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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5/blog.daum.net/bluros

수양제의 정벌군은 3월 14일 요하에 도착하였다. 요하를 건넌 수양제가 요동성을 포위하자 고구려 군은 성문을 닫고 굳세게 수비하는 농성작전에 들어갔다.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항복을 가장하여 수군의 공세를 일단 완화시킨 다음 전투력을 재정비하여 다시 수군에 대항하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수의 장수들은 양제로부터 독단행위를 금한다는 명령을 받고 있었으므로 상황에 따른 적절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재량권이 부족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두세 차례 되풀이하면서 고구려 군은 거의 2개월 동안을 버티어냈다.


요동성 전투가 전개되는 동안 수의 해군은 총사령관 내호아의 지휘 아래 황해를 건너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612년 6월 고구려 군과 접전하게 되었다. 고구려 수군사령관 건무(建武 : 영양왕의 아우로 영류왕)는 수적으로 우세한 수의 해군과 정면대결을 피하고 유인작전으로 격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해전을 피하고 대동강을 거슬러 온 수군을 평양성 60리 밖에서 저지하다가 평양성으로 후퇴하면서 외성 안의 빈 절에 500여 명의 결사대를 매복시켜 지상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최초의 승리에 도취한 수의 해군은 정예병 4만 명을 선발하여 총사령관이 직접 지휘하는 해군만의 단독공격을 감행하였다. 고구려군은 별도로 1개 부대를 출동시켜 내호아의 공격군과 접전하면서 고의로 패주하였고, 이에 내호아 군은 패주하는 고구려 군을 추격하여 평양성 외성 안에 들어가 흩어져서 약탈을 자행하고 전리품 탈취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매복 중이던 고구려 군이 수군을 급습하였고 약탈에 정신이 팔린 수군은 기습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참패를 당한 수군은 철수하여 다시는 상륙작전을 감행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수의 육군이 오기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수 양제는 요동 전선의 교착과 수군의 결정적 패배로 고구려에 대한 수륙협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구려 수도 함락을 생각하게 되었다.


좌·우 24개 군 가운데 후방 예비대 9개 군으로 평양을 직접 공격하는 별동부대를 편성하였다. 이 예비대는 전투로 인한 손실을 입지 않아 결정적 시기에 작전에 투입시키려는 최정예 부대였다. 별동대의 총사령관은 우문술이었고 총 병력은 30만 5천 명에 달하였다. 군량의 현지 조달이 불가능할 것을 예상하여 요서를 출발할 때 병사와 군마가 각자 1백일 동안 먹을 식량과 무기 및 천막 등을 한꺼번에 지급받는 바람에 1인당 3석에 해당하는 무게가 되었다. "식량을 버리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목을 벤다."고 엄명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식량을 몰래 버리는 사례가 속출되어 압록강변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군량이 거의 바닥난 실정이었다. 고구려에서는 적정을 살피기 위해서 을지문덕이 거짓으로 항복의사를 밝히고 적진에 들어갔다. 출정 당시 양제가 "만약에 고구려 왕이나 을지문덕이 오면 즉시 사로잡아라."고 하였으므로 곧바로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위무사 유사룡이 굳이 이를 반대하므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우중문은 곧 후회하여 추격하자고 했으나 우문술은 군량이 거의 떨어진 상태이므로 철군할 생각이었는데 우중문이 노하여 말하기를 "장군은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능히 소적을 격파하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대하시겠소!" 하고 질책하였다. 처음에 양제는 우중문의 지략이 뛰어나다 하여 전군의 지휘관에게 그의 명령을 받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지휘권만이 우문술에게 있었으며 실제적인 작전 지휘권은 우중문에게 줌으로써 일사불란한 지휘권을 운영하지 못하고 나아가 두 지휘관의 불화마저도 노출되고 있었다. 우문술이 부득이 그의 의견을 좇아 압록강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하기 시작하였으나, 을지문덕은 우문술의 군사들이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알고 수군을 더욱 지치게 만들기 위해 접전할 때마다 고의로 패주하는 후퇴작전을 전개하였다. 우문술군은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 번번이 승리하자 승리에 도취되어 계속 추격, 살수(撒水:청천강)를 건너 평양성 밖 30리 지점에서 산을 의지하여 영채를 설치하였다. 이때 을지문덕은 적장 우중문을 조롱하는 시 한수를 지어 보냈다.


神策究天文 그대의 신기한 전략은 천문을 알았고,

妙算窮地理 기묘한 계책은 지리를 통달했네.

戰勝功旣高 싸움에 이겨 공은 이미 높았거든,

知足願云止 만족할 줄 알아 이제 그만 그치시오.


이에 우중문도 답서를 보내어 항복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자 을지문덕은 거짓 항복의 뜻을 전하였다. 고구려 군이 성벽에 항복의 깃발을 세워놓고 "5일 말미를 주면 국가의 문서를 정리해 가지고 나가서 따르겠다." 하기에 수군은 공격을 중지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5일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 거듭 독촉했더니, 다시 10여 일이 지나 고구려군은 "내호아의 수군도 참패당하고 식량도 바닥이 났을 터인데 그대들은 무엇을 바라고 또 기다리는가?" 하더니 요해지를 점거하여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우문술군은 고구려의 전략에 말려들었음을 깨닫고 철군을 단행하였다.


우문술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방진(方陣)대형으로 행군하였다. 수군은 싸우면서 퇴각하여 동년 7월 24일 살수에 도착하였다. 병력이 절반쯤 도강했을 무렵, 고구려군은 도하중인 수군의 후면을 급습하였다. 그리하여 수나라의 전군은 일시에 무너졌고 산산이 흩어져 도망하고 말았다. 결국 퇴각 끝에 요동에 귀환한 병력은 겨우 2,700명이었으며, 병기와 장비를 비롯하여 기타 군수품 일체를 모조리 읿어버렸다.


내호아의 수군은 8월 중순경에 우문술의 육군이 참패당했다는 소식과 귀국명령을 듣고서 함대를 이끌고 본국으로 퇴각하였으며, 8월 25일에는 크게 진노한 수 양제가 총사령과 우문술을 위시해서 패전한 장수 전원을 결박해 가지고 귀국길에 올랐다. 우문술은 그의 아들 우문사급이 양제의 딸 남양공주의 사위라는 인연으로 죽음만은 면해서 서인이 되었다. 장군 우중문은 패전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지고 옥중에서 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