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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

일본 농상무성의 「日本帝國全圖」 편찬과 독도 인식(韓哲昊/동국대)



연구논문
1. 머리말
2. 농상무성의 지형도 편찬과 독도 인식
3. 농상무성의 「隱岐圖幅」·「隱岐圖幅地
質説明書」(1896) 편찬과 독도 인식
4. 농상무성의 「日本帝國全圖」(1888, 1892,
1897) 발행·개정과 독도 인식
5. 맺음말



■ 국문초록
일본 외무성·해군성과 함께 1905년 일본의 독도 강제 편입을 주도했던 농상무성
은 「일본제국전도」(1888, 1892)와 「대일본제국전도」(1897)를 간행하였다. 「일본제
국전도」에는 일본의 섬들과 달리 성인봉이 있는 울릉도와 산봉우리로 이루어진
독도에 산을 나타내는 표시가 없다. 농상무성은 울릉도·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
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측량 대상에서 제외했고, 그 결과 색깔뿐 아니라 산
표시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제국전도」와 「대일본제국전도」에는 일본 수로부가 간행한 「조선동해안도」
에 근거해 울릉도와 독도의 이름이 ‘松島’와 ‘오리우츠뢰·메네라이뢰’로 각각 적혀
있다. 수로부 간행의 「조선동해안도」 등과 수로지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 영토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농상무성도 자연스럽게 그 인식을 수용했을 것이다.


8 한국근현대사연구 2016년 겨울호 제79집


농상무성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점은 야마가미가 집필한 ?中
等教科用地圖 外國部?(1902)와 ?女子教科用地圖 外國之部 上?(1903)에 똑같이
실린 「아시아(アジア)」 지도에 독도를 제외하고 일본의 국경선이 확실하게 표시된
사실로 입증된다. 야마가미는 농상무성 재직 중 오키를 직접 측량하고 「隱岐圖幅」와
「隱岐圖幅地質説明書」를 작성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간주하지
않은 「일본제국전도」는 일본의 고유영토론 주장과 무주지 선점의 허구성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주제어: 독도(올리부차 뢰, 메넬라이 뢰), 울릉도, 오키, 일본 농상무성, 지질조사
소, 「일본제국전도」, 「조선동해안도」, 야마가미 만지로


1. 머리말
일본 농상무성은 1905년 2월 일본이 독도를 강제로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는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이는 1905년 9월 나카이(中井養三郞)가 「랸코도
영토편입 및 貸下願(대여신청서)」을 내무성·외무성과 함께 농상무성에 제출했
던 사실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당시 외무성과 해군성이 러일전쟁의 와중에
서 독도를 군사전략적 거점으로 중시하는 상황에서, 농상무성은 한국 어업
침탈을 주도하면서 나카이로 하여금 대여신청서를 제출하도록 부추겨 독도를
강점하는 결정적 빌미를 제공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독도 강점 이전 농상
무성의 독도 인식에 대한 고찰은 일본의 독도 무주지선점론을 비판함과 동시에
독도가 한국 영토였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줄 것이다.
일본 정부 내에서 농상무성 地質調査所는 육군성의 陸地測量部와 해군성의
水路部와 더불어 실지 측량을 바탕으로 지도를 편찬했던 전문기관이었다. 농상
무성 지질조사소는 “(일본 전국 내) 정밀하게 지질 및 토양을 조사하여 그야말로
이에 기인하는 殖産의 道에서는 그 利源을 탐구한다”1)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실지 측량뿐 아니라 육지측량부·수로부의 지도·海圖 등을 바탕으로 각종 地形
1) 「地質局事業ノ要領」, ≪地質調査所年報≫ 明治19年 1號, 1886, 1쪽.
일본 농상무성의 「日本帝國全圖」 편찬과 독도 인식 9
圖·地質圖·土性圖를 편찬했으며, 나아가 이들을 종합해 세 차례에 걸쳐 「日本帝
國全圖」를 발행하였다. 그러므로 농상무성 지질조사소의 지형도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일본 정부 차원에서 농상무성이 독도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한·일 양국에서 육지측량부의 지도와 수로부의 해도에
관해서는 적지 않은 연구가 진행되어왔던 반면, 농상무성 지질조사소의 지형도
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최근에 호사카 유지(保坂祐二)
세종대 교수는 1897년 농상무성 지질조사소가 간행한 「大日本帝國全圖」를 공
개하였다. 그는 「대일본제국전도」에 한반도와 울릉도·독도가 ‘朝鮮’의 땅을
나타내는 하얀색으로 표시되면서 일본의 땅과 구분해 그려졌으며, 독도는 다케
시마(竹島)가 아니라 러시아식 명칭인 ‘올리부차’(서도)와 ‘메넬라이’(동도)로
표기된 반면 당시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에 의해 일본 식민지가 됐던 臺灣은
일본 영토로 표시되었다고 밝혔다. 이에 근거해 그는 “그동안 독도를 한국
땅으로 인정한 민간 지도는 발견됐지만, 일본 정부가 이를 시인하는 내용을
담은 지도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며, “지금까지 일본 정부의 공식 지도에는
독도가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일본 측이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할 일말의
여지가 있었지만, (이번 지도 발견으로) 아베 정부의 ‘고유 영토’ 주장은 명백한
허위임이 밝혀졌다”고 평가하였다.2)
필자 역시 「대일본제국전도」에 대한 호사카의 견해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객관적인 설득력을 지니려면 「대일본제국전도」
뿐 아니라 농상무성 간행의 지도에 대한 심도 있고 다각적인 분석이 전제되어야
만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울릉도와 독도(올리부차瀨, 메넬라이瀨)가 일본
본토와 대부분의 일본 섬들과 달리 채색되지 않았지만, 九州·臺灣 등의 일부
섬들도 채색되지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에 채색 여부만으로는 독도의 소속을
확실히 단정하기 어려운 면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호사카는 농상무성이 1897년 전에 이미 1888년과 1892년에 「일본제국
전도」를 발행했을 뿐 아니라 각종 지형도와 지질도 등을 편찬했다는 사실을
2) ≪조선일보≫ 2015년 4월 14일자, 「‘독도는 朝鮮땅’ 명시된 日정부 공식地圖 발견」.
10 한국근현대사연구 2016년 겨울호 제79집
간과하고 말았다. 그 결과 농상무성이 「대일본제국전도」를 편찬한 배경과 과정
은 논의되지 않았고, 농상무성 편찬의 「일본제국전도」와 각종 지형도 등을
비교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 의미 역시 제대로 부각되지 못하였다. 단적인
예로, 그의 주장대로 색깔로 독도를 한국 영토로 구별한다면, 농상무성이 독도
를 한국 영토로 처음 인정한 것은 1897년판이 아니라 1888년판 「일본제국전도」
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농상무성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확히 입증하기 위해서는 농상무성이 편찬 간행한 다른 문헌이나 지형
도 등을 면밀하게 살펴보는 작업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본고에서는 일본 농상무성 내 지도 제작을 담당했던 지질조사소가
편찬했던 지형도·지질도·토성도 등을 발굴·분석함으로써 농상무성이 독도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농상무성 지질조사소가
설립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지질조사소 편찬의 각종 지형도와 지질도를 비교할
것이다. 다음으로 지질조사소가 독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오키(隱岐)를 직접
측량하고 발행한 「隱岐圖幅」·「隱岐圖幅地質説明書」를 근거로 독도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밝혀보겠다. 마지막으로 지질조사소가 「日本帝國全圖」를 발행·
개정한 배경과 과정에서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분석할 것이다.
