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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rebornbark.blog.me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한국전쟁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으로 유명한 책이다.

수정주의적 시각이라함은 한국전쟁의 기원을 파악함에 있어서

민족의 이념적 대립보다 세계적 이념대립의 한 표출로서 한국전쟁을 파악하고

전쟁의 주원인이 미소에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머리말에서 자신의 집필동기를 분명히 밝힌다.

"나는 한국전쟁의 원인은 주로 1945년에서 1950년 사이의 사건에서 찾아야 하며,

그 다음으로는 식민통치기간 동안 한국에 부과된 외부세력과

그것이 전후의 한국에 남긴 독특한 자취에서 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인들이 미소의 분쟁에서 어느 한쪽을 택했다기보다

미국과 소련이 각기 한국의 기존 분열에 가담하여

한편을 억압하면서 다른 한편을 지원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이 책에는 1947년 정도까지의 일들만 담고, 추후의 것들은 2권에 실었는데

2권은 아직까지 국내에 소개된 역서가 없는 것으로 안다.

 

한총련과 같은 민족통일을 주장하는 학생운동 단체를 비롯해서

분단을 한국적 모순의 기원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그 자체로 충분히 근거가 있으며 일리있는 시각이다.

실제로 미군이 통치하면서 친일파의 청산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 후예들이 여전히 사회의 주류로 남아있으면서

무엇이 옳은가보다 무엇이 강한가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이다.

(올해 대선에서 이 가치관은 너무도 명백하게 드러났다.)

한겨레 신문을 창간한 언론인 송건호도 이 책의 발간축하사에서

한국전쟁, 크게는 한국현대사에 대한 관심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이 관심(한국현대사에 대한)은 단순히 역사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오늘의 한국 현실에 대한 근원적인 원인을 밝혀보고자 하는

보다 더 민족적 자각의 한 발현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흥미 자체는 때로 역사학의 존재이유를 넘어설 정도지만,

이것이 가진 반성과 미래지향적 성격 자체로 역사학은 의미있는 학문이다.

 

저자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분석함에 있어

일제식민통치와 해방정국의 민족해방의 움직임,

미군 점령 하의 중앙과 지방정치를 통하고 있다.

먼저, 일제 식민통치가 준 영향을 보는데, 결론적으로 얘기한다면

일제의 토지수탈로 유출된 인구는 이후 해방기의 동력이 되며

일제는 새한국의 발목을 잡을 거대한 관료제도를 유산으로 남겼고

한인끼리를 갈라놓는 지배정책을 통해 분열의 기초를 만들었다.

이 글에서 일본의 식민통치가 어떠했다는 등의 가치평가를 함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식민통치가 한국의 무엇을 변화시켰으며

변화시킨 부분 중 한국전쟁의 기원과 맞닿아 있는 모습만을 살피면 되는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면서,

해방에 대한 감동과 함께 찾아온 것은 치안의 공백과 경제적 불안정이었다.

일인들은 귀순하면서 자신들이 가진 재산을 현금화하고

기존 통화량의 60%에 이르는 화폐를 추가 발행해서 한국경제를 위기에 빠뜨렸다.

이 해결을 위해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였다.

일제가 물러가면서 석방된 수만명의 한인들은 건준을 만들어가는 인적인프라였다.

이 자발적 흐름을 방해한 것은 미군의 등장이었는데

사실 당시 미군은 한반도에 있지도 않았고, 항복선언 3주 후에야 한국에 투입될 수 있었다.

여운형, 허헌 등 건준의 주요인사들은 미군진주의 의미를 알았기에

좌익, 우익, 민족주의자를 막론한 인민공화국의 내각을 발표한다.

이 인민공화국은 대중적 정치참여의 열기를 그대로 안은 것이었다.

저자는 당시 인공이 떨쳤던 위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외국의 간섭이 없었더라면 인공과 그 산하조직들이

불과 수개월 사이에 반도 전역에 걸쳐서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었던 한국의 지주층들은

미군의 점령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게 된다.

"인공과 같은 적극적이고 호소력 있는 강령, 그것의 보다 우월한 조직력,

한인들 사이에서 지지자를 확보하는 기회 따위를 갖지 못했던 한민당으로서는

진주하는 외국세력에 의존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이윽고 귀국한 이승만은 미국의 지지를 받는 한민당이 필요했고

치명적인 부일경력을 갖고 있는 한민당은 이승만의 독립운동가로서의 명성이 필요했기에

이들은 서로의 결점을 알면서도 너무나 노리는 바가 뻔한 야합을 하게 된다.

저자는 이승만을 평가하면서 그는 평생 이승만 운동이라는 한가지에 종사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국내의 전개와 함께 국외의 한국문제도 숨가쁘게 흘러갔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는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발표한다.

재미있는 것은 루즈벨트가 수정하기 전 이  선언문의 초록에는

'가능한 한 가장 빠른 시간에'라고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한국 개입은 소련을 다분히 의식한 것이었다.

