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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近代일본의 高句麗史硏究 -'滿鮮史’·'滿洲史’와 관련해서- /井上直樹(京都府立大學)



                             머 리 말

기원전1세기 압록강 중류역에서 발흥한 高句麗는 668年 당나라·신라의 연합군의 공격에 위해서 멸망했다. 약700년에 미친 그 역사 속에서는 曹魏·前燕에 의해 두 번에 걸쳐 王都가 함락되었다고 하는 위기적 상황을 맞았지만 서서히 그 세력을 확대시키고, 최성기인  5세기 전후에는 서북쪽으로는  遼河, 동북쪽으로는 牡丹江, 남쪽으로는 한반도 중·남부에 미친 거대한 지역을 영유하게 되었다. 그 것은 현재의 中華人民共和國,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大韓民國(이하 이 세 나라를 중국, 북한 , 한국이라 부르기로 함)에 해당하고 또 그 王都도 427년까지는 五女山城(遼寧省桓仁)·國內城(吉林省集安)으로 중국 동북지방에, 그 후에서는 平壤城(平壤)으로 북한에 해당한다. 따라서 현재의 국경을 역사지리적인 범위에서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 그 역사를 해명하려고 하는 틀에서는 그것이 맞아들아가지 않게 마련이다. 이 때문에 고구려사를 둘러싼 논의에서는 반드시 통일적인 견해가 제시되고 있는 것은 아니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고구려사 연구상에 있어서 하나의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그것은 현재의 정치적인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 역사관을 극복해서 새로운 역사상을 제시하는 결코 용이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고구려사 연구뿐만 아니라 근대역사학의 극복이라는 의미에서 역사학 전체의 과제라 생각되며, 이러한 의미에서 지속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해당 국가에서는 文獻·考古學 양쪽에서 연구가 진행되어 왔고, 다대한 성과가 발표되고 있다. 그 연구 성과들은 학계에 기여하는 것이 적지 않으므로,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고구려사 연구가 오늘날 옛 고구려의 영토를 자국의 일부로 한 국가에서만 진행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즉 고구려는 그 역사상 역대 중국왕조나 몽고 고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여러 민족, 또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백제나 신라뿐만이 아니라, 한반도와의 빈번한 교통이 있었음을 전제로 한다면 왜도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이 인정되며, 따라서 왜·일본의 사적전개와 관련하여 일본에서도 高句麗에 대한 적지 않은 연구가 축적되어 왔다.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은 고구려연구가 순연히 일본고대사와 관련한 문제로만 언급되어 왔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주지의 사실이지만,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근대화, 제국주의에의 길을 지향하고 청일(1894-95)·노일전쟁(1904-05)을 겪고 한반도를 침략·병합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대륙에도 진출했지만, 그것과 관련해서 해당지역의 연구도 심화되어 갔다. 이러한 근대 일본의 동양사학의 일익을 담당한 학문적 영역이 다름 아닌 고구려의 영역에 해당하며, 고구려사연구가 진전했던 것이다.
특히 吉林省集安에 우뚝 선 『廣開土王碑』는 고구려사람 자신들이 남긴 동시대 자료라는 점 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매개로 하여 그 사적전개와 밀접히 관련된 왜의 동향 그 자체를 밝히는 의미에서도 귀중한 금석자료로서 주목되어 왔다. 따라서 그 연구는 일본고대사와도 관련해서 활발하게 행해졌고 많은 성과를 거두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오랜 세월에 걸친 『廣開土王碑』연구의 성과는 일본에서의 고구려연구를 회고하는 의미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같은 연구의 동향에 대해서는 벌써 많은 논자가 지적하고 있으며, 지면상의 제한으로 향후의 과제로 돌리고자 한다.
오히려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고구려사연구가 그 자신의 사적전개를 해명하기 위해서 연구 되어 왔던 것과 더불어‘朝鮮史’‘滿洲史’‘滿蒙史’‘滿鮮史’ 의 일부로서 생각하면서 연구되어 왔고, 또한 그러한 사적세계 입론의 근거의 하나로서 위치지어져 연구되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근대일본의 동양사학에서 고구려사연구의 동향을 검토하는 것은 그 선행연구의 정리뿐만 아니라 고구려사연구를 포함한 근대일본의 東洋史學의 성격 그 자체까지 검증하는 것을 의미하며, 간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근대 일본의 고구려사연구 동향을 일본의 동양사학과 관련시켜 고찰하고자 한다.


                  1. 明治期의 高句麗史硏究
 
근대일본에서의 고구려사연구는 『廣開土王碑』연구에 위해서 그 단서가 열렸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廣開土王碑』가 고구려와 왜의 동향, 그 자체를 밝히기 위해 귀중한 동시대 자료였기 때문이다. 그 연구는 陸軍參謀本部의 酒 景信(사카와 카게아키)가 『廣開土王碑』의 拓本을 갖고 왔던 1883년부터 시작되었지만, 문헌사학에서는 1892年에 林泰輔『朝鮮史』, 坪井九馬「古朝鮮三國鼎立形勢考」, 1893年에 吉田東伍『日韓古史斷』등의 저작 및 제 논고가 발표되고 그 속에서 고구려사는 조선고대사의 한 분야로서 언급되었다. 또한 「朝鮮古碑考」에서 일찌기 『廣開土王碑』연구를 개시한 那珂通世도 그 다음 해에 「朝鮮古史考」를 집필하고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또한 일본의 동양사학의 창설자이고 많은 업적을 남겼던 白鳥庫吉도 조선사 연구에 착수하여 「朝鮮古傳說考」, 「朝鮮古代地名考」, 「朝鮮古代官名考」에서 고구려사의 제 문제에 대해서 고찰하면서 고구려사에 대한 본격적 연구인「高句麗の名稱に就て」를 발표했다. 白鳥는 「朝鮮古代地名考」에서 "高句麗는 闔族의 總領으로서 隱然宗國의 繼承者가 되었으므로 宗國扶餘의 祖先인 東明王을 옮겨 오로지 자기 나라의 선조라 정한 듯 하다. 선조를 최고의 시대에 두고 또 가장 神聖한 것으로 하려고 하는 것은 國家의 自負心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고구려는 부여가 먼저 멸망하고 자기 나라만 强盛하게 된 시기에 전 종족의 太祖 東明王을 자기 나라의 始祖로 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라고 하여 부여의 始祖東明이 고구려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 속에서 고구려의 시조가 되었던 것 등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일본 역사학회의 동향에 눈을 돌려 보면 1887년 東京帝國大學에 1879年에 일단 폐지된 적이 있었던 史學科가 다시 설치되어, 랑케의 지도를 받은 리스가 주임으로 초빙되고, 서구 제국에서 발달한 근대역사학이 도입되게 되었다. 이듬해인 1889年에서는 國史科가 증설, 史學會가 결성되고, 그 機關誌인 『史學會雜誌』(1-36號, 1892년 이후 『史學雜誌』로 개변)가 간행되었다. 그러한 일본 역사학회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1890년대 전반에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학자에 의해서 한국고대사, 고구려사에 관한 많은 논고가 제출된 것은 고구려사연구가 일본의 東洋史 중에서도 일찍이 관심이 모아진 학문 영역의 하나이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문헌사학만에 한정해서 살펴보면, 청일전쟁 이후 잠시 동안 고구려사의 논문은 거의 보이지 않게 되고 정체하게 되었다. 그 원인을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많은 연구가 행하여 졌던 『廣開土王碑』硏究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의 한국사·고구려사연구 성황의 배후에는 청일전쟁을 비롯한 한반도·대륙진출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2. 노일전쟁 이후의 고구려사연구

