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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高麗의 高句麗 繼承意識 /朴 漢 卨(강원대 명예교수)




                    Ⅰ. 序  言

어떤 王朝가 새로 建國될 때에 과거의 어떤 나라를 繼承한다고 표방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니 첫째로 새 王朝 建國 主體가 前 王朝의 後裔이든가, 둘째로 새 王朝가 前 王朝를 繼承할 名分, 예를 들면 새 王朝의 國民이 前 王朝의 遺民이라든가,  셋째로 새 王朝가 前 王朝를 繼承한다고 표방하는 것이 특별한 이해관계가 있다든가 하는 경우가 그것인데 高麗가 高句麗를 계승한다는 것은 이러한 세가지 내용에 모두 해당하는 것으로서 특히 첫째 · 둘째 내용과 절실히 관련되어 있다고 하겠다.
韓國 歷史上 高句麗는 기원전 37년에 건국하여 서기 668년에 멸망하였고 高麗는 918년에 건국하여 1392년에 멸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高句麗와 高麗의 사이에는 250년의 공백이 있으며 또 국호도 「高句麗」와 「高麗」로 차이가 있고, 특히 高句麗 멸망에서부터 高麗 건국 이전까지의 200여 년 동안을 「統一新羅時代」라 하여 高句麗·百濟의 遺民 사회가 新羅에 흡수·동화되는 기간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에 高句麗와 高麗는 완전히 별개의 국가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에 필자가 高麗 建國史 연구를 시작하면서부터 이러한 인식은 잘못된 것으로서 高麗는 高句麗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1) 高麗를 건국한 王建 一族은 白頭山 부근에서 남하해온 高句麗 遺民이었다는 것,  2) 高句麗·百濟 멸망 후 그 遺民들은 新羅에 흡수·동화된 것이 아니라 新羅末 까지 "高句麗人"·"百濟人"으로 존속되고 있었다는 것, 3) 이러한 "高句麗遺民"·"百濟遺民"의 故國 復興의 염원을 기반으로 "後高(句)麗" (내지 高麗)와 "後百濟"의 건국이 이루어 졌다는 것 등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韓·中 兩國의 史書에 中世이전까지는 "高句麗"를 "高麗"로 혼용하였고, 또한 高句麗 멸망후의 高句麗 復興運動을 철저히 추적하는 과정에서, 高麗는 高句麗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는 나라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高麗의 건국은 결국 高句麗 復興運動의 결과로서 "高句麗繼承意識"을 가지고 성립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高麗는 朝鮮王朝를 거쳐 오늘날 우리에게 인계되었으므로 高句麗는 우리의 祖上이며 따라서 우리는 血緣的으로·歷史的으로·文化的으로 高句麗를 繼承하고 있다는 것이다.
高麗가 高句麗 復興運動의 결과로 나타난 나라로서 高句麗繼承理念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필자가 과거에 몇 군데서 지적한 바가 있는데 이 문제는 단순이 과거에 묻쳐져 있던 사실을 밝혀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中國이 高句麗를 과거에 中國의 한 地方 政權이었으며 따라서 高句麗史는 中國史의 일부라고 우겨대는 것을 반박하고 바로잡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면에서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심도 있게 考察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본 論考를 작성하게 되었다.


