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 論
오늘날 우리 학계는 東北Asia 住民移動의 큰 줄기인 古Asia族(Palio-Asiatics)과 Altai語族의 움직임에 주목하면서, 우리 靑銅器文化의 享有者인 濊貊族이 新石器文化의 담당 주민이었던 古Asia족을 征服·吸收·同化·統合하는 과정이 韓民族의 形成過程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형성과 起源, 그리고 古朝鮮·扶餘·高句麗 주민의 正體性을 논함에 있어 그 출발점이 되는 것은 예맥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 형성과 그 문화의 着根 과정에서 時·空間的 바탕이 된 '濊貊文化圈'의 문화적 內包는 청동기문화에서 鐵器文化로의 진전을 示顯하고 있다.
특히 예맥문화권은 B.C. 7 C 경 이후 동질적 문화에 기반한 그러나 지역적으로 특화된 제 주민집단의 문화들로서 繼起的으로 발전해 나간다. 그리고 예맥은 이를 바탕으로 훗날 中國 東北 3省 지방(이하 論旨 전개의 편의 상 '滿洲'라 부르기도 함)과 韓半島에는 고조선·부여·고구려 등 國家形性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集團에 있어 正體性(identity) 문제의 핵심은 동아리 내부의 同質性의 확인과 다른 집단과의 差別性을 認識함에 있다. 곧 그것은 우리의 남과 다름을 인식함과 다름 아니다.
따라서 本稿의 주제인 '濊貊·부여와 고구려의 정체성' 문제의 초점은 예맥에서 비롯한 부여와 고구려의 동질성 확인에 있다. 또 이는 이들과 특히 漢族을 비롯한 非濊貊系 주민집단의 문화와 정치세력들과의 차별성을 검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제 필자는 본고에서 먼저 文獻資料 상에 나타난 예맥의 실상을 검토하고자 한다. 또 필자는 考古資料를 바탕으로 예맥문화권 형성·전개 과정을 고찰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이를 바탕으로 예맥·부여와 고구려의 정체성 문제를 검증해 보고자 한다.
Ⅰ. 文獻에 나타난 濊貊
韓民族의 형성과 기원, 그리고 고조선·부여·고구려의 住民과 그 문화의 정체성을 논함에 있어 언제나 濊貊과 더불어 논의되고 있는 것이 '東夷'·'Altai語族'의 문제이다.
Ⅱ-1). '東夷'와 'Altai語族'
'東夷'
최근까지 우리 학계는 우리 민족의 來源과 관련, 漢族과 더불어 중국 上古史 전개에 있어 중요한 위상을 점하고 있는 '東夷族'을 거론해 온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우리 민족문화의 바탕을 底礎하였던 청동기문화가 中原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는 점에서,또 夷夏東西說 자체가 중국 新石器文化 多中心的 發展論에 의해 비판·극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신중히 재고해 볼 여지가 없지 않은 것이다.
특히 春秋戰國時代까지 山東省·江蘇省 북부 일대 등에 거주했던 동이와 漢代 이래의 諸史書에 나오는 東北 지방의 그것은 문화적·種族的으로 峻別되어야 한다.
한편 燕 세력이 殷遺民을 이끌고 북방으로 진출, 大凌河 하류 유역에까지 도달, '孤竹國'으로 實在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 '箕子族'은 '箕侯'銘 등이 새겨진 靑銅禮器 埋納 遺蹟 분포를 근거로 살펴 볼 때, 아마도 一時的인 變故로 인하여 '永保尊彛'를 황급히 땅에 묻고, 다시 西쪽으로 이동, 이후에 결코 東北方으로 이동하지 않았다고 파악하여야 한다.
'Altai語族'
오늘날 우리 학계가 한민족의 기원과 형성을 논할 때 東夷와 더불어 흔히 거론하는 것이 'Tungus族'의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Altai어족 중의 한 民族單位로 설정될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先秦文獻에 나타나는 예맥 및 漢代 이래 중국 측 사료 상의 부여·고구려 등의 우리 민족은 婁·勿吉·靺鞨 등의 Tungus족은 준별되어야 한다. 또 夫餘·韓共通語는 이런 관점에서 Tungus·Mongol·Turk의 共通語와 더불어 Altai祖語에서 독립적 단위를 점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Altai종족의 구성 가운데서 독자적인 단일종족인 바, 대단히 오래 전 先史時代에 Altai종족에서 분리해 나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관점에서 'Tungus=韓民族說'은 부정될 수 밖에 없다.
Ⅱ-2). 韓國學界에서의 '濊貊' 認識
우리 민족의 기원·형성 문제 해명을 위한 노력은 Altai어족에서 갈라져 나온 하나의 독립된 민족단위인 예맥의 실체 구명 문제로 집약된다. 또 그것은 고조선과 부여 및· 고구려의 주민 구성과 문화 계통을 밝히는 문제의 열쇄가 되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中國 史書의 우리 역사에 대한 敍述 내용의 信憑性 문제이다. 중국 歷代 正史와 기타 文獻들은 주변 민족들에 대한 보다 풍부하고 체계적인 기록임을 자부하고 있다. 타자에 의한 기록은 객관성을 제고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기록자의 관점과 이해에 따라 일방적으로 歪曲될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중국측 기록들의 斷片性이나 부정확성 문제는 일단 且置하더라도, 그 기록들이 중국인의 전통적인 天下觀과 華夷思想에 의해 진상이 크게 이지러졌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그 역사서들은 중국 天子의 當爲的인 지배 범위를 '天下'로 상정하고, 이민족 세계를 그 천하의 일부에 포함시켜 주변 민족의 역사를 사실상 중국 王朝史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한편, 문화적으로 월등한 '中國'에 臣屬해야만 하는 野蠻 단계의 民族像을 구축하는데 한 몫을 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록들은 자체의 기록을 갖지 못하였던 주변 민족들의 초기 역사에 관한 '유일한 문헌자료'로서 이용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주변 민족들이 독자적인 사서를 편찬할 때도 이 중국 측 기록을 그대로 踏襲하였고, 이것이 다시 중국 측에 전달되어 그 잘못된 역사상을 확대 재생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 이와 같이 형성된 전통적인 '東北觀'이 현재까지 隱然中 계승되고 있는 예가 드물지 않음은 물론이다. 오늘날 公刊된 東北工程 관련 고구려사 및 東北地方史 연구 성과물의 상당 수는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종래 우리 학계의 일각에서 우리 上古史 및 古代史 전개 과정 상 독자적 단위세력 집단으로서 존재한 '扶餘族'의 分裂과 移動이라는 관점에서, 北扶餘를 東明이 건국한 松花江 유역의 부여로, 東扶餘를 東濊로, 南扶餘를 百濟로 파악하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한편 或者는 한민족의 기원 및 형성 과정을 東夷史의 시·공간적 전개와 그 분화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견해는 '韓城河北說'의 입장에서 오늘날 한국인의 祖型을 동이 계통의 '韓·追(濊)·貊', 그것도 韓을 중심으로 한 濊貊族이라 주장한 바 있다. 곧 이런 입장은 한국 상고사의 전개 자체를 '韓=朝鮮系(조선·眞番·三韓 등)'와 '濊貊=부여계(고구려·부여 등)'의 양계가 지역과 시기를 따라 혹은 분리 혹은 결합을 거듭하는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나 한국 상고사 및 고대사의 전개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장기간 또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공통의 문화 기반을 다져 나가면서 보여준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시대로의 계기적 진전상과 다름아니었다, 이점에 비추어, 이러한 견해는 우리 민족사 인식체계에 있어서의 담당 주민 및 문화의 二元的 構成論으로 飛火, 확대 해석될 우려가 없지 않다는 문제점도 함께 갖고 있음을 지적해 둔다.
