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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 한국전쟁의 기원 그리고 전쟁전야 - 한국현대사 14 >/blg.naver.com/hy2oxy

< 한국전쟁의 기원 그리고 전쟁전야 - 한국현대사 14 >

 

"1949년 상반기까지 남한 전역 133개 군 중에서 118개 군에 결성된 유격전구의 유격대는 하반기 동안 수십 만명의 병력으로 친일파 군경과 7천 여회의 전투를 치뤘다.

유격대는 한겨울에 친일 군경 토벌대의 보복공격을 버텨낸 후 1950년 3월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4월 한달 동안 전투회수 3천 여회에 참가인원은 6만5천 명에 달했다.

 

1950년 상반기에 남한 내의 유격투쟁은 미군정의 지지,지원을 등에 엎은 이승만 정권의 무차별 공격에 많은 역량이 파괴되고 인명이 희생되는 등 군사적으로는 패배하였으나 정치적으로 승리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지지세력이 불과 30석 밖에 당선되지 못했고 대미 자주노선와 평화적 협상에 의한 남북통일을 주장하는 진보적 인사들은 130여 명이 대거 당선된 것이다.

미군정에 의해 수립된 식민지 정권이자 친일 매국노로 구성된 이승만 정권은 어느모로 보나 극도로 고립되어 있었고 또한 파멸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상태로 계속 갔으면 이승만 정권은 조만간 붕괴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연찮게도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즉시 미군의 대규모 군사개입이 진행됨으로써 가까스로 위기에서 구출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구체적인 것은 확인할 수 없지만, 이승만 정권의 치명적 위기 상태와 한국전쟁의 발발 시기 사이에는 일정한 연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p.167~169)

 

"1949년 한 해 동안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지역에서는 역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 일대 사건들이 계속 발생한다.

소련은 핵무기 실험에 성공했고 중국 대륙에서는 미국의 앞잡이 장개석이 쫒겨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었다. 베트남에서도 프랑스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동맹국들에게 외교와 무역을 금지시키고 중국의 유엔가입도 막았다. 동시에 미국은 '패전국인 일본을 아시아의 후방 병참기지로 전환시키고 한반도, 대만, 베트남을 각자 군사적 진공을 위한 교두보로 삼으며 최종적으로 중국 대륙의 회복을 목표로 한다'는 전략방침을 수립하였다.[1960년대, 김성환 역] 따라서 베트남 전쟁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49년 중반기부터 1950년 초반 사이에 일본에서는 심상치 않은 상황이 진행되었다.

우선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에 대해 재차 전투태세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다. 전투사단의 본격적인 훈련 돌입과 함께 일본에 설치되어 있는 미군의 군사기지에 대한 대폭적인 시설 확충, 보수사업이 진행되었다. 이 시설확충으로 미군은 한국전쟁 발발 후 폭격기 등의 급격한 증파가 있었음애도 새로운 공군기지를 설립할 필요가 없었다. 제2차 새계대전 후 태평양 각지에 흩어져 있는 차량, 병기, 탄약 등 비축무기를 일본공장에서 재생하였다. 또한 일본 국회를 움직여 일본인의 조세를 군수품 생산으로 전환시킬 수 있도록 하는 '대충자금 특별회계법'을 통과시켜 일본의 군수산업을 재생시켰다.

 

'(한국전쟁 때) 미국 비행기는 일본 비행장을 이륙하여, 닛산 모터와 라이센스 하에 제조된 이시데키 회사의 네이팜탄읓 한국에 떨어뜨렸다. 미국 대포는 방대한 양의 일제 포탄을 쏘아대고, 미국의 7함대는 일본항을 출발하여 한국 해안선에 근 3년간 포격을 퍼부었다'

 

또 다른 한편에서 미국은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기 위한 정치적 조치들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먼저 일본의 군국주의적 망령을 부활시키고자 기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들을 교도소에서 석방시킨 후 미군의 자문단과 군수산업 부활, 군국주의적 정치에 부활을 위해 투입하였다.

일제의 전범들은 한국전쟁 발발 후 미군이 한반도에 폭탄을 투하하거나 전략,전술을 수립하고 전투를 전개하는 데 필요한 모든 군사 정보와 기록을 3년간 미군에게 재공했다. 미군의 자문관으로서 돈을 받으면서...

 

1945년 일본열도를 점령한 미국은 원래부터 대부분 강제 징용이나 노역, 빈곤으로 인해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240만명)을 학대하고 무시했다. 미군정은 일본 항복 후 한반도로 되돌아 가려는 조선인들에게 그동안 피땀흘려 벌어놓은 재산을 포기할 것을 강제한 후 몰수했다.[연표힌국현대사, 김천영]

그리고 1949년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 조직들을 강제 해체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간부들을 추방했다.

