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序言
- 註 001
- 武人執政과 國王에 대한 최초의 견해는 다음이 참고된다.
李基白, 《韓國史新論》(개정판) p.172.
金塘澤, 〈高麗崔氏武人政權과 國王〉(《韓國學報》 42).
- 註 002
- 武人執權期 文班을 중심으로 고찰한 論文 및 著述로는 다음의 것을 참조할 수 있다.
閔丙河, 〈高麗武臣執政時代에 관한 一考〉(《史學硏究》 6, 1959).
邊太變, 〈高麗朝외 文班과 武班〉(《史學硏究》 11, 1961).
朴菖熙, 〈武臣執權期의 文人〉(《韓國史》 7, 고려무신정권과 대몽항쟁, 1973).
金毅圭, 〈高麗武臣執權期 文臣의 政治的 動向〉(《史學論志》 3, 1975).
______,, 〈高麗武人執權期 文士의 政治的 活動〉(《韓㳓劤 紀念論叢》, 1981).
張淑卿, 〈高麗武人政權下 文士의 動態와 性格〉(《韓國史硏究》 34, 1981).
趙仁成, 〈崔氏政權下의 文翰官—‘能文’·‘能吏’의 人事基準을 중심으로—〉(《東亞硏究》 6, 1985).
金塘澤, 《高麗武人政權硏究》(1987).
南仁國, 〈崔氏政權下 文臣地位의 變化〉(《大丘史學》 22, 1983).
Ⅱ. 重房政治와 國王
○ 毅宗·明宗시대 이래로 武官이 用事하여 重房의 권한이 더욱 重하게 되었다(《高麗史》 권77, 百官志 2 西班序).
○ 軍國의 權柄이 重房에 속하게 된 것은 실로 李義方의 힘이다(《高麗史》 권128, 李義方傳).
① ‘庚寅의 亂’에 重房에서 巡檢軍 20명으로 하여금 그의(徐恭) 집을 수위케 하여 禍를 당하지 아니하였다(《高麗史節要》 권12, 明宗 元年 7月).
② 西京留守 兵部尙書 趙位寵이 군사를 일으켜 鄭仲夫·李義方 등을 토벌하기를 꾀하고 동북 兩界의 여러 城에 격문을 보내어 불러 말하기를 “소문을 들으니 서울서는 重房에서 결의하기를 北界에 가까운 여러 城에는 대체로 거세고 나쁜 사람들이 많으니 당연히 가서 토벌해야 한다”고 군사를 이미 크게 동원하였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 있다가 스스로 주륙을 당하겠는가……”(위의 책, 明宗 4年 9月).
③ 가을 7월 밤에 壽昌宮 북쪽 담에서 돌을 던져 왕의 침실 북쪽 창에 닿은 일이 3, 4차례나 되었다. 숙위하던 군졸들이 모두 놀라 순찰·수색하였으나 끝내 잡지 못하였다. 重房에서 奏請하기를 “밤마다 한 사람의 將軍을 시켜, 수하의 軍校를 거느리고 궁문밖과 여러 요해처에 복병하고 급변에 대비하게 하소서”하니 이를 좇았다(위의 책, 明宗 11年 7月).
① 將軍 李永齡, 別將 高得時, 隊正 敦長 등이 李義方을 위하여 鄭仲夫에게 원수 갚기를 꾀하다가 일이 누설되니, 重房에서 체포하여 먼 섬에 귀양보냈다(《高麗史節要》 권12, 明宗 6年 9月).
② 興王寺의 중이 重房에 와서 고하기를 “절의 중이 德水縣 사람과 함께 반란을 일으킬 음모를 하는 자가 있는데 散員 高子章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하니 重房에서 중과 (高)子章을 체포하여 먼 섬에 귀양보내고 비밀리 사람을 보내어 강물에 던져 버렸다(위의 책, 明宗 8年 1月).
③ 어떤 사람이 重房에 무고하기를 “文臣들이 南賊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몰래 모의하고 있습니다” 하니 이 날에 都校丞 金允升 등 7명을 섬에 귀양보내고 兵部尙書 李允修는 벼슬을 낮추어 巨濟縣令으로 삼았다(위의 책, 明宗 5年 11月).
④ 겨울 10月에 참소한 사람 朴敦夫를 먼 곳의 섬으로 귀양보냈다. 이때 匿名書가 매우 많아서 남에게 죄과를 무함하므로 죄를 둘러쓴 자가 이유를 알지 못하여 사람마다 두려워하므로 重房에서 비밀리 禁軍을 시켜 이를 정탐하게 했더니 敦夫가 글을 가지고 門에 붙이려 하므로 잡아서 이를 귀양보냈더니 길에서 죽었다(위의 책, 明宗 16年 10月).
① 重房에서 東北 兩界의 州·鎭의 判官은 武官으로 임명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기를 奏請하니 이를 聽從하였다. 이 논의를 주장한 자는 將軍 洪仲方이였는데,……(《高麗史節要》 권 12, 明宗 7 年 4月).
② 將軍 車若松 등 43명을 內侍院과 茶房에 兼屬하게 하였으니 이보다 앞서 重房에서 아뢰기를 ‘庚寅年 이후로 武官이 모두 文官을 겸했는 데도 內侍院과 茶房만은 홀로 겸하지 못하였으니 겸속시키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므로 이 命이 있었다(위의 책, 明宗 16年 10月).
③ 어느 사람이 重房에 호소하기를 ‘修國史 文克謙이 毅宗이 弑害당한 사실을 그대로 바로 썼는데 主上을 弑害한 것은 천하의 大惡입니다. 마땅히 武官으로 하여금 修國史를 겸임시켜 사실을 바르게 쓰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文)克謙이 史堂에서 武官인 崔世輔와 농담하며 말하기를 ‘儒官으로 上將軍이 된 것은 나로부터이고 武官으로 同 修國史가 된 것은 역시 公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면서 서로 한바탕 웃었다(위의 책, 明宗 16年 12月).
宰樞·重房·臺諫이 奉恩寺에서 회합하고 시장의 물가를 정하여 말과 斛의 용량을 고르게 하고 위반하는 자는 섬에 귀양보내기로 하였다(《高麗史節要》 권12, 明宗 11年 7月).
① 여러 武臣이 重房에 모여 文官으로 남아 있는 자를 모두 불렀는데 李高가 모두 죽이려고 하니(鄭)仲夫가 말렸다(《高麗史節要》 권11, 毅宗 24年 9月).
② 重房에서 東北 兩界의 州·鎭 判官은 武官으로 임명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기를 奏請하니 이를 聽從하였다. 이 논의를 주장한 자는 將軍 洪仲方이었는데, 武官 金敦義 등 6명이 (洪)仲方이 나오기를 기다려 길을 막고(그 잘못을) 호소하니 重房에서 체포하여 목형하고 성에 귀양보내었다(위의 책, 明宗 7年 4月).
○ 봄 正月 庚午 朔에 景靈殿에 알현하였다(《高麗史》 권19, 明宗世家 2年).
○ 봄 正月 乙丑 朔에 景靈殿에 알현하였다.
○ 여름 4月 乙丑에 친히 大廟에 禘祭하고 宣旨를 내려 ‘……赦令을 내리고 무릇 禘禮에 참여하고 三陵에 배알한 자에게도 또한 物을 賜하라’고 하였다.
