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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1/blog.daum.net/bluros

1. 전쟁의 배경

     

   577년 북주에서 양견이라는 인물이 나와 북중국을 중심으로 581년 수왕조를 개창하였다. 수는 이 여세를 몰아 10년도 안된 589년에는 남조의 진(陳)마저 병합하여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수는 외형적인 천하통일을 달성시킨 후 그 이름에 걸맞는 내면적이고도 실제적인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수 문제는 이를 위하여 노력한 인물로 후대에 이를 평하여 '개황의 치'라 부르고 있다. 당시 북방에서 돌궐의 힘이 강해지자 수는 이간책을 써서 돌궐을 분리시키는데 성공하였으며 서돌궐은 서역지역으로 물러나고 동돌궐은 수나라의 보호하에 수의 척후역할을 하고 있었다. 중국 통일왕조의 출현으로 고구려의 관심은 한반도의 한강 유역에서 만주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고구려는 581년부터 4년동안 해마다 사신을 파견하였고, 585년에는 남조의 진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수의 등장에 따른 정보수집 및 국제관계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였다. 이듬해인 586년에는 수도를 환도에서 장안성(長安城 : 평양)으로 옮겼다. 589년 수가 진을 멸망시키자 수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사를 정비하고 곡물을 비축하였다. 그리고 중국인 무기제조 기술자를 비밀리에 매수하여 병기를 수리하고, 수문제가 파견한 사신을 가두어 정보누설을 막았다. 또한 자주 국경지대에 기병을 파견하여 중국 변방인을 살해하며 불안의식을 높였으며 사신을 파견하여 비밀리에 정보를 수집하였다.

 

   고구려와 수와의 쟁패는 '요동확보'의 문제였다. 요동은 철 생산지로서 무기와 생산력 증강을 위한 전략적 위치였으며, 북과 서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을 제압하는데 용이한 군사적 이점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598년 영양왕은 강이식 장군을 고구려 병마도원수로 삼아 정병 5만의 병력을 이끌고 임유관(산해관)으로 향하게 하고, 먼저 말갈병 1만으로 요서를 침공해 들어갔다가, 수의 영주 총관 위충의 반격을 받고 일단 후퇴하였다. 고구려의 선제공격을 받고 크게 노한 수 문제는 동년 2월에 그의 넷째 아들인 한왕 양량을 원수로 임명하여 수륙 30만명으로 고구려를 정벌토록 하였다. 6월에 출발한 수나라 육군은 임유관을 나와 고구려로 진군하던 도중 요수에서 때마침 장마와 홍수를 만나게 되었다. 수나라 해군은 주라후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산동반도의 동래로부터 평양으로 쳐들어가는 것같이 보이게 하였지만 실은 군량보급선을 이끌고 요수에 이르러 임유관으로 나오는 육군에게 군량을 보급하기 위한 수송작전이었다.

  

  이와 같은 수의 계략을 미리 간파한 강이식 장군은 수군을 이끌고 해상으로 진출하여 수의 군량보급선을 급습, 이를 격파함으로써 수의 병참선을 절단시키고, 휘하 전군에게 군령을 내려 성벽을 굳게 지키고 수나라 군에게 대응치 않도록 하였다. 수나라 군은 군량이 다 떨어지고 때마침 장마를 맞아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군사가 속출하자 9월에는 군사를 거두어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수군을 수륙에서 추격하여 수군을 무찌르고 많은 군사장비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 때 죽은 군사가 10중 8, 9 였다고 한다.

  

  수의 고구려 원정의 기본전략은 전통적인 방법의 답습이었다. 첫째, 적을 압도할 수 있는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최종목표를 완전 포위공격한다. 강력한 군세에 압도된 적은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항복하게 될 것이며, 불응하면 강공하여 이를 점령하고 나아가 전원 포로로 하여 중국 내지에 사민시킨다. 둘째, 수륙합동작전을 최우선의 작전으로 한다. 고구려의 원정로는 3천여 리 이상이었으므로 군량의 보급이 큰 애로였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고구려의 성을 함락시켜 비축미를 노획하거나 후방에서 육로나 해로를 통해서 지원하는 것이었다. 해군의 활동은 군량미의 수송작전에 이용하였다. 또한 상대국이 전선에 병력을 투입함으로써 수도의 방비력이 소홀해진 틈에 최종목표를 공격하는데 있었다. 셋째, 속전속결을 원칙으로 한다. 양국의 주 전투지역은 요동지방으로 음력 6, 7월 사이가 우기이고, 또 8, 9월부터 다음해 2, 3월 까지는 동계시기였다. 장마와 대설이 작전과 수송 모두에 큰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작전은 동계가 끝나고 우기가 시작되기 이전의 2, 3개월의 짧은 시간에만 가능하였다.

  

  고구려는 견고하게 축성된 성을 거점으로 유사시에는 식량과 적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물자를 성안으로 가져가 수비하는 견벽청야(堅壁淸野) 전술을 수행하였다. 요하,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의 하천과 횡격실의 고지군은 방어에 유리한 점을 고구려에 제공해 주었으며 이 천연적인 방어벽과 인공적인 산성을 상호 연결하여 방어선을 설정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