존했다는 점에서 대처의 말은 분명 어불성설이었다.

그렇다고 중국이 장담하듯, 홍콩의 미래가 과연 장미빛인가. 영국식 식민 통치보다 공산당 일당의 전제정치를 고수하는 중국식 통치가 더 낫다는 보장이 있는가.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중영 회담에서 ​중국은 "일국양제"라는 독특한 정치 체제를 제시하여 홍콩의 국방과 외교 외에 홍콩 내부에 대해서는 결코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대처는 덩샤오핑 앞에서 만약 중국이 약속을 어기고 홍콩의 내치에 중국이 관여할 경우 영국은 즉각 홍콩으로 되돌아 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물론 자존심 강한 대처의 마지막 고집일 뿐, 실제로 그럴 힘이 없다면 상대에게는 한낱 공허한 허세일 뿐이었다.

150여년의 식민 통치 동안 단 한번도 홍콩의 자치를 인정하지 않았던 영국은 반환을 앞두고서야 홍콩 의회에 해당하는 입법국에 대한 선거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600만명의 홍콩 인구 중에서 투표권을 가진 사람은 고작 7만명에 불과했다. 1985년 9월 26일 전체 60석의 의석 중에서 6명의 민선의원이 선출되었다. 홍콩 역사상 최초의 선거였다. 중국은 반발했다. 영국이 중국과의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직접 선거를 실시하는 것은 중국을 기만하는 것이라며 홍콩의 독립을 유도하려는 음모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영국은 오히려 행정부의 자문 역할에 불과했던 입법국의 권한을 강화하여 법률 제정과 행정부 견제의 역할을 부여하였다. 반환 2년을 앞둔 1995년에는 입법국 의석 60석 전체를 직접 선거로 선출케 하였다.

물론 중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기로 하고 1997년 3월 홍콩 입법국을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따라서 1995년에 선출된 의원들은 홍콩 반환과 함께 자동으로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이들은 기자들 앞에서 불만을 터뜨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중국은 홍콩에서 집회 결사의 자유를 금지시켰기에 만약 중국 정부의 결정에 반발한다면 그 자리에서 체포될 판이었다. 영국은 영국대로 홍콩 주민들과 중국의 갈등을 유발하고 어부지리를 얻겠다는 계산이었지만, 중국 역시 시작부터 홍콩 자치권 인정과 일국 양제의 원칙을 어긴 셈이었고 홍콩에서 서구식 민주주의를 실현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자국의 이익만 앞세운 영국과 중국 사이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홍콩인들이었다.

 

중국은 1990년 4월에 홍콩 기본법을 제정한 다음, 본토인 6명과 홍콩인 6명으로 구성된 12명의 기본법 위원회를 발족시켰다. 홍콩 기본법의 원칙은 홍콩에 최대한의 자치권을 보장하여 반환 이후에도 홍콩 주민들은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누리게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홍콩 기본법은 원칙만 있을 뿐, 추상적이고 모호하여 해석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홍콩 내정을 간섭할 수 있었다.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없었던 중국 정부가 말하는 "고도의 자치권"이란 어디까지나 그들이 정해놓은 범주에서만 허용되었다. 따라서 홍콩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중앙 정부만이 아니라 광둥성과 선전 시 등 지방 정부들조차 홍콩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생각으로 법의 모호함을 악용해 간섭에 나서는 판이었다.

