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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

동북으로 가는 길의 역사적 전개― 慶興路에서 京元線으로/金效恩.성균관대



Ⅰ. 서론
Ⅱ. 조선시대의 도로
Ⅲ. 동북으로의 간선과 지선
Ⅳ. 개항 이후 통신과 육로의 변천
Ⅴ. 결론


• 국문초록
본고는 서울로부터 한반도 동북부 지역인 함경도로 향하는 전통적인 길에 주목하
여 조선시대 도로의 설치와 이용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조선시대의 도로에 대한 규정
은 초기의 법전에서 규정하고 있는데, 서울로부터 가까워 교통량이 많음에 따라 대
로・중로・소로로 구분되어 관리되었다. 대로에 해당하는 역들은 세 갈래의 길에 해
당하는데, 각각 서북(의주) 방면, 동북(경흥) 방면, 남부 방면으로 볼 수 있다. 서울로
부터 동북부 극점에 해당하는 경흥(서수라)으로 통하는 길은 경흥로라 하여 조선시대
의 간선도로 중 제2로로서 여러 지리지에 기재되었다. 경흥로의 지선 중 삼방로라 하
는 길은 경흥로와 함께 함경도의 물산이 많이 집중되는 원산으로 통하는 주요 갈래길
이었다. 삼방로는 보다 짧은 거리와 추가령 구조곡이라는 철령보다 완만한 고개를 넘
었기 때문에 원거리 이동에 적합하여 길의 이용이 간선인 철령을 넘는 경흥로보다 잦
아지게 되었다. 관방에 위협이 된다는 문제제기로 인해 삼방로의 치폐 여부를 두고
조선 정부에서는 반세기에 걸친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보다 효과적인 중앙의 관리를
위하여 길의 허통이 용인되는 방식으로 결론지어졌다. 일제 시기에 철도가 부설되면
서 경흥로가 재현되는데, 경원선~함경선~도문선이 바로 그것이다. 다만 경원선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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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 삼방로와 궤를 같이 하는데,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전통적 길인 삼방로(경원선)
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량 물류 수송에 적극적으로 이용되게 되었다.


주제어 : 역, 도로, 경흥로, 삼방로, 경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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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조선은 국초부터 “郵傳之置 爲傳命也”라 하는 기치 아래,1) 육로에는 역이 원칙상
30리마다 설치되어 전국적 연결망이 형성되어 있었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서울과
지방간의 인적, 물적 이동은 물론, 정보의 이동까지도 물리적 이동을 통해 이루어져야
했는데, 이때 필요한 것은 오고 갈 수 있는 ‘길’, 즉 도로였다. 전근대 한국의 도로는
소략하긴 하지만 고구려와 신라에서 역원이 설치되었고, 경로를 역을 기준으로 표기
한 기록이 있는 등 삼국시대부터 추적이 가능하다. 특히 신라에는 ‘5通’이라 하는
王道와 각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있었다고 추정된다.2) 백제의 경우 문헌에는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유적을 통해 지역 거점들이 도로로 연결되어 있었음이 발견되
었다.3)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성종대에 역제가 본격적으로 정비되면서 보다 구체적
인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 전국에 22개의 驛道와 525개의 역이 설치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개경과 서경을 중심으로 외방 도로가 상호 연결되는 역로망이 편제되
었다.4) 고려의 역로 편제는 조선시대에 재편을 거쳐 계승되었다. 이처럼 한국의 교통
사는 역의 설치와 함께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정비되었다.
남과 북을 잇는 교류가 기대되고 있는 작금의 정세 속에서 북쪽으로의 물리적인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길’이 주목되고 있다. 정부에 의해 종적으로 한반도를 연결하
는 철길과 도로 구축이 이른바 ‘한반도 신경제지도’의 H라인으로 구상되고, 공동선언
등을 통해 동해선과 서해선에 대한 연결 및 착수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동해선과 서해선 철도를 논할 때, 자주 노선 ‘복원’이라는 말로 단절된 남북을


1) ?三峯集?, 「朝鮮經國典」 下, 政典 驛傳條.
2) 고구려에는 수도인 국내성에서 중국을 연결하는 육로로 北路와 南路가 있었고, ?三國史記?, 「地理
志」, 高句麗條에 “평양으로부터 이곳(국내성)까지 17驛이다.”라고 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역원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는 소지왕때 郵驛이 설치되었고, 그때 이미 官道도 존재했었
다. 5通에 관해서는 설명될 수 있는 기록이 없어 추정될 뿐이지만, 경주를 기점으로 동해안・충남・
부산・호남・발해 방면으로 향하는 길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이상의 고구려와 신라 관련 내용은
조병로, ?韓國驛制史?,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2002, 51~83면 참조.
3) 이판섭, 「古代 地方道路와 陸上交通路-燕岐地域을 中心으로」, ?호서고고학? 35, 호서고고학회,
2016.
4) 고려시대 역제와 관련해서는 정요근, 「고려전기 역제의 정비와 22역도」, ?韓國史論? 45, 서울대
국사학과, 2001; 조병로, 앞의 2002 책, 101~133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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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는다고 하는 설명이 더해진다. 여기서 복원이란 무엇일까. 정재정은 한반도를 남북
으로 종관하는 간선철도는 원래 일본이 20세기 전반기에 일본~한국~만주~유라시아
대륙을 연결하기 위해 건설・운영한 바 있었다고 언급하였다.5) 남북의 철도 연결이
이미 이루어진 바가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철도 설치 이전, 즉
전근대 사회에서도 북쪽으로의 길은 간선로로서 중요한 위치를 부여받으며 존재하고
있었다. 전통사회 혹은 전근대 사회로 명명되는 과거는 현재와는 구별된 사회로 다루
어져 왔으나, 전통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근대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난다는
미야지마 히로시의 시각은 장기사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설명해준다.6) 이와 같은 논
지는 근대의 기준으로 전근대를 판단하는 시각에도 경계를 고한다. 그의 시각을 전제
로 하여 본 연구는 조선시대에 형성된 도로망이 일제시기에 어떻게 재편되었는지를
장기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조선시대 도로에 관해서는 다수의 선행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이른 시기의 성과로
최영준의 연구를 언급할 수 있다.7) 그는 조선시대 간선로 중 하나인 嶺南路의 사례를
통해 조선시대 교통로를 고찰하였는데, 역로 개설의 근본 목적은 중앙집권적 관료국
가체제의 유지에 있었고, 정치・군사・경제・문화 등 다방면의 기능을 담당하였다고
설명한다. 특히 경제적 기능면에서, 상업로의 발달이 지방 小路에서 이루어졌음을
제시하였다. 도도로키 히로시(轟博志)는 여러 지리지에서 도로의 체계를 계보표의
형식으로 나타내는 ?距京程里表?에 관하여 대략의 정리를 하였다.8) 그는 대부분의
?距京程里表?가 신경준이 엮은 ?東國文獻備考?, 「輿地考」의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했
다. 또 국가에서 명확하게 도로의 노선과 구간을 규정하지 않았으며, 그 체계는 지리
서마다 그것을 기록한 사람의 지식, 의도, 입장, 연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서술하였다. 류명환은 조선시대의 두 지리지와 지도에 나오는 중심적인 도로망을
비교하여 사찬 지리서인 ?道路考?에서는 저자의 실용적 생각이, 관찬 지리서인 「輿地


5) 정재정, 「역사적 관점에서 본 남북한 철도연결의 국제적 성격」, ?동방학지? 129, 연세대 국학연구원,
2005, 234면.
6) 미야지마 히로시, 「동아시아 小農社會의 형성」, ?인문과학연구? 5, 동아대 인문과학대학 인문과학연
구소, 1999; 미야지마 히로시, ?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공부?, 너머북스, 2013.
7) 최영준, 「朝鮮時代의 嶺南路 硏究-서울-尙州의 경우」, ?대한지리학회지? 10(2), 대한지리학회, 1975.
8) 도도로키 히로시, 「?距京程里表?의 내용유형과 계통에 관한 연구」, ?대한지리학회지? 45(5), 대한지
리학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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考」에서는 행정・군사적인 목적에 따라 도로를 기술하였다고 밝혔다.9) 조선시대 간
선로 중 특히 서북쪽의 극점에 위치한 義州로 연결되는 義州路는 본격적인 연구
주제로 여러 각도에서 분석된 바 있다.10)
앞서 언급한 최영준의 지방 소로가 상업로로서의 역할을 하였다는 논점은 조선후
기의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싹트고 있었다는 내재적 발전론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후
에도 이와 같은 시각에서 도로망의 지선 이용을 민간 상업로로서의 발전으로 바라보
는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11) 함경도의 극점인 동북쪽의 경흥으로 향하는 간선로에서
그 지선 중 하나인 三防路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 통행 허가는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
발전에 따른 결과로서, 상업로의 사례로 제시되었다.12)
이와 대조해 김재호는 시장경제 발달과 관계있는 화폐의 이용이 조선 사회에서는
‘국가지불수단’으로 기능하였으며, 조세의 동전 상납은 시장조건보다 운송조건에 관
련이 있음을 분석해, 소농국가의 경제적 재분배의 성격을 유지했음을 설명하였다.13)
손병규 또한 같은 맥락에서 중앙 국가기관에서의 세물의 물류는 시장을 통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현물이 고수되고, 관리가 쉬운 도내 물류에서 화폐가 유통되었음을
살펴, 금전의 유통은 세물 납부의 보조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고, 시장은 세물 납부를
위해 억제되었음을 밝혔다.14) 본 연구는 이상의 연구 성과들을 참고하여 전근대부터
이어져온 길의 체계와 이용에 대해 재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연구 대상을 조선시대 북쪽으로 향하는 간선로 중 하나인 慶興路로
삼아 그것의 지선인 三防路와 함께 분석한다. 우선 2장에서는 전근대의 도로와 역의
설치에 대해 살핀다. 특히 조선시대 도로의 기본적인 틀과 주요 도로인 간선로의
형성에 대해 서술한다. 이어 3장에서 간선로 중 한반도의 동북 극점인 경흥으로의