2. 농상무성의 지형도 편찬과 독도 인식
일본 정부 내에서 실지 측량을 바탕으로 지(형)도를 편찬했던 대표적인 전문
기관은 내무성의 지리국, 육군성의 육지측량부와 해군성의 수로부, 그리고 농상
무성의 지질조사소였다. 이들 네 기관은 각각 그 업무가 달랐지만, 일본 전국의
정확한 지리적 상황을 파악한다는 동일한 목적을 지녔기 때문에 계통상으로
서로 연결되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지리국·육지측량부·지질조사소
는 측량과 지도 편찬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관제 개편으로 업무와 담당
부서를 서로 조정하였다. 兵部省 육군참모국은 1871년에 설치되고 1878년에
참모본부로 개편되면서 그 산하에 측량과·편찬과 등을 두었으며, 1884년에
내무성 지리국과 이원화되었던 측량과 지도제작 업무를 전담했다가 1888년
일본 농상무성의 「日本帝國全圖」 편찬과 독도 인식 11
측량과가 육지측량부로 승격되었던 것이다. 농상무성 지질조사소 역시 1882년
2월 내무성 지리국 산하의 地質課가 폐지되고 설립된 기관이었다.3)
지질조사는 187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업무는 1874년 내무성
의 地理寮 木石課가 담당하였다. 1877년에 지리료는 地理局으로 바뀌었고, 그
다음해 지리국 산하에 지질과가 신설되고 목석과는 山林課로 개칭되었다. 이로
써 지리국은 지리·지질·측량을 총괄함으로써 그 방면에 일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1880년에 지질과는 지리국에서 勸農局으로 이속되었으며, 1881년
권농국이 폐지됨과 동시에 農商務省이 설치되자 내무성에서 농상무성 農務局
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농무국은 권농과 농업 외에 ‘漁獵’에 관련된 사무를
담당했으며, 지질조사를 맡았던 지질과는 지질·토질·지형·제도·분석 등 5계로
구성되었다.
지질과는 1881년 4월부터 약 2개월 여간 일시적으로 지질조사소로서 농무국
에서 독립되기도 했지만, 곧 농무국으로 되돌아갔다가 마침내 1882년 2월 13일
농상무성 직할의 지질조사소가 설립되었다. 그 후 1885년 말 지질조사소는
지질국으로 개편되고, 지질·토성·분석·지형·서무과 등 5과로 확대되었지만,
나중에 분석·서무과는 다른 곳으로 이속되었다. 그러나 1890년에 지질국은
다시 지질조사소로 명칭이 바뀌면서 농상무대신의 관리에 속했으며, 분석과가
복귀하면서 지질·토성·분석·지형계 등 4계로 조직이 정비되었다. 또 1897년에
지질조사소는 폐지되고 광산국에 지질과가 설치되었다가 1898년 다시 지질조
사소로 복귀하였다.4)
지질조사소(이하 지질국은 지질조사소로 통칭)는 명칭 그대로 지질을 조사하
는 데 가장 중요한 목적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지형과(계)가 지질 혹은 토성조사
에 종속되는 사무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는 당시 신뢰할 만한 지형도가
매우 적었던 상황에서 적절한 조치였다고 평가받는다. 즉 지질조사소가 설립될
3) 建設省地理調査所 編, ?測量·地圖便覧?, 建設協會, 1950, 7~10, 12쪽.
4) 지질조사소의 설립 및 변천 과정에서 대해서는 地質調査所百年史編集委員會 編, ?地質調査所百年史?, 地質調査所創立100周年記念協賛會, 1982, 1~26쪽 참조. 이
와 관련해서 지질조사소 소장을 역임했던 井上禧之助, 「地質調査所沿革及事業」,
≪地學雑誌≫ 20-3, 1908; 山根新次·三土知芳, 「わが國の地質調査事業の沿革」,
≪地學雑誌≫ 63-3, 1954 등의 기록도 남아 있다.
12 한국근현대사연구 2016년 겨울호 제79집
때에는 일본 전국을 대상으로 한 지형실측도가 없어 삼각측량 등을 실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5)
지질조사소의 지형과는 “지질도·토성도를 調製하는 데 필요한 지형도를 編
製”하는 부서로, 지형을 측량하고 실측지형도를 편제하는 업무를 맡았다. 매년
指命된 지역으로 가서 지형을 실측하고 地形祥圖(상세 지형도, 20만분의 1)·豫
察地形圖(40만분의 1)·地質土性原稿用 地形圖(10만분의 1)를 제작했던 것이다.
각 지형도의 규정을 살펴보면, 지형상도는 경위선 안에 참모본부 측정의 삼각점
과 해군 수로국의 경위도 측점을 사용하여 지질과원의 실측도로 이들 각 점을
접속시켜 도로·산천 등을 縮載해 편제하였다. 또 산천 조감도(‘見取圖’)를 평면
도로 바꿔 만들어 지질·토성과원의 野稿圖에 근거해 세부를 보충하거나 해·육
군 및 철도국 혹은 각 부·현청의 실측도류를 ‘參錯’하였다. 예찰도 역시 제작방
법은 지형상도와 대략 같지만, 원래 예찰사업에서 정밀하고 세세함을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의 지도(‘伊能圖’)와 그 외 지도를 參觀
하는 것도 있다. 예찰도는 전국을 동북부·동부·중부·서부·서남부 등 5폭으로
나누며, 北海道·沖縄諸島는 나중에 이를 정하기로 하였다.6)
지질조사소는 설립 이전인 1876년에 이미 홋카이도 전체를 조사하여 200만
분의 1 「日本蝦夷地質要略圖」를 출판한 적이 있고, 일본 전체의 예찰지질도를
작성한다는 계획 아래 지질조사를 실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질조사소는 창설
직후인 1883년에 지도로는 최초로 「예찰동북부지형도」를 제작하였다. 당시
이러한 종류의 지도는 일본에서 아직 만들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동판으로
조각해 인쇄할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였다. 그렇지만 東陽堂에서 1년 동안
실패를 거듭한 끝에 1884년에 「大日本帝國豫察東北部地形圖」를, 1886년에는
「大日本帝國豫察東部地質圖」를 각각 조각·인쇄해서 출간하게 되었다. 이어 지
질조사소는 1887년에 「대일본제국예찰동부지형도」, 1890년에 「대일본제국예
찰중부지형도」, 1892년에 「대일본제국예찰서부지형도」, 그리고 1894년경에
「대일본제국예찰서남부지형도」를 각각 출간하였다.7)
5) 山根新次·三土知芳, 「わが國の地質調査事業の沿革」, 48~50쪽.
6) 「地質局事業ノ要領」, 7~9쪽.
7) 山根新次·三土知芳, 「わが国の地質調査事業の沿革」, 48~50쪽; 地質調査所百年史
일본 농상무성의 「日本帝國全圖」 편찬과 독도 인식 13
40만분의 1 축척인 豫察地形圖는 예찰지질도와 토성도를 제작하는 데 필요
할 뿐 아니라 「대일본제국전도」를 제작하는 기본이 되는 중요한 지형도이다.
홋카이도와 오키나와제도를 제외한 일본 전국을 동북부·동부·중부·서부·서남
부 등 5폭으로 나눈 예찰지형도 중에 오키(隱岐)가 들어 있는 「대일본제국예찰
서부지형도」는 주로 쥬코쿠(中國)과 시코큐(四國)지방을 대상으로 삼았으며,
경위도상으로는 대략 동경 131도 45분부터 135도 5분까지, 북위 33도 30분부터
36도 30분까지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대일본제국예찰서부지형도」
안에 그 계획 단계부터 독도가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8)
아마도 그 이유는 지질조사소가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애초에 오키와 멀리 동떨어진 독도를 조사대상에서 제외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전자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기로 하고,
후자에 대해서 몇 가지만 지적해두고자 한다. 먼저 「대일본제국예찰동부지질
도」에는 원래 계획상에서 빠져 있던 ‘佐渡’의 윗부분을 포함하였고, 역시 계획
상에는 나오지 않은 ‘小笠原島’를 160만분의 1 축적인 分圖로 넣었다. 또 「대일
본제국예찰서남부지형도」에도 원래 계획상에서 빠져 있던 ‘五島列島’를 지형
도 형태로 포함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래 부분에 축척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약간 작은 형태의 分圖로 넣었으며, 大隅諸島 이남의 ‘薩隅諸島’, 즉 오키나와의
대부분을 비례척 100만분의 1 축적의 分圖로 넣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지질조사소는 원래 경위도상으로 멀리 떨어져 계획상
에는 빠져 있던 섬들까지 「대일본제국예찰지형도」에 가능한 한 넣으려고 노력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고스란히 「대일본제국예찰지질도」에도 반영되
었다. 따라서 「대일본제국예찰서부지형도」와 「대일본제국예찰서부지질도」에
독도를 어떠한 형식으로든 표시하지 않은 것은 농상공부 지질조사소가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編集委員會 編, ?地質調査所百年史?, 19~26쪽.
8) 「地質局事業ノ要領」, 첨부지도.
