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渤海國의 自主性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는가 하는 문제와 함께, 발해국이 고구려를 계승하였는가 말갈족이 최초로 왕조를 개창하여 세운 국가였는가 하는 문제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필자가 또 다시 이 문제들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 진부한 것인지는 몰라도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는 측면에서 전혀 무의미한 것 같지는 않다. 특히 한국사학계가 고구려사와 달리 발해사에 대해서는 한국사의 범주에 끼일 수 없다는 주장까지 있고 보면 더욱 그렇다.
발해국이 당나라에 대하여 얼마나 자주적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당시 동아시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일이다. 당의 주변 여러 나라들이 당으로부터 책봉과 조공의 관계를 모두 갖고 있었는데 이들을 모두 당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시각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적어도 당중심의 외교 질서는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지방정권 운운하기에는 진실과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 일반적이다. 특히 발해의 경우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당나라에 대하여 자주성이 강하였던 왕조였다. 때문에 당나라가 몇 차례에 걸쳐 고구려정벌을 감행했고 이로 인해 고구려가 멸망하기까지 하였다. 발해는 당에 대하여 군사적인 대결을 피하면서 정치적 자주성을 확고히 지켜나가는 정책을 추구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행정기구명이라든지 諡號와 年號를 당의 입장을 개의치 않고 '사사로이' 결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의 호칭도 '皇上'으로 황제를 자칭하고 있었다는 것이 여러 증거물을 통하여 확인되고 있다.
발해사를 둘러싸고 또 하나 문제가 되고 있는 점은 발해가 과연 고구려유민의 왕조였는가, 고구려와 다른 말갈이 세운 최초의 국가였는가 하는 점이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사실은 種族的인 입장과 文化的 保守性이 강한 古墳과 住居文化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Ⅱ. 種族的 입장에서 본 渤海
발해국의 성격에 대하여 한국이 고구려 계승국의 입장에 있는가 하면, 중국과 러시아는 靺鞨國이라는 입장이다. 그리고 일본은 高句麗遺民과 靺鞨이라는 양면적 견해가 병존하지만, 전자가 우세하다고 할 수 있다. 엄격히 말해 남한도 일본의 견해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터라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말갈국이라는 입장이 아직도 일반적인 견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대조영의 출자에 대해서는 말갈계 출신의 고구려인으로 인정하지만, 발해의 말갈국설을 뒤집을 수 있는 논리는 아니다. 다수의 피지배 주민들이 말갈이었다는 전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발해가 高句麗遺民國인가 靺鞨國인가 하는 생각은 靺鞨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필자는 몇 차례의 논고를 통해 말갈은 고구려의 피지배주민에 대한 卑稱이자 당나라 동북방 주민들에 대한 汎稱의 의미가 크다는 입장에서, 말갈의 고구려유민설을 주장해 왔다. 말갈의 他稱說의 입장에서 나온 卑稱, 汎稱說은 필자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었고, 이미 중국과 일본에서 統稱(通稱), 汎稱으로 불리며 주장해 왔던 견해였다.
總稱說은 대체로 일본의 白鳥庫吉과 日野開三郞, 중국의 孫進己 등에 의해 주장되고, 卑稱說은 박시형이 적극적이었다. 한국에서도 이미 말갈을 僞靺鞨과 眞靺鞨로 나누어 보려하거나 濊系 말갈의 존재를 인정하였다든지, 濊貊系와 婁系가 함께 존재한다고 하는 논거들이 있었던 것도 일정하게 말갈의 범칭설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이야기되기로 말갈의 선조로 알려진 秦 이전의 肅愼과 漢代의 婁 등은 자칭의 종족명이라기보다, 중국 왕조가 바뀌면서 타칭되었던 주변 '未開' 종족명이었다.