9) 류명환, 「?도로고?・「여지고」의 도로체계와 ?동역도?의 비교 연구」, 부산대 박사학위논문, 2012.
10) 이혜은, 「조선시대의 교통로에 대한 역사지리적 연구 한성-의주간을 사례로」, 이화여대 석사학위논
문, 1976; 류명환, 「義州路 道程 기록 계통 연구」, ?한국고지도연구? 6, 한국고지도연구학회, 2014;
신춘호, 「古地圖를 통해 본 義州大路 원형 복원 일고」, ?한국고지도연구? 6, 한국고지도연구학회,
2014.
11) 김종혁, 「조선후기의 대로」, ?역사비평? 69, 역사비평사, 2004.
12) 고승희, ?조선후기 함경도 상업연구?, 국학자료원, 2003, 제2장 2절; 고동환, ?한국 전근대 교통사?,
들녘, 2015, 2장 2절.
13) 김재호, 「朝鮮 後期 中央財政과 銅錢-?賦役實摠?을 중심으로」, ?경제사학? 44, 경제사학회, 2008.
14) 손병규, 「조선후기 국가재원의 지역적 분배」, ?역사와 현실? 70, 한국역사연구회, 200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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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살피고, 삼방로의 치폐 사례를 통해 도로 인식과 조선 정부의 도로 정책을 읽어
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4장에서는 근대 전환기와 일제시기의 철도 부설, 특히 京元
線과 관련된 부설 과정을 살펴, 조선시대와의 도로 이용의 異同에 대해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Ⅱ. 조선시대의 도로
1. 역의 설치와 도로 체계의 정리
고려 성종대, 전국에 22개의 驛道와 산하의 525개의 역이 본격적으로 정비되어
설치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개경・서경을 중심으로 외방 도로가 상호 연결되는 역로
망이 편제되었다. 조선의 역제는 고려의 것을 재편・계승하였는데, 조선시대의 전국
적인 역도-속역의 분포를 볼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은 ?世宗實錄地理志?로, 여기에는
44개의 역도에 538개의 속역이 설치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몇 차례의 정비를
거쳐,15) ?經國大典?에 전국에 41개의 역도에 543개의 속역이 설치되는 것으로 법제
화되었다. ?經國大典?에 나타나는 各道별 역도와 역의 수를 정리하면 아래의 <표
1>과 같다. 이후 몇 개소의 치폐가 이루어졌는데, 대체로 ?經國大典? 시기의 규모가
유지되었다. 역도는 초기에 찰방이 파견되는 察訪道와 역승이 파견되는 驛丞道로
구분할 수 있는데, 중종대에 역승이 혁파되어 모든 역도에 찰방이 파견되었다.
<표 1> ?經國大典?에 나타나는 各道별 역도와 역의 수
道 명 경기 충청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 평안 합
역도 수
(찰방/역승)
6
(3/3)
6
(3/3)
11
(5/6)
6
(3/3)
3
(2/1)
4
(2/2)
3
(3/-)
2
(2/-)
41
(23/18)
역 수 53 71 159 59 33 82 52 34 543
출전: ?經國大典?, 「吏典」 外官職.
15) 조선 전기의 역제 정비 과정에 관해서는 양정현, 「조선 초기의 驛道 편제와 그 성격」, 고려대
석사학위논문, 201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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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國大典?에서는 도로에 관한 기본적인 규정이 나타나 있다. 우선 「公典」 院宇條
에서 도로를 大路・中路・小路로 구분하였는데, 서울(京都)로부터 開城府, 竹山, 稷
山, 抱川에 이르는 길이 대로, 서울로부터 楊根, 竹山으로부터 尙州, 鎭川으로부터
星州, 稷山으로부터 全州, 開城府로부터 中和, 抱川으로부터 淮陽에 이르는 길이 중
로, 이외의 나머지가 소로에 해당하였다.16) 이어 橋路條에서는 도성 내의 대로와
중로, 그리고 소로 각각의 노폭과 관리법을 제시하였고,17) 지방의 도로에 관해서는
‘堠’라고 하는 이정표를 일정 거리마다 세우도록 하였는데, 매 10리마다 小堠를 세우
고, 30리가 될 때는 大堠를 세우게 하며 역을 설치할 것을 명시하였다.18) 또 「戶典」의
諸田條 廩田에서는 대로에 위치한 역에는 20결, 중로의 역에는 15결, 소로의 역에는
5결을 절급하도록 하였으며,19) 「兵典」 土官職條 外衙前에서는 驛日守를 대로에 20
명, 중로에 15명, 소로에 10명을 두도록 하는 등,20) 도로의 구분에 따라 차등적으로
토지와 일수가 지급되도록 하였다.
?經國大典?이 완성되고 10년 뒤에 법령을 모아 편찬된 ?大典續錄?의 「兵典」, 驛路
條에서는 ?經國大典?에서 대로를 서울에서 개성부・죽산・직산・포천에 이르는 길
이라고 제시한 것과는 달리, 대로・중로・소로에 속하는 역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
고 있다.21) 이것은 이후 ?續大典?에 그대로 반영되어, 대전의 한 조항으로 법제화되
었다.22) ?大典續錄?의 대로에 속하는 역은 총 12개소로 모두 경기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그림 1>로 나타내었다.
<그림 1>에서 ‘1’로 표시된 역들은 迎曙驛(楊州), 碧蹄驛(高陽), 馬山驛(坡州), 東
坡驛(長湍), 靑郊驛(開城)으로,23) 서울로부터 서북쪽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다.
16) ?經國大典?, 「公典」 院宇.
17) ?經國大典?, 「公典」 橋路.
18) ?經國大典?, 「公典」 橋路.
19) ?經國大典?, 「戶典」 諸田 廩田.
20) ?經國大典?, 「兵典」 土官職條 外衙前.
21) ?大典續錄?, 「兵典」 驛路.
22) ?續大典?, 「兵典」 驛路.
23) 狻猊驛은 靑郊驛과 마찬가지로 개성에 위치하여 ‘1’에 속하지만, 후기에 폐역되어 위치 비정이
불확실하므로 그림에서는 나타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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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朝鮮八道地圖?(古 4709-54) 상 ?大典續錄?의 大路역 위치 표시
‘2’로 표시된 역들은 綠楊驛(楊州), 安奇驛(抱川), 梁文驛(永平)으로, 서울로부터 동북
지역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한다. ‘3’의 역들은 良才驛(果川), 樂生驛(廣州), 驅興驛
(龍仁)으로 서울에서 한반도 남부로 가는 길목이다. ?經國大典?에 서술된 4개의 대로
중, 개성부에 이르는 길은 ‘1’의 역을 이은 길과, 포천에 이르는 길은 ‘2’의 역을
이은 길과, 죽산과 직산에 이르는 길은 ‘3’의 역을 이은 길과 통한다는 점에서, ?經國
大典?과 ?大典續錄?에서 나타나는 대로의 내용은 다르지만, 양자가 공통적으로 서울
로부터 서북・동북・남(서남・동남)쪽 분기의 주요 길목을 대로로 규정했음을 알
수 있다. ?朝鮮經國典?에서 정도전은 京邑에 가까운 역은 운송과 수운이 폭주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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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역보다 수고가 많이 든다고 하면서, 역로를 大・中・小로 구분하여 토지를 차등
적으로 주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24) 이로부터 알 수 있듯, 서울에 각지로부터의
교통이 집중되기 때문에 대로는 서울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경기지역에 한정되었다.
즉, 여기서 말하는 대로는 이용량에 따른 토지의 차등 지급을 위한 大・中・小의
구분에 따른 도로의 등급을 말한다.
초기의 법전들에서 길을 대로・중로・소로로 구분하고, 각 도로 등급에 따른 차등
적인 관리 지침을 제정하고, 역을 배정하였다. ?經國大典?, 「公典」의 橋路條를 제외하
면, 도로에 관한 내용은 모두 역을 기준으로 서술되고 있다. 조선에서는 선로라기보다
는 역이라는 점들의 연결로 길을 설명한 것이었는데, 법전에서 점으로 분포된 역의
서술만으로는 당시의 도로의 경로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존재한다. 지역과 지역을
잇는 주요 경로에 대한 설명은 18세기에 처음으로 정리되었다.
2. 18세기 이후의 幹線路
18세기에 이르러, 申景濬에 의해 서울을 중심으로 한 도로망이 처음으로 번호가
매겨져 정리되었다. 신경준은 1770년에 개인 저술서인 ?道路考?에서 6대로를, 같은
해에 영조의 명에 의해 편찬된 ?東國文獻備考?의 「輿地考」, 道里(이하 「輿地考」)에서
9대로의 노정을 기록하였다. 이 도로들은 한반도의 각 극점과 서울을 연결하는 간선
로로, 서북지역의 극점인 義州(鴨綠江)을 종점으로 하는 길을 제1로로 정하고, 시계방
향 순으로 도로의 번호를 매겼다. 이후 여러 지리지에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도로를
규정하였는데, 시기별 대표적 지리지로 19세기 후반 金正浩의 ?大東地志?의 「程里
考」(이하 ?大東地志?), 20세기 초 張志淵의 ?大韓新地志?, 「道里表」(이하 ?大韓新地
志?)를 꼽을 수 있다. 이상의 네 개의 지리지 속 도로망을 정리한 것이 아래의 <표
2>이다.
24) ?三峯集?, 「朝鮮經國典」 下, 政典 驛傳條, “分路大中小爲三等. 給田有差. 其國之西北自金郊至洞仙.
東南自靑郊至龍駒. 密邇京邑. 四方輻溱. 迎送輸運之勞. 倍於他驛. 加給其田. 所以重郵驛之傳命
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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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 지리지별 도로망
?道路考?
(1770)
「輿地考」
(1770)
?大東地志?
(1861~1866)
?大韓新地志?
(1908)
제1로 京城西北抵義州路第一京城西北抵義州第一西北至義州一大路京城西北至義州第一路
제2로 京城東北抵慶興路第二
京城東北抵慶興西水羅
第二
東北至慶興二大路
京城東北至慶興西水羅
第二路
제3로 京城東抵平海路第三京城東抵平海第三東南至平海三大路京城東抵平海第三路
제4로 京城東南抵東萊路第四京城東南抵釜山第四東南至東萊四大路京城東南至釜山第四路
제5로 京城西南抵濟州路第五
京城南抵統營第五
(제4로에서 분기)
東南至奉化五大路京城南至固城第五路
제6로 京城西北抵江華路第六京城南抵統營一路第六西至江華六大路京城南至晉州第六路
제7로
京城南抵濟州路第七
(제6로에서 분기)
南至水原別七大路京城南至濟州路第七路
제8로
京城西南抵忠淸水營第