  Ⅱ. 韓·中 史書의 「高句麗」·「高麗」 混用과 高句麗 繼承認識

韓國 史料를 정밀히 추적해 보면 "高句麗"를 "高麗"로 표기하던가 또는 "高麗"가 "高句麗"를 繼承한 나라라고 표기한 데가 몇 군데 있으며, 또 中國 史書에서도 흔히 "高句麗"를 "高麗"로 혼용하고,  "高麗"가 "高句麗"와 연결된 것으로 인식하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이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먼저 中國의 史書부터 살펴보면 『漢書』와 『後漢書』에는 "高句驪",  『三國志』에는 "高句麗" 라 하였는바, 唐·宋時代에 작성된 주해에는 "高驪" 또는 "高離" 라 표기하였고,  『宋書』에는 "高句驪"라 하면서도 같은 책 「百濟國傳」과 「倭國傳」에서는 "高驪"라고 표기하였으며, 『梁書』에는 國名을 "高句驪"라 하고는 설명문에서는 "王莽初 發高驪兵 以伐胡"라 하였고,  『魏書』에서는 "高句麗"라 하고도 설명문에 "且高麗不義 逆詐非一"이라 하였고, 『隋書』에서는 國號를 "高麗"라 해놓고 설명문에 "自號高句麗"라 하였고,  『周書』에는 國名을 "高麗"라 해놓고「百濟傳」에서는 "北接高句麗"라 하였고, 『明史』朝鮮傳에는 "漢末有扶餘人高氏 據其地 改國號 曰高麗 又曰高句麗"라 하였고, 특히 舊唐書와 新唐書에서는 "高句麗"를 그냥 "高麗"라고만 표기하는 등 흔히 "高句麗"를 "高麗"로 혼용하고 있으므로 中國人은 "高句麗"와 "高麗"의 구별 槪念이 없고 "高句麗"와 "高麗"는 원래 같은 것으로서 표기상의 차이, 즉 同名異記였을 뿐임을 알 수 있다.
한편 徐兢의『高麗圖經』에 "王氏之先 蓋高麗大族也"라 한 것으로 보아  高麗와 동시대인 宋나라 사람들이 "高麗"는 "高句麗"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즉 高麗가 건국하기 전에 살았을 高麗太祖의 先祖들을 가리켜 "高麗大族也"라고 했을 경우 이것은 王建이 건국한 "高麗"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朱蒙이 세웠던 "高句麗"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宋史』에서는 아예 "高麗(王建의 高麗) 本曰高句麗"라는 표기를 하고 있다. 
다음으로 韓國史料를 보면 『三國遺事』에 "後高麗"라는 표기가 있는데 이 "後高麗"는 弓裔가 세운 泰封國의 첫 이름으로서 王建이 "高麗"를 건국하기 이전이므로 "高句麗를 繼承한 나라"라는 뜻으로 쓴 것이며 또한 이로써 우리나라에도 "高句麗"를 "高麗"로도 표기하였던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한편 高麗太祖가 즉위한 후 "復稱高麗王"하였다고 했는데 이것도 "高麗를 다시 칭하였다."는 뜻이 아니라 "高句麗 다시 칭하였다."는 뜻으로 이로써 "高句麗"를 "高麗"로 混稱하고, "高麗"가 "高句麗"와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있었음을 재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高句麗"와 "高麗"는 음운상 으로도 혼용될 수 있는 비슷한 소리였던 것이니 오늘날은 "고구려"와 "고려"로 확연히 구별되는 음을 가지고 있으나 "句"의 획을 포함하고 "句"의 음을 가지고 있는 글자 중에는  · · · ·煦· · · ·  나 煦 같은 자처럼 "후"로 발음되는 것이 있고 " "자 같은 것은 "우"로 발음되는 등 "句"자에 "후"음 또는 "우"음 성향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대에는 "高句麗"가 "고후려" 또는 "고우려" 정도로 발음되어 "高麗"를 조금 길게 발음하는 정도의 음상사이므로 통용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日本 사료에도 "高句麗"를 "高麗"로 표기하는 예가 있었는데 이는 다음 항에서 취급하기로 한다.


