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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일제의 ‘신민화’ 정책에 관한 연구(최영호) /國史館論叢 第67輯

머리말

본 연구는 기존의 다방면에 걸친 일제의 식민정책 연구를 바탕으로 하되, 가능한한 관련된 일차적 자료를 분석함으로써, ‘신민화’정책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일제의 식민통치의 일반적인 속성을 새롭게 조망하고 특성을 부각시키려는데 문제의식을 두고 있다.
식민지조선에 대한 일제의 통치는, 경제적 수탈정책과 문화적 동화정책을 동시에 강행했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왔으며, 이런 비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001001 수탈과 동화를 특징으로 하는 일제식민통치에 대한 비판 중에서 대표적으로, 차기벽편, 『일제의 한국 식민통치』(정음사, 1985) pp.27~28을 볼 것.닫기 그런데 정치적인 면에서는 ‘신민화’가 ‘국민적 대우’를 의미하므로, 자칫하면 정치적으로도 ‘신민화’가 이루어졌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통치행위에 있어서 일본본토의 의회에 거의 구애받지 않는 전횡적인 총독통치가 계속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정치적으로는 ‘신민화’정책이 시행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현실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경우, 본래 식민통치와 ‘신민화’가 서로 背馳되는 개념이므로, 식민지에서 ‘신민화’정책이란 애당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식민통치란 식민지인들을 직접이든 간접이든 본국의 통치대상으로 하면서도 본국의 시민과는 달리 국민적인 대우를 하지 않는 것으로서, 근본적으로 차별대우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002002 최영호, 『재일한국인과 조국광복: 해방직후의 본국귀환과 민족단체활동』(글모인, 1995) pp.48~51.닫기
따라서 일제의 ‘신민화’정책을 정치적으로 논할 때는, 일제식민당국이 내건 슬로건으로서의 ‘신민화’와 일본인들이 향유하는 만큼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했는가 라는 ‘신민화’를 나누어서 파악해야 한다. 전자를 이념적 측면의 ‘신민화’라고 한다면 후자를 현실적 측면의 ‘신민화’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식민지인에 대한 현실적 권리의 보장도 없이 일본본토와의 이념적 일체성만을 강조한 식민통치방침은, 이른바 사이비 ‘신민화’방침으로서, 감언이설로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고 현실적 억압을 묵과하고 식민지인의 이성을 비하하겠다는 ‘愚民’정책의 기본방침으로서 밖에 파악되지 않을 것이다.
‘신민화’ 문제에 관한 종래의 연구를 거론하는 것은, 기존의 거의 모든 식민통치에 대한 연구들이 모두 ‘신민화’문제를 들고 있기 때문에, 모두 열거하기에 많은 지면이 필요할 것이며 그다지 의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본문에서 인용하는 연구들은 ‘신민화’정책의 배경이나 구체적 내용과 관련하여 괄목할 만한 것으로 평가되는 것들이다. 그 중에서 ‘신민화’정책에 대한 일차적 자료의 발굴과 조사가 돋보이는 대표적인 연구성과로, 코바야시(小林英夫)와 미야타(宮田節子)의 연구서를 들 수 있다.
코바야시는, 주로 한반도의 전시공업화와 물자통제정책, 자금 및 물자와 노동력 동원 등 ‘병참기지화’를 위해 조선인에 대한 ‘신민화’정책이 전개되었음을 밝히고, 그것은 식민지조선의 경제적 부담에 의한 厭戰 혹은 反戰의 기운을 없애고 군사산업부문의 능률확대를 위해 강요된 일본본토보다 훨씬 강력한 팟쇼적인 ‘신민화’였다고 지적했다.003003 小林英夫, 『‘大東亞共榮圈’の形成と崩壞』(御茶の水書房, 1975). 그 중에서 특히 p.282를 참고할 것.닫기
한편 미야타는, 주로 지원병제도와 징병제도의 도입과정에서 원활한 전쟁수행을 위해 ‘신민화’정책이 필요했음을 밝히고, ‘신민화’의 정치적 슬로건인 ‘내선일체’를 외치는 조선인들의 논리가 ‘차별로부터의 탈피’였던데 반하여, 일본인으로서는 민족적 우월감을 최대한 가슴 속에 감추고 그것을 일종의 ‘대국민으로서의 위엄’으로 승격화하려는 논리였다고 지적하고 있다.004004 宮田節子, 『朝鮮民衆と‘皇民化’政策』(未來社, 1985). 그 중에서 특히 pp.170~171을 참고할 것.닫기 이러한 연구들은, ‘신민화’정책을 ‘내선일체’의 슬로건과 관련시켜 만주사변 이후의 15년 전쟁기간에만 국한시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연구성과가 높이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연구성과가 전시체제의 ‘신민화’정책의 착취성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데 공헌하고 있는데 반하여, 자칫하면 근대 이후의 일본의 민족주의라는 전체상에서 일탈된 현상으로 보아 넘기게 할 수도 있음을 그 한계로서 지적할 수 있다. 즉, 전시체제에 필요했던 ‘신민화’정책이 전쟁종결과 함께 끝났다고 보아 넘기기 쉬워진다는 것이다.
본 연구를 기존의 ‘신민화’연구와 차별화한다면, 일제가 ‘신민화’이념을 가장 강렬하게 정치적 슬로건으로서 주입시킨 시기가 전시체제의 기간이었다는 것에는 동감하면서도, ‘신민화’이념의 생성과정과 전개과정을 일과성의 현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확장시켜 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다. 즉 ‘신민화’이념은 근대일본의 민족주의의 생성과정에서 보이는 ‘內地연장주의’에서 발원하는 것으로서, 이미 근대일본의 형성과정에서부터 출발한 제국주의적 속성에 서구로부터 받는 억압감을 동아시아에의 침략을 통해 상쇄하려는 주장에서 그 근원을 발견하려고 한다. 아울러 일본의 패전은 연합국에 대한 군사적 도전의 종결이었지 구 식민지인에 대한 ‘신민화’이념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패전후의 일본에서의 이민족에 대한 정책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 착안한다. 결국은 현대일본의 민족주의에도 ‘신민화’이념의 본질이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005005 현대일본의 민족주의를 역사적 연속성에서 파악하려는 시도로, 최영호,「현대일본의 민족주의의 특징」(『정신문화연구』 제17권 2호, 1994년 6월) pp.73~93을 들 수 있다.닫기
또한 본 연구에서는 ‘신민화’이념에 내재하는 현실성의 빈곤, 즉 허구성을 강조하여 지적하려고 한다.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식민지인들이 사이비 ‘신민화’를 신뢰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일본본토에서도 식민통치기간 전반에 걸쳐서 ‘신민화’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갖지 않았다고 본다. 따라서 ‘신민화’정책이란 애당초 현실적으로 실패할 내용도 갖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패전에 임박해서 식민지에 한정적으로 참정권을 부여하는 정책이 세워졌는데, 이것도 후술하는대로 전시동원체제의 파국에 임박해서의 斷末魔적인 선택에 불과했던 것으로, 애당초 식민지인들과 일본본토인들과의 일체성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신민화’의 허구성은 해방이후에도 일본사회에서 일본인 단일민족 신화에 기초한 민족주의라는 형태로 그대로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日帝의 식민통치에 대한 기존의 대부분의 연구가 ‘신민화’정책보다는 총독에 의한 억압, 탄압, 수탈, 강제연행 등, 현실적인 문제에 초점을 두어 왔던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다만 본 연구는, 종래의 연구의 대부분이 식민정책의 착취성을 비판하면서 덧붙여 ‘신민화정책=민족말살정책’으로서 비판해 온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즉, 정치적 보응도 없는 문화적·이념적 ‘신민화’정책이, 과연 민족말살정책으로서 얼마나 유효했겠는가 하는 의문과, 일본의 식민정책 담당자들이 ‘신민화’정책을 신뢰할 만큼 脫日本的이었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며, 전시체제에서의 차별대우와 강요된 복종은 민족소멸보다 오히려 민족자각의 계기가 되었음에 유의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006006 민족주의의 생성과정에서, 기왕의 일체감이나 정체감이 침식당할 조건에서나 어느 사회에도 속하지 못하는 정체성 위기 때에, 그 대안을 모색할 필요를 느낀다든지 기성사회에 대해 대항의식을 느끼는 것을 심리적 계기로 한다. 차기벽, 『민족주의원론』(한길사, 1990) pp.124~126.닫기
이러한 관점에서, 본 연구는 먼저 제1절에서,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일본국가 형성과정에서 대륙진출이념으로서의 ‘內地연장주의’가 어떠한 흐름 가운데 생성되었으며, 그 중심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병합과 문화통치 기간에 ‘內地연장주의’가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제2절과 제3절에서는, 중일전쟁의 시기와 태평양전쟁의 시기로 구분하여, 일본본토의 전시정책과 비교하면서 ‘신민화’이념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그와 함께 한반도의 인적·물적 자원에 대해 전개된 전시동원정책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 결론으로서는, 패전이후의 사이비 ‘신민화’의 잔존의 실태로, 일본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 정책을 간략히 언급할 것이다.

註 001
: 수탈과 동화를 특징으로 하는 일제식민통치에 대한 비판 중에서 대표적으로, 차기벽편, 『일제의 한국 식민통치』(정음사, 1985) pp.27~28을 볼 것.
註 002
: 최영호, 『재일한국인과 조국광복: 해방직후의 본국귀환과 민족단체활동』(글모인, 1995) pp.48~51.
註 003
: 小林英夫, 『‘大東亞共榮圈’の形成と崩壞』(御茶の水書房, 1975). 그 중에서 특히 p.282를 참고할 것.
註 004
: 宮田節子, 『朝鮮民衆と‘皇民化’政策』(未來社, 1985). 그 중에서 특히 pp.170~171을 참고할 것.
註 005
: 현대일본의 민족주의를 역사적 연속성에서 파악하려는 시도로, 최영호,「현대일본의 민족주의의 특징」(『정신문화연구』 제17권 2호, 1994년 6월) pp.73~93을 들 수 있다.
註 006
: 민족주의의 생성과정에서, 기왕의 일체감이나 정체감이 침식당할 조건에서나 어느 사회에도 속하지 못하는 정체성 위기 때에, 그 대안을 모색할 필요를 느낀다든지 기성사회에 대해 대항의식을 느끼는 것을 심리적 계기로 한다. 차기벽, 『민족주의원론』(한길사, 1990) pp.124~126.


Ⅰ. ‘신민화’ 이념의 생성과정



1. 메이지 국가 건설과 ‘內地확장’논리 대두

메이지 유신 초기에 일본의 국내적 모순을 대외적 침략에 의해 해결하려고 하는 정한론이 한때 메이지 정부내에서 융성했다. 그러나 정한론은 정치적인 현실면에서 구미시찰단을 중심한 정부중심세력에 의해 밀려났으며, 이론적인 면에서도 정교하지 못하여 사이고오(西鄕隆盛)의 실각과 함께 논의 자체가 수그러들게 되었다. 반면에 메이지 정부의 주도세력들은 국가건설과정에서 발생하는 모순들의 해결방안을 천황제 이데올로기에서 찾으려 했으며, 천황제 하에 일본인들을 신민화하려는 정책을 꾸준히 전개해 나갔다.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창출을 통해, 소위 위로부터의 국민통합이 추진된 것이다.007007 차기벽,「일본근대화과정의 명암」(현대일본연구회편, 『국권론과 민권론』, 한길사, 1981) pp. 11~24.닫기
메이지 정부는 점차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통치이념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학교교육과 언론사상을 통제하였으며, 神道를 국교로 정하고 근거도 없는 神武천황의 즉위년을 皇紀 원년으로 하는 황기제도를 실시했다. 게다가 건국신화에 맞추어 건국기념일(紀元節)을 정하고, 천황의 생일(天長節)을 국경일로 정했다. 특히 천황제 권력 강화의 일환으로 교육통제를 철저히 하여, 신민으로서의 천황에 대한 충성을 국민교육의 핵심내용으로 했다. 신민교육으로서, 이미 1882년 12월의 『幼學綱要』와 1883년 6월의 『小學修身書』를 통하여, 전국 아동들에게 천황권력의 절대성과 정통성, 그리고 신민도덕을 교육시켜 갔다.008008 강동진, 『일본근대사』(한길사, 1985) pp.117~118.닫기 아울러 1890년 10월에는 천황의 이름으로 ‘교육칙어’를 공포하여, 천황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도덕의 근본으로 삼고, 전쟁시에는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하며, 천황에 대한 신민의 절대적 복종을 국민교육으로서 주입시켰다. 그래서 학교의 축제일에는 반드시 천황 사진에 대한 배례를 행하게 하고, 천황부부에 대한 만세삼창과 ‘교육칙어’의 낭독 등을 의무화하여, 천황의 절대적 권위와 신격화를 교육의 기본정신으로 정책화했다.009009 위의 책, p.130.닫기
일본의 민족주의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일본국민 일부에서는 기독교배척 운동이 전개되고, 특히 1887년에 서구국가들과의 불평등조약 개정 교섭이 실패한 후에는 이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점차 대륙낭인 단체들의 대륙팽창 정책 주장에 쏠리게 되었다. 1891년에 들어 제정러시아가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하자, 일본내에는 대외적 위기감이 팽배해져 갔으며, 일본 지도층에서는 군비확장의 당위성과 함께 대륙진출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東方協會’ 등의 어용단체들이 공공연히 아시아주의라는 이름하에 대륙침략을 뜻하는 동방정책을 선전하였으며, 각종 언론들도 일본이 당하는 불평등조약의 부당함과 함께 대륙으로의 진출을 부채질하고 나섰다.010010 성황용, 『일본의 민족주의』(명지사, 1986) pp.54~58.닫기
메이지 일본에 있어서 아시아주의의 조직적 운동은 1880년에 소네(曾根俊虎) 등이 세운 ‘興亞會’에서 그 시점을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소네 등이 주장한 것은 쇠퇴해 가는 아시아를 만회하기 위하여 ‘합종연형’을 통해 아시아가 힘을 기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 만회라는 것은, 소위 근대화 방향의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아시아의 ‘합종연형’은 각각의 지역에서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세력들과의 결탁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결국 청국을 중심으로 하는 종래의 동아시아체제를 혁파하려는 것이었다. 즉 종래의 朝貢과 冊封을 축으로 해 온 중화제국 질서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었다. 구체제의 재편과 혁파를 각각 지향하는 청국과 일본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대립하는 상황에서, 아시아주의는 근대화의 측면에서 뒤떨어진 한반도를 진보시키겠다는 지도자적 의식의 확대로 나타났다.011011 古屋哲夫編, 『近代日本のアジア認識』(京都大學人文科學硏究所, 1994) pp.49~50.닫기
아시아주의를 부르짖는 일본인 지식인들 중에, 특히 東洋社會黨을 만든 타루이(樽井藤吉)가, 1891년 『自由平等經論雜誌』에「大東合邦論」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가장 최초의 체계화된 아시아 침략이론이 되고 있다. 이것은 1893년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는데, 한문으로 쓰여진 것으로 보아 일본의 지식인 뿐 아니라 청국과 조선의 지식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론은 이념적으로는 일본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 민족이 단결하여 서구열강세력에 대항하자는 것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일본과 조선이 합방하여 ‘대동국’을 세우고 청국과 동맹하자는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한반도 침략의 정당성을 제시한 것이었다.012012 한상일, ‘근대일본사에 있어서의 한국像: 樽井藤吉와 대동합방론’(제8차 한일 일한 합동학술회의 발제논문, 1994년 7월) pp.7~17. 닫기
그러나 일본의 침략속성을 간파한 조선의 민중들이, 당면한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한 저항운동을 전개하고, 조선 조정에서도 청국이나 러시아와의 화친을 통해 일본의 국가적 개입강화에 대처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일본정부 내에서는 적나라한 영토확장의 논리의 주장을 보완할 세련된 대외침략 이론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정책과 정당을 중시한 정치가 하라(原敬)의 견해를 대표로 하는 이른바 ‘內地연장주의’ 주장이 대두하게 된다.

註 007
: 차기벽,「일본근대화과정의 명암」(현대일본연구회편, 『국권론과 민권론』, 한길사, 1981) pp. 11~24.
註 008
: 강동진, 『일본근대사』(한길사, 1985) pp.117~118.
註 009
: 위의 책, p.130.
註 010
: 성황용, 『일본의 민족주의』(명지사, 1986) pp.54~58.
註 011
: 古屋哲夫編, 『近代日本のアジア認識』(京都大學人文科學硏究所, 1994) pp.49~50.
註 012
: 한상일, ‘근대일본사에 있어서의 한국像: 樽井藤吉와 대동합방론’(제8차 한일 일한 합동학술회의 발제논문, 1994년 7월) pp.7~17.



