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분단과 공간감각의 전환
Ⅱ. 아토피아 북한과 공통기억
Ⅲ. 식민지 근대의 北鮮 표상
Ⅳ. 삼팔선, 월경의 공간감각
Ⅴ. ‘北鮮’의 기억
• 국문초록
삼팔선 분단으로 북한은 텅 빈 공간, 아토피아가 되었다. 남쪽의 대한민국 국민에
게 북한은 감각할 수도 인식할 수도 실천할 수도 없는 공간 아닌 공간이다. 빈 공간은
이데올로기가 채웠다. 그러므로 아토피아가 된 북한을 재공간화할 수 있는 실마리는
근대 이후, 분단 이전의 ‘북선’에 있다.
식민지시대에 처음 등장한 북선의 공간감각은 개척과 식민의 공간, 조선인의 근원
적 정체성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식민권력은 북선을 시찰하고 조사했다. 제국적
규모의 조사사업으로 식민지조선에서 동원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을 기준으로 지
역을 나누고 순위를 산정했다. 그래서 북선은 적은 인구에 군사적 긴장이 상존하는,
그리고 광업, 산림업, 수산업 등이 유망한 낙후지역으로 표상되었다. 식민과 개척, 제
국 통치자의 북선에 대한 공간감각인 것이다. 이에 비해 조선인들의 북선은 근원적
정체성의 공간으로 표상되었다. 북선은 풍성한 문화, 수려한 산천과 동의어였고, 인정
과 풍속, 역사와 여론이 있는 다시 말해 ‘사람이 살고 있는’ 근원적 정체성의 공간이
었다. 식민지 조선인에게 북선은 특유의 의미와 가치를 품은 자부심과 긍지의 공간으
로 표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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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종전과 해방으로 식민지 근대를 양분하던 북선의 공간감각은 붕괴되기 시
작했다. 아토피아화의 기원에는 식민 공간에서 생성된 불안과 공포가 있었다. 일본인
은 물론 고향을 떠나 이주한 조선인에게도 북선은 불안과 공포였고, 안전과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공간으로의 회귀를 촉발했다. 그들에게 삼팔선 분단 소식은 공포 부재
의 공간, 안전과 생활이 보장된 공간, 정체성의 근원적 공간 즉 고향으로의 회귀 불가
능의 감각을 자극했다. 해방기 북선을 가로지르는 월경 서사가 펼쳐진 환경이다. 그러
나 고향을 향한 고난의 여정 속에서 오히려 불안과 공포는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 불
안과 공포를 동반하는 이동은 공간감각을 최소한의 생존감각으로 축소시켰고 이 때문
에 북선의 공간감각은 북선의 사람들에 집중되었다. 북선을 종단하는 동안 만났던 조
선인은 동정적이고 호의적이었다. 북선은 곧 북선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이었고 월경
자들이 경험한 동정과 호의가 탈북선을 자극한 불안과 공포를 소멸시켰다. 조선의 공
간적 총체성이 붕괴되는 순간, 또 감각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으며 실천할 수 있는
‘북선’이 아토피아로 전환되는 분기의 순간, 남선을 선택한 이들에게 북선의 마지막
기억은 조선인으로서의 ‘북선’, 사람으로서의 ‘북선’으로 남았다. 북선의 사람들, 여기
가 ‘북선’ 토피아의 종착지이자, ‘북한’ 토피아의 출발점이다.
주제어 : 북선, 남선, 북한, 남한, 북방, 종전, 패전, 해방, 분단, 삼팔선, 이동, 월경,
귀환, 고향, 공간감각, 아토피아, 공통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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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분단과 공간감각의 전환
분단은 한반도의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창출했다. 민족 개념의 형성 이후,
한반도의 조선인은 하나의 공간적 총체성(globalité)에 둘러싸여 있었다. 조선인들은
조선 외부의 공간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조선인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 조선의 바깥을
삶의 공간으로 감각하지는 않았다. 식민지로 전락한 뒤로도 조선인의 조선에 대한
공간감각은 총체성 내에서 동일성과 차별성이 직조되는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분단은 이 공간의 총체성을 무너뜨렸다.
근대 이전 한반도의 각 지방은 ‘道’와 ‘路’로 상상되었다. 보행이라는 신체적 활동
을 동반하는 ‘길’을 통해 지방의 형상이 그려졌던 것이다. ‘남도’와 ‘북도’, ‘서도’는
그 전통이 이어진 지역명이다. 한성을 중심으로 지방에 이르는 길의 어떤 특징 즉
호수나 고개, 관문을 기준 삼아 ‘호남’, ‘호서’, ‘영남’, ‘관서’, ‘관북’, ‘관동’ 등으로
부르던 것도 길과 보행의 신체성이 새겨진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이리저리 뻗은 길들
로 이어진 전체가 곧 조선인의 공간 총체였고 바다와 봉금을 만날 때까지 조선인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의 끝이 조선의 끝이었다. 길은 근대 이전 공간을 현시하는 대표적
표상체계였고 길이 끊긴 곳에서 조선이라는 공간감각의 경계가 형성되었다.
식민지 근대의 조선, 한반도의 남쪽 지방은 ‘남선’, 북쪽 지방은 ‘북선’이라는 새로
운 이름으로 불렸다. 전에 없던 이 명칭은 기묘하다. 방향을 중심으로 하고 영역적
경계를 갖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에서 여전히 전통적 명칭에 상응하지만, 다른 한편으
로 ‘조선’을 하나의 상대적 위치로 격하한다는 점에서 제국의 시점이 덧붙은 명칭이
다. 일본제국의 한 지방으로서, 본토 내지에 상대되는 식민지 조선과 그 조선 내부에
서의 방향성이 ‘북선’과 ‘남선’이라는 지방 명칭에 담겨 있다. ‘道’에서 ‘鮮’으로의
언어적 전회는 제국 영토 안으로 편입된 조선의 공간적 위상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남선’이나 ‘북선’은 여전히 분할할 수 없는 조선을 전제한 방향적 공간을 지시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내지’에 상대되는 식민지로서 제국 영토의 일 지방이 되었음에도
‘조선’이라는 조선인의 공간적 총체성은 여전히 유지되었고, 총체성의 방향적 분할이
‘남선’과 ‘북선’에 새겨졌던 것이다.
다른 한편, 이 지역명은 공간에 대한 근대적 인식을 함유하기도 한다. 북선은 평안
남북도와 함경남북도 그리고 황해도로 행정구역화된 지역을 이어붙인 상위 공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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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鮮에서 西鮮을 분리하기도 한다 - 이었고, 실측된 지도 위에 명확한 구분선을 지닌
근대적 개념의 공간이기도 했다. 또 생산시설과 자원, 인력 등 산업에 연관된 지리적
특성이 그 공간의 실존적 의미를 형성했다. 행정구역으로서의 공간, 산업지대로서의
공간이 식민지 근대의 ‘북선’ 형상에 녹아있다. 적어도 식민권력의 시각은 명백히
이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북선’에는 식민권력의 시각이 점유하지 못한 조선인들의 공간감각도 여전히 이어
지고 있었고 동시에 근대적 형상으로 부단히 갱신되고 있었다. 조선인들의 ‘북선’은
특히 고향과 명승으로 집약된다. 조상 대대로 부모형제에 이르기까지 삶이 계속된
역사적 터전으로서의 의미와, 금수강산을 장식하는 미적 감흥의 공간감각이 ‘북선’에
담겨 있다. 조선인들에게 ‘북선’은 식민지 근대의 변화상보다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
소로서의 의미가 더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분단은 강점 상태에서도 유지되던 공간감각을 순식간에 붕괴시켰다. ‘남한’
과 ‘북한’ 또 ‘북조선’과 ‘남조선’은, ‘남도’와 ‘북도’와도 다르고 또 ‘남선’과 ‘북선’과
도 전혀 다른 이름이 되었다. ‘남한’ 측에서 ‘북한’은 총체성 내에서 방향을 지시하는
명칭이 아니라 경계를 가진 영토 또는 영토에 준하는 지역을 지시하는 명칭이다.
반대로 ‘북조선’ 측에서 보는 ‘남조선’도 마찬가지이다. ‘북한’은 명료한 경계를 가진
공간이며 ‘남한’에 대응하는 폐쇄 공간이다. 그리고 그 공간은 방법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 ‘수복’되어야 할 공간으로 표상된다. 해방과 분단정부
수립 이후, ‘북한’과 ‘남조선’은 방향성으로 지역을 지시하는 총체적 공간의 개념을
벗어나 이데올로기적 허상이 대신한 아토피아가 되었다.
이에 비해 ‘북선’과 ‘남선’은 ‘북한’ 이전의, ‘남조선’ 이전의 총체적 공간감각을
포함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 식민성의 잔재가 침윤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근대적
공간감각도 함유하고 있다. 근대의 공간이 다만 기하학적 개념이나 지리적 의미만이
아니라, 신체와 감각을 지배하고 인간들의 삶을 규정하고 또 사회적 실천으로 생산되
는 것이라면, 식민지 근대의 ‘북선’은 분단시대의 공간감각을 상대적으로 재인식할
수 있는 지렛대가 된다. 이 지점 즉 ‘북선’의 기억으로부터 아토피아가 되어버린
‘북한’을 재공간화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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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아토피아 북한과 공통기억
‘북한’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있어 텅 빈 공간, 아토피아다. 감각하고 인식하고 실천
할 수 있는 공간성을 상실한 북한은 한국인에게 공간 아닌 공간 즉 반공간(atopie,
atopia)이다. 냉전체제 붕괴 직전인 1989년 3월, 금지된 북한 방문을 결행하던 작가
황석영은 아토피아 북한을 적실히 보여준다. 중국의 입국심사대에 선 황석영은 자신
이 어디로 가는지, 다음 행선지는 어디인지 묻는 질문에 어떠한 장소도 제시하지
못한다.
입국 심사대 앞에 섰을 때, 관리는 통과비자가 찍힌 별지를 찬찬히 들여다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디로 가는가?”
“왜 묻는가?”
나는 느긋하게 그에게 되물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통과비자가 아닌가?”
“그렇다 너의 정부가 찍어 줬다.”
“다음 행선지가 어디인가?”
“말할 수 없다.”
