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 머리말
2. 역외이주 규모(1) - 대만인
3. 역외이주 규모(2) - 조선인
4. 귀환 규모(1) - 대만인 및 外省人
5. 귀환 규모(2) - 조선인 및 越南者
6. 맺음말
1. 머리말
본고는 식민지시대에 이루어진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 규모와
해방 직후 몇 년 간에 걸쳐 이루어진 귀환 규모를 추산하는 것을 일차적
인 목적으로 한다.1) 주지하듯이 조선인의 식민지시대 역외이주와 해방
2018년 6월 정례발표회 발표자료집?, 15-66쪽).
1) 본고에서 사용하는 ‘역외’라는 용어는 대만의 경우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일본에 할양된 지역(대만도와 팽호도) 이외의 지역, 조선의 경우 1910
년 병합조약을 통해 새로이 일본제국에 통합된 지역(한반도 및 부속도서) 이
외의 지역을 가리킨다. ‘역외’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식민지시대의 조선과
대만을 다루면서 ‘국외’라는 말을 사용할 경우 혼동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http://dx.doi.org/ 10.25232/ku.2018.50.517
518 … 한국학논총 (50)
직후 귀환에 관해서는 이미 방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왔고, 또 현재까지
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2) 반면 대만인의 식민지시대 역외이주
와 해방 직후 귀환에 관해서는 2000년대 이후에 들어서 비로소 연구가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형편이다.3)
이러한 연구 성과 면에서의 편차 자체가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
와 귀환 규모가 크게 달랐음을 암시해주는 것이기도 한데,4) 본고는 조
선인의 역외이주와 귀환에 관해서는 기존의 다양하고 풍부한 연구에 기
대고, 대만인의 역외이주와 귀환에 관해서는 새롭게 자료를 발굴하고
재구성하여 최대한 조선쪽의 통계나 자료와 균형을 맞추고자 한다.5)
(도노무라 마사루(外村大) 지음, 신유원·김인덕 옮김, ?재일조선인 사회의 역
사학적 연구?, 논형, 2010, 37쪽). 한편 식민지시대에 대해서는 조선인, 해방
이후에 대해서는 한국인이라 지칭하고, 두 시대를 아울러 가리킬 때에는 편
의상 조선인이라 지칭하기로 한다. 대만의 경우, 식민지시대에 대해서는 대
만인, 해방 이후에 대해서는 (구별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本省人·外省人 또
는 (구별할 필요가 없을 때에는) 대만인이라고 표시하기로 한다.
2) 조선인의 역외이주에 관한 자료와 연구는 워낙 방대하여 소화하기 힘들 정
도인데, 지면 관계상 관련 연구 성과에 대한 소개는 문명기, 「식민지시대 대
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 패턴과 그 함의」, 15-16쪽에 맡기기로 한다.
3) 조선인의 역외이주 관련 연구에 비하면 연구가 활발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는 한편으로는 관련 자료의 부족에 기인한 바도 적지 않다. 반면 在中 대
만인에 관해서는 비교적 많은 자료가 남아 있는 편이다. 관련된 대표적 저작
에 관해서는 역시 문명기, 「식민지시대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 패턴과
그 함의」, 16쪽에 맡긴다.
4) 한 연구자가 대만총독부의 각종 통계에 대한 세밀한 파악 능력을 “물 한 방
울도 새어나가지 못하게 할 정도의 기량(滴水不漏的本領)”이라고 표현할 정
도로 대만총독부의 통계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은 유명하다(李力庸, 「日本帝
國殖民地的戰時糧食統制體制 - 臺灣與朝鮮的比較硏究, 1937-1945」, ?臺灣史
硏究? 16-2, 2009, 71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만인의 역외이주 관련 통계가
상대적으로 불비하다는 것은, 대만인의 역외이주 현상이 대만총독부의 관심
을 끌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5) 한편 식민지시대에 조선에 이주한 대만인, 대만에 이주한 조선인에 관해서는
金奈英, 「日本統治下に移動した在臺灣朝鮮人の硏究」, 筑波大學 碩士學位論
文, 2006(金奈英, 「日本統治下に移動した在臺灣朝鮮人の硏究」, ?現代中國事
情? 14, 2007로 공간됨)이 특히 조선인의 대만 이주에 관한 기초적인 통계
를 망라하여 제시하고 있고, 장석흥 외 지음, ?해방 후 중국·대만지역 한인
의 귀환?(한인귀환학술총서2), 역사공간, 2012의 제2부가 대만 지역 한인의
20세기 전반기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와 귀환 … 519
연도
대만 역외(명)
대만 역내
대만인
(b)
(천명)6)
대만인
총인구
(천명)
(a+b)
일본제국 이외 일본제국
小計Ⅰ+
小計Ⅱ
만주 (a)
관
동
주
중국7)
러
시
아
등
小計Ⅰ 내지8) 조선9) 樺太
남양
군도
小計Ⅱ
192010) 52 4,297 0 4,349
1,703
(1,208)
0 0 0
1,703
(1,208)
6,052
(5,557)
3,566 3,572
1925 (8,845) (8,845) (3,639) 9 (3,648) (12,493) 3,925 3,937
1926 -
9,087
(9,008)
9,087 (2,989) (2,989) (12,076) 4,010 4,022
1927 -
8,706
(8,624)
8,706 (4,323) (4,323) (13,029) 4,096 4,109
본고는, 필자가 구상하고 있는 식민지시대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
주 패턴에 있어서의 뚜렷한 차이와 그 원인에 대한 탐구를 위한 예비적
고찰 차원에서 일단 두 지역 식민지인의 역외이주와 귀환 규모에 대한
대체적인 윤곽을 그리고자 하는 것이다. 두 지역 식민지인의 역외이주
와 귀환 규모를 어느 정도 확정하고 나면, 두 지역 식민지인의 역외이주
의 패턴의 차이와 그 원인, 그리고 해방 직후의 대규모 귀환에 따른 다
양한 사회경제적 문제의 발생과 그 해결 방향 등에 대한 이해에 관해서
도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2. 역외이주 규모(1) - 대만인
식민지시대 대만인 역외이주의 전체 규모를 구성하는 것 자체가 필자
가 아는 한 본고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것인데, 불완전한 자료를 통해서
나마 재구성한 결과는 아래와 같다.
<표 1> 대만 내외 거주 대만인–1920~194314)
귀환을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김승일·김영신·황선익·陳姃湲 등이 수행한
관련 연구는 김경일, 「20세기 전반기 동아시아의 주변 – 조선과 대만의 인
구이동」, ?사회와 역사? 109, 2016의 <참고문헌>을 참조).
520 … 한국학논총 (50)
연도
대만 역외(명)
대만 역내
대만인
(b)
(천명)6)
대만인
총인구
(천명)
(a+b)
일본제국 이외 일본제국
小計Ⅰ+
小計Ⅱ
만주 (a)
관
동
주
중국7)
러
시
아
등
小計Ⅰ 내지8) 조선9) 樺太
남양
군도
小計Ⅱ
1928 -
9,982
(8,902)
9,982 (4,130) (4,130) (14,112) 4,187 4,201
1929 38 -
9,498
(9,423)
9,536 (4,604) (4,604) (14,140) 4,285 4,299
1930 144
9,703
(9,656)
0 9,847
4,611
(4,872)
19 5 1
4,636
(4,897)
14,483
(14,744)
4,400 4.414
1931 -
10,128
(10,224)
11,289 (5,230) (5,230) (16,519) 4,515 4,532
1932 59 -
10,782
(10,717)
11,591 (5,112) 6 (5,118) (16,709) 4,639 4,656
1933 68 -
11,722
(12,121)
12,850 (5,279) 5 1 (5,285) (18,135) 4,759 4,777
1934 126 -
13,093
(13,568)
14,042 (5,408) 6 11 (5,425) (19,467) 4,882 4,901
1935 340 -
14,375
(14,015)
1 15,747 (5,781) 48 (5,829) (21,576) 4,990 5,012
1936 303 -
13,671
(13,954)
14,849 (4,723) 25 (4,748) (19,597) 5,109 5,129
1937 374 -
13,629
(13,735)
15,152 (6,122) 31 (6,152) (21,304) 5,261 5,282
1938 163 -
6,161
(5,023)
7,357 (9,478) 32 (9,510) (16,867) 5,393 5,410
1939 -
14,321
(13,027)
15,36611) (11,276) 24 (11,300) (26,666) 5,525 5,552
1940 1,497 550
16,600
(16,122)
2 18,649
22,499
(17,766)
226 35 7
22,767
(18,034)
41,416
(36,683)
5,682 5,723
1941
25,26512)
(19,942)
25,265 (21,076) (21,076) (46,341) 5,833 5,879
1942
27,528
(27,528)
27,528 (17,892) 37 (17,929) (45,457) 5,990 6,035
1943 990
32,41213)
(26,931)
33,402
(29,921)
23,213 23,213 56,615 6,134 6,190
6) <부표 2: 식민지 대만의 ‘민족별’ 인구 규모와 비중>(문명기, 「식민지시대 대
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 패턴과 그 함의」, 49-50쪽)에 근거했다.
7) 1920·1930·1940년의 3개년의 수치는 <부표 1>에 따랐고, 나머지 연도는
JACAR 자료로 보충했으며, ‘러시아’ 항목과 ‘소계Ⅰ’ 항목 역시 JACAR 자
료에 따랐다. 인용한 JACAR 자료의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문명기, 「식민
지시대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 패턴과 그 함의」, 18쪽의 각주8)을 참조.
20세기 전반기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와 귀환 … 521
<표 1>에서 잘 드러나듯이, (후술할 조선인의 역외이주와 상반되게)
대만인의 역외이주에 관해서는 제대로 된 통계조차 갖추어져 있지 못한
괄호 안의 수치는 <부표 5: 식민지시대 재중 대만인 분포 상황 및 규모>(문
명기, 「식민지시대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 패턴과 그 함의」, 52-53쪽)
의 연도별 수치이다.
8) ‘내지’는 일본 내지를 가리키며 이하 모두 같다. 1920·1930·1940년의 3개년의
수치는 <부표 1>에 따랐다. 1943년의 수치는 内閣官房総務課, <内地在住朝
鮮人及台湾本島人の増加状況並に職業別調べ>, JACAR A15060172200에 따
랐다. 그 밖의 연도에는 괄호가 더해져 있는데, 이는 <부표 6: 내지로 도항한
대만인 및 내지로부터 귀항한 대만인>(문명기, 「식민지시대 대만인과 조선
인의 역외이주 패턴과 그 함의」, 53-54쪽)에 근거한 숫자이다. 해당 통계는
1899년부터 1942년까지 작성되었다.
