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랭글리 침몰(1) - 프레맨틀 출항
랭글리는 1913년 4월 7일에 프로테우스급 석탄선인 AC-3 주피터로 취역했다. 프로테우스급은 4척인데 주피터를 제외한 3척은 실종되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사이클롭스로 1918년 2월 22일에 브라질의 살바도르에서 망간원석 8,000톤을 싣고 출항하여 미국의 볼티모어로 가던 도중 감쪽같이 사라졌다. 원인은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았고 잔해 또한 발견되지 않았다. 사이클롭스는 버뮤다 삼각지대 음모론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소재다.
프로테우스와 네레우스는 민간에 팔린 이후 1941년 말에 한달 간격으로 나란히 해상에서 실종되었는데 거친 해상에서 구조적 붕괴로 인하여 침몰했을 가능성이 크다.
AC-3 주피터. https://en.wikipedia.org/wiki/USS_Langley_(CV-1)
주피터는 자매들과 다른 함생을 살았다. 1922년 3월 22일에 주피터는 대대적인 개장을 거쳐 미해군 최초의 항공모함인 CV-1 랭글리가 되었다. 랭글리는 14년 동안 현역에 머무르면서 미해군항공대의 초석을 놓았다.
CV-1 랭글리. https://en.wikipedia.org/wiki/USS_Langley_(CV-1)
랭글리는 항공모함으로서의 수명이 끝나자 다시 개장을 하여 수상기모함이 되었으나 랭글리라는 이름은 그대로 사용했다. AV-3 랭글리는 1937년 2월 26일 취역 당시 세계 최고의 수상기모함 중 하나였다. 표준배수량이 14,000톤에 가까운 커다란 함체 덕분에 랭글리는 항공유, 예비부품, 탄약, 식량을 잔뜩 실을 수 있는 커다란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비행갑판도 절반 정도 남겨 두었기 때문에 비행가능한 상태의 항공기를 많이 실을 수 있었다. 약점은 속력이었다. 랭글리의 카탈로그상 최고 속력은 15.5노트였으나 진주만 기습 당시에는 13노트가 한계였다.
AV-3 랭글리. https://en.wikipedia.org/wiki/USS_Langley_(CV-1)
개전 당시 랭글리는 아시아함대가 가진 4척의 수상기모함 중 하나였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다른 3척의 수상기모함(차일즈, 윌리엄 프레스톤, 헤론)은 동인도제도에서 일본군의 남하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랭글리는 발릭파판을 거쳐 1942년 1월 1일에 다윈으로 철수했다.
진주만 기습 몇시간 후에 맥아더의 극동미육군항공대가 또다시 기습을 받아 지상에서 파괴되면서 동남아시아에서 연합군이 일본군과 제공권을 다툴 기회는 사라졌다. 일본군은 예상보다 훨씬 적은 손실로 극동미육군항공대를 격멸했고 그 결과 일본기가 많이 살아남았다. 필리핀에서 살아남은 비행기 덕분에 일본군은 이후 동남아시아 어디에서 든 압도적인 공중우세를 누렸다.
미국은 그들이 가진 항공기와 조종사들을 최대한 빨리 보내기 시작했으나 불행하게도 미본토에서 동남아시아는 너무 멀었다. 그나마 항속거리가 긴 B-17이나 LB-30 리버레이터같은 중폭격기는 태평양의 섬들을 징검다리삼아 호주까지 날아갈 수 있었으나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필요한 P-40워호크 전투기는 항속거리가 짧아서 부품 상태로 수송 선에 실려 호주로 가야만 했다. 수송선에 실려 도착한 비행기는 조립해야 했는데 여기에는 숙련된 인력이 필요했다. 호주에 전개한 제7폭격비행전대의 지상요원들이 1941년 12월 23일부터 1942년 2월 4일까지 138대의 P-40을 조립했는데 이들은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숙련된 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립 경험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전투기와 함께 호주에 도착한 조종사들은 대부분 비행학교를 갓 졸업한 풋내기들이었다. 따라서 필리핀에서 철수한 극동항공대의 고참 조종사들이 실전에 대비한 훈련을 실시했다. 호주에서 자바로 증원될 미군 전투기부대는 5개의 임시추격비행대대(제3, 제13, 제17, 제20 및 제33비행대대)로 조직되었다.