그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면서 여권을 도로 내밀었다.1)
행선지를 묻는 두 차례의 질문에 그는 장소가 아닌 대답을 내놓는다. 먼저는 “왜
묻는가?”라며 되물었고, 나중은 “말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사뭇 다른 대답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가고자 하는 곳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도 두 가지였을 것으로
풀이된다. 두 번째 대답인 “말할 수 없다”는 북한이 철저히 금지된 공간이며 자신의
방문이 비밀리에 수행되고 있는 만큼 작은 여지도 남기지 않아야 하는 상황을 명료하
게 드러낸다. 그런데 “왜 묻는가?”라는 첫 번째 반문형 대답은 다소 복잡한 심리적
의미를 포함한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입국심사대임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화
된 공간감각에 대한 경계가 반사적으로 작동하고 또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1) 황석영, ?사람이 살고 있었네?, 시와사회사, 199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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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공간에 대한 불안도 동시에 드러나는 대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마중
나온 북한 사람에게 스스로를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라는 자의식으로 대할 수밖
에 없었고, 돌아 온 후에도 장편의 북한방문기로서 비어버린 공간을 채워야 했던
것이다. 황석영은 이를 ‘분단의 내면화’라고 지목하는데, 그가 말하는 ‘내면화’란
곧 분단 40여 년간 비어있는 공간을 이데올로기로 채워버린 북한에 대한 한국인의
공간감각과 같은 말이다. 분단과 전쟁 이후, 오갈 수 없는 경계가 그어지며 북한은
구체적 공간성을 상실했다. 대신 유일한 이데올로기적 상상만이 북한을 채웠다. 그리
하여 감각할 수 없는, 인식할 수 없는, 실천할 수 없는 공간이 되었다. 한국인에게
있어 북한은 공간 아닌 공간이 된 것이다.
‘북한’이라는 공간감각의 형성기간은 채 70여년에 불과하다. 식민지시대, 한반도
의 북쪽 지역을 남쪽지역과 대별해 부르는 지명은 ‘北鮮’이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사어가 되어버린 ‘북선’과 같은 시기 사실상의 신어로 등장한 ‘북한’은 한반도의 공간
적 총체성이 큰 변화에 휩싸였음을 시사한다. 특히 식민지시대를 관통해 온 오랜
언어적 관행이 극히 짧은 시간에 대체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을 염두에 두더라도 ‘북선’과 ‘북한’의 반전은 지나치게 극적이다.
이는 이데올로기적 이유에서 한반도의 북쪽을 지칭하는 새 언어가 필요했다는 점,
적대와 공포가 공간을 지칭하는 언어에 강력한 압력을 행사했다는 점, 한반도 공간감
각의 재편이 매우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 등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한반도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생성된 문화적 구조가 ‘북선’과 ‘북한’의 언어적 전환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전환은 다만 언어와 표현의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분단은 인적 이동의 소멸을
불러왔고 이동의 소멸은 휴전선 이북 공간에 대한 한국인의 경험을 단절시켰다. 사실
상 북한에 대한 구체적 공간감각은 북선에 대한 기억 속에 갇혀버렸다. 공간의 분단이
시간의 분단까지 불러 온 것이다. 말하자면 ‘북선시대’와 ‘북한시대’의 분단이다.
그러니 북선에서 북한으로의 전환은 한반도의 시공간적 분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언어적 사건이라고도 할 것이다.
시공간적 분단은 북한이라는 공간을 말 그대로 비어있는 장소로 만든다. 황석영은
앞서 언급한 북한방문기의 제호로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선택했는데, 이 제호는
공간의 분단이 시간의 분단을 만들고 시간의 분단이 다시 인간의 분단으로 이어진
40여 년간의 한반도를 정확히 포착한 문장이라 할 만하다. 북한의 구체적 공간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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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과 손끝에 현현하는 순간, 북한이 ‘사람이 살고 있’는 공간임을 재인식한 작가는
혼란과 당혹 속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분단시대, 한국인에게 북한은 텅
빈 공간이었다.
시공간적 분단과 인간마저 소실되어 버린 북한, 즉 사회적 공간을 부정당한 북한에
남은 것은 다만 영토뿐이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 대한 적대와 공포가 한국인을
지배했고 북한이라는 공간에 ‘소탕’과 ‘박멸’의 상상력을 추가로 작동시켰다. ‘북한’
과 짝을 이루는 어휘로 ‘괴뢰’를 찾아내고 ‘북한괴뢰’, ‘괴뢰군’, ‘괴뢰도당’ 등으로
파생시켰다. 정통성도 실체도 인정할 수 없는 인간집단인 ‘북한괴뢰’는 소탕해 박멸
시켜야 마땅한 존재이며, 빈 공간에 남겨진 산하는 불법점유 상태에 있는 남한의
영토로서 ‘수복’해야 할 영토가 되었다. 시공간의 분단이 인간의 소멸을 낳고 인간이
사라진 땅에 괴뢰의 소탕과 박멸을 통한 영토 수복의 서사가 만연했다. 그리고 반공주
의 또는 승공주의라는 공허한 사회적 의제가 북한이라는 공간을 점령했다. 북한이라
는 공간은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대한민국 국민에게 있어 비어있는
영토로서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월북과 월남을 반복한 끝에 제3국행 선박에
서 결국 죽음에 이르는 ?광장?의 서사도 가능했다.
물론 순수한 의미의 공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은 항상 이데올로기와 연동해
왔고 관점에 따라 다른 형상을 입는다. 그래서 공간은 항상 사회적 의미에서 해석된
다. 이미 아토피아가 되어버린 공간을 아토피아 상태에서 재생시키는 것은 그런 점에
서 무모할 수 있다. 그것은 또 다른 아토피아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상상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다만 아토피아 북한의 기원을 더듬어 본다면 저장된 공통기억으로부터
탈아토피아의 준거점을 확보할 수 있다. 그 공통기억을 부르는 이름이 ‘北鮮’이다.
Ⅲ. 식민지 근대의 北鮮 표상
한국인에게 아토피아이자 무인영토가 되어버린 북한의 공간성은 회복될 수 있을
까? 그 단초는 근대 이후, 분단 이전의 북한에 있다. 전 근대 북한 지역에 대한 기억은
근대의 북한을 설명하기에 너무 멀고, 분단 이후의 북한은 이데올로기적 상상들로
메워져 있어 북한의 공간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필터가 필요하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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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지금은 반공간이 되어버린 공간이 아직 공간이었을 때, 즉 ‘북한’이 ‘북선’이었을
때, 공간감각은 단일하거나 고정되지 않았다. 근대가 도래하며 식민지가 되었고 전쟁
과 해방의 역사가 조선의 공간감각을 뒤틀고 무너뜨리고 또 생성시키는 과정에 있었
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북선’은 하나가 아니었다.
1. 제국의 북선
‘북선’은 제국 일본이 생산한 공간감각이었다. 처음 한반도의 북쪽 지역을 ‘북선’이
라 칭하고 확산시킨 것은 1910년대 조선총독부와 ?매일신보? 등 일본의 식민주의자
들이었다.2) 그래서 식민지시대 내내 한반도의 북쪽 지역은 식민주의자들의 주도 하
에 ‘북선’으로 불렸다. 1910년대 ‘북선’에 주목했던 주된 이유는 무역, 이주, 군사
등의 문제였고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사전 시찰이 이어졌다. 초기부터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북선’이라는 지역명이 출현했던 것이다. 이에 대비되는 지역명인 ‘북한’은
?황성신문? 등 대한제국기의 신문에서 간혹 나타나는데,3) 이 때 ‘북한’은 주로 두만
강 부근의 국경지대를 지칭했다. 식민지시대에 들어서면서 ‘북한’의 용례는 더 희소
해지지만 ‘북선’과 거의 같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더불어 북선에 대한 관심사가
확산되며 광업・어업・임업 등 산업, 철도와 도로 등 교통, 나아가 관광과 문화 등이
조사・소개되었고, 그 사이 ‘북선’은 ‘시찰’의 대상에서 ‘개척’의 대상으로 변화했다.
정부수립 전후 ‘북선’과 ‘북한’의 위치가 뒤바뀌어 ‘북선’의 용례가 줄어드는 데 반비
례해 ‘북한’의 쓰임이 늘면서 ‘북선’은 점차 언어적 지위를 박탈당했고 50년대 말부터
는 거의 쓰이지 않는 사어가 되었다. 약 40여 년간 조선인의 공간감각을 지배했던
북선의 형상이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한 식민주의에 의해 형성되었다면, 북선의
기억에 식민주의가 잠식해 있음을 전제로 제국이 만들어 놓은 북선의 형상이 어떠했
2) ‘북선’이라는 용어를 조선어신문 기사에 사용한 것은 1911년 ?매일신보?가 처음이었고, 이후 10년간
1920년 민간 조선어신문이 창간된 이후 ?조선?, ?동아?, ?개벽? 등에서도 쓰임이 급증하며 한반도
북쪽 지방을 부르는 용어로 자리잡았다. 「東拓 총재의 북선 시찰」, ?매일신보?, 1911.10.08, 2면;
野村喜一郞, 「北鮮視察錄」(「北鮮之産業」, 「北鮮之商業貿易」), ?對岸之貿易?, 活文堂, 1912; 「告示
北鮮聯絡地方物産共進會紀念特殊通信日附印」, ?朝鮮總督府 官報? 291, 1942.11.18.
3) 「북한부근의 俄兵 수」, ?황성신문?, 1903.07.18, 2면; 「한국의 농업경영」,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05.02.14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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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제국을 꿈꾸던 일본은 조선을 식민화하기 이전부터 조사사업을 벌였다.4) ?병요조
선사정?(1885), ?조선지지략?(1889)은 그러한 정황을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식민화
이후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에 대한 근대적인 조사사업을 추진해 1907년부터
?통계연보?를 간행했고 1930년부터 제국 판도의 ‘국세조사’에 조선을 포함시켜 ?조
선국세조사보고?를 간행했다.5) 두 통계는 근대적 방법론에 기초해 조선을 조사한
제국 일본의 가장 대표적이고 지속적이며 전면적인 자료라는 점에서 ‘북선’과 ‘남선’
그리하여 ‘전조선’에 대한 제국의 공간감각을 드러낸다.6) 이 두 자료를 통해 조선에
대한 제국의 공간감각을 살필 때 주목해야 할 것은 설계된 항목과 지역의 배치이다.