이 문제와 관련, 학계는 '濊·貊·濊貊'의 상호관계, 곧 濊와 貊이 동일한 種族으로 파악될 수 있는가 여하를 밝힘을 논의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먼저 濊貊同種說의 입장에서, '濊貊'이라는 명칭은 濊族과 貊族을 합친 汎稱이 아니라, '貊'族인 고구려를 지칭하며, 漢代 이후 '예'와 '(濊)貊'은 동일 계통 내에서 각각 구분되는 실체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濊貊同種說의 관점을 따르더라도, '濊貊'이란 連稱이 아니라 개별적 존재로서 先秦時代부터 '濊'와 '貊'으로 표기되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이 '濊貊'은 '濊'와 '貊'이라는 각기 별개의 單稱을 가진 지역적으로 분별되는 동일 종족이었던 것이다. 곧 '貊族'은 遼東과 한반도 일부에 분포하며, '濊族'의 住地는 吉林·松花江 및 嫩江 유역 그리고 한반도 일부로 비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이 예와 맥의 주지를 일정 지역에 고정시켜 이해하는 것보다 그들이 거주하던 넓은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던 諸事象의 시간적 선후 관련성을 유념하여 고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선진 시대 이래 예와 맥은 고조선·부여·고구려 등 여러 국가의 계기적인 성립·발전과 더불어 부단한 변화상을 示顯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경우 맥의 주지를 '濊'라 하지 않고, 예의 그것을 일부 '濊貊'이라 지칭하기는 했어도 '貊'이라 한 적이 없었음은 눈여겨 볼 점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은 이들 예와 맥이 남쪽의 '韓族'과 더불어 韓民族 구성의 근간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래와는 다소 다른 視點도 없지 않다. 곧 이런 입장은 종래의 예맥 문제 연구 성과를 住民移動論과 分布說로 분별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곧 이 견해는 고구려를 세운 족속으로 거론되는 先秦 문헌 상 '貊族'이란 고대 黃河 유역 주민들이 그 북방의 족속들을 지칭하던 일종의 汎稱으로서, 특정한 족속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이 견해는 分布說이 사실이라 할 경우라도, 北中國 방면의 맥족은 한국인의 기원이나 고구려사와의 관계에서 볼 때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본다. 또 이런 입장은 移動說 역시 동이족 혹은 맥족의 이동 과정이나 그 결과물이 考古學 상으로 논증되어야만 그 유의미성이 확인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Ⅱ-3). 北韓 및 外國學界에서의 '濊貊' 認識
北韓 史學界는 그들의 '古代·中世史時代區分論爭(1956∼1963 A.D.)' 이후 고조선·부여·'辰國'을 중심으로 하는 나름대로의 '고대사' 인식체계를 구축, 그 인식의 출발점을 예맥족의 역사적 전개에 관한 실상 해명을 위한 노력에서 구하고 있었다.
李址麟은 본래 '북방족'인 예와 맥은 한 개 족속의 두 갈래로서, 신석기시대 ,늦어도 B.C. 2,000여 년 이전에 요동·요서 지역에 정착했다고 본다. 특히 그는 맥족의 실체 파악을 위한 전제로서 '秦·漢代 이전의 東胡=貊'이라 상정, 맥은 처음부터 예의 지역 북방에 거주, B.C.10 C 이전 시기에 이미 그 일부가 중국 북부에까지 진출, 늦어도 B.C.5 C에는 요서의 熱河·凌源·朝陽과 요동의 고조선 지역 북부에 걸쳐 '貊國'을 건립하였으나, 匈奴와 燕 세력에 밀려 그 활동 구역이 요동으로 국한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河北省에서부터 요동·요서 일대에 걸치는 지역을 그 주지로 하던 예가 요동의 蓋平을 수도로 하여 세운 국가가 '고조선'이었던 바, 이 예족이 '고조선족'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또 리지린은 부여란 송화강 이북에 위치하였던 맥족('北夷')이 세운 맥국의 일부 지역인 ' 國'의 통치집단 중의 일부가 늦어도 B.C.3 C 중기 경 이미 고조선의 세력권 하에 포섭되어 있던 예인의 나라인 '不與之國'을 정복하고 세운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북한 학계가 1970年代 이후 '주체사상'과 그의 史的 表象인 '주체사관'의 규정력 하에서 진행한 '고대사' 연구 성과 또한 기본적으로는 1960年代 그것과의 단절이 아닌 所與로서의 정치상황 변동에 照應한 變容과 다름 아니었다.
李址麟과 姜仁淑은 예와 맥이 '고대조선종족'으로서 그 중 예족은 B.C. 8∼7 C 이전에 '노예소유자국가'인 '고조선'을 세웠고, 맥족은 그보다 얼마간 늦게 부여·고구려를 세웠으며 그 일부는 고조선 주민의 일부를 이루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특히 맥족은 B.C. 5 C 경 열하 동쪽에서 內蒙古에 걸치는 지역인 大凌河 중류의 조양 지방 동쪽 지역에 '맥국'을 세웠는데, '高離國' 혹은 '北扶餘'는 이 맥국의 별칭인 바, 고구려는 B.C.3 C 초 이 '貊國=高離國=北扶餘'에서 갈라져 나온 세력이 고조선의 졸본 땅에 세운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1979年 第1板 조선전사 는 부여란 B.C.5 C 경 '고대조선족'의 한 갈래로서 열하 서쪽까지 진출한 바 있던 맥족 계통 중의 한 나라인 嫩江 서쪽에 있던 北夷 國(또는 북부여)의 일부 세력이 예족의 주지인 北流松花江 하류 일대에 이주, 그곳의 원주민(예족)을 예속시키고 세운 나라라는 견해를 개진하고 있다.