1996년 11월 홍콩 초대 행정장관 선거가 실시되었다. 후보에 입후보하려면 중국 정부의 추천이 필요했다. 400명의 선거위원들에 의해 실시된 간접 선거에서 둥젠화(董建華) 전 동방해외그룹 회장이 320표를 받아 선출되었다. 임기는 5년이었다. 재벌 출신인 그는 홍콩이 상하이에서 태어났으며 장쩌민을 비롯한 중국 지도자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중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사실상 중국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이것이 "항인항치"를 약속했던 중국의 방식이었고, 홍콩인들 입장에서는 결국 영국인 총독에서 중국인 총독으로 바뀐 것에 불과했다. 중국의 홍콩 길들이기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 홍콩인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낙천적이었다. 홍콩「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1996년 10월에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낙관론자가 56%, 비관론자가 18%로 낙관론자들이 훨씬 우세했다. 한때 홍콩을 떠났던 사람들 중에서도 되돌아 오는 이들이 60% 이상이었다. 부동상 가격은 폭등했고 주가도 오르고 있었다. 영국의 식민 통치에 익숙한 홍콩인들은 어차피 민주주의 따위는 자신들과 상관이 없다고 여겼고 그보다 중국 특수를 통해 지금보다 더 큰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기대했던 것이다. 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정치가 아니라 돈이었다. 중국 정부가 지나친 간섭만 하지 않는다면 서로 갈등을 빚을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 1996년 12월 12일 초대 홍콩행정장관에 취임하는 둥젠화. 그는 중국 정부의 이익을 대변하기 급급하여 홍콩 주민들을 실망시켰고 홍콩 민주화를 탄압하다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결국 중도 사임하였다.  

온갖 시행 착오가 있었지만, 날짜는 점점 흘렀다. 어쨌든 칼자루를 쥔 쪽은 영국도, 홍콩도 아닌 중국이었다. ​반환 하루를 앞둔 1997년 6월 30일 중국 전역에서 홍콩 회수를 축하하는 대대적인 행사가 열렸다. 10억 중국인들이 이 역사적인 현장을 보기 위해 TV 앞에 모였고, 도로 곳곳이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또한 선전에 주둔하고 있던 홍콩 주둔군 선발부대가 출동하여 홍콩의 검문소를 통과하였다.


▲ 1996년 6월 30일 장쩌민 주석의 지시에 따라 홍콩으로 진입 중인 홍콩 주둔군 선발부대. 그 뒤를 이어 류전우(刘镇武) 소장이 지휘하는 6천여명의 주력부대와 10척의 군함, 헬기가 당일 오전 8시까지 주둔을 완료하여 영국군과 교대하였다.

▲ 6월 30일 밤 11시 50분 빅토리아 항에서 거행된 영국군과 중국군 간의 인수식.


홍콩 반환식은 홍콩섬 중심가 완차이(灣仔)의 컨벤션센터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밤 11시 59분, 영국 국가가 울러퍼지는 가운데 대회당 전면에 게양되어 있던 영국국기와 홍콩정청기가 내려왔다. 1분 뒤인 12시. 정확하게 자정에 맞추어 이번에는 중국국가가 울려 퍼지고 중화인민공화국 국기와 홍콩특별행정구 구기가 올라갔다.



중국 대표는 장쩌민 주석, 영국 대표는 찰스 왕세자와 말콤 리프킨드(Malcolm Rifkind) 외무장관이었다. 또한 마거릿 대처 전 수상도 참석하였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없었다. "죽기 전에 홍콩이 반환되는 것을 꼭 보고 싶다"라고 말했던 그는 지난 2월 19일 결국 서거하였다. 고작 4개월을 남긴 채.


장쩌민 중국 주석은 축사를 하면서 "역사는 일국양제라는 원대한 창조적 구상을 주창한 덩샤오핑 선생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로서 "동양의 진주" 홍콩은 155년만에 중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중국의 여의주"가 될지는 전적으로 중국에 달린 일이었다.

 

​▲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홍콩 반환을 경축하는 베이징 시민들.

▲ 1997년 7월 1일 0시,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설치된 대형전광판의 시계가 멈추자 일제히 환호하는 베이징 시민들.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장엄한 홍콩 반환식이 거행되었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24시간도 되지 않아 아시아 금융위기가 닥친 것이다. 중국으로 귀속하자 말자 벌어진 사건 치고는 홍콩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징조였다. 7월 2일 태국의 바트화가 폭락하면서 시작된 금융위기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동남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동안 고도 성장을 누리던 아시아 국가들은 하루 아침에 공황상태에 빠져 들었다. 미 달러 대비 화폐 가치는 50% 이상 폭락했다. 거의 1년치 GDP와 맞먹는 경제 손실을 입은 태국은 8월 11일 IMF로부터 172억 달러를, 인도네시아 역시 10월 30일 320억 달러의 금융구제를 받아야 했고 그 뒤를 이어 남한도 12월 3일 195억 달러를 빌려야 했다. 이 세 나라는 경제적으로도 심각한 타격을 받았을 뿐더러 정권 역시 국민의 극심한 불신을 산 채 교체되었다.

