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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

조봉암ㆍ진보당과 한국 현대 진보이념: 그 기원과 전개*(정승현/서강대)



| 논문요약 |
이 글은 기존의 조봉암ㆍ진보당 연구자들이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는 몇 가지 사실들을 교정 하고, 진보를 역사적ㆍ상대적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한국 현대정치에서 보수와 진보의 역동 적 상호작용을 파악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구체적으로, 첫째, 평화통일론이나 사회민주주의가 당대에는 분명히 진보성을 갖고 있었으나 그 내용의 일부가 보수세력에 의해 전유됨으로써 본 래의 진보적 측면에는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둘째, 그 내용과 의미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지되고 있는 진보의 형태적 특성을 세 가지로 규정하고, 그것을 만들어낸 역사적 특수성을 밝히고자 했다. 셋째, 조봉암에 대한 당대의 비판이 모두 냉전반공의식의 산물은 아니었으며, 초보적 형태이기는 하지만 오늘날에도 보수ㆍ진보의 중요 대립 의제인 자유와 사유재산, 경쟁 과 계획에 관련된 문제들이 논의되었다. 이 글은 한국사회의 발전에 의한 정치사회적 문제영역 의 변화에 따라 보수ㆍ진보 사이에는 서로 상대방의 이념 내용을 전유하거나 그 내용이 뒤바뀌 는 역전현상이 나타났음을 지적하고, 역사적ㆍ상대적 실체로서 진보의 의미 변화와 그 유형적 특징의 연속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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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2012년 대통령 선거는 박근혜 후보의 당선으로 끝났다. 선거 결과를 두고 다 양한 분석이 있었지만 결론은 ‘진보 대 보수의 대결’이라는 틀로 요약되었다. 한 국 현대정치를 규정하고 이끌어 나가는 기본 틀로 진보ㆍ보수의 대결구도가 형 성된 것은 해방 직후로 소급할 수 있다. 둘 다 해방 직후에 좌우익이라는 명칭으 로 출생신고를 했고, 단정수립과 전쟁을 거치면서 우익이 보수가 되고 좌익은 소멸ㆍ불법화됨으로써 보수 일변도의 정치이념이 한국정치를 지배해왔다. 그러 나 그 중간에는 온건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한국의 지배적인 사회정치구도에 도 전하고 대안을 모색하던 이념이 존재해왔다. ‘진보’라고 지칭되는 이 흐름을 거 슬러 올라가면 조봉암ㆍ진보당이라는 발원지를 만날 수 있다.1)  조봉암ㆍ진보당의 ‘진보성’에 관련된 연구들은 대체로 세 가지 주제를 중심 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조봉암이 해방공간의 김구ㆍ김규식ㆍ안재홍ㆍ여운형 등 의 이른바 중간파의 민족주의 노선을 계승했다고 보면서 한국 진보이념의 역사 적 연원을 밝히는 연구가 있고(서중석, 2004b; 신병식; 정태영), 다음으로 국가계 획에 의한 경제발전과 공정분배를 통해 복지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사회민주주 의에 초점을 맞추어 조봉암의 진보성을 규명하는 연구가 수행되었다(윤상현; 정 태영; 노경채). 마지막으로 북진통일의 구호 아래 냉전구조의 지속과 독재의 정


1) 필자는 조봉암으로부터 출발하여 21세기에도 한국정치의 기본 축을 이루고 있는 ‘현대’ 진보이념을 다룬다. 한국에 진보와 보수가 1950년대부터 존재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 라, 한국 ‘현대정치’의 대립과 전개를 규정하는 기본 틀로서 보혁대립이 만들어진 시점 을 1950년대에서 찾는 것이다. 이 글에서 진보는 진보‘세력’과 ‘이념’ 혹은 ‘담론’을 함 께 내포하며, ‘조봉암ㆍ진보당’이라는 표현은 조봉암을 중심으로 진보당운동에 함께 참 여했던 세력을 포괄한다. 그와 동시대에 활동한 혁신계의 여러 인물들이 있으나 적어도 1950년대의 국면에서는 ‘진보’가 조봉암ㆍ진보당으로 대표된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기 때문에 그 외의 혁신운동은 다루지 않는다. 또한 이 연구는 한국의 진보 개념에 대한 엄한 규정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는다. 현재 개념적 혼란을 겪고 있는 한국 진 보의 폭과 외연을 미리 확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히 복잡하고 별도의 연구를 요하는 작업일 뿐만 아니라 진보를 역사적이고 유동적인 의미체계로 보는 필자의 관점과도 어 긋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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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화를 꾀하던 집권세력의 허구성과 비민주성을 폭로하며 냉전의 해체와 한반도 의 평화공존을 마련하고자 했던 평화통일론이 갖는 진보성을 조명하는 연구를 들 수 있다(홍석률; 이현주; 정진아). 연구자들은 하나의 중심 주제를 강조하면서 도 나머지 두 주제들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배치하여, 조봉암ㆍ진보당 이념의 진보성과 그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필자는 이런 경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이 연구들은 조봉암과 진보당이 해방 이후 한국 ‘진보이념의 맥’을 계승했으 며, 그 진보성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데 모두 동의하는 것 같다. 예컨대 1950년대의 진보당 운동으로부터 21세기 민주노동당의 교훈을 끌어내려는 의도 에서 저술된 글들에는 ‘진보와 보수의 비대칭적 대립 구도의 지속’이라는 관점이 암묵적으로 깔려 있다(서중석 2004a; 김성보; 조현연). 이런 관점에 따르면, 조봉 암은 설령 세부사항에서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1950년대에도 21세기에도 여전 히 진보로 파악된다. 이들은 조봉암에게서 발견되는 사회민주주의, 평화통일, 민 족주의의 세 가지 측면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진보성의 증거로 간주한다. 성 장/분배(혹은 복지), 흡수통일/평화공존, 시장/국가개입, 친미/반미, 세계화/민족 주의의 문제 틀을 중심으로 한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2010년대 한국정치의 밑그림 이며, 이런 이념 구도 속에서 조봉암의 정치이념은 지금도 여전히 진보의 표상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들은 조봉암의 이념을 복원하고, 한국 현대정치에 서 진보의 출발점으로 분명히 자리매김했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필자는 선행 연구의 노고와 공헌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앞으로 조봉암ㆍ진보당의 이념 을 보다 거시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점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고 생 각한다. 필자가 보기에 연구자들은 보수 일변도의 이념적 지형도에 대한 비판 의식에 기초하여 진보를 불변의 실체로 간주하고 있다. 그들은 진보를 어떤 고정된 실체 로 보며, 진보의 내용은 1950년대이든 2000년대이든 동일한 것으로 전제함으로 써, 조봉암ㆍ진보당을 초역사적인 진보성의 표상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그 결 과 해방 이후 60년이 지나면서 한국사회는 대단히 변모했으며, 그에 따라 1950년 대에 형성된 진보이념의 구체적 내용들이 변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사안 에 따라 진보와 보수의 담론 내용이 서로 뒤바뀌는 담론역전 현상까지 나타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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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이 글은 기존 연구들이 당연히 여기는 이런 전제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진보를 역사적ㆍ상대적 맥락에서 보고자 한다. 이 글은 진보이념의 내용 변화와 진보ㆍ보수의 상호작용에 주목한다. 진보ㆍ 보수는 서로 대응관계를 맺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진보ㆍ보수를 가르는 내용이 달라지고, 심지어는 진보의 표상을 보수가, 보수의 상징을 진보가 전유하는 보수ㆍ진보의 담론역전과 의미 전유도 벌어진다. 따라 서 시대와 문제영역의 변화에 따라 조봉암ㆍ진보당 이념이 보수세력에게 어떻게 전유되었는지, 그 전유 과정은 진보ㆍ보수의 내용 변화와 어떤 관련성을 갖는지 를 살펴보는 작업이 요청된다. 기존 연구들이 조봉암ㆍ진보당으로부터 진보이념 의 기원과 그 ‘내용적 연속성’을 강조한 것과는 달리, 필자는 조봉암ㆍ진보당에 서 한국 진보의 기원을 찾되 역사적이고 유동적인 의미체계로서 ‘진보의 의미변 화’를 함께 점검하려고 한다. 구체적으로 평화통일론과 사회민주주의의 내용 일 부가 보수세력에 의해 전유되고, 진보와 보수 담론의 내용이 서로 바뀌는 사례들 을 분석함으로써 이러한 주장을 입증하고자 한다. 아울러 필자는 조봉암ㆍ진보당으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한 국 진보의 특징과 그것을 만든 원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즉 기존의 연구들이 조 봉암ㆍ진보당으로부터 출발한 진보이념의 내용적 연속성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면, 필자는 시대와 문제의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국 진보의 지속적 특수성을 밝힘으로써 내용적 변화 속에서도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는 진보의 ‘형태적 연속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필자는 보수‘이념’이 아니라 보수‘세력’의 사회적 기원과 과거 행적을 중심으로 비판하는 진보의 오랜 관행, 정치영역에서 상대적으로 과잉화된 진보이념, 진보와 좌파가 공존하는 폭 넓은 공유지로서 사회민주주의라는 세 가지 사항을 통해 이런 사실을 보여주고 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기존 연구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전제와 사실들을 재검토 함으로써 앞의 논점들을 구체화하고자 한다. 첫째, 조봉암ㆍ진보당 이념의 진보 성을 강조하는 연구들은 ‘평화통일론’의 민족주의적 성격에 주목하는 가운데 민 족주의를 진보의 표상으로 놓고 해방정국의 중간파 및 비동맹세력의 민족주의와 연결시키고 있다. 하지만 민족주의가 진보의 표상으로서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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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가 진보의 표상으로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것인가? 둘째, 당시 조봉암을 비판하던 사람들은 어떤 논거를 내세웠는가? 그들은 모두 ‘극우반공주의자’였으 며, 기득권 유지가 그들의 유일한 논거였는가?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제기할 때, 당시 조봉암에 대한 비판과 반대가 어떤 다양한 입장과 논거에서 제기되었는지, 또 그런 다양성은 어떻게 진보ㆍ보수의 논쟁으로 수렴될 수 있었는지를 고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조봉암과 한국 진보의 원형적 속성: 과잉 정치화
