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 註 001
- 李基白氏는 肅宗代에 조직된 別武班의 人的 構成의 분석을 통해 초기 군제의 변화단서를 여기서 찾으려 하였다(〈高鹿 別武班考〉《金載元博士回甲紀念論叢》, 을유문화사, 1969).
- 註 002
- 金庠基, 〈三別抄와 그 亂에 대하여〉(《震檀學報》 9, 10, 13, 1938~1941;《東方文化史論攷》, 을유문화사, 1948).
金塘澤, 〈崔氏政權과 그 軍事的 基盤〉(《高麗武人政權硏究》, 새문사, 1987).
金潤坤, 〈三別抄의 對蒙抗戰과 地方 郡縣民〉(《東洋文化》 20·21, 1981).
池內宏, 〈高麗의 三別抄에 대하여 〉《史學雜誌》 37-9, 1926;《滿鮮史硏究》 中世篇 3, 吉川弘文館, 1963).
閔丙河, 〈崔氏政權의 支配機構〉(《한국사》 7, 국사편찬위원회, 1973).
內藤雋輔, 〈高麗兵制管見〉(《靑丘學叢》 15·16, 1934;《朝鮮史硏究》 京都大東洋史硏究會, 1961).
白南雲, 〈第81章 武家兵權의 支配的 段階〉(《朝鮮封建社會經濟史》, 改造社, 1937).
申安湜, 〈高麗中期의 別抄軍〉《建大史學》 7, 1989).
- 註 003
- 內藤雋輔, 〈高麗兵制管見〉(《靑丘學叢》 15·16, 1934;《滿鮮史硏究》, 1961).
白南雲, 〈第11篇 高麗의 兵制〉(《朝鮮封建社會經濟史》, 1937).
末松保和, 〈朝鮮三國 高麗의 軍事組織〉(《古代史硏究》 5, 1962).
姜晋哲, 〈高麗 初期의 軍人田〉(《淑明女大論文集》 3, 1963).
李佑成, 〈高麗의 永業田〉(《歷史學報》 28, 1965).
- 註 004
- 金鍾國, 〈高麗의 府兵에 대하여 〉(《立正史學》 23, 1959).
千寬宇, 〈閑人考〉(《社會科學》 2, 1958).
李基白, 《高麗兵制史硏究》(일조각, 1968).
洪承基, 〈高麗 初期 中央軍의 組織과 役割〉(《高麗軍制史》, 陸軍本部, 1983).
徐日范, 〈試論高麗前期兵制與唐朝府兵制的主要區別〉(《朝鮮歷史硏究論叢》, 延邊大出版社, 1987).
- 註 005
- 周采赫氏는 전쟁 초기에 몽고의 주공격 방향이 金, 南宋 등이었고 고려에 대한 공략은 南宋 정복전쟁의 일환으로 수행된 것이었기 때문에 정복전쟁에서 점하는 비중이 낮았다고 하였다(《몽골-고려사 연구의 재검토〉《애산학보》 8, 1989).
- 註 006
- 姜晋哲, 〈蒙古의 侵入에 대한 抗爭〉(《한국사》 7, 국사편찬위원회, 1973).
金潤坤, 〈抗蒙戰에 참여한 草賊에 대하여〉(《東洋文化》 19, 1979).
尹龍爀, 《高麗對蒙抗爭史硏究》(일지사, 1991).
- 註 007
- 金庠基氏는 崔氏政權의 對蒙抗爭의 태도를 高麗武人의 전통적인 氣習과 對外精神, 그리고 高麗武士 사이에 흐르고 있던 불굴의 정신으로 설명하였다(〈三別抄와 그 亂에 대하여〉《東方文化交流史論攷》, 1948). 閔丙河氏는 고려가 몽고제국을 상대로 30여 년간 싸워온 것은 高麗武人의 감투정신과 대외적으로 강한 主體性 때문이었다고 하였다(〈崔氏政權의 支配機構〉《한국사》 3, 국사 편찬위원회, 1973).
- 註 008
- 朝鮮 초기 관료인 李先齊는 兩界地域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前期軍制의 붕괴시점을 蒙古침략 이후로 보고 있다(……지금 高麗式目形止案을 가지고 諸城의 防禦制度를 살펴보니 中國 諸衛의 법에 약간 부합됩니다. 우선 몇 邑의 軍制를 들어 아뢰겠습니다……1城 내에는 使, 副使, 判官, 法曹가 있는데 이는 民事를 다스리는 官이고, 防戍將軍과 中郞將, 郞將, 校尉, 隊正이 있는데 이는 軍務를 다스리는 직책으로 각기 統屬이 있어 部伍가 엄정하였습니다. 일이 있으면 將帥에게 명해 出師하게 하고 적이 쳐들어오면 각기 邑城을 지켜 敗沒함이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元兵이 누차 침입한 이후에는 버티지 못해 士卒이 거의 다 살륙당해 없어졌고 말기에는 紅賊의 난입으로 王이 播遷하고 中外가 잔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文宗實錄》 권4, 즉위년 10월 庚辰 藝文館提學 李先齊上書).
Ⅱ. 兩界 州鎭의 軍制변화
兩界는 국경지역으로 南道의 일반 행정구역과는 달리 軍事的 역할이 특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양계는 남도와는 다른 특수한 行政組織과 軍事組織을 갖추고 있었다.註 009 行政組織上 남도지역은 일반 州, 郡, 縣이 설치되고 있었는데 비하여 양계지역은 防禦州, 鎭이 설치되어 군사적인 州鎭체제로 편성되었다. 또한 남도지역은 界首官이 있는 하나의 主牧을 중심으로 일반 守令이 파견된 몇 개의 領郡과 지방관이 없는 屬郡縣이 여기에 管領 또는 예속되는 지방조직을 갖추고 있었는데 반해 양계지역은 主牧과 領郡이 일원적인 領屬관계를 이루는 한편 극히 일부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다.註 010 이와 같이 군사적인 州鎭體制로 편성된 양계지역에는 지배기구로서 남도의 按察使와는 달리 군사적인 兵馬使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행정조직상의 특징은 양계지역의 군사적인 중요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특히 군사적인 면에서도 이러한 지역적인 차이가 크게 나타나고 있다.註 011지금까지 兩界 州鎭의 군사조직에 대해서는 두개의 다른 견해가 있다. 하나는 양계 주진의 防戍를 위해 中央에서 파견된 軍人註 012과 州鎭에 토착해 사는 주민, 그리고 원주지인 本貫에 가족을 남겨두고 주진에 入居한 군인이 모두 州鎭軍 내에 소속되어 하나의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는 견해註 013이고, 또 하나는 지휘계통이 다른 두개의 군사조직, 즉 州鎭將相將校의 지휘를 받는 州鎭軍과 中央에서 파견되는 防戍將軍의 지휘를 받는 防戍軍이 서로 조직을 달리하는 구성이었다는 견해註 014이다. 필자는 양계 주진의 군사조직이 주진의 토착 주민들로 조직된 州鎭軍과 중앙에서 파견된 防戍軍이 별개로 구성되었다는 후자의 견해에 동의하고, 우선 武臣執權期 이후 양계의 최고 지배기구인 兵馬使制의 변화를 살펴보고 이어서 防戍軍과 州鎭軍制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註 009
- 兩界의 支配組織에 대해서는 다음의 論文들이 있다.
邊太燮, 〈高麗 兩界의 支配組織〉(《高麗政治制度史硏究》, 일조각, 1971).
末松保和, 〈高麗兵馬使考〉(《東洋學報》 39-1, 1956).
李基白, 〈高麗 兩界의 州鎭軍〉(《高麗兵制史硏究》, 일조각, 1968).
金南査, 〈高麗 兩界兵馬使에 대하여〉(《李弘植回甲紀念韓國史學論叢》, 신구문화사, 1969),
小見山春生, 〈高麗前期 兵馬使機構에 관한 一考察〉(《朝鮮史硏究會論文集》 20, 1983).
- 註 010
- 邊太燮, 〈高麗 兩界의 支配組織〉(《高麗政治制度史硏究》, 일조각, 1971).
- 註 011
- 《高麗史》 兵志에 의하면 南道지역의 州縣軍은 단순히 保勝, 精勇, 一品으로 兵種이 구분되어 軍額이 기록되어 있는데 반해 兩界지역의 州鎭軍은 지휘관인 將校들의 軍額은 물론 하층군인의 경우도 남도 주현군보다 兵種도 훨씬 다양하게 구분되어 있고, 또 병종별로 병력수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軍事組織에서도 남도지역외 主縣 중심의 軍目道 편성과는 달리 양계지역은 모든 州鎭이 주진군의 편성의 단위가 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양계 州鎭軍이 남도 州縣軍에 비해 보다 조직적으로 편성되고 파악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高麗史》 兵志, 兵3 州縣軍條. 李基白, 〈高麗 兩界의 州鎭軍〉 《高麗兵制史硏究》, 일조각, 1968).
- 註 012
-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이것을 京軍으로 표현하면서 中央軍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京軍과 中央軍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中央軍은 京軍과 外軍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京軍은 개경에 거주하는 職業軍人이었고, 外軍은 지방 州縣에서 番上하여 中央軍을 구성한 義務兵인 州縣軍이었다고 본다.
- 註 013
- 李基白, 〈高麗 兩界의 州鎭軍〉(《高麗兵制史硏究》, 일조각, 1968).
- 註 014
- 趙仁成, 〈高麗 兩界의 國防體制〉(《高麗軍制史》, 육군본부, 1983).