(제6로에서 분기)
南至海南八大路京城西南至洪州第八路
제9로 京城西抵江華第九西南至忠淸水營九大路京城西至江華第九路
제10로 南至統營別路十大路
출전: ?道路考?; ?東國文獻備考?, 「輿地考」(奎 5216-v.8); ?大東地志?, 「程里考」(古 4790-37-v.13); ?大韓新地志?, 「道里表」(B16AB-0009a).
위의 <표 2>에서 지리지별 도로망을 보면 몇 가지 차이점이 눈에 띈다. 우선 ?道路
考?에서 마지막 도로의 순번 표기를 ‘第六’, 「輿地考」에서는 ‘第九’, ?大東地志?에서
는 ‘十大路’, ?大韓新地志?에서는 ‘第九路’로 표기한데서 알 수 있듯, 큰 줄기가 되는
도로의 개수가 상이하다.25) 또한 제1~4로의 종점은 차례대로 의주, 경흥, 평해, 동래
(부산) 순으로 동일한데 반해, 제5로 이하의 종점은 일치하지 않는다. 더불어 이 표에
서는 나타내진 않았지만, 상세한 노선을 살펴보면 같은 노선이라 하더라도 지리서마
25) 제시한 지리지 중 김정호의 ?大東地志?에서는 10개의 간선로를 ‘大路’라고 표기하였지만, 기타
참조 사료에서는 ‘대로’라는 표현을 명시적으로 쓰지 않았다. 2장 1절에서 설명한 법전 상에서
규정하는 ‘대로’와 혼동될 수 있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이들 큰 줄기가 되는 도로를 ‘대로’(慶興大路)
라 칭하지 않고, ‘간선로’로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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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세부적인 경로에서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같은 경로라 할지라도 거리(里數) 또한
다르다.26)
다만 신경준이라는 동일한 저자에 의해 동일한 시기에 저술된 ?道路考?와 「輿地
考」의 내용에서도 뚜렷한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경준이 어느 것을
먼저 저술하였는지 불분명한 데다, 이미 도로에 대한 저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기에 또 다른 책에서 다른 기준으로 도로를 정리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술
이 없다. 다만 「輿地考」는 왕명에 의하여 편찬되었기 때문에 통치 시스템의 연락체계
가 구비되어야 할 필요에서 관련 기술이 요구되었음을 추측할 뿐이다. 「輿地考」의
아홉 개의 간선로 중 ?道路考?의 여섯 개의 간선로와 중복되지 않는 종점은 ‘京城南
抵統營第五’・‘京城南抵統營一路第六’・‘京城西南抵忠淸水營第八’로, 모두 종점이
병영이라는 점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輿地考」의 제4로와
제5로, 그리고 제6로와 제7・8로의 노선이 중첩된다. 제5로의 상세경로를 살펴보면
첫 번째 경유지는 聞慶의 幽谷驛으로 나오는데, 그 아래에 “已見第四”라고 부기하여
앞의 제4로에서 幽谷驛까지의 경로를 참고할 것을 요한다. 제7・8로도 마찬가지로
각각의 첫 번째 경유지인 전주의 參禮驛(제7로)・素沙(제8로)까지의 경로를 제6로에
서 언급하였다고 아래에 “已見第六”이라 덧붙였다. 즉, 「輿地考」의 기본적인 대로는
신경준이 ?道路考?에서 서술한 여섯 개의 간선이 기본이 되어 목적에 따라 몇 개의
분기로 나뉘었다고 볼 수 있다.
외부인의 저술에서도 조선의 간선로에 대한 내용이 등장한다. 19세기 말 조선을
방문한 비숍(I.B.Bishop)은
“여행자들이 도보 여행이나 승마 여행에 이용하는 길은, 보통 시간당 3마일
의 속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열악하다. …… 서울로 향하는 「여섯 대로
(大路)」 조차도 다리가 허술하여 마부는 말보다 앞서 시험삼아 건넘으로써
……”27)
26) 뒤의 부표 속의 慶興路의 사료별 경로를 보면 ?道路考?에서는 92개, 「輿地考」에서는 81개, ?大東地
志?에서는 115개, ?大韓新地志?에서는 81개의 경유지가 등장한다. 적어도 제2로에 한해서는 ?大韓
新地志?의 모든 경로는 「輿地考」와 동일하다. 다만 淮陽에서 鐵嶺에 이르는 구간이 「輿地考」에서
는 45리, ?大韓新地志?에서는 40리로 표기되었다. 이를 제외한 다른 경로의 구간 거리는 모두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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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서술하였다. 비숍은 당시의 조선의 도로가 매우 열악하였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심지어 서울로 향하는 여섯 개의 대로마저도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비숍이 말하는 여섯 대로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서울로 향하는’이
라고 하는 표현을 통해, 중앙으로부터 의주・경흥・평해・동래・제주・강화로 향하
는 여섯 개의 간선로를 지칭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昭和 3년(1928)에 일본에 의해 편찬된 ?朝鮮の鉄道?에서도 조선시대의 간선로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바로 “第1路 西北 京城-義州”, “第二路 東北 京城-慶興”, “第
三路 東 京城-平海”, “第四路 東南 京城-東萊府”, “第五路 南 京城-濟州”, “第六路
西 京城-江華”라 하고 있다.28)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여섯 개의 간선로가 등장하며,
비숍의 글과는 달리 구체적으로 어떤 간선로가 있었는지가 서술되어 있다. 또한 간선
로들의 종점의 지역과 순서가 ?道路考?와 일치한다. 이와 같이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자료와 증언을 보면 서울을 기점으로 하는 6개의 길이 인식상・정책상 일정
정도 간선로로 공식화되어 있었다고 상정할 수 있다.
Ⅲ. 동북으로의 간선과 지선
1. 慶興路와 三防路
중국과 국경을 맞닿고 있는 함경도 지역은 조선시대에 들어서 태조 이성계가 국가
의 기틀을 닦은 땅으로 인식되어 왔다.29) 서울로부터 함경도의 동북 극점이자 한반도
의 동북 극점인 慶興(西水羅)을 연결하는 간선로는 참고되는 모든 지리지에서 ‘제2
로’로 등장한다. 도로의 순번을 어떠한 기준으로 정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1로는
서북부의 義州로 향하는 길로, 대중국 사행이 왕래하는 중요한 길이었기 때문에 첫
번째 간선로로 지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27) I.B.비숍 저, 신복룡 역,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집문당, 2000, 128면.
28) 朝鮮總督府鐵道局編, ?朝鮮の鉄道?, 朝鮮鐵道協會, 1928, 7~8면.
29) 조선 후기까지도 여전히 이러한 인식 속에서 함경도 지역에 태조 및 그 위의 선조에 대한 현창
사업이 진행되었다(?正祖實錄? 23권, 정조 11년 4월 2일 己亥).
동북으로 가는 길의 역사적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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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흥으로 향하는 길은 의주로 향하는 간선로를 기점으로 하면, 시계방향으로 바로
다음에 위치하며 의주와 마찬가지로 국경을 직접적으로 맞대고 있는 국방상 요지였
기에 그 중요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이 길은 윗 장의 <표 2>에서 볼 수 있듯, ‘京城東北
抵慶興路第二’, ‘京城東北抵慶興西水羅第二’, ‘東北至慶興二大路’, ‘京城東北至慶興
西水羅第二路’ 등 대동소이한 명칭으로 기재되고 있는데, 이하 본고에서는 이 길을
‘慶興路(경흥로)’라 지칭한다.30) 경흥로는 지리지에서 많으면 열 개까지 제시되기도
하는 간선로 중 가장 긴 길이의 노선을 갖고 있다. 지리지마다 구간 거리의 편차가
약간씩 존재하긴 하지만, 서울에서 경흥(실제로는 서수라)까지 최장 2,500리 이상의
노선이 이어진다.31) 경흥로는 서울과 경기도의 3개의 군현(楊州, 抱川, 永平), 강원도
의 4개의 군현(鐵原, 金化, 金城, 淮陽), 함경도의 21개의 군현(安邊, 德原, 文川, 高原,
永興, 定平, 咸興, 洪原, 北靑, 利城, 端川, 吉州, 明川, 鏡城, 富寧, 茂山, 會寧, 鍾城,
穩城, 慶源, 慶興)에 걸쳐 있는 길이다. 함경도 거의 대부분의 군현을 지나기 때문에
함경도의 관찰사로 부임하게 되면 이 경흥로를 이용하여 순력을 다녔다.32)
지리지를 살펴보면, 각 간선로마다 분기되는 지선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道路考?를 기준으로, 제1로에는 31개, 제2로에는 13개, 제3로에는 7개,
제4로에는 36개, 제5로에는 52개, 제6로에는 3개의 지선이 제시되어 있고, 이외에
지름길(徑路)로 부기되어 있는 것이 5개가 있는데, 각각 제1로, 제2로, 제3로, 제4로,
제5로에서 하나씩 보인다. 경흥로의 지름길은 龍池院에서 분기되어 禁基(30)~才川店
(20)~三防店(30)~分水嶺院(30)~儉佛浪店(20)~平康(40)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또 이
지름길의 시・종단점이 되는 평강은 지선 중 하나인 樓院~碑立街(20)~柯亭子(40)~
漢大灘(20)~通峴(20)~漣川(10)~龍潭(50)~鐵原(10)~月乃亭店(30)~平康(30)의 길과
이어진다. 즉, 이 두 개의 길을 연결하면 누원에서 용지원에 이르는 또 하나의 길이
30) 상기한 지리지들 상에서 이 경로의 종점이 ‘慶興’, 혹은 ‘慶興西水羅’로 표기되는데, 경흥은 공통적으
로 종점으로 언급되고 있으므로 ‘慶興路’라 약칭하고자 한다(참조되는 모든 지리지 속 제2로의
실질적 종점은 西水羅). 뒤에 支線에 대해 언급하겠지만, 여기서 이야기되는 ‘慶興路’는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한양에서 경흥으로 향하는 간선로를 의미한다.
31) 慶興路의 노선은 ?道路考?에서는 서수라까지 2,504리(경흥까지 2,444리), 「輿地考」에서는 서수라
까지 2,429리(경흥까지 2,364리), ?大東地志?에서는 서수라까지 2,180리(경흥까지 2,100리), ?大韓
新地志?에서는 서수라까지 2,424리(경흥까지 2,359리)로 나타난다.
32) 여상진, 「18세기 함경도 관찰사의 巡歷 노정과 주요 업무」, ?한국산학기술학회논문지? 18(9),
한국산학기술학회, 2017, 8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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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그것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 <그림 2>이다.
이 지선은 三防谷을 지난다고 하여 ‘三防路’라고도 불리는데,33) 삼방로를 이용한
누원~용지원의 거리는 총 400리로, 간선인 경흥로에서의 누원~용지원 구간의 430리
보다 30리가 단축되는 경로였다(?道路考? 기준). 게다가 경흥로는 鐵嶺을 경유하는
험난한 구간이 있는 반면, 삼방로는 ?道路考?에서 “此徑路也 不踰鐵嶺”이라고 설명
되어 있듯, 철령보다는 비교적 평탄한 楸哥嶺 構造谷을 경유하여 오고 가기가 수월하
였다.34) 서울에서 동북지역으로 가는 경로 중 추가령 구조곡을 통해서 가는 길이
가장 낮은 지대를 경유하는 것이었다.35)
<그림 2> ?道路考? 속 樓院~龍池院의 두 경로(실선은 간선, 점선은 지선을 표시)
33) 사료에서는 이 길목이 三防路(정조실록 24권, 정조 11년 9월 29일 계사 1번째기사), 三防岐路(?英祖
實錄? 29권, 영조 7년 5월 25일 丁亥), 三防一路(영조실록 63권, 영조 22년 6월 12일 丙子) 등으로
지칭되는데, 여기서는 三防路로 통일하여 표기한다.
34) 김종혁, ?일제시기 한국 철도망의 확산과 지역구조의 변동?, 도서출판 선인, 2017, 84・153면.
후술하겠지만, 일제에 의해 부설된 원산으로 향하는 철로(경원선)도 비교적 평탄한 추가령 구조곡
을 통과하게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35) 최영준, ?嶺南大路-韓國古道路의 歷史地理的 硏究?,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90, 35면.