현존 질서의 보존과 변혁을 주장하는 이념을 각각 보수와 진보로 규정한다면, 정치이념으로서의 진보와 보수는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서나 존재해왔다. 한국 근현대사에 한정시킨다면 조선 말기에는 위정척사파와 문명개화파가 보수와 진 보의 대립구도를 형성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실력양성파와 사회주의자들이, 해 방공간에서는 좌파와 우파가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념적 정 체성을 보수와 진보라는 이름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은 정치적ㆍ이 념적 대립구도가 한국의 정치사회적 현실을 규정하는 기본 틀로 정립된 것은 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였다. 그 이전에는 보수와 진보라는 용어가 잘 사용되지 도 않았다. 예를 들면, 좌우파가 사활을 건 투쟁을 벌이던 해방공간에서는 서로 대립되는 정치이념을 뜻하는 용어로 ‘진보’와 ‘보수’라는 낱말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진보라는 용어를 가장 많이 사용했을 것 같은 박헌영과 조선공산당도 진보를 거 의 수식어로 사용했다. 그 중에서 ‘진보적 민주주의’와 관련된 것이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진보적 노선, 진보적 민주개혁, 진보적 세력, 진보적 민주국가 등의 낱말과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우파를 공격할 때도 보수라는 용어보다는 반동ㆍ반동우익 등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해방공간에서 좌우파가 서로를 공격할 때 사용한 용어는, 당시의 격양된 민족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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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 최대한 활용해 상대방을 매도하려는 ‘친일민족반역자’, ‘매국노’, ‘일제의 주구’, ‘망국도배’, ‘파괴분자’와 같은 말이었다. 이것은 당시의 특수한 상황 탓이 었다. 해방공간은 모두 ‘미래의 조국’을 위한 ‘진보적 이념’을 내세우던 시절이었 다. 왕조정치와 식민지 통치 외에는 아무런 사회정치질서를 경험하지 못했던 한 반도에서 자유민주주의나 사회주의는 모두 진보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새로운 민족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열망으로 민족주의가 과잉분출되던 시기였던 만큼 상 대방을 ‘민족의 반역자’, ‘친일파’ 등으로 불렀을 뿐 어느 누구도 진보 혹은 보수 로 자처하지는 않았다. 진보는 저마다 당연한 것이었고, 그 반대말은 민족의 반 역자였다. 한국정치에서 대립되는 정치이념으로 진보ㆍ보수가 ‘유의미하게’ 통용되던 것 은 1954년 중반 이후의 일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신상초는 “우리나라 정계나 언 론계에서 보수와 진보를 구별하여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 3년 전부터(신 상초 1957b: 76)”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사사오입 개헌 이후 1954-55년에 민주 세력을 결집하여 자유당의 횡포에 대항하겠다던 소위 신당운동이 진행되면서 당 의 이념과 정책, 그리고 결집할 정치세력의 범위라는 두 가지 문제를 놓고 우여 곡절을 거듭하는 동안 보수세력이니 진보세력이니 하는 말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막연히 여당ㆍ야당이라는 말을 사용하다가, 신당 운동 이후부터 조 봉암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은 진보, 자유당과 민주당은 보수로 규정되었다는 진 술(김운태 1962: 68)은 신상초의 회고를 뒷받침해준다. 조봉암 또한 1955년 이전까지 어떤 특정 단체나 이념을 가리켜 진보 혹은 보 수라고 부르지도 않았으며 자신이 진보에 속한다고 천명하지도 않았다. 신당운 동이 진행되던 국면에서 쓴 「내가 본 내외정국」(1955)에서 조봉암은 민주국민당 의 몇몇 논객들이 “진보적이니 혁신적이니 하는 것은 모두 다 사회주의에 통하 는 것이고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의 사촌(?전집? 1: 270-71)”이라며 자신을 배제하 고 있음을 통박했다.2) 여기서 조봉암은 진보 혹은 혁신이 과거 한민당 이래의 2) 「우리의 당면과업」, 「남북통일의 기본과업」은 ?우리의 당면과업?을 텍스트로 이용했 다. 그 외의 문건들은 전 6권으로 출간된 ?죽산 조봉암 전집?을 사용했다. 전자는 (조봉 암, 123)의 형식으로 출전을 밝혔고, 후자는 (?전집? 1: 264)의 방식으로 권수와 쪽수를 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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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파들과 대립되며, 자신이 거기에 속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인하고 있 다. 1956년 제3대 정부통령선거의 대통령후보로 나서며 ?한국일보?에 광고 형태 로 게재한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1956.4.29)에서 조봉암은 처음으로 “책임 있는 혁신정치의 단행을 약속한다(?전집? 1: 302)”고 밝혔다. 자신을 혁신이나 진보의 축에 공개적으로 세운 것은 이 발언이 처음이다. 진보당 창당대회(1956.11.10) 「개회사」에서 조봉암은 “자본주의와 그 앞잡이 인 보수당”에 맞서 “나랏일을 바로 잡고 국민을 살리는 유일한 길은 오직 진보적 사상을 가진 혁신요소의 대중적인 집결로 혁신정당을 조직(?전집? 4: 28, 29)”하 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조봉암이 이 때 처음으로 상대방을 보수로 규정했는데, 그 전에는 아무리 격렬하게 비판해도 한민당ㆍ민국당을 보수라고 칭하지는 않았 다. 그리고 창당대회의 「선언문」에는 자신들을 “진보적이며 혁신적인 민주주의 적 대정당”, “근로대중 자신의 민주적 혁신적 정당(?전집? 4: 56)”이라고 부르면 서 진보와 혁신을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이제 진보는 근로대중을 기반으로 한 혁신과 변혁의 이념으로 당대의 지배구도에 어떤 형태로든 대립될 것임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조봉암ㆍ진보당은 한민당ㆍ민국당ㆍ민주당으로 이어지는 한국 보수 ‘세력’을 비판했지만 보수‘이념’을 비판하지는 않았다. 그의 보수세력 비판은 동 일한 내용이 국면에 따라 강조점을 달리하며 반복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첫째, 그는 일관되게 보수세력의 ‘과거 행적’을 비판했다. 그가 처음으로 보수세력을 공개 비판한 것은 1950년 1월 민국당이 제출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반대했을 때였다(「우리는 왜 개헌을 반대했나」). 그는 민국당의 전신 한민당을 해방정국 에서 ‘각 방면의 실권을 틀어쥐고 인민 위에 군림하며 인민을 지배ㆍ착취하는 정당’, 자기 당파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빨갱이’ 모함을 씌우는 정당이라 비판하 면서, 한민당이 “얼마나 많은 공산주의자 아닌 공산주의자를 만들고 또 혹은 공 산당 아닌 공산당이 생겼으며 …… 대량적으로 공산당을 제조(?전집? 1: 128)”했 는지 만천하가 알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런 비판은 혁신계 전체가 공유했고 한민 당을 비판할 때마다 매번 등장한다. 둘째, 한민당의 사회적 기원을 파헤치며 한국 보수세력을 계급적 측면에서 비 판했다. “자본가와 지주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출발”하여 “일제시대와 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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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로 우리 근로대중에게 군림하여오던 또 하나의 기성 보수세력이 야당으로 자처(「우리의 당면과업」 조봉암, 46)”한 것이 한민당ㆍ민국당이었고, 이승만의 보호 밑에 결성된 자유당 역시 “일제와 군정시대를 통하여 군림하던 경찰 및 관 료세력이 재빠르게 호응(「전당대회 개회사」 ?전집? 4: 48)”하여 결성된 정당이 라고 비판하며 한국의 지배세력이 일제강점기의 지주ㆍ자본가로부터 출발하여 ‘왜정ㆍ군정을 거쳐’ 그대로 유지되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들을 싸잡아 “한 국정치의 추기(樞機)를 장악하고 민주주의의 이름 밑에 반(半)전제적 정치를 수 행하여온 특권관료적=매판자본적 정치세력(「진보당 강령」 ?