물론 홍콩도 비켜갈 수는 없었다. 국제 투기 자본들은 동아시아 최대의 금융 중심지인 타이완과 홍콩에 대해서도 맹렬하게 공격하였고 홍콩 증시는 10월 17일 13,601에서 23일 10,426으로 증시일 3일(공휴일 제외)만에 24%나 폭락하였다. 이른바 "검은 목요일"이라 불리운 28일에는 9,059까지 내려갔다. 톈안먼 사건 이래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는 홍콩 반환을 앞두고 "홍콩 특수"를 기대하고 중국 본토에서 막대한 투기 자본이 밀려온데다, 당장의 치적성 성과에만 눈이 먼 홍콩 당국과 중국 정부가 부추긴 탓이기도 했다. 홍콩 증시는 1996년 말 8천 포인트에서 홍콩 귀속 직후인 1997년 8월에는 두배로 뛰었다. 부동산도 폭등했다.

하지만 주변국가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둥젠화 행정부는 "홍콩 경제는 건실하다"라는 말만 반복하며 당장의 환율 방어에만 급급했을 뿐, 무대책으로 일관했다. 중국으로 귀속하자 말자 홍콩 경제가 침체되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증시와 부동산은 1년 만에 반토막이 났다. 뒤늦게야 도널드 창(曾蔭權) 재무장관은 "정부의 대응이 서툴렀다"라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경기 부양책을 추진했지만 실업률은 두배가 되었고 관광객은 1/4이나 감소했으며 1998년 경제 성장률은 -5.3%에 달했다. 그 와중에서 소멸된 홍콩 자산은 무려 3천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홍콩의 불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2003년에는 급성 호흡기 증후군(사스)가 홍콩을 휩쓸었다. 사스의 시발은 광둥성이었지만 지역 경제에 큰 타격이 될 지 모른다고 생각한 광둥성 정부가 은폐한 덕분에 피해는 고스란히 홍콩이 입었다. 1700명이 감염되어 300여명이 사망했다. 관광객이 급감하면서 경제 전반이 위축되어 2/4분기 경제성장률은 -0.5%였다. 경기가 악화되어 민심이 흉흉하자 둥젠화 행정부는 반성하고 개혁하기는 커녕 오히려 중앙 정부의 통제를 더욱 강화하는 "국가안전법"을 통과시키려고 했다. 50만명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돈이 최고라던 홍콩 주민들도 정치 없이는 돈도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결국 둥젠화는 사임했다.


2000년대 이후 홍콩 경제는 중앙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금씩 회복되기는 했지만, 연평균 두자리 성장을 이룩하는 본토는 물론이고 한국이나 싱가포르 등 다른 경쟁국들에 비하면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중국 정부는 "고도의 자치"는 고사하고 점점 홍콩을 옥죄려 하였다. 2012년에는 홍콩 초중고 역사 교육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강조하는 내용을 추가하려다 학생들의 강력한 반발에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이 강조했던 "일국양제"의 원칙에서 "일국"을 강조하는 중앙정부와 "양제"를 강조하는 홍콩의 민주세력의 갈등은 갈수록 첨예하다. 또한 중국 정부는 우산 혁명 등 홍콩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도 중앙 권력에 도전하는 반정부 운동이며 배후에 서방 세력이 있다며 비난한다.

▲ 자치 약속을 깨뜨리고 홍콩 행정장관을 중앙에서 임명하는 것에 반발해 직선제를 외치며 2014년 9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된 이른바 "우산혁명(Umbrella Revolution)" 한때 10만명 이상이 참여했지만 중국의 강력한 대응으로 진압당하고 말았다. 