14 한국근현대사연구 2016년 겨울호 제79집
3. 농상무성의 「隱岐圖幅」·「隱岐圖幅說明書」(1896) 편찬과
독도 인식
지질조사소는 실지 조사를 통해 「大日本帝國豫察地形圖」를 제작했을 뿐 아
니라 각 지역마다 20만분의 1 축척인 地形詳圖를 제작한 뒤 이를 기초로 삼아
동일한 축척의 지질상도와 그 ‘報文’인 설명서를 편찬하였다. ‘보문’은 실지
조사와 이를 통해 얻은 정보에 대해 적부·우열·진위 등을 살펴서 분별한 ‘鑑査’
의 성적을 지세·암석금석·地質通覽·응용지질·辯論 등의 항목에 기초해 상세하
게 편술한 것이다. 이 보문은 지형상도에는 없고 지질상도에만 있는데, 아마
지질조사에 더 역점을 두었기 때문에 지형상도의 보문 성격을 지닌 ‘地勢’를
포함해서 하나의 보문으로 일목요연하게 작성한 것으로 여겨진다.9) 이들 지형
및 지질상도는 모두 「○○圖幅」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는데, 서로 구별하기
위해 지질상도는 아래 부분에 각종 암석의 종류를 표시하는 네모칸의 표를
첨부해 놓았다. 지질보문은 「○○圖幅地質説明書」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독도와 관련된 지형상도는 「隱岐圖幅 縦行(11)横行(5·6)」이다. 이 도폭은
1895년 12월 11일에 인쇄되고 그해 12월 17일에 발행된 점으로 미루어 그
이전에 이미 오키에 대한 실지 조사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지형측량자는
호리우치 요네오(堀內米雄)이다. 「隱岐圖幅」의 경위도 범위는 동경 132도 40분
부터 133도 40분까지, 북위 36도 부터 36도 30분까지 그려져 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대일본제국예찰서부지형도」의 북쪽 끝과 동일한 범위이다. 따라서
「隱岐圖幅」에는 독도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대일본제국예
찰서부지형도」에서 언급한 것과 같다.
그런데 「隱岐圖幅」에 독도가 포함되지 않은 이유를 엿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자료가 바로 地質詳圖인 「隱岐圖幅」(1896.4)과 함께 편찬된 「隱岐圖
幅地質説明書」(1896.3)이다.10) 지질상도 「隱岐圖幅」은 지형상도 「隱岐圖幅」을
바탕으로 지질실태를 반영했으므로 그 범위와 형태가 똑같지만, 그 ‘報文’인
9) 「地質局事業ノ要領」, 4쪽.
10) 農商務技手 山上萬次郎, 「隱岐圖幅地質説明書」, 農商務省地理調査所, 1896.3; 地
理調査所, 「隱岐圖幅」, 農商務省地理調査所, 1896.4.
일본 농상무성의 「日本帝國全圖」 편찬과 독도 인식 15
「隱岐圖幅地質説明書」에는 조사 대상지역인 오키의 ‘地形’이 다음과 같이 서술
되어 있다.
隱岐圖幅은 隱岐國 일원의 지역을 포괄하며 … 隱岐國은 出雲 북방에 가로놓
이고 일본해[동해] 남부에 있는 一群의 列島를 總稱하는 것이다. 全島의 위치,
南端은 북위 35도 59분 餘인 知夫郡 知夫村의 一點에서 시작하여 北端은 동 36
도 20분 餘인 周吉郡 西村의 一點에서 끝나며, 東端은 동경 133도 22분 餘인 周
吉郡 大久村의 일단에서 기원하여 西端은 동경 132도 56분 餘인 知夫郡 西村의
一點에서 끝난다. 그 전면적은 22奇零 20方里이며, 海士, 知夫, 周吉, 隱地의 4군
으로 나누어진다.
隱岐國은 주로 1大島와 3小島로 이루어진다. 이에 속한 小嶼는 매우 많아 약
180에 달하며 이를 隱岐의 小島라고 통칭한다. 이들 수많은 도서로 이루어진 隱
岐列島는 그 배열 상태에 의해 자연스럽게 2군으로 나뉘어 島前·島後라고 부른
다.11)
요컨대, 隱岐國의 범위는 북위 35도 59분 餘∼36도 20분 餘, 동경 132도
56분 餘∼133도 22분 餘이며, 1大島(隱岐の島)와 3小島(西の島, 中の島, 知夫里
島), 그리고 약 180개 隱岐의 小島로 이루어져 있다. 隱岐國의 범위, 즉 동·서·남·
북단은 「隱岐圖幅」의 경위도와 비교해보면, 북단과 서단의 일부 작은 섬들이
포함되지 않고 1大島와 3小島의 범위를 기준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12) 隱岐
國의 범위에는 隱岐의 小島라고 통칭되는 약 180개 섬이 모두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隱岐圖幅地質説明書」에 서술된 隱岐國의 경위도 범위에 독도
가 들어있지 않은 점을 근거로 지질조사소가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고 판단된다.
11) 農商務技手 山上萬次郎, 「隱岐圖幅地質説明書」, 1~2쪽.
12) 이는 「出雲石見隠岐三國土性圖說明書」의 ‘位置’에서 “隱岐國은 북위 35도 59분
30초(南端 知夫郡 知夫村)부터 북위 36도 20분 11초(北端 周吉郡 西村)에 이르고,
서경 6도 21분 38초(東端 周吉郡 大久村)에서 기원하여 서경 6도 48분 01초(西端
知夫郡 西の島)에서 끝난다”고 서술된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農商務省地質調
査所 編, 「出雲石見隠岐三國土性圖說明書」, 農商務省地質調査所, 1896, 2~3쪽.
16 한국근현대사연구 2016년 겨울호 제79집
그러나 「隱岐圖幅地質説明書」의 隱岐國이 1大島와 3小島, 그리고 약 180개
의 隱岐의 小島로 이루어졌다는 기술은 독도를 隱岐國 혹은 일본 영토로 포함했
는지 여부를 가려줄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와 관련해 1874년 일본의 최고 행정기관인 太政官의 正院 地誌課에서 편찬한
관찬지 ?日本地誌提要?에서 오키의 ‘島嶼’에 대한 다음의 내용은 시사해주는
바가 매우 크다
○ 本州의 屬島. 知夫郡 45, 海士郡 16, 周吉郡 75, 穩地群 43, 합계 179. 이를
총칭하여 오키의 小島라고 한다.
○ 또한, 서북방으로 松島·竹島 두 섬이 있다. 예부터 민간에 전해진다고 한
다. 穩地群 福浦港으로부터 松島에 이른다. 海路 약 69리 35정. 竹島에 이
른다. 해로 약 100리 4정 남짓. 조선에 이르는 해로 약 136리 30정.13)
요컨대 오키의 속도, 즉 부속섬으로는 오키의 小島로 총칭되는 179개의 섬이
있고, 그 서북방으로 독도와 울릉도에 해당되는 松島·竹島가 있다고 예부터
민간에 전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隱岐圖幅地質説明書」와 달리 오키의 小
島를 약 180개가 아니라 179개로 기록하고 있지만, 오키가 1大島와 3小島,
약 180개의 ‘隱岐의 小島’로 이루어져 있다는 인식은 동일하다고 판단된다.
?日本地誌提要?는 일본의 최고 행정기관인 太政官의 正院 地誌課이 편찬한
만큼 松島·竹島에 대한 일본의 공식적인 견해와 판단이 들어 있다는 점, 각
부·현에 명령해 실지를 참관하고 정정했으며 이를 다시 교정·편집해서 그 정확
도에 만전을 기했다는 점, 그 「凡例」에서 ‘島嶼’는 “그 이름이 있는 것은 작은
것이라도 빼지 않았다”고 명시한 점14) 등에서 松島·竹島의 소속 여부를 파악하
는 데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된다.15)
그럼에도 ?日本地誌提要?의 松島·竹島 내용을 둘러싸고 한·일 양국의 견해
13) 正院地誌課 編, ?日本地誌提要? 巻之50, 日報社, 1874, 10~11쪽.
14) 正院地誌課 編, ?日本地誌提要? 巻之1, 「凡例」, 日報社, 1874, 3~4쪽.
15) 윤소영, 「근대 일본 관찬 지지와 지리교과서에 나타난 독도 인식」, ≪한국독립운
동사연구≫ 46, 2013, 370~373쪽.