P-40이 호주에서 자바로 갈 때는 다윈에서 이륙하여 티모르의 쿠팡, 발리의 덴파사르 비행장을 거쳐 수라바야에 도착했다. 오늘날에는 쉽고 안전하게 다닐 수 있지만 원시적 인 항법장치를 가진 당시의 P-40에게는 위험한 경로였다. 노련한 극동항공대 출신 조종사를 중심으로 편성한 제17임시추격비행대대는 17대가 출발하여 1942년 1월 25일 에 13대가 도착했다. 가벼운 손실은 아니었으나 감내할만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1월 29일부터 2월 11일까지 실시된 제2차 파견은 비극이었다. 신참 조종사가 대거 포함된 제3 및 제20임시추격비행대대와 A-24밴시 급강하폭격기를 장비한 제91폭격비행대대는 파견 과정에서 60%의 비행기를 잃었다. 너무 많은 P-40을 잃은 제3 및 제20임시 추격비행대대는 제17임시추격비행대대에 통합되었다. 더 이상 티모르와 발리를 경유하여 P-40을 보낼 수는 없었다.
다른 방법은 미국에서 호주로 보냈듯이 수송선에 실어 보내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두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한가지는 수송선이 느리다는 것이었고 다른 한가지는 자바에서 조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호주에서의 경험은 숙련된 인력이 있어도 P-40의 조립에 1주일 이상 걸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바에는 숙련된 인력이 거의 없었으므로 조립하는데 길게는 한달이상 걸릴 수도 있었다.
조립 문제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항공모함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함재기가 아닌 지상발진 항공기도 항공모함에서 이함하여 지상비행장으로 날아갈 수 있었으며 실제로 영국은 인도미터블을 이용하여 허리케인을 지상비행장으로 날려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미해군은 이런 임무에 항공모함을 투입할 여력이 없었다.
이때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다윈에 정박중이던 랭글리였다. 랭글리는 함정 길이의 절반에 가까운 비행갑판을 가지고 있어서 항공모함처럼 비행가능한 상태의 항공기를 여러 대 실을 수 있었다. 실제로 일본정찰기가 다윈을 정찰했을 때 랭글리의 비행갑판을 보고 항공모함으로 오인했으며 이는 일본이 다윈 폭격을 결심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P-40이 다윈으로 날아온 후 랭글리에 실으면 간단하지만 비행장에서 항구까지 비행기를 운반할 도로가 없었다. 따라서 랭글리가 프레맨틀로 가서 P-40을 싣고 MS-5선단과 함께 항해하다가 도중에 헤어져 자바로 가기로 했다. 랭글리는 2월 11일에 다윈을 떠남으로써 일본군의 공습을 피했다.
랭글리가 다윈을 떠나던 2월 11일에 호주 동해안의 브리즈번에서 훈련 중이던 제13 및 제33임시비행대대의 P-40전투기 36대는 호주를 가로질러 서해안의 퍼스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퍼스에서 랭글리가 기다리는 프레맨틀까지는 트럭으로 견인할 것이었다.
2월 12일 오후 4시에는 수송선 4척으로 이루어진 MS-5선단(시위치, 홀브룩, 카툼바, 던트룬)이 멜버른을 떠나 프레맨틀로 향했다. 미국수송선 시위치는 포장된 P-40전투기 27대와 정비부대에 필요한 지프와 트럭, 그리고 50구경 기관총탄 75만발을 싣고 있었다. 미국수송선 홀브룩은 P-40전투기 4대, 호주수송선인 카툼바와 던트룬은 각각 3 대씩 싣고 있었다.