그러므로 1970年代 북한 사학계는 '고대조선족'의 존재를 매개로 부여뿐만 아니라 고구려까지도 '貊國=高離國=北扶餘'에서 직접 분화되어 나온 세력에 의해 건국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 학계는 고구려·부여 양국의 出自系統 상 位格의 等價性과 고구려 건국 時點 引上의 가능성을 제시함을 통하여, 고구려가 그들의 '조선사' 인식체계 상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과 비중을 제고할 것을 기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整地 작업을 거쳐 북한 학계는 1990년대에 들어와 B.C. 277 年을 고구려 建國紀年으로 규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손영종은 '고구려 봉건국가 초기의 주민구성'을 논함에 있어, 고조선·부여·고구려 사람들이 다 같은 '고대조선족'의 여러 갈래였던 만큼, 굳이 고조선 주민을 예족, 고구려 주민을 맥족 그리고 선주민인 예족을 정복하고 세운 맥족의 나라 부여 등으로 분별·인식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 기왕의 견해와는 그 입장을 달리 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입장은 1991년 제2판 조선전사2:고대편 이후 북한 학계에서 변함 없이 관철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고대조선족'을 주체로 하는 '高句麗 1000年說'은 '조선 옛류형사람 본토기원설'·'古朝鮮의 建國紀年=紀元前 3,000年紀 初說'과 더불어 최근의 '조선민족제일주의'에 의거한 새로운 조선사 인식체계 구축을 위한 노력의 일환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중국 학계의 凌純聲은 예맥 동종설의 관점에서 '濊'를 濊水 지역에 거주하였던 貊族이라고 보고 있다. 또 芮逸夫(1955)도 같은 입장에서 韓民族은 '濊貊'과 '韓'의 양계로 구성되었으며, 그 거주 분포에 따라 濊族'은 한반도 중북부·송화강·吉林·嫩江 등에, '貊族'은 山東· 遼東·渤海岸 등에 거주하였다고 본다. 한편 文崇一(1958)은 고구려의 '貊'과 先秦 대의 '맥'을 같은 족속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후자가 이동하여 전자가 되었다는 시각(住民移動說)을 부정하고, 애당초 이들 양자는 그 分布相을 달리하는 토착집단들이었다(分布說)고 보고 있다.
日本 학계의 경우, 三品彰英이 예맥 동종설의 맥락에서, 선진 문헌 상 '貊'은 北方族에 대한 汎稱이며, '濊'는 秦 대 문헌에서 처음 나타남을 지적하였다. 그는 漢 대의 범칭적인 '濊'는 고구려·부여·東濊를 포괄하는 民族名이고, '濊貊'이라는 熟語的 호칭은 '濊'라는 현실적인 민족명과 古典的인 北族에 대한 범칭인 '貊'을 결합시킨 것이라 주장하였다. 또 그는 고구려를 지칭하는 '貊'은 민족명인 汎濊族 내의 특정 部族名으로 파악한 바, 곧 漢 대 이후의 '貊'은 '濊'와 동일 계통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한편 三上次男은 濊·貊異種說의 입장에서, '濊族'은 有文土器文化를 영위, 생활방식에 있어서 狩獵·漁撈의 비율이 컸던 古Asia족 계통이며, '貊族'은 無文土器文化를 남긴 Tungus 계통임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 견해는 빗살문토기문화와 무문토기문화가 共時的 존재가 아니라, 通時的인 선후관계를 가진 文化였다 점에 비추어 문제점이 적지 않다.
유.엠.부찐은 古朝鮮 주민 구성의 토대는 Altai種族인 濊와 貊이며, 이 중 貊族은 그 서쪽 지역(요서 지역·요하 중류의 盆地·요동반도·한반도의 북서 연안 지역)에, 그리고 濊族은 그 동쪽 지역(길림 지방의 남쪽 지역·한반도의 북쪽 나머지 지역)에 거주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이런 종족들의 혼합이 遼寧 지방 동부와 鴨綠江 중류와 하류의 溪谷을 接脈 지대로 하여 이루어졌고, 그 결과 새로운 人種名 즉 '濊貊'이 나타났다고 파악한다. 또 그는 이러한 과정은 고대 한국의 종족들이 國家體制(고조선을 말함:필자)를 상실함과 더불어 중단, '예맥'이라는 인종명이 점차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상의 제 논의를 감안해 볼 때, 고조선과 부여·고구려 주민의 민족적 정체성 문제의 해명은 韓民族 형성의 본원이 되는 Altia語族인 濊貊의 실체 구명 노력과 직결된다고 잠정적으로 결론 지을 수 있겠다. 이 점은 고고자료를 바탕으로 한 예맥문화권의 형성과 전개 양상을 통해 새삼 검증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Ⅱ. 濊貊文化圈의 形性과 展開
<地圖 1> 靑銅器時代 濊貊文化圈의 형성과 전개.
(기존 지도 수정)
紀元前 2,000年紀 東Asia文明의 중심은 農耕文化圈의 中原 및 遊牧文化圈의 蒙古高原-Siberia 일대였다. 滿洲와 韓半島 그리고 日本列島는 그 중심에서 放射되는 빛에 의해 역사의 黎明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민족문화의 原型은 몽고고원-시베리아 일대 유목 청동기문화의 영향 아래에서 비롯된 예맥 청동기문화에서 그 뿌리를 찿을 수 있다.
B.C.1,100∼800年代 이후 中國 東北地方 청동기문화는 琵琶形銅劍·多紐鏡·無文土器·石棺墓와 支石墓를 그 문화적 내포로 하여 확산·발전되었다. 특히 비파형동검이 중국의 遼寧省·吉林省 및 한반도 등을 포괄하는 청동기시대 濊貊文化圈의 標識遺物로서 위상을 점하고 있음은 이미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최근 多 鏡 역시 비파형동검과 더불어 예맥문화의 특성을 뚜렷히 드러내고 있는 유물로서 새삼 주목받고 있다.
<圖 1> 琵琶形銅劍·多 鏡
(도판 사진 scan)
이 문제와 관련, 우리 학계 일각에서는 그 上限이 B.C.10 C 이전으로 編年되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에 있어 중국 동북지방 및 한반도 등지에 분포된 琵琶形銅劍을 '濊貊Ⅰ期文化'의 所産으로, 그 이후 起的으로 전개되는 '細形銅劍'을 그 표지유물로 하는 鐵器時代를 '濊貊Ⅱ期文化'로 파악한 바 있다. 이러한 견해는 그 문화의 담당 주민과 歷史性의 문제와 관련, '濊貊文化圈'의 時·間的 범위의 想定을 가능케 하고 있다.
따라서 예맥문화권은 이 시기 濊貊이 주체가 되어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성립·전개되었던 同質的 基底文化를 바탕으로 한 廣域의 文化圈을 일컽는다. 이 광역의 문화권은 B.C.12 C∼10 C 경 성립한 뒤, 이것은 B.C. 7 C 경 이래 각기 지역별·주민집단별 특성을 드러내는 여러 層位의 下位文化圈으로 분화·발전해 나간다
따라서 이러한 예맥문화권의 검토가 古朝鮮·扶余·高句麗 등의 정체성 究明하기 위한 先次的 과제가 됨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오늘날 우리 학계는 예맥문화권의 표지유물로서의 비파형동검이 遼寧地域의 '靑銅短劍'과 직접 연결됨을 분명히 하면서도, 이 비파형동검문화의 성립과 中心地 比定 및 그것과 무관하지 않은 古朝鮮 실상 파악을 둘러싸고 제반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遼西地方에서 비파형동검을 伴出하는 考古文化의 예맥문화권으로의 歸屬 여부의 문제와도 무관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현재 이 문제와 관련 된 제 논의는 중국 학계 및 북한 학계는 물론 국내 학계 내부에 있어서 조차도 상당한 視角差를 드러내고 있는 실정이다. 곧 이 문제에 대한 해명 노력은 청동기시대 예맥문화권의 성격 및 그 시·공간적 범위를 밝힘에 있어 선결 과제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 학계는 內蒙古 지방은 물론 그 이남 大凌河·小凌河 유역 청동기문화까지 모두 '夏家店上層文化'로 總 함을 일반적 慣行으로 삼고 있다(以下 필자는 이러한 중국학계가 云謂하는 '夏家店上層文化'를 서술 편의 상 '廣義의 夏家店上層文化'라 지칭함). 아울러 이들은 이 '廣義의 夏家店上層文化'의 하담자를 東胡 혹은 山戎으로 보고 있다.