노일전쟁(1904-1905년)의 일본 승리에 의하여 일본에 의한 본격적인 한반도·대륙진출이 개시되었다. 포츠머스條約(1905년) 및 日淸滿洲善後條約(1905년)에 의해서 東淸鐵道의 寬城子(長春郊外)에서 旅順 間 및 그 支線, 부속한 모든 권리, 재산의 양도를 받고 1906년 南滿州鐵道會社(이하 滿鐵이라고 함)가 設立되었다. 이 滿鐵은 철도 및 撫順·煙臺 탄갱(炭坑)경영 등을 행하는 동시에 일본의 식민지정책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 초대 총재인 後藤新平는 滿州經營을 할 때 "文事的인  施設으로서 다른 나라의 침략에 대비해서 준비하고, 일단 위험이나 위기에 직면하면 武斷的인 행동을 지원할"과학적 조사 활동에 의한 '文事的 裝置'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그 식민지 통치철학에 의거해서 1907년 본사에 調査部를, 1908년에서는 東京에 東亞經濟調査局를 개설하였다. 나아가 고구려사 연구와 깊은 관계가 있는 滿鮮歷史地理調査部가 1908년 설치되었다. 
이 滿鮮歷史地理調査部는 白鳥庫吉가 總裁인 後藤를 설득한 결과이었지만, 그것은 白鳥庫吉의 다음과 같은 구상에 의거한 것이었다. 白鳥庫吉은 '南滿洲의 經濟的經營'이 일본에 의해서 착수되고 "朝鮮에 대한 보호와 개발의 임무"가 시작되면 "滿·韓地方에 관한 근본적인 연구를 하는 것"이 급무라고 생각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滿·韓經營에 관한 실제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다. 그는

 반도국이 우리나라에 대해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은 옛날과 오늘날이 다름 없이, 반도에서 風雲의 동요가 언제나 만주의 광야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만주도 곧 우리나라 國運의 消長에 관계하는 것이 옛날도 오늘날도 같은 것을 생각해보면, 그 동안의 민족적인 경쟁의 진상을 구명하고 현재의 형세에 유래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정치가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며, 사학의 이같은 상황은 정말로 유감스럽다. 
 
라고 말하고,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과 한반도는 고대부터 밀접한 관계가 있고 그 동향은 ‘滿州’에서 유래한다고 하였다. 그 때문에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純然한 學術的인 見地에 유래하는 것" 이라고 한다. 그는 서구제국에서 발표되는 동양학자의 우수한 업적에 대해서 "참으로 경탄할 만한" 것이 많다고 인정하면서도, 동양인이 동양의 학술연구에 대해서 "행하는 것이 적음을 생각하면 유감스럽다" 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했고 ‘滿洲 및 朝鮮’의 연구를 일본이 주도해 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단지 滿洲 및 朝鮮에 대해서는 그 땅이 먼 곳에 있음에 西人의 연구가 아직 미치지 못한 부분이 많은 듯 하다. 지금 그 땅은 다행히 우리 학계 앞에 개방되고 게다가 여기에 대한 우리나라 국민의 지리상 및 문화상의 관계는 그 연구에 특수한 편의를 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학자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이 지방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연구에 노력하고 그 성적을 올려 세계의 학술에 공헌하지 않음이 없도록 할 것이다. 
 
요컨대 白鳥에 의하면‘滿洲 및 朝鮮’연구는 그 학문적 향상과 일본의 식민지경영에 대응하고 여기에 학술적인 근거를 부여한 의미에서 필수의 연구·사업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滿鮮歷史地理調査部는 白鳥庫吉가 주임, 箭內 ·松井等·稻葉岩吉·瀨野馬熊가 部員으로 해서 시작해서 나중에 津田左右吉, 池內宏가 참여해서 연구가 행해졌다. 그 연구는 白鳥庫吉 자신이 

 나의 임무는 滿韓史의 연구에 있지만 역사의 기초는 地理에 있다. 그렇지만 이 지방의 사적 지리는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학자가 거의 돌아보지 않고 있다. 支那人 및 朝鮮人의 編著도 역시 신뢰할 만한 것이 적으므로 나는 먼저 이것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지리고증을 주안으로 한 것이었다. 그 속에서 高句麗에 관한 것은 白鳥庫吉·箭內 「漢代の朝鮮」, 稻葉岩吉「漢代の滿洲」, 箭內 「三國時代の滿洲」, 箭內 「晉代の滿洲」, 箭內 「南北朝時代の滿洲」, 松井等「隋唐二朝高句麗遠征の地理」, 津田左右吉「好太王征服地考」「長壽王征服地考」「高句麗戰役新羅進軍路」가 발표되고 이 같은 연구성과를 수록한 『滿洲歷史地理』(第1·2卷) , 『朝鮮歷史地理』(2卷) 가 1913년에 간행되었다. 그 중 『滿洲地理歷史』은 독일어로도 번역되어 세계의 학회에 널리 소개되었다.
그렇지만 1915년 이 調査室은 "만철 당국이 이러한 순수한 학술적인 조사를 급한 사업이 아니라고 오해" 하여, 영리를 목적으로 한 만철의 취지에는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지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연구 자체는 만철의 출판원조를 얻고 東京帝國大學文學部內에서 이어서 행해져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6권 (1915-1941년)이 간행되었다. 이러한 硏究는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세계에 자랑할 만한 업적" 이라고 이르러진 것이었다. 그 중에 고구려사와 관련된 것은 津田左右吉「三國史記高句麗紀の批判」 나 池內宏「高句麗討滅の役に於ける唐軍の行動」등이 있다.
이리하여 일본의 대륙진출에 따라 고구려사연구는 그 일익을 담당한 학문영역으로서 위치지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滿鮮歷史地理調査部, 『滿洲歷史地理』『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에서 볼 수 있듯 일본의 東洋史學에서는 ‘滿洲史’‘滿鮮史’ 라는 틀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坪井九馬三「古朝鮮三國鼎立形勢考1-4」, 吉田東伍『日韓古史斷』, 那珂通世「朝鮮古史考」, 白鳥庫吉「朝鮮の古傳說」「朝鮮古代地名考」白鳥庫吉「朝鮮古代官名考」등에서 볼 수 있듯, 일찍이‘朝鮮史’의 일부로서 의논해 왔던 高句麗史는 『滿洲歷史地理』『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등에서도 취급 바 있는 것처럼 ‘滿鮮史’‘滿洲史’의 맥락에서도 연구되어 가기에 이른다. 이하에서는 이 ‘滿鮮史’‘滿洲史’에 대해서 언급하고, 그것과 관련된 고구려사의 연구 상황을 보고자 한다.


