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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6 /blog.daum.net/bluros

수 양제는 제 1차 전쟁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하여 이듬해인 613년 정월 2일 조칙을 내려 천하의 군사를 모두 징발하여 탁군에 집결시키고 요동에 있는 옛 성을 수리하여 군량을 저장하게 하였다. 1차전의 패전책임으로 폐서인이 된 우문술을 재등용하여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준다는 뜻에서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2차전의 작전계획은 기본적으로 1차전과 동일하여 육군과 해군이 공동으로 평양성을 협공하는 것이었지만 1차전의 작전과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었다.


첫째, 평양성 직접공격과 함께 이 공격로 선상에 있는 고구려의 각 성을 각개 격파하는 작전이었다. 이는 공격 시에는 안전한 병참선을 확보하고 후퇴 시에는 안전한 퇴각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둘째, 일선 지휘관들에게 상황에 따라 적절히 처리할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하였다. 셋째, 고구려의 장점이 산성에 의존하는 청야입보 전술임을 간파하여 고구려의 성을 함락시킬 수 있는 특수 장비와 특수 인원을 준비하였다. 특수인원은 건장한 인원 중에서 엄선된 자원병으로 특수부대를 편성, 특수 임무시 동원하였고, 특수 장비로는 비루당(飛樓糖), 운제(雲梯), 충제(衝梯), 지도(地道)와 같은 공성무기를 총동원하였다. 비루당은 성 안을 탐지하거나 공격할 수 있는 다락을 얹은 수레로 그 위에 높은 사다리를 걸어놓았으며, 운제는 성을 오르는 데 사용하는 사다리, 충제는 성안을 들여다보고 공격할 수 있는 15장(丈)이나 되는 장대이며, 지도는 성벽 밑으로 땅굴을 파는 장비였다. 넷째로 육군은 고구려 공격로를 2개로 선택하였다. 한 공격로는 부여도를 거쳐 신성(新城: 요녕성 무순)을 공격하며, 다른 공격로는 요동성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해군은 단독행동을 금지하고 육군과 평양성 수륙공진을 위해 출동 대기상태로 준비시켰다.


수군은 3월 4일 동경인 낙양을 출발하여 4월에 요하를 건넜다. 우문술이 지휘하는 수군은 공성무기를 총동원하여 요동성을 효과적으로 공략하였으나 2개월이 지나도록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에 새로운 공성무기인 누거(樓車)를 만들어 진격하려고 할 찰나 중국 본토에서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급보를 받게 되었다. 이에 병부시랑(兵部侍郞:국방차관) 곡사정이 평소부터 양현감과 교분이 두터웠던 관계로 불안한 나머지 고구려로 망명하고 말았다. 반란보고를 받은 수양제는 5월 28일 군대를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고구려군은 망명해 온 곡사정의 제보로 수군이 퇴각한 것을 알았지만 유인작전의 가능성으로 즉시 추격하지 못하다가 2일이 지난 후 비로소 수천 명으로 철수하는 수나라 군대의 후미부대를 공격하여 수천 명을 사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