○ 5月 丙申에 단오로 景靈殿에 알현하였다(위의 책, 明宗世家 3年).
○ 겨울 10月 乙酉에 王이 親히 大廟에 祫祭를 지내고 죄수를 赦하였다(위의 책, 明宗世家 16年).
○ 9月 庚申에 重陽임으로 景靈殿에 祭享하였다(위의 책, 明宗世家 20年).
○ 6月 戊午에 王이 菩薩戒를 大觀殿에서 받았다.
○ 겨울 10月 宣慶殿에 百高座를 설치하고 仁王經을 읽었다. 乙巳에 중 3만명을 공양하였다(《高麗史》 권19, 明宗世家 元年).
○ 2月 癸丑에 燃燈으로 王이 奉恩寺에 행차하였다. 有司가 太祖의 舊制에 의하여 2月 望月로 연등할 것을 請하니 王이 그 請을 어기기 어려워 이것을 聽從하였으나 明年에 다시 上元으로 行하게 되었다.
○ 3月 己巳 朔에 王이 靈通寺에 행차하여 世祖, 太祖, 仁宗의 眞影을 배알하였다(위의 책, 明宗世家 2年).
○ 11月 癸卯에 八關會를 設하고 法王寺에 행차하였다(위의 책, 明宗世家 3年).
○ 10月 丙辰에 百座道場을 대관전에 베풀고 中外로 하여금 중 3만을 공양하게 하였다(위의 책, 明宗世家 8年).
○ 겨울 10月 壬戌에 仁王道場을 대관전에 베풀고 중 3만을 구장에서 공양하였다(위의 책, 明宗世家 11年).
○ 여름 4月 壬寅에 華嚴法會를 洪圓寺에 성대히 베풀고 庚·癸 이래의 사망자를 천제하였다(위의 책, 明宗世家 13年).
○ 겨울 10月 庚戌에 大赦하고……(《高麗史》 明宗世家 即位年).
○ 가을 7月 辛已에 消災道場을 大觀殿에서 3일간 設하였다(위의 책, 明宗世家 元年).
○ 가을 7月 乙亥에 王이 궁궐에 불이 나고 벌레가 솔잎을 먹고 天文이 자주 변하므로 詔書를 내려 스스로를 責하고 內外의 斬·絞 이하를 赦하였다(위의 책, 明宗世家 2年).
○ 여름 4月 壬申에 太一(星)을 內殿에서 醮祭하였다.
○ 여름 4月 丙子에 무당을 모아 비를 빌고 近臣을 나누어 보내어 여러 山川에 빌었다.
○ 가을 7月 辛亥에 本命(星)을 明仁殿에서 醮祭하였다.
○ 겨울 11月 己亥에 太子를 册封하므로써 赦하였다(위의 책, 明宗世家 3年).
○ 여름 4月 辛酉에 비를 종묘·능침산악 및 諸神祠에 빌었다(위의 책, 明宗世家 11年).
○ 여름 5月 丙寅에 오랜 가뭄 때문에 각 지방 山川에 비오기를 빌게 하고 원통한 죄수를 사면하였다(위의 책, 明宗世家 19年).
○ 여름 4月에 詔書를 내리기를, ‘近來 刑獄을 말은 官員이 능히 직책을 다하지 못하여 죄가 없는 백성으로 하여금 오랜동안 獄에 있게 하고, 원통하고 억울함을 펴지 못하게 하여 天文의 位次를 잃게 되고 節氣가 고르지 못하게 되었으니 뒷날에 장차 무슨 변고가 있을지 알 수 없다. 憲臺에게 命하여 원통한 獄事를 살펴 다스려 이를 모두 용서하라’ 하였다(《高麗史節要》 권13, 明宗 23年).
- 註 003
- 贵族政治期 顯宗代 이후 北方民族과의 전쟁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武臣의 지위를 향상시켜 갔으며 文宗 30年 更定 田柴科에서 武班의 대우가 좋아진 것이나 睿宗 4年에 武學齋가 설치된 것은 이러한 추세의 반영이다.
- 註 004
- 《高麗史》 권77, 百官志 2 西班序, “穆宗五年 備置六衛職員 後置鷹揚龍虎 二軍 在六衛之上 後又 設重房 使二軍六衛上大將軍皆會焉”.
- 註 005
- 《高麗史》 권77, 百官志 2 西班 應揚軍, “又鷹揚軍上將軍 兼軍簿典(尙?)書者 稱班主”.
- 註 006
- 李基白, 〈高麗京軍考〉(《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p.72.
- 註 007
- 《高麗史》 권101, 宋詝傳, “今重房制事 將軍房沮之 將軍出議 郞將房沮之 互相矛盾”.
- 註 008
- 《高麗史節要》 毅宗 24年 9月, “諸武臣 會重房 悉召文臣之遺者 李高 欲盡殺之 仲夫止之”.
- 註 009
- 《高麗史》 권101, 閔令謨傳, “明宗在潛邸 夢一宰相出自廣化門 騶從甚盛 有人曰 此公之宰相也 及卽位 令謨以刑部侍郞 掌南省試 至放榜 王見之 與所夢者肖 始有大用之志 不次遷擢……”.
- 註 010
- 《高麗史》 권101, 崔汝諧傳, “初明宗爲翼陽公 汝諧爲其府典籤 一日夢 太祖授笏於明宗 明宗授之 坐御床 汝諧與百僚賀覺而奇之 以吿明宗曰 愼勿復言 此大事也 使上聞之 必害我 汝諧遂歸心焉 後倅羅州求名果海脯 厚餽於府 明宗深感之 及卽位 汝諧賷表至京 隨例赴朝 王不之知也 陛辭日 獨詣禁門因宦官以奏 王始警曰 崔典籤來矣 朕不省也 引見 甚慰籍之 令留待命 乃拜左正言知制誥不數年 歷侍御史寶文閣待制…….”
- 註 011
- 위의 책 권99, 李純佑傳, “兼直翰林院 時王太后 患乳瘡 王命純佑作祈禱文 有瘡生母乳 痛在朕 心之句 王覽而嘆曰 先得朕心矣 由是特加寵眷 擢除右正言知制誥 累遷國子祭酒諫議大夫翰林學士…….”
- 註 012
- 《高麗史節要》 권13, 明宗 15年 3月조.
- 註 013
- 辛虎雄, 〈高麗以前의 赦免制度〉(《高麗刑法史硏究》 pp.232∼235.
- 註 014
- 李熙德, 〈高麗時代의 天文觀과 儒敎主義 政治理念〉(《韓國史硏究》 17, 1977).
- 註 015
- 《高麗史》 권16, 仁宗世家 9年 9月, “東京持禮使書狀官崔逢深 本武舉人 書狀非其任 又嘗大言 國家與我將士千人 則可入金國虜其主來獻 其狂妄如此 竊恐生事 不宜遺之 狀閤固爭三日 不允”.
- 註 016
- 《高麗史》 권100, 李英搢傳.
- 註 017
- 《高麗史》 권20, 明宗 12年 6月 甲子制, “凡入金書狀 令國學館 翰儒官有才名者 遺之”.