1. 兩界 兵馬使制의 변화
1) 兵馬使機構 樣成의 변화남방의 道制와는 달리 西北面, 東北面 또는 北界, 東界라 불리는 특수한 행정구역이 설치된 양계지역에는 그 장관으로서 남도의 按察使에 비견되는 兵馬使가 파견되었다. 양계병마사는 기록상 成宗 8년에 처음 설치된 것으로 나타난다.註 015 원래 병마사기구는 1人의 兵馬使 밑에 知兵馬使, 兵馬副使, 兵馬判官, 兵馬錄事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註 016 이들 병마사직에는 文臣들이 모두 임명되었다.註 017 그러나 실제로는 백관지 규정에서처럼 병마사기구의 모든 구성원이 임명되지 않았다. 예컨대 靖宗代에는 병마사, 지병마사, 병마부사가 모두 임명되었는데 반해 文宗代에는 양계의 장관으로 3인 중 1인 만이 단독으로 파견되어 병마사, 지병마사, 병마부사가 병마사기구의 구성요원이 아니라 양계지역에 1명씩 파견되는 등등한 장관으로 되었다.註 018 또한 睿宗代가 되면 서북면에는 兵馬使 또는 知兵馬使가 파견되고 동북면에는 兵馬副使가 파견되어 서북면이 보다 중요시 되었다.註 019그러나 무신집권기 이후가 되면 兵馬使職의 구성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즉 종래 文官職이 독점하였던 병마사직에 武官職이 임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병마사직을 武官職에서 완전히 독점한 것은 아니었다. 즉 東北面과 西北面 간의 병마사직 임명에 문관직과 무관직이 交差로 임명되는 文武交差制가 실시되고 있고 같은 界內의 병마사직 임명시에도 문무교차제가 실시되고 있다. 먼저 西北面과 東北面의 양계 사이에 문무교차제의 실시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은 무신집권기동안 양계 병마사가 동시에 임명되는 사례들만을 모은 것이다.○ 明宗 12년 3월 上將軍 권절평을 서북면병마사, 尙書右丞 송단을 동북면병마사로 삼았다.註 020
○ 神宗 원년 정월 上將軍 백존유를 서북면지병마사, 太府卿 문후식을 동북면지병마사로 임명하였다.註 021
○ 高宗 4년 7월 前植密院使 조충을 서북면병마사로 임명하였다. 9월(대장군) 오수기를 동북면병마사에 임명하였다.註 022
○ 高宗 12년 7월 判司宰事 이윤함을 서북면병마사로, 大護軍 금휘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였다.註 023
○ 高宗 15년 정월 判將作監事 김변을 동북면병마사, 大將軍 태집성을 서북면병마사로 각각 임명하였다.註 024
○ 高宗 19년 정월 大將軍 박돈보를 동북면병마사, 右諫議 유준공을 서북병마사, 최임수를 知西京 留守로 삼았다.註 025위의 사례를 보면 예외없이 兩界間 병마사직의 임명에 문무교차제가 지켜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어느 한 쪽에 文官職이 임명되면 다른 쪽에는 반드시 武官職이 임명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武臣執權期 이전에는 西北面과 東北面 간에 불균등하게 임명되던 병마사직에도 변화가 일어나 양계 모두 병마사 기구의 최고직인 兵馬使 또는 知兵馬使가 동등하게 임명되고 있다. 이는 북방 국경지역에서 계속되는 전란으로 인해 東北面의 중요성이 西北面에 못지않게 커졌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다음은 同一界內의 문무교차제 실시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同一 界內에서 동시에 2인 이상의 병마사직이 임명되고 있는 사례는 이 이외에는 찾아 볼 수 없다. 먼저 明宗 3년의 경우 동북면 지병마사인 한언국이 문관인지 무관인지 나타나 있지 않으나 김보당의 거병이 反武臣政權의 성격을 띤 것이고 또 김보당이 모든 문신들이 가담하였다고 진술한 것을 통해 볼 때 文官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武臣政變 직후인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外官職을 아직 武人이 차지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동북면의 병마사직에는 여전히 문신들이 임명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종 13년에는 서북면병마사직의 경우 副使에는 무관이, 判官에는 문관이 교차로 임명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明宗 3년 10월에 모든 外官職에 武人을 임용하게 한 조치註 028의 결과 때문이었다. 이것은 무신정변 이후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무신들의 지위상승에 따른 변화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앞의 例에서 보는 것처럼 外官職에 武人만이 임명된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文武交差法에 의해 文官과 武官이 교차로 임명되었다. 이는 정권을 장악한 武臣들의 관직 독점에도 불구하고 外官의 기능상 武官이 감당할 수 없는 職務가 많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이처럼 무신집권기 이후에는 그 동안 文官만으로 임명되던 양계 병마사직의 구성에 변화가 일어나 兩界 사이의 병마사직에서나 동일 界內의 병마사직에서도 文武가 교차로 임명되게 되었다. 이는 武臣政變 이후 武臣의 권력장악과 함께 그 동안 文武 간의 未分化로 인해 파행적으로 운영되어 오던 兩班制度가 점차 제 기능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2) 兩界 兵馬使의 機能 변화양계 병마사의 기능은 서북면과 동북면을 行政的으로 통치하는 것 뿐만 아니라 軍事的으로 변경을 방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두가지 기능 중 양계의 지역적 특성상 軍事的 기능이 보다 중요시 되었다는 것이 종래 병마사 기능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이다.註 029 그러나 이에 대해 武臣執權 이전까지는 병마사의 군사상 기능에서 일반 외관과 근본적인 차이가 없었다는 견해도 있다.註 030 즉 武臣執權 이전의 병마사 기능을 보면 일반 外官과 차이가 없으나 이후에는 변화가 나타나서 군사행위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그러나 明宗代부터 南道按察使도 軍事的인 직무를 수행하는 예가 자주 보이기 때문에 비록 연대의 흐름에 따라 그 기능의 변화가 인정되기는 하나 직접적인 군사행위의 면에서는 南道의 按察使와 비교할 때 그 兵力差에 상응할 만한 본질적인 차이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였다.註 031 따라서 양계 병마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중앙정부에 대해 극히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지방군사력의 집중지인 양계 주진에 대한 감독, 감시였다는 것이다.註 032실제로 武臣執權期 이전의 사료상에 나타나는 병마사의 기능을 볼 때 군사적인 면에서 일반 外官과 구별되는 특별한 기능을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武臣執權 이후가 되면 병마사 기구 구성원의 출신변화와 함께 兵馬使의 적극적인 군사행동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즉 양계지역 병마사 관할하에 있는 官員의 功過에 대한 포상이나 처벌의 奏請, 외교문서의 수발, 외적의 침입, 지방민의 봉기사실이나 대륙의 정세변동 등 변방의 급보를 중앙에 보고하는 종래 병마사의 통상적인 기능 이외에 봉기군의 진압이나 외적의 침임에 대해 병마사가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군사행동을 하고 있다. 趙位寵 餘衆의 봉기시에는 서북면병마사가 諸城軍을 동원하여 봉기 진압에 참여하였고註 033 또 거란, 금, 몽고 등 외적의 침입시에는 諸城軍을 모아 싸우거나註 034 직접 出征軍을 조직하고 지휘하여 전투에 참가하였다.註 035이처럼 武臣執權期 이후가 되면 이전과는 달리 양계 병마사의 적극적인 군사행동이ᅵ 많이 나타나고 있다. 원래 국경지역인 양계의 경우 그 지배기구인 병마사의 軍事的 機能이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前期에는 병마사에 의한 군사행동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은 물론 後期에서처럼 이민족의 침입이나 양계 지역에서의 봉기가 빈번하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보다는 軍事的 기능이 보다 중요한 병마사직에 모두 文臣이 임명되고 있었던데 더 큰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무신집권 이후가 되면 병마사직에 文武가 교차로 임명됨으로써 병마사기구가 본래의 제 기능을 정상적으로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註 015
- 《高麗史節要》 成宗 8년 3월.
- 註 016
- 《高麗史》 百官志, 兵馬使條에 의하면 병마사기구외 구성원으로 兵馬使(3品) 1인, 知兵馬使(3품) 1인, 兵馬副使(4품) 2인, 兵馬判官(5, 6품) 3인, 兵馬錄事(參外權務) 4인이 설치되고 있다(《高麗史》百官志 外官條).
- 註 017
- 邊太燮, 〈高麗朝의 文班과 武班〉(《史學硏究》 11, 1961 ;《高麗政治制度史硏究》, 일조각, 1971).
- 註 018
- 邊太燮, 〈高麗兩界의 支配組織〉(《高麗政治制度史硏究》, 일조각, 1971).
- 註 019
- 변태섭, 위의 논문.
- 註 020
- 《高麗史節要》 권12.
- 註 021
- 《高麗史》 권21, 世家.
- 註 022
- 《高麗史》 권22, 世家.
- 註 023
- 《高麗史》 권22, 世家.
- 註 024
- 《高麗史》 권22, 世家.
- 註 025
- 《高麗史》 권23, 世家.
- 註 026
- 《高麗史》 권19, 世家.
- 註 027
- 《高麗史節要》 권15.
- 註 028
- 3京, 4都護, 8牧에서부터 郡, 縣, 館, 驛의 직임에 이르기까지 모두 武人을 임용하게 하였다 (《高麗史節要》 권12, 明宗 3년 10월).
- 註 029
- 末松保和, 〈高麗兵馬使考〉(《東洋學報》 39-1, 1956).
邊太變, 〈高麗兩界의 支配組織〉(《高麗政治制度史硏究》, 일조각, 1971).
- 註 030
- 金南奎, 〈高麗 兩界 兵馬使에 대하여〉(《李弘植回甲紀念韓國史學論叢》, 신구문화사, 1969).
- 註 031
- 김남규, 위의 논문.
- 註 032
- 김남규, 위의 논문.
- 註 033
- 《高麗史節要》 권12, 明宗 9년 4월.
- 註 034
- 《高麗史節要》 高宗 3년 10월·5년 11월·18년 9월·43년 4월.
- 註 035
- 《高麗史節耍》 高宗 13년 정월.