일본 농상무성의 「日本帝國全圖」 편찬과 독도 인식 17
는 매우 상반된다. 한국의 학자는 오키의 부속섬은 오키의 小島로 총칭되는
179개의 섬에 한정되며, 항목을 달리해 별도로 기재된 松島·竹島는 오키의
小島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松島·竹島는 오키 혹은 일본의 영토가
아니며, 이러한 사실은 ?日本地誌提要?를 계승한 오쓰키 슈지(大槻修二)의 ?日
本地誌略?(文部省, 1874) 등 각종 관찬지지와 지리교과서 서술에도 커다란 영향
을 끼쳤을 뿐 아니라 “竹島 외 一島가 本邦[일본]과 관계없다”는 「太政官指令」
(1877)이 결정될 무렵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지리인식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16) 그 반면 일본의 학자는 오키에는 島津島 외에 179개의 小島가 존재하
고 또 그 서북방에 松島·竹島 두 섬이 있으며, 竹島로부터 朝鮮에 이르는 해로가
약 136리 30정이라고 해석하면서 竹島를 日本영토로 인식한 ‘証左’로 단정하고
그 때문에 朝鮮까지 해로를 약 136리 30정으로 기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17)
이처럼 한·일 양국 학자들의 해석과 주장은 서로 다르지만, 오키의 소도에
독도와 울릉도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은 모두 동일하다. 하지만 그 어떠한
경우든지 1877년 태정관지령에 의해 일본에서는 공식적으로 독도와 울릉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사실이 천명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농상공부는 독도가 오키의 소도에 포함되었는지 여부에 관해, 또
독도가 한·일 양국 어느 쪽의 영토에 속했는지 여부에 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이 문제와 관련해서 농상무성이 1888·1892·1897년 세 차례에 걸쳐 제작한
「日本帝國全圖」, 오키의 지질을 직접 조사해서 지질상도인 「隱岐圖幅」을 제작
하고 「隱岐圖幅地質説明書」를 작성했던 農商務技手 야마가미 만지로(山上萬次
郎)의 지리교과서와 부도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일본제국전도」에
관해서는 다음 절에서 다룰 예정이므로, 여기에서는 야마가미가 집필한 지리교
16) 박병섭,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의 다케시마=독도 인식」, ≪독도연구≫ 3,
2007, 42~43쪽; 朴炳渉, 「明治政府の竹島=独島認識」, ≪北東アジア文化研究≫
28, 2008, 33~35쪽; 유미림·최은석, ?근대 일본의 지리지에 나타난 울릉도·독
도 인식?, 한국해양수산개발원, 2010, 124~125쪽; 윤소영, 「근대 일본 관찬
지지와 지리교과서에 나타난 독도 인식」, 373~382쪽.
17) 下條正男, 「朴炳渉氏の「明治政府の竹島=独島認識」(≪北東アジア文化研究≫ 28)
を駁す」, Web竹島問題研究所, 2009년 8월 7일 게재.
18 한국근현대사연구 2016년 겨울호 제79집
과서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다만, 논의 전개상 「隱岐圖幅地質説明書」를 작성하
기 이전에 발행되었던 「일본제국전도」에 ‘松島’(울릉도)와 ‘올리부차瀨·메넬라
이瀨’(독도의 서도와 동도)가 기재된 사실로 미루어, 야마가미가 울릉도와 독도
의 존재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야마가미는 明治·大正시대 대표적인 지질학자이자 지리교과서·附圖의 저자
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는 1892년 제국대학 이과대학 지질학과를
졸업한 뒤 농상무성 광산국에 취직했으며, 1893년 10월 농상무성 지질조사소로
자리를 옮겨 지질과(계) 기수가 되어 1896년 10월 말까지 근무하였다. 지질조사
소 재직 중 그는 三甁山·隱岐·大分·丸龜 등을 비롯해 많은 지역의 「圖幅」과
「說明書」를 제작·작성하였다. 이후 그는 學習院(대학) 교수(1896.12∼1899.8)·
해군성 技師(1899.8∼1902.7) 등을 거쳐 문부성 도서국 지리교과서 조사 촉탁
(1909.4∼1911.3)을 맡았다.
아울러 야마가미는 지질조사소 재직 중인 1893년에 이미 하마다 쥰자부로(浜
田俊三郎)와 공저로 ?新撰日本地理?와 ?新撰萬國地理?를 집필한 이래 수많은
지리·지문교과서와 부도를 단독으로 집필했는데, 당시 채택률에서 우위를 차지
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그의 이름은 “초중등교육계에서 널리 유포하게 되었
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지리학자로서 업적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교과서를
수많이 저술한 것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질
학자 혹은 지리학자로서 야마가미의 능력과 명성이 폄하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지리교과서와 부도가 초중등교육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던 점은 확실
하다.18)
야마가미가 집필한 지리교과서에는 독도에 대해 기술한 것이 없고, 지리교과
서와 부도에 실린 지도에도 독도가 거의 표시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독도
의 존재와 위치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큰 만큼, 지리교과서와 부도에
18) 中川浩一, ?近代地理敎育の源流?, 古今書院, 1978, 238, 270~271, 282~283쪽;
源昌久, 「山上萬次郎(1868~1946)の地理學に関する一研究 伝記·書誌學的調査」,
≪人文地理≫ 41-5, 1989, 76~82쪽. 그 외에 文部省, ?學制百年史?, 帝國地方行
政學會, 1972; 海後宗臣·仲新, ?近代日本敎科書總說 解說篇?, 講談社, 1979; 川村
博忠, 「明治初期の文明開化と地理敎育」, ≪總合人間科學≫ 3, 2003 등 참조.
일본 농상무성의 「日本帝國全圖」 편찬과 독도 인식 19
출처: ?女子教科用地圖 外國之部? 上(1903).
<그림 1> 「アジア」실린 지도들을 면밀하게 분석
하면 그의 독도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야마가미의 지리교과
서와 부도에 대한 자세한 분석
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여기
에서는 그의 독도 인식을 확실
하게 보여주는 ?中等教科用地
圖 外國部?(1902)와 ?女子教
科用地圖 外國之部? 上(1903)
의 「アジア(아시아)」를 집중적
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두
책은 일본 文部省의 검정을 받
았다(‘文部省検定済’).19)
이 「アジア」 지도는 1905년
2월 일본의 독도 편입 조치 이
전에 발행된 일본의 지리교과
서와 부도들 가운데 일본 영토
를 선으로 확실하게 표시한 흔
치 않은 지도로 판단된다. 이
들 「アジア」 지도를 보면, 일본
의 국경선 안에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독도가 제외되어 있
다. 두 개의 「アジア」 지도는 전자에 비해 후자에 산맥이 육지부분에 추가로
표시되고 블라디보스토크 등 몇 군데 지명의 글자 위치가 다를 뿐 국경선은
동일하다. 독도가 확실하게 일본 영토에서 제외된 국경선 표시는 후반부에
실린 백지도 판에 더욱 선명하게 그어져 있다.20)
19) 山上萬次郎, ?中等教科用地圖 外國部?, 大日本圖書, 1902; ?女子教科用地圖 外國
之部? 上, 大日本圖書, 1903.
20) 야마가미가 이 지도에서 일본의 영토 편입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정확하게 국경
20 한국근현대사연구 2016년 겨울호 제79집
따라서 1905년 2월 이전 야마가미는 독도를 분명하게 일본 영토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있다. 또 이를 근거로 앞에서 논의한 「隱岐圖幅地質説明書」
의 ‘隱岐의 小島’ ‘약 180개’에 독도는 포함되지도 않고 일본의 영토도 아니었다
고 야마가미가 파악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그는 太政官 正院의 ?日本地誌提
要?에 기술된 ‘竹島’와 ‘松島’, 지리국의 「大日本帝國略圖」와 자신의 ?新撰日本
地理? 내 「大日本帝國略圖」에 표시된 ‘竹島’와 ‘松島’ 역시 일본 영토로 인식하
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즉, 그가 「太政官指令」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에 의거해 공식적으로 확정된 ‘竹島’와 그 ‘外 一島’인
‘松島’는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그의
독도 인식은 다음 절에서 살펴볼 농상무성의 「일본제국전도」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
또한 야마가미가 1905년 2월 이전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점은 그 직후인 1906년 1월에 저술한 ?最近統合帝國地圖?(1906년 3월 15일
문부성검정제)의 「日本全圖」에 처음으로 ‘竹島(리안코-루토岩)’라고 기재한 사
실로도 확인된다.21) 이 내용은 일본의 한국병탄 직전인 1901년 1월에 발행된
訂正6판에도 동일하다가,22) 1915년 12월에 간행된 訂正14판의 「대일본제국행
정구획」에는 ‘鬱陵島(慶尙北道)와 ‘竹島(島根)’으로 적고 그 사이에 국경선이
그려져 있었다.23) 이에 대해 島根縣 總務部 總務課는 독도가 1915년판을 근거로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이 비밀리에 이뤄져 일본국민 속에서도 널리 인지되지
않았으며 1952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이전까지 일본이 독도를 교과서에 거
의 게재하지 않고 관심도 없었다는 한국 측의 주장을 반박하는 결정적인 자료로
제시하였다.24)
선을 그었는가는 이즈반도의 최남단에 있는 소후간(孀婦岩)을 일본 영토에서 제
외한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21) 山上萬次郎, ?最近統合帝國地圖?, 大日本圖書株式會社, 1906.