근대적 통계의 형식은 항상 이면의 프레임을 전제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설계 항목은
공간감각의 기준을 보여주는 지표가 되고 배치는 공간감각의 차등을 드러내는 대목
이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통계연보?의 주요 항목은 시기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대개 토지, 기
상, 호구, 농업, 임업, 수산업, 광업, 공업, 상업(금융), 무역, 물가(임은), 토목(수운),
체신, 철도, 전매, 신사(교육), 종교(사회사업), 경찰, 위생, 재판(등기, 공탁), 감옥,
재정, 관공리 등 20여개(?쇼와 9년 조선총독부통계연보? 기준)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국세조사보고?도 시기에 따른 편차가 있는데 1930년을 기준으로 씨명(성명),
성별, 출생연월(일), 배우관계, 민적 국적, 세대 내 지위, 출생지, 본적지, 상주지,
소속산업, 직업, 글 읽는 정도, 병역관계 등 10여 개 항목으로 구성되었고, ?통계연보?
와 ?국세조사?의 조사항목은 행정구역별로 구별해서 통계로 작성되어 全鮮이 집계되
도록 설계되었다.7)
?조선총독부통계연보?와 ?조선국세조사보고?의 조사 항목은 인구와 산업 그리고
4) 조선총독부는 ?朝鮮總督府 統計年報?를 중심에 두고 ?통계요람?, ?통계편람?, ?조사휘보?, ?조사월
보? 등을 간행했다.
5) 1920년 국세조사는 3.1운동으로 유보되었고, 1925년에는 간이국세조사를 실시해 ?大正十四年十月
一日 現在 簡易國勢調査結果標?(1926.12.15)를 간행했으나, 조선에서의 본격적 국세조사는 1930년
에 실시돼 ?昭和五年 朝鮮國勢調査報告?를 1934년과 1935년에 걸쳐 발행했다. 이후 1935년 간이국
세조사, 1939년 임시국세조사, 1940 국세조사, 1944년 인구조사 등으로 이어졌다.
6) 박명규・서호철, ?식민권력과 통계?, 서울대출판부, 2003, 39~92면.
7) ?昭和九年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34; ?昭和五年 朝鮮國勢調査報告?, 1934~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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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력에 집중되어 있고 조선인의 생활이나 문화를 조사하는 항목은 희소하다. 이러
한 항목 설계는 식민권력의 통계가 말 그대로 ‘國勢’를 조사하고 과시하기 위한 목적,
제국이 동원할 수 있는 식민지의 인적・물적 자원의 파악하기 위한 목적 아래 작성되
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식민지민의 생활적 요소나 문화적 요소들이 조사항목에서
배제된 것은 일면 당연하기도 하다. 이 기준을 따를 때 북선은 주로 광업과 임업
개발을 통해 물적 자원을 개척, 동원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된다.
다른 한편, ?조선국세조사보고?는 ‘全鮮編’ 2권과 ‘道編’ 13권으로 간행되었다.
‘도편’ 13권이 각 도별 상황을 구별해서 보여주는 것은 물론, ‘전선편’도 행정구역을
중심으로 구획되어 있다. 각 도별 기술 순서는 경기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강원도, 함경남도, 함경
북도 순이다. 경기에서 가까운 순서로 남선이 먼저 배치되고 북선의 각 도가 북쪽으로
올라가며 후반부에 놓였다. 이 배치는 2가지 사실을 상기시킨다. 하나는 경기도를
중심으로 거리가 가까운 지역부터 먼 지역으로 순서를 매겼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남선을 선순위로 북선을 후순위로 두었다는 점이다. 이 순서는 국세조사에서 매번
그대로 유지된다. ‘전선편’ 1권의 첫 도표인 「第1圖 道 人口の密度」는 북선에 대한
제국 일본의 공간감각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북선은 노동력과 산물이 적고 중심부
인 경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제국 일본의 국세를 기준을 볼 때 가치가 낮은 지역으
로 간주되었고 이에 따라 후순위 지역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중심으로 조선의 지역을 차등화했던 것이다. ‘북선 개척’의 식민주의적 감각
도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북선’은 식민주의의 지역명으로 출현했다. 식민과 개척이 조선이라는 공간에서
북선을 구별하고 조사하게 된 이유였다. 제국 일본의 식민지에 대한 가장 전면적인
조사사업이던 ?조선국세조사?와 지속적 조사보고였던 ?조선통계연보?는 정교하게
설계된 근대적인 조사임과 동시에, 조선이라는 공간을 물적 자원화하고 식민지민을
인적 자원으로 간주하는 제국의 논리로 설계된 조사였다. 즉 제국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지식의 요체는 제국을 위해 이용하고 동원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지식이
었던 것이다. 그 조선의 절반으로서 북선은 식민과 개척 가능성으로서, 광업과 임업
최적지로서, 그래서 더욱 조선의 낮은 생산력을 상징하는 지역이었다. 그렇게 식민주
의가 생산해낸 ‘북선’은 제국의 식민과 개척이 필요한 낙후된 자원 공간으로 표상되
었다.
北鮮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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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인의 북선
제국 일본의 ‘북선’에 대한 인식이 근대적 통계지표를 통해 인구, 산업, 행정을
주요 항목으로 국력의 편차와 증감에 두고 있었던데 반해, 조선인의 ‘북선’에 대한
인식은 현저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준비되었던 ‘국세조사’
가 유보되자 개벽사는 독자적인 ‘민세조사’8)에 나섰다. 「조선문화의 기본조사」9)라
이름 붙여진 이 운동은 전국을 돌며 각 지방의 특성을 조사, 보고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 내용은 지리와 기후, 인구와 문화, 산업과 산물, 인정과 풍속, 교육과 종교,
고적과 전설 등 다양한 부분에서 조사되었으며, 조선의 현황과 조선인의 생활을 파악
하고자 한 시도였다.
개벽사의 조사사업은 한편으로 식민당국이 실시했던 조사사업과 맥락을 공유한다.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근대적 지식을 창출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 조선의
각 도 단위로 조사했다는 점, 산업의 현황도 주요 항목이었다는 점 등에서도 유사성을
보인다. 그러나 식민지민의 자기지식은 제국의 식민지에 대한 자기지식과 조사의
내용과 방법, 기술의 형식 등에서 차이를 보였다. 식민당국이 인적・물적 자원으로서
식민지의 현황을 조사한 것이라면, 개벽사의 「조선문화의 기본조사」는 조선과 조선
인을 자원화하지 않는다. 조선인의 생활과 문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 국면들을 조사했다. 특히 사회문제에 대한 지역의 의견을
수렴하는 창구로서 여론조사의 역할까지 수행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사
하되 통치하지 않는 형상이 식민당국의 같은 행위 다른 형상과 대비되기 때문이다.
개벽사 민세조사의 대상은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이었다.
8) 근대국가의 대규모 조사사업인 국세조사에 앞서 민간의 조사사업이 있었다. 1890년대 이전 서구를
차용한 일본의 민간 조사사업은 주로 ‘민세조사’라 불렸는데 이후 국가가 전면에 나서며 ‘국세조사’로
대체되었다. 개벽사의 「조선문화의 기본조사」는 조선총독부의 근대적 조사사업 및 예정된 ‘국세조
사’를 대타항으로 의식했다는 점에서 국가 부재의 ‘국세조사’라 할 수 있다. 이 점에 근거해 일본의
민간 조사사업을 지칭했던 ‘민세조사’의 명칭을 부여했다. 일본의 ‘민세조사’에 대해서는 박명규・서
호철을, 개벽사의 ‘민간학술’에 대해서는 한기형을 참조했다. 박명규・서호철, ?식민권력과 통계?,
서울대출판부, 2003, 29~30면; 한기형, 「근대매체와 식민지 민간학술사회의 형성」, ?한국현대문학회
학술발표회자료집?, 2009, 22~24면.
9) 「조선문화의 기본조사」는 ?개벽? 31(1923. 1)에 첫 社告가 난 후, 34호의 ‘경남도호’를 시작으로
64호의 ‘전남도호’까지 14개 지역을 15회에 걸쳐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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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측면에서 개벽사의 조사단은 경상남북도를 시작으로 평안북도, 강원도, 함경
북도, 평안남도 순으로 조사사업을 전개했다. 지역의 요청과 조사원의 상황에 따른
편의를 고려한 듯 보이나, 기본적으로 순서를 특정하지 않아 지역적 차등 인식을
찾을 수 없다. 인구를 중심으로 한 자원의 유용성을 중심으로 남선과 북선 및 각
도의 순서를 설계했던 총독부의 차등적 지역 인식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조선총독부의 ?조선국세조사?와 개벽사의 민세조사인 「조선문화의 기본조사」는
기술 형식에서도 두드러진 차이를 보인다. ?조선국세조사? 전선편은 1권 결과표와
2권 記述報文으로 구성되는데 1권은 통계 그래프와 도표로 표현되었고 2권은 1권의
결과를 간결한 보고형 문장 형식으로 기술되었다. 이에 비해 「조선문화의 기본조사」
는 총독부의 통계를 인용한 간단한 도표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문장으로 기술되었고
그 문장도 간결한 보고형이 아니라 논리와 정서까지를 포괄하는 다채롭고 자유로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지역의 민요나 전설 등 채집 자료의 소개는 물론 풍속과 문화를
다루는 부분에서 이러한 특징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통계를 수행할 수 없는 극소수
개벽사 조사원의 조사 보고라는 점, 또 조선총독부 문서과의 직원들이 거의 다 일본인
으로 조선어의 섬세한 표현에 능통하지 못했다는 점 등을 염두에 두더라도, 취택한
문장 형식의 차이는 확연하다. 이는 통치자와 신민의 관계에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수직적 대상화와 조선인의 민심을 중심으로 지역사정을 공유하고자 하는 수평적 주
체화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또 결과에 대한 보고에서도 통치자가 읽는 텍스트와 조선
인들에게 두루 읽히기 위한 텍스트로 제작된 차이 때문이기도 하다. 즉 조선총독부의
?조선국세조사?는 통치자의 자료이고 개벽사의 「조선문화의 기본조사」는 식민지민
의 기록이었던 것이다.
개벽사의 「조선문화의 기본조사」는 이후로도 개벽사 출판물의 기사에 주요 원천으
로 작용한다. 대표적 사례로 ?별건곤?의 조선자랑호10)를 들 수 있다. 조선자랑호는
全鮮을 돌며 수집한 각종 정보와 이야기를 근거로 조선적인 것의 가치를 담았다.