9) 조선 거주 대만인 수치는, 1920·1930·1940년은 <부표 1>에 따랐고, 그 외의
연도는 ?朝鮮總督府統計年報?(각년판)의 <現住戶口> 항목에 따랐다. ?朝鮮
總督府統計年報?도 1932년 이후에만 관련 수치를 제시하고 있고 정확도도
떨어지지만, 대체할 자료가 없어서 그대로 이용하기로 한다.
10) ‘중국’ 항목의 4,297명은 ‘支那’ 4,236명에 ‘靑島’ 4명 및 ‘香港’ 57명을 더한
것이다(?臺灣現勢要覽(大正13年版)?). ‘관동주’ 항목의 52명은 ‘關東州’ 37명
에 ‘滿鐵付屬地’ 15명을 더한 것이다(<부표 1>). 1930년에 대해서도 동일하
게 계산했고, 1940년에 대해서는 만주국과 관동주의 수치를 국세조사 결과
그대로 제시했다.
11) 원문에는 총계가 14,061명으로 되어 있으나 재중 대만인만으로도 14,061명
을 넘는다. 원문이 잘못된 것으로 판단되며, 필자가 계산한 15,366명으로 수
정하기로 한다(外務省 調査部 第二課, <海外各地在留本邦人人口表/昭和14
年10月1日現在>(昭和15年10月), JACAR B10070371400, 81쪽의 <第10表:
在外朝鮮人及臺灣人人口>).
12) <中華民国在留本邦人人口統計表-中華民国在留本邦人人口比較表/昭和17年
1月1日現在>, 1942, JACAR B02130153400, 0219-0220쪽에는 1941년 11월
현재 25,265명, 1942년 1월 현재 27,528명으로 구분해놓았다. 1942년 1월의
수치를 1941년 말의 수치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판단했다.
13) 1943년도 ‘중국’ 항목은 許雪姬, 「日治時期臺灣人在中國」, ?臺灣學通訊? 101,
2017, 4쪽에 제시된 33,402명에서 만주 거주자 990명을 뺀 32,412명으로 한
다. 여기에는 일본군에 동원되어 중국으로 간 대만인 군인·군속은 위의 수
치에 포함되지 않는다.
14) 1920·1930·1940년의 수치는 해당 연도에 실시된 국세조사의 결과(<부표 1:
조선인과 대만인의 역외이주 규모 - 國勢調査 결과>, 문명기, 「식민지시대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 패턴과 그 함의」, 48쪽)에 따랐고, 국세조사로
알 수 없는 ‘중국’ 항목은 JACAR(アジア歷史資料センター) 자료로 보충했
으며, ‘소계Ⅰ’ 항목 역시 JACAR 자료에 따랐다.
522 … 한국학논총 (50)
실정이다. 그 이유는 대만인의 역외이주 자체가 대단히 적었고 따라서
일본 정부나 대만총독부의 ‘주목’을 끌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수치를 상
대적으로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1920·1930·1940년 및 1943년의 4개년만
보더라도, 역외이주 대만인(<표 1>의 a)은 1920년 6,052명, 1930년
14,483명, 1940년 41,416명, 1943년 56,615명에 불과하다. 대만인 총인구
(<표 1>의 a+b)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20년 0.17%, 1930년 0.33%,
1940년 0.72%, 그리고 전쟁과 동원 등으로 인구이동이 가장 활발했다고
할 수 있는 1943년조차 0.91%였다. 대만인 총인구에서 역외이주 인구가
1%를 넘긴 해가 없었던 것이다.
요컨대, 적어도 식민지시대에 관한 한 역외이주는 대만인들에게 대단
히 예외적인 삶의 경험이었다. 기존 연구들이 하나같이 식민지시대 대
만의 인구구조를 (인구의 유입/유출 등의 사회적 증가(social increase)
가 전체 인구변동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폐쇄
적’(closed) 인구 구조라고 평가해온 것도 무리가 아니다.15) 달리 말하면
식민지 대만의 인구성장은 거의 전적으로 자연적 증가(natural increase)
가 주도한 것이다.16)
청대 약 200년(1683-1895)에 걸친 대만사회 인구 변동의 추이를 보면,
鄭成功이 대만에 웅거하던 1680년 경 20만 명 전후에서 1810년에는 200
만 명 전후로 늘어났고 1890~1895년에는 250~255만 명 정도였다. 168
0~1810년의 130년 동안 연평균 1.8%의 인구증가율은 식민지시대 연평
균 인구증가율 1.6%를 상회하는, 공업화 이전의 농업문명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든 높은 증가였다. 이는 당연히 중국 대륙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인구 유입의 결과였다.17) 반면 식민지시대에는 (통치와 각종 사업의 필
요를 위한 일본인의 유입을 제외하고는) 인구의 유입과 유출이 대단히
15) George W. Barclay, Colonial Development and Population in Taiwa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4, p.12; 陳紹馨, ?臺灣的人口變遷與社會變
遷?, 聯經, 1979, 6쪽; 王德睦 等, ?臺灣全志?(卷3: 住民志-人口篇), 國史館
臺灣文獻館, 2011, 61쪽 등.
16) 陳紹馨, ?臺灣的人口變遷與社會變遷?, 94쪽.
17) 陳紹馨, ?臺灣的人口變遷與社會變遷?, 18-21쪽.
20세기 전반기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와 귀환 … 523
억제되어 인구증가가 거의 전적으로 자연적 증가에 의존하는 구조가 된
것이다. 이렇게 식민지시대 대만인의 역외이주가 (후술하는 바와 같이)
식민지시대 조선인의 그것과 달리 소규모에 그친 것에는 어떤 원인들이
작용했을까. 통상 인구이동에 영향을 주는 흡인요인(pulling factor)과
배출요인(pushing factor)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배출요인으로서의 식민지시대 대만인의 임금과 생활수준을 짚
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식민지시대 대만인이 역외이주 대상지로서 고
려할 수 있는 지역은 크게 보아 일본 내지와 중국 대륙이었을 것이다.
먼저 일본 내지로의 대만인의 이주 가능성을 짚어보자. 20세기 전반기
일본·조선·대만 세 지역의 구매력을 비교한 연구에 따르면, 1934-36년
가격을 기준으로 하고 일본의 1인당 실질GDP를 1.00으로 볼 경우 조선
과 대만의 1인당 실질 GDP는 1915년 0.52와 0.78, 1925년 0.45와 0.78,
1935년 0.44와 0.79로 나타났다. 즉 1910년부터 1935년 사이의 대만의 1
인당 실질 GDP가 일관되게 상당한 격차를 두고 조선의 그것에 비해 높
게 나타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격차는 커졌다.18) 이 수치를 신뢰한다
면, 대만인의 실질 GDP는 일본인의 약 80% 수준이었고, 조선인의 그것
은 50%이거나 그 이하였다. 일본인에 비해 50% 전후의 소득만을 올리
던 조선인이라면 역외이주의 제반 곤란을 감내하고 이주할 이유가 분명
히 있었던 데 반해, 일본인의 80%에 가까운 소득을 올렸던 대만인이 역
외이주에 동반되는 제반 곤란을 감내하고 이주를 감행할 이유는 별로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19)
한편 대만인들이 중국 대륙으로 이주하려면 중국 대륙의 경제발전 수
준, 나아가 임금 수준이 대만의 그것에 비해 상당한 격차를 보이며 높아
야 할 터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현재 필자는 식민
18) 袁堂軍·深尾京司, 「1930年代における日本·朝鮮·臺灣間の購買力評價 – 實質
消費水準の國際比較」, ?經濟硏究? 53-4, 2002, 332-333쪽; 335쪽.
19) 식민지 대만의 생활수준을 다룬 대만학계의 최근의 연구들은 대체로 대만
인의 소득 향상을 증언하고 있다(張素梅·葉淑貞, 「日治時代臺灣農家所得之
分析」, ?臺灣史硏究? 10-2, 2003; 葉淑貞, 「日治時代臺灣經濟的發展」, ?臺灣
銀行季刊? 60-4, 2009 등).
524 … 한국학논총 (50)
지시대 대만과 중국 대륙의 임금 수준을 직접 비교할 만한 자료를 가지
고 있지는 못하지만, 간접적인 방법으로 비교할 수는 있다. 예컨대 식민
지시대에 기술은 대만에서 대륙으로 흘러들어간 반면, 人力車夫, 製茶
人, 요리사, 이발사 등의 하층 노동력은 대륙에서 대만으로 흘러들어갔
다는 지적,20) 1894년 대만인 1인당 평균 무역액이 5海關兩에 달한 반면,
중국 대륙은 1901년에 가서야 겨우 1海關兩에 도달했다는 지적,21) 또한
대만인 인력거부의 임금이 1.7엔인 반면 중국인 인력거부의 임금은 0.8
엔에 불과했다는 사실 등을 미루어볼 때,22) 대만인이 노동이나 생계를
위해 중국 대륙으로 이주하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23) 요컨대 식민지시대 조선인 역외이주의 대부분을 구성한 노동이
주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 식민지 대만에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던 것
이다.24)
이상의 경제적 요인들 외에 대만인의 역외이주를 억제한 비경제적 요
20) 林滿紅, ?四百年來的兩岸分合 - 一個經貿史的回顧?, 自立晩報, 1994, 83쪽.
21) 林滿紅, ?茶·糖·樟腦業與臺灣之社會經濟變遷(1860-1895)?, 聯經, 1997, 6-7쪽.
22) 왕쉐신(王學新), 「1919년 봄–일제강점기 타이완의 중국인 인력거부」, 송승
석·이정희 편저, ?동남아화교와 동북아화교 마주보기?, 학고방, 2015, 452
-458쪽.
23) 중국에서 활동한 대만인의 대부분은 노동자가 아니라 상공업 종사자들이었
다. 예컨대 1937년 廈門 거주 대만인 중 상인이 81.18%, 의사가 4.51%였고,
福州 거주 대만인 중 상인은 68.18%, 의사가 8.36%, 공무원이 7.84% 등이
었다(林滿紅, ?晩近史學與兩岸思維?, 麥田出版, 2002, 282-283쪽).