2. 防戍軍制의 변화
1) 防戍將軍의 기능 강화중앙에서 防戍軍이 파견된 주진은 防戍將軍이 防戍軍과 함께 토착의 州鎭軍을 총지휘하여 방수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다시 말해 토착의 州鎭軍 장교와 중앙파견의 防戍將軍이 각기 별개로 지휘체계를 가졌던 것이 아니고 州鎭軍 장교도 중앙파견의 방수장군의 지휘하에 놓여졌던 것이다.註 036 州鎭軍의 최고 지휘관의 계급은 中郞將 또는 郞將 이하였으므로 이들은 모두 防戍將軍의 지휘하에 들어갔을 것이다.防戍將軍이 양계의 모든 州鎮에 파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朝鮮 初 인물인 李先齊가 高麗式目形止案을 가지고 高麗 전성기 때 양계 諸城의 防禦制度를 소개한 것을 보면 北界의 경우 모든 城에 방수장군이 배치되었던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지금 高麗式目形止案을 가지고 諸城의 방어제도를 살펴보니 중국 諸衛의 법에 약간 부합됩니다. 우선 몇 邑의 軍制를 들어 아뢰겠습니다.……1城 내에는 使, 副使, 判官, 法曹가 있는데 이는 民事를 다스리는 官이고, 防戍將軍과 中郞將, 郞將, 校尉, 隊正이 있는데 이는 軍務를 다스리는 직임으로 각기 統屬이 있어 部伍가 엄정하였습니다. 일이 있으면 將帥에게 명해 出師하게 하고 적이 쳐들어오면 각기 邑城을 지켜 敗沒함이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元兵이 누차 침입한 이후에는 버티지 못해 士卒이 거의 다 살륙당해 없어졌고 말기에는 紅賊의 亂入으로 왕이 播遷하고 中外가 殘滅하였습니다.註 037
그러나 《高麗史》 兵志에 나타나는 양계 주진의 將校構成을 살펴보면 防戍將軍은 없고 中郞將 이하의 將校層만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防戍將軍이 주진의 토착 지휘관이 아니라 중앙 파견의 관직임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된다.註 038 만약 이선제의 설명과 같이 모든 城에 방수장군이 배치되었다면 서북면지역 주진의 수만도 40여 개이므로 적어도 40여 명 이상의 방수장군이 파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방수장군으로 파견될 수 있는 중앙의 將軍 이상의 무관직수는 60여 개에 불과하다.註 039 따라서 北界 州鎭만도 40여 명 이상의 방수장군이 파견되어야 하는데 東界 州鎭까지 포함한 양계의 모든 주진에 방수장군이 파견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註 040따라서 일부의 특정 주진에만 파견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또한 기록을 통해 볼 때 방수장군이 파견되지 않은 주진을 많이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조위총 난 당시 유일하게 趙位寵 軍에 호응하지 않았던 延州의 경우 주진군 최고지 휘관인 都領이나 州將註 041 이외에 防戍將軍의 존재는 전혀 보이지 않는데 이는 연주에 방수장군이 배치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된다.註 042여러 기록들을 통해 防戍將軍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州鎮은 義州註 043·麟州註 044·靜州註 045·宣州註 046·朔州註 047·昌州註 048·定州註 049 등이다. 방수장군은 무신집권 이후 武臣의 지위 상승과 兩班制度의 정착에 따라 종래 文臣이 독점하던 兵馬判官職을 겸하고 또한 兵馬判官이 겸하던 分道員까지도 겸임하여 分道將軍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옛 제도에 義州는 두 나라의 關門이 되는 곳으로 무릇 사신의 來住와 文牒의 출입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文臣을 뽑아 맡아보게 하고 그 分道員도 또한 常參官으로 명망이 있는 자를 보냈다. 그런데 庚寅年 이후 무신이 정권을 잡아 戍邊將軍으로 하여금 모두 兵馬의 임무를 띠게 하고 分道로 삼았다. 때문에 昌州, 朔州외 두 성은 모두 장군에게 맡기고, 義州는 문서의 주고 받음이 있는 곳으로서 文, 武 2인을 兼置하여 州人이 공급하는 비용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였다. 송저가 병마사가 됨에 이르러 (州人이) 호소하기를, ‘우리 邑은 본래 北邊의 殘鄕인데 文武 分道가 항시 한 城에 거주하니 供费가 부족하여 몇 년 되지 않아 폐허가 될 것 입니다. 속히 아뢰어 편의에 따라 몇 개의 城을 나누어 관장하게 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송저도 옳게 여겨 文官으로 의주분도를 삼아 靈州, 威遠鎭을 예속시키고, 武官은 靜州분도로 삼아 麟州, 龍州를 예속시키자고 아뢰니 制를 내려 이를 따랐다.註 050
○ 양계의 兵馬判官을 승격하여 副使로 하고 防戍中郞將에게 角이 있는 복두를 쓰게 허락하였다. 처음에 방수장군은 병마의 직무를 띠지 않았으나 庚寅年 이 후에 비로소 병마판관을 겸하게 하고 이때에 승격시켜 副使로 하였다. 방수중낭장은 使命이 아니므로 角이 없었는데 이때 와서 아울러 角을 허락하였다.註 051위의 두 사료를 통해 볼 때 원래 分道는 서북면의 경우 義州, 朔州, 昌州 등 關門에만 설치된 것으로 하나의 큰 州를 중심으로 하여 주위에 있는 몇 개의 州鎭을 예속시킨 것임을 알 수 있다.註 052 그리고 무신집권 이전에는 병마사기구를 구성하는 文官 출신인 3인의 兵馬判官註 053이 分道員을 맡고 있었고 또한 分道에는 방수장군이 파견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신집권 이후 防戍將軍은 文官으로 임명되던 兵馬判官職을 겸하게 되고 동시에 分道員도 겸임하여 分道將軍이 되었다. 그런데 分道 가운데 義州는 사신과 문서의 왕래가 시작되는 곳이기 때문에 文, 武 2인의 分道員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경비가 과다하게 소요되어 주민에게 그 폐가 컸기 때문에 文官 1인 만을 義州分道로 삼고 나머지 1인의 武官(防戍將軍)은 靜州分道로 삼게 하였다. 그리하여 分道 하나가 새로이 증설되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 전기의 사료에서는 義州, 朔州, 昌州 3개의 분도만이 발견되고 있는 것을 볼 때註 054 靜州는 武臣執灌 이후 의주분도에 임명되었던 2인의 文武官을 나누어 직무를 分掌시키는 과정속에서 새로이 分道가 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그리고 神宗 원년에는 防戍將軍이 겸임한 兵馬判官職이 兵馬副使로 승격되었다. 이는 防戍將軍이 병마판관직을 겸임한 이후 4品의 방수장군과 5, 6品의 병마판관 간의 품계가 서로 일치하지 않던 것을 이때 와서 비로소 일치시킨 것이다. 이처럼 양계 주진에 파견된 武臣출신의 防戍將軍이 종래 文臣들이 독점하던 병마사직을 겸하고 아울러 文官 常參官 이상이 임명되던 分道員까지 겸하게 되는 등 防戍將軍의 기능 강화는 병마사기구의 변화와 함께 무신집권 이후 政治的 支配勢力의 변동과 양계지역의 軍事的 중요성이 점차 커져가는 당시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2) 防戍軍 파견의 중단兩界 州鎭의 군사조직은 토착주민들로 조직된 州鎭軍과 중앙에서 파견된 防戍軍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州鎭軍은 주진의 토착민들로 조직된 군대로서 역시 토착인들로 구성된 州鎭將相將校의 지휘를 받았다. 한편 防戍軍은 남방의 각 주현에서 개경으로 번상하여 中央軍을 구성한 州縣軍 중 일부가 방수장군의 지휘하에 변방으로 파견되어 방수의 임무를 담당한 군인, 즉 州鎭入居軍人이라고도 불리는 군대였다.(文章弼)은 門蔭으로 散員同正에 제배되었다……丙午年(仁宗 4년)……(이자겸 난 때의)……功으로 借隊正이 되었다가 곧 牽龍班으로 동궁을 시위하였다. 또 散員을 加授받고 곧 낭장으로 승진하였다. 庚寅年(毅宗 24년)에……(明宗이 즉위함에) 中郎將이 제수되었다. 그후 수년이 되지 않아 金吾衛 精勇 借將軍兼 御史雜端 □□副使로서 本軍을 거느리고 北邊을 방수하는데 昌州를 나누어 다스렸다.註 055
위의 금석문 자료는 中央軍 중 일부가 방수장군의 지휘하에 변방의 방수에 동원되고 있는 사실을 보여준다. 文章弼은 明宗 初 金吾衛 借將軍으로서 자기 직속의 本軍을 거느리고 북계를 방수하였는데 방수장군으로 昌州分道를 겸하였다. 여기서 本軍이란 本領軍으로도 불리우는 중앙의 2軍 6衛 소속의 장군 휘하의 직속부대를 의미하는 것이다.註 056 위에 보이는 昌州의 방수군은 6위 중 하나인 金吾衛 소속의 중앙군에서 파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금오위 소속의 精勇 6領 가운데 1領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防戍軍은 지방 州縣에서 開京으로 番上하여 2軍 6衛의 中央軍을 구성한 保勝, 精勇의 38領軍 중에서 일부가 교대로 防戌에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防戍軍이 파견된 지역은 양계의 모든 주진이 아니라 일부 특정 주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방수장군이 파견되었던 주진에 역시 방수군이 파견되었을 것이다. 기록상 확인할 수 있는 州鎭은 義州, 朔州, 昌州, 靜州, 麟州, 宣州, 定州 등이다.註 057 이들 州鎭은 대부분 대륙에서 한반도로 통하는 關門에 위치하는 지역으로서 외적 침입시 침략의 입구이며 국방상 최전선에 해당되는 곳이다. 거란이나 몽고의 침입도 바로 이들 州鎭의 공격으로부터 시작되었다.註 058무신집권기 이후 防戍軍과 防戍將軍의 파견이나 활동상을 전하는 기록은 대체로 몽고침입 초기까지 보이고 江華遷都 이후에는 찾을 수 없다. 무신집권 초기인 明宗代에는 방수군이나 방수장군의 파견 사실을 전하는 기록들이 많이 발견된다.註 059 그리고 高宗 초 거란 침입시에도 방수장군의 활동이나 파견을 전하는 기록들이 나타나고註 060 그 후 韓恂, 多智 餘黨의 봉기나 金나라 침입시에도 방수장군의 활동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註 061 그러나 蒙古의 1차 침입시 방수장군이나 방수군의 활동註 062을 마지막으로 이후에는 양계지역에서 방수군에 관한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이는 기록의 미비나 누락 때문이 아니라 양계지역으로 더 이상의 防戍軍 파견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몽고의 1차 침입시 兩界 州鎭의 함락과 海島로의 入保로 국경의 방어체제가 거의 붕괴된 상태였고, 또한 江華遷都 후 對蒙戰術이 지방의 요새를 중심으로 한 방어위주의 淸野戰術로 변화하면서 양계지역으로의 방수군 파견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아울러 武臣執權 이후의 극심한 사회경제적 변화와 계속된 봉기, 戰爭으로 인해 農民層이 급속히 몰락하고 流亡함으로써 軍役 담당층의 고갈을 가져왔고 이에 따라 番上을 위한 軍人徵發이 더욱 어렵게 된 때문이기도 하였다.- 註 036
- 高宗 4년 정월에 大將軍 오수기를 보내 步卒 수천으로 東界를 방수하게 하고 아울러 그 界諸軍을 거느리게 하였다(《高麗史節要》 권15). 이 사료를 통해 東界 防戍將軍은 중앙에서 파견한 防戍軍은 물론 동계의 州鎭軍까지도 지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註 037
- 《文宗實錄》 권4, 즉위년 10월 庚辰 藝文館提學 李先齊 上書.
- 註 038
- 趙仁成, 〈高麗 兩界의 國防體制〉(《高麗軍制史》, 육군본부, 1983).
- 註 039
- 中央軍인 2軍 6衛에 소속된 將軍 이상 上大將軍의 수는 60여 인 정도이다.
- 註 040
- 방수장군이 4품 품계의 將軍職 이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州鎭내 軍의 최고지휘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방수군이 파견된 州를 제외한 작은 규모의 주진에는 장군급 이하의 中郎將이나 郞將 등이 파견되어 이들도 방수장군이라 불리웠을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양계지역에 파견된 병마사이 외에 지병마사나 병마부사도 모두 병마사로 통칭되었던 것처럼. 그러나 대부분의 주진에는 중낭장, 낭장 등 주진 토착의 지휘관이 있었기 때문에 같은 계급의 중앙관이 파견된다면 지휘체계에 혼란이 생길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가정은 성립되기 어려운 것 같다.
- 註 041
- 州鎭軍의 將校를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된다.
- 註 042
- 《高麗史節要》 明宗 4년 9월.
- 註 043
- 《高麗史節要》 明宗 9년 6월·11년 3월, 高宗 6년 10월·10년 5월·18년 8월.
- 註 044
- 《高麗史節要》 明宗 6년 3월, 高宗 9년 정월.
- 註 045
- 《高麗史節要》 高宗 9년 7월·18년 9월.