동북으로 가는 길의 역사적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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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海東地圖?(古大4709-41) 黃海道 속 慶興路와 三防路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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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명으로 편찬된 「輿地考」는 ?道路考?와 마찬가지로 신경준에 의해 저술되었
음에도 불구하고 삼방로 관련 기록에 차이를 보인다. 「輿地考」에는 누원으로부터
평강에 이르는 지선은 기록되어 있지만, 평강으로부터 삼방을 경유해 용지원~안변・
덕원에 이르는 길은 부기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영조 7년(1731)의 이루어진 삼방로 관련 논의를 통해 그 단서를 유추할 수 있다.
북로에 파견된 尹淳에 의해 남북의 상인들이 안변에서 한양까지 기존의 길목인 철령
이 아닌 경로인 삼방로를 다닌다는 안건이 제기되었다. 윤순은 “철령 북쪽 삼방의
갈림길은 지름길이 되기 때문에 여행자들이 이곳을 거쳐 대로가 되었는지라 위급할
때에 관방이 허술해질 염려가 있습니다”고 하였는데,36) 이 사안이 다음 달인 6월에
재논의되어 “우선 나무를 길러 길을 막고, 주막을 철훼하는 것은 도신에게 맡긴다”는
내용으로 일단락되었다.37) 나무를 길러 길을 방색하는 樹木長養은 18세기 중반 이전
정부가 간로를 봉쇄하는 방법으로 이용되었다.38) 이렇듯 영조 7년인 1731년에 이미
삼방로를 防塞하도록 하는 조치가 공식적으로 취해졌기 때문에 관찬인 「輿地考」에서
는 이 지름길에 대한 정보가 의도적으로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2. 도로의 이용과 통제 정책
삼방로 이용빈도가 높아지면서 관방이 허술해질 수 있다는 우려로 방색이 결정났
지만, 여전히 삼방로는 빈번하게 이용되어 길이 넓어졌다.39) 때문에 삼방로 관련
안건은 약 반세기 후인 정조 11년(1787)에 재논의되었다. 전 北評事로 역임했던 副校
36) ?英祖實錄? 29권, 영조 7년 5월 25일 丁亥.
37) ?備邊司謄錄? 89책, 영조 7년 6월.
38) 김태홍, 「19세기 초 ?東輿記略? 편찬과 道路정책」, 연세대 석사학위논문, 2016, 31면. 김태홍에
따르면 수목장양은 성진 건설이나 관문 설치보다 유용한 방어책으로 인식되어 적극 준용되었다고
한다. 사료 속에서도 그 사례를 살펴볼 수 있는데, 숙종대의 평안 감사 閔鎭遠은 요해에 나무를
심어 길러 무성해지면 급박한 사태에 목책이 되고 성이 될 수 있다고 하며 수목장양이 가장 상책이라
고 하였고(?國譯備邊司謄錄? 66책, 숙종 39년 8월, “蓋臣意則凡係嶺阨要害之處, 長養樹木, 最爲上
策. 若多樹木, 則臨急設柵, 足以爲城, 多設疑兵於樹木間, 賊必不敢輕入矣.”), 정조대에도 좁은 고갯
길을 방어하는데 나무를 많이 기르는 것보다 상책은 없다고(?正祖實錄? 20권, 정조 9년 7월 26일
癸酉, “夫嶺隘防禦之策, 莫上於多養樹木.”) 하는 인식이 유지되었다.
39) ?英祖實錄? 63권, 영조 22년 6월 12일 丙子.
동북으로 가는 길의 역사적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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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 金履翼은 삼방로가 비교적 근거리로 왕래할 수 있기 때문에 빈번하게 이용되는데,
이것이 관방에 해를 입히는 것이 크므로, 길을 막기를 촉구하였다.40)
① 前原春監司 金鍾正은 말하기를, “…… 좁다랗게 처음 생길 때에 막았다면
옳았을 것이나 지금에 와서 막는 것은 되레 도움됨은 없이 해로움만 있을까 두
렵습니다. 대체로 통행한 지 이미 오래되어 원근에서 다 알고 있으므로 지금
비록 엄히 막아버린다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적이 쳐들어와 우리의 방비 없음
을 틈타서 앞질러 옛 길로 진출한다면 지금 막아버린 것이 되레 적의 길을 열
어주는 것이 될 터이니 이른바 도움됨이 없다는 것은 이것입니다. …… 만일
峽曲 속을 텅 비워 놓는다면 다만 적을 막지 못할 뿐만 아니라 누구 하나 경보
를 알리는 사람이 없을 것이니 이른바 해로움만 있다는 것은 이것입니다. 목하
空虛한 염려만 끼치고 후일 경비의 편리함을 잃는 것은 계략의 得이 아닐 듯합
니다.”” (?備邊司謄錄? 171책, 정조 11년 10월)
② 前北評事 金履翼이 말하기를, “저 철령의 관액은 얼마나 긴중한 곳인데도
관방의 허술함으로 말하면 삼방의 샛길이 나그네가 바뀌어 주인이 되었고 민
생의 艱苦함으로 말하면 삼방의 샛길이 손님을 꾀어 이익을 독점하여 天作의
險阨한 땅으로 하여금 하루아침에 버린 땅으로 만들었으니 일후의 걱정이 참
으로 지극히 깊습니다. …… 신의 구구히 守株하는 愚로는 아무래도 이 골짜기
를 다시 트지 못하게 하는 것이 득계라고 여기며 또 혹 이 골짜기를 트더라도
철령의 큰 관액에 해가 되지 않았으면 다행이라고 여기나 결국 좋은 대책이 없
는 듯합니다.”(?備邊司謄錄? 171책, 정조 11년 10월)
③ 金致仁이 아뢰기를, “형세를 눈으로 보지 못하였으므로 便否를 指一하여
아뢰기는 어려우나 일찍이 도신을 지낸 여러 사람의 말을 들으니 모두 막을 수
없다 합니다.” (?備邊司謄錄? 171책, 정조 11년 10월)
이에 같은 해 10월에 관련 대신들이 모여 상의를 하게 되었다. ①에서 보이듯
원춘감사였던 金鍾正은 삼방로를 막는 것에 대한 무용성을 주장하였는데, 그는 이제
와서 막게 된다면 그 곳이 공터가 되어 오히려 적의 침입이 용이하게 된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이 외에도 원춘도 관찰사 金載瓚, 함경도 관찰사 徐有寧, 鄭昌順,
전 원춘도 관찰사 具㢞, 蔡弘履, 金憙, 徐鼎修도 같은 맥락의 의견을 표하였다.41)
40) ?正祖實錄? 23권, 정조 11년 4월 2일 己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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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김이익은 ②와 같이 앞서 4월에 제기한 내용처럼 철령의 길이 조잔될 것을
우려하여 삼방로가 통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결론적으로는 당시의 영의정이었던 金
致仁(③)이 정리한 대로 삼방로의 통행이 인가되었다.
이전의 연구들은 삼방로의 통행이 정부의 공식적인 인가를 받은 것에 대해 상업의
발달에 따른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었다고 평가하며,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가 발달
되었다는 근거로 제시되었음은 서론에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상품화폐경제 체제에
서는 무엇보다 교환경제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삼방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行旅”
“商旅” 들에 의해 많이 이용되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朴齊家가
“원산에서 미역, 건어를 말에 싣고 왔다 사흘만에 돌아가면 이익이 조금 남
고 닷새가 걸리면 이익도 손해도 없다. 만일 열흘이나 머물게 되면 크게 축난
다. 돌아갈 때 싣고 가는 물건에서 얻는 이익이 보탬이 안되는 것은 그동안 말
에 든 비용이 많기 때문이다”42)
라고 했던 말은 자주 삼방로를 선택한 이유로 거론된다. 그러나 원거리 교역이 고래부
터 존재하였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43) 그 과정에서 짧고 평탄한 거리를 경유하여
시간의 단축을 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데, 본래 조선의 대량 수송은 수로를 이용한
수상수송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동북지방, 특히 함경도에서 서울까지 오자면 육로
이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44) 상품화폐경제 발달에 따른 도로의 발전이라면
오히려 교환거래의 대표적인 장소인 場市의 발달이 더 우선적인 조건이다. ?도로고?
의 마지막 부분에는 ‘開市’라고 하여 列邑의 장시가 열리는 날이 적혀있다. 이를
보면, 간・지선의 분기가 주로 이루어지는 강원도에서 경흥로 간선로가 지나가는
구역에서는 김화의 읍내장이 1・6일, 금성 읍내장이 5・10일, 금성 창도장이 4・10
41) ?備邊司謄錄? 171책, 정조 11년 10월; ?正祖實錄? 24권, 정조 11년 9월 29일 癸巳.
42) 박제가, ?北學議? 內篇, 車條(박제가 저, 이익성 역, ?北學議?, 을유문화사, 2011에서 재인용).
43) 원거리 물류는 고대사회부터 국가 사이에서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조대연은 선사시대부터 동지중
해 지역 간 교역이 이루어졌던 연구사를 정리해 장거리 교역의 시기를 후기 청동기로 파악하는
관점을 시도하였다(조대연, 「선사시대 교역에 대한 연구사례 검토-후기 청동기시대의 동지중해
난파선 자료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호남고고학보? 39, 호남고고학회, 2011).
44) 元永煥, 「朝鮮時代 交通路와 驛・院制의 考察-西北路와 東北路를 中心으로」, ?향토사연구? 7,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1995, 8면.
동북으로 가는 길의 역사적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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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회양 읍내장이 3・8일, 회양 신안장이 2・7일에 열린다.45) 반면 삼방로에서는
철원 읍내장이 2・7일, 평강에서는 5・10일이 열리는데 그친다. 그곳의 상품화폐경
제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삼방로를 경유하여 물류의 이동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삼방로에 관련된 사안은 오히려 시장 통제 정책을 취한 영・정조대의 조치라 볼
수 있다. 간로를 정부 차원에서 논의하여 공식적으로 추인하여 안정적으로 세를 거두
는 재정적 효과도 있었다.46) 나아가 ?龍潭炭幕民人等等狀?에는 “삼방대로에 거처하
는 炭幕 民人들이 관원들의 供饋를 담당하여 부담이 크다”는 호소가 담겨져 있다.47)
기존 역제에서 맡았던 기능인 관원들에 대한 숙식 제공 또한 삼방간로의 점막에게
役을 지웠던 것이다. 영조 7년에는 상인뿐만 아니라 관인들의 통행(官行) 또한 이
길을 이용하였다는데,48) 정부의 포섭 하에 놓이게 되면서 공무의 기능도 役으로 부과
되었다.
더불어 ①・②・③에서 보았듯이, 삼방로의 방색과 통행 추인의 근거가 모두 관방
에 있듯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국방 목적에 관계되어 치폐의 여부가 결정되었다.
주지하듯, 동북으로 가는 길의 큰 목적 중 하나는 관방에 있었다. 간선의 전체 길이에
서 경흥로가 차지하는 비율은 26.8%이지만, 경흥로의 지선 수는 전체 지선 수의
9.1%에 불과하다는 연구의 결과가 보여주는 것처럼,49) 애초에 관방 문제로 인해
동북지역으로 향하는 길은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 위의 Ⅱ장에서 ?續大典?에서 제시
한 대로역은 경기 지방에 한정되어 있음을 언급하였는데, 중로에 속하는 역을 살펴보
면 함경도에 속한 역이 37개소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50) 그만큼 官에 있어서
45) 허영란에 따르면, 5일장은 개별 시장 단위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상호 의존적, 순환적
구조로 존속한다(허영란, 「근현대 울산지역 장시 변동과 지역질서의 재편」, ?역사와 경계? 81,