9월 하순으로 결정되었던 진주일이 소련의 신속한 진격 때문에 9월 초순으로 당겨졌다.

이 당시의 미국의 움직임이 이념때문인지,

아니면 국제사회의 영향력 쟁취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당시 어느쪽이었건 이후 한반도 내에서 미국의 움직임은

전자의 성격을 강하게 띄고 나타난다.

"미점령군이 보기에 한국인들은 준적국민으로 변한 반면 일본인들은 벗으로 변했다.

이것은 전시의 동맹국인 소련에 대한 평가의 변화가

한국에 대한 미국의 관념 및 점령과 지배의 긴요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소련과 그들의 한인 동맹자들은 1945년 가을, 북한에서 철저한 숙청작업을 단행했다.

이것이 남한에 던지는 암시는 분명했으며

북에서 쫓겨난 부일관료들의 남하는 이런 감각을 더욱 강화시켰다."

 

요즘은 미군이 점령군으로서 한반도에 발을 디뎠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은 맥아더포고문 하나만 봐도 분명한 사실인데,

점령군 사령부는 여운형의 인공을 부정적으로 생각했으며

그들이 만든 11인의 고문회의에 여운형이 참가를 거부하자

인공을 비난하는 성명을 각 일간지 1면에 게재토록 요구하기도 했다.

"남한 언론인의 거의 전체가 이 성명을 비난했으며 매일신문은 그 게재를 거절했다."

(위의 11명은 여운형과 남한에 있지도 않았던 조만식을 제외하면 전원이 한민당원이었다.

여운형은 이를 모르고 회의에 참가했다가 구성원들을 보고 나가버렸다고 한다.)

 

일제가 남긴 유산 중 의미있는 하나가 바로 과도한 경찰력이었다.

미군사관들에 따르면

"재한 일본경찰이 지니고 있는 기능과 권력의 범위는

현대세계의 국가들에서는 거의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라고 한다.

문제는 이 경찰력이 일부만 대체되고 식민경찰 출신이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1946년의 통계에 따르면 경위급 이상 중에 82%가 식민경찰 출신이었다.

또한 국군의 모태가 된 국방경비대의 창설에 있어서도

미군은 일인들에 의한 투옥경력이 없는 자여야 한다고 규정하여

경비대와 그 후신인 한국군은 일본군 배경을 가진 장교들의 영역이 되었다.

관동군 출신의 박정희의 예는 이제 놀랍지도 않은 이야기다.

 

이쯤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인데,

3*1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건설되면서 한국인들에게

광복에 대한 희망적 메시지는 정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임정을 인정한 세계정부는 손문의 관동정부 밖에 없었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는 '패전국의 식민지에 대한'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되어 있었다.

사실 임정은 1923년의 국민대표회의 이후에 그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정이 갖는 독립운동의 상징성은 여전했다.

"웜스에 따르면 임정은 한국운동의 신적 존재이며

임정의 귀국은 지도자와 인민이 현명하고 애국적으로 행동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미군은 애초에 어떤 정부나 준비위원회도 인정하지 않았고

이는 임정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임정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

 

1926년부터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는 매우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만약 좌파를 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통일을 이룩할 수 없을 것이다."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가장 저명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를 유명케 한 것은 불도저 같은 추진력도 한몫했는데 이에 관한 재미있는 사례가 많다.

첫째로 김구를 유명하게 한 것은 '김창수'시절에 일본군 중위를 살해한 것이다.

이 사건은 백범일지를 참고해도 좋을 듯 하다.

둘째사건은 1923년의 일이다. 박은식이 임정에 사실상의 사형선고를 내리자

김구와 여운형은 박은식을 이완용보다 더한 매국노라고 매도했다.

이에 박은식의 아들 박시창이 항의하자 김구가 그를 구타하여 갈비뼈를 부러뜨렸다.

박은식 일파는 만만하고 사람좋은 여운형을 보복으로 집단 구타한다.

셋째는 김구의 짓인지 분명친 않으나 정황상 김구의 것으로 추측되는 송진우 살해의 건이다.

신탁통치문제를 놓고 김구와 송진우의 회견이 있던 다음날,

친탁을 주장하던 송진우는 변사체로 발견되는데 정확한 물증은 없다.

위의 세 사건은 김구가 일을 행하는데 있어 상당히 저돌적이며 적극적임을 보여준다.

후에 하지는 김구를 정무위원회의 명목적 수반으로 내세우려다 실패하게 되는데,

저자는 이 사건을 이렇게 표현한다.

"하지의 고기국에 필요했던 소금이 너무나 진했던 것이다."

 

다시 해방정국기로 돌아가면,

1945년 2월에 열린 미소공동위원회는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후속이었다.