- 註 046
- 《高麗史節要》 高宗 4년 12월.
- 註 047
- 《高麗史節要》 明宗 11년 3월, 高宗 3년 8월·9월·18년 9월.
- 註 048
- 《高麗史節要》 明宗 11년 3월, 高宗 3년 8월·18년 9월.
- 註 049
- 《高麗史節要》 高宗 4년 2월.
- 註 050
- 《高麗史節要》 明宗 11년 윤 3월.
- 註 051
- 《高麗史節要》 神宗 원년 5월.
- 註 052
- 邊太燮, 〈高麗 兩界의 支配組織〉(《高麗政治制度史硏究》, 일조각, 1971).
小見山春生, 〈高麗前期 兵馬使機構에 관한 一考察〉(《朝鮮史硏究會論文集》 20, 1983).2
- 註 053
- 5, 6품의 常參官 이상이 임명됨.
- 註 054
- 小見山春生, 앞의 논문.
- 註 055
- 《韓國金石文追補》 文章弼 墓誌.
- 註 056
- 《高麗史節要》 高宗 5년 5월.
- 註 057
- 본 논문 2의 1) 참조.
- 註 058
- 6차례에 걸친 몽고 침입의 대부분은 이곳 주진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 註 059
- 《韓國金石追文補》 申甫純 墓誌, 文章弼 墓誌 및 《高麗史》 권100, 陳俊 列傳과 《高麗史節要》 권12, 明宗 11년 3월, 神宗 원년 5월.
- 註 060
- 《高麗史節要》 高宗 3년 8월·9월 大4년 정월·5월.
- 註 061
- 《高麗史節要》 高宗 9년 7월·10년 5월·13년 정월·16년 5월.
- 註 062
- 《高麗史節要》 高宗 18년 8월·9월.
3. 州鎭軍制의 변화
1) 西北面 지역의 蜂起와 州鎭軍武臣執權 이후 서북면지역에서는 趙位寵 亂을 시작으로 한동안 주민들의 봉기가 계속되었다. 조위총 난에 앞서서 昌州, 鐵州, 成州에서 守令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주민이 봉기하였으나 서북면병마사가 이를 제지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註 063 明宗 4년에 일어난 西京留守 조위총의 난은 무신정권에 대한 文臣官僚의 지배체제를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서 기본적으로는 지배계급 내부의 권력쟁탈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여기에는 서경은 물론 安北都 護府 등 자비령 이북의 40餘 城의 주민이 가담하였다. 봉기군의 지휘부는 조위총을 우두머리로 하는 北界 諸城의 都領이었고 주력군은 제성 도령이 지휘하는 州鎭軍組織이었다.상층 지휘부를 구성한 都領 이하 주진군 장교는 中央에서 파견된 조위총과는 달리 이 지방의 토착세력으로서 分道員, 防戍將軍, 防禦使 등 중앙파견의 관리들과 사이에 알력이 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건국초 독자적인 세력기반이 미약하였던 高麗王室은 세력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西京經營에 주력하면서 서경세력을 육성하였다.註 064 그 결과 국초 王權의 정비과정에서 왕권이 위협을 받을 경우 서경세력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역대 國王은 수시로 西京에 행차하면서 서경을 중시하였다. 이처럼 서경세력은 왕실의 보호와 지지에 의해 육성되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하였다.註 065 武臣政變 이후 무신에 의해 政權이 장악되면서 王의 서경 행차가 중단되게 되었는데 이것은 서경세력이 왕실의 보호와 지원으로부터 소외당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 동안 왕실에 의해 육성되었던 서경세력은 당연히 무신정권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註 066그리하여 西京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면지역의 지방세력은 武臣政變 이후 정통성을 갖지 못하는 무신정권에 대해 反政權的인 성향을 띠게 되었고 또한 중앙정부의 통제력 약화를 틈타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註 067 이들 지방세력에 대해 중앙에서는 한편으로 회유하고 한편으로 통제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武臣執權 이후 武人출신의 防戍將軍으로 하여금 兵馬判官과 分道員의 職을 겸하게 한 것은 바로 양계 州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방책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조위총 난 이후 서북면 지역의 계속된 봉기에서 防戍將軍, 分道將軍이 수령과 함께 지방 토착세력의 제1의 공격대상이 되었던 것이다.註 068한편 農民層으로 구성된 하층 州鐵軍註 069의 봉기는 지휘부의 의도와는 달리 反封建抗爭의 성격을 띠었다. 무신정권 성립 후 국가의 과중한 收取와 통제력 이완을 틈탄 지방관들의 불법적인 수탈가중이 농민출신의 하층군인을 봉기에 가담하게 한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특히 양계지역은 南道와 달리 복잡한 支配構造로 되어 있어서 兵馬使, 監倉使, 分道員, 守令 등에 의한 중복수탈이 행해졌다.註 070 또한 이 지역은 使行의 통로였을 뿐만 아니라 西京은 중앙으로부터 고위관리들이 자주 왕래하는 곳이어서 타지역에 비해 더욱 심한 수탈을 당하였던 것이다. 무신정권은 蜂起軍에 대해 여러 차례의 토벌군을 파견하였으나 쉽게 진압하지 못하고 회유와 지휘부에 대한 분열공작을 통해 겨우 진압하였다. 봉기가 진압된 후 국가는 이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지방세력에 대해서 타협하고 회유하는 이중정책을 실시하였다.먼저 西京에 대한 中央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서경의 官制를 개편하였다. 副留守, 判官 등 西京留守官職에 임명되는 관원의 品階를 올리고註 071 또 西京人에 대한 감시를 위해 錄事 4人 중 2人과 6曹의 史 2人 중 1人은 반드시 上京人으로 임명하게 하였다.註 072 또한 官制의 개편과 함께 서경의 경제기반이 되는 西京食祿米를 개정하여 서경의 경제기반을 약화시켰다. 종래 서경 大倉에서 받아들이던 稅粮 중에 서경에 필요한 최소한의 경비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上京倉으로 移納하게 하였다.註 073 이 밖에도 廳舍와 公須田도 개정하였는데註 074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대체로 이전에 비해 축소 조정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조치들은 中央政府의 서경에 대한 통제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 결과 西京의 독립성은 약화되고 반면 중앙에 대한 예속성이 크게 강화되었다.註 075서경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 강화와 함께 한편으로 이 지역의 토착세력들에 대한 회유정책을 실시하였다. 즉 항복한 봉기군의 우두머리들에게 官職을 제수하기도 하고註 076 王이 동서 양계 諸城의 上戶長과 都領을 친히 불러 물품을 하사하기도 하였다.註 077 당시 정부의 힘으로는 이 지역 토착세력에 대한 완전한 제압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므로 이러한 회유정책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註 078봉기 실패 후 서경을 중심으로 한 서북면지역은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나 국가의 회유와 타협정책에 의해 지방세력과 봉기에 가담했던 州鎭軍의 軍事力은 상당 정도 보존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註 079 특히 봉기군의 主力軍이 주민들로 구성된 주진군 조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북면은 국경지역이라는 군사적 특성 때문에 國防力의 약화를 우려하여 정부는 봉기세력에 대해 강경한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註 080 그리하여 이후에도 서북면지역에서 거란의 침입을 격퇴하고 또 몽고침입시에 강하게 저항할 수 있었던 주진군의 군사력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2) 對蒙戰爭과 州鎭軍 조직의 붕괴앞에서 본 것처럼 州鎭軍組織이 가담한 서북면지역에서의 계속된 봉기에도 불구하고 蒙古 침략 이전까지 주진군조직은 대체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몽고의 침략으로 州鎭의 대부분이 함락당하거나 항복함으로써 州鎭軍조직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몽고의 1차 침입시 가장 치열한 전투지역이었던 北界지역의 피해가 심하여 주진군조직의 결정적인 붕괴를 가져왔다. 高宗 18년 몽고의 1차 침입시 북계의 주진은 龜州, 慈州 등 몇 개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몽고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몽고의 1차 침입시 기록에 나타나는 주진의 피해상황은 다음과 같다.○ 咸新鎭(義州);고려 국경의 관문으로서 高宗 8년 반역하였다는 이유로 함신이라 불렀는데 몽고군은 이곳을 통해 침입하였다.註 081 당시 防戍將軍으로 守城의 책임을 맡고 있던 趙叔昌은 義州副使 전간과 함께 별 저항없이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註 082 이로써 義州의 주진군 조직은 몽고군에 의해 해체당하고 나아가 몽고의 以夷制夷 정책에 따라 北界 諸城 공격에 이용당하였다.
○ 麟州;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북계의 대표적인 鎭城으로서 都領이었던 洪福源이 編民 1,500戶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이로써 홍복원 휘하에 있던 인주 주진군 병력의 거의 전부가 전쟁초기에 적에게 넘어가게 되었다.註 083
○ 鐵州城 ; 의주를 거쳐 내려온 몽고군은 함신진에서 이미 항복한 고려의 관원과 주민을 이용하여 철주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鐵州防禦使 李元楨, 判官 李希勣의 지휘하에 철주성에 입보한 철주민은 몽고 정예군에 보름간 저항하다 식량이 다하고 구원의 희망이 없자 처자들을 죽이고 자결함으로써 함락되었다.註 084 철주성은 成宗代 강동 6주의 하나로 고려영토에 편입된 후 현종대에 방어설비가 완성되었다.註 085 오랜 저항 후 함락된 철주성은 저항에 대한 보복으로 철저하게 유린당했으며 그 결과 철주의 주진군 조직은 완전히 붕괴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昌州;高宗 18년 몽고군의 침략으로 城邑이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註 086
○ 靜州;고종 18년 9월 몽고군이 철주를 함락한 후 정주를 침략하자 靜州分道將軍 金慶孫이 결사대 12명을 거느리고 귀주로 도망하였다.註 087
○ 朔州;고종 18년 9월 몽고군이 철주를 함락시킨 후 靜州를 침범하자 朔州分道將軍 金仲溫도 城을 버리고 龜州로 모였다.註 088
○ 龍州 ; 고종 18년 9월 몽고군이 용주를 포위하니 항복을 청해 龍州副使 위소가 생포당하였다.註 089
○ 宣州 ; 郭州;모두 고종 18년 9월에 함락당하였다.註 090
○ 平州;고종 18년 11월 평주에서 몽고 첩자를 가두자 몽고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州官을 죽이고 城을 도륙하였다.註 091
○ 安北都護府;중앙에서 파견된 3軍으로 편성된 防禦軍이 안북부에 入城하여 살례탑의 몽고군을 맞아 싸우다가 대패하였다.註 092이 밖에 寧德鎭·瑞昌鎭·定從鎭·寧朔鎭·定義鎭·嘉州·博州·謂州·泰州·雲州 등 몽고군이 거쳐간 주진도 모두 몽고군에 의해 유린당하거나 함락당하였다.註 093 이처럼 몽고의 1차 침입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지역인 북계지역에서는 주진의 거의 대부분이 함락당하였고 이로써 주진군 조직은 결정적인 피해를 입었다. 뿐만 아니라 和議 성립註 094 후에는 王京과 北界 諸城에 達魯花赤가 설치되고註 095 探馬赤軍이 파견되어註 096 북계의 40여 성이 몽고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註 097 또 고종 19년 3월에는 몽고의 요구에 따라 西京 都領과 前靜 州副使로 하여금 배 30척과 水手 3천을 거느리고 몽고에 가게 하였다.註 098 이에 따라 고려의 국경 방어선인 주진군 조직은 그대로 유지 될 수 없었고 이후 더 이상의 항전이 불가능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註 099이처럼 몽고군의 침략으로 대부분의 州鎭이 함락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海島나 山城으로 入保하거나 남쪽으로 이사하였다. 당시 崔氏 政權은 몽고군에 대한 대응전략으로 산성이나 해도로의 入保策을 실시하였는데 이러한 입보책은 몽고의 1차 침입시부터 북계지역에서 이미 광범하게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또 그 과정에서 주진군 조직의 바탕이 되는 주민들이 유리하였고, 또 빈번하게 주진간의 併屬이 이루어짐으로써 기존의 주진군 조직은 유지될 수 없었다. 몽고의 1차 침입당시 양계 주진의 海島入保와 州鎭간의 併屬상황은 다음과 같다.註 100○ 宣州;高宗 18년 몽고병을 피해 紫燕島에 들어 갔다가 元宗 2년에 출륙하였다.