22) 山上萬次郎, ?最近統合帝國地圖?, 大日本圖書株式會社, 1910.1(訂正6판).
23) 山上萬次郎, ?最近統合帝國地圖?, 大日本圖書株式會社, 1915.12(訂正14판).
24) 島根縣總務部總務課, 「文部省検定済教科書?最近統合帝国地圖?(明治39年及び大
正4年 発行)における竹島の記載」, 2011. 1. 27. 記者會見
(http://www3.pref.shimane.jp/houdou/files/2E81A1BA-F426-4E79-B120-0B91
일본 농상무성의 「日本帝國全圖」 편찬과 독도 인식 21
또한 경상북도 출연기관인 재단법인 독도재단이 1908년 일본 문부성의 「中
國地方」(1908), 大阪每日新聞社의 「日本交通分縣地圖」(1925), 和樂路屋 출판사
의 「島根縣地圖」(1938), 日本地圖株式會社의 「島根縣地圖」(1951) 등 1905년 이
후 일본에서 제작한 시마네현 지도 4점을 공개하면서 지도를 발간한 기관이
일본 중앙부처, 유력 신문사, 출판사 등인 점으로 미뤄 시마네현 고시가 일본
국내에서는 공식적으로 공포된 적이 없는 단순히 국제사회를 향한 선전용이었
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히자,25) 일본학자 후나스기 리키노부(船杉力修)는 야마
가미의 ?最近統合帝國地圖?(1906, 1915)를 근거로 “竹島가 日本領으로 기재되
어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26)
물론 독도재단의 주장은 독도가 오키 혹은 시마네현 관할임을 표시한 지도
역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무리한 주장이었다. 그러나 후나스기의 주장
역시 1906년판 ?最近統合帝國地圖?의 「日本全圖」에는 단지 이름만 기재되었을
뿐 일본 영토를 표시하는 빨간색이 칠해져 있지 않은 만큼, 근거가 빈약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일본 측은 바로 ?最近統合帝國地圖?의 저자인
야마가미가 1902년에 이미 ?中等教科用地圖 外國部?의 「アジア」에서 명확하게
독도를 일본의 국경선 안에 포함시키지 않은 사실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따라서 1906년과 그 이후에 간행된 ?最近統合帝國地圖?의 내용은 시마네현
고시 제40호가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졌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기보다
오히려 한국 영토인 독도에 대한 일본의 불법적인 강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57AFB18C.pdf#search='%E6%9C%80%E8%BF%91%E7%B5%B1%E5%9
0%88%E5%B8%9D%E5%9C%8B%E5%9C%B0%E5%9B%B3’).
25) ≪연합뉴스≫, 2016년 4월 18일자, 「1905년 이후 일본 지도에도 독도 없다…독
도는 한국땅」(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4/18/0200000000
AKR 20160418134400053.HTML?input=1179m); ≪경북신문≫ 2016년 4월
19일자, 「1905년 이후 日 시마네현 지도에 ‘독도’ 없다」.
26) 「2016年4月18日付韓国·聯合ニュース報道に対する反駁」, http://www.ssri-j.com
/takeshima-j-index.html.
22 한국근현대사연구 2016년 겨울호 제79집
<그림 2> 「日本帝國全圖」(1888)
4. 농상무성 지질조사소의 「日本帝國全圖」(1888, 1892, 1897)
발행·개정과 독도 인식
농상무성은 일본 전국을 대상으로 예찰측량으로 「예찰지형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1888년에 「日本帝國全圖」를 간행한 뒤 1892년에 訂正新刊판을 내놓
았고, 1897년에는 이전 판을 전면 개정하여 「日本帝國全圖」를 간행하였다.
1888년판은 地質局, 1892년판과 1897년판은 지질조사소의 명의였다. 이 지도
의 주기에는 편찬 과정과 근거자료 및 그 특징과 의의에 대해 서술해 두었는데,
1888년판과 1892년판의 내용은 동일하다.
먼저, 농상무성 지질국은 1888년에 「일본제국전도」를 간행하면서 대단한
자부심을 느꼈던 듯하다. 이 전도의 주기를 살펴보면, 당시까지 간행된 수많은
지도들의 단점을 지적하고, 두세 개의 실측지도가 세상에 나왔지만 오직 한
局部에 불과해서 전국을 살펴볼 수 없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이
전도를 간행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어 지질국은 이 지도를 편제한 순서를
「注記」에 다음과 같이 서술해두었다.
먼저 全幅의 廣輪을 정하고
경위선을 그렸으며, 해군성 수로
국 측정의 경위도와 참모본부
측량국의 삼각측량점으로 海·港·
山 위치 등의 요점을 두었다. 다
음으로 (지질)국원의 지형도, 참
모본부의 지형측량 및 내무성
지리국 토목국의 局部 측량 등
에 따라 세부의 지형을 補塡하
였다. 또 각 항의 彎狀, 해안의
蜿線은 해군성 수로국 간행의
해도에 근거하였다. 기타 세부는
府縣管內圖로 보충하였다.
일본 농상무성의 「日本帝國全圖」 편찬과 독도 인식 23
이와 같이 舊를 버리고 新을 採함으로써 본방 全土의 형상도 전일과 보기(觀)
를 달리 하는 바가 있다. 특히 세부의 各物에 이르러서는 旣刊의 것과 同視해서
는 안 된다. 아마도 이 圖로 實測日本全圖의 嚆矢로 삼아도 감히 不可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業에는 成否가 있고, 時에는 전후가 있다. 본도 편성
에 즈음해서 삼각측량·지형측량 모두 아직 전국에 두루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
므로 타일에 그 완전을 얻으려면 아직 訂正할 바가 있을 것이다.
요컨대, 지질국은 「일본제국전도」를 ‘實測日本全圖의 嚆矢’로 삼아도 이의가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평가할 만큼 기존의 지도들과 차원을 달리할 수준의
정확함과 정밀도를 장점으로 내세웠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전도를 편찬하는 데 사용된 주요 자료로 지질국의 지형도, 참모본부와 내무
성 지리국의 측량, 府縣管內圖, 그리고 수로국의 해도 등을 열거했다는 것이다.
이 전도에는 본토는 물론이고 北海道·千島諸島·小笠原島羣島·大隈 및 琉球諸島
등 일본의 전 영토와 울릉도·독도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지질국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1888년판 「일본제국전도」는 삼각측량·
지형측량 모두 아직 전국에 두루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훗날 더욱 완전을
기하기 위해 訂正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지질국의 후신인 지질조사소는
1892년에 「訂正新刊 日本帝國全圖」를 내놓았는데, 왼쪽 하단 난외에 “明治
24(1891)년 11월 電信 및 鐵道線路, 기타 세밀한 조사·訂正을 가한다”라고 쓰여
있다. 「注記」의 내용은 1888년판과 동일하다.
이어 지질조사소는 1894년 예찰지형도가 완성되자 이를 토대로 1897년에
더욱 정밀성과 정확성을 더한 「대일본제국전도」를 발행했는데, 「注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明治 21년(1888) 전 지질국에서 비례척 160만분의 1의 일본제국전도를 발간
하였다. 그리하여 이에 기초해서 전국지질도를 간행하려는 때를 맞이해서 該圖
의 비례척이 작고, 또 편제 당시 실측 재료가 아직 충분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뜻하지 않게 臺灣 島嶼가 우리 판도로 돌아옴으로써 다시 增補·訂正을 가해 비
례척 백만분의 1(臺灣·琉球·千島 등은 2백만분의 1)로 하고, 이에 이를 印行한다.