2. 일본제국의 ‘內地연장주의’ 제기와 그 한계

메이지 정부는 1875년에 오가사와라(小笠原) 섬들과 찌시마(千島) 열도를 각각 영토에 복속시키고, 1879년에 류우큐우를 점령하여 오끼나와(沖繩)현으로서 일본제국에 편입시킴으로써 근대국가로서의 영토적 경계를 분명히 했다. 1889년에는 메이지 제국헌법을 공포하여 명실공히 국민국가의 틀을 확정했다. 일본 제국헌법의 규정을 보면, 그 제1조에서 “대일본제국은 萬世一系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고 되어 있고, 제3조에서는 “천황은 신성하므로 침범할 수 없다”고 하여, 소위 천황대권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천황에게 내각의 임명권, 군대통수권, 전쟁선포와 조약체결권, 의회소집과 해산권 등이 집중되었으며, 천황이 국가주권 그 자체였다. 천황은 의회의 심의를 거치지 않고도 언제든지 긴급칙령을 내려, 신민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국가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메이지 헌법의 운용에 따라서 입헌주의를 일탈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헌법이 공포된 이후에도 그 이전과 같이 군사와 교육정책면에 있어서 제국의회의 협찬을 거치지 않고 거의 천황을 중심으로한 정치세력의 전횡하에 추진되었다. 특히 천황의 권위를 모든 일본인들에게 주입 확대시키려는 의도에서 교육정책을 실시해야 했기 때문에, 교육에 관한 법률들은 대체로 제국의회의 심의를 거치지 않고 천황의 칙령이란 방법으로 제정 공포되었다. 1890년 10월의「교육칙어」도 칙령으로 공포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일본제국은 1895년에 청일전쟁의 승리 결과 대만을 할양받게 되었으며, 그 후로는 점차 대한제국에 영향력을 증대해 가면서, 새로운 영토에 대해서 제국헌법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가 당연히 문제화되었다. 일본정부가 새로운 영토에 대해 어떠한 통치방침을 모색했는가의 문제는, 당시 외무차관이자 대만사무국 위원이던 하라의 견해와, 제국정부가 내놓은「대만에 실시할 법령에 관한 법률」에서 잘 나타난다.
하라는 1896년 2월에 소위 ‘內地연장주의’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지론을 담은 정책안을 대만사무국 회의에 제출했다. 그의 일기에는, 2월 2일 내각총리대신의 관저에서 열린 대만 사무국회의가 일본정부의 식민지 관할부서 拓殖務省의 관제와 대만의 총독부 관제에 대한 법안을 토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기서 그는 대만의 육해군을 일본의 주관부서에서 직접 통괄하고, 대만총독에게 입법권을 위임하지 않을 것은 물론, 세관업무·우편업무 그리고 전신업무 등의 일반사무까지도 일본정부의 주관부서가 직접 관할할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013013 原敬, 『原敬日記』 2권(乾元社, 1950) pp.131~132.닫기
더욱 구체적으로 보면, 그가 대만사무국에 제출한 ‘대만 問題 2案’에서, 대만을 ‘식민지(콜로니)‘으로 간주하는 甲案과, 일본본토와 정치체제를 달리 하면서도 대만을 ‘식민지’으로 간주하지 않는 乙案을 제시하고, 그 중에 자신은 乙案을 선택한다고 주장했다. 乙案에 의하면 “마치 독일제국이 알사스 로렌스에서 행하는 것이나, 프랑스가 알제리에 행하는 것 처럼, 대만의 제도는 가능한한 內地에 비슷하게 하거나 나아가서는 內地와 구별이 없게 할 것을 필요로 한다”고 되어 있었다. 이러한 견해를 하라 자신이 ‘內地연장주의’라고 했으며,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서 그는 대만이 일본본토에서 거리적으로 근접해 있고 점차 교통통신의 발달로 더욱 거리가 좁혀질 것이며, 또한 대만인들은 유럽국가들의 타인종지배와는 情況을 달리한다는 것을 들었다.014014 春山明哲,「近代日本の植民地統治と原敬」(春山明哲·若林正丈, 『日本植民地主義の政治的展開』, 現代中國硏究叢書 18, アジア政經學會, 1980) pp.23~24.닫기
그런데 하라의 ‘內地연장주의’ 주장은 식민지를 부정하는 논리가 아니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아무리 정치적 이념으로서 대만통치에 대한 동화적인 미래를 제시했다고 하더라도, 당시 내각수반이던 이토오(伊藤博文) 등의 주장, 즉 현실적으로 대만총독에 의한 별도의 통치제도의 필요성을 엄연히 허용하고 있었던 것은, 결국 그가 서구제국주의와는 다른 변형된 혹은 왜곡된 식민정책을 주장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라의 견해가 제출된 직후인 3월에, 제9차 제국의회에서 대만의 입법제도의 근본적인 규범이 될「대만에 실시할 법령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법률 제63호로 제정된 이 법률을 통해, 제국정부는 제국헌법에 있어서의 입법권을 애매하게 분할하여 그 일부를 총독의 政令제정권으로서 위임했으며, 나머지를 제국의회가 작성하는 법률을 총독이 확대시행하도록 규정했다. 무엇보다 이 법률이 대만총독에게 강력한 입법권한을 부여했던 것은, 오끼나와나 홋까이도오(北海道)와는 전혀 다른 ‘식민주의’ 혹은 ‘제국주의’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나타낸다.015015 1921년 이후에 식민지조선과 함께 대만에도 ‘內地연장주의’ 정책이 법률적으로 적용되어 갔으며, 특수한 경우에만 총독의 입법권(律令權)을 인정하게 되었다. 식민정책에 있어서 민사 형사법규나 교육제도의 면에 있어서는 대만 쪽이 조선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널리 ‘內地연장주의’가 적용되었다. 矢內原忠雄, 『帝國主義下の台灣』(岩波書店, 1988) p.173.닫기
이 법률이 공포되자 역시 위임입법문제가 학자들 간에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소위 ‘63문제’으로 불리우게 된 이 문제는, 대만총독에게 위임된 ‘법률의 효력을 갖는 명령’의 발령권이, 제국헌법 제5조의 “제국의회의 협찬을 얻어 입법권을 행한다”는 규정과 모순되지 않은가를 둘러싼 문제였다. 즉 대만총독에 대한 위임입법이 헌법규정에 상치되지 않은가 하는 문제였다.016016 ‘63문제’의 발단과 경위에 대해서는, 위의 책, p.181이 상세하다.닫기 대만의 통치체제 설정에 임하여 제국헌법과의 관계규정을 둘러싸고,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대두했다. 이것은 대만의 통치에 관한 입법과정에 있어서 일본제국의회의 협찬(심의)을 거쳐야 하는가 아닌가를 두고 대두된 견해로서, 결국은 일본제국내의 천황과 의회간의 권력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에 귀결되었다.
첫째 견해는, 절대군주론적 입장에서 천황의 무제한적 권력을 옹호하는 견해다. 즉, 메이지 제국헌법에는 그 통치영역을 명시하고 있지 않지만, 헌법공포 때의 천황담화에서 ‘八州의 民’이란 말을 쓴 것으로 추론한다면, 공포 때의 영토가 통치영역이 된다. 따라서 천황의 통치권은 새로운 영토 대만에 있어서는 헌법에 의한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황은 제국의회의 협찬없이도 대만의 통치행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견해는 입헌군주론적 입장에서 제국의회의 권한을 옹호하고 천황의 통치행위를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행해지는 행위로 보는 견해다. 즉, 헌법이 국가기관의 운용을 규정하는 것인 만큼, 일본의 영토라면 新舊영토를 불문하고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식민지에 관한 입법이라도 천황 독단으로 행하여진 것은 ‘위헌’이며, 따라서 모두 제국의회의 협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017017 이 두 견해는 당시 이토오내각이 고용한 영국인 사법성 고문 커크우드(Kirkwood W.M.H.)가 정부측에 자문한 내용 「台灣制度,天皇ノ大權,及帝國議會ニ關スル意見書」에서 이미 잘 구분되어 있었다. 春山明哲, 앞의 논문, pp.3~4.닫기
제국헌법에서 천황의 이름을 빌린 전횡적인 통치행위가 보장되어 있어, 애당초 의회가 천황을 견제할 수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견해의 차이가 현실적으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천황을 헌법에 초월하는 권력체로 볼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관한 견해 차이는, 일본 본토에 있어서는 정치적 근대화에 관한 것으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영토에 대한 위임입법의 위헌성 논의는, 제국헌법이 새로운 영토에 대한 통치방침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다고 해석할 것인가에 관한 것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즉 새로운 영토에 대해 제국헌법의 효력이 미치는 ‘內地’으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효력이 미치지 않는 ‘식민지’으로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법형식적인 측면에서 제국헌법과의 관계를 중시한다든지 일제말기의 참정권부여정책에 치중하여 볼 경우, 이 법률 제63호를 기본적으로 하라의 ‘內地연장주의’에 입각한 법률로 보고, 다만 정부가 ‘內地연장주의’를 보류하려는 의도로 일시적 방편으로 한시적인 입법에 의한 총독에의 입법위임이라는 형태를 취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며, 일본정부가 ‘內地연장주의’를 보류한 것은 아직 제국정부가 대만통치정책을 확실히 결정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총독에의 광범한 입법위임은, 제국정부의 신영토 통치정책의 근간이 되는 것으로서, 법형식에서만 제국헌법에 위임받은 것으로, 실제적으로는 신영토의 민중들에게 미치는 통치행위를 총독의 전횡적 권리 밑에 두는 고도의 식민정책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념적으로는 ‘內地연장주의’를 내세우면서, 실질적인 정책면에서는 제국주의적 식민주의를 관철하는, 기형적인 일본식의 식민통치방침의 근간이 된 것이다. 일본인은 당시 이미 제국헌법 제18조 이하에 규정된 신민으로서의 권리를, 비록 ‘법률의 범위에 있어서’이긴 했지만 향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일본제국의 역사적 제한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식민지인들의 권리는 제국헌법의 틀 밖에 있었으며, 단지 영토편입에 의한 천황통치의 목적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註 013
: 原敬, 『原敬日記』 2권(乾元社, 1950) pp.131~132.
註 014
: 春山明哲,「近代日本の植民地統治と原敬」(春山明哲·若林正丈, 『日本植民地主義の政治的展開』, 現代中國硏究叢書 18, アジア政經學會, 1980) pp.23~24.
註 015
: 1921년 이후에 식민지조선과 함께 대만에도 ‘內地연장주의’ 정책이 법률적으로 적용되어 갔으며, 특수한 경우에만 총독의 입법권(律令權)을 인정하게 되었다. 식민정책에 있어서 민사 형사법규나 교육제도의 면에 있어서는 대만 쪽이 조선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널리 ‘內地연장주의’가 적용되었다. 矢內原忠雄, 『帝國主義下の台灣』(岩波書店, 1988) p.173.
註 016
: ‘63문제’의 발단과 경위에 대해서는, 위의 책, p.181이 상세하다.
註 017
: 이 두 견해는 당시 이토오내각이 고용한 영국인 사법성 고문 커크우드(Kirkwood W.M.H.)가 정부측에 자문한 내용 「台灣制度,天皇ノ大權,及帝國議會ニ關スル意見書」에서 이미 잘 구분되어 있었다. 春山明哲, 앞의 논문, pp.3~4.



3. 조선식민지 통치에서의 ‘內地연장주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 통치방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이념상에 있어서의 ‘內地연장주의’와 실질적인 총독전횡의 통치가 혼재하여 적용되었다. 이것은「한일병합에 관한 조약」의 ‘각서별지 제2호’에서 그 식민정책방향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한 것이 1910년 8월이지만, 병합후의 통치형태나 총독부 관제의 대강 등은 이미 병합 1년전인 1909년 7월에 각료회의에서 결정되어 있었다. 각료회의 때 제출된 정부각서 ‘각서별지 제2호’에는, ‘병합방법 순서 細目’이 13항목에 걸쳐 기록되어 있어, 조선병합의 방법과 순서가 자세히 나타나 있다.018018 山邊健太郞, 『日本統治下の朝鮮』(岩波新書, 岩波書店, 1971) p.2.닫기 이 각서에 입각하여 당시 일본에 돌아가 있던 테라우찌(寺內正毅) 통감부 총감이 병합처리방안에 대한 내각의 결정을 얻어낸 것이다. 그 각서의 첫항목에는, “조선에는 당분간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대권에 의해 이를 통치할 것”으로 되어 있으며, 부록의 ‘헌법 해석’ 부분에도, “한국병합에 있어서 제국헌법은 당연히 이 새로운 영토에 시행되어지는 것으로 해석되지만, 사실상에 있어서는 새로운 영토에 대하여 제국헌법의 각 조항을 시행하지 않는 것이 적당하다고 보며, 따라서 헌법의 범위내에 있어서 제외법규를 제정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019019 위의 책, p.3.닫기
이 ‘각서별지 제2호’에 의거하여, 일본정부는 1910년 긴급칙령 제324호를 마련하여, 대만에서와 같이 조선총독에게 입법권을 대폭 위임했다. 이 긴급칙령은 그해의 제국의회에서 승인을 받지는 못했지만, 같은 내용의 법안이 이듬해의 의회에 제출되어 법률로써 가결되었다. 법률 제30호가 된「조선에 시행할 법령에 관한 건」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제국의회의 ‘위헌적’ 행위에 의해 조선총독부에 대한 명령제정 공포권이 법률적인 근거를 갖게 되었으며, 이로써 조선총독은 조선의 사법과 입법·행정의 3권을 한손에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법률의 제1조는, “조선에 있어서는 법률을 요하는 사항은 조선총독의 명령에 의해 이를 규정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제2조에 “제1조의 명령은 내각총리대신을 거쳐 천황의 재가를 요청할 것”을 규정하여, 총독의 전횡 가능성을 견제했지만, 다시 제3조에 “임시긴급을 요할 때 조선총독은 즉시 제1조의 명령을 발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사실상 총독의 전횡적 통치를 보장했던 것이다.020020 위의 책, p.12.닫기
그런데 조선의 식민통치에 즈음하여, 하라는 여전히 그의 지론인 ‘內地연장주의’를 식민지 조선에도 적용할 것을 주장했다. 1911년 4월에 밝힌 그의 견해에 의하면, “조선을 보통의 식민지로 보지 말고 곧 일본에 동화시켜야 하며 또한 조선인들은 동화될 수 있는 인민이다. 다만 일본인과 다른 것은 일본어를 충분히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 뿐이다. 따라서 대만의 중국인들에 대한 대우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우선 일본인들과 다름없는 교육을 조선인들에게 실시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장래에 府縣會와 같은 것도 가능할 것이며 국회의원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021021 春山明哲, 앞의 논문, p.28.닫기 그의 견해는 현실적으로 정치적 권력 측면에서 국민적 대우를 유보한 채 이념적으로 동화교육을 시키자는 고도의 식민통치 방침으로, 훗날의 한반도에 대한 동화적 식민통치를 예견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제국 의회에서 법률을 통해 허용한 총독의 위임입법과 관련하여, 식민지에 있어서의 제국헌법 시행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의 헌법학자들 사이에서 적극설과 소극설의 논쟁이 전개되었다. 먼저 적극설을 취한 학자에는 호즈미(穗積八束), 사사키(佐佐木惚一), 마쯔오까(松岡修太郞) 등이 있다. 이들의 주장은 일본제국을 이루는 영토에 있어서 신구영토에 관계없이 헌법이 당연히 시행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총독의 명령제정권도 헌법에서 위임하고 있는 것으로 합헌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하라의 통치이념인 ‘內地연장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주장에는 아직 ‘새로운 영토’으로서의 식민지에서 실제로 통치권이 어떻게 행해지고 있는가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제기가 없었다. 다만 마쯔오까가 식민지 조선에서 삼권분립이 행해지고 있지 않고 결국 총독에 의한 ‘전제적 행정권’이 입법과 사법의 권한에 많이 관여하고 있어, 식민지에도 일본본국에 상응하는 권리와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소극적으로 지적한 일이 있다.022022 鈴木敬夫, 『朝鮮植民地統治法の硏究:治安法下の皇民化敎育』(北海道大學圖書刊行會, 1989) p.43.닫기
한편 적극설의 이상론 즉 현실적 허위성을 비판하고 소극설을 취한 학자로, 대표적으로 미노베(美濃部達吉)를 들 수 있다. 그는 “입법권자가 특정 사항에 한하여 다른 기관에 위임하는 것은 헌법이 용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고, “특정 사항에 대한 위임이 아니라 입법권 전반을 위임하는 것은 헌법상 용인할 수 없은 것이다. 따라서 조선총독부 및 대만총독부에게 폭 넓게 법률에 대신할 명령의 제정권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헌법의 효력이 조선과 대만에 미친다고 한다면 명백히 헌법위반이다”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총독의 명령제정권에 대한 위헌성을 지적했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식민지가 장래 일본본국에 동화하여 헌법을 시행할 수 있을 정도에 도달할 때까지는 모든 헌법을 시행하지 않는다고 명언할 만큼의 용기가 없음이 유감이다”라고 하여, 식민지가 동화되지 않는 한에는 헌법이 보장되지 않는 식민정책을 묵인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전개했다.023023 위의 책, p.44.닫기
적극설을 ‘內地연장주의’적 주장이라고 한다면 소극설은 ‘제국주의’적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식민통치행위가 있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적극설이 법형식적 논리이자 이상론인데 대해, 소극설은 법실체적 논리이며 현실론이라 할 수 있다. 총독의 위임입법 행위만을 본다면, 적극설에서 보면 헌법상 문제가 없는 것이 되어 실제적인 제국주의적 정책이 은폐되기 쉽다, 그리고 소극설에서 보면 위임입법행위 자체가 위헌이기 때문에 실제적인 제국주의 정책현실에 걸맞는 별도의 법체계가 필요하게 된다. 아무튼 총독이 갖는 광범한 권한의 입법권한은 법형식면에서는 제국헌법에서 위임된 것으로 볼 수 있을지는 모르나, 정책적인 측면에서는 소극설이 지적하는 원천적인 위헌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본제국으로서는 이러한 식민정책의 위헌적 현실을 은폐하고 일본본국과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왜곡된 논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등장하는 논리가 정치적 권리의무에 관한 논의를 전혀 배제한 가운데, 문화적·이념적 동질성만을 주장하는 논리였던 것이다.

註 018
: 山邊健太郞, 『日本統治下の朝鮮』(岩波新書, 岩波書店, 1971) p.2.
註 019
: 위의 책, p.3.
註 020
: 위의 책, p.12.
註 021
: 春山明哲, 앞의 논문, p.28.
註 022
: 鈴木敬夫, 『朝鮮植民地統治法の硏究:治安法下の皇民化敎育』(北海道大學圖書刊行會, 1989) p.43.
註 023
: 위의 책, p.44.




4. 조선총독부의 내선문제 제기

1920년대에 들자, 10년대의 총독부 무단정치가 3. 1운동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식민통치의 효율에 있어서 그 문제점을 드러내면서 새로운 정책적 변화에 직면했다. 게다가 워싱턴체제의 압박으로 국제적 협조외교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국내의 정치체제가 정당정치에 돌입하는 등 제국체제에 민주주의적 요소를 도입하게 되면서, 일본제국은 식민지조선에 있어서 통치방향을 ‘문화통치’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화통치’하에 있어서도 식민통치의 근간은 변함이 없었으며, 오히려 고도로 간교해진 식민통치로서 한민족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통제와 수탈이 계속 실시되어 갔다.024024 차기벽편, 앞의 책, pp.33~38.닫기
3. 1운동 이후의 조선총독정치의 재편과 ‘문화통치’의 실시에는 그 당시의 일본수상이던 하라의 아이디어가 많이 작용했다. 하라는 한반도에서의 독립만세운동 사건에 접하고, 시대적 요청에 맞추어 조선통치방법에 변화를 행할 필요를 느끼고, 총독부 관제을 개정함과 동시에 새로운 인사조치를 단행했다. 그래서 우선 사표를 제출한 하세가와(長谷川) 총독과 야마가따(山縣) 정무총감 대신에, 사이토오(齋藤實)와 미즈노(水野鍊太郞)를 총독과 정무총감으로 경질시켰다.025025 齋藤實, 『子爵齋藤實傳』 第2卷(財團法人齋藤子爵記念會, 1941) pp.437~438.닫기 하라가 문화통치를 취한 의도로, 조선총독부의 『조선통치비화』는 다음과 같은 것을 열거하고 있다. 첫째, 무엇보다도 조선의 독립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을 국내외적으로 선언해 둘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조선인의 자치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제까지의 불투명했던 일본제국과 총독통치와의 상하관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 한반도 안에 있는 조선인들에게 지방행정에의 참여를 어느 정도 허용하여, 조선인들의 정치참여 욕구를 충족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넷째, 한반도 밖에서 재류하는 조선인들을 단속하고 보호할 목적으로 재외한인 교육지원책을 강구했다. 이는 재외독립운동을 단속하고 역으로 재외한인을 이용하여 만주진출을 용이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다섯째, 교육제도의 개혁을 확대하고 중추원을 개혁하여 지방세력가들을 대거 등용 규합하고, 아울러 이들을 중앙에서 통제하겠다는 것이었다.026026 조선총독부편, 『조선통치비화』(이충호·홍금자 역, 형설출판사, 1993) pp.154~166.닫기
하라는 일본제국의 국가 이익의 관점에서, 서구에 대해서 동아시아 지역의 새로운 질서구축을 추구해 가면서, 현실적으로 만주몽고에의 적극적 진출을 기도했다. 따라서 서구열강에 대해서 부드럽고 신중한 외교행태를 보임으로써 일본의 아시아 대륙진출에 대한 서구열강의 경계를 완화시키는데 주력했다. 그는 분명히 당대의 일본국가 이익의 관점에서 보면 ‘위대한 정치가 혹은 외교가’였는지 모른다.027027 신희석, 『일본의 외교정책』(을유문화사, 1991) pp.93~109.닫기 그러나 이러한 현실주의적 외교행태의 일환으로 그가 식민지조선에 대한 “문화통치”를 제기했음을 볼 때, 식민지 주민의 정치적 위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는 철저한 愚民정책의 추진자로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총독으로 새로 부임한 사이토오는 1919년 9월 3일에 행한 새로운 시정방침에 대한 훈시에서, “새로운 시정방침이 천황의 ‘聖恩’에 의한 것”이라고 전제하고, “내선人으로 하여금 항상 동포애로 相接하며 공동협력할 것이며, 특히 조선인들은 심신을 연마하고 문화와 民力을 향상시키기를 바란다”고 했다.028028 조선총독부, 『조선에 在한 新施政』(조선총독부, 1921) pp.54~56.닫기 이때부터 총독의 공식적인 발언에서 ‘내선융화’라는 단어가 빈번히 사용되게 되었다. 이어 9월 10일 ‘시정방침의 諭告’라는 총독담화가 있었는데, 그 요지는 ‘내선융화’의 시정을 베풀어 나갈 것이라는 시정방침을 소개하고, 이에 대해 순순히 복종할 것과 치안유지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 다음의 말에서도 총독부가 추진하는 ‘내선융화’의 허위성을 발견해 낼 수 있다.