○ 雲州;고종 18년 몽고병을 피해 해도에 들어갔다. 원종 2년에 출륙하여 嘉山 西村에 寓居하면서 延山府에 예속되었다가 恭愍王 20년에 郡이 되었다.
○ 博州;고종 18년에 몽고병을 피해 해도에 들어갔다. 원종 2년에 출륙하여 嘉州에 속하였다가 공민왕 20년에 郡號를 회복하였다.
○ 嘉州;고종 18년에 몽고병을 피해 해도에 들어갔다. 원종 2년에 출륙하여 泰州, 博州, 撫州, 渭州 등을 모두 本郡에 소속시켜 5城을 겸관하였다. 뒤에 태주, 무주, 위주 3주는 따로 설치하고 오직 박주만 그대로 소속시켰다가 공민왕 20년에 박주도 따로 설치하였다.
○ 郭州;고종 18년 몽고군을 피해 해도로 들어갔다. 원종 2년 출륙하여 隨州에 예속되었다가 공민왕 21년에 郡號를 회복하였다.
○ 孟州;고종 18년 몽고군을 피해 해도에 들어갔다가 고종 44년에 殷州에 병합되었다. 원종 2년에 출륙하여 安州 속현이 되었다가 공양왕 3년에 따로 縣令을 두었다.
○ 德州;원종 원년에 몽고군을 피해 安州의 蘆島에 들어간 후 5번이나 옮겼다. 忠烈王 6년에 옛 땅을 회복하여 成州에 소속되었다가 공민왕 20년에 나누어 知州事가 되었다.
○ 撫州;고종 18년 몽고군을 피해 해도에 들어갔다. 원종 2년 출륙하여 옛 渭主城에 있으면서 嘉州에 속하였다가 恭愍王 18년에 泰州에 이속되었다. 恭讓王 3년에 따로 감무를 두었다.
○ 泰州;고종 18년 몽고군을 피해 해도로 들어갔다가 원종 2년 출륙하여 嘉州에 소속되었다. 공민왕 15년에 撫州, 渭州를 본군에 소속시켜 知泰州事를 삼았다가 禑王 7년에 나누어서 무주, 위주 2주를 설치하였다.
○ 殷州;고종 18년 몽고군을 피해 해도로 들어갔다. 후에 출륙하여 成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恭讓王 3년에 監務를 두었다.
○ 隨州;고종 18년 昌州가 함락될 때 주민이 紫燕島로 들어갔다가 원종 2년 출륙하여 郭州 해변에 寓居하였다. 昌州 주민이 땅을 상실했으므로 郭州 동쪽 16村과 郭州 소속 安義鎭을 떼어 주어 知隨州事라 칭하고 그대로 곽주를 겸임하게 했는데 恭愍王 20년에 다시 나누어서 따로 郭州를 설치하였다.
○ 昌州;고종 18년 몽고군의 침략으로 城邑이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 州人은 남쪽 仁州 소속의 紫燕島로 입보하고 고종 37년에 서해도 安岳縣으로 內徙하였으며註 101 그후 다시 海島로 피난하였다가 元宗 2년에 出陸하였다 출륙 후에도 原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郭州 해안에 寓居하다가 知隨州事라 칭하고 郭州를 겸하였다.
○ 咸新鎭;항복했던 咸新鎭副使 전간이 고종 18년 10월에 吏民을 거느리고 保新島로 入保하였다.註 102
○ 安邊都護府;고종때에 定平 이남의 諸城이 몽고의 침입으로 江陵道 襄州로 옮겼다가 다시 杆城으로 옮겼다. 거의 40년이나 있다가 충렬왕 24년에 각기 本城으로 돌아왔다.이처럼 몽고군의 침략으로 양계 주진이 함락당하거나 海島로 入保하였고, 출륙후에는 주진간에 併屬이 이루어짐으로써 양계의 주진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지 못하였다. 또한 주진체제가 붕괴됨으로써 그에 기반을 두었던 주진군조직도 붕괴되지 않을 수 없었다. 1차 침입 이후 몽고군이 양계지역, 특히 북계지역에서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비교적 단기간에 걸쳐 남부지역 깊이까지 침투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양계지역의 주진군 조직이 붕괴한 때문이었다.2차 침입 이후부터 양계 주진에서의 전투상황을 전하는 기록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는 기록의 미비나 누락이라기보다 1차 침입시 양계지역 주진군 조직의 대부분이 저항 불가능의 상태로 파괴되어 양군간에 전투다운 전투가 치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3차 침입 직전 양계 주진의 상황을 보면 義州, 靜州의 경우 인물이 소모되고 주민이 섬으로 옮겨 농사를 짓지 못하니 관리를 둘 필요가 없어서 靜州 副使로 하여금 의주를 겸해 다스리게 하는 형편이었다.註 103 한편 西京에서는 고종 20년 5월에 畢賢甫, 洪福源이 중앙에서 파견한 宣諭使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註 104 麟州 都領이었던 홍복원은 몽고의 1차 침입시 編民 1,500戶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는데 이후 몽고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몽고세력을 등에 업고 북계지역에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였다.註 105 한편 畢賢甫는 서경에 세력기반을 가진 將校로서 홍복원과 연결하여 서경에서 자신의 세력확대를 꾀했던 인물로 추측되고 있다.註 106 이들의 반란에 대해 崔氏政權은 강경하게 대응을 하였다. 崔瑀는 家兵 3천을 보내 북계병마사 민희와 함께 이들을 토벌하게 하여 필현보는 사로잡고 홍복원은 몽고로 도망하였다.註 107 또한 홍복원의 일가를 사로잡고 나머지 주민은 해도로 옮겼다. 그리하여 서경은 고종 39년 10월 다시 서경유수관이 설치될 때까지 폐허로 남게 되었다.註 108 이 반란의 결과 西京留守官이 폐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西京軍組織도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결과 3차 침입시 몽고군은 열흘 정도의 짧은 기간에 북계 諸城을 점령하면서 西海道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註 1093차 침략군이 철수하는 고종 26년 이후 34년의 4차 침략까지는 8년간의 휴지기가 존재하는데 이 기간동안 고려정부는 양계지역에서의 대비책을 전혀 마련하지 않고 있다. 다만 고종 30년 2월 각 道에 巡問使가 파견되고, 또 방어태세를 갖추기 위해 37인의 山城勸農別監이 파견되었을 뿐이다.註 110 그러나 산성권농별감은 순문사의 건의로 곧 혁파되고 말았다.註 111 또한 8년간의 휴지기가 지나고 고종 34년에 몽고의 4차 침략이 시작되기에 앞서 고려정부는 三南지방에만 鎭撫使를 파견하여 침략에 대비하였다.註 112 그리하여 몽고침략이 재개되었을 때 兩界 州鎭에서는 몽고군에 대항해 저항다운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海島로 入保하는 상황이었다.註 113 이러한 사실은 이제 더 이상 양계 주진이 몽고침략에 대한 방어진지로서의 의미가 없어졌음을 뜻하는 것이라 생각된다.4차 침입 이후 고종 37년을 전후해서 北界의 여러 州鎭이 남방의 西京畿와 西海道로 집단적으로 이사를 하였는데 이는 더 이상 자체적으로 주진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註 114 고종 38년 정월에 江華에 온 蒙古 使臣이 나라의 北邊이 심하게 파괴되어 울타리가 없는 것 같다註 115라고 한 것은 당시 북계지역의 피폐상황을 잘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5차 침입 이후가 되면 양계지역에는 別抄軍의 활동 이 외에 州鎭軍이나 防戍軍의 활동은 전혀 보이지 않게 된다. 이것은 몽고의 침입시마다 공격목표가 되었고 남부지방에 비해 몽고군의 활동이나 주둔기간도 길었던 양계의 주진군조직이 완전히 붕괴되어 더 이상의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후 양계지역은 元의 직접 지배하로 들어가게 되었고 恭愍王代 고려에서 원 세력이 완전히 물러날 때까지 양계지역에서 이전의 州鎭軍과 같은 군사조직은 재건되지 못하였다.- 註 063
- 《高麗史節耍》 明宗 2년 6월.
- 註 064
- 河炫綱, 〈第 2 篇 4. 高麗時代의 西京〉(《韓國中世史硏究》, 일조각, 1988).
- 註 065
- 河炫綱, 위의 책.
- 註 066
- 河炫綱, 위의 책.
- 註 067
- 金南奎, 〈明宗代 兩界 都領의 性格과 活動〉(《高麗兩界地方史硏究》, 새문사, 1989).
- 註 068
- 明宗 6년 3월에도 麟州人들이 防戍將軍과 義州分道, 防禦判官을 죽이고 조위총에게 호응한 일이 있었다(《고려사절요》 명종 6년 3월).
- 註 069
- 兩界지역은 변경이라는 지역적 특성상 주민의 대부분이 州鎭軍 조직에 편입되어 行政的·軍事的으로 통제를 받았고 따라서 양계지역에서의 주민봉기는 대부분 주진군조직과 연결되어 있었다.
- 註 070
- 高宗 6년 10월에 義州別將 韓恂, 郎將 多智 등이 防戍將軍과 守令을 죽이고 봉기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중앙에서 파견된 宣諭使가 봉기의 원인을 邊城 守臣들의 탐학 때문이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대해 崔瑀는 分道, 分臺, 監倉使 등을 귀양시키거나 좌천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당시 이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의 원인을 짐작할 수 있겠다(《高麗史節要》 明宗 6년 10월·7년 정월조 참조).