24 한국근현대사연구 2016년 겨울호 제79집
그 제조방법은 旣刊의 것과 동일하므로 이를 부연하지 않는다. 대개 本圖 소재
의 지명은 실제 사용하는 데 편리하도록 오로지 지방의 遍稱을 襲用한다. …
전국지질도를 간행하기 위해 비례척이 작고 실측 재료가 불충분했던 종전
지도의 단점을 보완하고 새로 일본 영토로 편입된 臺灣을 추가해서 종전의
160만분의 1보다 자세한 백만분의 1인 「대일본제국전도」를 편찬했다는 것이다.
또 제조방법은 종전과 동일하며, 지명은 ‘오로지 지방에서 널리 부르는 명칭’을
그대로 쓴다는 점도 밝혔다. 아울러 지도의 왼쪽 상단에는 한국과 일본, 중국의
일부를 포함해서 전체의 위치를 포함한 「高低深淺圖」(500만분의 1)가 새로
추가되었다. 이 지도는 그 정확성과 상세함으로 말미암아 이후 지질전도를
만드는 데 기본 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일반에게도 값싸게 판매됨으로써 널리
활용되었다.27)
그렇다면, 「일본제국전도」 1888년판과 1892년판, 그리고 1897년판 「대일본
제국전도」의 울릉도와 독도의 형태와 지명 표기는 어떻게 변화했으며, 그 의미
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 3종류의 「대일본제국전도」을 기본으로 삼되, 지질조
사소에서 간행한 각종 지형도와 지질도 등을 비교하면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먼저, 「日本帝國全圖」는 지형도답게 직접 측량한 등고선과 산들이 고등색으
로 표시되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얼핏 보면 일본 영토는 고등색인 반면 울릉
도·독도는 조선 영토와 동일한 살색으로 표시되어 있어서 일본 영토에 속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이 전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크기가 작은 일본의 섬들
중에는 울릉도·독도와 같이 살색으로 표시된 것들도 있다. 따라서 채색 여부만
으로 울릉도·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이와 관련하
여 1897년판 「대일본제국전도」를 바탕으로 1899년부터 제작된 「大日本帝國地
質全圖」를 살펴보면, 울릉도·독도는 여전히 조선과 동일한 살색으로 시종일관
채색된 반면, 「대일본제국전도」에서 살색으로 표시된 일본의 작은 섬들은 모두
현무암 등 각종 지질의 형태에 따라 채색되어 있다.
또한 「일본제국전도」에는 섬의 크기로 볼 때 울릉도는 물론이고 서도와
27) 「大日本帝國全圖成る」, ≪地學雜誌≫ 11-1, 1899, 76~78쪽.
일본 농상무성의 「日本帝國全圖」 편찬과 독도 인식 25
동도로 구성된 독도보다 작은 일본 섬들 중에 간단한 형태로 산의 형태가
표시된 것도 있다. 그러나 성인봉이 있는 울릉도와 산봉우리로 이루어진 독도에
고저를 나타내는 표시가 없다. 따라서 「대일본제국전도」와 「대일본제국지질전
도」에 울릉도·독도가 일관되게 산 표시도 없이 살색으로 채색된 이유는 이들
두 섬이 애초부터 지질조사소의 측량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
다. 이러한 사실은 지질조사소가 울릉도·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음
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준다고 여겨진다.
다음, 「일본제국전도」와 「대일본제국전도」에는 모두 울릉도와 독도의 이름
이 ‘松島’와 ‘오리우츠瀨-메네라이瀨’로 각각 적혀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松島’와 ‘오리우츠瀨-메네라이瀨’는 일본 수로국이 간행한 「朝鮮東海岸圖」에
기재된 울릉도와 독도의 명칭이다. 수로국(이하 편의상 수로부로 통칭)은 1875
년 러시아의 해도 등을 참고로 「조선동해안도」를 제작하면서 울릉도를 ‘다제레
타도’[Dagelet island]로, 독도를 러시아명인 ‘오리우츠초’[Оливуца, Olivutsa]
와 ‘메네라이초’‘[Менелай, Menelai]로 각각 표기하였다. 그 뒤 수로부는 1878
년과 1880년 아마기함(天城艦)의 측량성과를 반영해서 1880대 후반에는 「조선
동해안도」의 小改正판을 발간했는데, 울릉도를 ‘다제레타도’에서 ‘松島’로 바
꾸었지만 독도는 ‘오리우츠초’와 ‘메네라이초’의 이름을 그대로 적어 두었다.28)
따라서 「대일본제국전도」의 울릉도·독도 명칭은 「조선동해안도」의 것을 채용
했음을 알 수 있다. 단 독도의 명칭이 표기된 위치만 세로에서 가로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는 해안 등 바다에 관련된 사항은 ‘수로국의 해도’에 근거한다는
주기의 편찬 방침과도 일치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1897년판 「대일본제국전도」에도 여전히 울릉
도·독도 명칭이 ‘松島’와 ‘오리우츠뢰’·‘메네라이뢰’로 표기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조선동해안도」는 1893년 10월에 대개정이 이뤄지면서 「朝鮮東岸 附伯
徳大帝灣」(이하 「조선동안」)로 그 명칭이 바뀌었으며, 울릉도와 독도는 ‘鬱陵島
(松島)’와 ‘리안코루도암(リアンコルド岩’)으로 각각 표기되었다. 또 「조선동안」
28) 한철호, 「일본 수로부의 「조선동해안도」(1875) 간행·개정 및 활용과 독도 인식」 ?‘울릉제도(鬱陵諸島)’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전망?(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학술
심포지엄 발표문), 2014.
26 한국근현대사연구 2016년 겨울호 제79집
에 이어 1896년에 간행된 「朝鮮全岸」에도 역시 울릉도와 독도는 ‘鬱陵島(松島)’
와 ‘리안코루도암으로 각각 적혀 있다. 따라서 「대일본제국전도」 1888년과
1892년판에 울릉도·독도가 「조선동해안도」의 명칭인 ‘松島’와 ‘오리우츠초’·
‘메네라이초’로 표기된 것은 수긍이 가지만, 1897년판에서도 「조선동해안도」
의 명칭이 그대로 적힌 것은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러한 의구심은 1897년 이전에 간행되었던 수로부 해도의 울릉도·독도
표기를 보면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수로부는 1888년 지질조사소의 「일본제
국전도」 간행 이전에 이미 울릉도와 독도의 존재와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명칭을 鬱陵島(松島)와 리안코루도암으로 각각 통일해서 표기해왔기 때문이
다. 예컨대, 수로부는 1878년 「日本海岸全圖」(해도번호 95)에 울릉도를 ‘松島’
로 적었지만, 그 후 「日本總部 附朝鮮及其附近露清海岸」(해도번호 128, 초판
1884, 개정1891), 「世界全圖」(해도번호 77, 1887), 「日本海岸全圖」의 대개정판
인 「日本本洲九州及四國 附朝鮮」(해도번호 95, 1891) 등에는 모두 「조선동안」
이나 「조선전안」과 마찬가지로 울릉도·독도를 ‘鬱陵島(松島)’와 ‘리안코-루도
암’으로 표기하였다.
그럼에도 지질조사소는 수로부 해도에서 사실상 확정된 ‘鬱陵島(松島)’와
‘리안코루도암’ 명칭을 적지 않았다. 심지어 1899년에 발간된 「대일본제국질전
도」에서도 ‘松島’와 ‘오리우츠뢰’·‘메네라이뢰’로 여전히 표기되었다. 지질조
사소는 1899년 영문판 「대일본제국전도(TOPOGRAPHICAL MAP of the
JAPANESE EMPIRE)」에서야 비로소 울릉도와 독도를 ‘Matsushima(Dagelet)’와
‘Liancourt Rks(Hornet Is)’로 각각 달리 표기하였다. 울릉도는 이러한 명칭은
1902년에 발간된 영문판 「대일본제국지질전도(GEOLOGICAL MAP of the
JAPANESE EMPIRE)」에도 표기되었다. 그나마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한 뒤에 발행된 「日本帝國及韓半島地質圖」(1910)·「대일본제국지
질전도」(1910)·「대일본제국광산도」(1911)에는 울릉도만 ‘松島MATSUSHIMA’
로 표기되었을 뿐 독도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 울릉도는 「대일본제국지질전
도」(1926)에 ‘鬱陵島UTSURYŌTŌ’로 표기되었지만 독도의 이름은 역시 빠져
있다.