까닭에 소련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반대한 단체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좌익측은 소련의 노선에 따라 삼상회의 찬성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며,

미국은 이에 반대하는 우익의 힘을 업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동위원회의 미국측 정치고문위원이 작성한 비망록은 미국의 입장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장시간 동안 소련의 지배에 항거할 수 있는

독립되고, 민주적이며, 안정적인 한국정부를 낳는 것이다."

 

"인민위원회는 특히 서울에 있는 그들의 반대파가 갖지 못한 모든 이점을 다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대중적 지지, 현지정세에 대한 인식, 대중적 통신형태의 장악,

불평에 알맞는 강령, 그리고-아마 가장 중요한 것으로-선착했다는 이점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위 글에서 알 수있듯 지방에서 인민위원회의 활약은 놀라운 것이었다.

인공 출신인 이강국의 통계에 따르면

13개 도지부와 31개 시지부, 220개 군지부, 2282개 마을단위지부가 존재했다고 한다.

지방의 인민위원회에 있어 지리적 접근성은 매우 중요했는데,

미군이 주둔한 뒤로도 접근이 어려운 곳은 오래도록 인민위원회의 통치가 유지되었다.

제주도의 경우 미군정 3년간 인민위원회가 통치했다.

 

인민위원회가 강세였던 지역에서 1946년 가을 추수봉기가 발생한다.

체포된 성주군의 군중들은

"우리는 우리나라가 미국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미국의 양곡공출은 과거 일본인들의 방식보다도 더 잔인하다."라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듯

이것은 미군정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다.

당시 한국의 경제는 1년 사이(46년 2월~47년 2월)에

주식인 쌀의 가격이 7배 이상 보리의 가격이 6배 이상 뛸 정도로 민중들에게 가혹했다.

그러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가고 그 진압과정에서 인민위원회는 그 힘을 잃고

우파와 국립경찰들은 그 영향력을 강화하게 된다.

 

한편 38선 위의 북한의 변화는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해방 후 9개월 내에 지주제도는 사라졌으며 토지는 재분배되었다.

주요 산업들은 국유화되었으며 철저한 개혁은 식민적 공장제도를 청산하였고,

여성의 평등이 확립되었다."

또한 북한의 행정은 예상보다 훨씬 소련으로부터 자주적인 것이었다.

"월남자들은 모두 소련인들은 지방행정에 관여하지 않았다라는 견해를 보였다."

그러나 이와 함께 모순적인 모습들도 나타났는데 바로 1인 독재의 징후였다.

"토지개혁에 뒤이어 토지를 주어 '고맙습니다. 김일성'하는 식의 표어가 도처에 나붙어

마치 자비로운 영도자가 모든 토지를 나누어 주기나 한 것처럼 선전하였다."

저자는 이 독재의 등장을 이렇게 평가한다.

"만주에서의 항일운동의 용감한 활약에서 수천 명이

생명과 건강과 정신과 역사에서의 지위를 희생당한 데 비하여,

오늘날 북한에서는 이 모든 사람의 공적을 이 억세게 운이 좋았던

생존자 한 사람에게만 돌리고 있음은 하나의 슬픈 풍자적 운명이다."

 

"불가피하다고 생각될 경우에 참고 견디던 악이

일단 도피의 가능성이 보였을 경우에는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변한다." -알렉스 드 토크빌

"사회적 유동은 불평등을 깨닫게 하고 따라서 이에 불만을 갖게 만든다.

새로운 관념의 도입은 재래식 분배의 합법성을 문제삼게 만든다." -사뮤엘 헌팅턴

위에서 인용된 두 문장과 같이 사람의 현재인식은 상대적이다.

자신의 현재가 보잘것 없어 보이는 것은 자신보다 나아보이는 사람의 현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체감적 빈부격차가 유독 심한 것은 그것이 더욱 심화된것 자체도 있지만

매체의 발달로 인해 격차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큰 원인일 것이다.

광복은 분명 더 많은 상대적인 가능성들을 해방된 국민들에게 틔워 주었다.

그러나 정치적 해방 이후, 제 2의 혁명, 즉 사회적 해방에 실패한 것은

분명히 현대사에서 가장 아쉬운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책이 길고 분야별로 쓰여있어 서평을 쓰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책에서 명백하게 서술된 일본에서 미국으로의 권력이양을 잘 못 짚어낸게 아쉽다.

끝으로 지금의 눈으로 보면 신기한 당시의 지역적 상황 몇가지를 소개한다.

"당시 가장 반항적이었던 지역은 경북 및 경남이었다."

"1946년 당시 전남의 인구는 290만으로 경북과 경남의 310만에 이은 전국 3위였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전남의 문자습득률은 전국 최저였다.

이것은 전남에 상대적으로 향교와 서원 등이 부족한 이유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민당의 주류는 막대한 토지에 근거해 부를 축적한 호남출신이었다."

"경남은 일본으로부터 귀환하는 한인들이 많아 가장 근대적인 지역이었다."

"미군은 충북을 남한에서 우익이 가장 우세한 도라고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