- 註 071
- 副留守는 종래의 4品 이상에서 正3品으로, 判官은 6品 이상에서 5, 6品으로 品階를 높였다(《高麗史》 권77, 百官 3 西京留守官).
- 註 072
- 《高麗史》 권77, 百官志 2 外職 西京留守官.
- 註 073
- 《高麗史》 권80, 食貨 3 西京官祿.
- 註 074
- 《高麗史節要》 明宗 8년 4월, 《高麗史》 권78, 食貨 1 田制 공해전시.
- 註 075
- 河炫綱, 앞의 논문.
- 註 076
- 《高麗史節要》 明宗 8년 10월.
- 註 077
- 《高麗史節要》 明宗 8년 11월.
- 註 078
- 《高麗史節要》 明宗 7년 12월·8년 11 월조 참조.
- 註 079
- 金南奎, 〈武臣執權期 兩界 地方勢力의 政治的 動向〉(《高麗兩界地方史硏究》, 새문사, 1989).
- 註 080
- 김남규, 위의 논문.
- 註 081
- 《高麗史》 권56, 志 12 地理 3.
- 註 082
- 《高麗史節要》 高宗 18년 8월, 《高麗史》 권130, 趙叔昌 列傳.
- 註 083
- 周采爀, 〈洪福源 一家와 麗元關係〉(《史學硏究》 24, 1974).
- 註 084
- 《高麗史節要》 高宗 18년 8월, 《高麗史》 권121, 文大 列傳.
- 註 085
- 《高麗史》 兵志 州縣軍條에 의하면 鐵州城의 병력은 中郞將 1인, 郞將 1인, 別將 4인, 校尉 16인, 隊正 32인, 行軍 870명, 白丁 62隊로 구성되어 있었다(《高麗史》 兵 3 州縣軍).
- 註 086
- 《高麗史》 권56, 志 12 地理 3.
- 註 087
- 《高麗史節耍》 高宗 18년 9월.
- 註 088
- 《高麗史節要》 高宗 18년 9월.
- 註 089
- 《高麗史節要》 高宗 18년 9월.
- 註 090
- 《高麗史節要》 高宗 18년 9월.
- 註 091
- 《高麗史節要》 高宗 18년 11월.
- 註 092
- 《高麗史》 권18, 高宗 18년 10월, 《高麗史節要》 高宗 18년 10월.
- 註 093
- 尹龍爀, 〈2. 蒙古의 高麗 來侵〉(《高麗對蒙抗爭史硏究》, 일지사, 1991).
- 註 094
- 高宗 19년 정월 고려의 항복으로 몽고군이 철수함(《高麗史節耍》 高宗 19년 정월).
- 註 095
- 《高麗史節要》 高宗 19년 5월, 《元高麗紀事》 太宗 4년.
- 註 096
- 《新元史》 권132, 札刺亦兒台豁兒赤 列傳.
- 註 097
- 周采赫, 〈初期 麗元戰爭과 北界 40餘城 問題〉(《사학회지》 16, 1970).
《元史》 2, 本紀 太宗 3년 8월.
- 註 098
- 《高麗史節要》 高宗 19년 3월.
- 註 099
- 尹龍爀, 〈2. 蒙古의 高麗 來侵〉(《高麗對蒙抗爭史硏究》, 일지사, 1991).
- 註 100
- 《高麗史》 地理志에 의거해 작성.
- 註 101
- 《高麗史》 世家 高宗 37년 2월.
- 註 102
- 《高麗史節耍》 高宗 18년 10월.
- 註 103
- 《高麗史節要》 高宗 22년 3월.
- 註 104
- 《高麗史節要》 高宗 20년 5월.
- 註 105
- 周采赫, 〈洪福源 一家와 麗元關係〉(《史學硏究》 24, 1974).
- 註 106
- 尹龍爀, 〈蒙古의 高麗 來侵〉(《高麗對蒙抗爭史硏究》, 일지사, 1991).
- 註 107
- 《高麗史節要》 高宗 20년 12월.
- 註 108
- 《高麗史節要》 高宗 20년 12월·39년 10월조 참조.
- 註 109
- 尹龍爀, 〈蒙古의 高麗 來侵〉(《高麗對蒙抗爭史硏究》, 일지사, 1991).
- 註 110
- 《高麗史》 권79, 食貨 2 農桑.
- 註 111
- 《高麗史節要》 高宗 30년 2월.
- 註 112
- “丁未春 國家因胡寇備禦 以三品官爲鎭撫使 分遣三方……崔滋” 《補閑集》 권下).
- 註 113
- 《高麗史節要》 高宗 34년 7월·35년 3월.
- 註 114
- 《高麗史節耍》 高宗 37년 3월.
- 註 115
- 《高麗史》 권24, 世家 高宗 39년 7월 戊戌條.
Ⅲ. 南道 州縣軍制의 변화
북방의 양계지역 이 외의 남부의 5道와 京畿지역에는 州縣軍이 조직되었다. 《고려사》병지 주현군조에 의하면 주현군의 兵種은 保勝, 精勇, 一品軍으로 구분되어 있다.註 116 보승, 정용, 1품군 이 외에 2·3품군의 존재도 확인된다.註 117 국가에서는 지방관이 파견된 軍目道註 118 단위로 주현군을 파악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軍目道 관하의 모든 屬縣에도 주현군이 조직되고 있었다.註 119州縣軍은 기본적으로는 農民層을 모체로 하여 주현의 戶籍에 등재되어 있는 百姓 중 丁男이 징발되어 조직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徵發時 年齡이나 身體條件, 戶等의 高下註 120 등이 징발기준이 되었고, 또한 이 기준에 따라 保勝, 精勇, 1·2·3品軍 등의 兵種도 구분되었을 것이다. 開京으로의 番上이나 변방의 방수에 동원되는 보승, 정용군이 비교적 좋은 조건에 있었고 그에 비해 1품군이나 중앙의 파악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는 2·3품군이 보다 열악한 조건에 처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징발대상에는 鄕吏층도 있었으나 이들은 職의 고하에 따라 一品軍 장교를 겸하여 주현군의 지휘관이 되었고註 121 일반군인으로 選軍되는 경우에는 대부분 開京으로 올라가 職業軍人註 122이 되거나 지방군 장교로 승진하였다.註 123주현군의 임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수도 開京으로의 番上註 124과 변방의 防戍註 125였는데 이 임무는 주현군 소속의 保勝과 精勇이 담당하였다. 다음 주현군 임무의 하나는 지역의 방위와 치안유지로서 주현군은 지방관아, 창고, 성곽 등의 경비와 질서유지를 위한 순찰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러한 임무는 非番의 주현군 중 일부가 교대로 州縣에 番上하여 수행하였을 것이다.註 126 《高麗史》 兵志 州縣軍條에 기록된 南道지역의 軍目道 단위 군인의 수는 지방의 방위와 치안유지를 위해 주현으로 번상한 군인의 군액이라 생각된다. 주현군 임무의 또 하나는 외적의 방어나 농민봉기의 진압을 위해 동원되는 것이었다. 이때는 保勝, 精勇만이 아니라 1·2·3品軍도 포함한 대부분의 주현군이 동원되었고 특히 대규모 출정시에는 군인이 아닌 일반민까지도 동원대상이 되었을 것이다.註 127 또 하나 주현군의 임무는 중앙이나 지방의 勞役에 동원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는 노역의 전담부대로서 一品軍이 있었으나 보승, 정용군도 평시에는 군사적인 노역에 많이 동원되었다.註 128 그리고 農閑期인 겨울철에는 군사훈련을 받았다.註 129將校를 포함한 전문적인 職業軍人은 職役에 대한 댓가로 국가로부터 田柴科에 의한 土地를 지급받았지만 義務兵인 州縣軍은 토지를 지급받지 못하였다. 다만 開京으로의 番上이나 兩界 防戍에 동원되는 기간 중에 한 해 국가가 養戶(佃戶)를 지급하여 이들로 하여금 軍人田註 130의 경작을 대신하게 하였다.註 131 한편 유사시 非番의 군인이 임시로 役에 동원되는 경우는 그 기간에 따라 農民으로서의 부담註 132 중 일부 또는 전부를 면제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註 133이러한 州縣軍制는 거란이나 몽고와의 전쟁이 본격화되기 이전까지는 대체로 前期의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 주현군조직은 무너지기 시작하여 그 존재는 점차 기록에 보이지 않게 되고 몽고와의 전쟁후기가 되면 別抄軍이라는 새로운 군사조직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면 무신집권기 주현군제의 변화를 거란과 몽고와의 전쟁을 전후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註 116
- 《高麗史》 권83, 兵志 3 州縣軍條.
- 註 117
- “文宗卽位年判 凡軍人有七十以上父母 而無兄弟者 京軍則屬監門 外軍則村留二三品軍 親沒後還屬本役”(《高麗史》 兵志 1 兵制).
- 註 118
- 軍事道, 下部道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 註 119
- 李基白, 〈高麗 州縣軍考〉(《歷史學報》 29, 1965).
- 註 120
- 戶等의 구분은 戶內의 丁數만이 아니라 經濟力도 중요한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경제력의 경우 일정규모 이상의 土地, 즉 17結 정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농민이 우선적으로 徵發되었고 부득이한 경우 그 이하의 토지소유자도 徵發對象이 되었다. 그리하여 토지소유 규모의 차이에 따라 足丁, 半丁 등의 구분이 생기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註 121
- 諸州 一品軍의 別將은 副戶長 이상, 校尉는 兵正·戶正·食祿正·公須正, 隊正은 副兵正·副倉正·副戶正·諸壇正을 弓科로 試選하여 差充한다(《高麗史》 권81, 兵 1 兵制 文宗 23년 判).
- 註 122
- 職業軍人이란 2軍 6衛의 中央軍 중 지방에서 番上하는 保勝, 精勇을 제외한 나머지 軍人과 將校를 가리킨다. 고려전기의 中央軍인 2軍 6衛는 국왕과 왕실을 호위하고 또 수도 開京의 수비와 出征, 防戍 등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2軍 6衛 가운데 2軍을 國王의 친위부대, 6衛를 수도 개경의 시위부대로 이해하였다. 또한 2軍 6衛를 구성하는 장교 이 외의 下級軍人層의 사회적 성격을 일률적으로 農民層 또는 전문적인 軍人層으로 이해하였다. 이른바 府兵制(兵農一致制)의 관점에서는 군인층의 사회적 신분을 농민으로, 軍班制의 관점에서는 官僚制의 하위에 위치하는 전문적 군인층인 軍班氏族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최근의 연구에 의해 비판되면서 새로운 견해들이 제시하고 있다. 먼저 2軍 6衛를 구성하는 軍人의 사회적 성격을 일원적으로 農民層 또는 軍班氏族層으로 파악하는 것에 반대하고 두개의 서로 다른 계층으로 구성되었다고 본다. 즉 2軍을 군반씨족층인 專門軍人으로, 6衛를 일반 農民層으로 보던가(洪元基, 〈2軍 6衛制의 性格〉《韓國史硏究》 68, 1990) 아니면 2軍 6衛 중 2軍과 6衛 내의 監門衛軍·金吾衛의 役領, 千牛衛의 海領·常領 등은 兩班層과 軍班氏族層으로, 나머지를 農民層으로 보는 것이다(吳英善, 〈高麗前期 軍人層의 二元的 構成에 관한 연구〉, 1991, 서울대 석사논문). 필자도 기본적으로는 새로운 견해에 동의한다. 즉 2軍 6衛의 중앙군은 農民層을 기반으로 강제징발되어 번상하는 義務兵(保勝, 精勇)과 將校層을 포함하여 選軍된 일부의 전문적인 職業軍人으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한다.