설문과 각종 이야기를 통해 역사적 사건과 위인, 조선인의 덕성과 인정, 종교와 사상,
산천과 기후, 문자와 활자, 음악과 예술, 음식과 의복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회와 역사
전 분야에서 자랑거리를 찾아 제시한다. 북선의 자랑거리도 조선의 일부로서 균등하
게 자리를 차지했다. 특히 북선의 경우 수려한 산천과 명승고적 부분에서 자주 거론되
10) ?별건곤? 3-2, 개벽사, 1928.5.
北鮮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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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는데 이는 1930년대 ?삼천리?로도 이어졌다.
?삼천리?는 창간 특집으로 「반도팔경」 기획을 선보였다. “本社 新選의 「半島八景」
에 對하야 現文壇의 巨星八氏와 畵伯諸氏가 親히 그 絶景을 踏破하시고 壯麗한 山水
紹介의 붓대를 잡기로 되엇슴니다 이문에 來月의 本誌부터는 一大壯觀을 이룰것이
외다”라는 사고를 내걸고 포부를 밝혔던 「반도팔경」기획은 당대 최고 작가들의 투표
로 시작되었다.11)
弟一景 金剛山(江原道) 得點數 34, 弟二景 大洞江(平壤) 得點數 28, 弟三景 扶餘
(忠南) 得點數 21, 弟四景 慶州(慶北) 得點數 13, 弟五景 明沙十里(元山) 得點數
11, 弟六景 海雲臺(東萊) 得點數 10, 弟七景 白頭山(咸北) 得點數 8, 弟八景 矗石樓
(晉州) 得點數 8
우리는 우리들이 사는 이 朝鮮 산천에서 새로 「半島八景」을 선정할 필요와
의무를 늣기고 그 重任을 全朝鮮 文人諸氏에게 仰議한 바 잇섯더니 문단의 37氏
로부터 즐겨 以上과 가치 투표로 公選하여 주섯슴으로 이에 공표하는 光榮을
자랑하는 바이노라.12)
「반도팔경」 기획이니 8군데 명승을 우선 선정했는데 북선지역의 명승이 우세를
점하고 있다. 금강산까지 북선지역으로 간주한다면 1위와 2위가 모두 북선지역에
위치하고 총수는 북선과 남선이 균등하게 4군데씩 차지했다. 특이한 것은 북선의
명승은 대부분 산천 명승인데 비해 남선의 명승은 도시이거나 누대 등 인공물이라는
점이다. ?삼천리?는 8경 외 투표된 명승지도 공개했다.13) 팔경 외로 선정된 명승을
포함해도 북선은 남선보다 오히려 많은 명승을 보유한 것으로 소개되었다. 조선이라
는 공간의 총체성이 명승을 중심으로 재현되는 ‘일대장관’의 「반도팔경」에서 북선은
수려한 자연을 보유한 자랑스러운 공간으로서 남선과 대등하거나 오히려 우위를 점
11) 「社告 其一」, ?삼천리? 창간호, 1929. 6. 표1대면.
12) 「전조선 문사 공천 신선 「반도팔경」 발표, 그 취지와 본사의 계획」, ?삼천리? 창간호, 1929. 6,
34~47면.
13) 2표 이상 득표한 팔경 외 명승지는 “滿月臺 6, 釋王寺 6, 朱乙溫泉 5, 藥山東臺 5, 朴淵瀑布 4,
鴨綠江 5, 統軍亭 3, 鏡浦臺 3, 漢江 3, 月尾島 3, 長壽山 3, 善竹橋 2, 智異山 4, 濟州島 2, 叢石亭
2, 白雲臺 2, 漢拏山 2, 九月山 2, 七寶山 2, 玉流泉 2, 馬山海岸 2, 妙香山 2, 釜山棧橋 2, 多島海
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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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지역으로 현현했다. 이후 8경으로 선정된 각 지역에는 문인과 화가가 답사하고
기행과 화폭에 담아 ?삼천리?에 게재했다.14)
?개벽?과 ?별건곤?, ?삼천리?로 이어진 북선의 기억은, 관서, 관북 출신 문인들의
좌담회에서 좀더 명료한 형상을 얻는다. “전조선을 關西, 畿湖, 嶺南, 關北, 嶺東의
5지구로 分하여, 그 지방 출신의 문사 諸氏로부터 향토 문화에 대한 高見을 들어서
매일 계속하여 紙上에 좌담회를 개최”한 기획으로서, 관서출신으로 김억, 노자영,
백철, 이광수, 이석훈, 함대훈, 관북출신으로는 김기림, 김광섭, 박계주, 이북명, 이용
악, 이찬, 이헌구, 최정희, 한설야, 현경준이 참석했다. 이 좌담회의 화두는 ‘소년시절
의 로맨스’, ‘향수와 정회’, ‘관서, 관북 작품의 특징’, ‘노후와 고향산천’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통해 재현된 북선은 다채롭다. 당연하게도 고향을 상상하는 범위
가 읍면이나 도시에 한정되기 때문에 세부 출신지에 따라 재현 양상도 제각각이다.
다만 관서 출신들은 관서지역 사투리를 작품에서 적극 활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
언어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지만 산천의 수려함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 않고,
관북출신들은 언어와 문화에 대해서는 주장하지 않지만, 웅건한 산천과 거칠지만
순정한 기질에 대한 긍지를 드러냈다.
관서 출신인 김억이 “무엇보다도 지방색을 내이랴고 하면 사투리같은 것은 절대
필요한 하나”라고 하자 노자영도 “黃海道와 平安道의 특별한 생활 習俗과 또는 그
기질과 사투리를 넣어, 향토 몇 만점의 작품을 써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고
추임새를 넣고 함대훈은 ‘백석의 정주 사투리’를 거론하며 평안도 사투리의 가치를
논한다. 이에 비해 관북 출신 김기림은 “이 북쪽에서는 작가나 시인의 작품의 특질은
반드시 누구에게나 공통되지는 않어도 대체로는 좀 부틈부치가 텁텁하고 붓이 거츨
지나 않을까”라고 하자, 이북명은 “關北지방에서는 지방어를 사용하여 작품내용을
빛낸다는 것은 곤란한 일입니다. 그러고 지방적으로 보아 아직 야성적인 강한 악센트
를 조잡하게 사용하고 있는 데가 많다”며 관북 사투리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내놓는
다. 대체로 사투리에 대한 열등감이 강한 대신 “關北의 억세고도 황량하고 암담한
중에도 무듸게 비치는 鈍光이랄까 이런 것이 끈기있게 그 속에 흘러있음”을 느낀다
는 이헌구와 “어디까지든 저는 흙내 나는 北方의 인간이오 北方출신의 작가인 그
14) 「백두산행, 당대 문호 총출, 반도팔경 답사 개시」, ?삼천리? 8, 1930.9, 1면, 「화려강산 아반도산하,
문인화가 총출의 장거」, ?삼천리? 13, 1931.3, 54~58면.
北鮮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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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을 키여 가고 싶습니다. 朝鮮문학에 關北 작가가 끼처준 特點은 ?意志의 힘?”이라
는 한설야의 언급처럼 산천의 특성을 닮은 기질에 대해서는 긍정적 해석이 다수를
이룬다.
관서 출신 작가들이 언어를 거론하는 것은 이들이 경성과 경기 지역에 대한 문화적
대등의식 혹은 경쟁의식을 드러낸다. 정치 경제적 측면에서 경성과 경기 지역은 명실
상부한 조선의 중심이지만 적어도 문화에서만큼은 관서가 경기에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다. 그래서 북선에서 관서지역을 분리해 인식하는 ‘西鮮’이라는 공간감각도
가능했다. 이에 비해 관북 출신의 기질론은 오히려 문화 일반을 상대화함으로써 경기
나 관서가 가지지 못하는 독특성을 제시한다. 관북 출신 작가들만의 기질은 몸이
뿜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문화 이전의 생명이 지닌 힘으로서 더 근본적인 의미를
항변한다.
관서와 관북의 미묘한 차이가 드러나는 가운데 이들에게 북선은 공히 고향의 개념
안에 있다. 어린시절 유학을 떠나고 당시로서는 경성에 거주하는 젊은 작가들인 탓에
향수에 시달리거나 고향에서의 노후를 꿈꾸는 사람은 적으나, 북선 출신으로서의
자부와 고향에 대한 애착이 곳곳에 출몰한다. 그래서 그 주된 이유가 언어와 문화에
있든, 산천을 닮은 기질에 있든 고향을 닮은 작품을 꿈꾼다. 나아가 북선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는 다만 북선에 머물지 않고 만주와 연해주로까지 확장되기도 했다.
북선은 다만 압록강과 백두산, 두만강으로 이어진 경계 내에 머물 수 없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관서 출신 백석은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부여를 숙진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며 정체성의 공간으로 만주 대륙을 소환하며
“나의 옛한울로 땅으로-나의 태반으로” 돌아온 자신을 노래했다.15) 관북 출신 이용악
도 “북쪽은 고향/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 감을 줄 모르”16)는 북선과 연해주의
15) 백석, 「북방에서」, ?문장? 2-6, 1940.7; 곽효환, 「백석 시의 북방의식 연구」, ?비평문학? 45, 한국비
평문학회, 2012.
16) 이용악, 「북쪽」, ?분수령?, 삼문사, 1937, 10~11면; 정우택, 「이용악과 러시아 연해주, 그리고
국경의 감각」, ?대동문화연구? 104,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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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으로 “내게는 정계비 세운 영토란 없다”고 선언했다. 이들에게 북선은 고향이었
고 정체성이었고 경계를 넘어 대륙을 향하는 공간이었다.
식민지의 조선인들은 한반도 북쪽 지방의 명칭을 식민주의자들과 공유했다. 식민
당국도, 식민된 일본인도, 식민지의 조선인도 모두 그 곳을 ‘북선’이라 불렀다. 그
공간을 기억하고 표상하는 방법은 달랐다. 조선인들에게 북선은 남선과 다르지만
대등한 위상과 독보적 의미를 가진 공간이었다. 자부심 가득한 출신지이자, 어린시절
의 추억이 서린 장소이며, 부모형제가 사는 고향이었다. 독보적 산천과 특장의 산물,
전래된 풍습과 이웃의 인정, 역사 속 인물과 명승고적이 전설처럼 고유의 언어로
펼쳐지는 곳이었다.