Ⅲ. 武人執政과 國王 및 文班
武人執權期 執權武人들의 專橫으로 王權이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도 王氏의 高麗王朝가 붕괴되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이었나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대한 해답은 먼저 出身家門이 미천한 執權武人들이 전통적 신분사회에 대한 잠재의식을 拂拭할 수 없었고 高麗王朝를 상징하는 國王의 권위를 무시할 수 없었던 데서 찾게 된다. 明宗代에 일어난 武人政權에 대한 叛亂이나 執權武人들의 정권투쟁은 國王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전개되었다.國王의 살해가 叛亂이나 정권투쟁의 명분으로 이용되었음은 다음 史料를 통하여 알 수 있다.① 李俊儀가 (동생) 義方을 꾸짖어 말하기를, ‘네게 세가지 큰 죄악이 있다. 임금을 弑害하고 그 第宅과 姬妾을 탈취하였으니 〈죄악〉의 하나이요,……(李)義方은 大怒하여 칼을 빼어서 죽이려 하였다(《高麗史節要》 권12, 明宗 4年 正月).
② (趙)位寵이 군사를 일으켜 (李)義方이 임금을 弑害하고 장사하지 아니한 罪를 聲言하였으므로 先王을 禧陵에 받들어 장사하고 그의 화상을 海安寺에 봉안하였다(위의 책, 明宗 5年 5月).
③ 將軍 慶大升이 鄭仲夫와 그의 사위 宋有仁을 베어 죽였다. 朝廷의 벼슬아치들이 궁궐에 나아가 축하하자 大升이 말하기를, ‘王을 弑害한 자가 아직 있는데 어찌 축하할 수 있는가’ 하니 李義旼이 듣고 크게 두려워하였다(위의 책, 明宗 9年 9月).위의 史料 ①은 武人執政인 李義方 형제의 불화가 빚은 사건이지만 兄 李俊儀가 동생 李義方을 꾸짖어 임금을 축출하고 弑害한 罪를 성토하자 義方은 격분하여 兄을 죽이려 하였다는 내용이다. 史料 ②는 趙位寵이 鄭仲夫·李義方을 타도하기 위한 구실로서 (李)義方이 임금을 弑害하고 장사하지 않은 罪를 성토하므로 毅宗의 화상을 海安寺에 봉안했다는 기록이다. 史料 ③은 將軍 慶大升이 鄭仲夫를 타도한 후 朝廷의 벼슬아치들이 축하하자 그는 왕을 弑害한 李義旼이 있음을 상기시킴으로써 國王의 弑害가 정권투쟁에 이용되고 자기의 執權을 정당화시키는 내용이다.다음으로 重房政治의 취약성에서 高麗王朝의 계속성을 찾을 수 있다. 明宗代에는 아직 武人政權이 안정되지 못하여 武人執政의 지위가 확고하지 못하였고 政治도 重房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정치상황이 한편으로는 미약하나마 王權을 유지시켜 주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武人執政들이 王氏의 高麗王朝를 감히 넘보려 하는 의도조차 갖지 못하는 要因으로 작용하였다.明宗代에 國王의 권위가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高麗王室과 깊은 연관을 갖는 文臣세력의 꾸준한 진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毅宗代보다 數的인 감소는 있었지만 武臣亂 이후에도 많은 文臣들이 國政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對外的으로 事大外交를 통한 金나라 朝廷의 後見的 측면도 明宗代 國王의 권위를 뒷받침해 준 또 하나의 要因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明宗이 즉위하자 金나라에 吿奏使로 파견된 庾應圭는 金帝로부터 禪位에 대한 의심과 詰難을 단식투쟁으로 극복하면서 回詔를 받아오는데 功을 세운 인물이다.註 018金甫當의 亂에 ‘文臣之長’으로 지목된 宰相 尹鱗瞻이 묶임을 당하고 이어 庾應圭를 핍박하려 함에 應圭가 이를 詰難하면서 의연하게 대처하자 諸將이 말하기를 “庚寅의 일은 金帝에 대한 公의 吿奏가 아니었더라면 우리 무리는 죽어 젓담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謝罪하였는데,註 019 이같은 당시의 상황인식을 다만 의례적·관념적 측면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崔忠獻은 執權後 國王의 廢立을 마음대로 하고 독자적인 執政府라 할 수 있는 敎定都監을 설치하여 國政을 천단하면서도 스스로 王이 되지는 못하였다. 武人세력의 대두로 身分制의 붕괴, 貴族制의 해체를 야기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儒敎的 전통이 강한 高麗王朝에 있어서 전통적 身分觀念을 떨쳐 버릴 수 없는 당시의 社會的 여건이나, 北方民族과 연관을 갖는 대외정세의 推移를 崔氏執政이라 하여 결코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崔氏執政者들은 國王이 되려는 모험을 시도하여 政權의 몰락을 초래하기 보다는 國王의 권위를 이용하여 그의 政權을 공고히 하려 하였다.註 020 崔忠獻 兄弟가 政敵 李義旼을 제거할 때도 “그가 일찍이 弑逆의 罪를 犯하고 백성을 포학하게 침해하여 王位를 엿보고 있었다”註 021 는 것으로 그 이유를 들고 있다. 崔忠獻은 執權한 직후 王에게「封事 10條」를 올려 舊政을 개혁하고 新政을 도모하여 太祖의 正法을 한결같이 준행할 것을 건의하고 있는데, 이는 王氏의 高麗王朝에 대한 권위를 否定하지 않겠다는 그의 의도를 엿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崔忠獻 집권 후 동생 崔忠粹는 그의 딸을 太子妃로 들이어 政治的 劣勢를 만회하려 하였으나 崔忠獻의 반대에 부딪치고 결국 권력투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살해되었다. 비록 崔忠献 형제의 권력투쟁에서 야기된 문제이기는 하지만 崔忠粹는 그의 딸을 太子妃로 들이려 하는 것을 崔忠獻이 반대하여 설득하는 다음의 史料에서 우리는 示唆받는 바가 많다.(崔)忠獻이 타이르기를, ‘지금 우리 형제의 세력이 비록 한나라를 기울이고 있으나 家系가 본래 미천하니 만약 딸을 東宮에 시집보낸다면 비난이 없겠는가’……옛 사람이 말하기를, 앞수레가 넘어지면 뒷수레가 경계한다’ 하였는데 전번에 李義方이 딸을 시집보냈다가 마침내 남의 손에 죽었으니 지금 그대가 앞사람의 실패한 자취를 따라 하는 일이 可하겠는가(《高麗史節要》 권13, 明宗 27年 10月 ).
武人執政이 아직도 전통적 신분사회에 대한 잠재의식을 떨쳐 버릴 수 없었으며 王室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권력투쟁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기록인 것이다.李義旼 일당을 타도한 崔忠獻은 그의 政權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舊세력의 상징인 明宗을 廢位하지 않을 수 없었다. 明宗의 후계자 선정문제는 崔忠獻 집권 후 그의 형제간에 최초의 정치적 대립의 양상을 띤 사건으로서 이 문제는 崔忠獻이 지지한 平凉公 旼(神宗)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일단락되었는데, 이때 崔忠獻의 의견에 同調하였던 조카 朴晋材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金나라와의 外交關係에 있어 주목을 끌게 하는 것이다.(朴)晋材가 말하기를, ‘縝과 旼이 모두 王이 될만하나 金나라에서 縝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니 만일 縝을 王으로 세운다면 저들이 王位를 찬탈하였다고 할 것이니 旼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毅宗의 옛일처럼 하여 아우에게 王位를 전했다는 것으로서 金나라에 알린다면 後患이 없을 것입니다’는 것으로 그 이유를 들고 있다(《高麗史節要》 권13, 明宗 27年 9月 庚申).