전집? 4: 80)”이라 고 불렀다.3) 셋째, 이 보수세력이 미국의 후원 아래 성장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2차 대전 후 냉전이 격화되면서, 공산당의 계획에 따라 한국의 국내적 혼란이 심해지 고 있다고 본 미국 당국자들이 “한국의 부패한 보수세력을 원조하고 또 이들과 결탁하게 되었다(「강령」 ?전집? 4: 80-81)”는 것이다. 미군정과 결탁한 한민당이 “반공, 반탁 투쟁을 했다는 것을 유일한 사업이며, 위대한 공적으로 삼고”, “반대 파를 공산당으로 몰아서 해친 일은 몇 만 몇 십만 건(「내가 본 내외정국」 ?전집? 1: 264)”이었다는 비판은 그 보충설명에 해당한다. 넷째, 현 정권의 기반을 이루는 보수세력이 혼란과 빈곤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라는 것이다. 진보당은 전쟁과 사회혼란의 책임을 일차적으로 북한과 소련에게 묻 고 있지만 동시에 해방 이후 경제와 산업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침체에 빠지게 된 책임이 “우리나라의 무능 부패한 우익 보수적 정치세력에게 있다는 것은 부인될 수 없는 사실(「강령」 ?전집? 4: 96)”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일본인으로부터 인 수한 국가적 독점기업과 미국으로부터의 경제 원조를 물적 기반으로 삼아 “일방으 로는 자유기업을 주장하는 미국의 비위를 맞추고 타방으로는 스스로의 재정적 필 요를 일시적으로 충족하기 위하여 국영 제 기업의 불하를 실시(같은 책, 81)”한다 면서 한국의 경제정책이 보수세력의 이익을 위해 진행되고 있음을 비판했다. 여기서 보듯이 조봉암ㆍ진보당은 일제강점기의 지주ㆍ자본가계급으로부터 시 작된 한국 보수세력이 해방 이후 반공을 명분으로 미군정과 결탁하며 1950년대


3) 「진보당 강령」은 앞으로 「강령」으로 줄여서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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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계속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현실을 추궁하면서 보수세력의 사회적 기원, 분단정권의 성립 근거와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보수세 력이 ‘지키고자 하는’ 기존질서를 비판하며 새로운 이념에 입각한 사회질서를 추구하겠다는 진보의 선언이다. 그러나 보수주의에 대한 체계적 비판은 찾을 수 없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사상계? 1958년 2월호에 수록된 「정치 종횡담」에 서 조봉암은 한국의 정당이 이해와 정실에 좌우되어 이합집산이 무상하고 권모 술수와 부패가 일반적인 이유는 ‘보수정객들’이 “이념이나 정책을 완전히 뒤로 하고 그저 목전의 이득추구에만 눈이 뒤집히는(?전집? 1: 481)” 데서 비롯한다고 비판했다. 곧 일제강점기 이후의 기득권자들이 미국의 후원 아래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결집한 것이 한국의 보수세력이며, 이들에게는 그 어떤 일관되고 체계적인 정치이념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자유당이나 민주당도 미사여구로 가득한 정강정책을 이념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조봉암과 함께 혁신운동을 했던 이동화는 4·19 이후의 글에서 “우파보 수세력”도 중요산업의 국유화ㆍ통제경제ㆍ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등 ‘진보 적’ 강령정책을 내세웠으나 이것은 해방 직후의 사회적ㆍ정치적 분위기 아래 “내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라면서, “허울 좋은 강령정책” 아래 “기만적 현혹 적인 제스추어를 쓰려고 하였을 뿐(이동화 1961: 173)”이라고 비판했다. 이것은 한국 보수주의가 내건 이념과 실제 사이에 아무 관련도 없다는 것, 보수주의에 대한 체계적 비판을 하고 싶어도 아무 내용이 없기 때문에 허공에 주먹질하는 격이 됨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정치이념으로서의 ‘보수주의’가 아니라 기득권자 로서 ‘보수세력’의 사회적 기원, 과거행적, 실제 의도를 추궁하는 방식으로 비판 이 펼쳐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민당을 ‘지주ㆍ자본가계급의 정당’이라고 부르는 것이 진보ㆍ혁신의 전유물 은 아니었다. 한국의 보수세력을 ‘지켜야 할 전통과 이념이 없는 기득권 세력’으 로 비판하는 것은 당대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부산 피난시절 동아일보 취재부장 을 지냈던 최흥조는 ?민주국민당의 내막?(1952)이라는 소책자를 출간했다.4) 여


4) 최흥조는 동아일보가 한민당의 후신인 민주국민당의 기관지 노릇을 하려는 데 반대하며 한민당의 결성과정에서부터 1952년까지 문제점을 파헤친 ?민주국민당의 내막?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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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서 그는 한민당이 “이조 왕정의 수탈의 앞잡이로 농노 위에 군림하면서 대대 손손이 계승하여온 토지재벌과 총독부 관리 그리고 친일적 인텔리겐챠들이 패망 일제가 작별기념으로 주고 가는 기성(旣成)의 지반 위에 …… 미군의 관용을 구 세주로 지지하면서 나아가서는 공산주의와 언제든지 대항하련다는 대의명분 밑 에 형성된” ‘신사구락부’라고 꼬집었다(심지연 1984: 406). 또한 자유주의자들도 한국 보수주의에는 이념이 없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조 세형은 ‘한국 보수주의는 이념이 없다’, ‘그 정치적 전통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하면서, ‘지켜야 할 아무런 전통’이 없는 한국 보수주의가 실제로는 자신의 안위 와 기득권, 그리고 권력을 지키려는 의지에서 나왔으며 “부패, 권모, 무법, 독재 등이 극히 중요한 한국 보수주의의 성격이 되었다(조세형 1960: 135)”고 비판했 다. 특히 4·19 이후 혁신계가 본격 등장함으로써 그때까지 ‘정치적 무풍지대’에 서 “안일과 고식으로서만 시종하던 보수적 정치세력”이 “반성과 미래에의 전망 에 대한 숙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한태연 1960: 61)”는 비판들이 빈번하게 등장하였다. 그 이전에는 보수세력이 자신의 이념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는 뜻이다. 이런 비판은 당시의 소장학자 김운태(1962)와 언론인 송건호(1960)에 게도 똑같이 반복된다. 4.19를 계기로 이제는 “먼저 적극적 개혁을 단행하고 혁 신작업이 상당히 축적된 그 후부터 비로소 보수 행위에 착수(김상협 1960: 125)” 하는 ‘신보수주의’를 정립하자는 주장은 그러한 반성의 소산이었다. 김일영은 한국의 진보가 문제만 생기면 상대방이 과거에 무슨 일을 했다는 식 으로 공격하는 “과거사 원죄론은 정책을 둘러싼 생산적 토론을 막을뿐더러 자칫 하면 진보가 그렇게도 경멸하는 이념적 색깔론에 비견되는 ‘역사적 색깔론’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김일영, 43)”고 비판한 바 있다. 물론 그의 지적은 옳다. 그러 나 이러한 현상이 생긴 근원을 조봉암 당대의 상황으로 눈을 돌려 찾아보면, 이 것은 비판하고 싶어도 비판할 실체가 없는 한국 보수주의의 이념적 빈곤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었다. 한국의 보수가 이념적 공백 속에서 자신이 내건 민주주의를 능욕하며 표리부동한 행동을 계속하는 상황에서 보수이념은 기득권자의 치장물에


하여 해임되었으나 이 소책자는 3만부나 판매되어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심지연 1984: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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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했고, 그에 따라 보수주의 비판 또한 그 이념의 내용이 아니라 보수를 내세우 는 ‘세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조봉암ㆍ진보당으로부터 시작된 진보의 관행, 즉 보수의 과거 행적을 들추는 관성이 현재도 남아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한 국 보수주의의 이념이 부실하거나 혹은 타성에 젖은 진보의 게으름 탓일 것이다. 이것은 한국 진보이념의 또 다른 지속적인 속성을 보여준다. 한국의 진보이념 은 사회생활 전반을 포괄하는 이념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주로 정치영역에서 과 잉화되어 있다(채장수 1999: 253). 기본적으로 진보당의 강령ㆍ정책으로 정립된 조봉암ㆍ진보당의 이념 역시 정치권력의 장악이라는 측면에 모든 것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런 과잉정치화는, 진보가 비판 이념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부분적 으로 보수 이념의 형해화와 연관되어 있다. 곧 한국 보수주의가 사회구성원의 내면에 뿌리박은 생활신조, 정치ㆍ사회ㆍ경제ㆍ문화 등 다차원에 걸친 포괄적이 고 설득력 있는 정치이념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기존 질서 유지와 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옹호하는 편협한 논리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전면에 내 건 집권세력은 반공의 기치 아래 그 밖의 모든 다른 목소리를 총체적으로 억압했 다. 이런 환경 속에 보수는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으며 진 보의 저항방식 역시 지배세력과의 직접적인 대립 속에서 정치권력의 획득이라는 획일적 가치를 통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무 이념적 내용이 없는 보 수에 맞서 진보는 기득권자가 장악해온 기존질서의 부당성, 그들의 사회적 기원, 폭력성 비판에 몰두하며 그 자신도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이념으로 발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이것이 조봉암ㆍ진보당에서부터 ― 어떤 면에서는 지 금까지도 ― 지속되고 있는 한국 진보의 속성이다.