이처럼 수로부 해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鬱陵島(松島)’와 ‘리안코루도암’
일본 농상무성의 「日本帝國全圖」 편찬과 독도 인식 27
으로 일반적으로 적혀 있었지만, 지질조사소는 「일본제국전도」에 지명은 “오로
지 지방에서 널리 부르는 명칭을 그대로 쓴다”는 주기의 편찬 방침에 어긋나게
당시 독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역인 시마네현 혹은 오키지방에서 널리
부르는 ‘리안코루도암’ 혹은 ‘랸코도’가 아니라 ‘오리우츠뢰’·‘메네라이뢰’로
표기하였다. 이와 달리 지질조사소는 울릉도와 독도를 제외한 일본의 지명에
관해서는 이 방침에 입각해서 정확하게 표기했다고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1897년판 「대일본제국전도」에 관해 당시 지리 및 지질분야의 최고학술단체인
東京地學協會는 “주요한 지명은 선택에 선택을 가해서 기입했”다든가 “지명
선택이 지도편성에 필요함은 실로 제도가라면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바”라면
서 이 전도가 “오래도록 표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던 것이다.29)
그렇다면 과연 지질조사소는 울릉도, 특히 독도의 지명에 대해 「일본제국전
도」의 편찬 방침에 어긋나게 ‘오리우츠뢰’·‘메네라이뢰’로 표기했다고 볼 수
있을까? 필자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질조사소는 일본의 지명에 대해
서는 지명 편찬 방침에 충실하게 따라 당시 최고의 수준에 도달하였다고 판단된
다. 이는 東京地學協會의 평가로도 입증될 수 있다. 그렇다면 지질조사소는
왜 울릉도, 특히 독도의 지명에 대해 편찬 방침에 어긋나게 ‘오리우츠뢰’·‘메네
라이뢰’로 표기하였을까? 아마도 그 이유는 지질조사소가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이럴 경우 지질조사소는
지명 표기에서 편찬 방침을 잘 지킨 셈이 된다. 그러나 지질조사소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명 표기 방침에 구애받지 않거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지질조사소는 독도에 관해서 「日本總部
附朝鮮及其附近露清海岸」 등 일본 중심의 해도보다 「조선동해안도」 등 조선
중심의 해도를 기준으로 삼아 「일본제국전도」를 1888년에 간행한 뒤 두 차례나
더 개정하면서도 「조선동해안도」의 독도 명칭인 ‘오리우츠뢰’·‘메네라이뢰’로
표기했다고 판단된다.
이와 같이 지질조사소가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편찬
방침에 따르지 않고 ‘오리우츠뢰’·‘메네라이뢰’로 표기했다는 점은 그 근거가
29) 「大日本帝國全圖成る」, 77쪽.
28 한국근현대사연구 2016년 겨울호 제79집
되었던 「조선동해안도」와 그에 짝하는 ?환영수로지?·?조선수로지? 등에 반영
된 수로부의 독도 인식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일본 수로부는 조선의 연안
을 측량하고 러시아와 영국의 해도 등을 참고해서 1875년에 「조선동해안도」를
간행하고 1876년 이후 여러 차례 개정했으며, 1893년에는 이를 대정한 「조선동
안」을 간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울릉도는 다즐레도에서 ‘松島’를 거쳐 ‘鬱陵島
(松島)’로, 독도는 올리부차초·메넬라이초에서 ‘리안코-루토쿠르암’으로 각각
표기되었다. 이처럼 수로부가 개정을 거듭하면서도 독도를 「조선동해안도」와
「조선동안」에 모두 포함시킨 것은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식·인정했다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조선동안」은 1897년부터 발행되지 않다가 1899년 2월에 해도번호 54호로
「木浦泊地」가 신간된 점으로 보아 더 이상 간행되지 않았다. 「조선동안」이
폐기된 이유는 이보다 훨씬 자세할 뿐 아니라 조선의 전 해안을 대상으로
삼은 「조선전안」이 1896년에 간행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수로부
가 「조선동해안도」와 「조선동안」에 모두 독도를 삭제하지 않고 포함시킨 것은
수로부가 1905년 2월까지 독도를 일본 영토가 아니라 한국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30)
또한 수로부는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 조선해안을 측량한 성과와 영국·러시
아해도를 참고로 1882년에 「조선전안」을 간행된 뒤 「조선동해안도」 등을 참고
로 1896년과 1906년에 大改正版을 제작하였다. 1882년판 「조선전안」은 개항장
후보지를 조사하는 데 역점을 두고 제작되었기 때문에 두만강 일대의 함경북도
일부와 울릉도‧독도가 수록되지 않았지만, 1896년판에는 경위도를 확대하면서
까지 독도를 포함시켰다가 1906년판에는 독도 강점 사실을 반영해 독도를
제외시켰다. 이처럼 수로부가 「조선전안」 1896년판에 경도를 확장하면서까지
독도(‘리안코-루토암’)를 포함시킨 이유는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식했기 때문이
다.
아울러 수로부는 측량성과를 바탕으로 해도와 짝하는 수로지를 편찬했는데,
독도 강점 이전에 발행된 ?환영수로지?와 ?조선수로지?에 모두 독도를 기재하
30) 한철호, 「일본 수로부의 「조선동해안도」(1875) 간행·개정 및 활용과 독도 인식」.
일본 농상무성의 「日本帝國全圖」 편찬과 독도 인식 29
였고, 독도 항목에는 「조선동해안도」·「조선동안」과 「조선전안」을 기본으로 삼
고 일본해도와 영국해도를 참고해도로 덧붙였다. 독도가 수록된 「조선동해안
도」·「조선동안」과 「조선전안」, 그리고 ?조선수로지?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
면, 자연스럽게 독도가 조선의 동해안에 소속된 섬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조선전안」과 수로지는 일반인에게도 판매됨으로써 누구라도
쉽게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조선해안으로 출어하는 일본어민이나 어업관계자들에
게 항해의 편리와 안전에 관계되는 「조선전안」 등을 비롯한 해도와 수로지는
필수품이었다. 이처럼 해도와 수로지가 널리 배포·유통되면서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사실도 자연스럽게 확산된 결과, 일본의 독도 강점에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던 나카이도 당연히 「조선전안」 등의 해도와 ?조선수로지?를 보고 독도
를 한국령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동해안도」·「조선전안」 등의 해도
와 ?조선수로지?를 보면,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인식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31) 이러한 독도 인식은 지질조사소 역시 예외
는 아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질조사소가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점은 앞
장에서 살펴본 야마가미의 독도 인식에 의해서도 입증될 수 있다. 야마가미는
오키를 직접 측량하고 오키지질도와 그에 대한 설명서를 작성했던 장본인이었
던 만큼,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근무했던 지질조사소 간행의 「일본제국전도」
등 각종 지형도와 지질도에 대해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파악·참고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일본제국전도」 등은 당시 ‘실측일본전도의 효시’로 높이 평가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용뿐 아니라 교육용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東京地學
協會에서도 이 전도에 대해 “학교, 기타의 敎授 및 揭示用으로는 빠져서는
안 될 것”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32)
실제로 1895년 야즈 쇼에이(矢津昌永)는 중등학교 지리부도인 ?日本地圖?를
편찬하면서 「例言」에 “本圖는 지질국의 실측도, 일본제국전도를 기초로 삼아,
31) 한철호, 「일본 수로부의 「조선전안」 간행·개정 및 활용과 독도 인식」, ≪한국사연
구≫ 169, 2015.
32) 「大日本帝國全圖成る」, 77쪽.