<圖 2> 南山根 M101 石槨墓 出土 琵琶形銅劍.
(도판 사진 scan)
중국학계는 曲刃과 直刃式 銅劍 7 點과 더불어 琵琶形銅劍 1 점이 共伴된 내몽고 지방 老哈河 유역 南山根 M101 石槨墓의 존재에 주목, 이 문제의 해명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무덤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이 전체 銅劍의 1/8에 불과한 점에 비추어 이를 하가점상층문화의 普遍的이고 固有한 樣式의 동검이라 보고 있음은 설득력이 없다. 또 출토된 동검들의 주내용인 直刃匕首式銅劍의 淵源을 殷·周靑銅器文化에서 찿으려 함도 내몽고 지방의 직인검은 北方 草原地帶 청동기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 비추어 타당성이 없다.
<圖 3> 小黑石溝 M8501 出土 琵琶形銅劍8.
(도판 사진 scan)
중국학계는 남산근 M101 석곽묘나 같은 지역의 小黑石溝 M8501 石槨墓가 西周 晩期∼ 春秋 早期(B.C. 8 C)로 編年된다는 점을 들어 비파형동검의 夏家店上層文化 起源說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동검이 하가점상층문화 中期에 비로소 내몽고 東南部 지역에 출현한다는 점에 비추어, 비파형동검은 하가점상층문화의 在來的 요소가 아니라, 中期에 이르러 流入되는 別系統의 동검임이 틀림없다.,
한편 오직 비파형동검만 출토되는 내몽고 寧城縣 靑山 孫家溝 石槨墓 M7371의 의존재는 내몽고 동남부 지역과 遼西地域의 文化圈을 구분할 수 있는 가능성을 示唆해 준다. 그러나 廣義에서, 老哈河 상류와 대릉하 상류 中間地帶는 柄曲刃式銅劍과 비파형동검의 相合地帶라 파악할 수도 있다. 그런데 곡인공병식동검은 이 重複地帶에서 출토되는 동검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이 동검의 분포는 대체로 노합하 유역을 중심으로 내몽고 동남부 지역에 局限되어 있다. 따라서 노합하와 대릉하 중간지대에서 努魯兒虎山脈 上下地帶를 연결한 橫線이 곧 곡인공병식동검 南限界線이 된다. 이 지대로부터 더 남하한 대릉하 유역에서은 餘他 曲刃系銅劍이 발견되지 않는 점에서 단순한 琵琶形銅劍文化地域이라 파악할 수 있다.
<圖4> 朝陽 十二臺營子 M1
(도판 사진 scan)
그러면 大凌河 유역 곧 遼西地方에서 현저해지고 있는 비파형동검문화의 실체는 무었일까 ? 종래 우리 학계는 이 문제 구명과 관련, 朝陽 十二臺營子M1에 존재를 눈여겨 본 바 있다. 이 石棺墓는 南山根 석곽묘와 別系統의 墓制로서 '石板'을 이용 '蓋口'하는 葬式을 쓴 바, 이는 遼東地域 석관묘 내지 石蓋石棺墓와 연관된 葬法이다. 또 이곳에서 나온 多 銅鏡 3 枚는 노합하 유역과 대릉하 유역의 청동기문화의 樣相을 구분 짓는 가장 특징적 표지유물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다뉴경의 분포 범위가 내몽고와 요서 지방을 구분짓는 努魯兒虎山脈을 넘지 않음은 주목할 사실이다.
<圖5> 建平縣 出土 多 銅鏡(M851/M881)17
: 建平 大拉罕溝 M851와 建平 手營子 M881
(도판 사진 scan)
이러한 다뉴동경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建平 大拉罕溝 M851와 建平 手營子 M881을 빼 놓을 수 없다. 종래 우리 학계 일각에서는 중국 동북 지방 석관묘에서의 劍/鏡 共拌現象만을 언급해 온 바 있다.그러나 노로아호산맥 南麓 高山丘陵 山間地帶에 자리한 건평 포수영자 M881 석곽묘에서 [비파형동검/雙 銅劍/天河石製管玉]이 동반 출토된 사실은 遼寧 지역에서도 한반도의 청동기시대에 종종 보이는 劍·鏡·玉 共拌現象을 확인하는 새로운 계기가 된 바 있다. 또 이점은 遼西와 遼東 그리고 韓半島 세 지역 청동기문화의 系統性을 짐작케 하는데 있어 하나의 실마리를 건내 주고 있는 셈이다.
<圖6> 喀左縣 南溝門遺址
(도판 사진 scan)
'魏營子類型文化'란 요서의 비파형동검문화의 직전 단계(12 C B.C.)에 下家店下層文化와 비파형동검문화('凌河類型'혹은 '十二臺營子類型') 시기 사이에 介在하는 地方色 강한 문화이다. 喀左縣 南溝門遺址는 [第1期層:下家店下層文化·第2期層: 魏營子類型文化(12 C B.C.)·第3期層: 石墓群·第4期層: 戰國中期 前後 土壙墓, 戰國 晩期 甕棺]의 層位로 구성되는 바, 이 유적을 통해 대릉하 유역 청동기문화의 변화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남구문 제3기층에서는 銅劍·銅鏃·銅 등 銅製兵器類가 출현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요서 지방 墓墳에서 靑銅製兵器가 등장하는 것은 남구문유지의 例처럼 비파형동검이 동반하는 층위로부터 말미암는 현상이다.
<圖7> 喀左 和尙溝墓地 B·C·D地區 出土 遺物23.
(도판 사진 scan)
한편 喀左縣 和尙溝墓地는 [A地點 墳墓(土壙木槨墓); 위영자유형문화 / 비파형동검이 출토되는 B·C·D地點]으로 분별된다. 原報告文에 따르면, 화상구 B·C·D지점의 時期는 朝陽 十二臺營子보다 빠르고, 대략 南山根이나 烏金塘遺蹟과 同時期이거나 조금더 앞설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또 원보고문은 화상구 두 區域 사이의 구분이 '西周中期(10 C B.C.) 前後'에 이루어졌으나,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B·C·D 3 지점이 곧이어 連續했다는 점에서 두 구역 간 그리 오랜 시간이 개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국내 학계 일각에서는 비파형동검 출토 화상구 B·C·D지점의 上限年代는 西周中期인 'B.C.10 C' 무렵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러한 화상구유적의 연대는 요서 지방 비파형동검 출현과 직접 관련된 중요한 문제이며, 그것과 하가점상층문화('南山根類型') 동검과의 관계 구명의 커다란 端緖가 되다.