                    3. '滿鮮史'와 高句麗硏究
 
 일본에서는‘滿鮮史’가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역사지리관점에 의거해서 제창, 사용하기 시작했는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1908년에는 滿鮮歷史地理調査部가 설치되었기 때문에 아마 이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그 때부터‘滿鮮史’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滿韓地方에 관한 근본적인 연구"인‘滿鮮史’는 白鳥庫吉 자신이 『滿洲歷史地理』의 서문에서 말한 바와 같이 "滿韓經營에 관한 실제적인 必要" 라는 현실의 정치적 과제에 대응하여 종래의 ‘朝鮮」뿐만 아니라‘滿洲’도 포괄하여 그 연구 영역을 확대시키는 것으로서 탄생했다.  그런 까닭에 그 학문은 성립 당초부터 일본의 대륙정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한편으로 旗田巍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朝鮮史’ 연구에서 ‘滿鮮史’ 연구로의 이행이란 반드시 명확한 것은 아니며, "너무나 안이하게 만선사의 연구가 시작되었"기 때문에‘滿鮮史’ 성립이후로도‘朝鮮史’, 또한‘滿洲史’가 병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狀況을 고구려사연구에 입각해서 살펴 보면, 조선총독부에 의해 편찬된 『朝鮮史』에 ‘滿鮮史’‘滿洲史’를 구성한 주요 민족의 하나이며 게다가 고구려의 유민을 다수 포괄하여 건국된 渤海는 여기에 수록되지 않은 것에 비해, 高句麗는 「新羅統一以前」에서 취급되고 있고, 1920년경 朝鮮史學會에서 출판된 『朝鮮史講座;一般史』에 수록된 小田省吾「朝鮮上世史」, 大原利武‘朝鮮地理歷史」도 역시 고구려사를 취급하고 있다. 나아가 池內宏「朝鮮の文化」도 「高句麗の文化」를 ‘朝鮮’문화의 하나로서 고구려사에 언급했다. 고구려사는‘朝鮮史’속에서 취급하면서도‘滿鮮史’를 구성한 하나로서 인식된 것이다. 여기에 근대일본의 동양사학의 朝鮮認識, ‘朝鮮史像’의 특색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滿鮮史’는 "동양사연구자, 조선사연구자의 중에서 이것에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었던" 상황이고  "아무 저항 없이 통용"되어, 앞서 지적한 滿鮮歷史地理調査部에서의 연구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동양사학의 중요한 연구부문으로서 위치되었다. 滿鮮歷史地理調査部에서 연구를 했고 나중에 東京帝國大學의 교수가 되었던 池內宏는 그 한반도·‘滿洲’지역의 歷史를 『滿鮮史硏究』(전5권)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東京帝國大學文學部東洋史學科의 강의명에서도 그것이 확인되고 1945년 이후에서도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그러한 ‘滿鮮史’ 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1945년 이후 몇 가지 의견이 제출되어 왔고, 그들의 지적은 중요하며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그들의 견해를 수긍하면서도, 일단 근대 일본의 동양사학 연구에서 주장된 논리·논의를 소개하고, 거기에서 주장된 ‘滿鮮史’ 의 틀을 제시하면서 주로 그것과 고구려사 연구에 대해서 검토하고자 한다.
 이 ‘滿鮮史’ 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너무나 안이하게" 그 연구가 시작되었지만 이것을 적극적으로 이론화하려고 했던 사람은 바로 稻葉岩吉(號;君山)이었다. 稻葉岩吉은  1897년에 一橋外國語學校에서 수학한 후, 중국에 유학하고 청일전쟁에 종군(陸軍通譯)하였으며, 滿鮮歷史地理調査部가 설립 직후부터 그 스탭(Staff)이 되어 연구에 종사했다. 그 후는 陸軍大學校·山口高等商業學校 敎官을 거쳐 1922년부터 朝鮮史編纂會委員이 되고 1925년 朝鮮史編修會의 개설과 함께 朝鮮總督府 修史官에 임명되고 1937년 建國大學 敎授가 되고 長春에서 죽었다. 그는 ‘滿洲史’·淸朝史·‘中國現代史’·‘朝鮮史’에 대한 많은 저서·논문을 발표하였고, 그 연구는 "현실의 문제에 주목해서 사론을 展開하는 것에 정통했다" 라고 평가되었다. 그 중에서도 그가 처음에 ‘滿鮮不可分’이라는 제목으로 ‘滿鮮史’ 을 논의한 것은 「滿鮮不可分の史的考察」이다. 이 논문은 종래 그의 ‘滿鮮史’ 의 성격을 고찰하기 위해 첫 번째로 검토되어 왔던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鴨綠·豆滿의 두 강이 滿鮮 國界가 됨에 얼마나 충분하지 않았던가 하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고찰해보면 이루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역사에서 보면 오늘날과 같은 지리적인 관계야말로 차라리 없는 것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이라고 말하고 ‘滿鮮不可分’의 논점으로서 아래와 같은 세 가지를 지적하였다. 첫 번째는 민족적인 문제이다. 즉 古代에서 李朝에 이른 많은 王家가‘滿洲系’혹은‘北方支那系’이며, 그들은 ‘대륙의 실패자」이었다. 두 번째는 정치적인 문제로서 燕·秦·漢·高句麗·唐·元 등 모두 鴨綠江을 넘어가서‘滿洲’ 와 한반도의 일부를 지배해왔고 鴨綠江·豆滿江은 국경으로서 기능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高句麗 같은 경우에는 王都를 보호한 險隘이기도 했다. 청나라는 "인위적으로 交錯시키지 않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것은 예외에 속한다고 한다. 세 번째는 경제적인 문제이다. 그는 鴨綠江·豆滿江의 二江을 국경으로 하고 鴨綠江·豆滿江의 二江의 谷地를 중간 지대로 하여 무인 지대라고 하는 것은 청나라에 유래한 요구이며, 조선 쪽은 大國 청나라의 앞에서 부득이하게 동의했던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조선사람이‘滿洲’에 가서 天産物을 채취하고 농업을 하는 것 등, 여기에서는 경제의 상호의존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滿鮮不可分論’을 더욱 구체적으로 논의한 것은, 1923년 9월부터 1924년 11월에 걸쳐서 朝鮮史學會가 매달 한번 會員에게 반포한 講義錄에 稻葉가 집필한 「朝鮮民族史」이다. 여기에서 그는 먼저 東胡系 민족이고 백두산 방면에 나타나는 민족으로서 夫餘·高句麗·渤海·金(女眞)·淸(滿洲)를 지적하고 