崔氏執權期 崔氏執政 조차도 北方 金나라 朝廷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려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확인시켜 주는 하나의 實例이다.神宗 元年 金나라에서 는 宣問使 孫俁를 보내어 前王이 王位를 사양한 일을 詰問하고 ‘詔勅이 있는데 반드시 前王을 보고야 親히 주겠다’하므로 朝廷이 이를 어렵게 여겼는데, 門下侍郞 趙永仁의 임기응변으로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外國語에 능통했던 金鳳毛의 출세도 金나라 사신의 접대에서 비롯되었으며 그의 자손들이 崔氏執政과 연결되어 크게 번성하면서 金鳳毛系의 慶州金氏는 뒤에 忠宣王의 ‘宰相之宗’에 오르는 貴族家門이 되었다.註 022崔忠獻의 執權期인 13세기 초엽 東아시아의 정세는 蒙古族의 興起로 一大 변동을 겪고 있었으며 滿洲에서 金나라의 쇠퇴와 함께 對外的으로 시련기를 맞게 된다. 金나라가 쇠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독립하게 된 契丹族이 蒙古軍에 쫓겨 高麗의 領內로 침입해 들어왔던 것이다.崔忠獻 死後 그의 아들 崔瑀(怡)에게 政權이 承繼되자 政治的 수완이 컸던 그는 父가 구축해 놓은 권력적 기반 위에 王室의 권위를 배경으로 그의 政權을 더욱 공고히 하려 하였다.崔瑀가 執權할 무렵 東아시아의 정세는 蒙古族의 강성으로 한층 긴박감이 감돌았고 滿洲대륙에서 金의 쇠망과 함께 결국 對蒙抗爭의 시련기로 접어들게 된다. 특히 蒙古침략에 접한 崔瑀政權은 단호한 항전의 결의로 高宗 19년(1232)에 江華遷都를 단행하여 대처 하였으며 國王을 앞세워 對蒙교섭에 임하였고 國內의 講和輿論을 무마시켜 나갔다.崔氏政權이 존립하기 위하여는 對蒙抗爭의 수행은 불가피한 것으로서 蒙古와의 講和는 崔氏執政의 지위를 무력하게 만들어 결국 崔氏政權의 몰락을 가져오게 되리라는 것을 崔瑀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崔瑀가 조직한 三別抄는 都房과 더불어 崔氏政權의 군사적 支柱로서 대외적인 시련기를 맞이하여 對蒙抗爭의 중심부대로서 괄목할만한 활약을 하였다. 이와 같은 對蒙抗爭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崔氏政權期 國王의 권위는 그 命脈을 유지할 수 있었다.明宗은 毅宗의 同母弟로 庚寅亂 직후 鄭仲夫, 李義方 등 政變의 주동인물에 의하여 옹립되었다.庚寅亂의 성공으로 많은 文臣들이 살해되었지만 이런 혼란의 渦中에서도 모든 文臣이 학살된 것은 아니고 적지 않이 免禍救命되었던 것이다. 武臣亂에 가담한 武人들 중에서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취했던 그룹註 023은 武臣亂의 확대를 원치 않고 있었다. 또한 政務面에서 미숙한 執權武人들은 정책수립 및 행정실무를 담당할 文臣들을 필요로 하였고, 민심을 수습 안정시키기 위하여도 덕망있는 舊文臣의 등용은 효과적인 것이었다.武人政權 成立後 새롭게 등용되는 文臣層은 王의 측근에서 신임을 받고 武人政權에 협조할 수 있는 舊文臣과 科擧시험에 합격하여 진출하는 新進文臣이 主流를 이루었다.○ 任克忠:中書侍郞平章事(鄭仲夫:參知政事)
○ 韓 就:樞密院使
○ 尹鱗瞻:知樞密院事
○ 文克謙:右承宣 御史中丞
○ 庾應圭:工部郞中武人들이 執權한 격변기임에도 불구하고 宰·樞 兩府로부터 六部 臺省職 등 要職에 免禍文臣들이 임명되고 있다. 文臣官僚들이 國政에 꾸준히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武人政權 成立後에도 國王의 銓注權行事에 있어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음은 이미 앞 절에서 언급하였다.武人執權期의 사회적 혼란속에서도 文臣養成을 위한 儒學敎育은 행하여졌고 비록 儒風이 부진한 가운데도 科擧는 중단되지 않고 設行되었다.註 025 특히 유학과 문필의 재능이 요구되는 文翰職은 반드시 학식이 있는 科擧 급제자를 필요로 하였다. 明宗은 그의 측근의 학식이 뛰어난 文臣官僚와 더불어 武人세력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科擧制를 운용하여 급제자를 배출하였다.執權武人들은 國王과 文臣들이 밀착되는 것을 항상 견제·탄압하였고 武人들의 不法과 부당한 人事에 대한 臺諫의 논란은 그들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응징하려 하였으며 가능한 한 많은 東班官職을 차지하여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려 하였다.鄭仲夫一派의 文臣에 대한 견제와 탄압이 심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註 026○ 明宗 8年 7月 太學博士 盧寶與를 地方官인 蔚州防禦副使로 임명하게 되자 參知政事 宋有仁은 「文武交差之法」을 이유로 하여 吿身에 署名하지 않고 끝내 重房까지 동원하여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고 있으며, 11月에는 文官인 閔令謨가 먼저 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던 바 王은 宋有仁을 閔令謨 보다 윗자리에 班列시키려 하였다. 그 배경에는 宋有仁이 鄭仲夫의 사위인데다 武人으로서 기세를 부림으로 王이 취한 배려였고 이는 有仁이 굳이 사양하므로 원만히 해결될 수 있었다.
○ 鄭仲夫의 家奴가 禁令을 범했으므로 臺官인 中丞 宋詝와 御史 晋光仁이 잡아 심문하니 이에 仲夫가 노하여 宋詝 등을 죽이려 하였는데 그의 아들 筠이 諫하여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王은 鄭仲夫가 분한 마음을 풀지 못할까 염려하여 明宗 8年 7月 宋詝의 관직을 파면시키고 晋光仁을 工部員外郞으로 좌천시키고 있다.