        Ⅲ. 高句麗 滅亡 後 復興運動과 高句麗 繼承 問題

高句麗 멸망 후 670년에 劒牟岑이 왕족 安勝을 추대하고 高句麗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나 결국 高句麗국은 부흥시키지 못하고 新羅에 흡수된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神文王 3(683)~4(684)년에 報德國이 소멸되고 그 15년 후인 699년경에 高句麗의 遺將 大祚榮이 渤海를 건국한 것은 高句麗 復興의 성격을 띤 것으로서 日本 史書에 渤海를 가리켜 "高麗"라 한 것과 부합되는 것이다.
한편 渤海 중기인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걸쳐서 遼東地域에 거주하고 있던 高句麗 遺民이 이 지역의 혼란을 틈타 渤海와는 별도로 "小高句麗國"을 세우고 818년에 唐나라에 조공하는 등 활동이 보이나 渤海 宣王 때 渤海에 병합되었으며 渤海는 또 926년에 契丹에게 멸망당하므로 써  북방에서의 高句麗 復興運動은 일단 끝나게 된다.
그리고 이후 渤海의 領土는 遼·金·元·明·淸의 領土로 되었기 때문에 渤海는 外見上 우리와 관계없게 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新羅末의 高句麗 復興運動에 관해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新羅末의 高句麗 復興運動을 살펴보려면 먼저 新羅 三國統一의 불완전성을 파악해야한다. 新羅 三國統一의 문제점은 흔히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국가를 멸망시켰다는 것과, 高句麗의 영토를 대부분 상실함으로써 民族의 활동 영역을 半島안으로 축소시켰다는 점을 들고 있지만 지금까지 간과되고 있었던 또 하나의 큰 문제는 統一新羅가 民族 融合政策에 소홀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먼저 制度的인 면에서 확인할 수가 있는데, 新羅 統一 후 中央軍이라 할 수 있는 「九誓幢」은 孝昭王2년(693)에 완비된 것인데 색깔별로 9개 부대를 설치하고 이를 新羅民 ·高句麗民·百濟民·靺鞨國民·報德城民·百濟殘民 별로 각각 부대를 편성했던 것이 그것이다.
지금까지 九誓幢이 新羅人·高句麗人·百濟人·靺鞨人으로 구성한 것을 新羅가 被征服民을 포용한 것으로 이해했으나 이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즉 九誓幢의 각 부대를 각각 新羅人·高句麗人·百濟人·靺鞨人으로 혼합 구성했다면 이는 民族 融合이라고 하겠으나 각 부대를 특정한 국가 출신 사람만으로 편성하는 것은 사실은 "區別"을 뜻하는 것이며, 區別은 곧 "差別"을 뜻하는 것이다.
한편 新羅末까지 高句麗人과 百濟人이 구별되어 있었던 것은 高麗 太祖의 祖父인 作帝建의 例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즉 高麗史의 「高麗世系」에서 高麗太祖 王建의 祖父 作帝建을 "高(句)麗人"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이 그것인데 이제 그 자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金寬毅의 編年通錄에 이르기를“作帝建은 어려서부터 聰睿神勇하더니...... 장성함에 믿쳐 재주가 六藝를 겸하였는데 書射에 더욱 絶妙하였고 나이 十六에 어머니가 아버지의 맡겨논 활과 화살을 주니 作帝建이 크게 기뻐하여 이를 쏘매 百發百中하므로 사람들이 「神弓」이라 하였다." (作帝建은) 이에 아버지를 뵙고자 하여 商船을 타고 출발하였는데 바다 가운데 이르자 雲霧가 잔뜩 끼어 배가 3일 동안 가지 못하므로 배안의 사람들이 占을 치니 “마땅히 高(句)麗 사람을 내보내라.”고 하는지라 閔漬의 編年綱目에는 혹은 이르기를 新羅의 金良貞이 使臣으로 唐에 갈 때에 그 배에 탔던바 良貞의 꿈에 白頭翁이 말하기를 “高(句)麗人을 남겨두면 順風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다. 作帝建이 弓矢를 들고 스스로 바다에 뛰어 내리니 아래에 巖石이 있으므로 그 위에 섰는 바 안개가 개이고 바람이 잘 불어서 배가 나는 듯이 출발하였다.

한편 作帝建의 孫子인 高麗太祖 王建은 新羅 憲康王 3년(877)에 태어났는바  1대의 년차를 30년으로 보아 그의 祖父인 作帝建이 태어난 것은 대략 60년전인 817년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16세인 때는 대략 832년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로 말하면 高句麗가 망한 668년으로부터 150~160년 뒤, 安勝 등의 高句麗 復興運動이 완전히 실패로 끝난 684년으로부터 140여년 뒤이며 後高(句)麗(901)나 高麗(918)가 성립되기 70~80년 전으로서 이 때에 高句麗人이나 高麗人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作帝建의 기사에서는 너무나 뚜렷하게 "高(句)麗人"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韓國古代史에서 대단히 잘못 인식되고 있는 하나의 큰 문제점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新羅가 百濟와 高句麗를 멸망시킨 후 民族 融合政策을 펴지 않았기 때문에 그 統一은 統一이 아니라 단순한 軍事的·政治的 統合일 뿐 진정한 民族統一이 아니라는 것이며 또한 百濟·高句麗 멸망으로부터 後百濟·後高句麗 성립까지 사이에 비록 高句麗國·百濟國이나 高句麗 政府·百濟政府는 존재하지 못했지만 高句麗人·百濟人은 존속되고 있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後高句麗·後百濟 성립의 배경을 확인할 수 있다. 즉 九誓幢의 예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新羅政府는 被征服國民을 新羅人으로 包容하지 않고 각각 高句麗人·百濟人·靺鞨人으로 구별하고 차별하였으며, 이것은 作帝建을 가리켜 高(句)麗人이라 한데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러한 현실은 高句麗遺民이나 百濟遺民으로서는 불만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新羅는 統合 후 강력한 군사력과 통치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이에 저항할 수 없었으므로 오랫동안 新羅의 통치를 받아 오다가 新羅末에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급속히 약화되고 드디어 각지의 蜂起로 全國이 혼란에 빠지게 되자 高句麗遺民과 百濟 遺民은 그들의 故國을 復興시키어 그들의 명예와 권익을 되찾으려는 高句麗 復興運動·百濟 復興運動을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甄萱의 後百濟 건국기사와 弓裔의 後高(句)麗 건국기사에 간략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먼저 後百濟 건국기사를 보면.