종래 학계는 內蒙古 동남부와 遼西 지방 출토 비파형동검 가운데 寧城 南山根遺蹟 M101의 동검이 가장 이르며, 그 時期는 대략 B.C. 8 C 무렵이라고 보아 왔었다. 그러나 이제 학계는 和尙溝 B·C·D地點遺蹟이 남산근유적 M101의 연대보다 빠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요서 지방 비파형동검 등장 시기는 기존의 '南山根類型'이나 '十二臺營子類型'에서 찿을 것이 아니라, 和尙溝 土壙墓나 南溝門 3期層과 같은 이른바 '和尙溝類型'에서 구하여야 하며, 그 연대는 대략 B.C. 10 C에 해당한다.이 사실은 요서의 비파형동검문화가 내몽고 동남부의 청동기문화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점을 분명히 해준다.
이 점에 비추어 노로아호산맥 이남 대릉하 유역에서 발전한 요서의 비파형동검·다뉴경을 특징으로 하는 청동기문화는 내몽고 동남부 지방 南山根類型 등으로 대표되는 夏家店上層文化(이 경우 '狹義의 하가점상층문화'라 볼 수도 있음)와는 질적으로 차별성이 큼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요서 지방의 청동기문화를 '夏家店上層文化(본고에서는 광의의 하가점상층문화')'라 總 하면서, 그 문화의 성격과 주민 문제를 一括的으로 해명하고자 함은 타당성이 희박하다고 본다. 그리고 필자는 이 요서의 청동기문화를 和尙溝類型이나 十二台營子類型을 그 內包로 하는 '遼西琵琶形銅劍文化'로 파악하고자 한다.
즉 요서 지방의 비파형동검·다뉴경을 共伴하는 청동기문화의 실체는 예맥문화권의 하위 문화권인 요서비파형동검문화로서 지칭될 수 있다. 또 이 문화는 그 하위 地方類型文化로서 和尙溝類型이나 十二台營子類型 등으로 구체화된다.
遼東地方은 청동기시대 考古文化의 展開相에 있어 요서지방·송화강유역·한반도 등 다른 지방에 견주어 石棺墓·支石墓·積石塚·土壙墓 등 다양한 墓制와 비파형동검과 幾何學무늬의 多紐粗文鏡 그리고 美松里土器 등을 그 문화적 내포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지방은 濊貊文化의 특성이 질·량면에서 가장 密度 짙게 집약·표출되는 곳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학계가 이곳이 바로 당시 예맥문화권의 中心地임을 定說化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필자는 따라서 이 지역의 청동기문화를 예맥을 주체로 하는 '遼東琵琶形銅劍文化'로 파악한 바 있다.
<表 1> 濊貊 靑銅器文化·鐵器文化의 展開相
그렇다면 이제 이 遼東琵琶形銅劍文化와 遼西琵琶形銅劍文化는 주민과 그 문화의 성격에 있어 同質的인 그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분명히 짚고 넘어 갈 필요가 있다.
筆者는 이 문제 해명을 위한 실마리로서 銅劍 및 多 鏡과 그리고 墳墓 및 그 副葬品의 組合方式에 주목, 기하학무늬 多紐粗文鏡의 共伴 否와 劍類의 副葬類型 및 石棺墓의 유물갖춤새 如何를 분석틀로 하여 요동과 요서 두 지방에서 발전한 비파형동검문화의 연결성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琵琶形銅劍關係遺物群 類型에는 기하학무늬 銅鏡이 나오는 유형으로서 요서의 十二臺營子·建平 大拉罕溝와 手營子와 요동의 鄭家窪子와 기하학무늬 동경이 나오지 않는 유형인 南山根·烏金塘類型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그런데 이 기하학무늬 동경의 분포 범위는 西쪽으로는 요하 이서 지방 大凌河 중류가 한계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하학무늬 동경을 共伴하는 비파형동검관계 유물군은 中國系나 北方系 고고문화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갖춤새임에 留意해야 한다. 이 점은 南山根 101 호 및 102 호에서 무늬가 없는 單紐素紋鏡이 출토되고 있다는 사실과 對比할 때 더욱 분명해지는 것이다.
다음으로 琵琶形銅劍 靑銅遺物群 類型에서 劍을 副葬하는 유형은 세 가지가 있음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먼저 遼西地方類型으로 비파형동검과 함께 北方式銅劍을 부장하는 경우인 바, 남산근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또 磨製石劍을 부장하는 南韓類型이 있다. 마지막으로 遼西·遼東·西北韓地方類型은 비파형동검만을 부장하는 바, 요동 지방과 더불어 요서 지방에서는 努魯兒虎山 이남 십이대영자유형이 이에 속함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圖8> 瀋陽 鄭家窪子 土壙墓.
(도판 사진 scan)
여기서 첫째 劍副葬類型을 준거틀로 삼을 때, 남산근유형(8∼7 B.C.)은 비파형동검이 북방식동검과 공반되는데 비하여, 그와 共時的으로 존재했던 십이대영자유형(8∼7 B.C.)은 비파형동검만 반출되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확실히 分別될 수 있다. 그러나 십이대영자유형의 劍 부장 유형이 그 보다는 다소 연대가 떨어지는 요동 지방 鄭家窪子(6∼4 B.C.)의 그것과 같다는 점에서, 요서 십이대영자유형과 요동의 비파형동검문화는 通時性의 관점에서 그 성격을 같이 하고 있다.
둘째, 多紐粗文鏡 伴出 否를 분석틀로 할 때, 요동 鄭家窪子와 십이대영자 및 건평 대납한구와 포수영자는 비파형동검과 기하학무늬 동경, 곧 多紐粗文鏡이 공반된다는 점에서 역시 문화의 起性이라는 측면에서 그 脈絡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남산근문화는 비파형동검과 다뉴조문경이 공반된 예가 없고, 다만 單紐素面鏡이 출토된다는 점에서 십이대영자문화와는 共時性의 관점에서 성격을 분명히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圖9> 本溪 梁家村 石棺墓M1·M2.
(도판 사진 scan)
한편 이 문제 해명과 관련, 새삼 눈길을 끄는 것은 遼東 本溪市 梁家村 石棺墓遺蹟의 존재이다. 이곳의 1 호 무덤에서는 십이대영자의 그것과 유사한 형태의 비파형동검과 連續Z字무늬의 다뉴동경이 공반되고 있다. 아울러 그 2 호 무덤에서는 비파형동검에서 細形銅劍으로 移行하는 형태의 동검이 반출되고 있다. 따라서 1 호 무덤의 編年은 대체로 B.C. 8∼7 C, 2 호 무덤의 그것은 아마도 B.C. 5 C 정도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劍副葬類型이나 多紐粗文鏡 반출 여부를 놓고 볼 때, 南山根과 十二臺營子 그리고 本溪市 梁家村 1 무덤은 共時的 존재였음(8∼7 C B.C.)에도 불구하고, 遼河 以西 지방의 南山根과 십이대영자는 분명히 분별되지만, 십이대영자와 梁家村은 그 문화의 흐름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십이대영자와 양가촌 청동기문화의 起的 동질성은 정가와자 토광묘의 遺物組合相을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다.