他稱의 말갈이 당나라 동북방 주민들에 대한 汎稱이자 변방 주민에 대한 卑稱이라는 입장이라면, 문제의 {舊唐書}와 {新唐書}를 중심으로 벌이고 있는 大祚榮의 출자문제도 쉽게 풀린다. '高麗別種'을 강조하는 {舊唐書}가 대조영의 고구려출신을 강조한 사료였다면, '粟末靺鞨'을 강조하는 {新唐書}는 대조영이 粟末水 지방출신이었던 점을 반영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종족적으로 발해국이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사실은 고구려인들이 살던 지역을 중심으로 발해가 되었다는 상식적인 판단으로부터도 기인한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는 사실은 668년 고구려왕실이 멸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다고 할지라도, 고구려땅에 세워진 발해국은 대부분 고구려인들이 주축이었다는 점에서 인정할 수 있다. 갑자기 말갈인들로 교체되었거나 번식되었다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해주민이 말갈이었다는 주장은 대조영이 '粟末靺鞨'로 기록된 {新唐書}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아울러, {舊唐書}나 {新唐書}가 고구려는 東夷列傳에 立傳하고 있고, 발해는 北狄列傳에 立傳하는 것으로도 발해의 고구려계승관계를 부정한다. 그러나 {隋書}가 東夷列傳에 고구려와 말갈을 같은 범주에 넣었던 것으로 볼 때, {舊唐書} 이후의 기록자들은 고구려가 멸망하고 30년만에 부흥한 발해국을 고구려의 계승국가로 보지 않으려는 왕조중심적 역사관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고구려의 피지배인들을 고구려인과 다른 말갈족으로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발해 역시 비록 그들을 '靺鞨' 부락이라고 불렀다고 하더라도, 汎稱 및 卑稱說의 입장에서 그들은 결코 고구려인과 다른 종족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말갈로 불리는 高句麗靺鞨도 고구려인이었고, 발해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Ⅲ. 古墳 古墓를 통해 본 渤海
발해와 고구려와의 문화적 계승관계는 문화적 보수성이 강한 고분에서 가장 비교가 많이 되고 있다. 貞惠公主墓 및 貞孝公主墓, 三靈墳 등과 같이 발해의 王陵 및 支配層의 石室墳은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중국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石室墳은 漢系 塼室墳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든지, 靺鞨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고 하여 고구려의 고유성을 부정한다. 그러나 渤海 墓制를 高句麗와 靺鞨系의 습속을 모두 전승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는 中國 朝鮮族 학자들의 견해로 얘기하자면,. 石室墳의 전통은 여전히 積石 石槨墓(石壙墓)를 기원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아무튼 石室墳의 기원을 靺鞨의 土壙墓(土坑竪穴封土墓)로 보려는 주장은 발해의 靺鞨國說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는 주장이 아닌가 한다.
靺鞨의 전형적인 墓制는 舊唐書 靺鞨傳에 입각하여 土壙墓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渤海時代의 靺鞨 古墓群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곳은 1979년 이후에 발굴된 松花江 유역의 吉林 永吉 楊屯의 大海猛 古墓群과 1986년 이후에 발굴된 吉林 永吉 査理巴와 楡樹 老河深 古墓群들이다. 이들을 靺鞨 古墓群으로 분류한 기준은 '土坑竪穴封土墓'라 불리는 흙구덩이의 土壙墓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세군데 150여기의 古墓 중 12기만이 石壙墓이고 나머지는 모두 土壙墓[土坑墓]였다는 것이. 그 반증이다 그러나 숫자는 적지만, 이 古墓群들에서 고구려 古墳 古墓들에서 많이 나타나는 石壙墓가 12기 나왔다.
한편, 土壙墓[土坑墓]는 六頂山 渤海 貴族 古墓群 2墓區에서 4기가 발굴되었는가 하면, 琿春의 北大 古墓群과 和龍 龍海 古墓群, 安圖 東淸 古墓群들에서도 발굴되었다. 이곳에서의 토광묘는 적은 수에 불과하지만, 이곳을 靺鞨 古墓群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는다. 六頂山은 발해의 첫 수도였던 舊國 지역이고, 다른 곳은 東京龍原府나 中京顯德府와 가까운 곳의 古墳群들이다. 발해를 말갈의 후예로 본다면, 초기 발해의 貞惠公主墓 부근의 사람들이 이렇게 적은 수의 土坑墓를 축조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들의 전통을 계승한 竪穴式 土壙墓를 다수 축조했어야 옳다. 그러나 이곳을 비롯해서 琿春의 北大나 和龍의 龍海 古墓群에서는 石室 및 石壙墓가 다수 출토되고 있다. 종족의 차이에 따른 묘제의 차이가 아니라, 權力과 生活水準의 차에서 나온 고분 축조의 차이라는 이야기다. 靺鞨 古墓群으로 언급되는 大海猛과 査理巴 및 楡樹 老河深 古墓群도 지역과 문명 수준의 차이로 말미암아 竪穴式 土壙墓가 많이 발굴되었을 뿐이지, 종족이 다르기에 나타난 묘제의 차이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다. 高句麗와 靺鞨을 따로 구별할 수 없는 이유가 이러한 사실에서도 입증된다는 것이다.