북선은 남선과 결합해 ‘조선’이라는 공간의 총체성을 형성하면서도, 제국 일본의
북선과 식민지 조선인의 북선 간에 상당한 감각의 격차를 유지했다. 식민과 개척,
고향과 산천은 두 시선의 차이를 선명케 하는 입각점이다. 식민주의자의 상상력과
오랜 정주자의 정체성이 충돌하고 경쟁했던 양상이 여기에 집약되어 있다. 제국 식민
지의 일부로서 개척되어야 할 북선, 고유한 문화와 역사를 보유한 고향으로서의 북선
은,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자의 서로 다른 공간감각을 보여준다.
Ⅳ. 삼팔선, 월경의 공간감각
식민주의자와 조선인 사이에 형성되는 대척적 공간감각의 대비만으로 이데올로기
적 침윤으로부터 자유로운 ‘북선’의 형상을 재구성하기는 어렵다. 사회적 해석에 기
대지 않는 공간이 사실상 존재하기 어렵다는 근본적 이유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식민
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자장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시기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
다. 그런 점에서 이 대척적인 공간감각을 가로지르는 또 다른 표상들을 살필 필요가
있다.
종전과 해방 후 재현된 월경서사는 한반도의 공간감각이 뒤틀리는 변화의 국면을
적실히 드러내는 표상이다.17) 월경서사는 제국과 식민지의 대립적 공간감각이 갑작
17) 해방 후 귀환서사의 전개 양상에 대해서는 정종현, 「해방기 소설에 나타난 ‘귀환’의 민족서사-지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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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레 해소되고 국민국가가 소환되는 순간의 기억 - 그런 점에서 귀환서사 혹은 인양서
사라 불린다 - 이자, ‘조선’의 공간적 총체성이 붕괴되고, 남한과 북한이라는 분단적
아토피아가 생성되는 광경의 목격담이다. 다른 측면에서, 붕괴되고 생성되는 공간감
각은 이동을 촉발하고 이동의 시선에서 식민지시대에도 유지해 온 정주적 공간감각
이 다시 뒤집힌다. 삼팔선을 넘는 월경의 표상들은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인 동시에
정체성의 재편을 매순간 확인하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월경서사는
이동서사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남선으로 또 북선으로 떠나는 월경자의 표상
은 식민지의 ‘남선’, ‘북선’ 그리하여 ‘全鮮’이라는 공간감각을 상대화시켜 보여주는
입각점이 된다. 북선을 종단하는 서사들 속에서 한반도의 공간감각은, 매순간 붕괴하
고 이곳저곳에서 생성되며 삼팔선 이전과 이후로 분기했던 것이다.
제국 일본의 패전과 해방의 소식이 전해지던 때, 작가 염상섭은 만주 안동에 거주하
고 있었다. 그는 피난민이 되어 월경에 나섰고 피난의 이야기를 소설 「삼팔선」18)으로
남겼다. 해방 소식과 함께 만주 안동에서 신의주로 건너와 머물다가 ‘아내와 업고
걸리고 한 올망졸망한 어린것 서넛’을 데리고 평양, 사리원, 신막, 신계를 경유해
삼팔선을 넘어 개성 직전까지가 소설 속에서 이동한 공간이다.
염상섭이 만주를 떠나 삼팔선을 넘었던 그 때 제국의 신민이었던 여성 후지와라
데이(藤原てい, 이하 후지와라)도 전재민으로서 만주를 떠나 삼팔선을 넘은 수기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19)를 썼다. 신경에서 봉천과 안동을 경유해 북선의 신천에서
근 1년을 머물다가 다시 평양을 거쳐 신막에, 그리고 도보로 삼팔선을 넘어 개성에
도착했다. 그리고 의정부에서 치료를 받고 다시 부산으로 가 배편으로 일본 하카다(博
多) 항으로 입국, 열차로 나고야와 나가노를 거쳐 고향 미나미자와(南澤)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야기를 마무리한다.20)
귀환을 중심으로」, ?비교문학? 40, 한국비교문학회, 2006 참조.
18) 염상섭, 「삼팔선」, ?삼팔선?, 금룡도서주식회사, 1948.
19) 藤原てい, ?流れる星は生きている?, 日比谷出版社, 1949; 藤原 데이 저, 정광현 역, ?내가 넘은
삼팔선?, 수도문화사, 단기4283(1950); 후지와라 데이 저, 위귀정 역,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
청미래, 2003.
20) 종전 후 송환 일본인들의 서사는 일본에서 ‘인양서사’의 개념으로 논의되었다. 인양서사로서의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와 시대인식의 구성 문제에 대해서는 김예림, 「종단한 자, 횡단한 텍스트-
후지와라 데이의 인양서사, 그 생산과 수용의 정신지」, ?상허학보? 34, 상허학회, 20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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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과 일본인, 남성과 여성, 그들의 정체성이 가진 차이가 무색하게도 염상섭과
후지와라의 경로는 매우 흡사하다. 염상섭이 안동(丹東)에서 서사를 시작하고 개성
직전에서 끝낸 것과 달리, 후지와라 데이가 신경(長春)에서 출발해 일본까지 연장되
어 있는 점을 제외하면 만주에서 출발해 삼팔선을 넘는 지점까지 거의 같은 궤적을
그린다. 삼팔선 월경의 여정이 시작되기 전 신의주와 선천 등 북선에 한동안 머물렀던
점도 공통적이다. 더구나 후지와라의 기록이 거의 북선에 집중되어 있음을 고려하면
염상섭의 월경 경로와 후지와라의 월경 경로는 대부분 중첩된다.
북선에 대한 식민지시기의 표상을 상대화하기 위해 염상섭과 후지와라를 볼 때,
첫 질문은 이들이 만주를 떠나게 된 까닭에서 시작될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고향을
떠나 식민지로 이주했던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다시 이주를 결정한
것은 그 이유가 소멸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유 여하가 북선을 통과해 삼팔선을
넘을 때까지 그들이 보고 재현한 북선의 형상에 대한 해석의 소실점으로 작용한다.
염상섭의 ?삼팔선?은 그가 그곳에 간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다. 일본의 패전으로
일본 제국의 한 위성국이었던 만주가 다시 중국이 되었고, 안동과 신의주 사이에
국가적 경계가 다시 생성되었다는 점만 그려진다. 다만 「혼란」, 「모략」, 「엉덩이에
남은 발자국」 등 해방기의 접경지역을 묘사한 그의 다른 작품과 연이어 볼 때, 염상섭
의 만주 이주나 만주를 떠나는 이유도 생활과 안전의 도모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1)
반면, 후지와라가 신경에 살게 된 이유는 염상섭과 달랐다. 책임감이 투철한 공무원으
로 관상대에 근무하는 후지와라의 남편은 국가로부터 임무를 부여받고 가족과 함께
신경에 전임한 것이다. 혹 그녀의 남편에게 과학적 관심사나 생활 방편 등 다른 이유
가 공존했다고 해도, 총동원체제 하의 1943년 4월 후지와라 가족이 일본에서 창춘으
로 이주한 이유가 국가의 명령과 결부된 선택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런
이들에게 일본의 패전은 곧 식민지로의 이주 명령이 취소되었음을 뜻하는 것이고,
역으로 일본으로의 귀환은 명령의 상실과 함께 생성된 또 하나의 명령을 의미했다.
염상섭과 후지와라가 만주로 이주했던 이유는 그렇게 정체성에 따라 구별된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시야에서 보면, 또는 만주 정주민의 시각에서 보면 염상섭이나
후지와라나 모두 만주 개척을 위해 식민된 자의 범주로 묶인다. 제국 신민으로서의
21) 이종호, 「해방기 이동의 정치학-염상섭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한국문학연구? 36, 동국대 한국문
학연구소, 2009.
北鮮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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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과 식민지민으로서의 조선인 간의 차이, 또 서로간의 민족적 이질감은 오족협
화를 내세운 제국의 정책과 만주에 식민된 이주민이라는 공통성 속에 사소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전과 해방의 순간, 잠복하던 이질적 정체성은 다시 부상하고
날카로운 대립관계를 형성한다.22) 강요되었거나 유도되었던 협화의 고리가 오히려
더 강력한 복원력으로 정체성의 이질감을 확대하는 것이다. 해방 직후부터 삼팔선
획정까지, 아직 제국 일본을 대신할 국가적 통제력은 수립되지 않았고 무정부적 상황
을 자구적 조치로 대신하던 환경에 놓이게 되었으니, 만주의 정주민에게 일본인과
조선인이 식민주의자이거나 식민된 자들로 복귀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만주에서 염
상섭과 후지와라의 위치는 별 차이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염상섭과 후지와라의
기록23)이 식민지민 조선인과 제국 일본의 신민이라는 적대적인 정체성의 차이가
무색하게 유사한 월경의 서사로 출현한 것은 그러한 배경에서 가능했다.
이로부터 연장해 보면 염상섭과 후지와라가 머물던 만주를 떠나 삼팔선 월경을
결심하는 근본적인 이유도 유사하다, 일상과 평온이 불안과 공포로 뒤바뀌었기 때문
이다. 생존의 위협을 느낀 개별자들의 공통감각이 그들에게 월경을 명령했던 것이다.
?삼팔선?의 ‘총소리’와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의 ‘마왕’은 두 사람이 공유한 이주와
월경의 근본적 이유를 보여준다.
작년 해방 직후의 일이지마는, 안동에 남겨둔 짐을 찾아가지고 오려니까 시
가지를 다 빠져나오기 전부터 압록강 철교 쪽에서 총소리가 팽팽 끊일 새 없이
났었다. 어떨까 하는 염려가 있으면서도 하여간 맞닥뜨려 보리라 하고…… 그
후에는 거리에선, 혹은 길가로 난 내 방 밑에서 열시 후면 거의 안 듣는 날이
없는 총소리가 귀에 익게 되었다. 새벽 두시 세시나 밝을 녘에 줄달아나는 총
소리에 잠을 소스라쳐 깨는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었다. …… 공회당 앞에 오
22) 염상섭은 해방 직후 만주에서 민족적 정체성이 날카롭게 긴장했던 상황을 소설 「모략」에서 사실적
으로 묘사했다, 염상섭, 「모략」, ?삼팔선?, 금룡도서주식회사, 1948.