아울러 이 경우 판단의 기준이 되는 유물인 비파형동검과 기하학무늬 동경 모두가 濊貊系 청동기문화의 표지유물이라는 점에 비추어, 십이대영자유형은 南山根유형과는 달리 遼東琵琶形銅劍文化와 더불어 濊貊靑銅器文化로서의 性格을 분명히 示顯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石棺墓는 그 존속기간이 우리의 銅劍文化가 비파형동검 단계에서 細形銅劍 단계로 전개되던 시기의 墓制이다.그런데 이런 석관묘의 동검과 함께 공반되는 유물들의 組合相은 시·공간적으로 다양한 양상을 띄면서 일정한 차별성을 드러내고 있어 주목된다.
비파형동검이 반출되는 석관묘의 유물갖춤새로서 鏡 또는 玉이 共伴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도, 중국 동북지방 석관묘에서는 비파형동검과 鏡이 한 組가 되어 반출되고 있다. 즉 조양 십이대영자 유적에서는 中期 비파형동검과 多紐銅鏡(粗紋鏡) 및 부채形 도끼가 공반된 바 있다. 또 遼東 本溪市 梁家村 유적 1 호 무덤에서는 십이대영자의 그것과 유사한 형태의 비파형동검과 연속Z자무늬의 다뉴동경이 공반되고 있음은 前述한 있다.
<圖10> 扶餘 松菊里 石棺墓.
(도판 사진 scan)
이에 반하여, 韓半島의 석관묘에서는 비파형동검과 더불어 玉이 한 set가 되어 출토되고 있어 대비된다. 곧 新坪 仙岩里·白川 大雅里 유적에서는 비파형동검이 管玉과 함께, 扶余 松菊里 유적에서는 비파형동검에 天河石製飾玉과 管玉이 공반된 바 있다.
그러므로 종래 우리 학계는 중국 동북지방 비파형동검이 출토되는 석관묘 유적에서는 玉類가 공반되지 않고, 韓半島 남부의 송국리에서는 동경이 비파형동검과는 공반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해 왔다 있다. 그러나 최근 遼西의 建坪 手營子 M881 석곽묘에서 [琵琶形銅劍/雙 銅劍/天河石製管玉]이 동반 출토된 사실은 遼寧 지역에서도 한반도의 청동기시대에 종종 보이는 劍·鏡·玉 共拌現象을 확인하게 되었다.
<圖11> 大田 槐亭洞 石棺墓.
(도판 사진 scan)
더구나 時期가 어느 정도 떨어지는 세형동검 단계의 석관묘 유적에서는 세형동검과 더불어 鏡과 玉이 공반되고 있다. 즉 韓半島 南部, 특히 湖西地方의 석관묘에서는 '劍·鏡·玉'이 한 set를 이루며 공반되고 있다. 燕岐郡 蓮花里·大田 槐亭洞·南城里·禮山 東西里 등 유적들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또 이점은 遼西와 遼東 그리고 韓半島 세 지역 청동기문화 전개의 系統性을 짐작케 하는데 있어 하나의 실마리를 건내 주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요서비파형동검문화는 濊貊을 주체로 하는 요동비파형동검문화와 동질적 문화인 반면, 共時的으로 존재 하던 夏家店上層文化와는 이질적인 문화로서 예맥계 청동기문화의 範疇에 포섭됨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圖12> 濊貊文化圈 石棺墓에서의 劍·鏡·玉 出土相 系統圖
요동: 검+경
비파형동검시기(建平 手營子): 검+경+옥 세형동검시기(韓半島 남부): 검+경+옥
韓半島: 검+옥
청동기시대 이래 濊貊文化圈에 포섭된 중국 동북 지방 및 한반도의 각 지역이 時期別·地域別로 일정한 차별성을 유보하면서도 그 基底文化를 함께하는 異形同質的 文化發展相을 示顯해 왔다.
K.Polayni가 인류의 경제조직으로 거론한 두 번 째 단계의 것은 '재분배체계(再分配體系;redistribution system)'이다. 이는 재분배에 기초하는 바, 사회적 位階秩序에 의거하여 운영된다.
이 점에 비추어, 청동기시대 예맥문화권 내에 자리 잡게 된 재분배 경제구조란 지배와 피지배라는 권력관계에 바탕한 집단 내부의 또 이들 집단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성립한다. 따라서 예맥문화권 내부 지역별 제 집단 간에 또 그 집단 내의 하위집단 사이의 정치·경제·문화·사회적 발전 수준에 있어 不均等性의 존재 가능성은 충분히 상정된다.
이러한 발전의 非對稱性은 만주와 한반도라는 너른 지역 곳곳에 분포하는 예맥계 제 주민집단 사이의 또 그 내부 하위집단 간의 인적·물적 교류가 종래 예상해 오던 수준 이상으로 활성화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경우 한 집단의 首長은 交易을 통하여 획득한 외부 집단의 財貨를 다시 자기 支配權 아래의 각 世帶에게 하사하게 된다. 특히 두 집단 간에 있어서의 奢侈品 교역은 각 집단의 lite 사이에서만 행해지는 까닭에, 수장은 교역에서 얻은 사치품을 자기에 대한 충성의 대가인 權威財 혹은 威勢品(prestege good)으로서 授與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유형의 인적·물적 교류 양상을 예맥문화권 域內交易으로 파악 할 수도 있을 것이다.
<圖13> 靑銅器時代 濊貊文化圈 內 無文土器文化
(미송리유형토기·공귀리유형토기·서단산토기·팽이형토기·송국리유형토기)
오늘날 우리 학계는 청동기시대 예맥문화권의 중심이 요동비파형동검문화라는 점에 대해 대체로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B.C. 7 C 이래 이 지역의 문화와는 전반적으로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각각 지역적으로 특화된 형태의 문화가 일정한 相關性을 가지면서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구체적 양상은 요동비파형동검문화를 대표하는 美松里類型土器와 公貴里類型土器·西團山類型土器·팽이형토기의 상관성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송화강 유역 吉林 지방의 西團山文化는 예맥문화권의 중심이 되는 요동지방 청동기문화와 일정한 관련성 속에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또 팽이형토기문화와 공귀리유형문화 역시 요동지방의 그것과 일정한 차별성을 보이면서도 상호보완적 관련성과 지속적 교류관계를 가지고 나름대로 발전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松菊里類型文化는 한반도 남부 錦江 유역 일대의 水田農耕文化를 대표하는 지역문화인 바, 위에서 말한 지역문화들과는 生業經濟의 相異性에서 비롯된 일정한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출토되는 토기 일부는 한반도 서북부 지방의 미송리유형토기와 일정한 系譜 관계가 없지 않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러한 예맥문화권 내 지역 별 주민집단 간의 문화적 상관성은 種族的·生業經濟的 親緣性에 바탕하여 遼東을 中心(center)으로 그리고 송화강 유역과 鴨綠江 중류 유역 및 大同江 유역을 周邊部(periphery)로 하는 정치·경제·문화적인 再分配 連網(network)이 형성·운영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연망을 매개로 제 집단 간의 인적·물적 교류 뿐만 아니라, 知識·技術·情報 및 政治的 影響力의 交互作用이 교역의 형태를 띄면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파악된다.
