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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8-결산/blog.daum.net/bluros

고구려와 수나라는 598년의 임유관 전투로부터 614년의 수 양제의 3차 전쟁에 이르기까지 17년 동안 네 차례의 전쟁을 치렀다. 막강한 국력을 기반으로 한 수의 군사력에 비해서 고구려의 군사력은 상대적으로 열세하였다. 수나라군은 수적인 절대적 우세와 고구려 군에 못지않은 정예병을 동원시키고도, 수나라군의 장점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지 못함으로써 전쟁에서 매번 패하고 말았다.


수의 패전 원인은 첫째, 작전지휘계통의 확립을 소홀하게 한 점이었다. 일선 지휘관에게 작전에 필요한 권한을 위임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앙 통제식으로 작전을 지휘함으로써 결정적인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또한 지휘권을 위임하는 경우에도 그것을 양분시킴으로써 지휘의 통일을 기하지 못하고 전투력의 분산을 자초하고 말았다.


둘째, 병참보급의 지원이 원활하지 못했다. 대규모 병력에 필요한 군량을 장거리에 걸쳐 지원하는 수송 작전은 전쟁수행과 직결된 문제였다. 수나라는 사전에 대운하를 이용, 군량을 전진기지에 비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군량을 전선에 보급하는데 있어 함선과 같은 대량운송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수레와 같은 소규모 수단에 의존함으로써 단기작전 위주로 전쟁을 수행하였다. 고구려군의 청야입보 전술은 수군에게 군량의 현지조달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군량부족은 수나라 패배의 큰 원인이었다.


이에 반해 고구려의 승리 요인 중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견고한 산성 축조술의 발달이다. 대체로 성을 단위로 한 고구려의 지방행정능력은 고도로 발달하여 평·전시를 막론하고 주민통제가 철저했다. 게다가 오랜 전쟁경험을 토대로 군사요충지에 견고한 성을 구축하고 전쟁에 대비해 식량과 군수물자를 항상 비축하고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백암성 성벽은 높이가 높은 성벽 4~10미터, 원래의 높이는 15미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릉지역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구축한 백암성은 가장 높은 곳에 총 지휘소인 장대를 설치했다. 성 내부는 반 구릉 지대로 한쪽 면은 태자하를 끼고 있고 그 안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백암성의 다른 한쪽은 200미터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고구려의 성은 이렇게 최대한 자연지형을 이용했던 것이다. 고구려의 성은 축성법도 독특했다. 성벽아래는 마치 계단처럼 차곡차곡 안으로 돌을 들여 쌓고 있었다. 성벽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튼튼한 기초를 만드는 것이다. 성벽을 넘어오는 적군을 공격하기 위해 고구려 성은 독특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 대표적인 시설이 바로 치. 백암성은 60미터 간격으로 거대한 치가 설치돼 있는데, 치의 간격은 화살이 미치는 사정거리를 정확히 계산한 것이다. 적군이 성벽을 오르면 고구려 군은 곧바로 공격에 나선다. 치가 설치된 성에서는 세 방향에서의 공격이 가능하다. 성문 진입이 어렵다는 점도 고구려성의 특징이다. 성문은 반원형 성벽으로 감싸여 있고, 그 안에 들어온 적군은 꼼짝없이 갇힌 채 화살공격을 받게 된다.


이 산성들을 중심으로 대중국 방어선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제 1방어선은 요하 유역과 요동반도 남단에서 동북으로 뻗은 천산산맥 방어선이었다. 요서 10성, 무려라성, 요동성, 신성, 안시성, 건안성 등이 대표적인 산성들이다.


제 2방어선은 압록강 선상의 산성들로 수도로 침입하는 적들을 막을 뿐 아니라 적극적인 공격으로 전환하여 적을 공격하기 위한 전략적 목적에 이용된 산성들이었다. 오골성, 박작성, 오녀산성, 위나암성, 백마산성, 국내성 등이 대표적인 산성들이었다.


제 3방어선은 수도방위를 위한 산성이었다. 평양의 대성산성은 내성, 외성, 나성의 3중으로 견고한 성곽을 축조하여 최후의 방어선으로 저항하였다.


둘째로는 우수한 군사전술을 들 수 있다. 고구려가 산성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것이 청야수성전술이었다. 고구려는 수성전술뿐만 아니라 적의 본거지를 날랜 말로 달려 치는 원거리 기동습격전도 감행하였다. 또한 평상시 첩보전술을 통해 적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획득하여 전쟁에 대비하였고 위기의 상황에서는 임기응변적인 기만전술을 사용하여 위기를 극복하였다. 셋째, 고구려는 전쟁에 대비해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고구려는 요동과 한강 유역의 2개의 전선을 회피하기 위해서 백제 및 신라와 적절한 동맹을 맺어 남방전선을 안심시켰다. 수나라와의 관계에서도 화·전 양면정책을 추진하여 전쟁을 위한 방비책을 준비하였다. 넷째로 군사 지휘관들의 탁월한 작전 지휘능력을 꼽을 수 있다. 각 성의 성주는 관할지역내의 작전에 독립된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어서 전황의 추이에 시기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고구려의 일반 민은 군과 다름없이 말타기, 활쏘기 등과 같은 기술에 숙달되어 있었다. 험준한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한 고구려인은 생활수단이 대부분 수렵활동이었으므로 그와 같은 기술에 잘 숙달되어 있어 유사시 단결된 힘을 발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