 이들은 滿洲의 上下三千年에 걸쳐서 일어나고 멸망해서 興亡을 되풀이하고, 그 중에서 어떤 것은 南下하고 支那의 北半을 점령하고, 어떤 것은 거대한 支那帝國의 영토를 구성한 대표적인 民族이었지만,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 출발점이 하나도 ‘亡人’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즉 대륙의 실패, 아니면 그것에 유사한 역사적인 연유의 소유자에 다름 아니다.…이러한 의미에서 半島의 原住民을 고찰할 때는 대략을 판단할 수 있게 마련이다. 즉 그 주가 되는 것은 대륙의 실패자가 長白山彙를 통해서 와서 점차 南下했던 것이 틀림없다. …조선의 古民族은 그들의 系統에 속하며, 해당 민족의 혈관에 신선하고 문화적인 原子를 주입한 것은 漢民族 및 東胡系의 민족이었다. 그들의 여러 점을 종합해보면 半島의 民族이나 社會를 고래로 單一民族로 이루어졌던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사실에서 떨어진 하나의 전설이라고 밖에 받아 들 수 없다.
 
라하고 해서 '朝鮮의 古民族' 은 '대륙의 실패'에 유래하였으며, 조선민족을 고대부터 단일민족으로 보는 것이 "사실에서 떨어진 하나의 전설이라고 밖에 받아 들 수 없다" 라고 부정함으로써, 그 민족의 흥망이 대륙의 동향과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었다고 한다. 더욱 아래와 같이 말하고  ‘滿鮮’이 不可分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半島와 半島의 주위에 있는 민족관계를 약술해보면 대개 이와 같은 경과를 얻게 되었지만 대세에서 판단해서 半島는 滿蒙의 延長이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滿蒙 방면에 근거를 갖고 있었던 민족은 어떤 기회를 이용해서 南遷해서 여기에 半島의 樂園을 찾아냈다고 판단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위에서 그는 

 朝鮮는 滿洲의 一部를 포용해야 그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滿洲를 우리가 스스로 합병하지 아니면  滿洲가 스스로 와서 朝鮮을 침략하고 그 一部分을 합병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는 형세에 이른다.

라고 말한다. 稻葉에 의하면 ‘朝鮮’가‘滿洲’와 일체화한 것이 ‘조선」의 "힘을 발휘"시키는 것이며 ‘조선」의 발전을 위해서는‘滿洲’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것에 대해서는‘滿洲’,‘朝鮮’사이에 이러한 측면이 있었던 것을 일단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전체의 일부를 일부러 강조한 점이 강하고, 게다가 이 ‘滿鮮不可分論’는 삼일운동을 계기로 해서 고양한 단군 이래의‘朝鮮史’의 유구성·독자성·자랑스러운 전통에 의거한 민족적인 의식을 억제하기 위해서 집필·제창되었다고 평가되었다. 사실은 稻葉의 주장내용이나 그것이 발표된 시기를 보면 그러한 지적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稻葉 자신의 한반도 지배정책을 고려하면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면 여기에서는 그것을 포괄하면서도 다른 시점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稻葉은 노일전쟁이 끝난 후인 1907년에 「韓半島の保障と遼東半島」(上下)를 집필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그는  한반도진출에 기반을 쌓았던 일본이 "정말로 반도의 발전을 도와주고 그 독립의 광휘(光輝)를 내걸려" 하는 경우에는 요동반도를 지배하는 "적극적 보장의 경영"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는 "무릇 한반도는 요동반도의 形勢를 얻어야 독립을 볼 수 있고, 요동반도는 요하 상류의 땅을 얻어야 그 세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은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당나라의 교전에서 증명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吾輩[稻葉;井上]이 말하는 반도 적극 보장"을 위해서는 "半島의 세력에 의거해서 만주를 통괄"하여 "滿韓一統의 經營"을 해야한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半島萬丈의 光輝를 내걸었던" 고구려의 "歷史에 배울 부분이 많은 바를 본"다라고 주장한다. 이어서 

 고래로 半島의 勢力으로서 北進했던 것은 오랫동안 단 하나 高句麗王國가 있는 뿐.  王國은 遼東半島를 確守하고 韓半島의 존립을 보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半島는 우리의 보호가 되고 다시 여기에 半島의 세력을 北進시키는 기회를 보기에 이르렀다. 半島의 오늘은 아직 內地의 정비에 바쁘고 아직 여력을 사용하는 시기에 아니라 하겠으나, 半島 존립의 옹호를 맡고 있는 일본은 반드시 요동반도의 確守로서 가장 필수의 條件이라고 하게 된 것 같다. …半島의 歷史를 보면 韓半島의 존립을 생각할 때는, 우리는 전력을 기울여 이 반도(=遼東半島)를 確守하는 것이 필요함을 느낀다. 歷史에서 관찰하면 우리가 이 半島를 영유하는 것은 가장 취미 있는 史實인 것을 잊어버릴 수 없다. 더 나가서 兩半島의 兵備나 經濟나 交通이나 기타 여러가지의 經營 등을 連絡시키고 氣脈을 一貫해서 같이 北進의 根本을 배양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經世家가 고려해야할 것인가 한다. 이 같은 일은 지금은 서둘러서 논의할 시기가 아니다.
 
이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일본은 한반도를 '保護'화한 후  그 보전의 위해서 遼東를 확보할 필요가 있고, 그 때문에 ‘氣脈을 一貫’하여 같이 ‘北進의 바탕을 배양한’것은‘經世家’에서는 요구된다 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본에 의한 ‘半島’經營를 위해서는 한반도·요동반도를 포괄한 ‘滿韓一統의 經營’이 필수적이라고 생각된 것이다. 즉 노일전쟁 후의 조선지배의 진전에 따라서 그 지배를 반석과 같이 하기 위해서 희구되는 것이, 다름 아닌 한·요동반도의 지배라는 "만한일통의 경영"이었다. 그래서 이 "滿韓一統의 經營"의 위한 모범이 되고, 또한 역사적인 근거가 된 것이 고대에서 해당 지역을 지배한 高句麗이며,‘滿鮮一體’의 역사관이었다. 그리고 이‘滿韓一統’야말로 稻葉의 ‘滿鮮不可分論」에 이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논리는 노일전쟁 이후 일본의 조선지배라는 현실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탄생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稻葉 자신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노일전쟁 직후의 단계에서는 한반도의 保護化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고, 그것은 그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서둘러서 논의할 시기가 아니다" 라고 했다. 그렇지만 삼일운동과 그것에 관련해서 민족의식의 고양에 의한 일본의 조선지배가 위기를 맞게 되자, 일본의 조선지배를 강고한 것으로 하기 위해서 그 자신에 의해서 고안된 '滿韓一統의 經營'에 의거한 '滿鮮不可分'인‘滿鮮史’및 그 사적 근거가 제시되었다고 생각된다. 이상과 같은 검토를 통해 보았을 때, 稻葉의 ‘滿鮮史’ 는 역사적 고찰에 의해 제안된 것이 아니라, 현실상의 일본의 조선지배와 관련해서, 먼저 ‘滿韓一體’가 있고, 그 후에 그것을 역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滿鮮史’가 제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稻葉는 일본의‘滿洲’ 支配가 더욱 진전한 滿州事變(1931년)·滿州國建國(1932년) 직후의 1933년 「滿鮮史 體系의 再認識」을 발표했다. 여기에서 그는