甄萱이 西巡하여 完山州에 이르자 州民이 迎勞하는지라 甄萱이 人心 얻음을 기뻐하여 좌우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 原 三國의 시초에 馬韓이 먼저 일어나고 뒤에 赫(居)世가 勃興하니 그러므로 辰韓과 弁韓이 이에 따라 일어난 것으로서 이에 百濟가 金馬山에 開國한 것인데 600여년만인 摠長 年間에 唐高宗이 新羅의 청에 따라 장군 蘇定方을 보내어 水軍 13만으로 바다를 건너오고 新羅는 金庾信이 軍士를 총동원하여 黃山을 지나 泗 에 이르러 唐兵과 합하여 百濟를 쳐서 멸망 시켰던바 이제 내가 감히 完山에 立都하여 義慈王의 宿憤을 풀지 않으랴? 하고 드디어 (後)百濟王을 스스로 칭하고 設官分職하니 이때는 唐나라 光化 3년이요 新羅 孝恭王 4년(900)이다.

하였고, 後高(句)麗 건국기사를 보면

天福 元年(901) 辛酉에 善宗(弓裔의 원이름)이 스스로 王을 칭하면서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往者에 新羅가 唐나라에 청병하여 高句麗를 파하였으므로 平壤舊都가 한줌의 풀 더미가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으리라”하였다.

고 했는데 이 두 기록이 비록 간략하지만 모두 兩國의 建國과 관련된 것으로서 後百濟·後高句麗 建國의 이유와 이념을 밝힌 것이므로 後百濟·後高句麗 건국의 배경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後三國의 成立은 高(句)麗의 復興·百濟의 復興의 성격을 띠고 나타난 것이었다. 즉 弓裔나 甄萱은 모두 新羅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高句麗의 復興과 繼承·百濟의 復興과 繼承을 주장한 것은 江原·京畿·黃海 등 北部地方에는 高句麗 遺民이 주로 거주하고, 西南地方에는 百濟 遺民이 주로 거주하고 있어서 그들이 高句麗의 復興·百濟의 復興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弓裔와 甄萱은 이들의 희망을 이루어 줌으로써 그들의 지지를 얻어서 자신들의 政治的 目的을 달성하려고 高句麗의 復興·百濟의 復興을 표방하였던 것이다.
수많은 반란 세력 중에서 弓裔와 甄萱만이 정권을 획득하고 국가를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현실을 꿰뚫어 보는 慧眼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高麗太祖 王建은 高句麗의 繼承을 주장하며 後高(句)麗를 세운 弓裔의 政權을 빼앗아 나라를 세웠는데 弓裔가 新羅 출신으로서 정치적 필요에 의하여 高句麗의 繼承을 주장했던 것을 부정하고 자기가 진정한 高句麗 繼承者라는 뜻에서 "다시 高(句)麗를 칭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로써 高麗가 高句麗 繼承意識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 당연함을 알수 있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타항에서 논급되는 것이므로 여기서는 논급을 줄이기로 한다.
그런데 高麗太祖는 渤海를 繼承한다는 의식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첫째로 高麗太祖가 西域僧 襪 에게 "勃海는 本來 나의 親戚의 나라" 또는 "勃海는 나의 昏姻"이라 하여 자기가 渤海와 血緣關係임을 주장하였고  둘째로 高麗太祖는 契丹이 渤海를 멸망시킨데 대하여 적개심을 품고 契丹의 使臣을 海島로 귀양 보내고 선물로 가져온 駱駝 50필을 開城 萬夫橋 아래 매어놓아 굶어 죽게 하였으며  셋째로 渤海가 멸망한 후 934년에 渤海國 世子 大光顯과 백성 수만 명을 받아드리는 등 여러번 渤海遺民을 받아들이고 지원하여 渤海에 대한 關心과 호의를 표한 것이 그것으로서 『續日本記』나 『高麗圖經』의 기록과 같이 渤海가 "高麗國"으로 불렸었다면 高麗太祖의 渤海繼承意識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Ⅳ. 高麗太祖의 出自와 高句麗 繼承 意識