○ 文克謙과 韓文俊이 王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는데, 明宗 9年 7月에는 그 때문에 宋有仁의 미움을 받아 좌천되고 있다. 이 경우에도 文克謙이 患難의 예방을 목적으로 密奏를 올려 행하여졌으며 樞密院使 文克謙은 尙書左僕射로 樞密院副使 韓文俊은 判司宰事로 좌천되었다.이와 같은 일련의 事例를 통하여 볼 때 國王은 정치의 중심부에서 文臣과 武臣의 알력·대립을 유연하게 중화시키고 文臣에 대한 豫期치 못한 患難을 최소화시키는 조정자의 역할을 해 나갔다.明宗朝 文臣의 動向을 보면 閔令謨, 韓文俊, 文克謙, 李知命 등이 王의 측근에서 高位官職에 나아가고 知貢擧를 역임하고 있다.鄭仲夫의 횡포에 분개하고 있던 靑年將軍 慶大升이 明宗 9年(1179) 鄭仲夫一黨을 제거하고 政權을 잡게 되자 그의 執權은 庚寅亂의 주동 인물에 의해 추대된 國王이나 執權武人들에게는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鄭仲夫의 피살은 庚寅亂에 적극 참여한 旣存武人들에게 위기감을 조성시켰고 慶大升을 武人 전체의 적으로 돌리려 하자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都房註 027 이라는 私兵集團을 두게 된다.明宗은 慶大升에 대하여 내면적으로는 꺼리나 겉으로는 두터운 은총을 베풀어 그의 奏請을 들어 주면서 旣存武人 세력과의 알력과 권력적 대립관계를 원만하게 조정해 나갔다.慶大升이 文臣에 대하여는 비교적 好意的 人物이었으며 그의 剛健하고 學識을 重히 여겼던 性品은 다음 史料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항상 武人들의 不法한 행동에 분개하여 慨然히 復古의 뜻이 있었으므로 文臣들이 기대어 존중히 여기었다.
王이 大升을 불러 묻기를, ‘鄭筠의 承宣職을 卿에게 除授코자 하노라’ 하니 그는 말하기를, ‘臣은 文字를 알지 못하니 감히 바랄 바가 아닙니다.……承宣은 王命을 出納함이니 儒者가 아니면 불가합니다’ ……사람이 많이 따르고 불었으나 學識과 勇略이 있는 자가 아니면 문득 거절하니 武臣들이 모두 그 위엄을 두려워하여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하였다(《高麗史》 권100, 慶大升傳).지금까지 벼슬과는 거리가 멀던 文士들이 仕宦의 길을 찾아 科擧에 응시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정치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李仁老는 明宗 10年 科擧에서 29才의 나이로 壯元及第를 하였으며 文名이 높은 吳世才도 明宗 12年에 나이 50으로 科擧에 급제하고 있고 科試에 부정적 입장을 취했던 林椿 역시 다시 科擧를 치뤄 官路에서 생활의 방도를 찾으려 하였다.註 028明宗 13年(1183) 慶大升이 死去한 후 천민에서 출세한 李義旼이 王의 부름을 받고 새로운 武人執政으로 등장하였다. 武人執權의 시대상황에서 國王이 旣存의 武人세력 중에서 武人執政에 대한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것은 武人세력에 대처해 나가는 國王의 정치적 위치가 결코 허약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明宗은 旣存의 武人세력 중에서 李義旼과 제휴함으로써 그들에게 신뢰와 안도감을 주고 慶大升執權의 충격에서 벗어나 國王과 執權武人들이 共存할 수 있는 政治秩序를 구축해 나갈 수 있었다. 明宗은 性品이 유약하고 결단성이 없어서 政權이 아랫사람에게 있었다는 史家의 評註 029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너무 피상적으로 본 君主의 책무에 대한 당위성만을 강조한 견해라고 볼 수 있다.李義旼 세력의 등장은 자유분방한 기질을 가진 일반 文士들에게는 시련기요, 암흑기였다. 武臣亂 이후 혼란한 세태는 文臣들로 하여금 현실도피적인 은거생활을 강요하였고 그들 자신이 耆老會나 竹林高會 등을 만들어 自然을 벗 삼아 詩酒로서 소일하는 풍조를 가져왔다. 吳世才, 林椿 등이 중심이 된 이른바 竹林七賢註 030의 등장도 이러한 세태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李義旼政權이 長期化되면서 明宗은 政事를 게을리하고 그림에 열중한다던가 人臣을 등용할 때 嬖臣·宦者들과 더불어 의논하여 엽관운동과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짐으로써 정치기강의 문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註 031明宗代에 크게 활약을 하고 冢宰에까지 오른 文克謙이 同王 19年에, 그 다음 해에는 韓文俊이 年老하므로써 세상을 떠났으며 門下侍郞平章事로 致仕한 閔令謨도 明宗 24年 3月에 卒去하였다.崔忠獻이 明宗 26년(1196) 李義旼政權을 타도하고 執權하게 되자 정치적 혼란은 점차 안정되어 갔고 武人政權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崔忠獻은 執權初에 趙永仁, 奇洪壽, 任濡, 崔詵 등 그와 친분이 있거나 인척관계에 있던 高位 文武官을 측근으로 맞아들였다.註 032 崔忠獻은 그의 長期的 집권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王室의 강력한 지지기반인 文臣세력과 國王과의 公式的인 연결 통로를 철저히 차단하려 하였다.崔忠獻은 執權後 文武官의 銓注를 장악하여 官僚社會에 군림하였고 그의 政權을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하여 文班에 대한 優待政策을 쓰고 科擧制를 강화하여 운용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처는 國王의 文臣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을 현저히 감소시킨 것 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文班階層은 그들의 屬性으로 보아 國王의 잠재적 지지세력으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武人政權 몰락 후 王政復古와 같은 정치적 변화를 맞아 文臣들의 向背가 이를 증명해 주는 것이다.崔忠默은 執權初 銓注權을 장악하기 위하여 兵部尙書에 知吏部事를 겸하여 文·武의 銓注를 관장하였다. 그리고 崔忠獻을 비롯하여 崔瑀, 崔沆 등이 御史臺의 長官인 判御史臺事를 장악함으로써 諫爭·封駁의 권리와 함께 官吏에 대한 규찰·탄핵의 권한을 가지고 있던 臺諫을 그들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崔忠献은 집권하면서부터 科擧制를 강화·운용하였다. 과거제 운용에 있어 무엇보다 知貢擧에 그의 측근이나 심복을 기용하는 일이었다.明宗 26年부터 고종 6年 사이에 거의 毎年 있었던 과거시험에 知貢擧로 임명된 면면을 보면 崔詵·任濡·李桂長·琴儀·崔洪胤 등을 주축으로 구성되고 있었는데,註 033 이들 문관들은 예외 없이 崔忠獻에 밀착되고 있었다.熙宗 元年(1205) 崔忠獻은 새로운 급제자를 기성문인과 더불어 그의 신축 茅亭에 초치하여 作詩하게 하였는데 그들 중 우수한 자를 內侍로 임명하게 하였다. 이러한 순간에 崔忠獻은 새 급제자와도 私的 恩顧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崔瑀의 文臣에 대한 정책은 崔忠獻의 정책을 답습하면서 이를 제도적으로 보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銓注權을 행사함에 있어 政房註 034의 설치라던가 文士에 대한 회유책으로 書房註 035을 두어 운영한 것이 그것이다.崔瑀는 崔忠獻에 이어 國家의 중대사는 주로 宰·樞會議를 통하여 처리하므로써 重房의 역할은 크게 弱化되었다. 그는 執權後 崔忠獻의 측근인 琴儀·鄭邦輔 등을 致仕시키거나 贬하여 배제하고註 036 그가 신임 하는 李奎報를 비롯하여 金敞,註 037 朴暄註 038 등을 새롭게 발탁·중용하였다.- 註 018
- 《高麗史》 권99, 庾應圭傳.
- 註 019
- 《高麗史節要》 권12, 明宗 3年 9月.
- 註 020
- 金塘澤, 〈崔氏政人政權과 國王〉(《韓國學報》 42).