23) 염상섭의 「삼팔선」은 소설로 발표되었고 후지와라 데이의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는 수기로
소개되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두 저자의 장르 인식을 존중해 장르 성격을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삼팔선」의 서사가 경험에 의지하는 바 크고,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도
후지와라의 다른 수기와 비교하면 허구적 작도의 개입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체험을 서사화한
기록서사로서 간주해도 무방하다고 보았다. 요컨대 비교가 가능한 경험담으로 간주한다(이경돈, 「기록서사와 근대소설-리얼리티의 전통에 대하여」, ?상허학보? 9, 상허학회, 200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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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저 뒤에서 또 총소리가 연달아 난다. 공산당 본부가 있는 방향이다. 큰길에
는 인적이 드물어갔다. 집 앞까지 오니 공회당과는 반대편에서 불종소리가 나
고 검은 여기가 구름같이 하늘을 뚫고 피어올랐다. 갑신정변의 우정국 사건이
생각나던 것이었다. “무서운 세상도 되었고나!”24)
작품 속 유일한 이주 전의 회상 대목은 염상섭이 신의주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총부리, 총소리, 유탄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그의 월경
을 재촉했던 것이다. 만주로 이주한 이유가 안전과 생활에 있었던 그에게 안전도
생활도 보장할 수 없는 북선은 불안과 공포의 공간이었고 그것이 재이주와 월경의
이유가 되었다.
후지와라도 불안과 공포로 서사의 처음을 열었다. 첫 문장 “소화 20년 8월 9일
밤 열시. 관사 현관문을 두드리는 당황한 소리”는 깊은 밤중 목총을 든 젊은 청년
둘이 ‘비상소집’을 전하기 위한 소리였다. 일상을 깨는 비상소집 소식에 현기증이
날 정도로 불안해하던 후지와라에게, 남편은 “여보, 밖의 소리를 들어보오. 확실히
여늬 때 新京은 아냐.”라고 대꾸했다.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인 후지와라에게 “멀리
자동차가 달리는 소리, 사람 소리, 온갖 소리는 그 어떠한 큰 변동이 일어날 징조와도
같이 달 없는 밤의 대기를 몹시도 흔드는 것”을 느끼게 했다. 1945년 8월 9일 밤
10시의 소리들은 그녀의 가족에게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원본의 고향 도착 장면을 잘라내어 번역본 ?내가 넘은 삼팔선?의 마지막 장이
되어버린 ‘마왕의 정체’는, 그녀의 월경 전 여정을 마왕으로부터 필사적으로 탈출하
는 과정에 비유하며 그 정체를 깨닫는 대목이다. 마왕의 정체를 마주하는 이 대목이
만주 신경에서 북선의 선천까지, 다시 1년을 머물던 선천을 떠나며 다시 시작된 그녀
의 월경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묻는 질문은 비로소 명료한 답변에 이른다.
남성 「바-스」 소리가 뒤를 쫓는다. 나는 몇 시간을 이 풍랑 속에서 어린애를
이끌고 이리저리 쫓긴다. 남자의 「바-스」 소리는 점점 사라진다. 피아노 소리
도 사라진다. 나는 이런 생각이 가득한 채 자리에 누었다. 이 꿈은 삼팔선을 넘
어서도 개성에 와서도 의정부에서도 기차 속에서도, 그리고 뱃속에서도 그 어
떤 악마와도 같이 내 뒤를 쫓는 것이었다. 마음대로 나를 괴롭혔다. …… 그
24) 염상섭, 「삼팔선」, ?삼팔선?, 금룡도서주식회사, 1948, 24~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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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야말로 밤마다 나를 괴롭히던 그 남자의 소리였다. 그 소리에 맞춰 나오는
피아노 소리는 너무도 확실하게 그 악몽 속에서 듣던 가락 그대로였다. 선창
밖으로 나왔다. 큰 배는 별 뜬 하늘 아래에 둥실 떠있고 뱃전의 선창 밖으로
비친 불빛은 바다 위를 물들이고 있었다. 그 곡조는 무전실에서 나오는 라디오
소리였다. 그 곡은 슈벨트의 마왕이었다.25)
만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북선으로, 다시 북선에서 삼팔선을 넘어 남선으로, 마지막
부산에서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후지와라가 결행한 3차례의 월경은 마왕으로 비유
된 불안과 공포로부터의 탈출이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슈베르트의 <마왕>은 죽음으로 인도하는 마왕과 싸우는 父子의 불안과 공포를 음산
하고도 격렬하게 묘사한다. 고통과 고난 속에서 끝내 고향에 당도한 그녀의 월경서사
역시 음산하고 격렬하다. 삼팔선을 향해 도보로 월경하며 “도망치는 것이다. 도망치
는 것이다. 채 못 내빼면 나는 죽게 된다”는 독백은 그녀의 공포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염상섭의 ‘총소리’와 후지와라의 ‘마왕’은 공통적으로 불안과 공포를 상징한다.
생활과 안전을 위해 이주를 도모했던 조선인과 국가로부터 주어진 임무와 명령을
따라 이주했던 일본인이 근본적으로는 공통의 이유로 월경을 결행했던 것이다. 종전
과 해방 직후, 한 조선인 가족과 한 일본인 가족의 월경 동기가 표면적으로 다르면서
도 근본적으로는 유사하다고 할 때, 그들이 향한 목적지의 성격에 대한 질문이 연이어
짐은 필연이다. 목적지는 출발지에서 생성된 월경의 이유가 제거된 공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의 목적지는 목적지가 아니기도 하다. 염상섭에게 서울, 후지하라에게
미나미자와는 두 사람이 떠나온 출발지이자, 두 서사가 가능했던 최초의 기점이다.
만약 「삼팔선」이나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를 더 긴 서사 속에서 본다면, ?삼팔선?
의 전편은 염상섭이 서울을 떠나 만주로 가는 경로일 것이고,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의 전편은 후지와라가 일본을 떠나 남선과 북선을 경유해 만주에 도착하는
여정일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만주를 서사의 기점으로 볼 때에만 그들의
목적지는 목적지가 된다. 더 긴 서사적 관점에서 이들의 목적지는 애초의 출발지이기
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팔선」과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는 모두 원점으로
25) 藤原 데이 저, 정광현 역, ?내가 넘은 삼팔선?, 수도문화사, 단기4283(1950), 247~24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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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하는 서사라 할 수 있다.
두 서사가 원점 회귀의 월경서사로 구성된 것은 최초 만주 이주의 이유와는 관계가
없다. 생활과 안전을 도모한 조선인과 국가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본인으로 그들의
만주 이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이뤄졌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만주와 북선을 떠나
재이주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맞닥뜨린 불안과 공포 때문이고 당연하게도 그들의 목
적지는 불안과 공포가 최소화 되는 공간이어야 했다. 만주를 떠나 북선에 머물다가
삼팔선을 통과해 남선의 서울로 가는 염상섭의 경로,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도 다시
부산에서 배편으로 일본까지 이르는 후지와라의 여정은, 다른 공간이지만 불안과
공포로부터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친숙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목적지는
고향이었다.26)
요컨대 염상섭과 후지와라는 각각 안전과 생활의 도모, 국가의 임무와 명령이라는
다른 이유로 만주에 이주했지만, 그 이유가 소멸하며 유사한 상황에 맞닥뜨렸고,
불안과 공포라는 유사한 이유로 이동을 시작했으며, 유사한 시기에 유사한 경로를
통해, 유사한 의미를 지니는 공간 즉 고향으로 월경했던 것이다. 염상섭이나 후지와라
의 고향은 안전을 지켜줄 가족과 생활의 기반이 갖추어진 생존의 최후 공간이며,
조선인과 일본인의 민족적 구별이나 남성과 여성의 성별을 넘어선 정체성의 근원적
공간인 것이다.27) 만주에서 북선에 머물다 삼팔선을 넘는 해방기의 서사, 염상섭의
「삼팔선」과 후지와라의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가 공유하는 월경의 맥락이 이러하
다고 할 때, ‘북선’은 삼팔선 획정 이후 불안과 공포가 상존하는 공간, 그리하여 떠나
야만 하는 공간임이 확연해진다. 종전과 해방이 만주의 공간감각을 흔들었듯이, 삼팔
26) 고향과 정체성의 구성 문제에 대해서는, 나리타 류이치 저, 한일비교문화세미나 역, ?‘고향’이라는
이야기?, 동국대학교출판부, 2007 참조.
27) 월경서사가 시작된 이유와 여정, 그리고 목적지의 성격 면에서 공통성을 찾았지만, 물론 두 서사에
차이가 없을 수는 없다. 특히 ‘피난민’과 ‘전재민’이라는 명칭의 차이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해방된 조선인과 패전국 신민이 느꼈던 불안과 공포는 수준 차이가 있다. 북선에서의 억류, 남편의
징용, 소모된 자금 등 전재민 후지하라의 상황은 염상섭에 비해 훨씬 열악했다. 이 점이 그녀가
월경의 과정을 더 신산하고 고통스럽게 재현한 이유이다. 월경 여건의 차이는 다시 그녀의 시야를
좁히고, 이에 따라 염상섭의 여로 곳곳에 출몰하는 잠상꾼과 ‘북행 피난민’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거
나 소련군과 미군에 대한 감정에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해방된 조선인 남성과 패전한
일본인 여성 사이에 월경의 고난은 다른 상황과 강도로 펼쳐졌고 이 점이 서사적 차이의 바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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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 그 소식만으로도 북선의 공간감각을 뒤집었다.
북선이라는 공간감각의 붕괴는 개척해야 할 자원, 수려한 산천, 풍성한 문화 등
기존의 감각을 유지하던 특질도 해체했다. 그래서 두 작품은 모두 풍광이나 풍습을
묘사하는 대목이 희소하다. 개척 의지는 전무하다. 불안과 공포를 동반하는 월경서사
인 만큼 이들이 경험한 북선은, 식민지시대의 대표적 공간감각이었던 자원이나 산천
혹은 문화가 아닌, 북선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현시된다. 이들은 최소한의 생존
감각으로 축소되었고 따라서 부의 축적이나 자연 풍광 또 문화 산물은 공간감각
내에 작은 자리조차 갖지 못했다. 북선을 통과하는 이들의 공간감각이 조우하는 사람
들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공포와 불안은 더 근원적인 저층에서 창출되는
새로운 공간감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공간감각의 붕괴와 생성을
추동한 것이 공포와 불안임에도 불구하고, 염상섭과 후지하라가 여로에서 만난 북선
의 사람들은 적대나 증오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점은 불안과 공포를 불어넣는
것은 사실 ‘북선’이라는 공간이 아닐 수 있음을 시사한다. 심지어 북선의 인민들은
비루할지언정 동정과 호의를 지닌 사람들로 묘사된다.