3. 조봉암ㆍ진보당의 진보성과 의미 변화
대부분의 논자들은 조봉암ㆍ진보당 이념의 진보성을 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 평화통일의 세 가지 측면에서 파악한다. 진보당사건 이후 평화통일을 거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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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상황에서 고정훈은 “한국의 혁신정당은 아무리 다의적인 요소가 내포된 다손 치더라도 좌측으로는 독일사회민주당적인 수정주의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이 고 우측으로는 수정자본주의까지를 내포(고정훈 1958: 98)”할 것이며, 더불어 한 국 혁신세력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강력한 민족주의적 사조’일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의 언급은 1950년대 진보의 이념적 폭과 한계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여기서도 평화통일론과 민족주의를 하나로 묶고, 사회민주주의를 다른 하나로 하여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1) 평화통일론과 민족주의: 보수적 의미 전유
조봉암과 진보당의 민족주의적 측면을 강조하는 논자들은 공통적으로 ‘외세에 맞서 민족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내세운 그의 자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때 의 민족주의는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나 ‘남북을 아우르는 민족주의’ 정도의 막 연한 의미는 아니다. 당시 한반도에는 냉전분단구조를 축으로 미국과 소련이 압 도적 힘을 행사하고 있었던 만큼, 당대의 민족주의는 ‘분단구조에 저항하며 외세 에 맞서 한반도 민족의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노력으로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려 는 이념이나 운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봉암의 진보성을 민족주의에서 찾는 오유석은 “한국사회의 진보와 보수의 문제는 민족문제와 일정한 연관성을 가지면서 냉전체제에 편승하여 현상유지를 바라는 분단 고착화세력 대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자주적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 려는 세력들 간의 대립구도로 이어짐을 볼 수 있다(오유석 1990: 57-58)”고 주장 했다. 이는 조봉암ㆍ진보당의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갖고 있는 공통 인식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한국의 진보는 민족주의를 갖추어야 하 며, 그 민족주의의 내용에는 분단체제 극복, 민족자주성, 분단고착화 세력인 기 득권 세력과 냉전구조의 타파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봉암과 진보당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파악하려면 이 측면을 살펴보아야 한다. 아직 전쟁이 발발하기 전 조봉암은 「남북통일의 기본과업」(1949)에서 미소 양 국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전 세계를 분할하는 현상을 비판하고, 남북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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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층에 대해 “국제배경이나 이용하려 하고 정권욕만 꿈꿈으로 말미암아 내홍 을 꾀하는 비열한 행동(조봉암, 133)”을 자행하고 있음을 질타했다. 그러나 전쟁 을 겪은 후 조봉암의 태도는 달라진다. 「우리의 당면과업」(1954), 「내가 본 내외 정국」(1955)은 친미반공노선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다. 두 문건에서 미국은 자유 진영을 구원하는 ‘원대한 사업’을 수행하는 나라로 묘사되고, ‘우리는 세계자유 진영의 선봉대’라며 냉전구도의 최첨병에 서있다는 사실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었다. 물론 이런 서술이 “필요가 있고 유익하기만 하면 공산블럭과 회의도 하고 협상도 해야 될 것(「내가 본 내외정국」 ?전집? 1: 292)”이라는 자신 의 주장이 불러올 반발을 무마하려는 전략에서 나왔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조봉암이 민족주의를 분명하게 내세운 것은 「평화통일에의 길」(1957년 10월) 이 그 시발점이다. 그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부터 11차 유엔총회(1956년 1월) 에 이르기까지 통일의 정치적ㆍ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은 있었으나 모두 실패 한 것은 결국 “미소 양국의 이해관계로 인한 충돌이 그 근본 원인으로 되어 있는 것임은 아무도 부인치 못할 사실(?전집? 1: 437)”이라고 하면서 미소 대립을 통 일의 근본적인 방해요인으로 꼽았다. 또한 “결국 우리 민족의 주체성이 약하다 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우리 민족 가운데 진실로 통일되기를 원치 않는 세력이 일부에” 있음을 거론했다(같은 책, 438, 429). 구체적으로 그들이 누구인지 말하 지 않았으나 무력통일론을 내세워 반공분단구조를 지탱하며 통일의 가능성을 차 단하는 세력이라고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 미소대립 속에서 그가 제시한 대안은 “우리들이 통일을 위해서 국제관계의 조정을 피하는 데 노력하고 싸우는 것(같은 책, 430)”이었다. 조봉암은 여기서 통일이 ‘민족적 지상과업’이라고 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민족주의’라거나 무력통일론자들을 ‘반민족주의’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민족의 주체성과 자주성 을 분명하게 내세우며 민족주의에 입각해 있었다. 이런 점에서 조봉암의 민족주 의를 당시 냉전반공구조를 축으로 하는 보수세력에 맞서는 진보의 한 표상으로 지적한 것은 옳다고 할 수 있다. 반공분단구조에 저항하며 민족의 주체적ㆍ자주적 노력을 강조하고 간접적 으로 외세배격을 주장하는 조봉암ㆍ진보당의 이념은 분명히 민족주의에 입각 해있다. 1950년대의 보수세력은 공산권의 3차대전 도발 → 핵전쟁 → 공산권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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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 남북통일이라는 공식을 당연히 여기고 있었다. 1956년 한 잡지사의 요청으 로 마련된 좌담회에서 신익희는 “미국이 원자탄과 수소탄을 들고 가서 만주니 시베리아니 막부(幕府)니 할 것 없이 모조리 때려부시면 우리의 남북통일은 될 거에요(김동명 외 1956: 56)”라고 호언장담했다. 조병옥은 한 술 더 떠 평화통일 은 환상에 불과하며, 1960년 무렵에는 공산세계가 먼저 도발함으로써 3차대전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고 “3차대전이 발발되면 한국통일도 자연히 이룩(조병옥 1957: 52)”된다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이승만보다 더 호전적인 두 사람이 당시 에는 국민의 희망이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이에 맞서 “민족의 무덤과 민족문화의 회진(灰塵) 위에 민족번영이 이루어진 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박기출 1957: 83)”는 진보당 부통령 후보의 발언은 분명 히 외세의 각축장이 되기를 거부하는 민족의 주체적 입장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한계는 있었다. 