- 註 123
- 毅宗, 明宗代 인물인 宋子淸의 예를 보면 처음에 安北都護府(寧州)의 鄕吏로 州鎭軍(精勇)에 選軍되고 이후 주진군 將校로 승진하여 안북도호부 都領이 되었다가 趙位寵 亂 때 공을 세워 중앙군의 將軍으로 승진하였다 (《朝鮮金石總覽》上, 宋將軍 墓誌 및 《高麗史節要》 明宗 5년 8월조 참조).
- 註 124
- 州縣軍의 番上에 대해 府兵制의 입장에서는 주현군의 개경으로의 교대 번상을 인정하고 있다(末松保和, 〈高麗의 42都府에 대하여〉《朝鮮學報》 14, 1959, 姜晋哲, 〈高麗 初期의 軍人田〉《淑明女大論文集》 3, 1963, 李佑成, 〈高麗의 永業田〉《歷史學報》 28, 1965). 반면에 軍班制의 입장에서는 주현군 중의 保勝, 精勇은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지휘계통 속에 놓여 있었고, 또 중앙군의 편제상에 존재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하면서도 이들의 번상은 인정하지 않는다(李基白, 〈高麗 州縣軍考〉《歷史學報》 29, 1965). 한편 같은 軍班制의 입장에 있으면서 中央軍을 구성하는 保勝, 精勇은 주현군 중의 保勝, 精勇이 番上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金塘澤, 〈高麗 初期 地方軍의 形成과 構造〉《高麗軍制史》 陸軍本部, 1983). 필자는 州縣軍의 番上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논지를 전개하고자 한다.
- 註 125
- 본논문 Ⅱ. 兩界 州鎭의 軍制변화 참조.
- 註 126
- 唐代 府兵制의 경우 府兵의 임무는 都城과 邊方으로 番上, 즉 禁衛上番과 邊方防戍가 있었고 이외에 州縣에 번상하는 州上이 있었다. 州上한 부병의 役의 내용은 성문이나 창고 등의 경비와 軍坊, 馬坊, 長行坊, 館驛 등의 근무였는데(菊池英夫, 〈府兵制度의 전개〉 《世界歴史》 5, 1970) 고려시대 주현군도 唐 府兵의 州上에 해당되는 임무를 수행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 註 127
- 唐의 府兵制 하에서도 대규모 출정시에 부변만으로 출정군 편성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18세 이상의 中男까지도 모두 徵發대상이 되었다(菊池英夫, 〈府兵制度의 전개〉 《世界歷史》 5, 1970).
- 註 128
- 李基白, 〈高麗 州縣軍考〉(《歷史學報》 29, 1965;《高麗兵制史硏究》, 1968).
- 註 129
- “都兵馬使准舊制淸 以九月遣使 訓練中外軍士 從之”(《高麗史》 兵志 1, 兵制 文宗 9년 9월).
- 註 130
- 여기서 軍人田이란 중앙의 직업군인이 田柴科 규정에 의해 국가로부터 지급받은 토지가 아니라 義務兵으로 강제 징발된 일반군인이 農民으로서 본래 所有, 耕作하고 있던 土地를 말한다. 국가가 농민을 의무병으로 徵發할 때 징발기준의 하나로 경제력을 고려하였고 經濟力외 기준은 주로 土地가 되었을 것이다. 이른바 足丁이라 일컬어지는 17結 정도 규모의 토지가 군인선발의 기준이 되었고,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농민들이 많은 곳에서는 그 半 정도의 토지소유자까지도 징발대상이 되어 이들은 半丁이라 불리웠던 것 같다
- 註 131
- 《高麗史》 권79, 食貨 2 農桑 睿宗 3년 2월 制, 《高麗史》 권81, 兵 1 兵制 文宗 27년 3월.
- 註 132
- 田租·貢物·搖役 등을 의미한다.
- 註 133
- “詔 諸州縣兵築城者 水軍轉輸軍餉者 賜今年田租之半”(《高麗史》 권80, 食貨 3 賑恤 恩免之制 仁宗 14년 5월).
1. 武臣執權 초기(高宗 이전)
이 시기 주현군은 무신집권 이전과 다름없이 기존의 조직을 유지하면서 주현군 본래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즉 조직이나 활동에 별다른 변동이 나타나지 않는다. 무신집권 초기에는 외적의 침입이 없었던 관계로 주현군은 노역이나 봉기의 진압에 주로 동원되었다. 그러면 기록을 통해 주현군의 활동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이 시기 가장 많이 보이는 주현군의 활등은 勢役에의 동원이다.① ……우리의 聖上(明宗)이 즉위하여 亂跡을 제거하고 여러가지 법도를 정돈하며 오로지 善政을 새롭게 함에 이르러 (先覺)國師의 法孫인 雲巖寺 住持 重大師 志文이란 자가 (碑 세우는 일)을 大史氏에게 아뢰어 마침내 왕의 허락을 얻었다. 光陽縣의 貢舡을 불러 그 돌을 싣고 玉龍寺로 운반하였다. 왕은 이에 內侍 양온서승 朴逢均을 보내어 그 일을 맡기고 大史 설호정 李陽靖에게 그 땅을 살펴보게 하였다. 石工은 華嚴寺 승려들을 부르고 役夫는 光陽, 求禮 2縣의 軍人을 징발하였다. 監務員 將仕郞 衛尉主簿 韓彥邦과 장사랑 위위주부 강립서가 그 役事를 감독하고 주지 지문이 실제로 그 일을 총괄하였다. 며칠 되지 않아 일을 마쳤는데 堂이 3間이 되었다. 大定 12년(명종 2년) 壬辰 10월 19일에 비를 세웠다.註 134
② 처음에 全州 司錄 陳大有가 자못 청렴한 것을 자부하여 형벌 사용이 심히 혹독하니 백성들이 이를 몹시 고통스럽게 여겼다. 국가에서 精勇, 保勝軍을 보내어 官船을 제조하게 하니 대유와 상호장 이택민 등이 일을 독촉함이 심히 가혹하였다. 이에 旗頭 竹同 등 6인이 亂을 일으켜 官奴와 不逕者들을 불러모아 대유를 山寺로 내쫓고 택민 등 10여 家를 불태우니 吏가 모두 도망가 숨었다. 判官 고효승을 위협하여 州吏를 바꾸게 하니 효승은 단지 인장을 줄 뿐이었다. 안찰사 박유보가 州에 들어오자 적은 兵伍를 성대히 베풀고 대유의 불법을 열거하여 호소하니 안찰사는 부득이 대유를 칼씌워 서울로 보내고 화복으로 적들을 효유했으나 듣지 않자 이에 道內兵을 모두 발하여 토벌하였다.註 135
③ 외방 役軍을 나누어 3番으로 하였다. 舊制에 諸州 1品軍은 2번으로 나누어 가을에 교대하여 순환하였는데 근래에 營造 때문에 합쳐서 사역하다가 지금 나누었다.註 136①은 明宗 2년 光陽縣에 있는 玉龍寺에 先覺國師碑를 세운 사실을 전하는 기록이다. 원래 명종 이전에 崔惟淸 등이 선각국사의 비를 세우려 하였으나 이 일을 추진하던 인물들이 유배를 당하거나 관직에서 쫓겨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후 明宗이 즉위하면서 선각국사의 法孫인 志文이 왕의 허락을 얻어 다시 일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동안 國淸寺에 방치되어 있던 碑 세울 돌을 운반하기 위해 광양의 貢舡이 동원되었고, 광양과 구례 2현의 군인들이 役夫로 징발되었다. 광양은 昇平郡의 속현이고 구례는 南原府의 속현으로 이 두 縣은 각기 서로 다른 軍目道에 속해 있다. 보통 전투에 동원되는 주현군의 지휘를 중앙 파견의 관리나 안찰사가 맡는 것과는 달리 여기서 군인들을 감독한 것이 監務註 137인 것으로 보아 역부로 징발된 광양과 구례의 군인들은 주현군 가운데 노동부대인 一品軍이었을 가능성이 크다.註 138②는 국가에서 保勝, 精勇을 관선제조에 동원하고 있는 기록이다. 이때 중앙 파견의 관리가 아닌 司錄과 上戶長이 사역을 감독하고 있어 동원된 보승, 정용군은 全州界內의 주현군註 139이었다고 생각한다. ③은 주현군 중 一品軍이 노동부대로서 교대로 노역에 사역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一品軍은 役軍으로도 불리웠던 것이다. 이처럼 무신집권 초기에도 지방의 주현군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中央 또는 地方의 勞役에 역부로 징발되어 사역되었다. 戰時가 아닌 평시의 경우 주현군은 군사적인 활동보다는 노역에 더 많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농민으로서의 주현군은 非番時에는 徭役의 형태로, 番上時에는 軍役의 형태로 勞役에 동원되었던 것이다.다음으로 이 시기 주현군 활동의 하나는 지방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던 농민봉기의 진압을 위해 동원되는 것이었다. 대체로 대규모 반란이나 봉기의 경우는 대부분 중앙에서 토벌군이 편성되어 파견되고 소규모 봉기에 대해서는 지방의 주현군이 동원되고 있다. 明宗 4년에 일어난 趙位寵 亂 때에는 중앙에서 3軍을 편성하여 파견하였고 明宗 3년의 亡伊, 亡所伊 봉기 때에는 중앙에서 壯士 3천을 불러 모아 대장군, 장군 등에게 명해 토벌하게 하였다.註 140 또한 明宗 7년 이후 계속된 趙位寵 餘衆의 봉기 때에도 중앙에서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이처럼 규모가 큰 봉기의 경우는 대부분 중앙에서 토벌군이 조직되어 파견되었다.그러나 작은 규모의 봉기가 일어나거나 여러 곳에서 동시에 발생하여 중앙에서의 토벌군 파견이 어려울 때는 州縣軍을 징발하여 봉기의 진압에 등원하였다. 예컨대 明宗 7년 2월에 서해도에 도적이 일어났을 때는 戶部員外郞을 보내 州縣軍을 징발하여 토벌하게 하였고註 141 明宗 12년 전주에서 旗頭 竹同 등이 봉기를 일으켰을 때도 按察使로 하여금 道內兵註 142을 징발하여 토벌하게 하였다.註 143 한편 明宗 23년에는 東南路按察副使가 東京 등지에서 일어난 봉기의 진압을 위해 먼저 州縣軍을 동원해 토벌하였으나註 144 실패하자 중앙군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그에 따라 중앙에서 대규모의 토벌군이 파견되었다.註 145 이처럼 무신집권기에도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지방에서 봉기가 일어났을 경우 그 규모에 따라 중앙군 또는 지방군이 진압에 동원되었으며 특히 지방의 주현군은 봉기의 규모가 작거나 중앙군의 파견이 어려울 때 주로 동원되고 있었다.한편 이 시기 지방민의 봉기와 관련된 특징의 하나는 軍人들이 주도하거나 참여한 봉기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明宗 4년에 일어난 趙位寵 亂은 기본적으로는 武臣政權에 대한 文臣官僚의 권력회복이라는 지배계급 내부의 정권쟁탈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北界지역 諸城 都領의 지휘하에 많은 州鎭軍이 가담하였다. 상층 지배층과는 달리 농민층으로 구성된 하층 군인의 봉기는 反封建 抗爭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이것은 무신정권 성립 후 서북면 지역의 복잡한 統治構造註 146하에서 지방관의 불법적인 중복수탈과 使行의 통로, 西京으로 잦은 고위관리의 왕래 등의 요인에 의해 이 지역주민에 대한 수탈이 가중되어 농민생활이 더욱 곤궁해졌기 때문이었다.다음 명종 12년 3월에 일어난 全州 군인 旗頭 竹同 등의 봉기註 147는 군인들에 대한 가혹한 力投 징발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봉기한 군인들의 타도대상이 된 것은 상호장을 비롯한 州吏와 司錄이었다. 