새로운 조선통치 방침은 一視同仁의 대의로 민중들의 복리를 증진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보하는데 있다. 이에 국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복리를 증진시킬 것을 기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감히 불손한 언동으로 인심을 미혹하고 公安을 저해하는 자는, 법에 비추어 추호도 가차없이 다스릴 것이다.029029 齋藤實, 앞의 책(第2卷), pp.437~438. 위의 책, pp.440~451에는 같은 취지로 이듬해 1월 1일에 행한 총독담화가 실려 있다. 닫기

‘내선융화’의 구체적 실현방책으로 총독부가 널리 선전한 것으로는, 무엇보다 ‘조선인 文官에 대한 대우개선’ 정책으로, 조선인 관리에 대한 서위·서훈자격의 확대, 조선인 訓導(교사)의 공립보통학교 교장임용 확대, 조선인 판검사 권한 확대 등이 있다. 또한 ‘형식주의의 쇄신’ 정책으로, 총독부 관리들의 제복착용 폐지와 사무간소화 및 하급관리에 대한 위임확대가 있다. 그리고 ‘민의창달’ 정책으로서 지방有志들의 대거 등용, 民情시찰단의 파견, 한글신문 발행의 허가, 공립보통학교의 증설, 학제의 개혁, 사립학교 규칙개정 등을 선전하였으며, 그 밖에 笞刑제도의 폐지, 지방행정의 개혁, 산업개발정책 및 복지정책의 확대 등을 선전했다.030030 조선총독부, 앞의 책(1921) pp.3~38.닫기
그런데 정치적인 권리면에서는 일본본국과 같은 법적 지위를 갖지 못하는 식민지조선에 ‘문화통치’를 실시한 것은 그야말로 식민주의적 동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특히 총독부에서 1922년의「제2차 조선교육령」(칙령 제19호) 제정 공포를 계기로 조선인과 일본인의 무차별성을 강조하게 되는데, 그것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공허한 것인가를 잘 알 수 있으며, 오히려 식민교육의 철저화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가「제2차 조선교육령」의 공포에 즈음하여, 총독이 내 놓은 ‘諭告’에 의하면, “내선공통의 정신에 기초하여 동일제도 하에 시설의 완비를 기하게 되었다”라든지, “구제도와 달리 신제도는 ‘내선人무차별’의 근본사상에 입각한 제도이다”라든지 하여, 일본인과 조선인의 무차별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그것은 일본어 기타 학습조건에서 일본인과 동일할 것을 전제로 하는 비현실적인 이념에 불과한 것이었다.031031 鈴木敬夫, 앞의 책, pp.157~158.닫기
한편 이러한 ‘문화통치’나 ‘내지연장주의’는, 조선인에게 뿐 아니라 일본본토의 일본인들에게도 ‘大日本주의’ 이념아래 선전되어, 일본의 대륙진출을 위해 일본인들의 한반도로의 유입을 촉진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이용되었다. 당시 ‘조선연구회’를 주재하던 아오야기(靑柳綱太郞)는, 일본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 정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관민이 조선에 영주하겠다는 마음이 없어서야 어떻게 大日本帝國의 대륙발전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실로 의문이다. 현대세계를 大觀해 보건대 서구는 今昔이 다르나 동양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다. 실로 일본인이 안으로 마음을 결속하고 밖으로 식민지 경제적 기반을 공고히 하여 國富를 증진해야 하며, 대일본주의의 신념아래 조선경영에 있어서 제반산업은 물론 종교·학술 기타 시설계획에서 大和민족의 발전팽창을 기해야한다. 민족적 팽창없이 한국을 병합한 보수가 무엇이겠는가? 조선은 大和민족 발전의 基本地이다. 실로 永住的 기풍을 배양하여 조선경영의 근본을 확립하지 않겠는가?032032 靑柳綱太郞, 『朝鮮統治論』(再版, 朝鮮硏究會, 1923) pp.826~828.닫기


註 024
: 차기벽편, 앞의 책, pp.33~38.
註 025
: 齋藤實, 『子爵齋藤實傳』 第2卷(財團法人齋藤子爵記念會, 1941) pp.437~438.
註 026
: 조선총독부편, 『조선통치비화』(이충호·홍금자 역, 형설출판사, 1993) pp.154~166.
註 027
: 신희석, 『일본의 외교정책』(을유문화사, 1991) pp.93~109.
註 028
: 조선총독부, 『조선에 在한 新施政』(조선총독부, 1921) pp.54~56.
註 029
: 齋藤實, 앞의 책(第2卷), pp.437~438. 위의 책, pp.440~451에는 같은 취지로 이듬해 1월 1일에 행한 총독담화가 실려 있다.
註 030
: 조선총독부, 앞의 책(1921) pp.3~38.
註 031
: 鈴木敬夫, 앞의 책, pp.157~158.
註 032
: 靑柳綱太郞, 『朝鮮統治論』(再版, 朝鮮硏究會, 1923) pp.826~828.


5. 문화통치의 한계

그런데 ‘내지연장주의’를 내세우는 총독부의 기만적인 문화통치는, 소수 일본인 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아 왔을 뿐 아니라, 독립을 열망하는 조선인들의 저항을 받게 되었다. 문화통치 초기에 조선총독부가 ‘내선융화’ 시정방침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응을 조사한 일이 있다. 주로 조선인 지식인들의 발언과 언론출판에서의 반응을 조사한 것으로, 총독부의 내부비밀문서「내선문제에 대한 조선인의 소리」를 보면, ‘내선융화’의 기만성을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 중에 ‘조선인 시민의 내선융화관’을 조사한 내용으로, 어느 조선인 관리가 다음과 같은 비판적 견해를 나타낸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인들도 內地人(일본인)과 같아지고 싶다는 관념, 그것은 사회지위나 경제생활면에 있어서 또는 力量技能면에 있어서 조선인들이 가장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국에서는 내선人을 결코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각처에서 차별대우에 대한 怨聲이 일어나고 있다. 당국이 ‘조선인을 특히 보호한다’든지 ‘특히 조선인을 위해서’ 라는 말을 사용하는데에 대해 조선인으로서는 이중의 모욕을 느낀다. 첫째는 표면적으로 듣기 좋은 말을 하여 조선인을 기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이 그런 것을 모를 정도로 우둔하지 않다. 둘째는 ‘조선인을 위해서’라는 말이 일본인에게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해석되어, 결국 조선인들이 未能力者 취급을 당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033033 朝鮮總督府, 『內鮮問題に對する朝鮮人の聲』(調査資料12輯, 朝鮮總督府, 1925) pp.1~2.닫기

이 관리는 일찍이 ‘내선융화’의 근본적인 문제를 교육면에서 찾고 있으며, 일본인 아동과 같이 조선인 아동에게도 의무교육으로서 小學교육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보고, 경제사회 면에서의 실질적인 ‘내선융화’를 강조했다. 총독부 당국에 대한 단순하고 긍정적인 기대를 거는 것이 한계이기도 하지만, 당시 조선인 관리의 차별대우 현실에 대한 솔직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그 밖에 이 조사자료에는, ‘내선융화’를 위해서 참정권의 부여가 시급하다고 하는 견해와, “메이지 천황의 ‘萬世一系’ 詔勅에 반해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학대멸시하는 것이 결국 천황에 대한 不忠이 아닌가”하는 온건한 비판도 있었다.034034 위의 자료, p.5 ; pp.7~8. 닫기 나아가서는 참된 ‘내선융화’는 일본인과의 通婚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적극적인 同化論도 있었고,035035 위의 자료, pp.17~18.닫기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에 무슨 융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과 함께, 참된 ‘내선융화’는 조선이 해방하는 날로부터 시작한다는 궁극적인 민족독립론도 있었다.036036 위의 자료, pp.12~14.닫기
그 뿐 아니라 총독부의 기만통치에 대해 조선인들의 저항운동이 다방면에서 전개되었다.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언론교육의 규제가 어느 정도 완화되자, 이를 이용하여 민족사상을 고취하거나 민중들의 의식을 촉구하는 간접적이고 準합법적인 저항을 나타냈다. 한반도 밖에서 국제적으로 조선독립청원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국내에서도 순종황제의 장례식에 즈음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기도 하고, 그 밖에도 1929년말의 광주학생운동이나 신간회에 의한 ‘민중대회’ 결행 계획이 있었으며, 개인적 혹은 조직적으로 테러를 감행함으로써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을 나타냈다.037037 佐佐木春隆, 『韓國獨立運動の硏究』(圖書刊行會, 1985) pp.168~198.닫기 특히 1926년의 6. 10만세운동은 총독통치에 대한 조선인의 저항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이 운동은 사회주의 사상이 대거 유입된 운동으로서 근본적으로 식민통치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1920년대의 일본에 있어서의 무산계급정당 결성 움직임과 맞물려, 일본인 지식인에게도 식민통치에 대한 반성을 불러 일으켰다.038038 이현희,「6. 10독립만세운동攷」 (6. 10만세기념사업회, 『6. 10독립만세운동 ; 제65주년 기념자료집』, 6. 10만세기념사업회, 1991) pp.7~76.닫기
한편 대중들의 정치적 참여가 활발해지고 있던 일본본토에서도, 식민통치에 대한 비판 내지 재고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었다. 하라가 내각수반이 된 1918년부터 일본의 정계에 있어서 정당을 근간으로 하는 정치가 정착되어 갔으며, 비록 치안유지법을 동반한 조치이기는 했지만 종래의 제한선거가 보통선거로 바뀌어 가면서 정치적 참여의 폭이 눈에 띄게 확대되어 갔다. 1925년 3월의 제50회 제국의회에서, “납세자격을 요하지 않으며 모든 25세 이상의 남성에 대해 선거권을 부여하는” 보통선거법을 성립시켰다. 이에 따라 소위 ‘內地연장주의’를 내세우는 식민정책 아래서 식민지 주민과 제국의회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일본인 학자들 가운데서 널리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때 대부분의 일본인 지식인들은 조선이 일본과는 여러가지 조건이 다르다는 이유를 들어 제국의회와의 직결에 의구심을 품었다. 만약 일본본토와 같은 방식으로 인구 12만명당 한명 정도로 식민지에서 의원들이 선출된다면, 조선에서만도 150명 정도가 제국의회에 진출하게 되어 일본내의 의원 총수의 3분의 1에 육박할 것이기 때문에, 제국의회가 식민지 출신의원들에 의해 혼란에 빠질 것이 명백했다. 그래서 그들은 ‘내선융화’논리를 현실적인 정치와는 관계없이 다만 식민지에 대한 교화논리로서만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펼치는 대표적인 논객 중 한 사람으로, 당시 경성제국대학의 조교수로 있던 마쯔오까(松岡修太郞)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현시점에서는 조선인은 바랄 수 있는 것으로서, 점진적인 제도개혁에 의한 합리적인 통치를 희망해야 한다. 조선인 민중들은 허영적인 자부심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종족적인 편견을 버리고 쓸데 없이 모국 본위로 치닫지 말고, 그러면서도 조선의 특성을 무시함이 없이 정의에 기초한 인류공동의 복리증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039039 松岡修太郞,「植民地制度と朝鮮」(『朝鮮』 139號, 1926年 12月) pp.16~17.닫기

그런데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소수의견으로서, 식민지 조선의 참정권 문제에 관련한 ‘內地연장주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자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주장으로서,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 『京城日報』 사장직에 있던 소에지마(副島道正)의 ‘자치권부여’ 주장과, 토오쿄오대학 교수이던 아나이하라(矢內原忠雄)의 ‘조선의회설치’ 주장을 들 수 있다. 두 주장은 모두 조선의 즉시 독립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볼 때, 여전히 조선총독통치의 근본적인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040040 송이랑, 『일제의 한국식민지 통치방식에 관한 연구』(경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논문, 1987년 1월) pp.103~106.닫기 그러나 당시의 군부에 의한 식민통치정책이 강압적으로 추진되고 있던 상황이나, 대다수 지식인들이 당시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데 급급했던 것에 비추어 보면, 소수 일본인 지식인들을 대표하여 총독통치에 이의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주의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929년에 발간된 『조선통치문제 논문집』에는 조선통치에 대해 식견을 피력해 왔던 유명한 논문들을 50편을 싣고 있는데, 그 중에서 위의 두 사람만이 당시의 식민통치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던 것이다.
소에지마는 6. 10만세운동 직전에 세차례에 걸쳐 『京城日報』의 사설에「조선통치의 根本義」라는 논문을 발표했었다. 그후 곧 그는 신문사 사장직을 사임했으며, 6. 10만세운동 직후에는「조선통치의 현상 및 장래」라는 팜플렛을 발행하여 일본본토와 한반도에 배포함으로써 조선인의 참정권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041041 幼方直吉,「朝鮮參政權問題の歷史的意義」(『東洋文化』 36號, 1964年 4月) p.12.닫기 그는「조선통치의 根本義」에서, 식민통치방침으로서의 ‘內地연장주의’가 일본의 정치상황를 혼란케 한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內地연장주의’를 포기하고 식민의회를 구성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일본의 식민정책이 영국의 아일랜드에 대한 정책을 모법으로 하는 경향에 대해, “아일랜드 출신 의원이 얼마나 영국의회를 착란하고 정계의 분위기를 악화시켰는가”를 상기시키고, 만약 조선인 의원이 제국의회에 선출되는 것을 허용한다면, 이들은 민족적 정당이 되어 이미 결성되고 있는 무산정당이나 기성정당들과 결합하여 제국의회를 혼란 속에 밀어 넣을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042042 副島道正,「‘朝鮮統治の根本義」(井本幾次郞編集兼發行, 『朝鮮統治問題論文集』, 1929) pp.101~102.닫기
그는 “帝國의 영토로서 조선고유의 문화적 특성에 입각한 문명적 통치형태”를 제시함으로써, 조선의회설립의 필요성을 암시했다. 그리고 조선의 민족주의에 대한 부르주아적 인식에 의거하여, 조선인에게 일본본토에서와 같은 참정권을 부여하게 되면 일본의 노동자계급이나 국제적 사회주의 단체와 연대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조선에 자치를 부여하려는 것은 조선인들에게 건전한 희망과 착실한 사상을 부여하고 합리적 수단에 의해 그 민족주의의 실현을 기하기 위해서”라고 했다.043043 위의 논문, p.100.닫기 그의 문제제기를 정책적 측면에서 요약하면, 조선에 의회를 설치하여 그 참정권을 실현하고, 일본제국 영토안에서 자치를 부여하자는 것으로서, 마치 영국의 통치지배형식과 같은 식민정책을 실현하도록 주장했던 것이다.
한편, 일찍부터 야나이하라는 ‘과학적 식민정책’의 견지에서 적극적으로 ‘조선의회’ 도입을 제안했다. 그는 1926년 4월에 발표한 논문 ‘일본의 식민정책’에서, 조선 및 대만에 있어서 참정권 기관은 없으며, 세계의 어느 식민지에서도 그 예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총독에 의한 專制정치가 행해지고 있다고 비판하고, 이러한 제도로는 부지불식 간에 內地 혹은 內地자본가의 이익으로 귀착되는 정책이 실현되기 쉬우며 식민지 사회는 소위 문화정치 아래 오히려 빈민화하는 현상이 생길 것이라고 지적했다.044044 幼方直吉, 앞의 논문, p.14. 닫기 이어 같은 해 5월에 발표한「식민 및 식민정책」에서도 그는 조선인의 참정권 문제는 조선의회를 설치하는 것 밖에는 해결방법이 없다고 단정하고, 조속한 설치가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조선의회를 개설하는 방향으로라도 식민통치가 바뀌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045045 矢內原忠雄, 『矢內原全集』 1卷(岩波書店, 1963) p.292.닫기 이윽고 6. 10만세운동 직후, 당시의 총독통치에 대해 비판할 의도에서 발표한 논문 ‘조선통치의 방침’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그의 지론을 피력했다.