고구려와 발해의 지배층 石室墳 문화를 漢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제하면서, 이것 역시도 靺鞨의 土坑墓 전통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渤海를 靺鞨系로 보려는 시각에서 나온 억측이 아닌가 한다. 竪穴式 土壙墓 문화는 前近代 피지배층인들이 사용하던 인류 보편의 문화로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지 않은가 한다.
또한 벽돌을 고분에 많이 이용한 것도 멀리는 漢系의 문화가 많이 전수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벽돌을 사용하였다고 하여서 반드시 漢風 내지 唐風이라고만 할 수 없지 않을까 한다. 자연 환경적으로 돌보다 흙이 많은 곳에서는 벽돌을 많이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三靈墳과 같이 발해 上京龍泉府에서의 고분은 玄武岩이 많이 사용될 수 있었고, 대단위 고분군에서는 흙이 많은 주변의 환경으로 인해 벽돌이 많이 사용되었다. 어떻든 흙이 주 材料인 중국에서는 塼室墳이 유행했고, 이가 일정하게 발해시대에 영향을 미쳤던 것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塼室墳이 梁나라의 영향을 받아 百濟의 武寧王陵에서는 채택되었지만, 고구려에서는 유행하지 않았다. 塼室墳은 특별한 경우에 축조된 예외적인 것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三靈墳과 같이 玄武岩 등으로 고구려적 전통을 사용했던 고분 축조방식이 보다 발해 귀족들의 전통적 방식에 가까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 貞孝公主墓와 같이 벽돌로 축조한 발해고분이라 하더라도, 천정 마감 방법 등을 비롯한 고분 축조양식은 여전히 고구려 양식을 모델로 하고 있었다.
필자는 발해의 고구려 계승과 관련하여 이른바 말갈의 墓制로 알려진 土壙墓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발해 묘제를 土壙墓系, 石築墓系, 塼室墓系로 분석한 李南奭은 지금까지 발굴된 土壙墓 보다 훨씬 많은 토광묘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내놓은 바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들은 주로 지배층문화에 집중되어 왔다. 이것은 발해문화의 특징들에 대한 해석이 주로 상경용천부를 비롯한 발해의 오경터 주변 유적에 집중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발해의 고구려문화 계승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북한의 경우를 보더라도 발해와 고구려문화의 비교는 이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를테면, 발해의 고구려계승을 입증하는 방법으로 고구려의 강서큰무덤, 진파리1호무덤, 통구사신무덤 등과 발해의 정혜공주묘를 비롯한 六頂山 고분군과 삼령둔 및 북대 고분 등이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중국측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귀족문화에 대한 비교관찰은 발해문화의 계승성을 밝히는 데에 많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고구려의 외교가 隋唐과도 빈번하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고구려문화에는 일정하게 외래의 것이 상당수 수용되었던 것은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 특히, 불교예술이나 벽화 등은 외래문화를 쉽게 전수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것이 전적으로 고구려나 발해문화를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다. 