호위는 보이시와 같은 브루클린급 경순양함인 피닉스가 맡았다. 6인치 주포 15문을 장비한 피닉스는 8인치 주포 9문을 장착한 중순양함 휴스턴보다 주포 구경은 작지만 주포의 숫자가 훨씬 많고 또한 6인치 주포의 연사력이 뛰어났으므로 전투력은 비슷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2월 17일에 제13 및 제33추격비행대대의 P-40전투기 36대중 낙오한 4대를 제외한 32대가 퍼스에 도착했으며 다음날인 18일에 랭글리와 MS-5선단이 프레맨틀에 도착했다. 퍼스에 착륙한 P-40들은 꼬리를 트럭에 매달고 프레맨틀까지 견인해야 했다. 트럭운전사를 구하지 못하여 조종사들이 직접 트럭을 몰았으며 지상요원들이 짐칸에 타고 견인되는 비행기의 상태를 살폈다. 프레맨틀의 부두에 도착한 P-40들은 22일에 기중기로 랭글리에 실었다. 랭글리의 승조원들은 27대는 비행갑판에 올리고 5대는 그 아래의 주갑판에 실었다.
MS-5선단의 목적지는 몇차례 바뀌었다. 애당초 선단에 실린 P-40들은 필리핀에 증원하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싱가포르로 보내기로 했다. MS라는 선단 이름 자체가 멜버른과 싱가포르를 뜻한다. 하지만 멜버른을 출발한 선단이 프레맨틀로 항해하는 동안 싱가포르가 함락되자 선단의 목적지는 자바가 되었다. 선단이 프레맨틀에 입항하기 전날인 2월 17일에 ABDACOM 부사령관 브렛 중장은 자바를 구하기도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여 인도로 보내기로 했다.
그러자 네덜란드인들이 격렬하게 항의했고 브렛 장군은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포장된 P-40전투기 27대를 실은 시위치는 랭글리와 함께 자바로 보내고 나머지 3척의 수송선에 실린 P-40전투기 10대는 인도로 보내기로 했다. 랭글리와 MS-5선단은 1942년 2월 22일 정오에 호주군악대의 연주를 들으면서 프레맨틀을 출항했다.
자바에서는 P-40전투기를 맞아들일 준비가 한창이었다. 칠라찹에는 비행장이 없었으므로 네덜란드군은 부두 옆의 야적장을 임시 활주로로 사용하기로 했다. 야적장의 화물을 모두 치우고 구멍을 메꾸었으며 평평하게 다듬었다. 활주에 방해가 되는 나무나 신호등은 제거했고 헛간같은 작은 목조건물은 물론 멀쩡한 건물까지 철거했다. 랭글리가 도착하여 P-40전투기를 기중기로 부두에 내리면 즉시 조종사가 타고 이륙하여 수라바야 부근의 응고로 비행장으로 향할 것이었다.
노련한 뱃사람인 랭글리의 함장 로버트 맥코넬 중령은 신중하게 항해계획을 짰다. 실론으로 향하는 MS-5선단이 자바 남쪽의 코코스 제도에 접근하는 2월 25일에 랭글리와 시위치는 선단에서 벗어나 호위없이 자바 남해안의 칠라찹으로 북상할 것이었다. 그러면 적의 공습에 취약한 마지막 190km를 밤에 달려 28일 새벽에 칠라찹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계획은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프레맨틀을 출항한지 몇시간 지나지 않은 22일 저녁에 헬프리히 제독이 랭글리에게 즉시 선단과 헤어져 바로 자바로 달려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시위치에게는 별다른 명령이 없었으나 몇시간 후 시위치도 선단을 떠나 칠라찹으로 북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때의 명령은 월권행위로서 헬프리히 제독은 랭글리에게 직접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었으며 글래스포드 제독을 통해야만 했다. 하지만 당시 자바의 전투기 세력이 15대 밖에 안될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으므로 헬프리히 제독은 월권행위를 감행했고 글래스포드 제독도 나중에 추인했다.
이럴 경우 랭글리는 27일 오전 9시 30분에 칠라찹에 도착할 것이었다. 원래 계획보다는 약간 위험했지만 도중에 추가 변경이 없었다면 무사히 도착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헬프리히 제독이 잇달아 참견하면서 랭글리의 시간표는 완전히 꼬이게 된다.