문제는 조선의 의원을 제국의회에 보낼 것인가, 혹은 조선의회를 특설할 것인가에 있다. 와까기(若槻)수상이 전번 의회에서 식민지의회의 특설 같은 것은 고려 밖의 일이라고 명언한 것을 기억한다. 우리 일본의 정치가들의 견해는 대개 제국의회에의 합병설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해 근본적으로 반대한다. 사할린과 같이 주민의 대부분을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고 총인구도 적은 식민지 같으면, 이를 內地에 포용하고 제국의회에 의원을 선출해 보내도록 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전혀 사정이 다르다. 조선은 內地와 동일하게 제국의회에 대표될 수 있는 사회적 기초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제국적 정치에 대한 조선의 참여문제는 2차적인 문제다. 우선 조선의 내정에 대한 조선인의 참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조선의 내정은 조선인을 主로 하는 의회에서 이를 결정하게 해야 한다. 마치 內地의 내정을 內地人의 의회에서 결정하게 하는 것 처럼.046046 위의 책, pp.740~743. 이 글이 실린 논문이 『朝鮮統治問題論文集』 속에 다시 게재되었다.닫기

소에지마가 일본본토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식민지의회를 주장한 것에 비해, 야나이하라는 조선에 맞는 통치실현을 위해 식민지의회를 주장했다고 볼 수 있다. 두 지식인 모두 일본제국의 안정이라는 목표를 위한 현실적인 식민통치방안으로서 식민지에 대해 제한된 자치를 허용할 것을 주장했다. 다만 야나이하라 쪽이 보다 민주적 입장에서 더욱 적극적인 자치허용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치부여’주장은 실제로 식민지에서 요구하는 국가독립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었으며, 게다가 식민통치이념으로서 ‘내지연장주의’를 내세우고 있던 당시 정계의 주류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너무나 나약한 주장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본인들 사이에 터부시되고 있던 식민통치방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 만으로도, 이러한 논의전개가 의의를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에지마는 이러한 주장이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총독부로부터 그의 說을 취소하도록 주의를 받았다고 한다.047047 小松錄,「朝鮮自治と內地延長主義」(井本幾次郞編集兼發行, 앞의 논문집) p.1.닫기 아무튼 식민통치에 대한 이의제기 직후 그는 京城日報 사장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며, 정치권 밖에 밀려서 소견을 개진하다가 30년대에 들어서는 통치정책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못하게 된다. 야나이하라의 경우는 소에지마와는 달리 교수직을 즉시 사퇴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도 역시 30년대에 들어서는 식민통치에 대한 아무런 언급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1920년대 일본제국의 식민통치는 이러한 특정 소수 지식인의 나약한 이의제기에서라도 문제시 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30년대에 들어 본격화하는 일본제국의 대륙침략전개는 이러한 여지도 허용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註 033
: 朝鮮總督府, 『內鮮問題に對する朝鮮人の聲』(調査資料12輯, 朝鮮總督府, 1925) pp.1~2.
註 034
: 위의 자료, p.5 ; pp.7~8.
註 035
: 위의 자료, pp.17~18.
註 036
: 위의 자료, pp.12~14.
註 037
: 佐佐木春隆, 『韓國獨立運動の硏究』(圖書刊行會, 1985) pp.168~198.
註 038
: 이현희,「6. 10독립만세운동攷」 (6. 10만세기념사업회, 『6. 10독립만세운동 ; 제65주년 기념자료집』, 6. 10만세기념사업회, 1991) pp.7~76.
註 039
: 松岡修太郞,「植民地制度と朝鮮」(『朝鮮』 139號, 1926年 12月) pp.16~17.
註 040
: 송이랑, 『일제의 한국식민지 통치방식에 관한 연구』(경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논문, 1987년 1월) pp.103~106.
註 041
: 幼方直吉,「朝鮮參政權問題の歷史的意義」(『東洋文化』 36號, 1964年 4月) p.12.
註 042
: 副島道正,「‘朝鮮統治の根本義」(井本幾次郞編集兼發行, 『朝鮮統治問題論文集』, 1929) pp.101~102.
註 043
: 위의 논문, p.100.
註 044
: 幼方直吉, 앞의 논문, p.14.
註 045
: 矢內原忠雄, 『矢內原全集』 1卷(岩波書店, 1963) p.292.
註 046
: 위의 책, pp.740~743. 이 글이 실린 논문이 『朝鮮統治問題論文集』 속에 다시 게재되었다.
註 047
: 小松錄,「朝鮮自治と內地延長主義」(井本幾次郞編集兼發行, 앞의 논문집) p.1.


Ⅱ. 중일전쟁과 ‘신민화’ 정책


1. 일본 국내외의 상황변화

1931년의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정부의 대외정책에서 군부의 개입이 시작되었는데, 때마침 30년대 중반 일본경제가 침체하자 그 돌파구로서 대륙팽창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 갔다. 일본정부는 소련에 대항하고 만주에 대한 정치적 지배권과 자원이용권을 확대하려는 목적에서, 1936년 1월의 ‘제1차 북중국(北支)처리요강’에서부터 이듬해 4월의 ‘對중국 실행책’에 이르기까지 중국화북지방에 대한 강경개입방침을 결정했다. 이러한 일본의 침략에 대해 중국에서는 반일운동과 반국민당정부 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동북 군벌들이 용공반일 움직임 혹은 장개석에 대한 반대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1936년 12월에는 장학량이 장개석을 감금하는 西安사건이 일어났으며 중국내전의 반대와 국공합작의 기운이 높아져 이듬해 9월 제2차 국공합작에 의해 항일통일전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본토에서는 이미 1936년 3월 히라타(廣田)내각이 발족할 때, 군부에서 ‘테라우찌(寺內)성명’을 통해 신정부의 자유주의적 정책을 비판하고, 적극적인 국가통치를 위해 군부 스스로가 국가정책에 관여할 것을 천명했다. 이후 군부의 정치적 발언이 점차 빈번해져 갔으며, 일본의 대외정책은 물론 국내정책에 이르기까지 군부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갔다.
1937년 7월 7일 제1차 코노에(近衛) 내각이 성립된 지 한달만에, 북경 교외의 蘆構橋에서 일본군과 중국군의 충돌사건이 일어났다. 일단 중국군 간부들은 전투확대를 막으려고 일본측의 요구를 받아 들이는 방향으로 정전협정에 임했다. 이에 따라 7월 11일 일단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코노에 내각은 군부 주도 아래 일본에서 3개사단을, 그리고 만주와 조선으로부터 각각 1개 사단씩을 파견하여 오히려 전쟁준비에 착수했다. 이에 맞서 7월 17일 장개석도 일본에 대해 철저히 항전할 것을 결의함으로써 점차 중일전쟁으로의 기운이 높아 갔다. 일본군은 증원군이 도착하자 총공격을 개시하여 8월 4일에 북경과 천진을 점령하고, 이어 상해도 점령했으며 남경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군해 갔다. 그런데 중국 각지에서 항일투쟁이 전개되고 제2차 국공합작을 통해 통일전선이 형성됨으로써, 당초 일본군부의 예상과는 달리 전쟁이 장기화하게 되었다.
일본 내각과 군부는 전쟁을 확대하여 일거에 중국의 국민혁명군을 격파할 의도로, 의회결의를 통해 25억엔이 넘는 막대한 군사비 지출을 제기하여 승인을 얻어냈다. 게다가 이듬해의 제국의회에서 군수공업동원법, 임시자금동원법, 수출입품의 임시조치법의 세 법안을 가결시켜, 전시통제경제의 윤곽을 확정했다. 그리고 내각은 내각참의제를 설치하고 각계의 대표들을 모아 전쟁수행을 위한 자문기관으로 삼았다. 그와 함께 1938년 9월부터는 八紘一宇, 擧國一致, 堅忍持久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국민정신 총동원운동을 시작하여, 국민들을 전쟁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사상적 통제와 교육을 강화해 갔다.048048 강동진, 『일본근대사』, pp.391~394.닫기
중일전쟁의 개시와 함께 전쟁을 비판하는 언론과 사상에 대하여, 내무성에서는 엄격한 탄압조치를 취했다. 이에 따라 토오쿄오 대학의 야나이하라 교수가 『中央公論』 1937년 7월호에 전쟁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가 삭제처분을 받았으며 12월에는 교단에서 쫓겨난 것을 필두로 하여, 전쟁반대의 기미를 보이는 신문·잡지의 기사가 철저히 단속되거나 필자들이 치안유지법 위반의 혐의로 기소되었다.049049 위의 책, pp.395~397.닫기 이러한 경제면·사상면에 있어서 전시의 체제는 식민지 조선에도 강요되었다. 대륙진출을 위한 병참기지 조선에 군사공업을 육성시키고, 조선인들에게 ‘내선융화’를 강조해 오던 이념교육을 더욱 강화하여 인적·물적 동원의 틀을 마련하게 함으로써, ‘內地연장주의’의 전시체제에의 현실적 적용을 단행한 것이다.

註 048
: 강동진, 『일본근대사』, pp.391~394.
註 049
: 위의 책, pp.395~397.

2. 南총독의 ‘내선일체’ 주창

1936년 8월 5일 육군대장 미나미(南次郞)가 조선총독에 새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미 1929년 8월부터 1년반 정도 朝鮮軍사령관으로 지낸 바 있어 조선의 사정에 정통했으며, 또한 1931년에 수개월 동안 육군대신을 역임했고 총독부임 전에는 關東軍 사령관, 관동주 지사, 만주국 대사의 직을 맡아 만주국을 지도해 왔던 인물로, 일제의 대륙경영에 있어서 화려한 경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총독에 부임하기에 앞서, 1936년 8월 22일 토오쿄오에서 조선통치방침에 대한 성명서를 내어, “조선통치의 要諦로서, 한국합방의 정신을 받들어 民力의 발달, 康福의 증진, 산업무역의 발전을 도모하여 보다 진전된 내선융화의 열매를 맺고, 조선과 만주가 接境관계에 있으므로 서로 공존공영을 기해 가야한다”고 함으로써, 식민통치이념에서 종래의 ‘내선융화’이념을 답습해 갈 것과 함께, 만주국과의 결연을 강화해 갈 것을 천명했다.050050 「南總督東京に於ける聲明書」(1936年 8月 22日 ; 朝鮮總督府官房文書課編, 『諭告·訓示·演述總攬』, 朝鮮總督府, 1941) p.582.닫기 그는 총독에 부임하자 마자, 취임성명을 통해 일촉즉발의 국제적 위기를 환기시키고, “일본의 중점이 만주국과의 불가분한 관계를 증진시켜가는데 있으며, 만주국과 조선과는 상접하고 있어 조선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역할이 중대하다”고 하여, 무엇보다 만주국과의 결연을 강조하며 총독업무를 개시했다.051051 宮田節子, 앞의 책, pp.150~151.닫기 만주를 중시하는 그의 이러한 견해는, 1937년 4월 20일의 도지사회의에서 자신의 통치방침으로 제시한 ‘國體明徵’, ‘鮮滿一如’, ‘敎學振作’, ‘農工倂進’, ‘庶政刷新’의 5대강령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052052 「道知事會議に於ける總督訓示」(1937年 4月 20日 ; 朝鮮總督府官房文書課編, 앞의 책) pp. 159~163.닫기
그런데 그 후 3개월이 지나 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조선인들에 대해 전쟁협력을 유도하고 사상적인 단속을 강화하기 위해서, 보다 강력한 정치적 슬로건과 민중통제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내지연장주의’의 정치적 슬로건으로서 종래 ‘내선융화’를 사용해 왔으나,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내선일체’라는 보다 강렬한 슬로건을 사용하게 되었다. 1938년 4월 19일의 도지사회의에서, 미나미는 “중국의 사변에 의한 영향과 본인이 시행할 방침과를 비교하여 검토하면, 5대방침은 통치의 근본취지라고 할 수 있는 ‘내선일체’의 본류에 따를 때에 가일층 새로운 의의를 갖게 되며, 그 실적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고, “5대방침의 수행이 장래의 ‘내선일체’ 심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하여, ‘내선일체’를 조선통치의 근본이라고 강조하기에 이르렀다.053053 「道知事會議に於ける總督訓示」(1938年 4月 19日 ; 朝鮮總督府官房文書課編, 앞의 책) pp. 172~175.닫기
미나미는 1939년 5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의 임원총회에서 한 인사말 속에서, ‘내선일체’의 최후목표는 “내선무차별 평등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하고, 그 현실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가 항상 역설하는 것은, ‘내선일체’가 서로 손을 잡는다든지 융합한다고 하는 그런 미지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손을 잡는 자는 손을 떼면 그만이다. 물과 기름도 무리하게 휘저으면 융합한 모양이 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모양도 마음도, 피도 육체도 모두가 일체가 되어야 한다. 현하 세계추세의 획기적 변화를 동기로 하여 바뀔 것은 빨리 바뀌어야 한다. 시국인식이 모자라는 자는 더욱 그 인식을 깊이 하라. 우리가 지금 지향하는 길은 눈앞의 작은 문제가 아니며, ‘내선일체’의 강화구현이야말로 동아시아의 새로운 건설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므로, 그것을 이룩하지 않고서는 만주국을 형제국으로 한다거나 중국과 제휴한다거나 하는 말은 할 수 없는 것이다. 내선은 융합이 아니며, 악수에 있지 않으며, 심신 모두 진실로 일체가 되는 것이어야 한다.054054 津田剛, 『內鮮一體論の基本理念』(今日の朝鮮問題講座1, 綠旗聯盟, 1939) pp.8~9.닫기

총독부의 대중선전을 위한 어용문화단체 ‘녹기연맹055055 ‘녹기연맹’은, 천황주의 골수분자 津田榮 일가에 의해 주도된 단체로서, 1925년 2월에 ‘경성天業청년단’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1930년 5월에 ‘녹기동인회’으로 개편한 후, 1933년 2월에 ‘녹기연맹’으로 재출발한 것이다. “일본國體의 정신에 卽하여 건국 이상 실현에 공헌한다”는 것을 강령의 하나로 내건 이 단체는, 그 조직활동으로서 천황 귀일의 생활운동과 사상통일작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갔다. 임종국, 『일제하의 사상탄압』(평화출판사, 1985) pp.199~200; 高崎宗司, ‘綠旗聯盟と‘皇民化’運動’(『季刊三千里』 31號, 1982年 8月) pp.64~72.닫기의 주간을 맡고 있던 쯔다(津田剛)는, ‘내선일체’ 슬로건에 다음과 같은 현실적 의도가 있다고 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설명했다. 즉 먼저 정신적으로, 황국신민으로서의 천황에 대한 충성을 고양시키는 것이며, 문화적으로는 지난날의 모든 좌익적 민족주의적 색채를 없애는 것이며, 경제적으로는 대륙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다 하게 하는 것이며, 정치적으로는 교육령의 개정이나 지원병제도의 창설을 통해 신민의 대우를 받게 한다는 것이다.056056 津田剛, 앞의 책, pp.9~10.닫기
총독부의 ‘시국대책조사회’에서는 정신교육의 일환으로, 일장기를 배부하고, 총독부 주최로 대중들을 동원하여 시국순회강연회를 열고,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을 결성하고, 문예회를 가져 시국관련의 가요를 보급하고, 국방헌금 및 비행기헌납운동을 유도하며, 황국신민의 선서(誓詞)을 암기 제창하도록, 상세한 지침을 각 지방에 하달했다.057057 「朝鮮總督府時局對策調査會諮問案參考書」(生活ノ刷新ニ關スル件, 1938年 9月) pp.4~20.닫기 그리고 각 관공서나 회사·공장·각종단체 등을 단위로 매월 1회에 걸쳐, 애국일을 설정하고 지키게 했으며, 그 날에는 신사참배와 일장기 게양을 행하고 국가(君が代)를 제창하고, 시국강의를 듣고 황국신민의 선서를 제창하며 ‘천황폐하만세’를 삼창하도록 지침을 내렸다.058058 위의 자료, pp.21~22.닫기
식민지 조선에서의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미나미 총독의 부임 이후 ‘내선일체’를 주장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운동을 조직화하여 어용교화단체들을 통해 ‘내선일체’교육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정책적인 측면에서 보면 1937년 7월 15일에 임시 도지사회의에서 행한 총독의 훈시를 발단으로 하여 총독부 안에 7월 22일 ‘중앙정보위원회’가 설립된 것을 시점으로 잡을 수 있으며, 운동적인 측면에서 보면 1938년 7월 7일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발족한 것을 그 시점으로 잡을 수 있다.059059 Anzako 由香,「朝鮮における戰爭動員政策の展開: ‘國民運動’の組織化を中心に」(『國際關係學硏究』 21號, 津田塾大學, 1995年 3月) p.2.닫기 1937년 8월 ‘중앙정보위원회’는 拓務차관으로부터 ‘국민총동원 실시에 관한 건’을 통달받고, 전시통제정책과 군사후원정책을 모색하는 한편, ‘국민정신 作興 주간’, ‘국민정신총동원 강조 주간’을 실시하여 시국선전과 함께 ‘근검절약’ ‘저축장려’ 등의 캠페인을 전개해 갔다.060060 위의 논문, p.2.닫기 그리고 미나미 총독은 1938년 4월의 도지사회의에서, ‘국민운동’을 통제강화해 갈 것을 천명했으며, 이 자리에서 오오노(大野綠一郞) 정무총감은, 총독이 말한 ‘국민운동’은 구체적으로 정신총동원운동을 가리키는 것이며 “앞으로 가일층의 준비하에 이 운동을 강화해 갈 것 필요가 있다”고 말해, 이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해 갈 것을 표명했다.061061 『朝鮮』 1939年 5月號, p.112.닫기
이렇게 해서 기획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은, 총독부 알선에 의해 ‘내선민간 유력자’ 10명을 준비위원으로 하여, 57명의 지도자급 인사와 65개의 단체가 발기하여 출발했다. 이 연맹의 명예총재직에는 오오노 정무총감이 앉았으며, 이사장직에는 시오하라(鹽原時三郞) 학무부장이 앉았다. 발족 당시에는 이 연맹의 활동에 대한 주무부서가 총독부의 학무국 사회교육과였으나, 1939년 4월에 총독부내에 ‘국민정신총동원 위원회’와 그 간사회가 설치되고 나서는 관방문서과가 주무부서가 됐다. 이 위원회의 위원장은 정무총감이 담당했으며, 구성원으로서 총독부내의 모든 국장이 임명되었다.062062 Anzako 由香, 앞의 논문, pp.4~5.닫기 또한 총독부의 국장·부장 및 관계과장이 이사 혹은 참사로서 위원회를 운영했으며, 조선군 및 조선헌병대의 관계무관이 고문 또는 參與로서 관여하여, 모두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의 간부가 되었다.063063 朝鮮總督府, 『朝鮮總督府施政年報』(1939) p.596.닫기
총동원 운동의 기구와 활동을 간단히 살펴보면, 중앙기구로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과 함께 각 지방에 ‘지방연맹’이 결성되었으며, 관공서나 학교, 은행, 회사, 기타단체 안에 ‘각종연맹’이 결성되었다. 거기에 말단조직으로서 대개 10호의 가구를 전후로 하여 ‘애국반’이 결성되었다. 주된 활동으로는, ‘애국일’을 제정하고 지킨다든지, 매일 아침 라디오에 맞추어 ‘宮城遙拜’를 한다든지, ‘勤勞報國’의 명목하에 근로봉사활동을 한다든지, 근검절약과 저축을 장려한다든지 하는 것이었다.064064 위의 책, pp.597~599.닫기
나아가서 미나미 총독은 그의 말대로 ‘司法상에 있어서의 내선일체의 구현’으로서, ‘창씨개명’과 ‘내선通婚’을 추진했다. 1937년 4월, 총독부 훈령 제24호로 ‘사법법규개정 조사위원회’를 설치하기고 하고, 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선민사령’의 개정을 심의하게 했다. 그 결과 1939년 11월 10일자로 制令 제19호 ‘조선민사령 중 개정의 건’과, 制令 제20호 ‘조선인 씨명 변경에 관한 건’을 공포했다. 制令 제19호의 11조 1항에 이른 바 ‘창씨개명’에 대해 규정하여, 1940년 2월부터 조선인의 성을 일제히 일본식 씨로 바꾸도록 했으며, 같은 조 2항에 他姓養子와 壻養子 제도를 신설하여 조선전통의 남계혈족관념을 분쇄하고 내선통혼을 제도화하려고 했다. 이것은 ‘내선일체의 완성’이라는 표면적인 이유와 함께, 이면적인 이유로서, 이미 실시되어 행하고 있는 특별지원병 제도로부터 언젠가는 징병제가 예상되는 가운데 군대내의 이질적 ‘민족’호칭을 없애고 원활히 군을 통솔하게 하기 위한 의도에서 도입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065065 창씨개명의 제도와 실시과정에 대한 괄목할 연구성과로, 宮田節子·金英達·梁泰昊, 『創氏改名』(明石書店, 1992)을 들 수 있다. 그 중에 창씨개명 도입의 목적에 관해서는, pp.34~40의 宮田의 글이 시사적이다. 또한 ‘창씨개명’의 의의와 수속에 대한 총독부 지도자료로, 朝鮮總督府法務局,「氏制度の解說:氏とは何か,氏は如何にして定めるか」(1940年 2月) 자료와, 綠旗日本文化硏究所編, 『氏創設の眞精神とその手續』(綠旗聯盟, 1940)의 교육책자가 상세하다.닫기
이러한 ‘내선일체’의 슬로건은, 전시체제의 통치이데올로기를 축약한 것으로서, 정치적 자유를 속박한 가운데 선전된 것이어서, 선전문구가 어떻든 간에 그것은 식민지 민중들에게 전쟁협력과 충성을 강요하는 것에 불과했다. 결국 최종목표가 일본인과의 무차별 대우라고까지 역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중국과의 전투가 장기화 되어감에 따라 피폐해진 조선을 지속적으로 병참기지로 하고, 언젠가 시행하게 될 징병제에 있어서 조선인 청년들의 자발성을 유도하기 위한 마지막 남은 감언이설이었다. 이윽고 이 감언이설은 적과의 전투에 임하는데에 있어서는 조선인이 일본인과의 차별이 있을 수 없고 결전태세야 말로 ‘내선일체’가 실현될 수 있는 길이라고 하는, 소위 인적·물적자원을 전시동원하기 위한 논리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註 050
: 「南總督東京に於ける聲明書」(1936年 8月 22日 ; 朝鮮總督府官房文書課編, 『諭告·訓示·演述總攬』, 朝鮮總督府, 1941) p.582.
註 051
: 宮田節子, 앞의 책, pp.150~151.
註 052
: 「道知事會議に於ける總督訓示」(1937年 4月 20日 ; 朝鮮總督府官房文書課編, 앞의 책) pp. 159~163.
註 053
: 「道知事會議に於ける總督訓示」(1938年 4月 19日 ; 朝鮮總督府官房文書課編, 앞의 책) pp. 172~175.
註 054
: 津田剛, 『內鮮一體論の基本理念』(今日の朝鮮問題講座1, 綠旗聯盟, 1939) pp.8~9.
註 055
: ‘녹기연맹’은, 천황주의 골수분자 津田榮 일가에 의해 주도된 단체로서, 1925년 2월에 ‘경성天業청년단’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1930년 5월에 ‘녹기동인회’으로 개편한 후, 1933년 2월에 ‘녹기연맹’으로 재출발한 것이다. “일본國體의 정신에 卽하여 건국 이상 실현에 공헌한다”는 것을 강령의 하나로 내건 이 단체는, 그 조직활동으로서 천황 귀일의 생활운동과 사상통일작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갔다. 임종국, 『일제하의 사상탄압』(평화출판사, 1985) pp.199~200; 高崎宗司, ‘綠旗聯盟と‘皇民化’運動’(『季刊三千里』 31號, 1982年 8月) pp.64~72.
註 056
: 津田剛, 앞의 책, pp.9~10.
註 057
: 「朝鮮總督府時局對策調査會諮問案參考書」(生活ノ刷新ニ關スル件, 1938年 9月) pp.4~20.
註 058
: 위의 자료, pp.21~22.
註 059
: Anzako 由香,「朝鮮における戰爭動員政策の展開: ‘國民運動’の組織化を中心に」(『國際關係學硏究』 21號, 津田塾大學, 1995年 3月) p.2.
註 060
: 위의 논문, p.2.
註 061
: 『朝鮮』 1939年 5月號, p.112.
註 062
: Anzako 由香, 앞의 논문, pp.4~5.
註 063
: 朝鮮總督府, 『朝鮮總督府施政年報』(1939) p.596.
註 064
: 위의 책, pp.597~599.
註 065
: 창씨개명의 제도와 실시과정에 대한 괄목할 연구성과로, 宮田節子·金英達·梁泰昊, 『創氏改名』(明石書店, 1992)을 들 수 있다. 그 중에 창씨개명 도입의 목적에 관해서는, pp.34~40의 宮田의 글이 시사적이다. 또한 ‘창씨개명’의 의의와 수속에 대한 총독부 지도자료로, 朝鮮總督府法務局,「氏制度の解說:氏とは何か,氏は如何にして定めるか」(1940年 2月) 자료와, 綠旗日本文化硏究所編, 『氏創設の眞精神とその手續』(綠旗聯盟, 1940)의 교육책자가 상세하다.