외래문화의 영향을 덜 받는다고 할 수 있는 고분축조 및 성곽 축성방법 등에서는 비교적 고구려의 고유성이 발해에 대부분 계승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왕과 귀족들이나 쓸 수 있었던 석실고분 등을 고구려와 발해문화의 비교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고구려인들의 거의가 이러한 무덤들을 쓸 수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구려와 발해의 서민들이 사용했던 무덤들은 말갈묘의 한 특징으로 제기되고 있는 흙구덩이의 土壙墓[土坑墓]계통에서 찾아야 한다. 토광묘의 축조 방식은 오늘날의 매장 방식과도 가장 가까운 것으로써, 일반적인 토광묘는 거의 계획적으로 발굴되지 않고 있다. 토광묘의 발굴은 대체로 지배층의 대형고분 발굴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통례인 것 같다. 이러한 것은 고구려나 발해시대의 것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인민중심의 역사를 한다고 하는 북한의 고고학에서도 토광묘에 관심은 소홀하다. 물론 이와 같은 것은 토광묘 유적의 빈약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복원을 위한 계획적 발굴이라는 측면보다 유물찾기 내지 보물찾기식의 발굴이 아직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물이 없고 유적이 빈약하다고 해서 이것을 고구려나 발해시대의 부수적인 묘제로 보거나, 고구려나 발해와 다른 靺鞨墓로 볼 수는 없다. 사료를 통해 볼 때, 말갈은 고구려의 변방피지배 주민들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토광묘는 고구려와 발해의 피지배 주민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Ⅳ. 土器와 住居文化를 통해 본 渤海
발해문화의 특징으로 꼽고 있는 이른바 靺鞨罐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도 짚고 넘어 갈 필요가 있다. 발해 내지 고구려토기와 말갈토기의 구분은 대체로 돌림판[輪制]을 쓴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또는 굽는 온도의 차이 등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도 靺鞨文化는 아직 未開한 문화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渤海三彩 등을 언급하면서 靺鞨罐을 구별하는 것은 마치 귀족문화와 변방문화를 비교하는 논리임과 동시에, 지배층과 피지배층문화를 異民族의 구별하려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발해의 종족구성을 말갈로 보는 중국학계에서는 말갈관 즉 '배가 부른 항아리 모양의 단지'[深腹筒形罐]를 발해주민(말갈인)들이 쓰던 그릇의 대표적인 것으로 꼽고 있다. 이러한 관은 敦化六頂山 무덤떼나 上京龍泉府터 및 다른 주거지에서도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것이 고구려유지였던 자강도 자성군 법동리 하구비와 대성산 기슭의 고구려무덤에서도 나왔다. 그렇다고 고구려무덤의 이것들을 고구려인들이 아닌 靺鞨人들이 사용하던 '靺鞨罐'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고 본다. 고구려를 비롯해서, 발해시대에도 이와 같은 저급의 토기는 많이 발견되지만, 모두는 고구려와 발해인들이 사용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종족에 따라 고급의 도자기와 토기로 구별해서 설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지배와 피지배 내지, 중앙과 지방문화의 차이로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문화적 보수성이 강한 것으로는 古墳과 함께 住居文化를 생각할 수 있다. 온돌을 고구려인들이 썼다고 하는 사실은 다음의 {舊唐書}가 잘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인들의) 주거는 반드시 산골짜기에 있으며, 대개 茅草(띠)로 이엉을 엮어 잇고, 오직 佛寺·神廟 및 王宮·官府만이 기와를 쓴다. 일반인의 생활은 대부분 가난하고 겨울철에는 구덩이를 길게 파서 밑에다 숯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한다. 밭농사와 누에치기는 대개 중국과 같다.