24) 도시화의 정도를 통해서도 대만 역외이주가 활발하지 않았던 원인을 간접
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식민지 조선의 도시인구는 1940년에 16%로 증가했
지만(차명수, 「경제성장·소득분배·구조변화」, 김낙년 편, ?한국의 장기통계
–국민계정 1911-2010?,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2, 349쪽), 식민지 대만
의 도시화는 훨씬 급속했다. 張立彬, 「日據時期臺灣城市化進程硏究」, 東北
師範大學 碩士學位論文, 2004, 16쪽 및 20쪽에 따르면 식민지 대만의 도시
인구는 1941년 33.9%에 도달했다. 거의 같은 시점에서의 조선과 대만의 도
시화 수준은 2배 정도의 차이를 보이는데, 도시인구의 비율이 높았다는 것
은 도시의 취업기회가 그만큼 많았음을 의미한다. 식민지 조선에서 역외이
주의 주된 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 농촌에서의 ‘과잉인구’의 퇴적이라는 현
상이 대만에서는 도시에서의 취업으로 인해 발생하지 않았거나 훨씬 덜 발
생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20세기 전반기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와 귀환 … 525
인도 없지 않았다. 식민지시대 조선인의 주된 역외이주 대상지였던 일
본 내지와 만주의 경우 조선으로부터의 거리가 대단히 가까웠고 따라서
역외이주가 실현될 가능성 역시 식민지시대 대만인보다 훨씬 높았다.
예컨대 일본 내지 이주를 위해 조선인이 주로 이용했던 부산-시모노세
키 루트의 직선항로 거리는 225km인데 반해 기륭-요코하마 루트의 직
선항로 거리는 2,200km 이상이었다(기륭-오사카 루트는 1,800km 이상).
이러한 물리적인 거리상의 차이에 더하여 소위 ‘밀항’의 가능성에는 더
큰 격차가 있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만주로의 이주 역시 (조선인보다) 대만인에게는 훨씬 어려운 일이었
을 것이다. 1930년 중화민국 신의주 영사관은, 安東(중국)과 新義州(조
선) 사이에 놓인 철교 외에도 여름에는 배, 겨울에는 얼음을 통해 어디
서든 여권 없이도 중국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한다는 사실을 보고하고 있
다.25) 이는 조선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중국인 노동자에 대한 언급
이지만, 뒤집어 말하면 조선인 역시 압록강(이나 두만강) 건너편의 만주
로 자유롭게 이주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반면 대만인에게 만주 이주
는 쉽지 않았다. 예컨대 식민지시대 시인이자 기자인 대만 지식인 웨이
칭더(魏淸德)는 1936년 5월 9일 대만 북부의 基隆港에서 山東丸을 타고
3일 후인 12일 저녁에야 大連에 도착하고 있다.26) 大連에서 奉天이나 新
京 등지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하루 정도가 더 필요했을 것으로 본다면,
대만인이 만주로 이주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거리 이상으로 심리적 거리
를 극복해야 했을 것이다.
25) 김승욱, 「20세기 전반 한반도에서 일제의 도항 관리정책 - 중국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윤해동 엮음, ?트랜스내셔녈 노동이주와 한국?, 68쪽.
26) 우재호, 「대만 지식인 魏淸德의 20세기 초 朝鮮 認識」, ?동북아문화연구? 47,
2016, 27쪽.
526 … 한국학논총 (50)
연
도
조선 역외(명)
조선 역내
조선인(b)
(천명)28)
조선인
총인구
(천명)
(a+b)
일본제국 이외 일본제국 소계Ⅰ+
소계Ⅱ
만주 관동주 중국 러시아 소계Ⅰ 내지 대만 樺太 (a)
남양
군도
소계Ⅱ
1910 158,433 20 0 54,076 212,529 2,600 2 0 0 2,602 215,131 15,288 15,503
1916 328,207 67 244 72,773 401,291 17,972 2 0 0 17,974 419,265 16,374 16,793
1922 534,967 635 1,247 173,525 718,482 90,741 145 616 143 91,645 810,127 17,595 18,405
1923 527,416 611 1,100 314,362 860,489 136,557 203 1,464 82 138,306 998,795 17,829 18,828
1926 552,217 976 2,367 188,480 761,040 247,358 353 4,387 93 252,191 1,013,231 18,602 19,615
1931 629,235 1,747 2,580 194,249 835,275 427,257 999 5,880 224 434,360 1,269,635 19,969 21,239
1932 654,023 2,002 3,582 194,249 871,407 433,692 959 4,787 278 439,716 1,311,123 20,294 21,605
1933 671,535 2,259 4,954 200,000 887,245 500,637 1,191 5,043 313 507,184 1,394,429 20,610 22,004
1934 758,885 2,708 6,214 200,000 975,906 559,080 1,316 5,878 318 566,592 1,542,498 20,610 22,152
1935 826,570 3,251 7,197 200,000 1,046,201 615,869 1,604 7,053 546 625,072 1,671,273 20,930 22,601
1936 895,000 4,025 11,353 200,000 1,122,115 657,497 1,694 6,604 545 666,340 1,788,455 21,249 23,037
1937 932,000 3,917 16,420 200,000 1,159,437 693,138 1,985 6,592 579 702,294 1,861,731 21,600 23,482
1938 1,056,308 4,496 21,816 200,000 1,289,720 796,927 1,903 7,625 704 807,159 2,096,879 21,864 23,961
1939 1,162,127 4,828 44,759 200,000 1,419,332 980,700 2,260 7,625 1,968 992,553 2,411,885 22,119 24,531
1940 1,450,384 5,710 77,667 200,000 1,740,861 1,190,444 2,299 16,056 2,782 1,211,581 2,952,442 23,273 26,225
1941 1,490,000 6,405 86,793 200,000 1,790,298 1,484,025 2,539 19,768 4,563 1,510,895 3,301,193 23,547 26,848
1942 1,562,000 7,279 86,153 200,000 1,862,532 1,778,480 2,662 19,768 6,646 1,807,556 3,670,088 23,931 27,601
1943 1,634,000 7,414 86,564 200,000 1,935,078 1,946,047 2,662 25,765 7,889 1,982,363 3,917,541 24,321 28,239
3. 역외이주 규모(2) - 조선인
반면 식민지시대 조선인의 역외이주는 대만인의 그것과 사뭇 다른 양
상을 보인다. 식민지시대 조선인의 역외이주에 관해서는 기존 연구가
이미 잘 정리하고 있다. 아래의 표를 보자.
<표 2> 조선 내외 거주 조선인–1910~194327)
27) 도노무라, ?재일조선인 사회의 역사학적 연구?, 83쪽. 도노무라의 표에는
‘일본제국 이외’ 항목에 ‘기타’항목이 설정되어 있으나 본고는 ‘소계Ⅰ’ 항목
에 수치만 반영하고 항목 자체는 생략했다.
28) <부표 3: 식민지 조선의 ‘민족별’ 인구 규모와 비중>(문명기, 「식민지시대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 패턴과 그 함의」, 50-51쪽)에 근거했다.
20세기 전반기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와 귀환 … 527
식민지 조선의 경우에는 만주로의 농업이민, 내지로의 노동이민 등의
결과 1926년에 이미 역외이주 규모가 100만 명을 넘어섰고, 1938년의
200만 명 돌파에 이어 1943년에는 무려 400만 명에 가까운 조선인이 역
외로 이주했다. 1926년에 역외이주 조선인(<표 2>의 a)이 조선인 총인
구(<표 2>의 a+b)의 5.16%를 기록한 데 이어 1938년 8.72%, 1943년
13.84%까지 도달했다.29) 즉 1945년 현재 한반도에 거주한 인구가 2,500
만 명 정도였던 데 반해 한반도 바깥에 거주한 인구는 400만 명으로 한
반도 거주 인구의 16%를 차지했다. 1910년 현재 역외이주 조선인의 규
모가 전체 조선인 인구의 1.6%에 불과했음을 고려하면(<표 2>의 1910
년 항목), 이 역시 한국인구사에서 하나의 중요한 획기라고 말할 수 있
을 것이다.
조선인이 만주나 일본 내지로 대거 이주하게 된 원인을 간략하게 정
리해보자. 먼저 조선인의 만주 이민은 대체로 1840년대부터 시작되었는
데, 1869-70년의 연이은 자연재해에 따른 흉작으로 인하여 조선 북부를
중심으로 이주 조선인이 급증했다. 특히 1880년 함경도 회령부사 洪南
周의 적극적인 越墾 장려로 실현된 소위 庚辰開拓을 통해 회령부의 두
만강 북안에 100여 정보에 달하는 평야가 개간되는 등30) 20세기 초까지
간도 및 동변도 20縣의 대부분이 조선인의 개척지가 되기에 이른다. 그
결과 1860~1908년의 50년 간 재만 조선인 누적 인구는 20만 명에 달했
다.31) 1910년 이후에도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 그리고 1932년 성립한
만주국의 조선인 정책과 경제국면의 변동에 따라 부침이 있었지만, 식
29) 1935년 현재 일본 내지 이외의 지역(조선, 대만, 카라후토, 남양군도, 관동
주, 만주국, 기타 외국)으로 이주한 일본인(내지인)이 총 2,505,866명, 전체
내지인 인구의 3.52%인데 반해(도노무라, ?재일조선인 사회의 역사학적 연
구?, 87쪽), 같은 해 조선 이외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은 1,671,273명, 전체
조선인 인구의 7.39%였다(<표 2>의 1935년도 항목).
30) 김형종, ?1880년대 조선-청 공동감계와 국경회담의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
문화원, 2018, 476쪽. 보다 상세한 내용은 같은 책의 제2장 제2절(70-92쪽)
을 참조.
31) 김경일·윤휘탁·이동진·임성모 지음, ?동아시아의 민족이산과 도시?, 28-31쪽.
528 … 한국학논총 (50)
민지시대 내내 조선인의 만주 이주는 꾸준히 진행되었다. 그 결과 1943
년 현재 1,634,000명(<표 2>)(또는 1,777,423명)32)의 조선인이 만주에서
생활했다.33)
이들의 이주에는 한일합방이라는 정치적 요인이나34) 鮮滿拓殖株式會
社가 주도한 집단이주 등의 정책적 요인도 작용했지만,35) 경제적 요인
이 가장 중요했음은 대체로 기존 연구가 일치하는 편이다. 예컨대 조선
인의 만주 이민은 “하나의 活路로의 진출이고 飢者의 出奔이고 旣知의
死地로부터 未知의 死地로의 흐름”이어서 “조선 농민 만주유입의 직접
동기가 생활본능에 있음”은 명확했다.36) 실제로 재만 조선인 농민을 대
상으로 한 조사에서, 이주 동기가 금전부족 67%, 사업실패 12%, 농업경
영 9% 등으로 경제적 요인이 90%를 차지하는 실정이었다.37)
다음으로 조선인의 내지 이주는 1919년까지 연간 1만 명 이내였던 시
기를 거쳐 1920년대부터 급증하기 시작했고, (관동대지진의 영향으로
일시 감소도 있었으나) 1920년대 후반 이후 매년 10만 명 전후의 조선인
이 내지로 이주했고, 1939년 이후 내지 기업의 단체모집이나 官斡旋·징
용 등의 형태를 취하면서 더욱 늘어나게 된다. 그 결과 1943년 현재 재
일 조선인은 1,946,047명(<표 2>)(또는 1,894,623명)38)에 달하게 된다.