3. 식민지조선에 대한 통제경제정책

중일전쟁 후, 조선의 산업구성을 재편성하고 시국산업부문을 보호 육성하며 여기에 자금투여를 집중함으로써, 조선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구축해 갔으며, 이러한 목적 아래 노동자들을 양성배치하고 중소기업을 하청화하는데 주력했다. 이른바 전시체제에 상응할 경제구조의 재편을 시도한 것이다. 일본정부에서는 중일전쟁 발발 한해 전부터 ‘日滿재정경제연구회’를 중심으로 생산력확충계획과 항공기를 주로 하는 군수공업동원계획을 수립하게 했다. 이 연구회는 1936년 8월에 ‘1937년도 이후 5년간의 帝國세입 및 세출계획’ 속에서 ‘긴급실시 國策大綱’을 마련했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帝國군수공업 확충계획’을 마련하여, 참모본부와 육군성에 대해 그 실현을 개진했다. 육군성에서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이듬해 5월 ‘중요산업 5년계획요강’과 6월 ‘군수품제조공업 5년계획요강’을 마련했다. 이러한 계획들은 아직 세부적인 방안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1937년도부터 시작되는 육군의 ‘군비충실 6년계획’이나, 해군의 ‘제3차 보충계획’의 막대한 군사비 예산지출을 뒷받침하는 강령이 되었으며, 앞으로의 자원배분에 대한 정부의 고도의 개입을 필요로 하는 생산력 확충정책을 예고하는 것이었다.066066 原朗編, 『日本の戰時經濟:計劃と市場』(東京大學出版會, 1995) pp.45~46.닫기
중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정부의 기획원이 주무부서가 되어 물자동원계획을 입안해 갔다. 그 이듬해인 1938년 3월과 4월에 걸쳐서「日滿관계관의 교섭에 기초한 생산력 확충계획대강」(日滿關係官打合ニ基ク生産力擴充計劃大綱)이 작성되었다. 이것은 일본본토 만으로서는 개별적인 확충사업계획의 실현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만주국에 적극적인 동조를 기대하며 마련한 계획이었다. 대륙진출을 위하여 만주까지도 자원공급지로 할 계획이었던 것이다.067067 위의 책, pp.47~48.닫기
그와 함께 일본정부는 1938년 4월 1일부터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하므로써 자원 통제의 법적장치를 완전히 갖추었다. ‘국가총동원법’은 자본이나 물자 노동력 금융 등을 비롯한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전쟁수행을 위해 국가통제 아래 둘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법률을 근거로 식민지에서도 농촌의 노동력을 광공업 분야로 이전 동원하게 되었다. 이 법안은 본래 군부측에서 제안한 것이지만, 코노에 내각이 이에 동조함으로써 일본국민의 생활 전반에 걸쳐 군부의 정책개입을 허용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써 군부의 정치개입이 날로 심해져 갔으며, 일본의 사회전체가 전시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068068 이형철, 『일본군부의 정치지배』(법문사, 1991) pp.133~134.닫기 코노에 수상은 당초 ‘국가총동원법’을 중국과의 전투시에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일찍이 7월부터 이 법률을 발동시키기 시작했다. 노동자의 통제를 비롯하여 군수용 원자재 수입에 대한 특혜와 배당의 통제, 국내시장용 섬유제품의 제조판매 금지, 휘발유의 배당제 실시 등 모든 물자와 기금이 국가권력의 통제하에 들어갔다.069069 강동진, 앞의 책, pp.399~403.닫기
식민지 조선에서는 바로 5월 5일부터 칙령 제316호로 ‘국가총동원법’을 적용하게 되었다. 이 단계에서는 일본본토와 마찬가지로, 戰時授權法 또는 백지위임법과 같은 성격의 법령으로서 법조문 자체만으로 보면 아직 구체적인 통제내용과 방안이 마련된 것이 아니었으나, 이듬해부터 본격화된 각종 칙령과 각령·성령·고시 등을 통하여 점차 그 구체적인 내용을 드러내게 되었다.070070 정인섭,「전시동원체제하의 한인희생」(『1995년 해외희생자 유해현황조사사업 보고서』, 정신문화연구소, 1995) pp.49~50.닫기
이미 식민지 조선에서의 자원조달은 병합 이후 근대화라는 이름하에 아무런 꺼리낌 없이 실행되어 왔다. 1910년에서 1918년까지 토지조사라는 명목하에 광대한 토지를 국유지로 수용했으며, 그 밖에 철도부지용지 학교부지·도로용지·군사시설용지 등의 명목으로 토지를 수용했다. 그리고 1911년 6월에는 ‘삼림령’을 공포하여 임야 총면적 1,600만 정보 중에서 1,300만 정보를 국유림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1910년 12월에 ‘회사령’을 공포한 이후로 일본인 자본가의 경제활동을 보장하고 조선인 민족자본의 성장을 억제했다. 또한 조선의 대외무역도 완전히 독점통제해 왔으며 일본의 대재벌과 국가독점자본에 종속시켰다.071071 강동진, 앞의 책, pp.245~246.닫기
본래 적극적인 대륙진출 정책으로 식민지 조선을 포함한 일본과 만주 간의 국방적·경제적 유대를 강조해 온 미나미 총독은, 그의 지론으로서 특히 전략적인 측면에서 한반도를 종래의 식량공급기지로 해 온 것으로부터 제국에 대한 풍부한 광물자원·전력·원자재 값싼 노동력의 공급기지로 하고, 일본과 만주국 간의 교량역할로서의 산업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리고 백만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을 만주에 정착시키는 업무를 추진하여 한반도의 잉여인구를 만주에 배출시키고, 조선인을 앞세워 만주에 대한 경제적 진출을 시도하는 한편, 일본인의 잉여인구를 대거 한반도에 이주시키려고 했다. 이러한 그의 전략적 동아시아의 확대재편 추진은, 중국은 물론 미국·영국의 경계의 대상이 되어 갔던 것이다.072072 구대열, 『한국국제관계사연구1: 일제시기 한반도의 국제관계』(역사비평사, 1995) pp.370~373.닫기
중일전쟁 이후 조선에 군사공업화 정책이 구체적으로 도입되게 되는 것은, 1938년 9월에 개최된 ‘시국대책조사회’에서의 계획안부터라고 할 수 있다.073073 미나미 총독이 ‘대륙병참기지’론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1938년 9월의 제1회 各道산업부장회의에서 훈시했을 때이며, 이윽고 ‘시국대책조사회’에서 內鮮滿의 名士들에게 ‘대륙병참기지’라는 단어를 소개했다고 한다. 鈴木武雄, 『大陸兵站基地論解說』(今日の朝鮮問題講座2, 綠旗聯盟, 1939) pp.29~33.닫기 이 조사회에서, 시국의 진전에 따라 조선이 제국의 대륙정책에 있어서의 전진병참기지로서 더욱 그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에 비추어, 한층 조선의 각종 공업을 진흥시킴과 함께, 특히 군수산업을 비약적으로 신장시킬 것을 결정했다. 이 회의에서 결정한 구체적 방안으로서, 경금속, 석유, 인조석유, 유산암모니아, 폭약, 공업기계, 자동차, 철도차량, 선박, 항공기, 피혁 등의 군사공업부문의 확충을 당면한 정책목표로 삼았으며, 이 목적달성을 위하여 관계법규를 정비하고 기업부지를 알선하며 기술자 및 숙련공 양성기관을 확충하는 것 외에, ‘자금융통’ ‘보조금 교부’ ‘운수시설 정비’ ‘동력요금 및 운임의 경감’ ‘원재료 공급알선’ ‘하청공업 확충’ 등을 결정했다.074074 小林英夫, 앞의 책, pp.178~179.닫기
이 ‘시국대책조사회’에서 결정된 내용을 크게 두가지로 특징지울 수 있다. 첫째로는, 만주에서의 ‘산업개발 5개년계획’에서와 같은 특수회사 주도형태를 취하지 않고 기성재벌이 군수사업을 주도하도록 했다. 이미 1910년대와 20년대에 걸쳐 ‘회사령’에 의해 식민지 조선의 민족자본형성을 철저하게 차단해 온 결과, 30년대의 조선에서는 만주에서와 같이 특수회사로 재편할 만한 기업이 존재하고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본 내의 미쯔이(三井), 미쯔비시(三菱) 등과 같은 기성재벌을 군사공업구축의 주축으로 했던 까닭에, 이 시기에 설립되는 조선의 군수회사는 이러한 기성재벌의 보조역할 만을 담당하게 했던 것이다. 둘째로는, 이 조사회에서 시국산업부문의 확충이 강조됨과 아울러 노동력의 확보가 강조된 것은, 군수산업 및 관련산업부문에 노동력을 집중시켜 전쟁수행을 원활히 하려고 했다는 점이다.075075 위의 책, p.179.닫기
이 조사회 이후, 한반도에는 풍부하게 있으면서도 일본국내에는 적게 존재하는 부존자원을 적극 개발해 나갔으며, 1930년대 전반기부터 건설된 발전시설에 의거하여 풍부하고도 값싼 전력을 이용하여 철강·경금속·인조석유 부문의 개발에 박차를 가해 갔다. 특히 대량의 전력을 소비하는 제철사업은, 일본본토에서는 기업화하기에 어려운 조건을 갖고 있었는데, 이에 비해 전력이 풍부하고 철강자원이 풍부한 한반도는 이에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한반도에 있어서의 철강업은, 일본의 철강수요에 맞추어, 주로 은율·재령·대성·이원·화북 등지의 탄광과 결합하여, 겸이포 제철소를 중심으로 개발되었으며 이것만으로 수요를 채우지 못해 청진에 제철소 건설을 계획했다. 이 외에 중점적으로 육성강화된 부문은, 값싼 석탄과 전력 그리고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하여 일본독점자본이 그들의 산업을 재편성하여 초과이윤을 얻어낼 수 있는 부문들이었다. 즉 명반석 공업, 알루미늄 공업, 인조석유공업 등이었다. 그런데 조선에서의 군사공업의 확대재생산 확보의 면에서 필수하다고 여겨지는 기계류의 공업부문을 보면, 사실상 육성정책이 행하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기계류의 태반을 일본본토에서 유입해 써야했다. 따라서 각종 부문들은 상호간에 유기적으로 육성되지 못하고, 일본본토의 군수적 필요와 독점자본의 이윤에 맞게 파행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1937년 이후 일본본토의 산업이 전시체제화해 가면서 기계류의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조선에의 기계류 이입할당량이 감소하자, ‘시국대책조사회’는 조선에서의 ‘기계공업 자급자족화’를 결정했다. 그런데 사실상 조선에서는 ‘시국대책조사회’가 의도하는 바와 같은 종합정밀기계공업 분야의 자급화에는 도저히 미치지 않았고, 자동차·비행기 등은 제조되어지지 않고 단지 부품공장만이 있었을 뿐이며, 선박제조 역시 부산의 조선중공업회사 정도의 소규모 공장에서 행하여졌고 그것도 수리를 주로하는 것에 불과했다. 1940년도에 있어서 조선의 주요 기계류 자립률을 보면, 차량·선박·자동차의 부속품 29.5%, 제조가공용 기계 19.6%, 원동기 7.1%, 시계와 학술용품·전신기기 6.2%, 증기기관 및 부속품 3.7%, 공작기계 0%, 철도기관차 0% 등으로, 현저하게 저조했음을 알 수 있다.076076 小林英夫,「1930년대 조선 ‘공업화’정책의 전개과정」(『한국 근대 경제사 연구』, 사계절, 1983) pp.484~491.닫기 이것은 한반도의 산업이 당시에 일본본토 경제에 얼마나 종속되었는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한편, 식민지 조선은 일본본토에 대한 식량공급기지로 활용되었다. 이미 한반도의 병합 이후로 ‘토지조사사업’과 함께 제반 식민지농정의 기초를 마련해 왔으며, 일본본토의 안정적인 저임금의 미곡공급을 위해, 1920년부터 토지개량사업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에 제1기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했으며, 1926년에는 제2기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했었다.077077 河合和男,「산미증식계획과 식민지농업의 전개」(사계절편집부편, 위의 책) pp.377~382.닫기 ‘산미증식계획’은 1930년대 초에 공급과잉과 함께 중단되었는데, 1930년대말의 전시체제에 들어서 격심한 미곡공급부족으로 다시 식민지조선에 미곡증산정책이 실시되었다.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의 농림국이 작성한「朝鮮增米計劃要綱」에 의하면, “반도는 그 지리적 위치에 있어 內地와 대륙의 중간, 일본·만주·중국 경제블록의 중심에 위치하여, 현지 또는 內地에의 식량공급기지로서 절호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어, 耕種法 개선 등에 의한 適地適作의 견지에서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하여 조선을 식량공급기지화할 것을 천명했다. 그리고 증미계획과 목표로서, 1939년에 이어 1940년부터 6년간에 걸쳐 ‘耕種法 개선’사업과 ‘토지개량사업’을 실시하여, 계획완성연차인 1950년에 약 680만석을 증산하여 총 3,500만석을 생산하도록 한다는 것을 제시했다.078078 朝鮮總督府農林局,「朝鮮增米計劃要綱」(朝鮮總督府, 1939年 11月) p.1.닫기
이 계획의 실적을 보면, 1940년의 경우 2,152만여 석으로 대흉작이던 전해보다는 약 700만석 정도를 증산했지만, 이것은 종전의 연평균 수확량 2,300만석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고, 이어 1941년에 2,480만여 석을 달성하여 평년작을 유지하게 되었다. 특히 ‘耕種法 개선’의 중심이 화학비료의 增施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시체제하에서 화학비료가 점차 부족해져 갔을 뿐 아니라 자급비료 마저도 가축의 감소 등으로 공급이 악화되어 갔다. 이러한 식량증산실적의 부진에 따라 총독부는 농민들로부터의 강제공출을 실시했다. 1941년의 미곡추가공출에 대한 강요는, “죽창으로 가택을 수색하는” 사태에 이르렀으며, 이 때문에 조선농가에서는 농가 나름대로 갖은 수단을 사용하여 공출을 피하려고 했으며, 이러한 사태는 농민들의 인심을 극도로 동요하게 만들었던 것이다.079079 小林英夫, 앞의 책, pp.488~489.닫기

註 066
: 原朗編, 『日本の戰時經濟:計劃と市場』(東京大學出版會, 1995) pp.45~46.
註 067
: 위의 책, pp.47~48.
註 068
: 이형철, 『일본군부의 정치지배』(법문사, 1991) pp.133~134.
註 069
: 강동진, 앞의 책, pp.399~403.
註 070
: 정인섭,「전시동원체제하의 한인희생」(『1995년 해외희생자 유해현황조사사업 보고서』, 정신문화연구소, 1995) pp.49~50.
註 071
: 강동진, 앞의 책, pp.245~246.
註 072
: 구대열, 『한국국제관계사연구1: 일제시기 한반도의 국제관계』(역사비평사, 1995) pp.370~373.
註 073
: 미나미 총독이 ‘대륙병참기지’론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1938년 9월의 제1회 各道산업부장회의에서 훈시했을 때이며, 이윽고 ‘시국대책조사회’에서 內鮮滿의 名士들에게 ‘대륙병참기지’라는 단어를 소개했다고 한다. 鈴木武雄, 『大陸兵站基地論解說』(今日の朝鮮問題講座2, 綠旗聯盟, 1939) pp.29~33.
註 074
: 小林英夫, 앞의 책, pp.178~179.
註 075
: 위의 책, p.179.
註 076
: 小林英夫,「1930년대 조선 ‘공업화’정책의 전개과정」(『한국 근대 경제사 연구』, 사계절, 1983) pp.484~491.
註 077
: 河合和男,「산미증식계획과 식민지농업의 전개」(사계절편집부편, 위의 책) pp.377~382.
註 078
: 朝鮮總督府農林局,「朝鮮增米計劃要綱」(朝鮮總督府, 1939年 11月) p.1.
註 079
: 小林英夫, 앞의 책, pp.488~489.