 

미군정은 1950년 6월 초 일본의 병참기지화를 반대하는 일본공산당을 불법화 조치했다. 뒤이어 동경 시내에서의 모든 공개집회와 시위를 금지하는 비상계엄령을 발동하고, 24명의 공산당 간부와 당 기관지 편집인을 추방했으며, 1만2천명의 노조원과 공무원을 정치적인 이유로 해직시켰다.

미군정은 한국전쟁 발발 9일 전인 1950년 6월 16일 전 일본 지역에 일체의 공개집회와 시위를 금지시키고 전시동원체제에 착수하였다.[1960년대, 김성환 역]"(p.176~183)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에치슨은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한다는 '에치슨 라인'을 발표하였다. 주류 언론과 학자들은 이 에치슨 선언이 북으로 하여금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남침을 감행하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북을 포함해서 중국이나 소련이 미국의 한반도 불개입 선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일본 내의 움직임 때문에 새로운 전쟁 음모에 대한 심각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 미국의 군사적, 외교적 정책과 활동은 '에치슨 라인'에 분명하게 역행하였다.

1950년 1월 이승만 정권에게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을 체결토록 하여 482명의 군사고문단의 주둔이 합법화되고 약 2억 달러의 군사원조가 단행되었다.

1950년 4월 중국에 대해 초강경파인 델레스가 국무장관의 고문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등장하자마자 한반도를 둘러싼 모든 불활실성과 의견 차이를 종식시켰다.[1950년대의인식, 진덕규 역]

동시에 미국 정부는 4월 국방비를 전년도의 135억 달러에서 500억 달러 수준으로 증대시키는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이 비밀계획은 한국전쟁 발발로 전격 실현되었다.

 

1950년 들어서는 미국 군사지도자들이 극동지역에 다한 왕래가 유난히 많았다.

2월 맥아더는 이승만을 일본으로 불러 이틀간 비밀회담을 가졌으며, 미군 합참의장 브래들리, 해군차모장 셔먼, 육군참모장 콜린스, 공군사령관 반덴벅, 등은 군사시설을 시찰하기 위해 자주 한국과 일본을 왕래하였다.

6월 18일에는 국무장관 델레스가 38선을 시찰한 후 동경에서 맥아더와 회담을 가졌다. 뒤이어 국방장관 루이스 존슨과 통합참모본부 의장 오먼 브래들리가 극동지역을 순방하고 귀환하는 순간에 6.25 전투가 개시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재무장과 미국의 적극적인 극동정책에 고무된 이승만은 연일 소리높여 북진통일을 외쳐댔다. 이승만은 조병옥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기와 총탄을 제외하고 북진 무력 통일을 준비가 다 되었다'라고 큰소리쳤다.[남북분단과통일문제, 김병오]

 

반면에 미군의 공식적인 전쟁사에 의하면 본래 북측의 군대는 1949년 말까지 방어형 군대였다. 평양이 모스크바로부터 공격용 군수물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남한이 1950년 봄에 북진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였다.

북은 기부금 운동에 의해서 무기를 구입하였는데 1950년 봄아지 약 390만 멍이 참가하였고, 구입된 군 장비는 전쟁이 발발한 6월애도 대체로 수송 도중에 있었으며, 북이 남에 대한 최대의 공격을 가하는 데 필요한 장비를 갖추게 된 것은 7월 말 겅에 이르어서였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남은 9만5천 명의 군대와 경찰 4만8천 명을 보유하고 있었고(미군 고문단 500명), 북은 군대 10만4천명과 1만8천 명의 경찰로 구성(소련 고문관 40명)되어 있었다.[한국현대사, 로버트시몬즈]

 

대규모 전면전에 대한 북의 준비상태를 알려주는 사례로서, 미군 정보팀이 북의 문서를 입수하여 연구한 끝에 밝혀낸 사실은 '노동당 상임위원회의 일급 비밀 작업계획이나 북의 고위 장교들은 전쟁이나 공격에 대해 전쟁 전까지 아무런 구체적인 지시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한국현대사, 로버트시몬즈]

또한 1950년 7월 맥아더 사령부의 보고 과정 중 한 장교가 특파원에게 '전쟁이 시작된 6.25 당시 북은 동원계획을 수행하지 않았다. 오직 6개 부대가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전투준비가 되어 있었다. 전쟁 수행에는 13~15개 부대가 필요함에도...' [비사한국전쟁, 스토운]"(p.184~190)

 

- 박세길 저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 중에서..

 

○ 한국전쟁은 베트남 전쟁처럼 어느날 하루아침에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가깝게는 미군정이 1948년 한반도 남단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시점이 전쟁의 개시 시점이고, 조금 멀게는 1945년 9월 35년간 한반도를 점령한 일제를 대신하여 미군정이라는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 남단을 점령한 때가 전쟁의 개시 시점인 것입니다.

아주 멀고 크게 본다면 19세기 말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침탈하기 시작한 때부터 거슬러 올라가겠죠.

 

○ 1945년 8월 이후 5년간 한반도, 특히 남단에서 전개된 상황만 보더라도 5넌 내내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를 위한 대다수 한민족과 민중 대 미군정과 친일파와의 전쟁으, 연속이었습니다.