평화통일론은 당대의 국면에서 냉전분단체제에 도전하는 대단히 진보적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형적인 반공민 족주의에 입각한 것이기도 했다. 「평화통일에의 길」(1957)에서 조봉암은 통일의 첫 번째 이유로 ‘단일민족’, ‘민족감정’, ‘단일민족으로서의 민족적 긍지’를 들고 있으나, 이를 철저하게 남한의 입장에서 서술했다. 북한은 ‘자유대한’에 의한 해 방의 대상일 뿐이었다. 물론 당시 냉전반공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전술적 고려에 의한 표현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러한 관점은 조봉암의 저술에 일관되게 유지되 고 있었다. 평화통일론의 핵심은 남북평화공존, 통일의 전 단계로서 남한의 민주화와 발 전, 남북협상 및 남북총선거이다. 1950년대 미소 냉전질서가 평화공존을 지향함 에 따라 조봉암은 통일의 전 단계로 남북의 평화공존을 수용했고 평화적 통일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민주화와 압축성장을 주장했다. 후르시초프가 평화공존론을 내세운 것은 1956년이었으나 실제로 미소가 평화공존을 적극적 정책으로 실행한 것은 1950년대 말-60년대 초에 들어서였다. 이런 점에서 조봉암의 평화통일론 이 갖는 진보성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지만, 그 이후 박정희체제가 평화통일론에 서 민주화를 빼버리고 성장을 권위주의 정권의 정당화 논리로 전유함에 따라 체 제비판으로서 평화통일론이 갖는 진보성은 대폭 약화되었다. 이처럼 쉽사리 보 수적으로 전유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평화통일론이 본질적으로 냉전민족주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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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한 ‘흡수통일’의 한 방식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승만의 북진통일, 박 정희의 평화통일, 그리고 현재 보수세력의 흡수통일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통일 방안의 본질은 ‘대한민국에 의한 북한의 해방’이다. 조봉암의 평화통일도 동일한 틀 안에 있다. 물론 현재 보수주의 일각의 ‘전쟁 불사’ 운운하는 호전성과 대비하 면 평화통일론은 여전히 진보의 표상이 될 가치가 있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내 용의 일부가 보수에 의해 전유됨으로써 진보성이 탈각되는 의미 변천도 함께 고 려되어야 할 것이다. 조봉암의 민족주의가 갖는 진보적 의미를 강조하는 연구자들은 공통적으로 외 세배격과 민족의 주체성ㆍ자주성을 강조하며, 민족주의가 진보의 표상이라는 것 을 당연시한다. 지금 북한은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생각 아래, ‘오랜 우방’ 중국 의 만류조차 뿌리치고, 한반도에 미국이라는 ‘외세’와 그 ‘앞잡이’ 남한정권에 맞서 전쟁 불사를 외치며 ‘주체적ㆍ자주적’으로 핵을 개발하고 있다. ‘주체적ㆍ 자주적’이며 ‘외세 거부’의 정신만 있으면 모두 민족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 가? 이 상황에서 한국이 독자적 핵무장 대신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하는 정책을 취한다면 그것은 ‘외세의존적’이며 ‘반민족적’인 것인가? 과연 민족주의를 진보 의 표상으로 당연시할 수 있는 것이며, 그렇다 하더라도 민족주의의 의미를 단일 한 잣대에서 평가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의 근본적인 함의는 진보가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시대와 문제영역의 변화에 따라 유동적이며, 그런 한에서 어느 하나의 관점을 일방적으 로 투사하여 통시대적으로 ‘진보성’을 규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조봉암ㆍ진보 당의 평화통일론은 해방정국의 중간파를 따라 민족의 주체적 입장을 강조한 민 족주의 노선에 입각했고, 그런 한에서 1950년대에는 분명히 진보적이었고 민족 주의적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관점을 통시대적으로 지금까지 연장해도 안 되고, 오늘의 관점을 당대에 덧씌워도 안 된다. 오늘날에도 민족주의가 진보의 한 표상 일 수 있지만, 민족주의의 내용이 고정불변은 아니다. 조봉암ㆍ진보당의 민족주 의가 갖는 진보성을 평가할 때에는 당시와 현재의 문제의식을 주의 깊게 구별하 고, 시대와 문제영역의 변화에 따른 진보의 의미 변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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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회민주주의: 진보와 좌파의 공유지
조봉암ㆍ진보당ㆍ혁신운동을 다루는 논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당시 사회민주주 의가 진보의 커다란 축을 이룬다고 지적한다. 조봉암과 함께 활동했던 신도성 역시 혁신운동을 “대체로 사회민주주의적 성향을 가진 정치운동 내지 정당운동 (신도성 1987: 123)”으로 한정했고, 혁신계에 대해 지극히 인색한 평가를 내리는 신상초도 “진보당의 정강정책은 민주사회주의정당의 그것으로서는 매우 온건한 것이며 일본 사회당의 분파 강령의 범위를 넘지 못한다(신상초 1960: 58)”고 하 며 사회민주주의를 진보당의 이념으로 규정했다. 조봉암ㆍ진보당이 사회민주주의를 본격적으로 제시한 것은 진보당 창당대회 에서부터였다. 1956년 5월 정부통령선거 당시 ?한국일보?(1956. 5. 15)가 선거 초반전에 ‘조봉암 후보의 사회민주주의 정책과 평화통일이 일부 층의 주목을 끌 고 있다’고 보도한 기사(서중석 1999: 359에서 재인용)를 보면 조봉암의 사회민 주주의는 세간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 조봉암ㆍ진보당의 사회민주주의는 기본적 으로 민족국가의 건설 방안으로 강력하게 부각되었지만 그 안에는 자본주의 비 판, 자본주의 지양, 민중의 생존권 향상, 민주주의 실현 등 다양한 층위가 내포되 어 있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기본적으로 사회민주주의 문제의식은 압축성장을 통한 민족국가의 발전 에 있었다. 진보당은 「강령」에서 ‘아시아의 후진국인 한국’은 “선진제국이 과거 수세기간에 걸어온 노정을 극히 압축된 단기간 내에 주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집? 4: 93)”고 하면서 ‘산업혁명을 시급히 수행하고 사회생산력을 전반적으 로 제고’하기 위해 사회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회 민주주의는 단순한 국가발전론이 아니라 반자본주의 혹은 탈자본주의의 논리를 기반으로 삼는 새로운 사회구성의 원리로 제시되고 있었다. 진보당의 사회민주 주의는 모순과 병폐로 가득 찬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다 같이 거부하고 “원자 력 시대에 적응한 인류의 새 이상(「진보당 개회사」?전집?4: 31)”, 즉 역사와 사 회의 새로운 구성원리였다. 둘째, 한국의 민족자본에 맡겨서는 민족국가의 발전과 민주주의 실현이라 는 과제를 완성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 노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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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ㆍ진보당에게 이른바 민족자본이란 “폭만(暴慢)한 일제세력에 아부 추종함으 로써 그의 생존을 유지하려고 하는 한편 일제의 미미한 계부적(繼父的) 비호 밑 에서 약간의 발전을 꾀하여(「강령」 ?전집? 4: 91)” 출발했던 세력에 불과했다. 