- 註 021
- 《高麗史節要》 권13, 明宗 26年 4月.
- 註 022
- 《朝鮮金石總覽》 上, 金鳳毛墓誌銘.
《高麗史》 권101, 金台瑞傳.
- 註 023
- 金塘澤, 〈李義旼政權의 性格〉(《歷史學報》 83). 그는 初期 武人政權에 참여한 武人들을「가담집단」과「비가담집단」으로 나누고 가담집단을 다시「온건집단」과 「행동집단」으로 나누었다.《高麗史》 권128, 鄭仲夫傳, “諸武臣會重房 召文臣之遺者 李高欲盡殺之 仲夫止之”.
위의 책, 世家 毅宗 24年 9月 戊寅條, “李高蔡元欲弑王 梁淑止之”.
위의 책 권100, 陳俊傳, “庚癸之亂 文臣家瀬俊 全活者甚多 時人 謂有蔭德必昌”.
- 註 024
- 《高麗史節耍》 권11, 毅宗 24年 9月.
- 註 025
- 李奎報는 14세 되던 辛丑年(1181) 비로소 文憲公徒가 되어 誠明齋에 들어가 學業을 익혔다.(《東國李相國集》 年譜).
崔滋, 《補閑集》 卷中, “十二徒冠童 每夏會山林肆業 及秋而羅 多寓龍興 歸法兩寺”.
- 註 026
- 《高麗史節要》 권12, 明宗 8年 7月·11月조, 明宗 9年 7月조.
- 註 027
- 《高麗史》 권100, 慶大升傳. “(慶)大升懼 招致死士百數十人 留養門下 以備之 號都房”.
都房이란 말은 원래 사병들의 숙소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뒤에는 宿衛隊를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都房온 慶大升의 신변보호기구인 것 이 외에도 비밀탐지·반대세력 숙청을 비롯하여 主家의 권세를 배경으로 약탈·살생 등을 자행하므로써 그 폐단이 자못 컸었다.
- 註 028
- 李仁老, 《破閑集》 卷下.
〈與皇甫若水書〉 (《東文選》 권59).
- 註 029
- 《高麗史節要》 권12, 明宗 王贊, 明宗 14年 2月.
- 註 030
- 《高麗史》 권102, 李仁老傳, “李仁老……與當世名儒 吳世才 林椿 趙通 皇甫抗 咸淳 李湛之 結爲 忘年友 以詩酒相娛世比江左七賢”.
- 註 031
- 《高麗史節要》 권13, 明宗 15年 3月, “命文臣 製潚湘八景詩 倣其詩意 摹寫爲圖 王 精於圖畵 與 畵工高惟訪 李光弼等 繪畵物像 終日忘倦 尤工山水 軍國萬機 不以介懐 近臣希旨 凡奏事 以簡爲尙”.
위의 책 明宗 14年 12月, “王 凡用人 唯與嬖臣宦堅議之 由是 奔競成風 賄賂公行 賢否混淆 嬖臣宦堅 有所請托 王 問曰 得賂幾何 多則喜 從其請 否則延時曰.”
- 註 032
- 趙永仁과 任濡는 崔忠献의 집안과 인척관계에 있었으며 崔詵은 崔忠默 집권 이전부터 그와 친 분을 맺고 있었고 奇洪壽는 崔忠獻이 가장 신임하는 武官 中의 한 사람이었다(《高麗史》 권129, 崔忠献傳 및 朴菖熙, 〈崔忠献 小考〉(《史學志》 3) 참조.
《高麗史節要》 권15, 高宗 12年 6月.
- 註 033
- 《高麗史》 권73, 選擧志 科目 選場 明宗 26年∼高宗 6年.
- 註 034
- 《高麗史》 권129, 崔忠獻附 崔怡傳, “怡 自此置政房于私第 選文士屬之 號曰必闍赤 擬百官銓注……”.
- 註 035
- 위와 같음, “(崔)怡門客 多當代名儒 分番三番 遞宿書房”.
- 註 036
- 《高麗史節要》 권15, 高宗 7年 春正月, “平章事琴儀 鄭邦輔 辭職 加儀壁上功臣 仍令致仕 贬邦輔 安東副使……”.
- 註 037
- 《高麗史》 권102, 金敞傳, “金敞 初名孝恭 安東人…… 熙宗朝 登第 直史館 累遷尚書右丞 崔怡召 置政房 掌銓選……敞附權門 久典政柄 一日可九遷”.
- 註 038
Ⅳ. 國王과 民衆
武人政權의 성립을 보게 된 明宗代의 文班은 그 세력이 貴族政治期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었지만, 國王의 지지계층으로 계속 존재하고 성장함으로써 執政武人들이 王權을 타도할 수 없는 하나의 要因이 되었음은 이미 언급하였다.王室과 깊이 연결되어 있던 文班이 國王을 지지하는 세력기반이었다면 피지배층인 민중이 國王과 武人政權에 어떠한 태도를 취하였는가를 규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미약하나마 王權이 계속 유지되었다는 측면에서 그들의 역동적인 영향도 지대하였음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민중은 武人執權期라는 고려왕조의 정치적 격변기에 民亂으로 그들의 불만을 표출하면서도 國王의 타도가 아닌 反武人政權的 태도를 분명하게 표방하였고 고려왕조가 유지될 수 있는 사회적·정치적 세력으로 집단화하므로써 간접적으로 國王의 지위를 지키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本節에서는 明宗代의 民亂을 통해서 國王과 민중의 관계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明宗代에 있어서 사회적 특징은 여러 면에서 검토될 수 있지만 가장 특징적인 것은 각계각층에 의한 반란이 일어나 사회적 동요가 격심하였다는 것이다. 이들 반란의 성격은 매우 다양하나 社會史的으로 보나 民衆史의 측면에서 크게 주목되는 것은 지배계층으로부터 수탈과 압박을 받아오던 농민과 천민의 반란 즉 하부계층의 반란이라 하겠다.특히 明宗代에는 국왕과 武人執政과의 2원적인 권력구조로 武人政權으로서 權力을 집중적으로 발휘할 수 없었고, 重房을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합의제 정치체제도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반란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이러한 정치적 상황속에서 民亂을 촉발시킨 素因은 중앙의 武人執政과 결탁된 지방관(주로 守令) 및 鄕吏의 貪虐과 橫暴였다.註 040 이같은 현상은 근원적으로는 高麗 郡縣體制의 모순에서 비롯한 것이었다.高麗前期 郡縣體制는 郡縣制 영역과 部曲制 영역이라는 階序的인 구조로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部曲制 영역의 주민은 郡縣制에 비해 특정의 役을 추가적으로 부담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 경제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註 041 한편 군현제 영역 내 屬縣 역시 租税 수취와 운반 등에 있어 州縣에 비해 훨씬 열악한 조건에 놓여 있었다.註 042 따라서 部曲制 영역과 屬縣의 주민은 屬縣에 비하여 그만큼 가혹한 수취의 부담을 안게 되었으며 그것이 그곳 주민이 流亡하게 되는 주요한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이상과 같은 郡縣體制의 모순에서 비롯된 불합리한 수취구조가 민란을 촉발시킨 하나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경제적 측면에서 民亂의 또 하나의 素因은 농촌사회의 피폐와 빈궁화를 들 수 있다. 