한편 高麗 太祖의 출자에 대해서 살펴보면 당시의 상황을 더욱 확실히 파악할 수 있다. 즉 弓裔와 甄萱은 원래 新羅人으로서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高句麗의 復興·百濟의 復興을 주장했지만 高麗 太祖는 자기 자신이 高句麗의 後裔였기 때문에 高句麗의 復興에 대한 의지와 태도가 단호하고 확고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高麗 太祖의 출자에 대해서는 졸고「高麗 王室의 起源」에서 자세히 취급한 바 있는데 거기에서 본고와 관계있는 것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高麗 太祖의 출자에 관하여 高麗史의 「高麗世系」에서는 "金寬毅의 編年通錄에 이를기를 이름을 '虎景'이라 하는 이가 스스로 호를 '聖骨將軍'이라 하고 白頭山으로부터 遊歷하여 扶蘇山 左谷에 이르러 장가들어 살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 기록대로 본다면 王建의 祖上은 옛 高句麗 땅에서 남쪽으로 이주해온 高句麗의 遺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白頭山 부근은 옛 高句麗 영토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지역인데 특히 그가 '聖骨將軍'이라 자칭하였다는 '聖骨'이란 용어는 우리 歷史上 王族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우리는 虎景이 高句麗의 王族 또는 貴族의 후예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후 虎景의 아들 康忠으로부터 伊帝建·寶育 형제와 作帝建·龍建을 거쳐 王建에 이르게 되는데 이로써 우리는 高麗王室의 내력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보완하는 또 하나의 자료로서 『資治通鑑』권285 後晋紀6 齊王下 開運 2년 11월 戊戌條 기록에 대한 註에 宋白이 말하기를 晉나라 天福  年間에 西域僧 襪 가 來朝하였는데 불점을 잘 쳤다. 얼마 후 高祖를 하직하고 高麗에 노니니 王建이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 때에 契丹이 渤海의 땅을 아우른지 몇 년이 되었는데 王建이 조용히 襪 에게 일러 말하기를 "勃海는 본래 나의 親戚의 나라인데 그 王이 契丹에게 사로 잡혔으니 내가 朝廷을 위하여 이를 쳐서 취하고 舊怨을 풀려고 하는바 大師는 돌아가서 天子에게 아뢰어 마땅히 기일을 정하여 양쪽에서 이를 치게 해 달라.”고 하였다 하고 또 그 본문에서는 “처음에 高麗 王建이 군사로서 인국을 병합하여 자못 강대하였는데 胡僧 襪 를 통하여 高祖에게 말하기를 "勃海는 나의 昏姻"인데 그 王이 契丹에게 사로잡혔으니 청컨대 조정과 함께 이를 쳐서 취하도록 하소서”라고 한 것이 있다. 여기서 "勃海는 本來 나의 親戚의 나라"라는 것과"勃海는 나의 昏姻이라"고 한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우리 古代에 흔히 근친혼이 많았던 것을 생각할 때에 이 기록은 어느 쪽으로 보던지 王建은 渤海와 혈연관계에 있었던 것을 뜻하는 것으로서 위의 「白頭山說」과 함께 高麗王室의 起源이 북방으로서 그들은 高句麗의 後裔였음을 반영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위에서 논급했던 高麗圖經의 "王氏之先 蓋高麗大族也."라한 기록과, 作帝建을 가리켜 "高(句)麗人"이라 한 기록을 종합해 볼 때에 高麗太祖의 출자가 高句麗였던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고 여기에서 우리는 高麗太祖의 高句麗 復興 意志와, 따라서 高麗가 高句麗를 繼承한 나라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Ⅴ. 高麗의 建國理念