청동기시대 예맥문화권의 중핵 지역은 太子河와 渾河를 중심으로 하는 遼河 유역 곧 遼東 지방이다. 또 이곳에서의 예맥을 享有 주체로 하는 遼東琵琶形銅劍文化는 훗날 古朝鮮의 기저문화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또 이 청동기문화의 철기문화로의 계기적 진전 과정 가운데서 창출된 力動性(dynamics)은 고조선 國家形成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더불어 松化江 유역 西團山文化는 훗날 扶餘(夫餘)의 先行文化로서, 또 漢書文化上層-望海屯文化는 ' 離國'의 문화로서 부여의 그것과 일정한 상관관계를 가졌다. 아울러 公貴里類型文化는 고구려의 先行文化 혹은 기저문화로서 거론될 수 있다.
그리고 小英子文化·團結文化는 沃沮의 바탕이 되는 문화로 그 구실을 다하였을 것이다. 다만 鶯歌嶺·東康文化만은 肅愼/ 婁의 문화로서 예맥문화권의 範疇에서 제외된다.
한편 팽이형토기문화는 우리 학계의 古朝鮮中心移動說에 무게를 두고 있는 논자들에 의해 이를 '後期古朝鮮'과 연결시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 松菊里類型文化는 한반도 중·남부 무문토기문화의 바탕이 되며, 이 지역에서의 水田農耕의 확산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훗날 三韓의 선행문화로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요서비파형동검문화는 철기시대 이래 예맥문화권 인식 범주의 지평에서 일단 포착되지 않고 있으나, 이는 예맥세의 萎縮으로 받아 드리는 것 보다는 오히려 예맥의 민족적 혹은 種族的 자기 정체성이 보다 분명해지는 계기로서 파악함이 타당할 것이다.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청동기시대는 우리 민족과 그 문화의 원형이 '濊貊'이라 지칭되면서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 예맥이 中原 청동기문화의 영향권 하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점은 주목에 값하는 사실이다. 오히려 이들은 蒙古高原-Siberia 방면 遊牧文化圈에서 비롯된 그것의 영향을 짙게 받으면서 '예맥Ⅰ기 문화' 곧 비파형동검문화를 창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예맥이 우리 민족 문화의 원형을 형성하던 바로 그 출발점부터 중원문화와는 계통을 달리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예맥은 '예맥 Ⅱ기 문화' 즉 세형동검문화를 바탕으로 한 철기문화로의 진전 상황 아래에서 마주치게 된 질·량 면에서 압도적이며 浸透力과 同化力에서 빼어난 中原文化와의 만남 가운데서도 자기 正體性을 상실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오히려 이들은 중원문화를 자기들 문화역량 증대를 위한 戰略的 資源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맥은 제 세력집단의 '發展의 不均等性'을 전제로 한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의 繼起的 진전상 가운데서 동질적 基底文化에 바탕한 異形同質的 社會·國家로의 발전을 期約함과 동시에 중원의 漢을 비롯한 제 이질적 존재와의 차별성을 보다 뚜렷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예맥을 주체로 한 古朝鮮과 扶餘의 國家形性, 高句麗社會와 三韓社會의 성장은 바로 그 歷史的 표현 이었던 것이다.
Ⅲ. 濊貊·扶餘와 高句麗의 正體性
청동기시대 이래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동질적 기저문화을 향유하는 주민집단들은 '濊貊'이라 汎稱되어져 왔다. 그런데 이들 주민집단들은 B.C. 7∼8 C를 전후하여 이들 거주 지역 별 生態的·정치적 조건에 卽應한 '發展의 不均等性'이나 生態的 適應戰略의 차별성에 따른 異形同質的 種族·住民集團으로 분별되기 시작한다.
특히 B.C. 3 C 이후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의 철기문화 확산과 더불어 새로운 단계의 정치적 조직체(polity)로서의 '韓'의 존재가 부각됨은 특기할 사실이었다.
<圖14> 濊貊의 分化와 政治的 成長
濊貊 (遼東琵琶形銅劍文化/팽이形土器文化) 古朝鮮
濊 (西團山文化) 扶餘 高句麗
貊 (公貴里型文化 魯南里型文化) 高句麗
韓 (松菊里型文化) 三韓 百濟·新羅·伽倻
<圖15> '濊貊文化圈'의 時·空間的 전개(共時性/通時性)의 表
우리 학계는 일반적으로 한국 鐵器文化의 始點을 B.C. 3 C로 비정하면서, '初期鐵器時代(3 C B.C.∼紀元 전후)'라는 시기를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古典·古代文明의 전개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 방면의 동향도 고려에 넣어야 한다는 점에서, B.C. 5∼3 C를 過渡期로 하여 B.C. 3 C 이후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철기문화는 細形銅劍·多紐細文鏡을 표지유물로, 또 중심 墓制로서 土壙墓를 그 문화적 내포로 한 '예맥 Ⅱ기 문화'라 지칭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 민족사는 청동기시대의 발전과 葛藤의 渦中에서 축적된 역동성을 바탕으로 철기시대로 계기적 진전상을 보이면서 마침내 B.C 4 말∼3 C 초 이래 '古朝鮮'이라는 국가의 성립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곧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축적된 예맥문화권의 제 역량이 고조선의 국가 형성을 中心軸으로 한 扶餘(夫餘)·高句麗·沃沮/東濊·三韓 등 예맥계 제 정치세력의 성장이라는 역사의 진전으로 표출됐다는 점이 이 시기가 갖는 含意로서 자리매김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학계는 고조선 국가 형성과 관련, 國家(state)라는 고도의 政治的 複合體 형성 요인을 農耕·戰爭·交易에서 찿고자 함이 일반적이다.
原生國家(pristine state)인 '濊貊朝鮮'은 예맥문화권의 先進·中核 지역인 요동 지방에서 B.C 4 말∼3 C 초 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이 예맥조선은 청동기시대 이래 축적된 제 역량을 토대로 철기시대에 진입하면서 성립된 우리 민족 최초의 '國家'였던 셈이다.
한편 衛滿朝鮮은 역사 상 그 실체가 최초로 분명히 드러나는 국가로서, 그 성립과 관련, 戰爭과 交易에 각각 초점을 맞추어 연구가 진행된 바 있다.