 일찍이 滿鮮歷史의 속에서 우리 半島의 地位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전에 상정했던 것 중에 많은 것은 局部的인 見解에 머무르고, 또한 너무나 단순 간략한 것이었던 것에 주의한다. 특히 우리는 대륙과 우리 半島와의 錯雜한 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는 유감이 있다. 국부적인  견해라는 것은 朝鮮의 領土內에서 발생한 事件을 모두 이 民族의 機構에서 유래한다고만 해석하고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경향이다.
 원래 일본에서는 완전한 일본사의 구성이 있고, 또 朝鮮史에서도 獨自의 機構는 인정할 수 있지만, 內鮮 모두 넓은 意義의 東洋史의 一部를 구성하는 것인 한, 全局上에서의 주의는 고려해야 한다.

이라고 주장하여 ‘일본사’‘조선사’그 자체의 독자적 존재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넓은 意義의 東洋史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東洋史’의 시각에서 그같은 역사를 고찰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觀點에서 滿鮮歷史를 보면 滿鮮一家라고 말하지 않아도 쌍방의 관계의 극히 밀접하였음은 별로 다언을 요하지 않는 것이지만, 한반도에 나타나는 大事件은 하나로 東亞全局의 문제의 반영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말해 두고 싶다.
 
라고 주장하고,‘東洋史’라는 거시적인 시각에서 보면‘滿鮮’의 역사는 긴밀하며,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은‘東亞全局’의 움직임과 관련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한나라에서 수·당나라 시기까지의‘滿鮮’의 대사건은 오로지 남북대립에서 발생하고 漢人 방면의 적극적 행동을 촉진시켰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唐末·五代에서 北宋에 걸친 시기에서는 거란의 발흥에 의해서 그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했다고 한다. 그것에 아울러서 

 단지 고구려 멸망 이후의 滿鮮의 民族을 보면 스스로 分解 작용을 보이며 滿洲는 滿洲, 朝鮮은 朝鮮이라는 식으로 대립적인 형세를 이루게 되고, 그 결과 여러가지의 錯雜한 상태를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라고 하여 신라이후 ‘滿鮮一家’의 이념에 큰 균열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滿鮮關係의 歷史上에서는 高麗太祖의 政策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즉 신라는 '滿鮮一家'를 이룬 高句麗의 영토는 물론, 平壤까지도 그 영토로 할 수 없었던 것이지만, 太祖王建은 高句麗의 繼承을 의미한 高麗를 그 國號로 해서, 더욱 "西京을 無人의 땅에서 修葺하고 이것을 鎬京이라고 하여 分朝를 두고 西北諸州의 統括에 기여시키고",  "國家의 根本는 長白山의 멀리 저쪽에 놓고", '滿鮮一家'의 왕조를 건설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조선왕조시대를 통해서‘滿洲’ 는 회복되지 않았고, 女眞人은 朝鮮에서 보면 '野人'으로 취급되고, 또한 女眞人도 朝鮮人을 경멸했다. 稻葉에 의하면 ‘朝鮮’은 "滿洲와의 관계가 극히 원활하게 진전한 경우가 태평이고 더 강했다. 이것에 반해서 만주에 이해가 없거나 혹은 이것을 자극한 경우에는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은 "半島를 위해서는 기뻐할 만한 경향이 아니"었고, 따라서 ‘朝鮮’의 입장에서도 "滿鮮은 一體化"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稻葉에 위하면 이러한 ‘滿鮮一體化’은 결코 "현재 갖고 있는 利害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역사적"이며 "支那 古代 史家"가 지적하는 바였다. 『三國志』「魏志」에서는 동방민족인 扶餘·高句麗·東沃沮· 婁·穢·韓·辰韓·弁辰·倭人을 일괄하여 ‘東夷’라고 했지만 이것에 대해서 그는 

 무릇 이들 九種族의 언어든지 風俗든지 地域든지 經濟든지 또는 그 信仰든가 거의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고, 漫然하게 附名했던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九種族은 이해가 공통하고 서로 관계하는 것이라는 이해로 이 名稱은 특정되었다.
 
이라고 생각하고 동이 제족은 "만연(漫然)"이라고 동이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활동한 '東夷'지역은 고대부터 "이해 공통하고 서로 관계한" 일체화 가능한 지역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동이 제족은 "상대 만주의 二大 部族"인 扶餘·高句麗와는 言語나 民族系統에서 공통하는 것이 인정되고 그들은 "東胡의 枝派"였으며, 따라서 "하나도 滿鮮一家의 역사적인 증거를 보여주지 않은 것이 없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만선민족은 공동의 운명 아래에 지배되고 있었" 으므로 離叛한 것이 있어도 그것은 常態가 아니라 "공동공존의 길을 갈 것이다" 라고 하고, 이것은 그에 의하면 "역사상에서도 명백하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稻葉는 『三國志』「魏志」東夷傳의 분석을 통해서 '만선'지역이 역사적으로도 "하나의 체계에 소속"하며 '一家'를 이룬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동시에 倭人인 일본도 포함되고 있고 간과할 수 없다. 이것은 중요한 것으로서, 그것은 일본에 의한 한국 식민지화·만주국 건국을 통한‘朝鮮’·‘滿洲’지배가 그 전제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도 왜·일본이 여기에 포함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면 이러한‘滿鮮史’를 주장한 稻葉에게 고구려사는 어떻게 위치지어져 있던 것이었을까? 다음은 고구려에 관한 그의 기술이다.