이상에서 여러 사료를 통하여 高麗가 高句麗를 계승한 나라라는 것을 고찰하였거니와 高麗 당시의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徐熙가 契丹의 蕭遜寧과 담판한 내용으로써 확인해 보고자 한다.
그런데 徐熙가 蕭遜寧에게 高麗가 高句麗를 계승한 나라라고 주장한것에 대하여 오늘날 이것이 위급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임시방편으로 꾸며댄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서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高句麗와 高麗가 완전히 별개의 나라라고 인식되고 있는 우리 역사체계로서는 있을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것이 잘못된 현상으로서 徐熙의 발언은 정당하고, 高麗王朝는 高句麗 繼承意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 본항의 목적이라고 할수 있다.
高麗 成宗 12년(993)에 契丹의 1차 침입을 당하자 고려는 크게 낭패하게 되었다.
이 때에 대신들은 모두 "重臣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자"는 「乞降論」이나 "西京 以北의 땅을 베어 주고 講和하자"는 「割地論」을 주장하는 것이 대세였으므로 성종은 「割地論」을 따르려 하였는데 이를 적극 반대한 것이 內史侍郞 徐熙였다.
당시에 徐熙의 발언과 상황을 자세히 파악하기 위하여 高麗史 列傳의 「徐熙傳」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成宗 12년(993)에 契丹이 래침하자 徐熙는 中軍使가 되어 侍中 朴良柔·門下侍郞 崔亮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北界에서 방비했는데……거란의 東京留守 蕭遜寧이 蓬山郡을 공파하고 우리의 선봉군사인 給事中 尹庶顔 등을 사로 잡았으므로……
熙는 군사를 거느리고 蓬山郡을 구원하려 하였는데 소손녕이 성언하기를 "거란이 이미 高句麗의 옛땅을 점유하였거늘 이제 너의 나라가 疆界를 침탈하므로 來討하는 것이다." 하고 또 글을 보내여 말하기를 "우리가 사방을 통일하였는 바 아직 귀부하지 않은 것은 기어이 소탕할 것이니 속히 항복하여 오래 머물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熙가 글을 보고 돌아와 아뢰기를 "강화할만한 가능성이 있습니다."고 하였다
소손녕은 또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80만 대군이 이르렀다 만일에 강을 건너와 항복하지 않으면 모름지기 모두 殄滅할 것이니 高麗의 군신은 마땅히 속히 군전에 항복하라고"고 하였다……
成宗은 군신을 모아 의논케 하니 혹은 말하기를 "임금은 서울로 돌아가고 중신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을 빌자." 하고 혹은 말하기를 "西京 以北의 땅을 베어 주고 黃州에서 巴嶺에 이르는 선을 국경으로 하자." 하였는 바 成宗이 장차 割地論을 따르려 하여 서경의 창미를 열어 백성이 가져가게 하니……
熙가 아뢰기를 "식량이 족하면 성은 지킬 수 있고 싸움도 이길수 있는 것입니다. 전쟁의 승부는 강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능히 기회를 보아 움직이는데 있는 것이거늘 어찌 서둘러 쌀을 버리겠습니까?"……하였다.
熙가 또 아뢰기를 거란의 東京으로부터 우리 安北府에 이르기까지 수백리의 땅은 모두 生女眞이 점거했던 것으로서 光宗께서 이를 취하여 嘉州와 松城을 쌍으신 것인데 지금 거란이 래침한 것은 그뜻이 이두성을 취하려는데 불과한 것이요 "高句麗 舊地를 취하겠다"고 떠들어 대는 것은 실은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병세가 크고 성하다 하여 졸속히 西京 以北의 땅을 떼어주는 것은 잘못된 계책입니다.
또 三角山 이북은 모두 高句麗의 옛 땅인데 저들이 영토욕을 가지고 한없이 요구한다면 모두 내어주시겠습니까? 더구나 땅을 베어 적에게 주는 것은 萬世의 수치입니다. 원컨대 임금께서는 서울로 돌아가시고 신등으로 하여금 저들과 한번 싸워본 연후에 의논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고 하니…… 成宗이 옳다고 하였다……
소손녕은……오래도록 회보가 없자 드디어 安戎鎭을 공격하다가 高麗의 中郞將 大道秀와 郎將 庾方에게 패하였으므로 감히 더 직격하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어 항복만 재촉하였다......성종은 군신을 모아서 묻기를 "누가 능히 거란영으로 가서 구설로 적병을 물러가게 하고 萬世의 공을 세우겠는가?"하니 군신이 아무도 응하지 않았는데 熙가 홀로 아뢰기를 "臣이 비록 불민하나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으오리까?"하고 자원하였다. 왕은 강두로 나아가 그의 손을 잡고 격려하여 전송하였다.
이에 熙가 영문에 이르러 뜰에서 소손녕과 서로 읍하고 당에 올라 예를 행한 후 동서로 마주 앉으니 소손녕이 熙에게 일러 말하기를 "그대의 나라는 新羅의 땅에서 일어났고 高句麗의 땅은 우리가 차지한 바인데 高麗가 이를 침식하며, 또 高麗가 우리와 땅을 접하였으면서도 바다를 건너 宋과 관계를 맺으므로 오늘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니 땅을 베어 바치고 朝聘을 닦을 것 같으면 무사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熙는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곧 高句麗를 繼承한 나라이며 따라서 國號를 高麗라 하고 首都도 平壤인데 만약에 지계를 가지고 논한다면 귀국의 東京이 모두 우리 영토이거늘 어찌 우리 보고 침식했다고 하겠습니까? 또 鴨綠江 내외도 또한 우리의 경내인 바 현재 女眞이 곳곳에 숨어 살며 고약하게 노략질을 해서 왕래의 어려움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니 귀국과 조빙이 불통하는 것은 여진 때문입니다.  만일에 우리로 하여금 여진을 쫓아내어 우리의 舊地를 회복하고 城堡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한다면 어찌 脩聘치 않겠습니까? 장군께서 저의 말대로 帝에게 보고한다면 어찌 허락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고 하였는데 辭氣가 慷慨하였으므로 소손녕은 강요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사실대로 보고하니 거란제가 말하기를 "高麗가 이미 和親을 청하였으면 마땅히 회군토록 하라"고 하였다……
희가 거란영에 머문지 칠일만에 돌아 오는데 소손녕은 駱駝 10수·말 100필·양 1000두와 비단 50필을 선물로 주어 보내니 成宗이 크게 기뻐하여 江頭까지 출영하였으며…… 平章事로 영전하였다.