이러한 관점들에서 보면, 위만조선 국가의 형성은 청동기 시대 이래 진행된 농경문화의 축적, 그리고 그에 따른 제한된 領域 안에서의 인구 증가, 그리고 그러한 人口壓에 대처하기 위한 전쟁과 교역이라는 圖式 속에서 해명의 실마리를 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성립한 위만조선은 동북아시아 방면의 유력한 武裝勢力(armed power)으로 부각되면서, 이 방면에서의 交易網 통제를 둘러싸고 漢帝國과 전쟁을 치루면서 무너져 갔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고조선을 선두로 한 예맥계 제 집단의 정치적 성장은 交易圈의 확대와 東Asia 교역 net-work 형성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 시기 이래 고조선을 중심으로 한 예맥계 제 집단은 여러 부문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며 동아시아의 國際的 再分配system으로 觀念되는 '朝貢 冊封體制'을 매개고리로 압박해 오는 漢 세력의 覇權主義에 대한 拮抗作用을 벌리면서, 꾸준히 자기 발전의 길을 추구하고자 하였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扶餘(또는 夫餘)는 共時的으로 古朝鮮과 병존하였고, 通時的으로도 高句麗·百濟가 모두 이 부여를 자기들의 出自로서 認識·自任하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 학계는 松嫩平原 白金寶 / 漢書下層文化에서 望海屯 / 漢書上層文化로의 진전에 주목, 後者를 ' 國'의 문화로, 또 B.C. 7∼3 C 吉林市 일대의 西團山文化를 부여의 기저문화로 이해하고 있다.
B.C. 5 C 경 송눈평원의 濊族이 松遼平原으로 점진적 移住를 시작, B.C. 3 C 경 離國 東明集團의 南下·亡命을 계기로 國家形性 단계에 진입하게 된다. 그리고 B.C. 2 C 말 이미 濊君南閭로 表象되는 '原-扶餘'가 형성되고 있었던 점, 그리고 古朝鮮의 국가형성 시점이 B.C. 3∼4 C라 파악되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할 때, 부여국가의 성립은 B.C.3 C 이후에서 B.C. 2 C 말 사이 어느 시점의 일로 비정된다.
종래 우리 학계의 上古史 및 古代史 인식체계에 있어 扶餘史가 점하는 위상은 古朝鮮·三韓·三國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여는 衛滿朝鮮 國亡(108 B.C.) 이후 B.C.37 년 高句麗가 출현할 때 까지 濊貊文化圈을 지탱하는 핵심적 세력으로 嚴存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 학계는 古朝鮮 멸망 이후 三國 성립 사이 우리 民族史에 있어서 國家의 欠缺이라는 單線論的 系統論에 의한 歷史繼承論을 止揚하여야 한다. 나아가서 우리 학계는 예맥문화권 내 제 집단의 '발전의 不均衡性'을 전제로 이들의 共時的 竝存 가능성을 인정하며, 通時的 繼起性에 입각한 韓國史 인식체계 정립을 위한 관심의 연장선 상에서 이 시기 부여사가 함축하고 있는 역사적 유의미성을 浮刻·提高·檢證하고자 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濊貊文化 가운데 貊系 문화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은 곧 高句麗의 주민과 그 先行文化 혹은 基底文化의 맥락를 이해하기 위한 소망스런 접근이 될 것이다. 이 점에서 최근 학계 일각에서 제기된 바 있는 貊系文化論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 논의는 美松里類型文化의 荷擔者를 맥계 민족으로 비정하면서, 특히 渾河·太子河·鴨綠江 중·하류 지방 그들의 존재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이 견해는 遼河 중·하류 유역에서부터 淸川江 이북 지역은 B.C. 1,000年紀의 전반 대에서 B.C. 4∼5 C까지, 늦어도 B.C. 3 C 대에 이르기까지 中原文化와 구별되는 독자적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곳으로서, 高句麗族 / 貊族 계통의 활동 범위였다고 파악하고 있다.
B.C. 1,000年紀 후반 이후 중국 동북 지방 철기문화의 진전과 함께 遼寧 동부 지방·吉林地方에서는 土壙墓가 예맥계 제 집단의 기본묘제로 광범위하게 확산·정착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C. 3 C 이래 압록강 중류 유역 일대의 貊系 주민 일부는 積石塚이라 일컬어지는 지역적으로 특화된 墓制를 자기 집단의 기본적 埋葬慣行으로 삼아 그것을 집중 축조하고 있었다. 따라서 토광묘를 기본묘제로 하고 있는 중국 동북 지방 및 韓半島 西北部 지방과 峻別되는 압록강 중류 유역 일대 적석총의 집중적 築造라는 突出現象은 이 지역 맥계 제 집단의 정치 / 문화적 凝集力이 눈에 띄게 提高됨으로써 그들이 고구려 국가형성 前史에 있어 하나의 主體로서 그 존재를 뚜렸하게 드러내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한편 現傳하는 제 資料는 고구려의 국가 형성과정과 扶餘史의 전개가 重層的으로 상호 연관되어 있음을 적시하고 있다. 이점에 비추어, 오늘날 학계에는 고구려 국가형성과 관련, 앞서 말한 貊系主體論에 갈음한 扶餘系主體論이 제기 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고구려 국가형성을 주도한 것이 扶餘系 流移民集團이라고 한다면, 建國主導勢力과 基層住民集團 간 相關性의 이해 문제라는 커다란 벽에 부딪치게 된다. 그러나 현전하는 문헌 및 金石文 자료들은 이에 관한 어떠한 시사점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考古 자료의 측면에서 볼 때 이 점은 더욱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즉 당시의 墓制는 松花江 유역 중심의 扶餘가 石棺墓에서 土壙墓 중심으로 바뀌고 있었다. 반면 B.C. 3 C 이래 高句麗社會에서는 석관묘에 갈음하여 積石塚이 집중적으로 造營되는 돌출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점은 부여족의 일원이라 추정되는 朱蒙 남하 이후에도 변화가 없었다. 따라서 부여족 중심축에 선 견해를 따르면, 이러한 고고 자료를 해명할 길이 없다.
필자는 이 점에 주목, B.C. 1 C 중반 이래 고구려사회의 정치적 통합을 志向하는 力動性의 一端을 '解慕漱-河伯-柳花-朱蒙' 집단의 有機的 關係項 속에서 찿고자 하였다. 곧 필자는 B.C. 1 C 후반 새로운 건국 주도세력으로 등장한 주몽집단은 다름아닌 한 世代 전 이 지역에서 일시 부여 방면으로 강제 退出되었던 해모수 및 유화집단에 그 脈絡을 대고 있는 貊系의 闖入戰士集團이었던 것이라 파악하였다. 그리고 필자는 이 사실이 '北夫餘'를 출자로 하는 주몽집단이 주도한 국가형성이 고구려사회에 큰 문화적 충격이나 변화를 불러오지 않았던 이유가 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高句麗는 B.C. 3 C 이래 貊系 주민을 중심으로 일정한 발전 과정을 經過,B.C. 1 C∼A.D. 1 C 경 東北Asia 구석진 곳의 한 王國(kingdom)으로 興起하였다. 고구려는 주어진 環境的 열악성과 경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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