4. 인력통제 및 동원정책

일본본토에서의 전시노동력 통제체제는, 1938년 8월 ‘국가총동원법’ 제6조에 기초한 ‘학교졸업자 사용제한령’을 필두로 하여 숙련공이나 하급기술자 획득에 나섰던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1939년 7월의 ‘국민징용령’을 공포시행하기까지 일본정부가 행한 노동력 통제정책만을 살펴 보면, 일본본토 전국의 직업소개소를 국영화하고 그 사무직원들을 대폭적으로 늘려 국책기관으로 삼았으며, ‘국민능력등록령’을 내려 기계공을 중심으로 500만명에 달하는 직업노동자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명단을 작성했다. 그리고 ‘직공양성령’을 통해 주로 중공업과 기계공업 공장에 자체적인 직공양성소 시설을 만들어 양성교육을 실시하도록 했으며, ‘신규학교졸업자 통제령’을 통해 모든 신규졸업자는 직업소개소를 통하지 않고서는 취직할 수 없도록 했다.080080 原朗, 앞의 책, pp.243~247.닫기
한반도에서도 중일전쟁 이전부터 광공업 부문에 노동력을 대거 투입시킬 목적으로 노동력의 통제가 행해졌다. 총독부는 1930년대 초부터 중국진출을 위한 한반도 북부지역의 공업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남부의 잉여인력을 북부지역으로 재배치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으며, 1934년 2월에 ‘南鮮노동자 단체이민案’을 작성하는 등, 사실상 한반도내에서 총독부의 관주도에 의한 노동력 통제를 하고 있었다.081081 정인섭, 앞의 논문, p.54.닫기 그것이 중일전쟁의 확대와 함께 더욱 활발해졌다. 공업 및 군수부문에의 노동력 동원과 조정을 위해, 총독부는 1938년 5월의 칙령 316호를 통해 ‘국가총동원법’을 적용하기 시작했으며, 일본본토의 법령시행에 맞추어 다음과 같은 일련의 노동력 통제 입법을 실시했다.082082 小林英夫, 앞의 책, pp.276~277.닫기

1938년 8월,「임금통제령」 시행
1938년 9월,「학교졸업자 사용제한령」 시행
1939년 5월,「국민직업능력 신고령」 시행
1939년 6월,「공장사업소 기능자양성령」 시행
1939년 8월,「종업원 고용제한령」 시행
1939년 8월,「공장취업시간 제한령」 시행
1939년 10월,「임금임시조치령」 시행
1939년 10월,「국민징용령」 시행
1940년 1월,「직업소개소령」 시행
1940년 9월,「청소년 고용제한령」 시행

이러한 일련의 입법과정을 보면, 일본본토에서 시작된 것이 곧 바로 조선에 적용되는, 이른바 ‘내지연장주의’적인 입법이 이뤄졌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법령의 실현면에 있어서는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것은 한반도내에는 일본본토와 달리 종래에 숙련공을 양성할 수 있는 설비가 거의 없었을 뿐더러, 조선인 노동력의 거의가 농촌출신의 미숙련 노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일본본토와는 달리 일련의 법령의 실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숙련공으로서는 일본인들이 거의 차지했다. 중공업을 주축으로 진출한 일본자본에 있어서,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중추부서는 일본에서 들여 온 숙련노동력에 의해 충당되었던 것이다.083083 위의 책, p.277.닫기
한편, 일본본토에서는 청년층이 대거 징병되어 가자 그에 따라 노동력부족이 야기되었다. 특히 열악한 작업조건을 가진 광업분야에서 일본인 근로자를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처음에는 종래 해 오던 대로 작업장이나 회사별로 조선인 노동력을 모집해 갔지만, 이러한 개별방식으로는 일본본토의 노동력부족을 도저히 메울 수 없었다. 이에 일본정부에게 조선인의 노동력유입정책을 실시하도록 하는 요구가 높아 갔다. 일본정부의 기획원에서는 1938년 9월 각료회의에서 결정한「1939년도 국가총동원 실시계획 설정에 관한 건」에 기초하여, 1939년 7월 3일에「1939년도 노무동원 실시계획강령에 관한 건」을 작성하여 내각에 제출했다. 그 강령의 제13항은 “조선인의 노동력 이입을 꾀하며 적절한 방책하에 특별히 그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사업에 종사시킬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로써 조선인 노동력 이입문제를 일본정부 차원에서 계획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그 해의 이입목표로 조선인 남성노동력 8만 5천명을 계획했던 것이다.084084 ‘昭和14年度勞務動員實施計劃綱領ニ關スル件’(企劃院上甲第60號, 1939年7月3日 ; 戰後補償問題硏究會編, 『戰後補償問題資料集 第一集』, 戰後補償問題硏究會, 1990) pp.11~26.닫기
같은 해 7월 29일 내무성과 후생성은, 각각 次官 명의로「조선인노동자 內地이주에 관한 건」을 통해 조선인 이입방침과 모집요강을 각 지방장관에게 통달했으며,7월 31일에는 후생성의 직업부장과 사회부장, 그리고 내무성의 警保국장 명의로 같은 제목의 추가적인 통달이 있었다. 이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은 9월 1일자로 같은 내용의 통달을 각 도지사에게 내리고, 조선인 노동자의 집단모집에 협조할 것을 당부함과 동시에「조선인 노동자 모집과 渡航 취급요령」을 시달했다.085085 정인섭, 앞의 논문, pp.54~55.닫기
전시체제의 조선인 인력동원 면에서 노동력의 동원과 함께 지원병제도를 통한 병력동원이 행해졌다. 1938년 2월 22일 칙령 제95호 ‘육군특별지원병령’의 공포로부터 시행된 지원병제도를 통해, 병력충원에서의 ‘내선일체’가 제도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미 만주사변 이듬해인 1932년부터 朝鮮軍을 중심으로 ‘조선인의 병역문제’를 고려해 왔는데,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본토의 병역법을 조선에 시행할 필요가 생겼다. 이에 조선인의 정치적 참여도나 보통교육의 정도에 비추어 아직 징병제를 도입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여겨, 지원병제도를 시험적으로 실시하게 된 것이다.086086 지원병제도의 성립과정에 대해서는, 宮田節子, 앞의 책, pp.50~56이 상세하다.닫기 만 17세 이상의 청년을 대상으로 한 지원병제도는, 1938년 4월 3일부터 실시되어, 1938년에 전기와 후기 도합하여 총 2,946명이 지원하여 각도지사와 조선군 사령관의 전형을 거쳐 그 중에 406명이 훈련소에 입소하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총 12,548명이 지원하여 그 중 613명이 입소하도록 결정되었다. 이들은 훈련과정을 거쳐 거의 대륙에 배치되었다. 이들 지원병들의 활약상이 조선에서 ‘내선일체’의 표본으로서 선전되었으며, 전사자들은 황국을 위한 ‘殉國奉公의 化身’으로서 칭송되었다.087087 海田要, 『志願兵制度の現狀と將來への展望』(今日の朝鮮問題講座3, 綠旗聯盟, 1939) pp.7~23.닫기

註 080
: 原朗, 앞의 책, pp.243~247.
註 081
: 정인섭, 앞의 논문, p.54.
註 082
: 小林英夫, 앞의 책, pp.276~277.
註 083
: 위의 책, p.277.
註 084
: ‘昭和14年度勞務動員實施計劃綱領ニ關スル件’(企劃院上甲第60號, 1939年7月3日 ; 戰後補償問題硏究會編, 『戰後補償問題資料集 第一集』, 戰後補償問題硏究會, 1990) pp.11~26.
註 085
: 정인섭, 앞의 논문, pp.54~55.
註 086
: 지원병제도의 성립과정에 대해서는, 宮田節子, 앞의 책, pp.50~56이 상세하다.
註 087
: 海田要, 『志願兵制度の現狀と將來への展望』(今日の朝鮮問題講座3, 綠旗聯盟, 1939) pp.7~23.


Ⅲ. 태평양전쟁과 ‘신민화’정책


1. 태평양전쟁 발발과 ‘대동아공영권’ 슬로건 제기

1939년에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만 해도,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에 여념이 없었으며 세계대전에 대해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1940년이 4월이 되어 독일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이어 6월에는 마지노선을 돌파하여 파리를 점령하는 대승리를 거두자, 일본은 베트남을 통하는 원장루트를 차단한다는 이유로, 8월 10일 독일에 항복한 프랑스의 비시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협정을 맺어 군대를 북부 베트남에 진주시켰다. 일본군의 ‘南進’을 적극 주장해 온 것는 주로 해군측의 급진분자들로서, 그들은 일본의 태평양에 있어서의 해군력 우위유지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석유자원의 확보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이윽고 일본제국은 독일과의 동맹체제를 구축하고 유럽에서의 제국전쟁을 이용하여, 베트남을 기지로 하여 말레이지아·싱가포르·인도네시아로 군대를 진출시켜 갔다.
그런데 일본의 예상과는 달리 미국이 일찍이 영국과 소련측을 지원할 태세를 보이고, 일본의 ‘南進’을 제지할 목적으로 미국내 일본자산의 동결과 일본에 대한 석유수출금지를 단행했다. 1941년 봄부터 계속하여 진행해 온 미일교섭이 결렬되고, 그해 10월에 토오죠오(東條英機)가 이끄는 내각이 성립되면서 급진파들에게 장악된 일본정계는 전쟁의 결의를 굳히고,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격을 개시로 연합국과의 전투에 들어 갔다. 이로써 전쟁수행을 위한 비상사태 속에 일본정계는 강압 속에 ‘단결’하게 되었다.088088 일본의 2차대전에의 몰입과정에 대한 설명으로, アメリカ合衆國戰略爆擊調査團(正木千冬 譯), 『日本戰爭經濟の崩壞』(日本評論社, 1950) pp.11~15을 참고했다.닫기
일찍이 코노에(近衛文麻呂)는 일본국내에서 군부의 독주를 견제할 만한 강력한 국민정치조직 결성을 목표로 하여, 1940년 6월 경부터 ‘신체제운동’을 전개했다. 곧 이어 7월에 제2차 코노에 내각이 들어서고 이 운동이 진전됨에 따라 政友會와 民政黨 등의 정당이 잇따라 해산되었으며, 10월에는 1國 1黨의 국민조직 ‘大政翼贊會’이 결성되었다. 코노에의 당초의도야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 ‘大政翼贊會’는 나치스식의 팟쇼조직이 되었던 것이다.089089 橋川文三,「일본정치사의 전개」(차기벽·박충석편, 『일본현대사의 구조』, 한길사, 1980) pp. 44~45.닫기 이윽고 다음 해에 정권이 토오죠오 내각으로 바뀌고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돌입함에 따라, ‘大政翼贊會’는 전쟁협찬을 선동하고 국가주의 사상의 국책화를 주도해 갔다. 익찬회의 총재는 수상이 맡았으며, 지부장은 각 지방의 지사들이 담당하는 행정조직의 보조기관이 되었다. 본부나 지부의 역원으로는 군인·관료 출신자와 각계 인사들이 참여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부서는 내무관료들이 차지하여, 실제로 내무성의 어용기관 구실을 했다. ‘大政翼贊會’ 아래 각종 단체들이 가입되어 전쟁협력에 강제동원되었다.090090 강동진, 앞의 책, pp.409~412.닫기 이와 함께 사상통제 및 신사참배의 강요, 치안유지법 강화, 교육통제, 노동운동탄압 등으로, 일본사회 전체가 전쟁광기에 사로잡혀 갔으며, 이러한 전시팟쇼체제는 ‘內地연장주의’을 일환으로 식민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한편, 일본제국내에서는 ‘南進’의 정당화를 위해 ‘대동아공영권’ 이념이 부상했다. ‘대동아공영권’의 공식적인 출발은 제2차 코노에 내각의 출범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내각은 유럽에서의 독일의 전격작전 성공과, 이에 따라 발생한 동남아시아에서의 프랑스·네덜란드 식민지지배의 공백을 배경으로 하여, 전쟁확대와 ‘南進’의 기운 가운데 출범한 것이다.091091 대동아공영권 구상을 서구열강에 대항하는 논리로서 皇道연방체제(동아연맹론)로 이론화한 자는 만주사변의 주동자 중에 하나인 이시하라(石原莞爾)이다. 닫기 코노에 내각은 성립 직후인 7월 26일,「기본국책요강」을 각의로 결정하고, 시국에 대한 국책의 근본방침으로서 ‘대동아 신질서 건설’ 구상을 내세웠다. 여기에서 “황국의 國是는 八紘을 一字로 하는 肇國의 大정신에 기초하여 세계평화확립을 초래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황국을 핵심으로 하여 日滿支의 강력한 결합을 근간으로 하는 대동아 신질서를 건설할 것”을 천명했다. 이어 7월 27일에는 정부 大本營 연락회의에서,「세계정세의 추이에 따른 시국처리요강」을 결정하고, “정세의 변화를 이용하여 好機를 포착하고 對南方 무력행사를 추진할” 방침을 육해군 쌍방의 양해사항으로 확인하고, ‘대동아공영권’의 범위가 日滿支의 ‘東亞’에 덧붙여서 ‘南方’을 포괄하는 지역임을 확인했다.092092 古屋哲夫編, 앞의 책, pp.550~551.닫기
태평양전쟁과 함께 동남아시아에 일본군이 진출하면서, 일본정부내에 ‘대동아공영권’의 현실적인 정책으로서 대동아정책이 대두했다. 1943년 4월에 외상에 취임한 시게미쯔(重光葵)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 이번 전쟁목적이, “東亞의 해방과 아시아의 부흥이며, 東亞민족들이 식민지적 지위를 탈피하고 각국 평등의 지위에 서는 것이 세계평화의 기초” 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전쟁협력을 구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093093 鹿島平和硏究所編, 『日本外交史24: 大東亞戰爭 戰時外交』(鹿島硏究所出版會) pp.460~461.닫기 이윽고 5월 31일 御前회의에서「대동아政略指導 大綱」을 결정하고, “帝國은 대동아전쟁 완수를 위해 帝國을 중핵으로 하는 대동아諸國과 諸민족 결집의 政略태세를 더욱 정비강화함으로써 전쟁지도의 주도성을 견지하고 세계정세변천에 대처한다. 政略태세의 정비강화는 늦어도 올해 11월 초까지 달성할 것을 목표로 한다. 滿·華·泰 외에 일본군 점령지에 있어서 대동아 신정책의 강력한 추진을 도모한다”고 했다. 즉, 중국과의 사이에서는 기본조약을 동맹조약으로 개정하고, 태국에 대해서는 말레이에 있어서의 失地회복을 승인하며, 버어마 및 필리핀에 대해서는 독립을 허용하고, 그리고 말레이, 스마트라, 자바, 보르네오, 셀레베스 등의 점령지에서는 당분간 軍政을 실시하지만 원주민의 民度에 맞추어 가급적 정치에 참여시킨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러한 정책의 구체화를 위해 필리핀이 독립한 후의 10월 하순에 각국의 지도자들을 토오쿄오에 초치하여 ‘대동아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094094 ‘대동아회의’는 11월 5일과 6일에 열렸으며, “각국이 상호 제휴하여 대동아전쟁을 완수하고 대동아를 미국·영국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켜 그 自存自衛를 완수한다”는 취지의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위의 책, pp.462~483.닫기
그런데 일본제국 자체가 억압적 총독통치의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동남아시아 국가 지도자들에게 ‘대동아공영권’이나 서구제국의 식민지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을 선전하는 것은, 소수 친일적 인사들의 형식적 의례적 모임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것으로, 일본군 점령지의 원주민으로 하여금 전쟁에 협력하도록 유도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설득력을 결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식민지인들을 일본본토의 정치권에 어떤 형태로라도 포섭해야하는 정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註 088
: 일본의 2차대전에의 몰입과정에 대한 설명으로, アメリカ合衆國戰略爆擊調査團(正木千冬 譯), 『日本戰爭經濟の崩壞』(日本評論社, 1950) pp.11~15을 참고했다.
註 089
: 橋川文三,「일본정치사의 전개」(차기벽·박충석편, 『일본현대사의 구조』, 한길사, 1980) pp. 44~45.
註 090
: 강동진, 앞의 책, pp.409~412.
註 091
: 대동아공영권 구상을 서구열강에 대항하는 논리로서 皇道연방체제(동아연맹론)로 이론화한 자는 만주사변의 주동자 중에 하나인 이시하라(石原莞爾)이다.
註 092
: 古屋哲夫編, 앞의 책, pp.550~551.
註 093
: 鹿島平和硏究所編, 『日本外交史24: 大東亞戰爭 戰時外交』(鹿島硏究所出版會) pp.460~461.
註 094
: ‘대동아회의’는 11월 5일과 6일에 열렸으며, “각국이 상호 제휴하여 대동아전쟁을 완수하고 대동아를 미국·영국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켜 그 自存自衛를 완수한다”는 취지의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위의 책, pp.462~483.