이들이 해방 후 한민당 중심의 보수적 정치세력으로, 그리고 정부수립 이후에는 “민주주의의 이름 밑에 반전제적 정치를 수행하여온 특권관료적=매판자본적 정 치세력(같은 책, 92)”으로 변신했다는 것이다. 조봉암ㆍ진보당은 일제강점기 이 래 기득권세력으로 군림하며 일체의 사회경제적 변혁을 가로막는 보수세력을 축 출하고 진정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실현하는 정치사회의 변혁론으로서 사회민주 주의를 제기하였다. 셋째, 조봉암ㆍ진보당은 지배세력이 내세우고 있는 자유방임 자본주의는 사실 상 소수 자본가의 독점자본주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사회민주주의를 민중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국민 일반의 복지를 지향하는 사회발전의 원리로 제시했다. 해방정국에서 미군정을 거쳐 넘어온 귀속재산은 대부분 관료배와 결탁한 소수의 모리정상배에 의해 농단되었고, 현재 국영으로 남아 있는 일부 기업체는 관료의 무능과 부패로 인해 작업능률과 생산성은 저하되고 적자만 증대되고 있는 실정 이라고 비판한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우익적 보수세력의 일부 대변자들은 (「강령」 ?전집? 4: 97)” 국영기업의 실패를 지적하면서 자유경제를 그 대안으로 내세운다는 것이다. 우익 보수세력의 주장과 달리 자유경제는 “사실상 독점경제 의 별명에 지나지 않”으며, 이 독점자본주의는 소수 자본가들이 국가 그 자체를 장악하고 “소수 자본계급에 의한 경제상의 독점과 정치상의 전제(신도성 1956: 307)”를 휘두를 것이라고 비판했다. 진보당은 이 모든 사항을 종합하여 창당대회에서 당의 이념을 ‘사회적 민주주 의’로 설정하고 복지국가, 사회보장제도, 모든 국민의 생활 향상, 분배의 평등, 급속한 경제성장, 평화통일, 참된 민주주의의 실시 등을 내세웠다. 그리고 ‘계획 적 경제체제’를 수립하여 민족자본을 육성ㆍ동원함으로써 산업의 부흥, 국가 발 전, 사회보장제도 실시, 새로운 민족문화 창조를 실현할 것을 주장하며, 이런 모 든 정치적 과제들의 실천이야말로 ‘한국의 진보주의’라고 역설했다(?전집? 4: 32). 즉 사회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한국적 진보’에는 국가 주도의 급속한 경제성장, 반자본주의 혹은 탈자본주의의 전망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구성의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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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정치사회의 변혁론, 사회발전의 원리, 민족국가의 발전 등 민족주의로부터 탈자본주의에 이르는 대단히 폭넓은 요소들이 들어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오늘 의 관점에서조차 진보적이며, 그런 면에서 조봉암ㆍ진보당의 사회민주주의는 그 진보성이 지금까지도 유지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필자는 그 진보성의 이면에 있 는 ‘복합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진보당ㆍ조봉암에서 시작한 한국의 진보이념이 민주주의 실현에서부터 사회 주의에 이르는 대단히 복합적이고 포괄적인 내용을 갖게 된 이유는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당시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의 폭이 매우 넓었다는 사정, 이 과제 들을 제대로 다루지 않거나 아예 그럴 의지도 없었던 보수세력의 무능을 대신하 고자 했던 의지와 열정, 중요 문제를 포괄적으로 선점하려는 정치전술, 그리고 ‘역사적 특수성’ 탓이다. 앞의 세 가지 사항은 별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만큼 마지막 문제를 검토하자. 여기에서 역사적 특수성은 한국 진보의 형성에서 나타 난 기원적 특수성과 이후 역사적 전개의 특수성을 말한다. 조봉암ㆍ진보당은 해방정국의 중간파 노선을 계승했다. 중간파는 민족주의를 공통분모로 삼고 있지만 김규식ㆍ여운형의 중도좌파부터 안재홍ㆍ조소앙의 중 간우파까지 그 이념 지형이 상당히 넓다. 조봉암은 반공에는 반대하며 사회주의 와 일정한 친화성을 보이는 점에서는 중도좌파에 속하지만 미국의 주도적 역할 을 인정하며 남한 단정을 지지하는 미묘한 입장에 있었다. 이 다양한 노선의 인 물들이 진보ㆍ혁신의 기치 아래 진보당으로 모여들었다. 혁신운동에 참여했던 이상두는 혁신세력 안에는 사회민주주의 입장에서 참가한 사람들보다 “진보적 민주주의자, 청렴한 양심적 인사. 독립운동자, 우국적 노지사, 사명감을 지닌 지 식인들이 보다 더 많은 것이 사실이며 이것은 또한 한국 혁신세력의 한 특성(이 상두 1968: 113)”이라고 회고했다. 서중석 또한 진보당 안에는 과거 공산주의 경 력자로부터 심지어 극우파에 이르는 다양한 인물들이 ‘현실정치에 대한 격렬한 불만과 혁신에의 의욕’이라는 공통분모를 중심으로 결속되었다고 지적했다(서중 석 1999: 185). 이는 한국 진보이념이 처음부터 대단히 포괄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조봉암은 이렇게 모여든 다양한 인물들을 놓고 당의 이념을 먼저 설정한 후 정당을 발족시키는 것은 꿈같은 일이라고 하며 선 창당 후 이념정비를 내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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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진보당을 발족시켰다. 진보당 구성 인물과 이념의 복합성을 사회민주주의라 는 큰 틀에 묶어 ‘잠정적으로’ 봉합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보당이 곧 불법화됨으 로써 혁신ㆍ진보 내부의 이념 정비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민주주의 실현부터 사 회주의에 이르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혼재된 양상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 은 한국 진보가 형성되던 시공간의 특수성으로부터 생긴 현상, 즉 기원적 특수성 이다. 한국 진보는 자유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에 이르는 광활한 공간을 자신의 표상으로 가지고 출발했던 것이다. 진보의 이같은 기원적 특수성은 한국 정치사회의 특수성과 맞물려 이념적 혼 재를 그대로 이어가도록 만들었다. 개념적으로 보면 진보와 좌파는 입지 기반이 상이한 개념이지만, 대단히 협소한 이데올로기적 지형을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 는 진보ㆍ보수가 곧 좌파ㆍ우파와 동일시되었다. 이런 사태의 원인은 상당 부분 ‘역사적 특수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채장수가 잘 지적했듯 분단과 전쟁을 거치 며 형성된 보수 독점의 정치지형이 만들어낸 억압적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 과정 에서 ‘기존질서를 변화시키려는 진보’와 ‘자본주의와는 다른 체제를 꿈꾸는 좌 파’ 사이에는 상당한 ‘공유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 공유지에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진보로 좌파가 묻어 들어가면서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진보는 진보와 좌파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채장수 2010: 249-50). 좌파와 진보를 구분하지 않고 양자 모두 좌파로 몰아세우거나 진보좌파로 뭉뚱그리는 보수파의 공세가 지금도 이어지는 것 역시 이런 특수성의 반영물이다. 다른 한편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지 않고 진보 속으로 몸을 숨기는 관행 또한 계속되며, 이 는 진보 내부의 이념적 분화를 더디게 만들고 진보의 결속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우리는 그런 ‘한국적’ 현상이 나타나게 된 연원을 다양한 이념과 성향의 인물들 이 진보의 이름 아래 둥지를 틀었던 한국 진보의 ‘원류’ 조봉암ㆍ진보당으로부터 추적할 수 있다.