부산경남사학회, 2011). 단언할 수는 없지만, 김화~금성~회양의 5개의 장시는 하나의 장시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46) 김태홍, 「18세기 도로정책과 間路 포섭 과정」, ?역사와 현실? 103, 한국역사연구회, 2017, 361~363면.
47) ?龍潭炭幕民人等等狀?, 私人文書(所志類-還穀・賑恤) 24책(奎70190).
48) ?英祖實錄? 29권, 영조 7년 6월 4일 乙未.
49) 김종혁, 앞의 2017 책, 59면. 이 책에서 제시되는 비율은 ?大東地志?의 10대로를 기준으로 한다.
50) ?續大典?, 「兵典」 驛路. 중로에 속한 역을 도별로 나누어 보면 경기에 9개소, 충청도에 24개소,
경상도에 5개소, 전라도에 4개소, 강원도에 6개소, 황해도에 11개소, 평안도에 13개소, 함경도에
37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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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의 길이 신경써야 하는 곳이었음을 의미한다. 18세기를 거쳐 자리잡게 된 경흥
로의 간선과 지선인 삼방로 모두 국가 관리 시스템 하에서 전통적인 기능을 하도록
제어되었던 길이었다.
Ⅳ. 개항 이후 통신과 육로의 변천
1. 대한제국기 역원제의 폐지와 원산 개항
조선시대 개국 이래 존속되었던 역제의 폐지는 대한제국으로 전환되기 직전에
이루어졌다. 고종을 비롯한 조선 정부는 1896년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정보 전달의 운영을 기도하였다.51)이러한
시도는 소위 근대 문물이 전해지기 시작하고, 통신제도의 변혁에 대해 논의되면서
촉발되었다. 가장 처음으로는 1876년 1차 수신사로서 일본에 파견된 金綺秀가 일본
의 전신 운영을 시찰하고 고종에게 보고하였다.52) 이어 1880년 2차 수신사로서 일본
에 다녀온 金弘集은 “같은 배타기라도 옛날에는 돛이었지만 지금은 火輪이고, 같은
수레타기라도 옛날에는 노새와 말이었지만 지금은 鐵道이고, 같은 郵遞라도 옛날에
는 驛傳이었지만 지금은 電線으로 한다.”며 화륜과 철도, 전선이 필요함을 역설하였
다.53) 또한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서 일본에 다녀온 趙準永, 姜文馨과 朴定
陽 또한 일본의 우편과 전신의 사용을 목격한 후 그 필요성에 대해 주장하였다.54)
이들의 위와 같은 요구에 따라 역제를 통해 운영되던 기왕의 통신제도는 새로운
51) 勅令 第九戶 ‘各驛察訪及 驛屬廢止에 關한 件’(?일성록? 고종 32년 12월 4일 관보 건양원년 1월
21일; ?승정원일기? 고종32년 12월 4일 칙령 건양원년 1월 18일(송병기,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대한민국 국회도서관, 1970). 1895년 12월에 역속 폐지에 관한 내용의 칙령이 내려지고, 다음
해인 1896년 1월에 칙령 제9호로 재가・반포되었다.
52) 이승원, 「개항 후(1876~1884) 근대 通信制度에 대한 이해와 郵征總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8,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6, 13면.
53) 「수신사일기」 권2, 한국사료총서 제9, ?수신사기록?, 국사편찬위원회, 169면(김형태, 「개항초기
(1876~1894) 근대 통신제도의 도입과정에 관한 一考察」, 경기대 석사학위논문, 2011, 12면에서
재인용).
54) 내용에 관한 구체적인 서술은 김형태, 앞의 2011 논문, 13~15면 참조.
동북으로 가는 길의 역사적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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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 설립이 추진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1880년 12월 설치된 統理機務衙門은 1882년 11월 외교업무를 관할하는 統理衙
門,55) 내정을 담당한 統理內務衙門으로 분화되었다.56) 그 다음 달인 12월에 통리아
문은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개편되었는데, 그 산하에 郵程司를 두었다. 우정사
가 관할한 업무는 “郵程司를 설치하여 전보, 역전, 철로 및 수륙 통운 여러 사무를
관장하게 한다”는 관련 章程57)에서 보이듯, 電報・驛傳・鐵路・水陸通運에 등에 관
한 업무였다. 새로 설치된 통신기구에게 이 네 가지 역할들이 모두 요구된 것은 기존
의 역제가 담당하던 역할을 동일하게 기대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왕의 역제와 같이 여전히 전보・역전과 같은 정보 전달의 업무를 철도・수륙통운
과 같은 교통 운수 업무와 한데 묶었던 것이다.
이후 우정사가 개편되면서 1884년 3월에 郵征總局이 설립되었는데, “郵征總局을
설립하여 연해의 각 항구에서 왕래하는 서신을 관장하고, 내지의 우편도 또한 마땅히
점차 확장하여 공사의 이익을 거두도록 하라.”는 고종의 전교에서 알 수 있듯, 앞의
우정사와는 달리 철로 및 수륙 통운에 관한 업무가 부과되지 않았다.58) 다만 ‘개화파’
의 갑신정변 실패에 따라 동년 10월, 즉 7개월 만에 폐지되어, 이후 조선의 우정
업무는 1895년 郵遞司가 신설될 때까지 10년 동안 다시 구제인 역참에 의해 이루어졌
다.59) 우체사에 대한 관제가 재가된 것은 1895년 윤5월의 일로, 칙령 제125로 반포되
었다. 이때 우체사의 위치로 처음 비정된 곳은 24곳으로, 그중 23곳은 23府制에 따른
府 소재지였고, 나머지 유일하게 부 소재지가 아닌 한 곳이 元山이었다. 원산은 부
소재지는 아니었지만, 개항장으로서 통상과 외교의 업무상 통신기관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설치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60)
1876년에 체결된 강화도조약(朝日修好條規)에 의해 釜山・元山・仁川이 순차적
55) ?高宗實錄? 19권, 고종 19년 11월 17일 己亥.
56) ?高宗實錄? 19권, 고종 19년 11월 18일 庚子.
57)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朝鮮)編,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章程?(奎15323).
58) ?高宗實錄? 21권, 고종 21년 3월 27일 壬寅.
59) 김형태, 앞의 2011 논문, 37면.
60) 이후 지방제도가 바뀌면서 1896년에 우체사 관제도 개정되었다. 이때 우체사를 일등사와 이등사로
구분하였는데, 개항장이었던 釜山・元山・仁川은 일등사로 편제되었다(박이택, ?한국 통신산업에
있어서 지배구조와 고용구조: 1876~1945?, 한국학술정보, 2008, 55~57면).
大東文化硏究 제10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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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개항되면서 원산은 또 다른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1899년의 ?德源府邑誌?에
는 이전 시기에 작성된 德源의 읍지나, 같은 시기 다른 지역의 읍지에는 없는 항목이
마지막 부분에 수록되어 있다. 바로 원산이 개항되면서 생긴 새로운 행정정보가 기록
된 것인데, 이 부분은 ‘新式官職’・‘人口’・‘港署’ 등의 항목으로 나누어져 있다. 人口
條에는 개항의 인구가 男 10,892구, 女 8,233구, 총 19,125구로, 약 2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덕원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앞서 1872년에 편찬된 ?德源府邑誌?에
서는 民戶 2,137호, 男丁 5,297구, 女丁 4,492구(합 9,789구)가 있던 것으로 기재되어
있는데,61) 약 30년이 채 안 되는 사이에 인구가 190% 이상이 증가하게 된 현상은
자연증가라기보다는, 인위적인 인구의 이동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또 이 읍지의 말미에는 항구 내에 거류하는 외국인들에 관한 정보도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 일본 거류인이 남 883구, 여 644구, 가호 350호가 있었고, 청나라 사람
이 66구, 가호 17호가 있었다. 서양인들도 별도로 기재하였는데, 영국인 5호, 덴마크
인 1호, 노르웨이인 1호, 독일인 1호, 러시아인 1호, 미국인 1호, 프랑스인 1호가
항내에 거주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가장 마지막 부분에는 ‘電報司’,62) ‘우체사’ 등
항구 내 신설 관청의 이름도 보인다.63) 이 시기의 원산에는 이전과는 다른 역할이
부여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원산에는 인구 증가가 비약적으로 이루어
졌으며, 대한제국의 새로운 관청도 우선적으로 설치되었다. 그리고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삼게 되면서, 원산은 더욱 부상하게 되었고, 경원선과 함경선의 종점이자
기점이 되었다.
61) 1872년의 ?德源府邑誌?(奎 17572)의 坊里條 말미에 나와 있는 정보로, 조선시대 호구조사의 특성상
현실을 완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지만(이영훈, 「조선후기 토지소유의 기본구조
와 농민경영」,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85; 정진영, 「단성호적의 사료적 성격-18~19세기 호적대장
“호구” 기록의 검토」, ?대동문화연구? 39,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01; 김건태, 「호적대장에
등재된 호구의 성격」, ?韓國史硏究? 132, 한국사연구회, 2006), 光武戶籍 시기까지도 실호실구의
파악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기존의 체계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낮은 수준의 등재가 이루어졌다는
연구성과에 따라(손병규, 「明治戶籍과 光武戶籍 비교연구」, ?태동고전연구? 24, 한림대 태동고전
연구소, 2008b) 1870년대의 구수와 1890년대의 구수의 대략적인 비교가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62) 이 시기의 통신 기구로서 우편 기구와 더불어 주목되는 것은 전신 업무를 담당한 기구이다. 1886년
에 전보총국이 인천~한양~평양~의주를 연결하는 전선의 개통을 계기로 처음 설치되었는데, 1891년
에는 춘천을 경유하여 원산까지 완공되었다(申相珏, 「李朝末 通信制度의 歷史的 考察」, ?한국통신
학회논문지? 3(1), 한국통신학회, 1978, 8~9면 참조).
63) 이상의 1899년 덕원부에 관한 내용은 1899년의 ?德源府邑誌?(奎 10983)를 참고하였다.
동북으로 가는 길의 역사적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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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제의 철도부설: 京元線을 중심으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만주에 이어 유라시아 대륙까지 연결하기 위한 철도
를 부설하였다. 1900년에 조선의 철도로는 京仁線이 가장 처음으로 개통되었다. 이후
1904~1906년에 京義線, 1899~1905년에 京釜線, 그리고 1910~1914년에 걸쳐 경원
선과 湖南線이 함께 부설되면서 한반도에는 X자형 철로가 설치되었다.64)
이 중 경원선은 서울역・용산역에서 출발하여 의정부역에서 연천역~철원역~평강
역~검불랑역~삼방역~안변역을 지나 원산역에 이른다. 그리고 경원선의 종점인 원산
역을 다시 기점으로 하는 咸鏡線이 착공되어 회령역으로까지 철도가 연결되었다.
함경선은 1914년 원산역에서 문천역으로 연결되는 노선의 착공을 시작으로, 1928년
에 회령역까지의 전체 구간이 개통되었다. 일본은 함경선을 통해 함경남북도의 석탄