文臣貴族政治下에서 시작된 토지겸병은 농민의 빈궁을 촉진시켰는데 무신정변에 성공한 執政武人들은 公田과 私田을 가리지 않고 다투어 토지를 겸병하였으므로 농촌은 피폐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의 家臣格인 家僮과 門客들까지 주인의 권세를 배경으로 토지를 겸병하기에 이르자註 043 농민의 원망대상도 執權武人들에 집중되었다. 또 간악한 鄕吏들의 불법적인 농민의 토지 탈취가 겹쳐서註 044 농민들의 民亂을 촉진시켰다.民亂의 다른 원인으로 민중의 사회의식과 신분의식의 상승을 들 수 있다. 武人들이 집권한 明宗代에 오면 민중들은 신분사회의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武人政變의 주역인 鄭仲夫·李義方 등 執權武人들은 미천한 신분출신이었고 그 羽翼의 武人들도 대부분 그러하였다.註 045‘庚寅의 亂’을 계기로 민중들도 執權武人들과 같이 정치적 출세와 사회참여가 가능하다고 자각하게끔 되었고 이러한 민중의 자각은 下剋上의 풍조와 함께 民亂을 일으킬 충분한 素因이 되었다.이들 民亂이 王權과 武人政權에 미친 영향이 어떠했는가를 實例를 들어 살펴보겠다.公州 鳴鶴所에서 일어난 亡伊·亡所伊의 亂은 明宗 6年 1月에 이들은 스스로 山行兵馬使라 칭하고 本邑인 公州를 함락시켜서 중앙에서 파견한 大將軍 丁黃載·將軍 張博仁 등의 3千軍으로도 이를 평정하지 못하고 官軍이 패배를 당하는 대규모의 농민반란이었다. 그리하여 朝廷에서는 그들에 대하여 회유정책을 써서 그해 6월에 그의 鄕里인 鳴鶴所를 忠順縣으로 승격시키고 守令을 파견하여 그들을 安撫케 하였다. 그러나 반란군은 그해 9月에는 禮山縣을 쳐서 함락시키고 그 監務를 살해 하였다. 한때 정부의 회유정책으로 한동안 항복하기도 하였지만 재차 봉기하던 明宗 7年 2月에는 瑞山의 伽倻寺를 침구하며 3月에는 稷山의 弘慶院을 불태우고 승려 10여 명을 살해하였다.이때 亡伊 등은 弘慶院의 住持를 위협하여 書片을 주어 開京에 보냈는데 거기에 “이미 우리 고울을 승격하여 縣을 삼고 또 守令을 두어 安撫하더니, 도리어 다시 군사를 내어 와서 치고 우리 母와 妻를 잡아 가두니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창칼 아래 죽을지언정 끝내 항복하여 포로가 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王京에 이른 연후에 그만 둘 것이다”라 한 것을 보면 그들의 적개심과 투지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들이 再叛하자 6개월 만인 그해 7月 결국 亡伊·亡所伊 등이 南賊處置兵馬使 丁世獻 등에게 잡히어 淸州獄에 囚禁됨으로써 이들의 반란은 일단락을 보게 되었다.이 亂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도 鄭仲夫一家의 專橫에서 비롯된 것으로 《高麗史節要》 卷12, 明宗 6年 8月條에서는,諸領의 군사가 익명의 榜을 붙여 말하기를 ‘侍中 鄭仲夫 및 그 아들 承宣 筠과 그 사위 僕射 宋有仁이 권세를 마음대로 하고 방자하므로 南賊이 일어남은 이에 의함이니 만약 군사를 내어 치려면 반드시 먼저 이 무리들을 제거한 뒤에 하는 것이 옳다, 라고 하므로 (鄭)筠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解職을 빌고 여러 날 동안 나오지 않았다
라고 하였고, 《高麗史》 권20, 鄭仲夫傳에서도 “南賊이 일어난 것은 당시 武人執政 鄭仲夫一家의 專横에 그 근원이 있다”라고 하여 사실상 民亂의 원인을 武人정권에 있음을 밝히고 있어서 民亂은 역설적이지만 武人政權을 견제하고 간접적으로 王權을 유지케 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慶大升 집권기인 明宗 12年에는 全州에서 官奴의 亂註 046이 일어났다. 즉 全州의 司錄인 陳大有 및 上戶長 李澤民 등이 官船을 건조하는데 그 督役함이 너무나 가혹하였으므로 旗頭竹同 등 6人이 官奴와 불량배를 불러모아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 全州의 亂은 그 主體者가 旗頭(旗守兵)竹同 등 군인이었으나 노예가 직접 참가한 최초의 반란으로서 그 동기와 목적이 地方官과 鄕吏의 가혹한 督役, 驅使에 대한 반발로 그 근원적인 것은 執權武人들과 결탁한 地方官의 고질적인 횡포와 탐학에 있었다.明宗 23年 李義旼 집권기에 경상도 지역인 雲門과 草田에서 일어난 金沙彌와 孝心의 亂은 민중과 武人執政 및 國王과의 미묘한 관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당시 武人執政인 李義旼은 신라부흥의 뜻을 품고 金沙彌·孝心 등과 내통하였으며 그의 아들 李至純(將軍)도 대장군 全存傑의 휘하에서 반군을 치는 官軍의 지휘관으로서 南賊과 내통하여 軍中의 동정을 亂軍에 누설시켜 官軍의 패배를 自招케 하였다.註 047明宗 23年 12月 官軍의 대토벌 작전이 어느 정도 성공하였을 때 南賊의 괴수의 한 사람인 得甫가 대궐에 들어가 생업에 종사할 것을 허락하여 주기를 請하므로 國王은 有司에 명하여 놓아 돌려 보내어 현지 兵馬使에게 거처케 한 일이 있으며,註 048 同王 24年 8月에는 南賊의 괴수가 그 무리 李純 등 4명을 보내어 대궐에 나와서 항복하기를 청하므로 國王은 그들에게 隊正을 除授하고 布를 하사하여 돌려보냈다註 049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는 民亂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협상대상으로 國王의 권위를 인정하고 執政武人을 여기서 제외시킨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도 그들의 목표는 國王의 타도나 적대감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武人執政 및 그와 연결된 지방관의 탐학·횡포에 대한 항거였다고 생각된다.武人政權의 確立期라 할 수 있는 崔氏執權期에 일어난 民亂에서도 우리는 國王의 位相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태를 경험하게 된다.崔忠獻 집권 초인 神宗 元年(1198) 開京에서 萬積이 주동이 되어 대규모의 公私奴婢의 반란이 일어났다.註 050 이 반란은 개경의 모든 노비들과 연락하여 計劃的으로 신분해방 나아가서는 정권탈취를 꾀하였다는 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비록 사전에 발각되어 거사조차 하지 못하고 말았지만 開京 北山에서 公私奴婢를 모아 놓고 행한 다음과 같은 萬積의 선동적 연설에서 시사받는 바가 크다.庚癸 이래 朱紫(高官大爵)는 賤隸속에서 많이 일어났다. 將相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찌 육체를 수고롭게 하고도 매질 밑에서 괴로와야 하겠는가……먼저 崔忠獻 등을 죽이고 이어 각기 그 주인을 죽여 賤籍을 불살라서 三韓으로 하여금 賤人을 없게 하면 公卿將相은 우리가 모두 할 수 있다.