이러한 대규모 내지 이주를 이끈 요인 역시 기본적으로는 경제적인
32) 박경숙, 「식민지시기(1910-1945) 조선의 인구 동태와 구조」, 47쪽.
33) 만주 지역 조선인의 규모에 관한 정확한 통계는 여러 면에서 얻기가 쉽지
않다. 만주국의 인구 증가는 자연적 증가와 (인구의 유출입으로 생겨나는)
사회적 증가 외에 ‘발견 증가’라는 용어를 사용할 정도로 정확한 인구 파악
은 쉽지 않았다(김경일·윤휘탁·이동진·임성모 지음, ?동아시아의 민족이산
과 도시?, 48-49쪽).
34) 김경일·윤휘탁·이동진·임성모 지음, ?동아시아의 민족이산과 도시?, 31쪽.
35) 임성모, 「만주농업이민정책을 둘러싼 관동군·조선총독부의 대립과 그 귀결」;
정안기, 「만주국기 조선인의 만주 이민과 鮮滿拓殖株式會社」 등을 참조.
36) 滿洲帝國協和會中央本部 調査部, ?國內における鮮系國民實態?, 2-3쪽, 김경
일·윤휘탁·이동진·임성모 지음, ?동아시아의 민족이산과 도시?, 39쪽에서
재인용.
37) 김경일·윤휘탁·이동진·임성모 지음, ?동아시아의 민족이산과 도시?, 40쪽.
38) 박경숙, 「식민지시기(1910-1945) 조선의 인구 동태와 구조」, 50쪽.
20세기 전반기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와 귀환 … 529
문제였다. 우선 ① 조선 농촌의 만성적인 경작지 부족과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식계획 등 조선총독부 시책의 영향으로 많은 조선인 농민이 몰락
해간 반면 조선 내부의 노동시장에서는 離農人口를 흡수하지 못했다.
또한 ② 몰락해 가는 농민을 다수 떠안고 있는 조선 남부와 내지가 가까
운 데다 내지 노동시장의 임금이 조선의 임금보다 높았으며, ③ 위험하
고 비위생적이며 장시간에 걸친 노동 등에 조선인이 저임금으로 종사하
는 것을 환영하는 내지 자본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39) 내지 이주 조선
인 대부분은 ‘교육받지 못한’ 노동자로서 대다수가 “조선에서의 생활고
타개를 위해 내지로 온 자들”이며, 따라서 “特種의 기능을 가진 자는 매
우 드물어 대다수는 土工이나 자유노동자 등의 하급노동에 종사하는”
형편이었다.40) 요컨대 조선인의 만주 및 내지로의 대규모 역외이주의
근저에는 조선사회의 경제적 빈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상의 논의를 간단히 정리하면, 대만인의 역외이주는 여러 경제적·
비경제적 요인이 작동하여 식민지시대 내내 대단히 작은 규모로 억제된
반면, 조선인의 역외이주는 주로 경제적 요인에 의해 방대한 규모를 나
타내고 있었다. 이러한 대조적인 현상 자체가 흥미롭고 또 그 원인을 보
다 심층적으로 규명할 필요를 느끼기도 한다. 다만 역외이주 패턴의 차
이와 그 복합적 원인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논의는 별고에 맡기기로 하
고, 본고에서는 식민지시대에 역외로 이주했던 대만인과 조선인의 해방
직후의 행방, 즉 귀환의 규모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이어가고자 한다.
39) 도노무라, ?재일조선인 사회의 역사학적 연구?, 34쪽.
40) 警保局 保安課, <内鮮警察参考資料>, 1939년 7월, JACAR A05020256900,
18-19쪽.
530 … 한국학논총 (50)
4. 귀환 규모(1) - 대만인 및 外省人
우선 대만인의 경우부터 살펴보자. <표 1>에 따르면 1943년 현재 역
외이주 대만인은 56,615명 정도였다. 이를 좀 더 세분해서 살펴보자.
1945년 8월 현재 在日 대만인은 29,581~34,000명 사이였다.41) 在中 대
만인은 1943년의 32,412명이 현재로서는 최대 규모이지만, 1944-45년 사
이에 증가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42) 在滿 대만인은 1940년의 1,497명
보다는 증가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약 3,000명이라고 파악한 기존연구
에 따르기로 한다.43) 이밖에 관동주, 러시아, 카라후토(樺太), 남양군도
등에 거주한 대만인을 최대 1,000명 전후로 어림잡을 수 있다면, 1945년
8월 현재 역외이주 대만인 합계는 65,993명에서 70,412명 사이가 된다.
이 수치는 대만 최후의 총독 안도 리키치(安藤利吉)의 조사에 근거하여
1946년 2월 이전 일본·중국·홍콩·마카오 및 동남아 등지에 있던 대만인
을 66,271명으로 제시한 연구와 거의 일치한다.44) 여기에 전쟁 기간에
동원된 대만인 군인·군속 207,183명(군인 80,433명, 군속 126,750명)에서
41) <終連報丙第24号-昭和21年2月12日-渉外課-GHQ歸引揚及送還実績表>, 昭
和21年2月12日, JACAR C15010093200에 따르면 일본으로부터 귀환 예정인
대만인은 29,581명, 1946년 2월 6일까지 귀환 완료는 12,540명, 귀환 미정은
17,041명이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재일 화교는 증가일로를 걸어, 중일전쟁
종전 시에는 3.4만 명의 대만인을 포함하여 9만 명 정도의 화교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 후 1949년 9월 30일까지 약 4.2만 명이 중화민국(중국 대륙),
약 2.4만 명이 대만으로 귀환했다.”(巽由佳子, 「占領期日本における華僑の出
版物」, ?國會圖書館月報? 658, 2016년 2월, 12쪽 및 註4). 따라서 위의 자료
에 제시된 귀환 예정 대만인 29,581명은 적어도 과대 집계된 수치는 아니다.
42) 巫靚, 「日本帝國崩壞直後の人的移動 - 在日大陸籍者と臺灣籍者の移動の諸
相を中心に」, ?社會システム硏究? 17, 2014, 168-169쪽에 따르면, 1946년 3
월 18일까지 24,054명의 臺灣籍者가 송환되었고, 1946년 12월까지 9,663명
의 臺灣籍者가 이동했다. 이 숫자만 합하면 33,717명의 대만인이 대만으로
송환된 셈이다.
43) 1946년 2월 長春臺灣省同鄕會 회장 郭松根이 臺灣省 行政長官에 제출한 진
정서에 따르면, “동북 지방의 대만 동포는 약 3,000명이다.”(許雪姬, 「戰後在
滿洲臺灣人的迢迢歸鄕路」, ?臺灣學通訊? 102, 2017, 10쪽).
44) 湯熙勇, 「戰後初期旅外臺灣人的返鄕」, ?臺灣學通訊? 102, 2017, 4-5쪽.
20세기 전반기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와 귀환 … 531
<표 3-1> 1945년 이후 대만에 유입된 외성인 규모49)
연도 1946 1947 1948 1949 1950 1951 1952 합계
총수 26,922 34,339 98,580 303,707 81,087 13,564 10,012 568,211
남 18,062 23,594 61,679 199,026 58,604 8,465 6,532 375,962
여 8,860 10,745 36,901 104,681 22,483 5,099 3,380 192,149
남/여 비율 2.04 2.19 1.67 1.90 2.61 1.66 1.96 2.00(평균)50)
전사자 30,304명을 뺀 176,879명이 전부 대만으로 귀환했다고 가정하
고45) 이를 앞서의 65,993~70,412명에 더하면, 242,872~247,291명의 대
만인이 해외에서 귀환했다고 볼 수 있다.46) 이는 1946년의 대만 인구
6,097,117명의47) 3.98~4.06%에 해당된다.48)
하지만 주지하듯이 1945년 8월에서 1950년대 초반에 걸쳐 대만사회는
역외이주 대만인 외에도, 대륙에서 중국공산당에 패하여 대만으로 퇴각
한 국민당 정부를 따라 대만으로 이주하게 된 중국인, 즉 外省人을 받아
들여야 했다. 대만으로 이주한 외성인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한 연
구는 외성인 유입 규모를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 있다.
45) 문명기, 「식민지시대 대만인과 조선인의 야스쿠니신사 합사」, ?중국근현대
사연구? 76, 2017, 4쪽.
46) 다만 재일 대만인의 어느 정도가 귀환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예컨대 1946년
2월 연합군 총사령부가 제정한 <朝鮮人·中國人·琉球人及び臺灣人の登錄に
關する總司令部覺書>에 의거하여 실시한 등록 결과 재일 대만인은 15,906
명이었고, 이 중 일본 잔류 희망자는 3,122명이었다(楊子震, 「帝國臣民から
在日華僑へ - 澁谷事件と戰後初期在日臺灣人の法的地位」, ?日本臺灣學會報?
14, 2012, 73쪽).
47) 林桶法, 「戰後初期到1950年代臺灣人口移出與移入」, ?臺灣學通訊? 103, 2018,
5-6쪽.
48) 李棟明, 「日據時期臺灣人口社會增加之硏究」, ?臺灣文獻? 20-2, 1969, 24쪽의
<表 16: 二次大戰後臺灣人由外地返臺人數統計>에는 동남아시아, 호주, 홍
콩, 태평양제도, 한국, 하와이, 오키나와, 베트남, 시베리아 등지로부터 귀환
한 대만인이 40,194명이라고 제시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태평양전쟁 기간에
파견된 대만인 군인·군속을 포함한 수치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필자는
민간인과 군인을 구분하여 계산하고 있으므로 李棟明이 제시한 이 수치는
귀환 대만인 숫자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다.
532 … 한국학논총 (50)
즉 총 568,211명의 외성인이 대만으로 이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다만
이 수치는 군인을 제외한 민간인의 총합이다. 1969년 이전 대만에서는
軍籍과 民籍이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륙에서 대만으로 유입된
군인을 528,421명으로 추산한 연구에 따르면, 이 기간에 대만으로 이주
한 외성인 합계는 대략 110만~120만 명이 된다.51) 그 결과 나타난 194
6~52년 사이의 인구 변동은 아래와 같다.
49) 林桶法, 「戰後初期到1950年代臺灣人口移出與移入」, 5쪽(근거 자료는 ?中華
民國戶口普査報告書?(제2권 제1책), 721-723쪽).