과 삼림을 개발하고, 연해의 수산물을 반출함으로써 연료난과 식량난의 해결을 도모
하였다.65) 나아가 이 선로는 만주의 吉會線 부설이 논의 되면서 고안되었는데, 길회
선과 함경선을 연결시킴으로써 만주와 시베리아에 일본세력을 확대하고자 했다.66)
이어 圖們線은 1919년 회령에서 상삼봉까지 철도가 개통되는 것을 시작으로 1933년
에 웅기까지의 노선이 연결되면서 완성되었다.67) 도문선은 탄・목재의 반출, 만주철
도와의 연락과 만주의 대두 등 잡곡 반출, 국방・경비의 강화, 동해를 통한 일본과의
연락을 목적으로 두고 국유철도망을 확장하려는 ‘조선철도12개년계획’으로 부설되
었다.68) 일련으로 이어지는 이 세 개의 노선은 조선시대의 경흥로와 맥을 같이 하고
있는데, 다만, 경원선은 2장에서 언급한 삼방로와 같은 지점을 경유하고 있다.
조선 철도 중 가장 이른 시기에 부설된 경인선・경의선・경부선・경원선・호남선
의 노선은 해상망과 연결되어 조선 바깥으로의 연결을 중점에 두었다. 특히 경원선의
원산과 경부선의 부산은 일본 본토로 가는 해상망과 연결되었고, 더 나아가 원산은
중국・러시아로도 이어지는 육로와 해로의 기점으로도 역할을 하였다.69) 당시의 ?每
64) 정재정, ?일제침략과 한국철도: 1892~1945?, 서울대 출판부, 1999, 139~147면.
65) 정재정, 「역사적 관점에서 본 남북한 철도연결의 국제적 성격」, ?동방학지? 129, 연세대 국학연구
원, 2005, 249~250면.
66) 정재정, 앞의 2005 논문, 234면.
67) 같은 해에 도문선의 경영이 남만주철도주식회사로 옮겨지면서 ‘滿鐵北鮮線’으로 개칭되었다.
68) ?西鮮每日新聞? 193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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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申報? 사설에도 “경원선의 개통은 경성~원산의 관계를 밀접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에 의거하여 북일본 및 露領(러시아 영토) 연안의 무역상 관계를 가장 밀접하게
할 것”이라는 일본 측의 입장이 실려 있다.70) 더불어 회령으로 이어지는 함경선은
애초에 만주의 길회선 부설과 함께 논의되었다. 서울에서 원산, 원산에서 회령, 그리
고 다시 만주의 길림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구상이었다.
1904년 작성된 ‘대한방침 및 대한시설강령’에서는 일제의 철도사업과 관련하여
“교통기관을 장악할 것-교통 및 통신기관의 중요한 부분을 우리 쪽이 장악하는 것은
정치상 군사상 경제상의 여러 점에서 매우 긴요한 것으로서 그 중 교통기관 중 철도사
업은 한국 경영의 골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라
실행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며 철도 부설의 목적을 밝혔다. 또한 경원선 및 원산에
서 웅기만에 이르는 철도에 대해서는 “본 철도는 앞서 말한 한국 종관선을 중앙에서
일본해(동해) 방면과 연결시키고 나아가 두만강 부근에 이르는 것으로 북변의 방비상
필요한 선로에 속한다. 본선은 급히 부설에 착수할 필요는 없지만 철로부설 권리만은
국방상 필요하다는 명의로써 전쟁 중에 이를 획득하여 타국이 이 권리를 얻지 못하도
록 예방해두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라고 언급한다.71) 이 문서는 당초 일본의 철도
및 경원선 등의 부설 목적을 나타내는 공식적 문서라고 볼 수 있다.
기차가 물류의 대량 수송에 적합한 교통수단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본주
의 산업 발달에 핵심적인 하부시설의 역할을 했던 기차는 단일 운행을 통해서는
다른 어떤 운반기보다 많은 화물과 승객을 실어 날랐고, 기차역은 통상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 교통 중심지를 차지한다.72) 식민지기에 들어선 조선에서도 대량의
물자들이 철도를 통해 수송되었다. 1942년판 ?朝鮮總督府統計年譜?에 따르면 철도
를 통한 화물의 수송량은 1910년에 903,000톤이었고, 점점 증가하여 1940년이 되면
69) 정재정, ?철도와 근대서울?, 국학자료원, 2018, 93면에 따르면, ?日本外交文書? 제25권, 178문서를
통해 러시아 또한 일찍이 시베리아 철도의 종단항으로 원산을 상정하였고, 원산과 블라디보스토크
를 잇는 함경선과 경원선의 부설을 구상했음을 알 수 있다.
70) ?每日申報? 1913.08.21.(정재정, 앞의 2018 책, 199면에서 재인용).
71) 권태억 외 편, ?자료모음 근현대 한국탐사?, 역사비평사, 1994, 132~133면.
72) 강내희, ?길의 역사 :직립 존재의 발자취?, 문화과학사, 2016, 61~64・218~224・247~258면. 강내
희는 또 Clarke의 말을 인용하여 철도가 선형적 전진에 의한 원거리 운송에는 적합하지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복수의 단거리 목적지까지 승객과 화물을 나르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서술하였다
(강내희, 앞의 2016 책, 258~259면 참조).
동북으로 가는 길의 역사적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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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25,000톤에 달하게 되었다.73) 경원선은 화물수송 실적에서 경부선, 경의선을
이어 3번째로 많은 양(7.8%)을 수송하였다.74) 그리고 1938년 말의 화물수송 품종구
성을 지방의 철도사무소별로 보면 원산에서는 수산물이 24.7%, 공업품이 27.3%를
차지하였다. 게다가 원산철도사무소는 평양철도사무소(29.9%)와 경성철도사무소
(21%)에 이어 높은 발송비율을 보인다.75) 경원선을 이용해 대량의 물류가 서울에서
원산을 통해 일본 본토와 대륙 방면으로 원거리 수송이 이루어졌다.
철원과 내금강을 잇는 金剛山電氣鐵道 또한 일제 철도 부설의 특성을 드러낸다.
이 철도는 1931년에 완공되었는데, 서울에서 경원선을 통해 철원으로 가 금강산에
도착하는 형식이었다. 초기의 철도들은 저조한 수익을 메우기 위해 관광을 통한 여객
수입의 증대를 도모하였고, 그 대표적인 것이 금강산전기철도이다.76) 금강산은 조선
시대에도 손꼽히는 명승지였는데,77) 조선시대에는 서울에서 출발하여 금강산을 목적
지로 하는 대부분의 노선은 경흥로 간선의 昌道驛까지의 길을 따랐다.78) 이 시기에
와서는 금강산전기철도가 기존에 부설된 철도와 연결되어 빠른 시간에 금강산에 도
착을 가능케 하였다. 미완성으로 남긴 했지만, 경성에서 감화로의 직통 전차와 원산~
포항 사이에 외금강을 경유하는 東海北部線(일부 부설)이 계획되기도 했다.79) 이
노선들은 빠른 이동을 통한 근대 관광이라는 목적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었다.80) 이렇
듯 경원선은 부설 목적을 비롯하여 실제 운용 방면에서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근대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하부시설로 적극적으로 이용되었다.
73) ?북한지리정보?, 「운수지리」(김영묵 외, ?지리데이터베이스?, http://geography.yescnc.com/Mountain/
Geography.aspx?no=19671#action, 2019.03.04. 접속) 참조.
74) 정재정, 앞의 2018 책, 217면.
75) ?북한지리정보?, 「운수지리」의 표(“지방(철도사무소)별 화물품종발송비률”) 참조.
76) 원두희, 「일제강점기 관광지와 관광행위 연구-금강산을 사례로」, 한국교원대 석사학위논문, 2011,
12면.
77) 조선시대 산수유기 자료조사에 따르면, 관련 기록이 100건이 넘는 산은 금강산이 유일하다(이상균, 「조선시대 유람문화 연구」, 강원대 박사학위논문, 2013, 18~20면).
78) 정치영, 「금강산 유산기를 통해 본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여행 관행」, ?문화역사지리? 15(3), 한국문
화역사지리학회, 2003, 22~23면.
79) 원두희, 앞의 2011 논문, 30・47~49면.
80) 근대 관광에 내포된 식민지성에 대해서는 김백영, 「철도제국주의와 관광식민주의 제국 일본의
식민지 철도관광에 대한 이론적 검토」, ?사회와 역사? 102, 한국사회사학회, 201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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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결론
한반도 동북부인 경흥으로 가는 경로는 함경도(東北面)를 태조의 고향이자 영토로
확정한 조선시대부터 확인이 된다. 전근대의 길은 역참을 위주로 연결되었으며, 중앙
과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형성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중앙인 한양을 중심으로
한 간선로는 18세기에 처음으로 순번을 매겨 6~10개의 도로망으로 규정하였다. 조선
에서는 중앙집권 시스템을 원활하게 시행하기 위해서 역로를 설치・운영하였다.
동북으로 가는 길은 일명 ‘慶興路’라 하여 서울(한양)에서 抱川・金化를 거쳐 함경
도 동해 연안의 군현들을 모두 지나서 慶興에 도착하는 약 2,500리의 긴 길이었다.
慶興路에는 三防路라 하는 서울로부터 안변~원산 사이의 지름길이 있었다. 이 三防路
는 본래 경유지인 鐵嶺~淮陽~金城~金化를 거치지 않고, 鐵嶺보다 비교적 평탄하고
가까운 길인 三防을 경유하여 平康~鐵原~永平을 거쳐 서울에 도착한다. 약 30리의
거리가 줄고 비교적 평탄하였기 때문에 영・정조 시기에 빈번하게 이용되었다. 본디
鐵嶺을 통하는 길이 북계에서 한양으로 가는 관문이었는데, 三防路의 길이 커지면
관방 문제가 불거졌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논의 끝에 이미 길이 넓어졌으니 三防路를
방색하는 것보다 오히려 다수의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방어에 유리하기 때문에 통하
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그 이면에는 조선 정부의 지선에 대한 재정적 파악의 의도
가 깔려 있었으며, 삼방로도 경흥로와 마찬가지로 조선의 전통적 시스템 속에서 운영
되었다.
대한제국기로 전환되는 시기에 조선의 역제는 폐지되고 새로운 통신기관이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원산은 첫 시기의 개항지가 되어 더욱더 인구가 집중되었으며,
새로운 통신기관도 설치되는 등의 주목을 받았다. 일제시기가 되어서는 철도가 부설
되어 원산은 경원선과 함경선의 종점이자 기점이 되었다. 원산은 일본 본토와 중국,
러시아로 연결되는 거점으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렇듯 경원선・함경선・도문선의
연결은 삼방로를 경유하는 慶興路의 노선과 흡사하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조선
의 전통적 시스템이 아닌, 대량 물류 운송에 특화되어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하부구조
로 기능하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경흥로의 지리적 구조와 기타 지선에 관한 문제를 미처 다루지 못했다.
이에 따라 지역적 특성을 나타내는데 부족했으며,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상을
동북으로 가는 길의 역사적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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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하지 못하였다. 나아가 대동법 실시 전후의 물류 이동과 장시 설치에 대한 실증
적인 수치 분석은 도로 운영의 더욱 다양한 성격을 구체적으로 밝혀줄 것이다. 이외
에도 부족한 본고를 보완해줄 분석 및 연구의 방면은 다양하겠지만, 추후의 보충을
기약한다.