·高麗를 朝鮮民族의 代表者라고 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직도 문제이지만 그들이 滿鮮 兩方面으로 나가서 하나가 되고, 그로 말미암아 고대 미증유의 强勢과 文化를 발전시켰던 것은 명예있는 史實이다 .
·고구려는 이 玄 郡의 全貌를 기초로 興國했기에, 滿鮮一家의 理念을 수행할 수 있었고, 隋·唐의 大敵에 대항하여 敗北하는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新羅統一이후의 半島는 어떤 이유에서인가 그 지역이야 겨우 大同江 以南에 局限하고 東北 咸鏡道조차도 마침내 방기할 수밖에 없었고, 쓸 데 없이 大國의 안색을 보고 살피고 그것에 따라 감으로써 원래의 面目으로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句麗의 위대한 것은 地形의 便宜를 얻었던 것이다. 즉 滿鮮 境上에 나라를 이루어 東西에 발전하고 滿鮮을 하나로 하였다. 이것이 句麗의 强力한 이유의 根源가 되지 않으면 안 되고 이 형세에 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莫大하지만, 半島人은 이 이해를 점차 잊어버리고 句麗에 대해서 흥미를 잃어버리고, 마침내 혐오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는 고구려는 대단히 높게 평가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稻葉에 있어서 고구려는 "배워야할 것이 많은" 대상으로서 '滿鮮不可分論'상 필요불가결하며, '滿鮮一如'를 具現化한 존재이었다. 그 때문에 고구려는‘滿鮮史’의 속에서는 대단히 높게 위치지어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그 고구려를 당나라와 동맹하여 멸망시켰으면서도 옛 고구려의 영토를 방기한 신라 이후의 ‘조선사」의 평가는 낮아진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滿鮮史’라고 말하면 稻葉君山이 다루어지고 있었지만, 稻葉 이외도 ‘滿鮮史’를 언급한 학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三品彰英「滿鮮地帶의 歷史」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여기에서‘滿鮮史’가 성립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지리적·역사적 사상 등의 각도에서 검토하고 있었다.
三品는 먼저 그 지리적인 조건을 고찰하고‘滿洲’ 와 ‘朝鮮’가 모두 공통되어 있으며, 그 의미에서 "種的 統一性을 가진 境域" 이라고 하여 一元的으로 역사를 구성한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이어서 민족에 대해서는 稻葉과 같이 『三國志』「魏志」東夷傳을 들고, 동이의 민족이 烏丸·鮮卑과 구분된 것에 대해서 「魏志」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당시 이러한 구분을 할 수 있는 근거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라고 해서 "민족 사회적으로 분명하게 類的統一性을 볼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 이어서 동이는 일본도 포함해서 "내적 기반에서 오래 전부터 통일적인 계기를 갖고 있었던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해야한다" 라고 해서 동이 제족을 통일적인 범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三品는 이어서 '滿洲民族'과 '朝鮮民族'의 사적전개를 검토한 結果, 그들은 "二者 分立하고 항쟁해 왔던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원래 일체적으로 성립할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할 수 없었던 이유로서,  1)滿鮮民族의 생활기술, 특히 중세에서의 생활기술의 相異(‘滿洲’는 수렵을 주로 한 半農,‘朝鮮’은 純農的), 2)漢族과의 關係 속에서 "滿鮮은 그 역사 속에서 한족 국가의 제반 정책에 의해서 분립되고 서로 대항하여 왔다" 고 해서 전근대의‘滿洲’‘朝鮮’일체의 사적전개과정을 부정했다. 그렇지만 三品에 의하면 근대 이후 한민족의‘滿洲’ 진출에 의한‘滿洲’ 의 農耕化에 인해서 일체화가 촉진되어 

 日韓倂合, 滿洲國의 건국이라는 滿鮮史上의 一大畵期的 사건을 거쳐 古代의 東夷諸族은 여기에 새롭게 一體的 共存國家를 건설해 얻게 되었다. 생활기술가 原始的인 古代에서는 多元的으로 병존했던 東夷諸族이 기반적으로 主體的으로 포함해 왔던 一體史的 可能性을 오늘날 일본의 國體와 생활기술을 중핵으로 해서 처음 歷史 위에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大御稜威의 아래 滿鮮史는 새롭게 國史的으로 전개해 간다.

이라고 말하고,‘滿洲’·‘朝鮮’이 일본에 의해서 일본도 포함해서 一體化하고 새롭게 ‘國史’적으로 발전해 간다고 주장했다. 이 논문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집필된 것으로, 근대 이후의 ‘滿鮮一體」는 일본 주도에 의해서 건국된 滿州國을 전제로서 논의되고 있고 이데올로기성이 강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전근대에 관해서 말하면 三品는 ‘滿洲史’와‘朝鮮史’  의 史的展開를 서로 다른 것이라고 보고 있었으며,‘滿洲’‘朝鮮’을 有史이래 하나의 사적 세계라고 본 ‘滿鮮史’가 성립하기 어려운 것을 제시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보는 것과 같이 稻葉와 三品의‘滿鮮史’는 서로 상이한 부분이 적지 않지만, 양자에 공통헌 것은 그들이 일본의 대륙에의 진출, 만주국의 성립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滿鮮史’ 를 검토하기 의해서는 결코 소홀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면 三品彰英에게는 고구려는 어떻게 평가되어 왔을까. 三品는 고구려와 발해에 대해서‘滿洲’ 와 ‘朝鮮’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유형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논란이라고 하면서도, "만주적인 강함"과 "조선적인 문화 능력"을 모두 갖고 있었지만,‘朝鮮’‘滿洲’의 "주변에 化"했다 라고 위치지었던 것이다.  사실 三品는 『朝鮮史槪說』에서는 고구려는 "강렬한 만주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금나라나 원나라보다 많이‘朝鮮史’에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朝鮮史’의 一部으로서 취급해 왔지만 "朝鮮史上에서는 어디까지라도 보좌역"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싱과 같이 고구려는‘滿洲’ 에서 발흥해서 그 영토의 대부분은‘滿洲’이었기 때문에‘滿洲史’라고 논의할 것도 가능했다. 이 ‘滿洲史’도 역시 ‘滿鮮史’ 이상으로 일본의 대륙진출·만주국의 성립을 사적 전제로 하여, 활발하게 연구 되어왔던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滿洲史’와 관련하여 고구려사연구의 동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4.‘滿洲史’와 高句麗