50) 이러한 성비의 불균형은 해방 이후 대만사회의 잠재적 위협 요인이 될 수
있었다. <표 3-2>에 제시된 외성인 남성 인구에서 외성인 여성 인구를 뺀
수치, 즉 138,813명(①)에 거의 전부가 남성으로 구성된 외성인 군인
528,421명(②), 합계 667,234명에게는 배우자나 그에 준하는 여성이 없었던
셈이다. ①과 ②가 중복 계산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도 최소 40만 명 이상
의 남성이 독신으로 지냈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 해방 직후 이러한 성비
불균형의 문제를 국민당 정부가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는가를 추적하는 것
도 흥미로운 연구 주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1951년부터 臺灣省 保護養女運
動委員會가 추진한 ‘保護養女運動’이 주목된다. 여기서 말하는 ‘養女’란 淸
代 이래 대만의 관습이었던 童養媳(=민며느리)이나 (주로 경제적 이유로
매매되어) 하녀 노릇을 하던 젊은 대만인 여성을 지칭한다. 국민당 中央婦
女運動委員會는 1950년부터 대만 내 양녀 규모의 파악, 양녀 ‘해방’을 위한
각종 선전 활동 및 제도 마련, 양녀를 ‘해방’시킨 이후의 조치 및 각종 권익
보호 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50년 현재 119,546명의 양녀가 ‘발견’되어
이들에 대한 취업 알선을 비롯한 경제적 자립 지원과 결혼 알선 등의 조치
를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그 결과 1960년대 중반이 되면 ‘양녀’는 최소한 제
도적으로 소멸되었다(秦風 編著, ?歲月臺灣, 1900-2000?, 廣西師範大學出版
社, 2005, 50-55쪽). 명분상으로는 ‘여성인권’의 문제로 포착되었지만, 실제
로는 독신 외성인 남성의 ‘배우자 구하기’ 프로젝트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51) 이 중에서 민간인은 약 640,072명, 군인은 528,421명(장교 53,665명 포함)이
었다(葉高華, 「外省人的人數·來源與分布」, ?臺灣學通訊? 103, 2018).
20세기 전반기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와 귀환 … 533
연도 유입(명) 유출(명) 증감(명)
총인구1
(1,000명)
총인구2
(1,000명)
1946 26,576 8,253 18,323 6,090 6,241
1947 37,726 9,819 27,907 6,495 6,521
1948 80,942 10,987 69,955 6,806 6,816
1949 374,535 36,752 337,783 7,397 7,538
1950 179,389 73,426 105,963 7,554 7,885
1951 46,075 9,158 36,917 7,869 8,046
1952 41,763 9,012 32,743 8,128 8,311
(군인) 528,421 - 528,421
<표 3-2> 1945년 이후 대만 인구의 유입과 유출
위 표에서 ‘총인구1’은 ?臺灣省統計提要?와 ?臺灣光復二十五年? 등의
일차 자료의 수치를 그대로 옮겨온 것이고,52) ‘총인구2’는 기존의 자료
와 연구를 보정한 수치이다.53) 이들 연구결과에 따르면 1946년 시점에
서 609만~624만 명 사이였던 인구가 불과 6년 만에 812만~831만 명으
로 급증했다. 대만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1946년 인구 기준) 19%의 외
성인과54) 4%의 귀환 대만인, 합계 23%의 인구를 추가로 부양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불과 6년 사이에 23%나 급증한 인구를 대만
사회에 여하히 안착시키는가의 문제는, 국가권력과 민간사회를 막론하
고 대단히 부담스러운 과제였음에 틀림없다.55)
52) 林桶法, 「戰後初期到1950年代臺灣人口移出與移入」, 6쪽.
53) 劉士永, ?光復初期臺灣經濟政策的檢討?, 稻鄕, 1996, 41-42쪽.
54) 이는 외성인 규모의 중간값인 1,150,000명을 1946년 현재 대만 인구
6,100,000명으로 나눈 것이다.
55) 林滿紅, ?四百年來的兩岸分合 - 一個經貿史的回顧?, 43쪽. 이들 외성인이
해방 직후 대만사회에 끼친 영향은 긍정과 부정의 양면이 공존하는데, 이
들 외성인이 일본인의 引揚으로 인한 산업적·기술적 공백을 메워 나간 점
에 대해서는 문명기, 「해방 초기 대만경제의 단절과 연속 – 기술인력 충원
문제를 중심으로」, ?동북아역사논총? 43, 2014를 참조.
534 … 한국학논총 (50)
5. 귀환 규모(2) - 조선인 및 越南者
한국인의 귀환 문제 역시 대만 못지않게 복잡하다. 1949년을 경계로
남한과 북한이 분리되었고 월남자가 월북자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던 점
을 고려해야 한다. 우선 1945년 8월 시점의 재일 조선인 규모에 관해서
는 여러 연구가 다양한 추계를 내놓았는데, 최소 1,241,178명(권태환의
추계)에서 최대 2,100,000명(박경숙의 추계)에 이른다.56) 박경숙은 인구
학적 통계방식을 활용하여 1945년의 재일 조선인을 210만 명으로 추산
했다.57) 도노무라 역시 國勢調査(1940년)로부터의 추계인 2,206,541명과
內務省 警保局의 1944년의 조사결과에 근거해 추계한 1,968,807명(1945
년)의 두 수치를 병기한 후,58) 해방 시점의 재일조선인 규모를 200만 명
이라고 제시했다.59) 본고는 도노무라의 200만 설을 존중하면서도, (조사
누락이나 밀항 등으로 인하여) 일본 정부가 파악하지 못한 재일 조선인
도 있었을 것으로 판단하여, 박경숙의 210만 설을 따르기로 한다.60)
문제는 이 중에서 몇 명의 재일 조선인이 귀환했는가, 또 이들은 남한
과 북한 중 어디로 갔는가, 라는 점이다. 재일 조선인 귀환자는 1950년
11월 19일까지의 통계가 존재한다. 귀환 재일 조선인은 일본정부의 파
악에 따르면 1,040,679명(남한으로 1,040,328명, 북한으로 351명)이고, 실
제 귀국자는 이보다 40만 명 이상 많았다고 보고 있다. 그 결과 140~
150만 명이 귀환했고 일본에 남은 재일조선인은 약 50~60만 정도였
다.61) <外國人登錄令>에 따라 등록된 재일 조선인이 1947년 현재
56) 이에 대해서는 박경숙, 「식민지시기(1910-1945) 조선의 인구 동태와 구조」,
56쪽 참조.
57) 박경숙, 「식민지시기(1910-1945) 조선의 인구 동태와 구조」, 48-51쪽.
58) 도노무라, ?재일조선인 사회의 역사학적 연구?, 61쪽.
59) 도노무라, ?재일조선인 사회의 역사학적 연구?, 389쪽.
60) 이밖에 황선익, 「연합군총사령부의 해외한인 귀환정책 연구」, 77-78쪽은
1945년 9월 25일 후생성 사회국의 자료에 의거하여 1944년 말 재일 조선인
규모를 1,911,307명으로 제시하고 있다.
61) 도노무라, ?재일조선인 사회의 역사학적 연구?, 390-392쪽.
20세기 전반기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와 귀환 … 535
598,507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으로 귀환한 재일 조선인의 규모
는 (210만 명을 기준으로) 150만 명 전후가 된다. 이들은 남한과 북한 중
어디로 귀환했는가?
귀환한 재일 조선인이 당초 자신의 출신지로 귀환했다고 가정한다면,
이들 대부분은 남한으로 갔을 가능성이 크다. 內務省 警保局 자료에 근
거하여 도노무라가 작성한 재일 조선인의 출신도별 비율을 보면, 남한
에 해당하는 충청·경상·전라·경기·강원 출신자가 전체의 96.7%, 북한에
해당하는 평안·함경·황해 출신자가 3.3%였다.62) 자신의 출신지로 귀환
하는 것이 상식이고 실제로도 그러했다면, 남한으로의 귀환이 압도적으
로 많았을 것이다. 전술한 비율대로 귀환자 150만 명을 분할하면, 남한
귀환자가 1,450,500명, 북한 귀환자가 49,500명이 된다.
한편 재만 조선인에 대해서도 다양한 집계와 추계가 행해졌는데, 최
소 1,309,053명(金哲)에서 최대 1,948,375명(박경숙)에 이른다.63) 재만 조
선인 통계는 재일 조선인 통계에 비해 정확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일단
1940년에 실시된 滿洲國臨時國勢調査를 통해 파악된 재만 조선인은
1,450,384명이다.64) 권태환이 제시한 수치는 만주국임시국세조사 결과와
동일하다. 1940~45년 사이에 재만 조선인이 자연증가에 의해 다소 늘었
거나 최소한 그대로였다고 본다면, 권태환이나 김철의 수치는 과소 추
계(권태환) 또는 과소 집계(김철)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점을 고려하
여 필자는 渡滿 시기별 인구에 기초해 이주 당시의 인구규모를 추산하
고, 조선 내에서의 조(粗)사망률과 자연증가율 등을 재만 조선인에 적용
하여 1,948,375명을 산출한 박경숙의 추계에 따르기로 한다.65) 그렇다면
62) 도노무라, ?재일조선인 사회의 역사학적 연구?, 73쪽. 허수열, 「1945년 해방
과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3, 2012, 475쪽은 강원도
의 ½을 각각 남한과 북한으로 나누어 편입시켰으나, 본고에서는 편의상 강
원도 전체를 남한에 편입시키기로 한다.
63) 박경숙, 「식민지시기(1910-1945) 조선의 인구 동태와 구조」, 56쪽.
64) 「康德七年滿洲國臨時國勢調査に依る確定人口の發表」, ?人口問題硏究? 3-10,
1942, 72쪽.
65) 박경숙, 「식민지시기(1910-1945) 조선의 인구 동태와 구조」, 44-48쪽.
536 … 한국학논총 (50)
이들 재만 조선인은 해방 이후 몇 명이 귀환하였으며, 이들은 또 남한과
북한 중 어디로 갔는가?