염상섭의 월경과 이주를 추동한 계기는 소련군과 공산당 그리고 보안대원의 총과
총소리였다. 신의주에 머물던 염상섭에게 북선의 불안과 공포를 안겨준 압록강 철교
의 총소리는 소련병의 총구에서 나온 것이었고, 속옷 바람에 당한 위협은 보안대원의
총부리였으며, 거리의 총성과 방화는 공산당 본부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소련병과
보안대원에 대한 그의 시선은 그리 적대적이지 않다. 열차에 함께 타 향수 어린 콧노
래를 부르던 소련병도, 전우와의 이별을 슬퍼하며 만취한 소련 복귀 병사에게도 불안
과 공포는 없었다. 심지어 삼팔선 부근에서 총을 들고 월경을 단속하는 소련병조차
공포와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신막의 보안서장에게는 ‘황감’한 호의와 친절을 받기
도 했고, 여정에서 만난 다른 보안대원들 역시 유익한 정보를 주고 사소한 위반은
묵인함으로써 호의를 비치거나 적어도 적대시하지는 않았다.
‘무슨 당 신계지부니 무슨 청년회 신계지부니’ 하는 문패가 붙은 집에서 만난 북선
의 조선인이 낯선 피난민 염상섭과 북선의 새로운 제도와 조치에 비판과 기대를
섞어가며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염상섭의 일행도 신막 구제소에서 만난 ‘흙몽둥이
맨발’의 어린 고아를 보고 딸의 속바지를 주려하거나 굶주린 청년에게 밥을 제공해
주고 싶어하는 등 공감력을 지닌 인간의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염상섭의 눈에는
피난민 사이로 파고든 잠상꾼들의 모습이 종종 들어오는데, 이들의 비루한 행태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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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적대시하지 않는다. 염상섭에게 잠상꾼은 혼란기에 흔히 있기 마련인 인간 군상
중 하나이다. 피난민에게 조악한 식사를 파는 행위나 비싼 숙박료를 요구하는 행위와
별다를 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장 연설과 한바탕 훈시를 늘어놓는 차표 검사원
을 두고 “저런 게 일제 잔재야. 한참 배워두었던 것을 활갯짓 치며 써먹는 것”이라는
여론마저 불안과 공포에 기인한 적대라기보다 ‘비아냥’에 불과할 뿐이다.
북선의 조선인에 대한 염상섭의 시선은 북행 피난민을 대하는 대목에서 적실하게
드러난다. 그 자신이 불안과 공포로 북선을 떠나는 남행 피난민이니 남선을 떠나는
북행 피난민은 그 자신과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했으므로 그들에 대한 적대나 증오가
드러나기 쉽다. 하지만 남행 피난민 염상섭과 서울에서 의주의 시집으로 떠난다는
북행 피난민 일행은 불안과 공포도 적대나 증오도 없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다.
심지어 서울살이를 매개로 친밀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북행 월경도 자신의 남행 월경
과 다를 바 없는 선택 중 하나로 간주된다.
사실 염상섭은 해방된 조선인 피난민으로서 처지가 나은 편이었다. 패전한 일본인
전재민의 사정은 더욱 어려웠다. 사리원의 거리 모퉁이에서 ‘쫓겨 다니는 우리를
부럽게 보는 존재도 있고나! …… 너희가 우리를 부럽게 볼 때도 있고나 …….’ 하고,
염상섭에게 일본인과 조선인의 지위 역전을 일깨운 ‘일본 여자와 아이들의 한 떼’는,
전재민 후지와라가 처한 고난이 피난민 조선인에 비해 훨씬 고달팠음을 보여준다.
그런 후지와라에게도 북선의 조선인들은 대개 동정과 호의로 기억된다.
시장의 쓰레기더미에서 식량을 구하고 비누장사로 연명하던 때 전재민들을 수용하
던 거처에 찾아와 불안해하는 아이들과 놀며 노래를 가르쳐준 보안대원 김씨, 그녀에
게 생활용품과 일거리를 주선하고 가게의 일자리까지 주었던 곰탕집 박주사, 그녀의
행상을 팔아주고 지속적인 일거리를 주었던 돌대문집 가족, 쇠잔해진 후지와라의
아이들에게 싼값에 사과를 사다준 보안대원이 그녀가 기억하는 북선의 인민들이었
다. 그리고 삼팔선이 눈에 보이는 곳에서 마지막 사력을 다하다 쓰러졌을 때 그녀를
도왔던 사람도 누군지 알지 못하는 북선의 조선인이었다.
이 때 별안간 어둠 속 한 농가에서 조선 사람들이 나와 주먹밥을 담은 바가
지를 내미는 것이었다. 「밥 먹으라」는 소리에 눈물을 흘리며 한동안 우리들은
말없이 참으로 고맙게 먹었다. 이젠 한걸음도 더 걸을 수 없었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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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선의 조선인들은 후지와라의 처지를 동정했고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 중에
서도 그녀를 감동 속으로 몰아넣은 인물은 단연 구세병원의 조선인 의사였다. 아이는
호흡기 전염병인 디프테리아에 걸렸고 그녀가 믿을 것은 남편의 귀중품인 ‘론진시계’
뿐이었다. 구세병원의 의사는 혈청주사 비용 지불능력이 없다는 말에도 기꺼이 아이
를 치료해주었다. 오히려 어떻게든 치료비를 갚겠다는 후지와라의 자존심을 위해
치료비로는 턱없이 부족한 시계를 치료비에 맞춘 가격으로 사주었고, 사후의 진료까
지 맡아주었다. 그녀에게 북선에서의 이 경험은 “줄달음치던 다리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푸른 물에 비친 버들가지도, 시냇가에서 빨래하는 여인네들의 흰옷도 아름답
게 두 눈에” 비치게 했다. 후지와라에게 북선은 곧 북선 조선인이었고 그녀의 처지에
동정하고 아픔에 공감해준 공간이었다.
그녀의 불안과 공포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던 소련군에 대한 인식도 북선에서
현저히 감소했다. 인형 장사를 위해 헝겊 자투리가 필요했고 후지와라는 소련군 부대
에서 재료를 구하기로 결심하는데 이는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겁을 먹어서는
안 돼요”라는 대화는 후지와라 일행이 소련군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공포를 단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예상 외로 소련군은 “크게 한바탕 웃어 댄 다음” “아무거나 가져가”
라고 손쉽게 허락한다. 물론 소련군의 호의로 인형 재료를 구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소련군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한다. 그래서 “아직도 불안”한 마음에 줄달음질을
쳐 부대를 빠져나오지만, 이후 병사들과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소련군에 대한 후지
와라의 공포는 “공연히 도망”친 것에 불과했던 것으로 판정된다. 따라서 “소련 병정
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은 1년 전과는 전연 달라졌”고 “무섭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먼 옛날 일”이 될 수 있었다. 공포는 일시적 상황에서 편견과 오해에 기초해
생성되었던 것이다.
오히려 증오를 불러일으켰던 사람들은 일본인들이었다. 숨겨놓은 비상금을 훔쳐가
는 자들, 죽어가는 사람의 목숨보다 수중의 돈을 귀중히 여기는 이들, 자신들의 작은
편익을 위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자들, 많은 돈을 비열하게 숨기는 자들은
‘이남박 머리’로 대표되는 일본인들이었다. 일본인 중에도 백발노인을 비롯한 선한
의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재민이 된 일본인들이 처한 상황이 더욱 절박했고
전재민들은 악랄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 역시도 월경의 과정에서 조금씩 독해져,
28) 藤原 데이 저, 정광현 역, 앞의 1950 책, 2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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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일본인들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일본행 월경을 결행했다.
애초 만주와 북선을 떠날 때의 불안과 공포는 명백했다. 무정부적 상황이 도래했고
이질적 정체성은 날카롭게 대립했다. 불안과 공포가 엄습했고 그것이 월경의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북선을 경유하면서 월경의 이유는 점차 희미해졌다. 염상섭은 총소리
의 불안과 공포에 쫓기는 대신 여정에서 만나는 북선의 세태를 관찰하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월경을 재촉했던 불안과 공포가 소멸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또 일본인
여성이기에 더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후지와라도 도보 행진이 시작된 신막에서
부터 “오래 동안 들어오던 선입관 때문에 나는 완전히 악마에게 사로잡힌 것”으로
서술한다. 감각의 극단적 긴장 속에서 실제가 희미해진 불안과 공포가 혼미한 마왕의
형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마왕은 불안과 공포에 발을 딛고 있지만 그 경험적 실제는
사라진 존재였던 셈이다. 그러니 “빨리 내빼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은 더 이상
불안과 공포라기보다 여정의 고난이 각인시킨 생존에의 집착에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고, 따라서 월경의 여로에서 그들이 만난 북선은 불안과 공포의 소멸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마왕은 삼팔선에서 출현하기 시작해 현해탄에 이르기까지 - 북선이
아니라 - 그녀를 괴롭혔던 것이다. 북선에서, 총소리는 없었고 여정 중 실제가 사라진
공포는 마왕처럼 막연해졌다.
삼팔선 월경은 그 막연해진 공포가 다시 신기루처럼 현현하는 순간이었다. 이러저
러한 소문과 예측 속에 막연해졌던 공포가 다시 고개를 들지만, 염상섭 일행도 후지와
라 일행도 두려워하던 어떤 사건과도 마주치치 않은 채 오히려 싱겁게 월경에 성공한
다. 잠시 재생되었던 불안과 공포는 또 다시 허상에 불과함이 입증된다. 불안과 공포
는 북선을 거쳐 삼팔선이라는 상징을 통과하며 불가역적 소멸상태가 되었다.