근대일본에서의 ‘滿鮮史’ 연구는 那珂通世 등에 의해서 시작되어, 箭內 , 松井等, 內藤湖南, 稻葉君山, 白鳥庫吉, 池內宏 등이 계속해서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이러한‘滿洲史’연구는 노일전쟁 후의‘滿洲’ 경영의 진전에 더불어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08년에 설립된 滿鮮歷史地理調査部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滿洲史라고 말하는 것보다 滿鮮史"였다. 그 후, 일본 동양사학회의 연구대상은 '시대의 추이'와 함께 '새외(塞外)에서 支那本部', '政治·歷史地理'보다 '다채로운 사회·문화'로 이행하게 되었지만, 滿州事變(1931년)·滿州國成立(1932년)을 계기로 한‘滿洲’에의 관심의 고양이‘滿洲史’연구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滿洲史’연구의 고양을 반영하여 『歷史學硏究』(1935년, 5-2)에서는「滿洲史硏究特集號」가 간행되고,‘滿洲史參考文獻目錄’을 붙인 것과 함께 ‘滿洲史’를 둘러싼 연구성과 및 그 과제 등이 논의되었다.
 그 속에서 특히 주의되는 것은 三島一「滿洲史硏究序說」이며, 여기에서는‘滿鮮史’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과제가 다루어지고 논의되었다. 그 첫 번째는,‘滿洲’가 "고대부터 支那의 領土"이었는가, 아니면 그렇지 아니한가라는 문제이다. 이 관점은‘滿洲史’의 존립기반과 관련되어 중요한 것이다. 당시 일본의‘滿洲’ 진출과 관련해서 중국 쪽으로‘滿洲’가 "支那古來의 영토이었다"라고 주장한 논의에 대해,  矢野仁人가 이것에 반론해서‘滿洲’가 역사적으로 보면‘支那」의 영토가 아니었음을 입론하려고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三島는 矢野의 "論證의 方法에 다소 역사적 연구로서 오류가 있다"라고 지적한다. 즉 矢島는 중국 변경(滿洲·蒙古·新疆·西藏)에서는 近世的인 영토권이 성립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는 近世的인 국가의 영토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三島는 이것을 "일단 옳다"고 하면서도 "도대체 支那는 近世的인 國家"인 것인가 라고 물음을 던지고, ‘支那’자체가 近世的인 國家가 아니기 때문에 近世的인 영토권이 성립하지 아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며, 따라서 문제점은 支那 전근대의 영토권의 성질·前近世的인 국가의 정치 형태의 성질을 논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요컨대‘滿洲’룰‘支那’에서 적극적으로 떼어내려고 하는 의논은 앞으로 중국 왕조의 변경에 대한 영토권이나 그 지배구조를 고려한 위에서 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두 번째의 과제는 첫 번째의 문제와 관련해서,‘滿洲史’는 일관된 역사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전제가 되는 것은‘滿洲’ 는 農耕民인 漢族, 遊牧民인 蒙古族, 狩獵民인 퉁구스계 民族의 쟁패(爭覇)지역이며, 그 사회는 단속적이고 일관한 역사가 없었다고 한 白鳥庫吉의 지적이었다. 三島는 이것을 인식하면서‘滿洲史’는 기본적으로‘滿洲族’을 중심으로 한 것이 ‘正當’하지만 "滿洲族의 일관한 역사발전이 滿洲史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支那民族과의 역사적인 접촉 과정에서 그 交互的인 作用에 속에서 滿洲史의 體系가 수립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이나 대외교섭뿐만 아니라, "그 기반을 이루는 사회경제적 측면도 고려하면서 더욱 연구를 깊게 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 때문에‘滿洲史’는 결코 고립된 것이 아니라 "여러 민족의 의 사회적인 문화적인 접촉의 결과로서의 체제"인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이 문제를 생각하는 경우에는 ‘蒙古族」과의 관계까지 시점을 넓게 확대하면서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사실 三島는 다루고 있지 않지만, 그 외‘滿洲史’그 자체를 하나에 사적세계로서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종래 별로 주목되지 않은 것 같지만 松井等「滿洲史要領」이 바로 그것이다. 松井等는‘滿洲史’의 本質으로서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즉 "滿洲史는 滿洲에 한민족 세력의 消長을 핵심으로 하여 漢滿蒙 세 民族의 勢力 交錯의 변천을 설명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滿洲史는 支那史의 一部으로서 고찰해야 할 것이며, 漢民族과의 관계를 무시하고 만주 여러 部族만을 구성요소로 한 滿洲史라는 것을 성립시킬 수는 없다" 고 하여, ‘滿洲史’가 滿洲民族만의 역사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滿洲史’의 시대구분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1)漢民族勢力進展時代(前311-318年) 318年는 東晋建國, 漢民族勢力의 후퇴
2)第一次漢民族勢力喪失 및 快復時代(318-907) 907年 唐朝滅亡
3)第二次漢人勢力喪失 및 快復時代(907-1616);唐滅亡에서 淸朝建國까지
4)第三次漢人勢力喪失 및 快復時代(1616-);淸朝建國以後

松井의 견해는 滿洲民族과 漢民族과의 連動性을 중시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의미에서는 三島의 指摘과 공통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중국 역대왕조의 성쇠를 기준으로 ‘滿洲史’를 規定·時代區分하는 것은 "民族의 興亡 盛衰 등의 정치인 여러 현상의 연구성과를 얻고 있는 것에 반해서, 다른 여러 機構에서는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그 ‘滿洲史’와 ‘支那史’와의 긴밀한 관계에서 보면, 그것이‘支那史’그 자체나 혹은 그 일부를 구성하는 東夷로서 취급되지 않고 ‘滿洲史’가 되었는가, 또한‘滿洲民族’이나 ‘滿洲史’의 전제가 되는‘滿洲’란 과연 어떻게 규정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우선 문제삼지 않으면 안 되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그들의 논의는 일본의 대륙 진행이라는 시대적인 요청에 의거해서 등장한 ‘滿洲史’의 체계가, 그 당시에서도 반드시 확고한 학문적인 정의에 의해서 규정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같은 점은‘滿洲史’설정 상에서도 중요한 문제의 하나였고, 그 때문에‘滿洲史’개설서 등에서도 적극적으로 언급되었다. 예를 들면 『滿洲新史』는 그 편찬 이유의 하나로서,  滿蒙의 땅은 ‘支那」과 다른 "특수지역이었다", "滿蒙 三千年의 역사는 支那史의 一部가 아니다"라고 논하고 있었다. 또한 稻葉君山『滿州國史通論』도 "滿州國의 영토 내에 옛날부터 생존해 왔던 여러 민족은 부분적으로는 다소의 차이는 인정할 수 있지만 대개 동일민족이고, 그것은 支那의 漢民族과는 전혀 다른 계통이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같은 주장은 반드시 三島이나 松井 등의 논리를 ‘滿洲史’ 의 사적 전개에 따라 학문적으로 극복하고 있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듯 하며, 그러한 의미에서는 ‘滿洲史’ 의 등장과 함께 이러한 논의가 끊임없이 이어졌던 것은 ‘滿洲史’ 의 性格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를 갖고 있었던‘滿洲史’이었지만, 근대 일본에서 가장 빠르게 이것을 通史로서 썼던 것은 稻葉君山『滿洲發達史』이었다. 稻葉는「明代以前의 滿洲」에서 고구려를 취급하고 있는데, 고구려사가‘滿洲史’를 구성하는 하나로 인식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고구려사를‘滿洲史’와 관련시키는 것은 稻葉가 처음이 아니다. 일본의‘滿洲史’연구의 선구자인 那珂通世도「朝鮮古史考」에서 고구려사람을 '貊種'이라고 해서 "맥의 인종이라고 생각되는 바 아닌 것은 아니지만 역사서에서 명확하게 쓴 바 없는" 三韓과 別種이라고 논하고 있다. 또한 今西龍는「檀君考」에서 고구려 사람은 "현대 조선민족의 祖先의 主體인 韓民族과 관계없다"고 하고 '滿洲族'이라고 하였다. 白鳥庫吉도 高句麗를 퉁구스족이라고 생각하면서 '朝鮮人'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요컨대 고구려사를 언급한 많은 연구자는 고구려를 '滿洲民族'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三品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朝鮮史’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朝鮮史’의 일부를 구성한 것이라고 인식되고‘朝鮮史’의 범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滿州事變, 滿州國 건국에 의해서  ‘滿洲史’ 가 모색되자 고구려는 ‘滿鮮史’ 와 함께 ‘滿洲史’ 를 구성한 주요한 것으로 위치시키게 되었다. 
‘滿洲史’에 대한 개설서는 滿州事變·滿州國 建國 시기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 시기에서는 有高巖『滿蒙史講話』, 大原利武『槪說滿洲史』, 南滿州敎育會編纂『滿洲新史』, 及川儀右衛門『滿洲通史』 , 稻葉岩吉(朝鮮史)·矢野仁一(滿洲史)『世界歷史大系11 朝鮮·滿洲史』, 稻葉君山『滿州國史通論』둥이 출판되었다. 이들의 개별적이며 구체적인 내용은 차치하고서, 그들에 일관하고 있는 것은 ‘滿州史」(稻葉君山의 경우에는 『滿洲國史』) 속에서 高句麗는 그 고대사를 담당하는 주요한 民族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未開混沌의 滿洲民族은 高句麗의 建國에 의해서 당시의 大國인 隋, 唐과 당당하게 승부를 결정하는 것까지 이르렀다. 滿洲民族의 빛이라 할 만 하다.