우선 귀환자의 규모를 보자. 1953년 중국정부가 실시한 인구센서스
결과 (舊滿洲國 영토를 포함한) ‘在中’ 조선인은 111만 여 명으로 집계되
고 있다.66) 여기에 1945~53년의 ‘재중’ 조선인의 자연증가를 고려하여
해방 시점의 ‘중국 잔류’ 조선인 규모를 계산하면 964,114명이 된다.67)
따라서 만주에서 한반도로 귀환한 조선인은 984,261명(1,948,375명[박경
숙의 추계] ― 964,114명[‘중국 잔류’ 조선인])이 된다.68) 이들이 남한과
북한 중 어디를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재일 조선인의 경우와 같은 방
식, 즉 출신지로의 귀환이라는 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
문제는, 재만 조선인이 1880년대부터 1945년까지 장기간에 걸쳐 단속
적으로 이주했고 이주한 후에도 만주 내의 다른 지역으로도 이동한 데
다, 만주국 정부의 인구파악 능력이 상대적으로 뒤떨어져서, 재만 조선
인의 출신지 파악 역시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예컨대 1932년의
조선 남부·북부 출신 재만 조선인의 지역별 분포조사에 따르면 전체
494,958명의 재만 조선인 중에서 북부 출신 재만 조선인은 438,728명
(88.6%), 남부 출신 재만 조선인은 56,230명(11.4%)이었다. 하지만 이를
南滿洲와 北滿洲로 나누어보면, 간도를 포함한 남만주에서 북부 출신
재만 조선인은 90.8%, 남부 출신 재만 조선인은 9.2%인데 반해, 간도에
66) 박경숙, 「식민지시기(1910-1945) 조선의 인구 동태와 구조」, 55쪽.
67) 이때의 자연증가율은, 편의상 1953년과 1964년 조선족 인구(1,111,274 →
1,348,594)의 연평균 인구성장률(17.6‰)로 계산했다(박경숙, 「식민지시기
(1910-1945) 조선의 인구 동태와 구조」, 44쪽). 이 방식으로 계산하면 1953
년 1,111,274명, 1952년 1,091,716명, 1951년 1,072,502명, 1950년 1,053,626명,
1949년 1,035,082명, 1948년 1,016,865명, 1947년 998,968명, 1946년 981,386
명, 1945년 964,114명이 된다.
68) 김춘선, 「동북지역 한인의 귀환과 현지 정착」, 170쪽은 연변대학에 소장된
<東北收復區全僑民代表大會報告各地韓僑現況要記>에 근거하여 해방 후
80여 만 명의 한인들이 귀환했다고 파악하고 있다. 또 한상복·권태환, ?중
국 연변의 조선족 – 사회의 구조와 변화?,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3, 35-36
쪽은 간도 지역으로부터의 귀환이 전체 인구의 25%에 조금 못미치는 15만
명, 다른 지역의 경우 50%가 넘는 55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20세기 전반기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와 귀환 … 537
비해 시기적으로 뒤늦게 진출한 북만주에서 북부 출신 재만 조선인은
48.1%, 남부 출신 재만 조선인은 51.9%였다.69) 일단 지역적 편차가 크
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남부 출신과 북부 출신의 비율은 시간적 추이에 따라서도 큰
편차를 보였다. 예컨대 ?在滿朝鮮人事情?(1933)에 따르면 재만 조선인
497,748명 중에서 남부 출신은 77,039명(15.5%)이고 나머지 84.5%가 북
부 출신이었다.70) 반면 동일한 자료에 수록된 통계이면서도 앞의 수치
와는 전혀 다른 수치를 제공하는 자료도 있다. ?在滿朝鮮人事情?의 다
른 부분에서는 延吉縣·和龍縣·汪淸縣·琿春縣의 조선인 406,341명 중 남
부 출신은 93,953명(23.1%)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난다.71) 네 현 모두 間
島省임을 감안하면, 전술한 1932년도 남부/북부 출신별 조선인의 분포
에 비해 남부 출신의 숫자가 훨씬 많다. 동일한 자료 내에서도 편차가
꽤 크게 나타난 것이다.
다만 1934년을 경계로 전체적인 이주 패턴이 변화한 점에 주목할 필
요가 있다. 1934년 이전의 조선인 이주가 간도 지방에 집중되었던 것과
달리, 1934년부터는 인구가 희박하고 농경지는 풍부한 북부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에 따라 北滿洲와 南滿洲의 조선인 인구증가율은 현
저한 차이를 보였다. 예컨대 1935~36년을 비교하면 남만주의 인구증가
율이 8.3%인데 반해 북만주는 35.2%로 4배 이상 높았다.72) 이러한 여러
요인들을 고려할 때, 1940년대 초 시점의 재만 조선인 중에서 남부 출신
과 북부 출신의 비율은 3:7 정도로 추산된다.73) 이에 근거하여 재만 조
선인 귀환자 총수(984,261명)를 3(남한):7(북한)로 분할하면, 295,278명은
남한, 688,983명은 북한으로 이주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어서 在中 조선인의 귀환인데, 우선 1945년의 재중 조선인을 도노
69) 김경일·윤휘탁·이동진·임성모 지음, ?동아시아의 민족이산과 도시?, 56쪽.
70) 滿洲國 民政部 總務司 調査科 編, ?在滿朝鮮人事情?, 新京, 1933, 20-22쪽의
<第4表: 移住朝鮮人出身道別表>(大同元年(1932) 12월 조사).
71) 滿洲國 民政部 總務司 調査科 編, ?在滿朝鮮人事情?, 200-201쪽.
72) 김경일·윤휘탁·이동진·임성모 지음, ?동아시아의 민족이산과 도시?, 53-54쪽.
73) 김경일·윤휘탁·이동진·임성모 지음, ?동아시아의 민족이산과 도시?, 59쪽.
538 … 한국학논총 (50)
무라가 제시한 1943년 인구 86,564명이라고 보기로 한다.74) 이 중에서
몇 명이 귀환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황선익에 따르면 1946년 2월 현재
송환 예정인 조선인은 55,260명이었다.75) 하지만 1945년 8월부터 1946년
1월 사이에 연합군총사령부의 송환계획과 상관없이 개별 귀환한 사례도
있고, 또 해당 송환계획 종료 후에도 귀환할 수 있었음을 고려하면, 송환
예정인원이 실제귀환인원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1946년 6월 ?조선
일보?의 기사로 미루어보아76) 12,000명 정도가 중국 잔류를 선택한 것
으로 간주한다면, 전체 86,564명 중 12,000명을 뺀 74,564명이 귀환한 것
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역시 이들이 남한과 북한 중 어디로 귀환했는가의 문제인데,
재일·재만 조선인의 사례와 달리 재중 조선인의 도별 분포를 보여주는
자료는 현재까지 필자가 찾지 못했다.77) 때문에 편의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남북한 인구를 분할하는 것이 가능한 연도인 1941~44년의 4년
간의 남북한 인구의 비율을 구하여, 재중 조선인 귀환자를 남북한으로
분할하고자 한다.78) 계산 결과 1941~44년 북한 인구는 조선 인구의
37%, 남한 인구는 63%였다. 이 비율로 재중 조선인 귀환자 74,564명을
분할하면, 남한 귀환자는 46,975명, 북한 귀환자는 27,589명이 된다.
在臺 조선인에 관해서는, ?臺灣戶口統計?(1943年版)에 제시된 2,775명
을 1945년 8월 시점의 재대 조선인 규모로 간주한다.79) 귀환 상황을 보
74) 도노무라 ?재일조선인 사회의 역사학적 연구?, 83쪽.
75) 황선익, 「연합군총사령부의 해외한인 귀환정책 연구」, 국민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2, 133쪽.
76) 황선익, 「연합군총사령부의 해외한인 귀환정책 연구」, 149쪽.
77) 조선인의 귀환 업무에 활용될 조선의 항구로 부산·인천 및 목포가 지정되
기는 했지만(황선익, 「연합군총사령부의 해외한인 귀환정책 연구」, 132쪽),
귀환 항구가 모두 남한에 있다고 해서 이들이 모두 남한으로 귀환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78) 남북한으로 분할한 조선 인구(1941-1944년)는 김낙년, ?한국의 장기통계?,
519쪽에 의거했다.
79) 황선익, 「해방 후 대만지역 한인사회와 귀환」, ?한국근현대사연구? 34,
2005, 204쪽. 1945년 8월 시점에서 대만에 체재한 조선인은 군인·군속과 민
간인을 합하여 4,000~5,000명으로 추산되는데(같은 글, 205쪽), 본고에서는
20세기 전반기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와 귀환 … 539
면, 우선 1946년 8월 이전에 귀환한 인원이 약 2,000명이다. 이후 1947년
2월 臺灣省政府가 작성한 귀환자 명단에는 71명이 기재되었다.80) 또 같
은 시점의 대만 거주 조선인은 358명이었다.81) 이후 臺灣韓僑協會의 파
악에 의하면 약 400명의 한국인이 대만에 거주하고 있었다.82) 이로 미루
어 보아 재대 조선인 귀환자는 약 2,375명(2,775-400)이라고 추정된다.
다행히 재대 조선인의 경우 도항자 및 귀항자의 출신도별 통계가 193
6~38년의 3년에 걸쳐 제시되어 있어서 귀환자를 남북한으로 분할할 수
있다.83) 도항자를 기준으로 보면, 1936년은 409명 중 남부 출신 309명
(76%), 북부 출신 100명(24%), 1937년은 435명 중 남부 출신 341명
(78%), 북부 출신 94명(22%), 1938년은 575명 중 남부 출신 513명(89%),
북부 출신 61명(11%)이었다. 3개년 평균은 남부 출신 82%, 북부 출신
28%이다. 이 비율을 재대 조선인 귀환자 2,375명에 적용하면, 남부 출신
1,948명, 북부 출신 427명이 된다.
사할린 거주 조선인은 1945년 시점의 규모가 다양하게 주장되어 왔
다. 7,800명 설, 15,000명 설, 23,498명 설, 43,000명 설 등 다양한데,84) 여
기서는 가장 최근에 수행되었고 논리적으로도 정합적이라고 판단되는
연구의 견해에 따라 25,000명이라고 간주한다.85) 그런데 사할린 거주 조
선인의 귀환을 담당한 것은 소련 당국이었다. 소련 당국의 방침은 사할
군인·군속을 따로 계산하므로 군인·군속 숫자는 일단 포함시키지 않는다.
80) 황선익, 「해방 후 대만지역 한인사회와 귀환」, 212쪽 및 214쪽.
81) 楊子震, 「戰後初期臺灣における脫植民地化の代行 – 國民政府の對在臺冲繩
人·朝鮮人政策を中心に」, ?國際政治? 162, 2010, 49-50쪽.
82) 황선익, 「해방 후 대만지역 한인사회와 귀환」, 217-218쪽.
83) ?대만총독부통계서?(1936년판), 72-73쪽; ?대만총독부통계서?(1937년판), 64-65
쪽; ?대만총독부통계서?(1938년판), 64-65쪽.
84) 사할린 거주 조선인의 숫자에 관한 다양한 주장 및 통설의 근거에 대해서
는 김민영, 「사할린 한인의 이주와 노동, 1939-1945」, ?국제지역연구? 4-1,
2000, 27-32쪽에 상세하다.