투고일: 2019.04.10 심사일: 2019.05.24 게재확정일: 2019.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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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東文化硏究 제10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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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으로 가는 길의 역사적 전개
- 151 -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the Road to the
Northeast
― From Gyeongheung Road to Gyoengwon Line
Kim, Hyo-eun
This study examined the installation and use of roads during the Joseon Dynasty, noting
the traditional road from Seoul to the northeast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Hamkyong
Province. The regulations on road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were stipulated in the Act,
which was divided into boulevards, middle roads, and facilities due to heavy traffic due
to its proximity of Seoul. The stations corresponding to the boulevard correspond to the
three branches of the road, each of which can be viewed in the northwest(Uuju), the
northeast(Gyeongheung) and the south. The road leading from Seoul to Gyeongheung
(Seosura), the northeastern polar point, is called Gyeongheung-ro, and was listed on various
geography as the second of the main roadways of the Joseon Dynasty. Among the lines
of Gyeongheung-ro, there was a "shortcut" that did not cross the Iron Curtain. Along with
Gyeongheung-ro, this road was a major forklift to Wonsan, where the mountains of
Hamkyong-do are heavily concentrated. As Sambang-ro has been over a shorter distance
and a slower head than the Iron Curve, the use of the road has become more frequent
than Gyeongheung-ro, which is over the main line of Cheolnyeong, due to its suitability
for long distances. Due to the issue of the threat to the government office, half a century
of discussion was made in the Joseon government on whether Sambangro was destroyed
or not, and it was concluded in a way in which road hubbub was tolerated for more
effective central management. With the construction of the railroa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Gyeongwon Line, the Hamkyong Line and Domun Line are
reproduced. However, it was not until this time that the Gyeongwon Line(Gyeongwon
Line) was actively used for the transport of bulk logistics under the capitalist society.
Key Words : Station, Road, Gyeongheung Road, Sambag Road, Gyeongwon Line