1945년 8~9월 한반도 전 지역에서 인민위원회 구성 및 조선인민공화국 설립 --> 1945년 9~10월 미군정의 한반도 남단 점령 및 인민위원회와 인민공화국 부정, 폭력탄압 --> 미군정청에 총독부/친일파 관료, 지식인 고용 --> 일본군/만주군 출신으로 미군정 휘하에 국방경비대 구성, 총독부 순사 출신으로 경찰 구성 --> 노동, 농민, 청년, 부인, 학생, 문화, 학병, 지식인등 항일투사와 독립세력 및 압도적 민중의 자치조직, 정당, 언론, 자위대 결성 --> 미군정과 친일파 군경의 탄압, 해산 --> 1946년 3.1 기념일 투쟁 --> 5.1 노동절 투쟁 --> 10월 인민항쟁 --> 모스크바 삼상결정 이행 투쟁 --> 1947년 3~7월 미국의 미.소 공동위원회 파탄 --> 7.27 임시정부 수립 촉진 인민대회 --> 9월 미국 유엔에 한반도 자치정부 수립을 상정 --> 1948년 2.7 구국투쟁 --> 3월 유엔임시위원단 한반도 도착 --> 3~5월 남북정치협상 및 제정당사회단체 연대기구 구성, 단선단정 거부투쟁 --> 4.3 제주민중항쟁 --> 5.10 단선단정 저지투쟁 --> 8월 미군정의 지휘아래 부정폭력선거로 친일,종미 이승만 정권 수립 --> 10~11월 여순봉기 및 국방경비대 내 반란 --> 1949년 6월 미군 대부분 철수 --> 남한 대부분 지역에서 유격전투 진행 --> 1950년 유격전 재개, 이승만 일파 총선 참패

 

○ 저자가 제시한 자료와 근거를 살펴보면, 저자의 논리는 미국의 '남침 유도설'을 제기하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남치 유도설'의 가장 강력한 주창자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입니다. 그는 저자도 자주 인용하고 있는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입니다. 올해 커밍스 교수는 연합뉴스 등 한국 언론과 한국전쟁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습니다.

 

○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 발발에 관한 견해 바꾼 적 없어” (경향, 2013년 6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6261839291&code=100100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미국 시카고대학 석좌교가 교통방송 시사프로그램 ‘디스 모닝’과 가진 인터뷰에서 “남침 유도설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발발 이전 5년간의 사건들을 다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한 것”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1940년대 후반의 미군정 기록들을 열람했다”며 “이는 한국의 고위급 관료들도 볼 수 없는 자료로서 한국인들이 알지 못하는 한국전쟁에 관한 내용들이 많다”고 말했다. 또 “한국 전쟁동안 미국이 한국에서 한 일들은 매우 끔찍하고 중대한 전쟁범죄“라며 “한국 전쟁의 발발은 미국에게 막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 "일본군 협력자 처단이 김일성 남침 주요 이유" -브루스 커밍스 (연합뉴스, 2013년 6월) http://blog.daum.net/ioweyouone/17462323

 

"한국전쟁의 기원은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해방 후) 한국이 둘로 나눠지고 2개의 다른 정부가 나타나면서부터 본격 전개되기 시작했다. 미국이 한국을 둘로 나누는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6·25 발발 20여년 전인 1930년대에 있었던 충돌도 얽혀 있다. 김일성 등 북한 게릴라와 게릴라를 쫓던 일본군 사이의 갈등이 대표적인 예", "남침을 감행한 것은 김일성이 남측 경찰과 군에 있는 과거 일본군 협력자를 제거하고 싶었기 때문"

"한국전쟁은 20여 년에 걸친 오랜 기원을 가진다. 내전이 일방의 침략 감행으로 시작됐다는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한국전쟁과 유사한 내전으로 평가하는) 베트남 전쟁이 언제 시작됐는지에 대해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다"

또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의 유사점을 강조하면서 "모두 반식민지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인 김일성과 호찌민에 의해 표면화됐다"고 분석했다.

한국전쟁은 (미국에 반공 열풍을 불러온) 매카시즘 시대(McCarthy Era)에 일어나 억제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전쟁이 됐고 반면 베트남전쟁은 미국이 시민권리(civil rights)를 위해 싸우던 시기였고 TV를 통해 세계 곳곳으로 방송됐다고 말했다.

 

○ 한국전쟁의 성격과 관련해서 커밍스 교수는 북의 김일성의 입장에서 '친일파 척결'이라고 평가했지만, 1945년 ~ 1950년 사이의 한반도 남단에서 진행된 과정을 볼 때, 한국전쟁의 성격은 짭게는 5년 동안 계속된 친일 매국노의 척결하기 위한 전쟁이자 그들을 보호하는 미군정과의 전쟁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단선단정을 저지하고 통일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한민족과 민중의 제국주의 미군정과의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