또한 홍콩 전체 인구보다도 훨씬 많은 4천만명에 달하는 본토 유입인구와 관광객은 홍콩 경제에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부동산 폭등과 극심한 인플레이션만 유발했다. 날로 심해지는 빈부 격차, 서민들의 삶의 질 저하 등 홍콩인들 입장에서 중국 반환 이후의 삶은 결코 나아졌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점이 중앙 정부와 홍콩 주민들 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10억 중국인들에게 홍콩 회수는 그야말로 감격적인 순간이었을지 모르나, 600만 홍콩인들에게는 결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2013년에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홍콩 주민을 대상으로 온라인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91%가 영국 통치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답변하였다. 물론 온라인의 특성상 정확성은 의심스럽지만 홍콩 주민들의 불만을 보여주는 한 측면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설문조사에서도 홍콩인들은 스스로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20% 미만이고 중국계 홍콩인 또는 홍콩 주민으로 여기는 이들이 50% 이상이다.

홍콩이 중국의 품으로 돌아간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중앙 정부와 홍콩의 갈등은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이는 서로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비록 홍콩이 아편전쟁에서 강압적으로 서구 열강에게 빼앗겼던 중국의 영토이지만, 그 시간이 너무 길었다. 또한 1949년 이후 전혀 다른 체제에서 너무 오랫동안 단절되었다. 따라서 말이 같은 중국인 일뿐, 사실상 외국인이나 다름없다.

 

중국인들은 홍콩에 대해 그동안 중앙 정부가 제공하는 각종 특혜 아래에서 상당한 수혜를 누린 '시혜자'로 여긴다. 하지만 홍콩인들 입장에서는 말로는 "일국양제" 원칙에서 고도의 자치를 인정한다고 했으면서 실제로는 온갖 간섭을 일삼는다고 불만이 많다. 게다가 대륙에서 끝없이 유입되는 본토인과 본토 관광객들로 일자리를 빼앗기고 부동산 가격 폭등,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점도 서로의 골을 더욱 깊게 한다.

 

일국 양제를 놓고 양쪽의 견해 차이는 아주 크다. 중국 정부는 자신들이 허용하는 선에서 홍콩의 자치권을 최대한 보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중앙과 지방의 종속적인 관계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홍콩인은 영국인도, 중국인도 아닌 홍콩인이라는 사실이다. 권력이 고도로 집중되어 있는 사회주의 체제의 중앙 정부와 자본주의 체제의 홍콩특별행정구는 근본적으로 모순될 수밖에 없다. 덩샤오핑은 평화로운 홍콩 반환을 위해 국제 사회와 홍콩 주민들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일국양제"라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방안을 들고 나왔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공산주의 특유의 '일보후퇴 이보전진'식의 상투적인 방편임을 보여준 셈이 되었다.


말로는 "위민정치" "민본정치"를 외치면서도, 소수의 엘리트가 권력을 독점하고 선민사상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지난 수천년간 이어져 온 중국의 오랜 정치 철학이다. 21세기가 된 지금도 이런 사고에는 변화가 없다. 따라서 체제에 어떠한 변화나 도전에도 과도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한다. 결국 자신들의 기득권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현지 주민의 불만이 2014년의 이른바 "우산 혁명"으로 폭발하였다.


과연 홍콩이 앞으로 진정한 "중국의 여의주"가 될 것인가. 우선 중국 지도부부터 경제와 정치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려는 구태의연하고 경직된 태도부터 바꿔야 한다. 중국과 홍콩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중국식 가치관을 억지로 강요한다면 반발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지금처럼 보수적인 사고를 끝까지 고수한다면 중국이 말하는 "일국양제"란 허울 좋은 환상에 불과할 것이다.


ps. 원래 1편으로 간단하게 쓸려고 했던 것이 그야말로 홍콩 150년사가 된 느낌입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가깝고도 먼 중국입니다. 홍콩은 중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이지만 시중의 중국 관련 서적들에서도 제대로 다루지 않습니다. 부족하나마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흥미로운 주제로 계속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정작 국공내전사는 언제쯤 재개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