위의 기록은 고구려인의 주거생활에 대한 특징을 몇가지 들고 있다. ① 산골짜기에서 산다 ② 집은 띠로 이엉을 엮어 이어 지은다 ③ 기와는 佛寺·神廟 및 王宮·官府에서만 사용한다 ④ 일반인들은 대개 가난하고 ⑤ 겨울철에는 구덩이를 길게 파서 밑에다 숯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하는 온돌장치를 한다는 점이다. 위의 내용은 唐, 五代의 지성들에게는 생소한 것으로 당나라 사람들의 주거생활과는 차이가 있었기에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반인들이 가난하다는 것은 고구려나 唐·五代인을 막론하고 피지배인들 생활상을 반영한다. 이것은 분명 고구려인들이 唐과 五代인들과 다른 주거생활을 누리고 있었다는 증거이고, 이것에 근거하여 한국학계에서는 온돌의 기원을 고구려로 언급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이러한 온돌은 실제로 고구려유적의 여러 곳에서 확인되었다. 북한의 고구려유적에서도 많이 발굴된 것으로 보고 되고 있고, 중국에서도 1958년 集安 東台子 建築 遺址와 氣象站 遺址 등에서도 발굴되었다. 고구려유적은 古墳群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건축유지 등이 후대의 파괴와 자연화로 발굴이 어려웠을 뿐이지 고구려시대의 온돌은 상당히 많이 보급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최근 集安과 五女山城 등의 고구려유적에서 온돌이 대거 발굴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관청이나 군사시설 등에서 온돌이 상당히 보편화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이러한 온돌은 발해시대에도 많이 발견되었다. 발해국 上京龍泉府의 궁성 서쪽 '침전터'에서 7개가 발견되고 있으며, 북한의 함남 신포시 오매리 발해유적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또한 集安市 太王鄕 民主六隊遺址에서도 발견되어 이 문화가 지속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한편, 발해인들이 온돌시설을 하였던 근거는 러시아의 연해주지역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은 발해의 지방문화라는 점에서 주목되어야 하는데, 노보고르데예프카, 스타로렌첸카, 코르사코프카, 콘스탄티노프카 유적들에서 모두가 온돌이 나왔으며, 발해유민들이 살았던 아나니예프까 유적에서도 역시 발견되었다. 변방의 말갈지역으로 꼽히는 이곳에서도 온돌이 발견되고 있는 것은 발해국의 고구려 계승이라는 사실 이외에 종족을 넘어서 중앙과 지방의 유력자는 대체로 온돌을 사용하였음을 의미한다. {隋書} 東夷傳 靺鞨條에 입각한다면 변방의 靺鞨人들은 온돌이 아닌 땅구덩이의 竪穴[鑿穴] 생활을 하였어야 한다.
말갈유지로 보는 지역의 온돌유지는 1977년 黑龍江省 東寧縣 團結遺址에서 발견된 네 개의 발해 집터도 유명하다. '平民住宅'으로 인정하면서도 중국 학계에서는 이것을 고구려와의 관계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이곳을 발해의 一夫一妻制를 반영하는 遺址라든지, 이곳에서 五銖錢이 나왔다고 하여 "黑水"와 "黃河"의 경제적 교류가 있었다는 등의 해석을 한다. 또한 張太湘은 이곳의 온돌을 "地火龍(땅고래)"으로 표현하고 이것이 발전하여 벽난로와 온돌이 되었다고 하는가 하면, 구들 " "자가 중국에서 온 女眞語라고 하여 중원과 이곳의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이곳 유지에 대한 해석을 중국문화의 영향으로 보는 시각은 발해 만주지역의 고고 유지들에 대한 중국측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러나 {舊唐書} 기록과 발굴 결과들은 분명히 온돌이 고구려의 전통이었음을 전하고 있다. 결국 발굴 결과만을 놓고 보자면, 발해인들에게 온돌이 일반화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온돌은 발해의 수도나 지방에 상당히 많이 보급되었던 난방장치였다.
고구려에서 계승된 온돌이 발해에서도 발견되고 있다는 점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사실과 함께 발해의 주민구성문제를 푸는 중요한 열쇠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본다. 말갈 지역으로 불리는 지역에서도 온돌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또한 문화적 보수성이 강한 온돌이 당나라 건축유지에서 그렇게 발견되고 있지 않다는 점은 고구려나 발해문화가 갖는 독자성이 분명했다는 반증일 것이고, 나아가 세계에서 아파트에 온돌이 보편화된 나라가 한국이라는 점을 생각하자면, 문화사적 측면에서 발해사의 민족사적 귀속문제에 대한 해답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Ⅴ. 결 론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은 이밖에도 벽화 미술과 음악, 성곽체제 등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만 美術과 音樂은 유행을 타는 분야로서 先進的 唐文化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벽화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石室墳에 壁畵를 넣은 전통은 고구려로부터 전수받은 것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 城郭 築造 방식 역시 그 繼承性을 엿볼 수 있는 分野이다. 그러나 高句麗가 山城 중심이었다면, 渤海는 平地城 중심이었다. 때문에 일정하게 그 방식이 다를 수도 있었겠지만, 고구려 성곽 축조방식이 발해에도 일정하게 원용되었을 것은 분명하지 않을까 한다. 아직 많은 부분에서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 산성의 雉 형식이 러시아의 발해유적인 크라스키노 평지성에서도 발견되고 있는 것 등이 그러한 예라고 하겠다.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보다 심화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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