2. 총독부의 전쟁협찬정책

태평양전쟁에 돌입한 직후, 일본정부는 국민의 정치활동과 표현의 자유 등 일체의 정신적 자유를 전시체제하의 치안유지를 위해,「언론·출판·집회·결사 등 임시단속법」(법률 제97호)과,「언론·출판·집회·결사 등 임시단속법 시행규칙」(내무성령 제40호)을 제정했다. 이 법령을 식민지 조선에 적용한 것이「조선 임시 보안령」(制令 제34호)과,「조선 임시 보안령 시행규칙」(총독부령 제339호)이다. 일본제국에 있어서 종래 ‘병참기지’으로서 기능해 온 한반도가 태평양전쟁 개시와 함께 이제 인적·물적 자원의 공급기지로서 더욱 중요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전쟁수행에 방해가 되는 일체의 언론·출판·집회·결사를 단속할 수 있는 법령체제를 갖추게 된 것이다.095095 鈴木敬夫, 앞의 책, pp.204~205.닫기
총독부는 먼저 언론통제의 일환으로 1940년 8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시키고, 1941년 봄에는 제1차 잡지 통제를 실시하여 『문장』, 『사해공론』 등의 21종의 잡지를 폐간시켰다.096096 임종국, 앞의 책, p.306.닫기 신사참배의 강요를 통해 신앙의 자유를 박탈했을 뿐 아니라, 태평양전쟁 후에는 기독교 사제나 목사 등을 비롯한 종교계 지도자들과 조선에 와 있던 선교사들을 추방 혹은 투옥시키고, 일부교파를 폐지시켰다.097097 강위조,「일제하 한국 기독교의 존재양식과 그 발전」(차기벽편, 앞의 책, 1985) pp.450~452.닫기 그리고 일본역사를 주입하고 일본어 교육을 철저화 하고 ‘조선어’ 사용을 금지시켰다. 1937년부터 일본어 사용을 적극 권장해 온 총독부는, 1941년 ‘국민학교규정’(총독부령 제90호)을 공포하여 종래 隨意과목으로서 나마 존속해 오던 ‘조선어’ 교과를 폐지했으며, 1943년 3월에는 제4차 교육령 개정을 통해 중등학교와 사범학교에서도 ‘조선어’ 과목을 폐지조치했다.098098 정대철, 『일제의 對한국 식민지교육정책사』(일지사, 1985) pp.475~479.닫기
식민지 조선에서의 학교교육정책은 황민화교육을 매개로 하여 결전태세확립의 고취를 목적으로 하는 군사교육이 되어 갔다. 제4차 교육령 개정을 통해 각 학교령과 규정에 명기한 교육목표는, 소위 “皇國의 道에 기초한 국민의 鍊成”으로서, 학교교육을 군사교육화하고 황도정신을 기초로 한 전시동원의 장으로 하는 것이었다.099099 위의 책, p.468.닫기 그 한 예로서 1944년에 총독부 학무국장이 각 도지사와 사범학교장에게 내 보낸 통첩「국민학교 체련과 교수요령에 관한 건」을 보면, 교수방침으로서 “신체를 단련하고 정신을 연마하여 활달 강건하며 忍苦持久하는 심신을 육성하여 헌신봉공의 실천력을 배양함으로써 황국신민으로서 필요한 기초적 능력을 연마 육성하고 종합전력의 증강에 이바지할 것” 과, “강인한 체력과 왕성한 정신력은 국력발전의 근간이며 특히 국방에 필요한 것을 인식시켜 강건한 심신을 단련함으로써 盡忠報國의 신념을 배양시킬 것” 등을 강조하고 있다.100100 朝鮮總督府學務局編, 『國民學校體鍊科敎授要項竝實施細目』(朝鮮公民敎育會, 1944) pp.2~3.닫기
이 밖에 제4차 교육령개정 후에 군사교육화를 위해 세부내용을 규정한 것을 열거하면,「전시학도 체육훈련 실시요강」(1943년 4월 26일),「학도 전시동원체제 확립요강」(1943년 6월 25일),「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 방책」(1943년 10월 12일),「학병제 실시」(1943년 10월 20일),「학도군사교육요강 및 학도동원 비상조치요강」(1944년 3월 18일),「학도동원체제정비에 관한 훈령」(1944년 4월),「학도동원본부규정」(1944년 4월 28일),「학도근로령」(1944년 8월 23일),「학도근로령 시행규칙」(1944년 10월 30일),「긴급학도근로동원 방책요강」(1945년 1월 18일),「학도군사교육 강화요강」(1945년 2월 4일),「決戰 비상조치요강에 근거한 학도동원 실시요강」(1945년 3월 7일),「결전교육 조치요강」(1945년 3월 18일),「전시교육령」(1945년 5월 22일) 등이 있다.101101 정대철, 앞의 책, pp.463~464.닫기
그리고 총독부에서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확대하여 ‘국민총력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일본본토에서의 ‘大政翼贊會’에 의한 국민운동을 식민지조선에서 모방한 것이다. 1940년 10월 종래의 ‘국민정신총동원’조직과 ‘農山漁村振興運動’조직을 통합하여 ‘국민총력운동’이라고 이름붙였으며, 운동의 목표로서 첫번째로 “國體의 본의에 투철하여 특히 반도동포의 皇國臣民化에 중점을 둔다”고 했다.102102 朝鮮總督府, 『朝鮮ノ國民總力運動』(朝鮮總督府, 1943, pp.81~82; 國民總力朝鮮聯盟編, 『朝鮮國民總力運動史』, 朝鮮總督府, 1945) pp.1~6.닫기 지도기구로서는 처음에는 총독부의 관방정보과와 사정국 국민총력과가 담당해 왔으나, 1942년 11월부터는 신설된 총무국이 전담하게 되었다. 그 외에 총독부 내에 군관민 연락위원회로서 ‘국민총력운동 연락위원회’를 두었으며, 각 道에 ‘국민총력과’를 두었다. 실천기구로서는 중앙기구로 ‘국민총력운동 조선연맹’을 두고, 그 사무국 밑에 5개 부서를 두어 민간인들로 하여금 부장을 담당케 했다. 그리고 산하에 ‘지방연맹’과 ‘각종연맹’을 두었고 말단조직으로 ‘애국반’을 두었다. 총독부의 자료에 의하면 1942년 4월 현재 전국의 ‘애국반’수가 약 43만에 달했다고 한다.103103 위의 책, pp.83~87.닫기

註 095
: 鈴木敬夫, 앞의 책, pp.204~205.
註 096
: 임종국, 앞의 책, p.306.
註 097
: 강위조,「일제하 한국 기독교의 존재양식과 그 발전」(차기벽편, 앞의 책, 1985) pp.450~452.
註 098
: 정대철, 『일제의 對한국 식민지교육정책사』(일지사, 1985) pp.475~479.
註 099
: 위의 책, p.468.
註 100
: 朝鮮總督府學務局編, 『國民學校體鍊科敎授要項竝實施細目』(朝鮮公民敎育會, 1944) pp.2~3.
註 101
: 정대철, 앞의 책, pp.463~464.
註 102
: 朝鮮總督府, 『朝鮮ノ國民總力運動』(朝鮮總督府, 1943, pp.81~82; 國民總力朝鮮聯盟編, 『朝鮮國民總力運動史』, 朝鮮總督府, 1945) pp.1~6.
註 103
: 위의 책, pp.83~87.

3. 식민지조선에 대한 전시경제정책

이미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의 군수물자통제를 위해「朝鮮産金令」,「경금속 제조사업법」 등을 제정 실시해 왔다. 그런데 전쟁의 확대와 함께 생산증강, 중점적 물자배급의 확보, 소비의 억제, 국가에 의한 중요공업용 자재 및 생활필수품의 관리 등이 필요하게 되자, 이전보다 더욱 광범한 부문에서의 물자통제를 목적으로 하여, 1941년 4월에「생활필수물자 통제령」을,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물자통제령」을 제정시행하게 되었다.104104 小林英夫, 앞의 책, p.318.닫기 또한 총독부는 1941년 이후 5년간의 단기간으로 급속한 증산을 목표로 하는「식량田作物 증산계획」과, 1942년에 토지개량사업을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10개년 갱신계획」을 세웠다. 그 내용으로는 관개개선 및 개간 433,700 정보, 용배수개선 86,000 정보, 소규모사업 24,000 정보, 간척 32,000 정보로, 총 577,000 정보를 개량하는 것이었다.105105 近藤釗一編, 『太平洋戰下朝鮮4』(朝鮮近代史料朝鮮總督府關係重要文書選集7, 友邦協會, 1963) pp. 181~182.닫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량이 감소하자, 총독부에서는 1943년 10월에 서둘러서「제2차 식량증산대책」을 수립하여 1944년의 식량수확의 목표로 농업생산책임자제와 병행하여, 쌀 160만석 맥류 33만석 등의 획기적인 증산계획량을 책정하고, 이에 따른 10만정보에 달하는 농지축조계획을 비롯하여 토지개량사업의 조기실시, 밭의 개간과 경지보전사업, 황폐지복구사업을 계획했다. 그 밖에도 자급비료증산과 농업노동력 동원강화 등의 시책을 강구했다.106106 京城日報社, 『朝鮮年鑑』(1945年版) pp.105~106.닫기
그런데 이러한 계획과 대책들은 총독부의 展示행정에 의한 것으로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했으며, 계획은 존재하나 실행이 뒤따라 주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39년초부터 실시한 미곡증식계획은 전술한 바와 같이 저조하여, 1939년과 1942년을 제외하고는 평년작 2,300만 석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는 전시체제의 산업구조에 따른 것으로서, 예를 들면 군수공장 확충으로 인한 공업용지로 농지가 전용되거나, 노동력과 자재부족으로 경작을 포기하는 농지가 확대되어 경지면적이 감소해 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증산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자, 총독부에서는 식량에 대한 유통을 통제함으로써 절대량을 확보하려 했다. 여기에 미곡의 강제적인 공출을 무리하게 추진함으로써, 조선내의 미곡공급의 악화와 농민들의 경작의욕 저하, 그리고 농촌의 피폐를 가중시켰던 것이다. 총독부는 1940년 10월「昭和16年(1941년) 미곡년도 식량대책」을 발표하여, 미곡의 유통에 대한 국가관리를 본격화했다. ‘식량대책’의 목표로 내건 것은 국민식량의 수급조정, 국민생활의 안정, 軍需의 확보였으며, 관리내용으로서는 출하 및 集荷, 배급, 輸移出入, 道양곡배급조합의 강화, 감독 및 조성, 자금의 알선, 가격조작, 소비규정 등이었다. 이듬해 9월에도「1942년도 식량대책」를 발표하여 전년도의 관리제도를 보강강화하고 미곡 공출의 증대를 계획했다.107107 이송순,「일제말기 전시체제하 (1937~1945) 조선에서의 미곡공출과 농촌경제의 변화」(고려대학교 사학과 석사논문, 1992년 7월) pp.28~31.닫기 이윽고 1943년부터 처음으로「自家保有米제도」를 실시하기로 했다. 이 제도는 1942년도에 산출한 쌀의 集荷과정에서 자가 보유미를 제외한 모든 쌀을 매입하게 하고, 만약 그 후에 식량이 부족한 지역이 생기면 그때 가서 되사게 하는 제도로서, 미곡공출을 위한 전면적인 국가관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108108 위의 논문, pp.33~34.닫기 더욱이 총독부는 1943년 제82회 제국의회에서 통과되어 6월 21일 공포시행된「조선식량관리 특별회계법」(법률 제91호)에 근거하여, 바로 그해부터 미곡의 ‘공출事前할당제’를 실시했으며, 이듬해 4월에는 농업생산책임제를 실시했다. 이에 따라 각 부락 단위로 공출 책임량을 사전에 할당하여 강제적으로 수매하고, 그 대가로 보조금의 교부제도와 장려금 교부제도를 마련하는가 하면, 농가의 생활필수물자인 면포류, 작업화, 고무신, 비누, 마른 명태 등을 우선 배급하고, 酒類의 특별배급을 실시하는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식량확보에 열을 올렸다.109109 小林英夫, 앞의 책, pp.488~490.닫기
이와 함께 총독부에서는 농촌의 노동력 부족을 무리하게 해결하려고 했다. 1940년대에 들어서 일본으로의 노동자 유출정책과 한반도내의 노동력 배치정책의 결과, 농촌의 노동력이 점차 감소해 갔다. 이에 따라 총독부에서는 1944년 9월에「농업요원설치요강」을 발표하고, 한반도 전역의 165만명을 농업요원으로 지정했으며, 그 밖에 여성인력의 적극적 활용, 농번기에 있어서의 공동작업의 촉진, 각종단체로부터의 차출 등으로 노동력 확보에 주력했다.110110 위의 책, p.490.닫기

註 104
: 小林英夫, 앞의 책, p.318.
註 105
: 近藤釗一編, 『太平洋戰下朝鮮4』(朝鮮近代史料朝鮮總督府關係重要文書選集7, 友邦協會, 1963) pp. 181~182.
註 106
: 京城日報社, 『朝鮮年鑑』(1945年版) pp.105~106.
註 107
: 이송순,「일제말기 전시체제하 (1937~1945) 조선에서의 미곡공출과 농촌경제의 변화」(고려대학교 사학과 석사논문, 1992년 7월) pp.28~31.
註 108
: 위의 논문, pp.33~34.
註 109
: 小林英夫, 앞의 책, pp.488~490.



4. 국민총동원 정책

1940년대에 들어 일제는 ‘총동원체제’ 하에 조선인들을 대거 ‘징용’ ‘징병’의 형태로 강제징집해 갔다. 이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정책실행과정이나 실행내용은 언급하지 않고, 정책의 형성과정으로서 주로 입법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시기별로 정리하기로 한다.
1939년부터 ‘모집’방법에 의하여 조선인으로 하여금 일본내의 노동력 부족을 충당해 왔는데, 이것으로서는 충당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통상 2년의 계약기간을 설정하여 ‘모집’동원을 실시했는데, 실제로 계약기간이 되어서도 회유와 강제를 통해 재계약 및 계약연장을 통해 귀환을 희망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그대로 사용하는 작업장이 많아졌다. 보다 많은 인력동원을 위해 총독부에서는 종래의「직업소개소令」에 의한 ‘모집’식 노무동원으로부터, 1942년 2월부터 ‘조선노무협회’으로 주무부서를 일원화하여 ‘관알선’에 의한 강제적인 노무동원책을 강구했다. 이는 일본본토에서 1941년 12월부터 시행된 ‘국민근로보국협력令’을 조선에 적용한 것으로서, 총독부가 일본 후생성으로부터 필요한 노동력을 요청받으면, 각 도와 면사무소에 인력공출을 지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111111 김민영, 『일제의 조선인 노동력수탈 연구』(한울아카데미, 1995) pp.80~96.닫기 이를 보장하기 위해 일본의 각료회의는 1942년 2월 3일 ‘조선인노동자 활용에 관한 방책’에서, “조선인노무자의 송출은 조선총독부의 강력한 지도에 의해 이를 행하고 수요에 응하여 국민징용령을 발동하여 요원을 확보할 것”을 결정했다.112112 위의 책, p.267.닫기 이윽고 1944년 9월부터는「국민징용령」을 조선에 발동하여 공식적으로 노무동원을 위한 강제연행을 실시했다.
또한 태평양전쟁 초기의 예상 외의 ‘성과’와 전선확대라고 하는 새로운 사태를 맞아, 장기전에 대비한 군사력보충을 위해, 일본정부의 각료회의는 1942년 5월 8일 1944년부터 조선인을 징집할 것을 결정했다. 이 각료회의 결정은 ‘병역법 중 개정법률안’으로서 1943년 2월에 제국의회의 귀족원과 중의원에 상정되어 가결되었으며, 그 해 3월 1일 법률 제4호로 공포되고, 8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 갔다.113113 宮田節子, 앞의 책, pp.96~97.닫기 조선총독부에서는 1942년 5월 11일, 훈령 제24호「징병제 시행준비위원회 규정」를 8개조에 걸쳐 마련하고 그 위원장으로 경무국장 미하시(三橋孝一郞)를 앉혔으며,「국민총력연맹」 조직을 이용하여 징병제에 대한 홍보활동을 실시하게 했다.114114 朝鮮總督府, ‘朝鮮同胞ニ對スル徵兵制實施準備決定ニ伴フ措置狀況竝其ノ反響’(1942年 5月).닫기 그리고 1943년 10월 1일부로「조선청년특별練成令」(制令 제33호)를 제정 공포하여, 17세 이상 21세 미만의 조선인 남성으로서 선발된 자에게 원칙적으로 1년간 청년특별연성소(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도록 의무화했다.115115 공포 당일에 코이소 총독은 담화를 발표하여 ‘練成令’의 취지와 내용을 설명했다. 高宮太平(編集兼發行), 『小磯統理の展望』, pp.192~196.닫기 이렇게 하여 조선에서의 첫번째 징병검사가 1944년 4월 1일부터 8월말까지 5개월에 걸쳐서 실시되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총동원법’체제에 따라, 총독부에서는「보국정신대」의 조직(1943년 1월 17일),「해군특별지원병제」의 공포(1943년 5월 12일),「임시특별지원병 채용규칙(학병제)」의 공포(1943년 10월 20일),「조선 여자청년양성소 규정」의 공포(1944년 2월 10일),「여자정신대 근무령」의 공포(1944년 2월 8일),「국민근로동원령」의 공포(1945년 3월 6일) 등으로, 남녀 불문하고 조선인에 대한 전시동원을 강화해 갔다.116116 정대철, 앞의 책, p.464.닫기

註 111
: 김민영, 『일제의 조선인 노동력수탈 연구』(한울아카데미, 1995) pp.80~96.
註 112
: 위의 책, p.267.
註 113
: 宮田節子, 앞의 책, pp.96~97.
註 114
: 朝鮮總督府, ‘朝鮮同胞ニ對スル徵兵制實施準備決定ニ伴フ措置狀況竝其ノ反響’(1942年 5月).
註 115
: 공포 당일에 코이소 총독은 담화를 발표하여 ‘練成令’의 취지와 내용을 설명했다. 高宮太平(編集兼發行), 『小磯統理の展望』, pp.192~196.
註 116
: 정대철, 앞의 책, p.464.