칠라찹을 향하여 북상하던 랭글리는 2월 26일 정오에 네덜란드해군항공대의 카탈리나 2대를 만났다. 카탈리나는 랭글리에게 서쪽으로 30km 떨어져 있던 네덜란드의 기뢰 부설함 윌렘반데르잔을 만나 대잠호위를 받으라는 헬프리히 제독의 명령을 전했다.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며 서쪽으로 가서 윌렘반데르잔을 만난 맥코넬 중령은 윌렘반데르잔의 보일러에 문제가 있어 속력이 랭글리보다도 느린 10노트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윌렘반데르잔과 동행했다가는 도착시간이 더 늦어져서 공습에 취약해진 다고 생각한 맥코넬 중령은 글래스포드 제독에게 상황을 보고한 후 윌렘반데르잔을 떼어놓고 혼자 북상했다. 그런데 몇시간 후에 헬프리히 제독이 글래스포드 제독을 통하여 다시 남하하여 윌렘반데르잔을 만나 동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랭글리는 또다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면서 남하했다.
맥코넬 중령의 시야에 윌렘반데르잔이 들어올 때쯤 헬프리히 제독의 또다른 명령이 도착했다. 윌렘반데르잔은 버려두고 당시 자바 남쪽 320km 해상에서 대잠초계 중이던 미국구축함 엣솔 및 휘플과 만나 동행하라는 것이었다. 이제 랭글리의 시간표는 엉망이 되었다. 맥코넬 중령은 글래스포드 제독에게 전문을 보내어 칠라찹 도착 시간이 27일 오후 5시쯤 될 것 같다면서 항공엄호를 요청했다. 항공엄호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글래스포드 제독은 헬프리히 제독을 만나 이렇게 된 이상 랭글리로 하여금 아예 남쪽 에서 올라오고 있던 시위치와 만난 후 원래 계획대로 28일 새벽에 도착하도록 허용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헬프리히 제독은 일본선단이 접근중이라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 유로 거절했다. 그는 아직까지 자바 남쪽 해상에서 일본군의 공습을 받은 적이 없으며 오후 5시는 장거리를 날아온 일본기가 공습을 가하고 멀리 떨어진 기지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고 주장했다. 글래스포드 제독이 물러섬으로써 랭글리는 엣솔 및 휘플과 만나는 즉시 전속력으로 칠라찹으로 달려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로써 랭글리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랭글리는 26일 밤에 폭풍우에 시달리면서 구축함을 찾아 다닌 끝에 27일 아침 7시 20분에 칠라찹 남쪽 160km 해상에서 네덜란드의 카탈리나 2대와 함께 있던 엣솔과 휘 플을 만났다. 이들이 만난 직후 휘플이 소나로 무엇인가를 탐지하고 1시간 이상 추적했으나 다시 접촉하지 못했다.
휘플이 탐지한 것이 일본잠수함이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명확하지는 않다. 당시 일본잠수함들이 자바 남쪽 해역을 돌아다니고 있었던 건 사실이며 우가키 제독은 전후에 펴낸 자신의 책에서 이때 일본잠수함이 "레인저급 항공모함 1척이 칠라찹으로 향하고 있다." 고 보고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당시 자바 남쪽에 전개했던 일본잠수함 중에서 랭글리 를 만났다는 내용을 포함한 항해일지를 제출한 잠수함은 없다.
랭글리와 구축함들은 27일 오전 8시 44분에 칠라찹을 향하여 북상하기 시작했다. 날씨는 야속하게도 전날밤과는 딴판으로 화창하여 공습에는 최적의 날씨였다.
계획대로라면 벌써 칠라찹에 도착했을 27일 오전 9시에 랭글리는 아직 칠라찹에서 남쪽으로 160km 떨어진 해상에 있었다. 그때 랭글리의 견시가 동쪽 하늘에서 높은 고도 로 비행중인 일본정찰기를 발견했다. 사실 일본정찰기는 이미 40분 전에 랭글리를 발견하고 보고한 후였다.
맥코넬 중령은 글래스포드 제독에게 긴급전문을 보냈다. 그는 일본기가 랭글리를 발견했으며 늦어도 2시간, 빠르면 그 이전에라도 공습이 시작될 것 같으니 즉시 전투기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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