30 한국근현대사연구 2016년 겨울호 제79집
특히 중등교육에 적합케 함을 목적으로 調製한다”고 밝혔다.33) 따라서 상식적
으로 판단하더라도 당대 최고의 지리교과서 집필자이자 지리·지질학자였던
야마가미가 「일본제국전도」와 「대일본제국전도」의 존재를 몰랐다거나 지리교
과서·부도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이를 외면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더군다나 야마가미는 수많은 지리교과서와 지리부도들 가운데 보기 드물게
지도상에서 일본의 국경선을 그려 넣었다. 이는 일본의 지리뿐 아니라 영토
편입의 역사에 정통하다는 자신감을 갖지 않고서는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야마가미는 일본의 지리·지질학계와 지리교과서계에서 권위를 인정받
고 있었기 때문에, 독도를 제외하고 일본의 국경선을 표시한 지리부도는 당연히
문부성의 검정을 통과할 수 있었다. 아울러 그가 얼마나 일본의 새로운 영토편
입 상황에 대해 민감하고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교과서가
일본의 독도 편입사실을 가장 빠르게 반영한 대표적인 교과서로 일본학자들도
꼽고 있는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는 역설적으로 야마가미뿐 아니라 일본의
문부성과 농상무성도 1905년 2월 이전에 독도를 결코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판단된다.
5. 맺음말
일본 농상무성은 외무성·해군성과 함께 1905년 2월 일본의 독도 강제 편입을
주도했으며, 농상무성 지질조사소는 육군성의 육지측량부와 해군성의 수로부
와 더불어 지도를 제작했던 전문기관이었다. 따라서 농상무성의 독도 인식은
일본 정부 차원에서 자행되었던 독도 무주지선점에 대한 허구성을 비판함과
동시에 독도가 한국 영토였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에
본고에서는 농상무성 지질조사소 편찬의 지형도·지질도·토성도 등을 발굴·분
석하고, 이를 토대로 농상무성의 독도 인식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는 본론에서
새롭게 밝힌 사실을 요약함으로써 맺음말로 삼고자 한다.
33) 矢津昌永 編, 「日本地圖例言」, ?日本地圖?, 丸善, 1895.
일본 농상무성의 「日本帝國全圖」 편찬과 독도 인식 31
첫째, 「대일본제국전도」는 1897년이 아니라 1888년에 「일본제국전도」로 처
음 간행되고 1892년에 개정되었다. 이 「일본제국전도」에는 일본 내의 작은
섬들 가운데 독도와 비슷하게 채색된 곳도 있기 때문에, 이 전도의 색깔만으로
는 독도의 소속 여부를 단정하기 어렵다. 이보다는 이 전도에 독도만큼 작은
일본의 섬들 가운데 간단한 형태로 산의 형태가 표시된 것도 있는 반면, 성인봉
이 있는 울릉도와 산봉우리로 이루어진 독도에 산을 나타내는 표시가 없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즉, 농상무성은 울릉도·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
기 때문에 애초부터 측량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그 결과 색깔뿐 아니라 산
표시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일본제국전도」와 「대일본제국전도」에는 모두 울릉도와 독도의 이름
이 ‘松島’와 ‘오리우츠뢰·메네라이뢰’로 각각 적힌 사실은 밝혀졌지만, 그 명칭
이 일본 수로부가 간행한 「조선동해안도」에 기재된 이름이라는 점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해안 등 바다에 관련된 사항은 수로부의 해도에 근거한다는 주기
의 편찬 방침과도 일치한다. 그런데 수로부가 간행한 「조선동해안도」·「조선동
안」·「조선전안」 등과 그에 짝하는 수로지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 영토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농상무성도 자연스럽게 그 인식을 수용했을 것이다.
셋째, 「일본제국전도」에 지명은 “오로지 지방에서 널리 부르는 명칭을 그대
로 쓴다”는 편찬 방침에 있지만, 이에 어긋나게 당시 독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역인 시마네현 혹은 오키지방에서 널리 부르는 ‘리안코루도암’ 혹은
‘랸코도’가 아니라 거의 쓰이지 않는 ‘오리우츠뢰’·‘메네라이뢰’로 표기되었다.
그 이유는 지질조사소가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명 표기 방침에 구애받지 않거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된 데 있다. 따라서 농상무
성 지질조사소가 일본 정부 차원에서 독도를 한국 영토로 시인한 시기는 1888년
으로 앞당겨져야 한다.
넷째, 농상무성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점은 야마가미가
집필한 ?中等教科用地圖 外國部?(1902)와 ?女子教科用地圖 外國之部 上?(1903)
에 똑같이 실린 「아시아(アジア)」 지도에 독도를 제외하고 일본의 국경선이
확실하게 표시된 사실로 입증된다. 야마가미는 농상무성에 근무하면서 오키를
직접 측량하고 「隱岐圖幅」과 「隱岐圖幅地質説明書」를 작성했던 만큼, 「일본제
32 한국근현대사연구 2016년 겨울호 제79집
국전도」 등에 대해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당대 최고의 지리교
과서 집필자이자 지리·지질학자였던 야마가미가 「일본제국전도」의 존재를 몰
랐다거나 지리교과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이를 외면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다섯째, 독도를 제외하고 일본의 국경선을 명확하게 표시한 야마가미의 지리
부도는 일본 문부성 역시 독도를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인정한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의 지리부도는 단순히 개인적인 견해를 제시한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문부성의 검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의 독도 강제 편입에 깊이 관여했
던 농상무성·해군성 등을 비롯해 문부성도, 즉 일본 정부 차원에서 독도를
일본 영토가 아니라 한국 영토라고 인식했음을 증명하는 근거라고 판단된다.
여섯째, 야마가미가 1906년에 저술한 지리부도는 일본학자들도 시마네현
고시 제40호에 근거해 일본의 독도 편입사실을 가장 빨리 반영한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힐 정도로, 그는 일본의 새로운 영토편입 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된 ?중등교과용지도 외국부?와 ?여자교과용지
도 외국지부 상?은 야마가미가 1905년 2월 이전까지 독도를 일본 영토가 아니라
고 판단한 사실을 명확하게 입증해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일본의 고유영토론
주장과 무주지선점의 허구성을 밝히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투고일: 11월 7일, 심사완료일: 12월 6일, 게재확정일: 1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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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한국근현대사연구 2016년 겨울호 제79집
The Japanese Ministry of Agriculture and Trade’s
Publication of the Topographical Map of the Japanese
Empire and its Recognition of Dokdo
Han, Cheol-ho
The Japanese Ministry of Agriculture and Trade (MAT) took the lead of Japan’s
occupation of Dokdo with Ministry of Foreign Affairs and Ministry of Navy in
1905. Then, the Imperial Geological Survey of Japan (IGSJ) that is one of affiliated
organizations in the MAT, published and revised the Topographical Map of the
Japanese Empire (TMJE : 1888, 1892, 1897). It did not have marks to show
Seongin-bong in Ulleungdo and mountaintops of Dokdo on the TMJE, in spite
of the fact that the others Japanese islands are marked with mountains and so
on. The MAT had not recognized Ulleungdo and Dokdo as Japanese territory
so that they were excluded from survey from the beginning. Therefore, the TMJE
did not have any mark with colors or signs of mountain for Ulleungdo and Dokdo.
There were written as Matsushima and Olivutsa Rocks/Menelai Rocks, being
based on the East Coast of Korea issued by the Japanese Hydrographic Office
(JHO), in the TMJE. Matsushima represents Ulleungdo and Olivutsa Rocks/Menelai
Rocks means Dokdo. Because JHO regarded Ulleungdo and Dokdo as Korean
territory, MAT accepted the JHO’s cognition about Ulleungdo and Dokdo without
any aversion. The face that there did not have a sign for ‘Liancourt Rocks’ or
‘Liancourt islands’ of which name was known well in Oki in those days, supports
to show that the IGSJ did not aware Ulleungdo and Dokdo as Japanese territory.
That The MAT did not consider Dokdo as Japanese territory is proved as
the face that Japanese border clearly excluded from Dokdo on the map, the Asia
in the Chuto-kyokayo-jizu, Gaikokubu (?中等教科用地圖 外國部?, 1902) and the
Joshi-kyokayo-jizu, Gaikokunobu, Jo (?女子教科用地圖 外國之部 上?, 1903)
written by Yamagami Manziro (山上萬次郎). Yamagami surveyed for himself Oki
일본 농상무성의 「日本帝國全圖」 편찬과 독도 인식 35
Keywords: Dokdo (Liancourt Rocks), Olivutsa Rocks, Menelai Rocks, Ulleungdo
(Matsushima), Oki, Japanese Ministry of Agriculture and Trade,
Imperial Geological Survey of Japan, Topographical Map of the
Japanese Empire, East Coast of Korea, Yamagami Manzi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