3) 진보ㆍ보수의 담론역전과 상호 의미 전유
진보ㆍ보수는 상호 대립 구조 속에서 현실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지키고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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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기존질서의 변화에 따라 보수의 이념체계에 변화가 일어나듯, 진보 역시 역사 적ㆍ사회적 맥락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내용을 갖고 있다. 이념적 포괄성으로 인한 진보와 좌파의 공유지는 조봉암 이후 한국 진보의 특징으로 계 속 남게 되지만 다른 한편 역사적ㆍ사회적 맥락에 따라 그 진보성이 퇴색되고, 보수와의 대립ㆍ갈등 속에서 담론 내용이 서로 뒤바뀌는 담론역전 그리고 상호 의미 전유 현상을 겪게 된다. 진보ㆍ보수의 담론 역전은 진보당이 주장하던 ‘헌법가치의 준수’에서부터 찾 을 수 있다. 당 「강령」에서 진보당은 해방 이후 헌법은 근대 민주주의의 자유뿐 아니라 수정자본주의적 규정들까지 포함했으나 국내의 혼란과 동서 진영의 대립 으로 인해 헌법의 본래 규정과 정신은 유린된 채 한국판 ‘보나파르티즘’이 성 립ㆍ발전되었음을 비판하고 자신들이야말로 건국이념에 충실한 세력이라고 주 장했다. 그리고 진보당이 집권하면 “우선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과 정신을 소생 시켜 광범한 민중에게 민주주의적 제 자유를 보장하여주려고 한다(?전집? 4: 82)”고 역설했다. 보수세력이 건국을 주도하며 내건 이념을 진보세력이 완수하 겠다는 약속, 이는 담론역전의 대표적 사례이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경계가 지닌 역사적인 유동성으로 인해 동일한 형태의 담론을 어떤 시기에는 진보가, 다른 시기에는 보수가 주장하게 되는 현상이 빚어지는 것이다.5) 이런 담론역전은 진보의 큰 축을 구성하는 민주화세력이 역대 권위주의정권에 맞서 헌법에 구현된 민주주의 가치의 실현을 요구할 때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그러나 역전은 재역전된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과를 전제로 2000년대의 보수 세력은 재벌규제와 남북화해에 맞서 한국이 ‘헌법에 규정된 한반도의 유일한 합 법정부’이고 시장경제가 헌법의 기본가치라고 주장하며 ‘헌법가치의 준수’를 주
5) 담론 역전이란 진보 혹은 보수의 담론 내용 중 일부를 상대방이 가져다가 자기 것으로 만들고, 빌려준 (혹은 뺏긴) 쪽은 그것을 더 이상 내세우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의미 전유 는 상대방의 담론 내용 일부를 차용하여, 여기에 자신의 색을 덧칠함으로써 본래의 의미 와는 전혀 다르게 사용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이 둘을 개념적으로 분명히 구분하기 는 어렵다. 필자는 한국 진보ㆍ보수의 개념적 상대성, 현실변화에 따른 진보ㆍ보수의 문제영역과 담론 내용의 변화, 양자의 상호작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 용어를 사용했는 데, 앞으로 더 다듬어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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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고 있다. 사회구조와 문제영역이 변함에 따라 진보와 보수의 구분선이 달라 짐으로써 과거 진보의 영역이었던 것이 보수로 포섭되고, 보수의 영역이 진보로 흘러들어가는 현상이 생긴 것이다. 조봉암ㆍ진보당 이념의 진보성 또한 자동으 로 주어지거나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한때는 조봉암ㆍ진보당의 표상이었지만 오늘날 어느 누구도 ‘헌법가치의 준수’를 진보의 상징으로 여기지 않는다. 진보의 역사적 전개에서 고려해야 할 또 하나의 요소는 진보ㆍ보수의 상호 의 미 전유이다. 앞에서 평화통일론을 다루며 박정희체제에 의한 평화통일의 보수 적 전유를 설명한 바 있지만, 그 현상은 다른 부분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조봉 암ㆍ진보당의 사회민주주의ㆍ평화통일론은 ‘민족과 국가의 과업’, ‘민주조국의 건설’, ‘민주주의적 통일을 위한 예비작업’, ‘우리 민족의 운명 타개’ 등의 수식어 를 동반하며 철저하게 민족국가의 틀에 입각해 있다. 그 핵심은 국가 주도의 경 제계획에 의한 압축성장의 논리였다. 그 후 박정희 정권이 국가주도의 압축성장 을 실현하며 성장은 보수가 전유했고, 진보는 사회정의와 공정분배 등의 가치를 가져갔다. 한때는 진보의 독점물이었던 것을 이제는 진보와 보수가 나눠가지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박정희ㆍ전두환 정권의 통제ㆍ계획경제에 대해 1970-80년대의 민주세력은 ‘자율적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조 봉암ㆍ진보당이 보수세력의 ‘독점경제’라고 비난했던 것이 진보의 몫으로 돌아 가게 된 것이다. 좀 더 시간이 지나자 진보는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모순에 맞서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주장하게 되었고, 보수는 자유방임 시장경제에 가까운 논 리를 들고 나왔다. 국가 개입이라는 부분이 진보에서 다시 살아났지만 그 내용은 ‘시장의 모순으로 인한 폐해의 시정’이라는 의미로 바뀌었고 ‘자율적 시장경제’ 는 오히려 보수의 영역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조봉암ㆍ진보당의 압축성장론이 갖고 있던 진보성은 완전히 소멸되어 성장은 진보의 항목에서 사라졌으며, 계획 과 통제는 1950년대 진보당과는 의미가 변질된 상태로 진보의 표상 속에 남게 되었다. 우리는 이런 역사적 현상을 통해 보수와 진보가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 니라 역사ㆍ사회발전에 따라 문제영역이 달라지면서 담론체계의 내용이 변하고 때로는 보수ㆍ진보의 담론역전과 상호 의미 전유가 생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봉암ㆍ진보당의 진보성을 평가할 때는 1950년대 진보이념의 형성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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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갖던 진보성과 그 이후 나타난 의미변화를 추적하며 한국 진보의 다층적이 고 복합적인 차원을 함께 파악하는 작업이 동반되어야 한다.
4) 당대의 비판: 다양성의 복원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조봉암과 진보당에 반대하는 당대의 목소리와 의견들을 ‘냉전반공의식에 젖은 기득권자의 저항’ 정도로 지나치게 폄하하고 있다. 이승만 과 자유당은 말할 것도 없고 1956년 신당추진운동과 1957년 ‘진보당 사건’에서 갈등을 빚은 조병옥ㆍ김준연ㆍ민주당ㆍ?동아일보? 등을 ‘냉전수구극우세력’으 로 취급하며 그들의 행동과 발언은 언제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나온 것임을 강조 한다. 물론 조봉암 반대세력들 중에는 수구세력이 많았지만, 당시 이른바 ‘보혁 대결’에서 보수를 지지한 쪽에서도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모든 비판이 질 낮은 반공의식이나 기득권 수호의 소산이거나 조봉암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나타난 적대감의 발로는 아니었다. 그 중에는 나름대로의 논리에 따라 혁신계를 반대했고, 이런 비판과 반대 논리들 속에는,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현재의 보수ㆍ 진보의 이념대결을 예고하는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요컨대 다양한 목소리들을 ‘냉전수구세력’으로 단일화하고 다층적인 비판의 논리를 ‘기득권 유지’의 산물로 획일화시킬 때, 진보ㆍ보수의 대립구도가 형성ㆍ강화될 수 있었던 배경, 그리고 지배질서를 떠받치는 논리를 적극적으로 고찰할 여지가 봉쇄되는 것이다. 진보 당 비판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철저한 반공논리에 입각한 반대논리가 있다. 진보당은 사회주의 정당이 므로 한국에는 전혀 필요 없다는 주장이다. 진보당 사건의 담당검사였던 조인구 는 ‘사회주의나 수정사회주의는 그 근원이 모두 사회주의에 있으며 대한민국 국 헌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면서 평화적 방법을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정책 은 결국 공산주의자와 같다고 보았다(조인구 1958: ?전집? 5: 212). 심지어 민주 당 선전부차장 구철회는 진보당 추진자들을 “소위 보련계라는 것으로서 6·25 이전 공산주의를 맹종하다 전향한 자 또는 그에 동조자 또는 회색분자, 기회주의 자들이 대부분(구철회 1956: 184-85)”이라며 진보당의 ‘용공성’을 거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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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용공성 시비를 건 사람들이 모두 극우반공주의자들은 아니었다. 당대 의 대표적 자유주의자 신상초를 비롯한 지식인들 역시 반공노선을 주장했다. 진 보당의 평화통일론은 냉전의 최일선에 서있는 한국에서는 “있을래야 있을 수 없 는 것”으로 지금과 같은 국제적 조건에서는 “철저한 ‘반공노선’과 결부되지 않을 수 없는 것(신상초 1956: 203)”이라는 주장이다. 주요한 역시 진보당의 노선에 대해 ‘연막적 색채’, ‘양의 가죽으로 이리의 본색을 감추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거론하며, ‘금일 선진국의 사회민주주의는 명백히 반공’이라는 점을 지 적하면서 한국에 존재할 수 있는 진보노선의 한계를 설정했다(주요한 1958). 4·19 이후 혁신계를 지지했던 신범식(1960)과 강상운(1960) 또한 한국에는 공산 주의와 단절하고 복지사회 건설, 의회정치, 민주주의를 본질로 삼는 ‘민주사회주 의’만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사한 취지에서 변호사 태윤기도 “진정한 우파 사회민주당 정도”는 ‘정국 견제’에 의미가 있지만 “혁신이라는 가면에 장식 된 공산당이라면(태윤기 1960: 114)” 한사코 거절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오 늘의 시각에서 보면 반공은 보수극우세력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분단과 전쟁이라는 역사적 경험 속에 반공은 생각보다 폭넓게 확산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것은 조봉암의 사형 이후 ‘대중의 침묵’을 일정 부분 설명해주고 있다. 둘째, 한국은 혁신운동이 진행될 정도로 사회경제적 발전이 진행되지 못했다 는 논리이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여 그 병폐가 뚜렷하게 드러난 곳에서 “자본주의체제를 뒤집어엎고 사회주의를 단행하자는 정당이 혁신정당(신상초 1957b: 72)”인데 한국은 여기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한국의 생산양식은 자본주의화 되지 못했으며, 생활양식에는 신분적 예속관계나 예속의식이 상당히 남아 있고, 정치적 측면에서도 아직 근대국가 형성과 부르주 아민주주의 이전 단계에 있는 만큼 사회주의를 그 내용으로 하는 혁신운동이 들 어설 자리가 없다. 예컨대 박운대는 사회주의 정책이 한국 현실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소아병’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진보당을 비롯 한 혁신운동의 당면과제는 ‘야당연합전선’이라고 주장했다(박운대 1957). 