85) 한혜인, 「사할린 한인 귀환을 둘러싼 배제와 포섭의 정치」, ?사학연구? 102,
2011, 170-171쪽에 따르면, 1944년의 인구 통계가 25,435명, 1946년 5월 소
련의 주민등록제 실시에 즈음하여 조사된 인구가 22,777명, 1946년 7월 사
할린 인구조사에 의한 결과가 23,498명이었다.
540 … 한국학논총 (50)
린 거주 조선인을 북한으로 송환함과 동시에 귀환 조선인의 모든 사유
재산을 북한 정부에 양도하는 것이었다.86) 다만 실제로 얼마나 북한으
로 송환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947년 사할린 거주 조선인 233명을
興南으로 송환한 공식기록 외에 ‘樺太抑留韓國人會’ 회장 박노학의 증언
에 근거한 ‘8,000명 북한 송환’ 주장 정도가 있는 실정이다.87) 다만 북한
당국이 일본인의 留用과 재일동포의 북한 송환에 적극적이었던 점 등을
감안하고, 소련 당국이 북한 당국의 요청에 소극적이지 않았을 것으로
가정하여, 일단 8,000명 북한 송환 주장을 수용하기로 한다.88)
마지막으로 아시아태평양전쟁 기간에 동원된 조선인 군인·군속은
242,341명이고 전사자는 22,182명이므로 귀환 가능자는 총 220,159명인
데,89) 이들 또한 출신도별 인원에 대한 정보가 없다. 전술한 1941~44년
남북한 인구비례로 분할하면 남한 출신은 152,675명(63%), 북한 출신은
89,666명(37%)이 된다.
이상으로 불충분하나마 1945년 8월 시점의 역외이주 조선인이 어떤
규모로, 그리고 남북한 중 어디로 귀환했는지를 개략적으로 검토해보았
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86) 황선익, 「연합군총사령부의 해외한인 귀환정책 연구」, 177쪽.
87) 한혜인, 「사할린 한인 귀환을 둘러싼 배제와 포섭의 정치」, 171-172쪽.
88) 시베리아 거주 조선인의 경우는 주로 소련 당국에 의한 일본군 억류 및 점
진적인 송환과 관련하여 소련군의 포로가 된 조선인의 사례로서 귀환이 논
의되고 있다. 예컨대 1948년 12월 20일 흥남으로 귀환한 조선인 포로 2,161
명 등이 그것이다(황선익, 「연합군총사령부의 해외한인 귀환정책 연구」,
170-171쪽). 다만 이때의 조선인 포로는 대개 군인 또는 군속이었을 것이
고, 후술하는 조선인 군인·군속의 범주로 묶어 다룰 것이므로 따로 계산하
지는 않는 것으로 한다.
89) 문명기, 「식민지시대 대만인과 조선인의 야스쿠니신사 합사」, 7쪽.
20세기 전반기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와 귀환 … 541
이주 지역 일본 만주 중국 대만 사할린 군인·군속 총계
조선인 수
(1945년 8월)
2,100,000 1,948,375 86,564 2,775 25,000 220,159 4,382,873
남한 귀환 1,450,500 295,278 46,975 1,948 0 138,700 1,933,401
북한 귀환 49,500 688,983 27,589 427 8,000 81,459 855,958
귀환 합계 1,500,000 984,261 74,564 2,375 8,000 220,159 2,789,359
귀환 비율 71.42 50.52 86.14 85.59 32.00 100.00 63.64(평균)
<표 4-1> 역외이주 조선인의 귀환 규모와 귀환 지역, 1945~195090)
위 표에 따르면 1945년 8월 현재 역외이주 조선인은 총 4,382,873명,
귀환자는 2,789,359명이다. 이 귀환자 규모는 이제까지 기존 연구에서 제
시된 최대치(2,535,000명)보다는 다소 크다. 다만 재일·재만 조선인의
1945년 인구 규모는 박경숙의 추계를 따른 것인데, 박경숙의 추계는 민
간인과 군인을 구분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별다른 언급이
없다는 것은 민간인과 군인·군속을 구분하지 않고 통합해서 추계했음을
뜻할 것이다. 때문에 필자의 계산에는 민간인과 군인·군속이 중복되었
을 가능성이 있다. 이 점을 감안하면 필자가 계산한 해외거주 조선인 귀
환자의 규모는 2,569,200명(군인·군속 귀환자 제외)~2,789,359명(군인·
군속 귀환자 포함) 범위 내에 있고 이 중 최소치는 박경숙의 추계와 거
의 차이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1945~50년(한국전쟁 이전) 사이에 38
선을 경계로 하여 남한과 북한 사이에도 인구이동(월남과 월북)이 있었
다는 점이다. 주한미군 정보보고서(G-2보고서)에 따르면91) 38선 이북
90) 표에 제시된 지역 외에도 해방 전후한 시기에 시베리아 지역, 인도네시아
자바 지역, 하와이 포로수용소, 중부 태평양지역 등에도 한인들이 소규모이
지만 생존해 있었던 것 같다(장석흥 외 지음, ?해방 전후 국제정세와 한인
의 귀환?, 197-292쪽). 다만 이들 역시 대부분은 군인·군속이거나 일본군
위안부의 신분이었고, 따라서 중복 계산의 우려가 있어서 역외이주 조선인
규모 추산에서는 제외했다.
91) 해당 보고서는 상당히 정밀하고 신뢰도도 높은 편이어서 해방 직후의 인구
이동 상황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김두섭, 「미군정기 남한 인구 재
542 … 한국학논총 (50)
(중국/만주/북한) → 남한으로의 인구이동은 1945년 511,484명, 1946년
188,176명, 1947년 149,816명, 1948년 110,842(113,664)명 등으로, 1945~
48년 사이에 38선 이북에서 남한으로 이동한 인구는 963,140명에 달한
다.92) 이 100만 명에 가까운 38선 이북에서 남한으로의 이동 중 만주로
부터의 이동(=귀환)과 북한으로부터의 이동(=월남)의 각각의 비중을 찾
아내는 것이 과제가 된다. 필자로서도 별 뾰족한 방법은 없는데, 일단 기
존 연구에서 제시된 관련 통계와 <표 4-1>을 대조해가면서 이 문제를
검토해보자.
해방 직후부터 1949년까지 해외와 북한으로부터 유입된 인구에 관해
서는 네 종류의 통계가 존재한다. ① 조선은행이 발간한 ?경제연감?
(1949)에 수록된 외무부 조사결과(219만), ② 한국산업은행이 발간한 ?한
국 산업경제 10년사?(1955)에 수록된 사회부 조사결과(248만), ③ Kwon,
Tai Hwan(권태환)의 Demography of Korea(1977)의 추계(253.5만) 및
④ 김두섭에 의한 추계(210.1만).93) 이 중 ①과 ②는 외무부와 사회부에
구성」,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미군정기 한국의 사회변동과 사회사
Ⅰ?, 한림대학교 출판부, 1999, 155-156쪽).
92) 1948년의 괄호 안의 수치(113,664명)는 38선으로부터의 이동과 일본으로부
터의 이동을 합한 수치(누계 기준)이기는 하지만, 일본으로부터의 이주가
거의 완료된 시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부분이 38선으로부터의 이주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일본 정부가 파악한 1948년의 재일 조선인 귀환자는
2,822명에 불과했다(괄호 밖의 수치 110,842 = 113,664–2,822). 일본 정부가
파악한 ‘귀환자’ 수치와 주한미군 정보보고서가 파악한 ‘일본으로부터의 이
동’ 수치는 대단히 근접해 있다. 예컨대 1945년 8월부터 1946년 말까지의
이동 규모는 각각 1,023,338명(일본 정부 파악)과 1,133,458명(주한미군 파
악)으로 양자의 차이는 110,120명이지만, 일본 정부가 파악하기 힘든 ‘불법
적인’ 루트를 통해 한국으로 귀환한 재일 조선인이 적지 않았을 거라는 점
을 고려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편차라고 판단된다. 1947년의 경우에도
각각 8,392명(일본 정부 파악)과 8,544명(주한미군 파악)으로 거의 근사한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일본 정부 파악 ‘귀환자’ 수치는 도노무라, ?재일조선
인 사회의 역사학적 연구?, 392쪽에 따랐고, 주한미군 파악 ‘일본으로부터
의 이동’ 수치는 이용기·김영미, 「주한미군 정보보고서(G-2보고서)에 나타
난 미군정기 귀환·월남민의 인구이동 규모와 추세」, ?한국역사연구회회보?
32, 1998, 21쪽의 표에 나뉘어 기록된 것을 필자가 합산한 것이다).
93) ①②③은 김낙년, ?장기통계?, 2012, 321쪽, ④는 권태환·김두섭, ?인구의 이
20세기 전반기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와 귀환 … 543
의한 ‘집계’이고, ③과 ④는 인구학적 방법론에 의한 ‘추계’이다.
우선 ‘집계’에 해당하는 ①(외무부)과 ②(사회부)부터 살펴보자. ①에
따르면, 북한으로부터의 이동은 248,228명이 되고,94) ②에 따르면
538,228명(2,480,000 – 1,941,772)이 된다. 따라서 ①의 경우에는 만주/북
한으로부터의 이동(963,140명, G-2보고서) 중에서 만주로부터의 귀환
(714,912명)이 74%, 북한으로부터의 월남(248,228명)이 26%가 되고, ②
의 경우에는 귀환(424,912명)이 44%, 월남(538,228명)이 56%가 된다.
다음으로 ‘추계’에 해당하는 ③(권태환)과 ④(김두섭)는 두 연구자의
추계 결과를 그대로 옮겨보자. 같은 방식으로 계산할 경우 ③에 따르면
월남은 740,000명, 일본으로부터의 귀환은 1,379,000명, 만주 및 기타 지
역으로부터의 귀환은 416,000명이다. 따라서 ③의 경우 귀환은 약 40%
(416,000명), 월남은 약 60%(740,000명)이 된다. ④에 따르면 월남은
541,000명, 일본으로부터의 귀환은 1,111,000명, 만주 및 기타 지역으로
부터의 귀환은 449,000명이다. 따라서 ④의 경우 귀환은 약 45%, 월남은
약 55%가 된다.
이상의 네 종류의 집계/추계를 대조해보자. 우선 ①(외무부)과 ④(김
두섭)는 역외이주 조선인의 귀환 규모에 있어서 필자의 계산(2,569,20
0~2,789,359명, <표 4-1>)과 차이가 꽤 난다. ①은 40~60만 명, ④는
50~70만 명이나 된다. 역외이주 조선인의 (남한으로의) 귀환 인구를 과
소 집계(①) 또는 추계(④)했다는 혐의가 없지 않다.95) 더구나 ①의 집
계는 1949년 말까지의 귀환 인구 전체를 파악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보면 추가적인 귀환 인구가 계산에 포함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④
해?,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255쪽)을 참조.