여기서 萬積의 주장 속에 將相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라든가, 崔忠獻 등 집권자를 죽인 후 賤籍을 불태워 三韓에 賤人을 없애고 자기들이 公卿將相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자는 선동은 그들의 봉기목적이 國王의 타도가 아닌 신분해방 및 정권쟁취에 국한시킨 점이 매우 특징적이다.- 註 039
- 民亂 발생의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守令의 횡포로 百姓이 流亡하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는데, 이러한 면은 武臣政權 이전 睿宗代에도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高麗史》 권12, 睿宗卽位年 十二月條이 “甲申 敎曰……今諸州郡司牧 淸廉憂恤者 十無一二慕 利釣名 有傷大禮 好賄營私 殘害生民 流亡相繼 十室九空 朕甚痛焉……”이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 註 040
- 《高麗史》 권74, 選擧志 全國 選用監司條, “(明宗) 十八年三月 因宰樞所奏 下制曰 百姓乃國家 根本 朕欲其安土樂業 故遺朝臣 分憂宣化 近聞守令 因公事不急之務 侵漁勞擾 民不堪弊 流移逃散 轉于溝壑 朕甚愍之 云云”·
- 註 041
- 朴宗基, 〈高麗時代 郡縣支配體制와 구조〉(《國史館論叢》 4, 1989).
- 註 042
-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5, 比安縣 樓亭條(河崙記).
위의 책 권27, 玄風縣 樓亭條(李詹記).
- 註 043
- 《高麗史》 권28, 鄭仲夫傳, “(鄭)仲夫 性本貪鄙 殖貨無厭 及爲侍中 廣植田園 家僮門客 依勢橫恣 中外苦之”.
- 註 044
- 《高麗史》 권129, 崔忠献傳. 崔忠獻兄弟의 封事 第7條 가운데 “比聞 郡國吏多逞貪 廉恥道息”이란 말이 있어 그 당시 州縣의 吏(鄕吏)가 貪汚하여 廉恥를 저버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註 045
- 杜景升, “質厚少文 有勇力 初補控鶴軍 手搏者 招景升爲伍……遂不往 後以隊正 充厚德殿牽龍.”
洪仲方, “起自行伍.”
陳 俊, “有勇力 起行伍 積勞拜衛將軍.”
崔世轉, “系本寒微 不解書 毅宗時 以禁軍充隊正.”
朴純弼, “門地賤微 挺姿表 羙鬚髯 進止言語 爲人所推許 毅宗時 以中禁軍入衛 頗勤恪 始補勇爵.”
李英搢, “家世微 販魚爲生 充邏卒 性殘忍喜禍.”
白任至, “業農 初以驍勇被選 至京 賃屋居 賣薪自給 毅宗選充內巡檢軍 扈駕出入 不離仗側以勞補隊正.”
鄭邦佑, “起自電吏……以賤系拜臺官 人皆笑之.”
- 註 046
- 《高麗史》 권20, 明宗 12年 3月조.
- 註 047
- 《高麗史》 권128, 李義旼傳.
- 註 048
- 《高麗史》 권20, 明宗 23年 12月 丁已조.
- 註 049
- 위의 책, 明宗 24年 8月 丁酉조.
- 註 050
- 《高麗史》 권129, 崔忠獻傳.
Ⅴ. 結語
지금까지 武人執權의 격동 속에서 國王의 政治的 위상이 어떻게 변모되었으며 王氏의 高麗王朝가 붕괴되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던 배경 그리고 文班과 民衆의 動向을 武人執權期의 前期에 해당하는 明宗代를 중심으로 고찰해 보았다.이를 요약하므로써 結語에 대신하고자 한다.明宗代에는 아직 武人政權이 안정되지 못하여 執權武人들 간에 政權 다툼이 치열하였으며 政治도 高位武臣의 合坐機關인 重房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武人執權期 重房의 기능은 軍事는 물론 警察·刑獄·百官의 任免 등 모든 政務에 간여하므로써 王權의 위축을 초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明宗代에는 武人執政과 重房의 견제 속에서도 國王은 政治의 求心點으로 政務수행이 가능하였고 對外的으로 金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주관하였으며 詔書를 반포하거나 赦免權을 행사하여 정치의 쇄신을 기하려 하였고 文班에 對한 銓注權 행사와 科擧制 운용에 영향력을 발휘하므로서 貴族政治期에는 비견될 수는 없지만 文班세력을 기반으로 한 國王 자신의 통치영역을 유지할 수 있는 과도기적 시기였다고 생각된다.執權武人들의 專横으로 王權이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도 王氏의 高麗王朝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전통적 신분제사회에 있어서 자신들의 미천한 신분에 대한 잠재의식과 高麗王朝를 상징하는 國王의 권위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明宗代 國王의 권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王室과 깊은 연관을 갖는 文臣세력의 꾸준한 진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고 重房政治의 취약성 및 對外的으로 事大外交를 통한 金나라 朝廷의 後見的 측면도 또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崔忠獻은 집권 후 國王의 廢立을 마음대로 하고 國政을 擅斷하면서도 스스로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國王이 되려는 모험을 택하기 보다는 國王의 권위를 이용하여 그의 정권을 공고히 하려는 신중함을 택하였다.유교적 전통이 강한 高麗社會에 있어서 신분관념을 배제할 수 없는 당시의 사회적 여건이나 北方 민족과 연관된 대외정세의 추이를 崔氏執政이라 하여 무시할 수는 없었다. 특히 崔氏 정권은 몽고침략의 시련기를 맞아 國王을 앞세워 對蒙交涉에 임할 수밖에 없었고 이같은 대몽항쟁의 수행과정에서 국왕의 권위는 그 명맥이 유지되었다.武臣亂 이후 執權무인들은 國王과 文臣이 밀착되는 것을 항상 경계, 견제하였고 가능한 한 많은 東班官職을 차지하여 권력기반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明宗은 政治의 중심부에서 文·武官의 대립을 중화시키고 文臣에 대한 예기치 못한 환난을 最小化시키는 조정자의 역할을 해 나갔다.武人執權期 武人執政의 개인적인 성품이나 政治性向에 따라 文班의 政治的 立地도 큰 영향을 받았다.崔忠獻은 집권 후 그의 長期的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고 國王과 文臣세력의 연결 통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文·武官의 銓注權을 장악하고 文班우대정책을 쓰며 科擧制를 강화하여 운용하였다. 이에 따라 國王의 文臣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은 현저히 줄어든 것만은 사실 이지만 文臣들은 國王의 잠재적 지지세력으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崔忠獻死後 아들 崔瑀가 집권하게 되자 그는 父 崔忠獻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이를 제도적으로 보완해 나갔다. 즉 왕실에 대한 예우와 배려, 銓注權 행사를 위해 政房을 설치한다든가 文士에 대한 회유로 書房을 두어 고문의 역할을 담당케 한 것이 그것이다.끝으로 武人執權期에 피지배층인 민중이 國王과 武人政權에 어떠한 태도를 취하였는가는 社會史的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民衆들은 武人執權期 그들의 불만을 民亂으로 표출하면서도 國王의 타도가 아닌 反武人政權的 태도를 분명히 표방하므로써 王氏의 高麗王朝가 유지되고 간접적으로 國王의 권위를 뒷받침 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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