사회 개량주의를 지향하는 진보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경제학자 최주철조차 한국 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자본주의를 정상적인 테두리 안에서 수립하고 발전시킴 이 선결문제(최주철, 1956: 10)”라면서 철저하게 체제 내에서 자본주의 발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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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을 기울이는 개량주의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셋째, 과거 자유당 정권과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측면에서 한국 보수주의가 충 분히 진보적 역할을 해왔고 또 진보적이라는 논리도 제기되었다. 자유당은 이승 만의 일인 정치를 옹호하기 위한 도당에 불과한 반면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온건 보수정당’인 민주당은 “지금까지의 정치투쟁 과정에 있어서 …… 자 유경제, 법치주의 확립, 민권신장, 책임정치 구현 등 우리 사회를 근대적인 시민 사회로 만들기 위해 …… 개혁에의 열의를 다분히 가지고 있으며 또 개혁을 위한 투쟁을 대담하게 전개하고 있는 점에 있어서 건전하고 또 진보적(신상초 1957a: 127)”이라는 것이다. 민주당 소속의 김영선 또한 자유당은 “반봉건질서, 즉 현상 을 유지하려는” 정당인 반면 민주당은 자유ㆍ민권의 신장을 주장하는 “현상타파 내지는 개혁을 주장하는 보수정당”이고,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현실에 있 어 보수정당은 현상유지정당이 아니고 혁신과 진보의 정당(김영선 1956: 61)”이 라고 주장했다. 넷째, 한국의 경제발전은 ‘자유경제’와 ‘민간기업’의 원칙 아래 자유주의의 틀 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진보당은 국유ㆍ국영기업의 비능률성과 부패를 이유로 기업의 민간불하를 주장하는 민주당의 정책을 반대했다. 민간불 하가 이루어지면 이 기업들은 정치권에 야합한 무리의 수중에 떨어져 또 다른 대규모 부정이 자행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반면 자유경제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민간에게 넘어간 기업은 결국에는 운영 능력이 있는 사람의 손으로 들어가게 되 며, 영리의식 아래 책임 있는 경영을 하고, 자유경쟁 원칙 아래 생산성이 향상될 뿐 아니라 민주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형성한다고 주장했다(신상초 1956; 김영선 1956). 이들에 따르면, 자유경제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의 틀 안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와도 결부될 수 있지만 자본주의 및 자유주의와 결합되지 못한 민주주의는 경제적 자유를 파 괴함으로써 결국 정치적 자유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이런 근거에서 4·19 이후 동아일보 논설위원 이동욱은 ‘국유화는 자유를 말살하는 것’이라고 하며 혁신계 의 국유화 주장에 반대했다(김재순 외 1960: 85-88). 진보당을 비롯한 혁신계에 대한 당대의 비판에는 비록 초보적이지만 시장경제 와 국유화(혹은 통제경제)의 문제, 시장과 계획, 자본주의와 정치적 자유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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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ㆍ사회발전 단계에서 보수와 진보의 위상 등이 담겨져 있는데, 이것 은 오늘날에도 보수ㆍ진보논쟁의 중요 의제를 구성하고 있다. 조병옥ㆍ김준연ㆍ 조인구 등은 냉전반공의식이나 기득권에서 조봉암ㆍ진보당을 비판했지만, 그 나 름대로 타당한 이유를 갖고 반론을 제기한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당대의 담론을 냉전반공의식과 기득권에서 연유한 것으로 획일화시킬 경우, 당대의 담론이 지 닌 다양성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또한 이와 더불어 현재의 진보와 보수의 대립을 이루고 있는 의제들의 지속성과 역사성까지 누락되어 버린다. 
4. 마치며
이 글은 크게 두 가지의 목적을 갖고 있다. 그 하나는 조봉암 관련 연구자들이 당연시하는 전제와 주장들이 과연 옳은 것인지 검토하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진보를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역사적ㆍ상대적 내용을 갖는 의미체계로서 보수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살펴보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진보는 고정된 실체 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역사적 맥락에 따라 변화되는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조봉암의 정치이념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그 진보성이 관철되는 것인가, 관련 연구자들이 별 다른 고민 없이 반대세력을 극우반공주의자로 매도하는 관 행은 용인될 수 있는 것인가, 평화통일론의 민족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주체성ㆍ자 주성은 오늘날에도 일관되게 진보의 표상이 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문제를 검토 했다. 그리고 필자는 그 대답을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 평화통일론이나 사회민주주의가 당대에는 분명히 진보성을 갖고 있었으 나 그 내용의 일부가 보수세력에 의해 전유됨으로써 애초에 갖고 있던 체제도전 이념으로서의 진보성은 많이 퇴색했다. 한국사회의 발전에 따라 보수ㆍ진보 사 이에는 서로 상대방의 이념 내용을 전유하거나 그 내용이 뒤바뀌는 담론역전현 상이 일어났기 때문에, 조봉암ㆍ진보당의 진보성을 평가할 때는 이런 담론 교체 의 역사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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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보수‘이념’이 아니라 보수‘세력’의 기원과 과거행적을 중심으로 진행되 는 진보의 관행은 한국 보수 그 자체의 이념적 빈곤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런 사 실은 당시 진보계열에 속하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에게도 널리 인정되고 있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이래의 기득권 세력이 한국 보수의 기원이라는 통설 역시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아울러 정치영역에서 과잉화되어 포괄적 세계관으로 발전하 지 못한 진보의 이념적 지체 역시 기득권 옹호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 보수세력에게 책임의 일정 부분을 물을 수 있다. 셋째, 조봉암에 대한 당대의 비판이 모두 냉전반공의식의 산물은 아니었으며, 초보적 형태이기는 하지만 오늘날에도 보수ㆍ진보의 중요 대립 의제인 자유와 사유재산, 경쟁과 계획에 관련된 문제들이 논의되었다. 현재 진보와 보수의 대립 이 어떤 역사적 전개 과정을 거쳐 나타난 것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단순화·획일화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다양성을 복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보았듯 조봉암ㆍ진보당으로부터 출발한 한국 진보는 정치측면에서 의 상대적 과잉화, 보수‘세력’의 과거 행적이나 사회적 기원에 대한 비판이라는 측면에서 일정한 연속성을 갖고 있지만 그 이념 내용은 변화해왔다. 이것은 진보 ㆍ보수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역사적ㆍ상대적 개념이며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전제로 할 때, 즉 진보ㆍ보수의 대립 구조 속에서 현실적인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지키고자 하는 기존질서의 변화에 따라 보수의 이념체계에도 변화가 일어나듯, 진보 역시 어떤 불변의 의미체계나 사회관계를 반영하는 개념 이 아니라 역사적ㆍ사회적 맥락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내용을 갖고 있다. 한국의 진보를 연구할 때는 보수ㆍ진보의 상호 의미 전유, 담론역전을 파 악함으로써 이념과 현실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포착해야 한다. 이 연구는 그것을 조봉암ㆍ진보당의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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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현대정치연구 ?2013년 봄호(제6권 제1호)
투고일: 2013.03.05.    심사일: 2013.04.10.    게재확정일: 201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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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ㆍ진보당과 한국 현대 진보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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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Cho Bong Ahm and Jin Bo (Progressive) Party: Origin and Evolution of Korean Progressivism Jung, seunghyun ? Sogang University
This paper is intended to trace the origin of Korean political progressivism and its historical evolution from Cho Bong Ahm and Jinn Bo Party. I suggested that three features of Korean progressivism has started from Cho and Jin Bo Party. First, its criticisms on the social origins and past activities, not ideology itself of the conservatives. Second, its ideological features as a political rhetorics. Third, ideological mixtures of the progressives and the left in the social democracy theory. And I also emphasized that progressivism is not static or unchanging entity. Historical development and the changing politico-social scenes has made its original ideology very differently, sometimes even made conflicting. For example, peaceful reunification and rapid economic development were appropriated by conservatives, and its original progressiveness was evaporated. I found similar cases in the areas of free economy, state planning, values of national constitution. In short, political ideology as a historical and relative entity should be considered in its historical evolution.
Key Words | Cho Bong Ahm, Jin Bo (Progressive Party, conservatism, progressivism, social democra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