94) 2,190,000(해외로부터 남한으로의 이동[북한으로부터의 이동 포함, 조선은
행]–1,941,772(해외로부터 남한으로의 이동[북한으로부터의 이동 제외],
<표 2>) = 248,228명.
95) 물론 남한으로의 귀환만 놓고 보면 필자의 계산으로는 1,941,772명으로 ①
(외무부)과 ④(김두섭)의 추계보다 적지만, 북한 귀환 인구의 상당수가 월남
했음을 고려하면 과소 집계/추계되었다는 의미이다. 월남 인구만 보면 ①~
④의 집계/추계에서 최소 248,228명(①)부터 최대 740,000명(③)에 이른다.
544 … 한국학논총 (50)
연도
해당 시점의 인구(stock) 증감(flow) 추계 결과
총인구 한국인1 한국인2
자연
증가
국제
이동
한국인 외국인 총인구
1945.9.1 16,136 16,136 16,136 441 16,577
1946 16,465 329 1,853 18,319 35 18,354
1947 16,868 403 466 19,188 23 19,211
1948 17,281 413 215 19,816 21 19,837
1949.5.1 20,189 20,167 17,632 351 (2,535) 20,167 22 20,189
(1949.5.1) 19,904 19,904 19,904 22 19,926
1950 20,404 500 20,404 22 20,427
195397) (646)
의 추계는 과소 집계의 혐의가 있는 ①보다 규모가 더 작다. 결국 필자
가 보기에 상대적으로 더 신뢰할 수 있는 수치로는 ②와 ③이 남는데,
두 수치 간의 해외로부터의 귀환 인구의 차이는 5.5만 명으로 상당히 작
다. 또 귀환과 월남의 비율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으며, 필자 나름대
로 수행한 추산의 최소치(2,569,200명)와 거의 일치한다. 상대적으로 신
뢰할 만한 수치라고 판단된다.
다만 여기서는 1945~50년 남한의 인구 규모를 제시한 최근의 추계를
활용하기 위하여 ③(권태환)을 채택하기로 한다.96) ③을 채택하여 194
5~50년 남한 인구의 추이를 보이면 아래와 같다.
<표 4-2> 남한의 인구 추계, 1945-1950(단위: 1,000명)98)
96) ③(권태환 추계)는 북한 및 만주 기타 지역으로부터의 인구 유입의 합계는
1,156,000명이고 북한으로부터의 유입인구는 74만 명에 달한다. 북한으로부
터의 유입인구가 지나치게 많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
지는 않은 것 같다. 북한으로부터의 유입인구에는 1945년 이전부터 북한에
거주하던 인구만이 아니라, 만주나 중국으로부터의 귀환자가 북한을 경유
하여 남한으로 유입된 사례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97) 권태환, ?인구의 이해?, 255쪽은 1950~53년 사이에 북한에서 남한으로
646,000명의 인구유입이 추가로 발생했다고 파악하고 있다.
98) 김낙년, ?한국의 장기통계?, 2012, 320-321쪽. 이 표에서 ‘한국인1’은 센서스
결과로 제시된 한국인 인구이고 총인구는 거기에 외국인이 포함된 인구이
20세기 전반기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와 귀환 … 545
위 표에 따르면, 1945년 9월 1일 현재 1,614만 명이던 남한 인구가
1950년(한국전쟁 이전)에는 2,040만 명으로 증가하여, 불과 5년 만에 426
만 명의 인구가 증가했다. 5년 만에 약 26%(1945년 인구 기준)의 인구가
증가한 것은, 1945년 이래 6년 만에 약 23%가 증가한 대만의 사례와 유
사한 양상의 인구증가이다. 식민지시대에는 판이하게 다른 역외이주 양
상을 보인 대만과 조선이, 해방 직후 5~6년 사이에는 (外省人과 越南者
라는 변수로 인하여) ‘단기간의 인구 폭증’이라는 공통된 경험을 하게 된
셈이다.
6. 맺음말
이상의 검토를 통해 필자는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 규모, 그리
고 해방 직후 대만인과 조선인의 귀환 규모에 대하여 기존 연구들이 제
시한 수치들을 재확인함과 동시에 해당 수치들에 대한 보다 풍부한 근
거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식민지시대 대만인의 역외이주 전체 규모는
필자가 아는 한 본고에서 최초로 제시했다.99) 이러한 재검토의 결과 그
동안 다소 막연하게 ‘500여 만 명’ 등으로 운위되던 해방 전후 역외이주
조선인의 규모에 대해서도 보다 분명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던 것 같
다.100) 더하여 식민지시대 대만인의 역외이주 및 귀환 규모의 추산을 통
다. 해방 직후(1945.9.1) 남한의 인구는 Kwon(1977, 169-172)의 추계치를
가져온 것이다. ‘한국인2’는 국제이동이 없었을 경우 자연증가에 의해 늘어
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구이다. 국제이동 항목에서 (2,535)는 인구센서스
기간 동안의 누계치이며, 이 역시 권태환의 추계 결과이다. 국제이동에는
越南이나 越北도 포함된다.
99) 예컨대 식민지 대만과 조선의 역외이주에 관한 가장 최근의 연구 결과라
할 수 있는 ?‘帝國의 擴張, 人群의 移動’ 국제학술회의 자료집?(한양대 비교
역사문화연구소·대만 중앙연구원 대만사연구소 공동 개최, 2018년 5월
11-12일)에 수록된 여러 논문들은 개별 주제에 대한 접근으로서는 상당히
뛰어난 연구 결과이지만, 식민지 대만과 식민지 조선의 역외이주 규모와 패
턴을 총괄적으로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546 … 한국학논총 (50)
하여 식민지시대 조선인의 역외이주 경험을 상대화하여 인식할 수 있는
토대를 일부나마 제공한 점도 나름대로 의미를 가진다고 판단된다.
다른 한편으로 본고의 역외이주 규모와 귀환 규모에 관한 추산 결과
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를 절감하는 계기도 되었다. 우선 식민
지 대만의 역외이주 = 소규모, 식민지 조선의 역외이주 = 대규모라는 사
실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들 역외이주 인구의 직업 구성이나 해외 각지
에서의 활동 양상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조사를 통해 두 지역 역외이주
의 전체적인 ‘패턴’을 제시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아울러 식민지시대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 규모가 절대 규모 면에서나 총인구에서 차
지하는 비율의 면에서나 대단히 큰 차이를 보인 원인들에 대해서는 보
다 깊은 천착이 있어야 할 것이다.101) 마지막으로 본고의 귀환 관련 추
산 결과는 해방 직후 대만사회와 남한사회가 ‘단기간의 인구 폭증’에 어
떻게 대응했는지, 특히 단기간에 급증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식량 정
책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호기심을 낳는다. 이에
대해서는 한국과 대만에서 일정한 연구 성과가 제출되어 있긴 하지만,
두 지역을 동시에 다룬 연구는 아직 없다. 비교사적 관점에서 접근할 경
우 한국과 대만의 사례를 개별적으로 접근하는 것과는 다른 시각(예컨
대 미국 원조에의 의존 정도, 식량 자급능력의 편차, 국가권력의 존재양
태의 차이 등)을 제공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102)
100) 예컨대 장석흥 외 지음, ?해방 전후 국제정세와 한인의 귀환?(한인귀환학
술총서1), 15쪽은 “전후 처리 대상에서 500여 만 명에 달하던 해외한인”이
라는 표현이 등장하지만, 이 수치를 정당화할 수 있는 수량적 접근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희박하다.
101) 본고에서 간단하게 언급하기는 했지만, 두 지역의 상이한 역외이주 패턴의
원인을 경제적 요인과 비경제적 요인, 나아가 비경제적 요인은 제도적 요
인과 지정학적 요인 등으로 세분하여 천착할 필요가 있다.
102) 대표적인 연구 몇 개만 꼽자면, 해방 직후 한국의 식량 정책에 관해서는
김점숙, 「미군정의 식량정책과 소비실태」, ?사학연구? 61, 2000; 최영묵, 「미
군정의 식량생산과 수급정책」, ?역사와 현실? 22, 1996 등이 있고, 해방 직
후 대만의 식량 문제에 관해서는 劉志偉·柯志明, 「戰後糧政體制的建立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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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반기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와 귀환 … 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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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 … 한국학논총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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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본고는 식민지시대에 이루어진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 규모와 해방 직
후 몇 년 간에 걸쳐 이루어진 귀환 규모를 추산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했
다. 이를 위해 조선인의 역외이주와 귀환에 관해서는 기존의 다양하고 풍부한
연구에 기대고, 대만인의 역외이주와 귀환에 관해서는 새롭게 자료를 발굴하고
재구성하여 최대한 조선쪽의 통계나 자료와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본고는 또한 필자가 구상하고 있는 식민지시대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
패턴에 있어서의 뚜렷한 차이와 그 원인에 대한 탐구를 위한 예비적 고찰 차원
에서 일단 두 지역 식민지인의 역외이주와 귀환 규모에 대한 대체적인 윤곽을
그리고자 하는 것이다. 두 지역 식민지인의 역외이주와 귀환 규모를 어느 정도
확정하고 나면, 두 지역 식민지인의 역외이주의 패턴의 차이와 그 원인, 그리고
해방 직후의 대규모 귀환에 따른 다양한 사회경제적 문제의 발생과 그 해결 방
향 등에 대한 이해에 관해서도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본문의 검토를 통해 필자는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 규모, 그리고 해방
직후 대만인과 조선인의 귀환 규모에 대하여 기존 연구들이 제시한 수치들을
재확인함과 동시에 해당 수치들에 대한 보다 풍부한 근거를 얻을 수 있었다. 또
한 식민지시대 대만인의 역외이주 전체 규모는 필자가 아는 한 본고에서 최초
로 제시했다. 이러한 재검토의 결과 그동안 다소 막연하게 ‘500여 만 명’ 등으로
운위되던 해방 전후 역외이주 조선인의 규모에 대해서도 보다 분명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더하여 식민지시대 대만인의 역외이주 및 귀환 규모
의 추산을 통하여 식민지시대 조선인의 역외이주 경험을 상대화하여 인식할 수
있는 토대를 일부나마 제공한 점도 나름대로 의미를 가진다고 판단된다.
주제어 : 식민지시대, 대만인, 조선인, 역외이주, 해방, 귀환, 이주와 귀환의
규모
20세기 전반기 대만인과 조선인의 역외이주와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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