오래간만에 두 다리를 뻗고 마음놓고 아이들을 놀리며 앉았으니, 가슴이 후
련하면서도 한귀퉁이가 맥히는 듯하다. 그러나 생각하면 삼팔선이란 허황하고
허무한 것 같고, 두세 사람의 눈을 기우고 불과 오 리나 십 리 길을 건너느라
고 천리 밖에서부터 계획을 세우고 겁을 집어먹고 몸에 지닌 것까지 다 버리
고, 이 고생을 하며 허위단심 겨우 넘어왔다는 그 일이 얼뜨고 변변치 못한 짓
같기도 하다.29)
29) 염상섭, 「삼팔선」, ?삼팔선?, 금룡도서주식회사, 1948, 7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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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 삼팔선을 넘어 남선에서 처음 맞닥뜨린 것은 ‘미군’과 “小斗 한 말에 삼백칠
십 원”이라는 남한의 현실30)이었다. 북선의 ‘소련군’과 ‘펑크난 트럭’에 정확히 대비
되는 남선의 현실은 염상섭에게 양상의 차이일 뿐 우열의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삼팔선 월경 직후 그가 내뱉은 말이 “무얼 먹구 사누!”였던 것이다. 월경
결행의 이유였던 북선의 공포와 불안은 오히려 삼팔선 건너편에서 다른 양상으로
재연된다.
삼팔선 월경을 다만 다른 현실과의 조우로 인식했던 염상섭과 달리, 후지와라는
미군과 남선을 감격스러워 했다. 이 차이에서 염상섭과 후지와라가 실제적 불안과
공포가 소멸하는 여정을 밟으면서도 그토록 삼팔선 월경에 집착했는지를 알 수 있다.
어찌되었든 염상섭의 서울과 후지와라의 미나미자와는 정체성이 지시하는 근원적
공간이고, 위기에 처한 그들이 상상해낸 최종 공간이며, 공포의 소멸 이후에도 향할
수밖에 없는 목적지이다. 아직 고향까지 한 차례의 월경을 더 감당해야 했고, 환영뿐
인 존재인 마왕과도 싸워야 했기 때문에, 후지와라는 고향을 향한 남은 월경의 과정
에서 마왕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거라 믿는 미군과의 상봉에 감격하는 차이가 발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 도착한 후지와라가 “이상하게도 감상적이 된 나는 하늘
을 쳐다보며 눈을 감고 입술을 달싹였다. 내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은 북조선의 언덕
위에서 부르던 노래, 「흐르는 별은 살아 있네」의 가락”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종전과 해방 직후의 체험담인 염상섭의 소설 「삼팔선」과 후지와라의 수기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는 변화하는 북선의 공간감각을 그려낸 대표적 서사이다. 두 서사는
패전과 해방으로 생성된 불안과 공포를 피해 정체성의 근원 공간인 고향을 향해
월경을 결행하고 그 여정에서 북선을 가로질렀다. 조선인 남성인 염상섭의 여정보다
일본인 여성인 후지와라의 여정이 고달프고 신산했음은 물론이나, 피난의 고난은
예외없이 북선을 경과하는 내내 지속되었다. 식민지시대를 양분하던 북선의 표상들,
요컨대 개척과 식민의 희망은 물론 수려한 산천이나 풍성한 문화마저 전재민의 고난
30) 삼팔선 월경 직후 염상섭이 만난 첫 남선 사람은 식량가의 폭등 이유를 ‘흥남질소’라 지목했다.
이 대화는 분단으로 마주하게 된 남선의 난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북선에서 기차의 연착
이유를 궁금해 하며 남선과 북선의 화물차, 기관차, 철로선 보유량에 대한 비교도 같은 의미로
읽을 수 있다. 물론 남선이 처한 난관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남행 피난민으로서 예측되는 자신의
미래를 고민했기 때문이다. 만약 북행 피난민이었다면 북선의 난관을 고민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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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의미를 잃는다. 그러나 고난의 여정 가운데에서도 그들에게 북선은, 동정적이고
호의적인 조선인들과 두려워할 필요 없는 소련군들을 경험하는, 오히려 불안과 공포
를 소멸시키는 공간이었다. 고난은 북선이라는 식민지시대의 공간감각을 해체했고
벌거벗은 인간들로 그 자리를 채웠다. 북선은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는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삼팔선의 차단기와 그 양단을 지키는 소련군과 미군은 남과 북이 더 이상
월경할 수 없는 공간이 되었음을 상징한다. ‘북선’과 ‘남선’이 ‘북한’과 ‘남한’으로
분단되어 서로가 서로의 공간을 소련과 미국의 이데올로기로 대신하는, 감각할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는, 실천은 더더욱 불가능한, 텅 빈 공간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이 살고 있었네?의 이야기가 이어지게 된다.
Ⅴ. ‘北鮮’의 기억
후지와라 데이 일행이 북선의 선천에서 고향 회귀를 목표로 한 삼팔선 월경을
결행할 때, 그녀 앞에는 조선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펼쳐진 조선지도 위의 삼팔선은
단지 위도 표시에 불과했지만,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군사적 차단기였고 금단의 공간
이었다. 염상섭은 조선지도 없이도 후지와라의 조선지도를 끊임없이 그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삼팔선 월경을 결심하는 순간은 ‘북선’의 공간감각이 붕괴하는 순간
이었고 삼팔선 월경에 성공하는 순간은 ‘북선’이라는 - 이후 ‘북한’으로 이어지는
- 아토피아가 생성되는 순간이었다. 해방기 월경서사에서 북선 여정은 식민지 근대적
공간감각의 붕괴와 분단적 공간감각의 생성 사이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식민지시대에 처음 등장한 북선의 공간감각은 개척과 식민의 공간, 조선인의 근원
적 정체성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식민권력은 북선을 시찰하고 조사하고 개척했
다. 제국적 규모의 조사사업으로 식민지조선에서 동원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을
기준으로 지역을 나누고 순위를 산정했다. 북선은 적은 인구에 군사적 긴장이 상존하
는, 그리고 광업, 산림업, 수산업 등이 유망한 낙후지역으로 표상되었다. 제국 통치자
의 시각이자 관심사인 것이다. 이에 비해 조선인들의 북선은 정체성의 공간으로 표상
되었다. 북선은 풍성한 문화, 수려한 산천과 동의어였고, 인정과 풍속, 역사와 여론이
있는 다시 말해 ‘사람이 살고 있는’ 근원적 정체성의 공간이었다. 식민지 조선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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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선은 특유의 의미와 가치를 품은 자존과 긍지의 공간으로 표상되었다.
그러나 삼팔선의 경계가 확정된 후, 북선은 이북으로, 다시 북조선으로, 또 북한으
로, 한반도의 북쪽 지역은 ‘환멸’과 ‘동토’의 표상으로 고정된다. 조선인은 물론 식민
권력도 공유하던 ‘조선’의 총체성이 깨지고, 남선은 북선을 또 북선은 남선을 무인영
토에 불과한 아토피아로 만들어 갔다. 그 아토피아의 새로운 명칭이 ‘북한’과 ‘남조
선’이었던 것이다. 공간감각의 상실을 일깨우는 동시에 공간감각을 재창출하려는
시도가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재발견한 황석영의 일갈이었던 것이다.
반공간 아토피아의 기원에 현 공간에서 생성된 불안과 공포가 있었다. 패전과 해방
은 식민된 제국 일본의 신민은 물론 고향을 떠나 이주한 조선인에게도 불안과 공포였
고, 안전과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공간으로의 회귀를 촉발했다. 그들에게 삼팔선
분단 소식은 공포 부재의 공간, 안전과 생활이 보장된 공간, 정체성의 근원적 공간
즉 고향으로의 회귀 불가능의 감각을 자극했다. 해방기 북선을 가로지르는 월경 서사
가 펼쳐진 환경이다. 그러나 고향을 향한 고난의 여정 속에서 불안과 공포는 오히려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 북선을 종단하는 동안 만났던 조선인은 동정적이고 호의적이
었다. 북선은 곧 북선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이었고 월경자들이 경험한 동정과 호의가
탈북선을 자극한 불안과 공포를 소멸시켰다. 조선의 공간적 총체성이 붕괴되는 순간,
또 감각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으며 실천할 수 있는 ‘북선’이 아토피아로 전환되는
분기의 순간, 남선을 선택한 이들에게 북선의 마지막 기억은 조선인으로서의 ‘북선’,
사람으로서의 ‘북선’으로 남았다. 북선의 사람들, 여기가 ‘북선’ 토피아의 종착지이
자, ‘북한’ 토피아의 출발점이다.
투고일: 2019.04.17 심사일: 2019.05.24 게재확정일: 2019.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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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鮮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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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emory of North Korea
Lee, Kyeong-don
Because of the 38th parallel, North Korea has became empty place, atopia. North
Korea is the place but it isn't the place which South korean can't perceive or experience.
The empty place is filled with ideology. There is a clue we can re-place the North Korea
(北鮮). During the colonial modern period, it had become atopia. Emerged in the colonial
period, place sense of North Korea was divided into two meanings: one was developing
and colonial space, the other was place of recognizing Korea people's identity. Colonial
power investigated and inspected North Korea. After investigating it in a imperial scale,
colonial power divided and ranked regions depending on material resources. So North
Korea which had small population but military tension represented a backward reign of
the country but it also had the great possibility in mining industry, the forestry industry,
fishing industry. The ruler of the empire recognized it as developing and colonization.
The recognition was the space sense of North Korea.
By comparing this recognition, Korean cognized it as the symbol of place where they
could realize their identities. North Korea had the same meaning of good culture,
beautiful mountains and streams. Also it had histories and public opinions that is to say,
it was the place where they could recognize their identities. To Korean in the colonial
period, North Korea was the symbol of having unique value and meaning. So it became
the place of pride and self-esteem.
But after ending the war and liberation, the two recognition of North Korea started
to collapse. There was horror and anxiety that came from not-space, atopia. North Korea
had the same meaning to not only Japanese also Korean who left their homes. So that
feeling caused them to go to place giving them security and guarantee of living. But
the news of division of 38th parallel made them feel that they couldn't go to place which
they wanted to live in. That is to say, it meant the impossibility of going back home
where they could recognize their identities. Crossing the border in the liberation period
happened in this situation. But the feeling of horror and anxiety went through the proc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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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fading away in the hard journey to hometown. Korean they met in crossing North
Korea were very friendly and kind. North Korea was just north Korean. The kindness
and friendliness they experienced could help fade away the feeling of horror and anxiety
of the border crossers which made them decide to escape North Korea. It was the time
when the spatial totality of Korea collapsed, North Korea which had been perceptible,
sensible, workable changed into atopia. Also to people who choose to stay South Korea
(南鮮), the last memory of North Korea was just Korean.
Key Words : North Korea, South Korea, DPRK, ROK, Northern Region, Termination
of war, Postwar, Liberation, Division, 38th parallel, Transport, Border
crossing, Repatriation, Return, Homeland, Space sense, Atopia(Atopie),
Common mem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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