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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3/blog.daum.net/bluros

2) 고구려 중심의 세계관

     평남 덕흥리에서 발견된 한 고분 벽화는 무척 흥미로운 사실을 전해준다.

 

 

 

13군 태수들이 유주 자사에게 인사드리는 모습. 연군태수, 범양태수, 어양태수, 상곡태수, 광령태수, 대군태수, 북평태수, 요서태수, 창려태수, 요동태수, 현도태수, 낙랑 태수, 대방태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3군이 유주에 속하며 거느리는 현은 75개이고, 유주의 소재지는 광계이며 지금의 소재지는 연국인데, 덕양으로부터 2, 3백리 떨어져 있다. 이 벽화를 통하여, 당시 광개토대왕 때 일시적이나마 고구려가 중국 화북 지방까지 점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 최무장, 임연철 편저, <고구려벽화고분>, 신선원, 1990, p306~p309

2) 이형구, <한국 고대문화의 기원>, 까치, 1991, p198



     이 무덤의 주인은 고구려의 진이란 사람이다. 그가 유주지역의 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13명의 부하태수들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데 그 태수들의 지역이 벽화 속에 정확히 기록 되어 있다. 벽화에 기록된 열세 지역은 모두 지금의 북경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이것은 5세기 초 고구려가 중국의 북경지역을 장악할 정도로 강성했다는 증거였다. 이때 고구려가 이렇게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중국이 대단히 혼란한 5호 16국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를 틈타 고구려가 중국에 진출하였던 것이다.

     또한 고구려 제 19대왕인 광개토대왕비를 통해 우리는 고구려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 고구려 사람들은 광개토왕을 가리켜, 왕중의 왕인 호태왕이라고 불렀다. 또 이 비석에는 끊임없는 정복 활동을 통해 대제국을 건설한 광개토왕의 업적이 화려하게 기록돼 있는데, 그런 광개토왕을 고구려 사람들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太王 恩澤 皇天 威武 四海"

태왕의 업적은 황천에 달하고 위력은 사해에 떨쳤다.


     함경남도의 한 절터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금동판에는 당시고구려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삼가 이 탑을 만들었으니, 5층으로 새기고 상륜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원하건대 왕의 신령이 도솔천으로 올라가 미륵을 뵙고 천손과 함께 만나 모든 생명이 경사스러움을 입게 하소서.....?화 3년 세차 병인 2월 26일 ?술 초하루에 기록한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천손'이라는 용어이다. 발해 문왕이 일본에 국서를 보내면서 스스로 '천손'이라고 일컫었는데, 중국이나 일본 학자들은 당시 당나라의 천자나 일본의 천황을 보고 발해가 모방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금동판이 증거가 되었고, 고구려 시대 때 만들어진 후 발해 시대에도 사용된 것이다. 발해 시대에는 최고 통치자를 '천손'이라고 불렀다는 점과, 발해 왕실이 고구려 왕실의 용어를 그대로 계승해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송기호<발해를 찾아서>,솔,1993,p.272-p.275


     고구려 유물에 나타난 기록, 태왕, 사해, 천손과 같은 말들은 바로 고구려가 천하를 지배하는 중심 국가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런 고구려에 비해 수나라는, 비록 중국을 통일했다고는 하나 나라를 세운지 겨우 17년에 불과했다. 그런 수나라가 고구려를 신하의 나라로 칭한 것을 고구려는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구려가 수나라 공격에 동원한 병력은 1만. 그것도 고구려의 정예 부대가 아닌 말갈군이었다.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작정을 하고 공격을 했다기보다는, 무력행동에 대한 의지를 보임으로써 수나라의 움직임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영주 지방을 선제공격한지 석달 만에, 수나라는 30만 대군을 조직해 대대적인 고구려 원정에 나선다. 그야말로 신속하기 이를 데 없는 대응이었다. 전쟁을 하기 위해 군사를 조직하고 각종 물자를 조달하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612년, 제 2차 전쟁 때 수나라의 양제는 고구려에 선전포고를 하고도 1년이 지나서야 실질적인 공격에 나섰다. 그런데 문제가 30만이라는 대군을 일으키는데 불과 석 달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것은 수나라가 이미 오래 전부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수나라의 문제는 왜, 고구려와의 전쟁을 원했던 것일까?



(3) 수 문제의 왕조의 정통성 확보

     분열돼있던 중국을 400년 만에 통일하는 업적을 이뤘지만, 문제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원래 북주의 왕 정제의 외할아버지였던 그는, 어린 나이의 정제를 대신해 실권을 휘두르다가 581년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때문에 집권 초기에는, 수많은 비판과 반란에 시달려야 했다. <자치통감>에는 문제의 등극과정에 대한 당시의 평가가 어땠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황제는 본래 공덕이 없는 사람으로, 천하를 사취하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문제는 신하들에게조차 황제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들 대부분이 북주 왕조에서 문제와 같은 서열에 있었기 때문에, 반감이 더욱 컸던 것이다. 당시 수나라의 명문 귀족 양소는 공공연하게 자신을 천자로 칭했다고 전한다. 당시의 귀족들 간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황제가 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것이다. 때문에 문제는,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통일왕조의 위엄을 과시하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 장안에 새로운 성을 건설한 것도, 이 같은 노력의 하나였다. 581년 수나라를 세우고 장안에 도읍한 문제는 이듬해부터 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지금은 장안성이라 불리는 대흥성이다. 수 문제는 북주에서 수를 세운 것을 혁명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새 수도를 지었다. 또 전국을 통일하고 국가가 번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옛 직함 대흥공을 따서 대흥성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또 문제는 594년, 서른 권에 이르는 <황수영감지>를 편찬하게 한다. <황수영감지>는 민간가요와 불경 등에서 신왕조의 정통화 논리를 추려 모으고 수나라의 정치적 이상을 집약해놓은 책이었다. 왕조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문제가 택한 또 하나의 방법은 대외 원정이었다. 수나라를 세운 이후, 문제는 돌궐, 거란 등과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다. 전쟁을 통해 왕조의 힘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의 신망을 얻고, 신하들을 통합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같은 대외 원정 사업의 마지막에, 고구려가 있었다. 수나라의 중국 통일 전까지 동아시아 최대의 강국으로 군림해온 나라 고구려를 정복한다면 수나라의 힘을 만천하에 과시할 수 있을 터였다.


당시에 고구려는 막강한 나라였다. 아직까지는 직접적인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돌궐이 이미 수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수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였던 셈이다.

- 왕소부 교수(북경대 사학과)


     이 같은 분위기에서, 수나라와 고구려의 일전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598년 6월, 고구려가 영주를 공격한지 석 달 만에 수 문제는 넷째아들 양량과 개국공신 고경 등을 지휘관으로 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한다. 병력의 수는 무려 30만! 국력을 총동원한 대공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