이상 담판의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즉 소손녕이 "高麗는 新羅땅에서 일어났고 高句麗 옛 땅은 거란이 차지했는데 高麗가 이를 침식한다."는 현실논을 주장한데 대하여 서희는 "高麗는 高句麗를 계승한 나라이며 따라서 국호를 高麗라 하고 수도도 평양이다. 그리고 소손녕이 留守로 있는 (거란)東京도 우리영토"라고 이념논적 반격을 하고 있다. 결국 거란은 高麗와 和親을 맺고 회군했을 뿐 아니라 高麗가 淸川江에서 鴨綠江 사이의 땅을 수복하고 9성을 쌓는 것을 승인한 것으로 보아 소손녕과 거란帝는 서희의 高麗의 高句麗 繼承論에 승복하고 이를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로써 高麗人들은 高麗가 高句麗를 계승하였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것이 곧 高麗의 建國理念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Ⅵ. 結    論


이상 高麗의 高句麗 繼承意識에 관하여 살펴보았거니와 이제 이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 역사상 高句麗는 668년에 멸망하였고, 高麗는 918년에 건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사이에 200여년 공백에 대하여 별다른 설명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당연히 高句麗와 高麗는 서로 단절된 별개의 국가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의 각 항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 中國이나 우리나라 史料에 "高句麗"를 "高麗"로 혼칭하고 또 高麗가 高句麗를 계승한다는 기록이 여러 군데 있으며, 2) 高句麗 멸망 후 高句麗 復興運動史를 추적해 보면 내적으로는 高句麗遺民을 통하여, 외적으로는 渤海를 통하여 高麗로 연결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서 어느 면으로 보던지 高句麗가 高麗로 연결되고 있으며, 3) 高麗의 건국자인 王建의 출자가 高句麗의 후예로서 누구보다도 高句麗 復興의 의지가 강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高麗는 高句麗 계승의식을 가지고 성립된 나라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高麗 사람들의 高句麗 繼承意識은 거란 침입 때 소손녕과 담판한 서희의 발언에 명쾌하게 나타나 있어서 高麗人의 高句麗 계승의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 中國이 "高麗는 高句麗와 관계가 없으며, 高句麗는 中國의 한 地方政權이었기 때문에 高句麗史는 中國史의 일부"라는 주장이 터무니없는 논리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高句麗가 高麗와 朝鮮王朝를 거쳐 오늘의 우리에게 인계된 것이므로 高句麗는 우리의 祖上이며 따라서 우리는 血緣的으로·歷史的으로·文化的으로 高句麗를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앞으로 高句麗 史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더 많은 연구를 진행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