라고 하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듯, 고구려는 ‘滿洲史’ 에서는 대단히 높게 평가되어 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다음와 같은 기술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諸國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말해 온 夫餘, 高句麗 및  婁의 세 개이고 모두 한나라에서 三國의 경에 걸치고 滿洲에 있었던 나라들이다. 그 風俗 중에 우리나라 上古의 그것과 유사한 것이 적지 않다. …이것은 地理的으로 보아도 滿鮮과 일본의 접촉이 고래 극히 친밀했다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滿洲地方의 古語는 잘 알 수 없지만, 요즘의  滿洲語는 朝鮮語나 日本語 등과 함께 우랄, 알타이語系에 속한다고 말해지고 있으며, 또한 최근에 滿鮮 各地에서 發掘된 遺蹟 遺物도 일본, 특히 관서지방의 것과 유사한 것이 적지 않는 것 등을 고려하면, 우리 大和民族의 선조와 滿鮮土人과의 연고가 매우 깊었던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후 滿鮮, 일본 기타 東洋에 관한 考古學, 言語學, 人類學, 史學 등의 연구가 進步해 간다면, 아마도 大和民族의 主要分子는 北方系, 즉 滿鮮 및 支那에서의 移民이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日本人이 鮮滿 各地에 점차 발전하고 있는 것은 선조의 고향에 돌아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부여나 고구려와 일본 고대의 풍속의 공통성, 同系의 언어체계, 유물 등에서 보아 "우리大和民族의 선조와 滿鮮土人과의 연고가 매우 깊었던 것"을 강조하여, 일본의 지배에 의한‘滿洲’ ‘朝鮮」의 一體化를 人類學이나 民俗學 등의 시점에서 합리화하려고 하는 듯한 주장으로 보인다. 나아가 일본 사람이 ‘滿鮮 및 支那’에서 이민해 왔을 가능성이 있고, 그렇다면 일본 사람이 ‘鮮滿各地」에서 "점차 발전(漸次發展)"하고 있는 것은 "선조의 고향에 돌아가는 것 같은 것이다"라고 해서 일본의 ‘鮮滿各地’에의 진출을 선조의 땅으로 귀성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여기에서는 근대화에 성공하고 ‘朝鮮’‘滿洲’를 지배하여 滿州國 建國을 주도한 일본이라는 인식이 전제가 되어 있으며, 그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錦衣還鄕하는 것인 양 인식하여 일본의‘滿洲’ 支配를 정당화하려는 듯한 지적을 하고 있다. 더욱이 大原利武는

滿洲는 上古에는 일찍이 고구려의 영토이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宗主權 아래에 있었다. 그 후 일어난 渤海도 역시 前朝인 高句麗의 예를 따라서 日本에 조공해 왔다. 지금이야 滿州國을 승인한 우리나라는 이것을 지도 개발해야 하는 중대한 책임을 갖고 있다.

라고 그 저서 『槪說滿洲史』의 머리말에서 서술하여,  고구려는 일본의 종주권의 아래에 있었고 이어지는 발해도 역시 일본에  조공해 왔기 때문에, 그 종주국인 일본은 당연히 그들을 계승한 것으로 위치지어진 ‘만주국’를 "지도 개발해야 할" 중요한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일본의‘滿洲’지배의 근거로서 高句麗가 이용되고, 그 역사적인 경위에 의해서 일본의‘滿洲’지배도 정당화된다는 논리구조가 되어 가는 것을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보는 것과 같이 일본의 대륙진출이라는 현실적 과제에 의한 ‘滿洲史’연구의 요청·발전에 속에서 고구려는 그 고대 주요민족에 하나로서 깊게 평가되는 한편, 일본의‘滿洲’지배의 정당성의 의한 근거의 하나로 이용되어 왔다.

 
                                맺 음 말
 
 최근 고구려사를 둘러싸고 한국과 중국 사이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 중 하나는 옛날의 고구려의 영토가 오늘날의 중국, 북한, 한국에 해당하고 있고, 그 때문에 근대국민국가적인 역사관인 '一國史'의 범주로써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곤란한 것에 기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45년 이전 시기 해당 지역에 진출하여 직접지배 혹은 간접 지배를 행했던 일본은, 그 지배의 정당성·지배강화 등을 위해서 고구려사를 특히 주목해 왔다. 그들은 고구려의 영토가 대체로 과거 일본이 진출·지배한 조선반도·‘滿洲’지역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배를 배경으로 하여 고구려사 연구가 행하여져 왔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고구려는 높게 평가되는 한편, 일본의 한반도·대륙지배의 유력한 근거의 하나로 되었다. 그것은 일본의 동양사학, 조선사학, ‘만주사학」의 하나의 특징이었으며, 이러한 일본의 대륙진행 정책과 고구려사연구의 동향에 대해서는 결코 소홀히 다루어져서는 안 되고, 엄격하게 점검·비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러한 근대 일본에서의 고구려 연구의 실정을 충분히 파악해서 자기 민족 중심적인 ‘一國史’적인 역사관을 배제해 가면서,  새로운 고구려사 연구를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여기에서는 고구려사 연구의 중에서도 ‘滿鮮史'나 ‘滿洲史’의 시점, 또한 문헌사학의 視點을 중심으로 고찰해 왔지만, 1945년 이전에서의 일본의 고구려사연구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군사적 지배를 전제로 하여, 현지에서 활발하게 고고학 조사가 행해진 것도 역시 사실이며,  그 이외에도 방대한 연구가 행해진 것으로서, 다양한 시각에서 그 역사연구를 비판적으로 검증해 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향후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