大東文化硏究 제106집
- 152 -


[附錄]
<附表>
?道路考?
(1770)
「輿地考」
(1770)
?大東地志?
(1861~1866)
?大韓新地志?
(1908)
京城京京都京
水踰里店 (10) x 水踰峴 (15) x
樓院 (20) 樓院 (30) 樓院 (17) 樓院 (楊州) (30)
x x 議情阜 (8) x
西五郞店 (20) x 西五郞店 (10) x
祝石嶺 (10) x 祝石嶺 (10) x
松隅店 (20) x 松隅場 (20) x
擺撥幕 (10) 擺撥幕 (60) 擺撥幕 (10) 擺撥幕 (抱川) (60)
x x 安寄驛 (10) x
場巨里 (10) x 炭場巨里 (10) x
萬歲橋 (20) 萬歲橋 (30) 萬歲橋 (10) 萬歲橋 (永平) (30)
梁文驛 (10) 梁文驛 (10) 梁文驛 (10) 梁文驛 (永平) (10)
x x 楡亭 (10) x
x x 屈雲川 (10) x
x x 惠才谷 (10) x
豊田驛 (40) 豊田驛 (40) 楓田驛 (10) 豊田驛 (鐵原) (40)
x x 自登峴 (10) x
x x 葛峴 (10) x
可老介嶺 (20) x x x
長林川 (10) x 長林川 (10) x
x x 生昌驛 (15) x
金化 (20) 金化 (50) 金化 (5) 金化 (50)
x x 踰阿峴 中峴 (30) x
x x 經眞木驛 阿峴 (10) x
金城 (50) 金城 (50) 金城 (10) 金城 (50)
x x 炭黔店 (15) x
昌道驛 (30) 昌道驛 (30) 昌道驛 (15) 昌道驛 (金城) (30)
才五峴 (20) x x x
松包江 (10) x x x


동북으로 가는 길의 역사적 전개
- 153 -


x x 灰峴 (10) x
x x 松浦津 (10) x
新安驛 (20) 新安驛 (50) 新安驛 (20) 新安驛 (淮陽) (50)
淮陽 (30) 淮陽 (30) 淮陽 (30) 淮陽 (30)
x x 渡西津 銀溪驛 (5) x
鐵嶺 (45) 鐵嶺 (45) 鐵嶺 (30) 鐵嶺 (安邊) (40)
高山驛 (15) 高山驛 (15) 高山驛 (15) 高山驛 (安邊) (15)
龍池院 (20) 龍池院 (20) 龍池院 (20) 龍池院 (安邊) (20)
南山驛 (30) 南山驛 (30) 南山驛 (25) 南山驛 (安邊) (30)
x x 擺撥幕 (20) x
x x 奉龍驛 (20) x
安邊 (20) 安邊 (20) x 安邊 (20)
圓山村 (30) 元山倉 (35) x 元山倉 (德原) (35)
德源 (15) 德源 (15) 德原鐵關驛 (30) 德原 (15)
文川 (35) 文川 (35) 文川良驥驛 (20) 文川 (35)
x x 箭灘 (30) x
高原 (50) 高原 (50) 高原 (20) 高原 (50)
x x 沙朴浦橋 (20) x
永興 (40) 永興 (40) 永興 (20) 永興 (40)
x x 龍興江 (3) x
金坡院 (30) 金波院 (30) 金彼院 (27) 金波院 (永興) (30)
草原驛 (15) 草原驛 (15) 草原驛 (15) 草院驛 (定平) (15)
高城峴 (10) 高城峴 (10) 高城峴 (5) 高城峴 (定平) (10)
定平 (30) 定平 (30) 定平 (30) 定平 (30)
蓬臺驛( 5) 蓬臺驛 (5) 蓬臺驛 (5) 蓬臺驛 (5)
x x 德浦橋 (15) x
x x 城川江萬歲橋 (-) x
咸興 (45) 咸興 (45) 咸興 (10) 咸興 (45)
德山驛 (30) 德山驛 (30) 德山驛 (30) 德山驛 (咸興) (30)
林東院 (20) 林東院站 (25) 林東院 (20) 林東驛 (咸興) (25)
咸關嶺 (10) 咸關嶺 (10) 咸關嶺 (15) 咸關嶺 (咸興) (10)
咸原驛 (10) 咸原驛 (10) 咸原驛 (5) 咸原驛 (洪原) (10)
洪原 (25) 洪原 (25) 洪原 (25) 洪原 (25)
x x 大門嶺 (30) x


大東文化硏究 제106집
- 154 -


平浦 (45) 平浦 (45) 平浦驛 (10) 平浦 (洪原) (45)
雙加嶺 (25) 霜加嶺 (25) 相加嶺 (20) 霜加嶺 (北靑) (25)
北靑 (20) 北靑 (20) 北靑 (30) 北靑 (20)
長毛老店 (30) 眞毛老 (30) 長毛老 (30) 眞毛老 (北靑) (30)
居山驛 (25) 居山驛 (25) 居山驛 (20) 居山驛 (北靑) (25)
侍中臺 (15) x 侍中臺 (10) x
x x 蔓嶺 (5) x
多寶洞店 (15) 多寶洞站 (25) 多寶洞 (10) 多寶站 (利原) (25)
x 松亭站 (15) 松亭站 (15) 松亭 (利原) (15)
利城 (20) 利城 (10) 利原 (10) 利原 (10)
谷口驛 (35) 谷口驛 (30) 谷口驛 (30) 谷口驛 (30)
x 巢洞站 (25) x 巢洞站 (25)
磨雲嶺 (10) 磨雲嶺 (15) 摩雲嶺 (10) 麻雲嶺 (端川) (15)
端川 (45) 端川 (20) 端川 (30) 端川 (20)
磨谷驛 (40) 磨谷驛 (40) 麻谷驛 (40) 麻谷驛 (端川) (40)
磨天嶺 (-) 磨天嶺 (25) 摩天嶺 (30) 磨天嶺 (端川) (25)
城津鎭 (55) 城津鎭 (20) 城津鎭 (20) 城津 (20)
x x 嶺東驛 (10) x
臨溟驛 (30) 臨溟驛 (40) 臨溟驛 (30) 臨溟驛 (城津) (40)
x x 山城站 (30) x
吉州 (60) 吉州 (55) 吉州 (30) 吉州 (55)
古站 (35) 古站 (35) 古站驛 (30) 古站 (明川) (35)
在德堡 (15) x 在德舊鎭 (15) x
明川 (25) 明川 (35) 明川 (25) 明川 (35)
x x 在德鎭 (30) x
鬼門嶺 (30) 鬼門嶺 (30) 鬼門關 (-) 鬼門嶺 (鏡城) (30)
x x 雲委院 (5) x
朱村驛 (30) 朱村驛 (20) 朱村驛 (25) 朱村驛 (鏡城) (20)
永康驛 (45) 永康驛 (45) 永康驛 (45) 永康驛 (鏡城) (45)
鏡城 (45) 鏡城 (45) 鏡城 (45) 鏡城 (45)
x x 魚遊澗橋 (15) x
輸城驛 (40) 輸城驛 (40) 輸城驛 (25) 輸城驛 (鏡城) (40)
富寧 (60) 富寧 (60) 廢茂山堡 (10) 富寧 (60)
x x 獐項 (25) x


동북으로 가는 길의 역사적 전개
- 155 -


廢茂山堡 (45) 廢茂山 (45) 富寧 (35) 廢茂山 (富寧) (45)
x x 虛古院 (30) x
麻田院 (45) 麻田院 (45) x 磨田院 (茂山) (45)
茂山 (55) 茂山 (55) 茂山嶺 (10) 茂山 (55)
梁永萬洞堡 (27) 梁永萬洞 (27) x 梁永萬 (27)
豊山鎭 (60) 豊山鎭 (23) 古豊山鎭 (20) 豊山津 (23)
甫乙下鎭 (25) 甫乙下鎭(25) x 甫乙下鎭 (25)
x x 獨德站 (30) x
會寧 (25) 會寧 (20) 會寧 (30) 會寧 (20)
高嶺鎭 (23) 高寧鎭 (23) 古嶺鎭 (20) 高寧津 (23)
x x 細川舊堡 (20) x
防垣堡 (39) 防垣 (39) 防垣鎭 (20) 防垣 (鐘城) (39)
鍾城 (35) 鍾城 (35) 鍾城 (30) 鐘城 (35)
潼關鎭 (15) 潼關 (15) 潼關鎭 (25) 潼關 (鐘城) (15)
永達堡 (25) 永達 (25) 永達鎭 (25) 永達 (穩城) 25)
柔遠鎭 (40) x x x
穩城 (18) 穩城 (30) 穩城 (30) 穩城 (30)
美錢鎭 (25) 黃柘坡堡 (30) x 黃柘坡 (穩城) (30)
黃拓坡堡 (17) 美錢鎭 (17) 黃拓坡堡 (25) 美錢鎭 (穩城) (17)
訓戎鎭 (30) 訓戎鎭 (30) 訓戎鎭 (25) 訓戎鎭 (慶源) (30)
慶源 (30) 慶源 (30) 慶源 (30) 慶源 (30)
安原堡 (30) 安原 (30) 安原堡 (30) 安原 (慶源) (30)
乾原堡 (20) 乾原 (30) 乾原堡 (20) 乾原堡 (慶源) (30)
阿山堡 (25) 牙山堡 (20) 阿山堡 (20) 牙山堡 (慶源) (20)
阿吾地堡 (30) x x x
x x 伯顔 (10) x
撫夷堡 (20) 撫夷堡 (45) 慶興 (20) 撫夷堡 (45)
慶興 (35) 慶興 (30) 撫夷鎭 (25) 永興 (30)
造山堡 (30) 造山堡 (35) 造山鎭 (35) 造山 (35)
西水羅堡 (30) 西水羅 (30) 西水羅鎭 (20) 西水羅 (30)
里2,504 2,429 2,180 2,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