5. 終戰대책과 식민지에 대한 국민적 권리부여 검토

태평양전쟁 이후 연합국 간에 전후처리를 위한 교섭과정에서 주로 미국과 중국간에 동아시아 문제를 다루어 왔는데, 그 중에 미약하게 나마 한반도의 독립문제가 논의되었으며, 1943년 12월 1일 카이로 선언을 통해 전후에 한반도를 적절한 과정을 거쳐 독립시키기로 공식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1945년 2월의 얄타회담과 7월의 포츠담회담 속에서 전후 한반도의 신탁통치문제가 약간 논의되었는데,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7월 26일의 포츠담선언에서 “일본의 주권이 本州 北海道 九州 四國과 연합국이 정하는 섬들”이라고 함으로써, 전후처리의 불투명함을 유지한 채이긴 하지만 한반도의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분명히 했다.117117 구대열, 『한국국제관계사연구』 2 (역사비평사, 1995) pp.52~67.닫기 1944년 10월에 미군이 오끼나와(沖繩)에 공격을 개시했으며, 11월말부터 토오쿄오를 공습하기 시작했다. 1945년 4월 1일에 미군이 오끼나와에 상륙했고 5일에는 소련이 일본과의 중립조약 기한에 대해 불연장할 것을 통고해 옴으로써 일본은 사면초가의 상태에서 고군분투하는 사태에 빠지게 되었다.
한편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본정부는 1944년 7월에 코이소(小磯國昭)에 의한 내각출범과 함께 終戰대책을 심의해 왔으며, 공식적 혹은 비공식적 외교루트를 통해, 소련에 대한 독일과의 화해공작이나, 스웨덴 정부를 통한 비공식적인 미국·영국에 대한 화해타진, 그리고 나아가서는 장개석 정부와의 화해공작에 나섰다.118118 鹿島平和硏究所編, 『日本外交史25: 大東亞戰爭 終戰外交』(鹿島平和硏究所, 1972) pp.51~92; 豊田穰, 『孤高の外相 重光葵』(講談社, 1990) pp.280~294.닫기 그러나 이러한 정부내의 終戰대책이나 대외적인 평화교섭에 있어서 조차도, 식민지 독립문제는 고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식민지의 유지방안을 모색해 갔던 것이다. 코이소에 이어 1945년 4월에 출범한 스즈키(鈴木貫太郞)의 새 내각에서도 여전히 식민지 독립문제는 고려하지 않았다.
조선총독에서 내각수반이 된 코이소는, 9월 7일의 제85 제국의회(임시의회)에서 시정연설을 하는 중에, 당면한 戰局에 응하기 위한 시책의 일환으로, “조선 및 대만인의 처우개선문제에 대해서 정부가 구체적인 정책을 세우겠다”고 말함으로써, 식민지인들의 정치적 권리관계에서의 국민적 대우문제를 정책화해 갈 것을 비쳤다.119119 內閣制度百年史編纂委員會編, 『內閣總理大臣演說集』(大藏省印刷局, 1985) p.376.닫기 코이소는 12월 22일의 각료회의에서 결정된「조선 및 대만동포에 대한 처우개선에 관한 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주로 식민지 거주의 조선인과 대만인에 대한 ‘정치상 처우개선’과, 주로 일본본토 거주의 조선인과 대만인에 대한 ‘일반적 처우개선’을 따로 따로 처리해 갈 것을 암시했다.

一億一心의 열매를 올려 대동아건설의 聖業완수에 매진할 것이 긴요한 점에 비추어, 조선 및 대만동포에 대한 정치상의 처우에 대해 특별히 검토함과 함께, 내지에 거주하는 조선 및 대만인의 일반적 처우개선에 관한 방책을 실시하기로 한다.120120 內閣制度百年史編纂委員會編, 『內閣制度百年史』下(大藏省印刷局, 1985) pp.262~263.닫기

이날 각료회의에서 ‘일반적 처우개선’ 방책으로, 재일조선인과 재일대만인의 內地渡航 제한제도의 폐지, 경찰상의 처우개선, 근로관리의 개선, 후생사업의 적용, 진학지도, 취직알선, 호적이적 용이화, 등이 결정되었다.121121 위의 책, p.263.닫기 재일조선인에 국한하여 그들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일별해 보면, 전시체제하에 있어서 경찰조직과 상하관계를 맺고 있던 ‘협화회’를 통해 사상을 통제받고 있었으며, 전쟁에의 협력을 강요당하고 있었다.122122 Higuchi 雄一, 『協和會:戰時下朝鮮人統制組織の硏究』(社會評論社, 1986) pp.99~102.닫기
1944년에 들어서는 종래의 ‘협화회’를 ‘흥생회’으로 개칭하고 조선인들을 대거 지도원으로 등용하여 전쟁협찬을 유도했는데, 그들 중에는 ‘지하공장건설一心會’ 같은 적극적인 전쟁협찬조직을 결성한 자들도 있었다. 당시 이들에게는 참정권의 측면에서는 일본인과 큰 차이가 없었으며, 다만 사회적인 차별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전쟁협찬의 대가로 요구해 온 바, 內地渡航제한제도의 폐지 등의 요구에 대해 일본정부로서 무언가 호응의 제스처를 보여야 했던 것이다.123123 최영호, 앞의 책, pp.55~56; pp.70~75. 닫기
식민지에 대한 ‘정치상 처우개선’ 문제로 등장하는 것이 이른바 참정권부여 정책이다. 앞의 ‘조선 및 대만동포에 대한 처우개선에 관한 건’과 함께, ‘정치상 처우개선’을 위해 ‘조선 및 대만 在住民 정치처우 조사회官制’가 각료회의에서 결정되어 칙령 제671호로 발표되었다. ‘조사회관제’으로서는 회장(수상) 1명과 부회장 2명, 위원 30명 이내로 구성되었는데, ‘정치상 처우개선’를 받는 당사자인 조선인 (또는 대만인)은 한명도 끼지 않았다. 조사회는 12월 29일 첫모임(총회)을 가진 후에 이듬해 3월까지 4차에 걸친 비공개의 총회를 통해 ‘중의원의원 선거법 중 개정’안을 마련하여, 그것을 3월의 제86 제국의회에 회부함으로써 전원일치의 가결을 얻었다. 개정안의 골자는 “조선 및 대만에 있어서 제국신민으로 25세 이상의 남자로 선거인 명부조정 기일까지 계속 1년 이상 직접國稅 15엔 이상을 납부한 자는 선거권을 갖는다”는 것이었으며, 의원수로 조선에 23명, 대만에 5명을 배당하는 것이었다.124124 淺野豊美,「最初にして最後の日本帝國再編:大東亞新政策と朝鮮台灣民族問題」(東京大學博士編入論文, 1992) pp.93~108, p.127, p.137.닫기
일본내각이 ‘內地연장주의’의 정치적 구현으로서 ‘정치상 처우개선’을 추진하게 된 목적은 크게 세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군부측 특히 육군측의 의도로서, 일본본토결전을 대비하는 상황에서 한반도에도 결전의 태세를 갖추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조사회의 마지막 총회에서 시바야마(柴山兼四郞) 육군차관이 “조선인을 日滿支를 중심으로 하는 ‘本土決戰체제’에 편입시킬 것”을 목표로, 보다 많은 수의 의원선출을 제안했던 것으로부터 잘 알 수 있다.125125 위의 논문, p.99.닫기 둘째는, 전황이 불리해짐에 따라 조선에서 발생할지 모를 폭동에 대한 불안을 감소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코이소가 총독재직시에도 느껴왔던 불안으로, 특히 사이판이 함락된 1944년 6월부터 조선에서 일본어 학습성적이 떨어지고 의도적으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자가 늘어났던 것에서 위기의식을 느꼈는데, ‘정치상 처우개선’과 같은 방법으로 이러한 움직임을 억제하려고 했던 것이다.126126 위의 논문, pp.52~55.닫기 셋째는, 조선인 지도급 인사들의 계속적인 참정권요구에 대한 호응의 모양새를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조사회의 회원 거의가 조선에서 생활을 했거나 조선인 지도급 인사들과 깊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조선인들의 전쟁협력의 대가로 그들에게 무언가 정치적 보상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127127 幼方直吉, 앞의 논문, pp.6~8.닫기
‘정치상 처우개선’의 법률안이 제국의회에서 심의되던 3월, 미군의 B29기가 토오쿄오와 오오사까 등의 도시들을 수시로 강타하고 있었고, 이 법률안이 가결되어 천황의 詔書로 공포된 4월 1일, 바로 그날 미군이 오끼나와 본섬에 상륙을 개시했으며, 일본의 阿波丸 病院선박이 미군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어 2천 여 명이 사망했다. 그 나흘후에 코이소 내각이 육군측을 통제하지 못하는 역부족을 느끼고 총사퇴했는데, 바로 그날 소련이 일본과의 중립조약 不延長을 통보해 왔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달도 채 안되는 4월 25일, 미국의 새 대통령 트루먼이 “4개월 이내에 원자폭탄이 완성될 것이다”는 보고를 받게 된다.128128 外務省編, 『日本選擇第二次世界大戰終戰史錄』 下(山手書房新社, 1990) pp.169~171.닫기

註 117
: 구대열, 『한국국제관계사연구』 2 (역사비평사, 1995) pp.52~67.
註 118
: 鹿島平和硏究所編, 『日本外交史25: 大東亞戰爭 終戰外交』(鹿島平和硏究所, 1972) pp.51~92; 豊田穰, 『孤高の外相 重光葵』(講談社, 1990) pp.280~294.
註 119
: 內閣制度百年史編纂委員會編, 『內閣總理大臣演說集』(大藏省印刷局, 1985) p.376.
註 120
: 內閣制度百年史編纂委員會編, 『內閣制度百年史』下(大藏省印刷局, 1985) pp.262~263.
註 121
: 위의 책, p.263.
註 122
: Higuchi 雄一, 『協和會:戰時下朝鮮人統制組織の硏究』(社會評論社, 1986) pp.99~102.
註 123
: 최영호, 앞의 책, pp.55~56; pp.70~75.
註 124
: 淺野豊美,「最初にして最後の日本帝國再編:大東亞新政策と朝鮮台灣民族問題」(東京大學博士編入論文, 1992) pp.93~108, p.127, p.137.
註 125
: 위의 논문, p.99.
註 126
: 위의 논문, pp.52~55.
註 127
: 幼方直吉, 앞의 논문, pp.6~8.
註 128
: 外務省編, 『日本選擇第二次世界大戰終戰史錄』 下(山手書房新社, 1990) pp.169~171.

맺는말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패전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치의 이념으로서 ‘내선일체’ 즉 ‘신민화’를 강조해 온 것은, 조선인들에 의한 국가의 독립이나 자치허용의 요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나아가서 인적·물적 자원을 일본본토의 수요에 맞추어 동원하기 위한 제국주의적 책략이었다. 국가독립과 자치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에 대한 병합의 논리가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이며, 다만 식민통치가 장기화하고 조선인에게 일본본토로부터의 국가적 의무를 부과할 필요가 생기면서 정치적 슬로건이 ‘내선융화’으로부터 ‘내선일체’으로 바뀌어 간 것이다. 이러한 ‘신민화’의 이념은 전쟁의 계속적인 수행을 필요로 하는 일본의 지도자와 일부 조선인 지도층 인사들의 ‘차별로부터의 탈피’를 목적으로 한 호응으로, 전쟁의 확대와 함께 계속 증폭되어 갔다.
이처럼 일본정부는 이념적으로 혹은 정치적 슬로건으로서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총독에 대해 전횡적인 통치권을 위임함으로써, 식민지에서 일본본토에서와 전혀 다른 억압적 통치가 자행되게 해 왔다. 즉 스스로 내세운 ‘신민화’ 이념에 배치되는 차별적 식민통치로 일관해 온 것이며, 애당초 일제 통치자들이나 어떠한 정치세력도 조선인의 ‘신민화’에 대해 신뢰하고 있지 않았던 까닭에, 식민지인의 국민화 정책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이다.129129 宮田節子, 앞의 책, pp.165~172.닫기
동화적 이념과 차별적 현실이라는 모순된 식민통치를 온존시키는 방편으로,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어용학자들을 동원하여 ‘타율성론’, ‘정체성론’, ‘반도성격론’, ‘파당성론’, ‘민족성론’, ‘사대주의론’ 등의 식민사관을 창출해 냈으며,130130 정대철, 앞의 책, p.509.닫기 조선인들의 자발적인 일본에의 진출억제를 위해 엄격한 ‘內地도항단속’을 실시해 왔다.131131 일제는 한국병합과 함께 총독부로 하여금 일본으로의 진출을 단속하게 했으며, 일본본토에서도 내무성으로 하여금 단속하게 했다. 1938년이 되어 일본본토에서의 단속은 완화되었지만, 총독부가 그해 12월 ‘조선인 內地도항단속에 관한 통첩’을 발함으로써 더욱 단속을 강화했다. 水野直樹, ‘朝鮮總督府の‘內地’渡航管理政策’(『在日朝鮮人史硏究』 22號, 1992年 9月) pp.25~27; 朴慶植, 『在日朝鮮人運動史』(1979) pp.208~209. 닫기 따라서 이러한 허구적인 ‘신민화’ 이념은, 조선인들에게는 공허한 슬로건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을 뿐 아니라, 소수 일본인들도 이에 대한 회의를 품고 있었다. 일찍이 야나이하라 등의 ‘자치권부여’ 제기 등에서부터 비판받아 온 것을 비롯하여, 전시동원체제 하에서도 공식적으로는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으나, 간접적으로 ‘신민화’이념에 대한 반대견해를 나타냈던 것이다.132132 ‘內鮮일체’론에 대해 일본인에 의해 제기된 반대견해 중에서, 총독부가 파악했던 것으로, ‘시행면에 있어서의 착오가능성’, ‘조선민족문화 멸망론’, ‘피의 순결오염론’, ‘시기상조론’, ‘형식적 內地化론’ ‘同化 불가능론’, ‘공리적 편승적 찬동론’, ‘小乘的 일체론’ 등이 있었다. 國民總力朝鮮聯盟防衛指導部, 『內鮮一體の具現』(1941)을 참고할 것.닫기
그런데 일본정부는 포츠담선언을 수락할 때에도, 그리고 나아가서는 연합국에 의해 식민지가 해방이 되고 나서도, 이러한 ‘신민화’이념을 포기하지 않았던 점에 유의해야 한다. 두차례에 걸친 원폭투하와 소련참전 후에야, 일본정부는 비로소 8월 10일의 御前회의를 통해 ‘국체유지’를 마지막 조건으로 하여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 이윽고 14일의 御前회의에서 무조건 수락을 결정했다. 이 사이 12일 오후에는 천황의 소집으로 황궁에서 황족회의가 열려 포츠담선언을 수락할 것을 알리고, 황족들에게 國體수호를 위해 차후의 협력을 요청했다. 이 모임에는 조선인으로서 李垠과 李鍵 두사람이 참가하고 있었는데, 천황으로부터 이들에 대해 조선의 장래에 관한 하등의 발언도 없었다.133133 外務省編, 앞의 책, pp.891~896; 최영호, 앞의 책, pp.68~69.닫기
패전후 새로 내각을 결성한 히가시쿠니(東久邇宮稔彦) 수상은, 8월 28일의 첫 기자회견을 행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천황의 ‘聖斷’에 의해 항복에 이르렀으며 ‘聖斷’을 國體의 고마움이라고 강조하고, “국민전체가 철저히 반성하고 참회할 것”을 호소하여, 이른바 ‘國體護持’와 ‘一億總懺悔’으로 패전정국을 이끌어 갈 것을 나타냈다.134134 歷史學硏究會編, 『日本同時代史1: 敗戰と占領』(靑木書店, 1990) pp.78~79.닫기 이것은 이제까지의 전쟁에 대한 책임의 소재를 애매하게 하는 발언이었을 뿐 아니라, 일본인들 뿐 아니라 지난 식민지인들까지도 포함시킨 일억명의 ‘신민’들이 전쟁을 참회하자고 함으로써, 이른바 전쟁참회의 ‘내지연장주의’를 표명한 것이었다.
그리고 전후의 점령기에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한국인과 대만인에 대해서, 식량사정악화를 완화하고 치안유지를 확보하기 위해 갖은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이들을 귀국시키려고 하는 한편, 일본에 ‘잔류’하는 자에 대해서는 교묘한 권리제한방식을 취하여, 법형식면에서는 이들을 패전국 일본의 국민으로 취급하면서 개별적으로 외국인으로 취급했다.135135 大沼保昭, 『單一民族社會の神話を超えて:在日韓國朝鮮人と出入國管理體制』(東信堂, 1986) pp.36~37.닫기 이는 통치대상으로 하면서도 국민적인 권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방침으로, 전후 일본의 재일외국인에 대한 ‘출입국관리체제’의 기본방침이 되었다. ‘內地연장주의’라는 미명 아래 식민지 우민화정책의 근간이 되었던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일본인 민족우월주의가, 식민지를 교두보로 한 제국주의적 대륙진출이 패전과 함께 끝나자, 이제는 일본사회에서 일본인 단일민족사회의 신화에 기초한 국민의식으로서 재생산되어 타민족에 대한 정치적 차별을 정책화해 가는 이념적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부기: 본 논문에서는 식민시기에 있어서의 한국인을 역사성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당시 통용되던 조선인으로 표기했다. 또한 일본의 인명과 지명을 한국어로 표기함에 있어서 나름대로 통일성을 견지하려 했음을 일러둔다. 기본적으로는 김용옥 저서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통나무출판사, 1986년)가 권말에서 제시하고 있는 일본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했으며, 다만 か(ka)行의 か,き,く,け,こ, 그리고 た(ta)행의 た,て,と의 경우에, 이 자음들이 각 단어의 첫째음절이 아닐 때와, 첫째음절로서 촉음으로 끝나는 단어와 복합될 때에 한하여, 한국어의 경음으로 즉 까, 끼, 꾸, 께, 꼬, 그리고 따, 떼, 또로 각각 표기했다. 따라서 예를 들면 東京(Tokyo)는 ‘토오쿄오’으로, 北海道(Hokkaido)는 ‘홋까이도오’으로 각각 표기했다. 그리고 본문에 거론된 일본인의 성명에서 한국어로는 이름을 생략하고 성씨만을 표기했다].


註 129
: 宮田節子, 앞의 책, pp.165~172.
註 130
: 정대철, 앞의 책, p.509.
註 131
: 일제는 한국병합과 함께 총독부로 하여금 일본으로의 진출을 단속하게 했으며, 일본본토에서도 내무성으로 하여금 단속하게 했다. 1938년이 되어 일본본토에서의 단속은 완화되었지만, 총독부가 그해 12월 ‘조선인 內地도항단속에 관한 통첩’을 발함으로써 더욱 단속을 강화했다. 水野直樹, ‘朝鮮總督府の‘內地’渡航管理政策’(『在日朝鮮人史硏究』 22號, 1992年 9月) pp.25~27; 朴慶植, 『在日朝鮮人運動史』(1979) pp.208~209.
註 132
: ‘內鮮일체’론에 대해 일본인에 의해 제기된 반대견해 중에서, 총독부가 파악했던 것으로, ‘시행면에 있어서의 착오가능성’, ‘조선민족문화 멸망론’, ‘피의 순결오염론’, ‘시기상조론’, ‘형식적 內地化론’ ‘同化 불가능론’, ‘공리적 편승적 찬동론’, ‘小乘的 일체론’ 등이 있었다. 國民總力朝鮮聯盟防衛指導部, 『內鮮一體の具現』(1941)을 참고할 것.
註 133
: 外務省編, 앞의 책, pp.891~896; 최영호, 앞의 책, pp.68~69.
註 134
: 歷史學硏究會編, 『日本同時代史1: 敗戰と占領』(靑木書店, 1990) pp.78~79.
註 135
: 大沼保昭, 『單一民族社會の神話を超えて:在日韓國朝鮮人と出入國管理體制』(東信堂, 1986) pp.3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