鄕吏들은 지방사회에서 농민들에 대한 租稅徵收, 力役 徵發 등의 행정업무를 일선에서 수행하였으며 특히 上戶長은 주현군(一品軍)의 장교를 겸임하여 別將이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여기서 상호장이 별장직을 겸하고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司錄은 司錄參軍事로도 불리는데 지방에서 鄕吏들을 지휘, 감독하여 중앙정부의 民에 대한 수취를 원활하게 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註 148 동시에 향리를 교체할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註 149 따라서 사록은 외관 관속층 중 향리층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었고, 또한 주민들과도 가장 접촉이 많은 위치에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농민봉기시 일선에서 조세징수나 力役징발 등 對民업무를 직접 수행하는 향리층과 함께 농민들의 타도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농민층으로 구성된 군인봉기 역시 이 시기 다른 농민봉기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과중한 수취와 노역동원에 반발해서 일어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神宗 5년에 일어난 慶州別抄軍의 봉기註 150도 또한 별초라는 군인층이 주도한 군인봉기로 볼 수 있다. 경주별초군이 永州를 공격한 원인에 대해서는 이 사건 이전에 慶州에서 봉기가 일어났을 때 이웃 永州의 공격註 151을 받아 실패한데 대한 보복이라는 설명註 152이 있고, 또 領域간의 階序的 지배구조 속에서 맺어졌던 主縣과 屬縣간의 관계가 변동되면서 생긴 이해관계의 대립 때문이라는 설명註 153이 있다. 당시 군현제의 전반적인 변동과 관련하여 主屬縣사이의 이해관계의 대립에 의한 충돌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겠다. 그러나 慶州와 永州사이의 충돌은 일반주민이 아닌 別抄의 주도하에 도적, 승려 등의 특정계층이 참여하였고, 또 이전부터 경주지역에서는 주민들의 봉기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양자간의 직접적인 충돌원인에 대해서는 당시의 이러한 특수한 사정들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별초가 봉기를 주도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당시 지방 군현에서 군인징발을 둘러싸고 군현 간에 벌어진 이해관계의 대립을 원인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註 154군인봉기는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는데註 155 봉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대부분 武臣政變 이후 더욱 확대되는 權勢家들의 土地兼併과 국가의 농민층에 대한 과중한 收取, 그리고 통치체제의 이완을 틈탄 지배층의 불법적인 수탈로 인한 것이었다. 무신집권 이후 가속화되는 농민층의 몰락과 유망은 軍役담당층의 감소를 가져왔고 군인 징발시 군현간 또는 군현 내에서 징발을 둘러싸고 地方官이나 鄕吏들에 의해 富壯戶는 면제되고 대신 능력이 없는 貧弱戶가 군역에 동원되는 등의 불법이 행해졌다. 대부분의 군인봉기에서 지방관이나 향리들이 타도대상이 되었던 것은 바로 이들이 군인징발시 일선에서 징발업무를 담당하면서 여러가지 불법을 자행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이다.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武臣執權 초기까지 지방의 주현군은 이전과 비교하여 그 조직이나 활동에서 별다른 변화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이 시기가 되면 일반민의 봉기와 함께 軍人들에 의한 봉기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군인봉기는 일반민의 봉기와 마찬가지로 무신정변 이후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이를 계기로 하여 전기의 주현군체제는 서서히 변화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 이 단계까지는 前期의 州縣軍體制가 대체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註 134
- 《朝鮮金石總覽》 上, 〈光陽玉龍寺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先覺國師碑陰記.
- 註 135
- 《高麗史》 世家 권20 明宗 12년 3월.
- 註 136
- 《高麗史節要》 明宗 21년 8월.
- 註 137
- 《高麗史》 地理志에 의하면 求禮는 仁宗 21 년에 감무가 설치되었지만 光陽은 설치시기가 不明이다.
- 註 138
- 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에서도 一品軍이 석탑 조성을 위한 役夫로 동원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韓國金石文追補》).
- 註 139
- 《高麗史》 병지 주현군조에 기록된 全州界內의 保勝, 精勇의 군액은 각각 150과 1,214인으로 이들 가운데서 징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註 140
- 《高麗史節要》 明宗 6년 2월.
- 註 141
- 《高麗史節要》 明宗 7년 2월.
- 註 142
- 여기서 道內兵이란 全州界內외 군인이 아니라 全羅州道 내의 군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高麗史節要》 高宗 4년 5월조 참조).
- 註 143
- 《高麗史節要》 明宗 12년 3월.
- 註 144
- 이때 慶州別抄軍의 봉기를 토벌한 공으로 安東이 大都護府로 승격되고 있는데 이는 봉기군의 토벌에 안동의 州縣軍이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高麗史》 地理志 安東府).
- 註 145
- 《高麗史節要》 明宗 23년 2월.
- 註 146
- 兩界지역에는 南道와는 달리 兵馬使, 監倉使, 分道員, 守令 등의 복잡한 지배기구가 설치되고 있었다(邊太燮, 〈高麗 兩界의 支配組織〉《高麗政治制度史硏究》, 일조각, 1971).
- 註 147
- 《高麗史》 권20, 明宗 12년 3월.
- 註 148
- 朴宗基, 〈高麗時代 外官 屬官層에 관한 硏究〉(《震檀學報》 1992, 게재예정).
- 註 149
- 尹京鎭, 〈高麗 郡縣制의 變動과 朝鮮初 郡縣運營體系의 改編〉(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90).
- 註 150
- 《高麗史》 권21, 神宗 5년 10월·12월, 《高麗史節要》 神宗 5년 12월, 《高麗史》 地理志 安東府.
- 註 151
- 高宗 20년 慶州에서 봉기가 일어났을 때 중앙에서 토벌군이 파견되었는데 이때에도 토벌군이 永州城에 들어가 이곳을 근거로 하였음이 주목된다(《高麗史節要》 高宗 20년 5월·6월).
- 註 152
- 金錫亨氏는 이 사건 이전에 別抄軍을 중심으로 한 경주 폭동군이 봉기했을 때 개경으로부터 토벌군 파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봉기군이 저절로 와해되었는데 이는 이웃 永川의 공격을 받아 패주한 때문이며 경주 별초군의 공격은 이에 대한 보복이라고 하였다(《봉건지배계급에 반대한 농민들의 투쟁》 고려편, 1960).
- 註 153
- 蔡雄鎭, 〈12, 13세기 향촌사회의 변동과 민의 대웅〉(《역사와 현실》 1990년 3호).
- 註 154
- 후대의 자료이긴 하지만 《高麗史》 刑法志 職制 禪王 14년 7월의 記事가 참고된다. 즉 司憲府 上書에 의하면 당시 軍人을 징발할 때 징발업무를 직접 담당하는 守令들의 부정을 염려하여 巡問按廉使가 수령들로 하여금 서로 郡을 바꾸어서 징발하게 하였는데 이때 수령은 자신의 관할이 아닌 他郡의 사정에 밝지 못하므로 여러가지 가혹한 방법을 동원하여 군인을 징발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이미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주민들은 군인징발시 가혹했던 他郡에 대하여 많은 불만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것이 군현간에 무력충돌을 야기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 註 155
- 高宗 3년 12월에 일어난 全州 군인의 봉기, 고종 4년 5월에 일어난 西京 군인 최광수의 봉기, 그리고 고종 6년에서 9년 사이에 일어난 義州民 別將 韓恂, 郞將 多智의 봉기 등이 있다.
2. 崔氏執權期
이 시기는 외적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때이다. 주현군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봉기의 진압이나 役事에 동원되기도 하였지만 주로 외적과의 전쟁에 징발되었다. 그러나 거란과의 전쟁 이후부터는 民의 流亡이 심화되면서 州縣軍의 징발이 점차 어려워지게 되었다. 蒙古의 1차 침입 이후에는 중앙으로부터의 防禦軍 편성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주현군은 출정군으로 동원되지 않고 지방에 머물러 지역방어에 주력하게 되었다.이 시기의 봉기의 대부분은 외적의 침입을 틈 타 일어났고 그것의 진압을 위해 주현군이 징발되었다. 먼저 高宗 4년에 일어난 振威縣人의 봉기는 거란의 침입이라는 국가유사시를 틈 탄 것으로 令同正 李將大, 直長同正 李唐必 등이 같은 縣人 別將同正 金禮와 더불어 무리를 모아 縣令註 156의 符印을 겁탈하고 자칭 靖國兵馬使, 그들의 군대를 義兵이라 칭하는 등 그 규모가 큰 것이었다.註 157 대규모 반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부는 중앙에서 토벌군을 파견하지 못하고 郞將과 散員 등을 보내 按察使와 함께 廣州와 水州의 주현군을 징발해 토벌하게 하였다. 거란의 침입으로 모든 中央軍이 전선에 동원된 상태였으므로 중앙군의 파견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廣州註 158와 水州軍註 159의 군사력만으로 진압이 불가능하자 忠州,註 160 淸州,註 161 楊州道兵註 162까지 징발하였다. 그러나 이 봉기는 주현군의 힘만으로 진압하지 못하고 결국은 중앙에서 토벌군이 파견됨으로써 비로소 진압되었던 것 같다.註 163다음 高宗 24년에 전라도에서 일어난 봉기도 몽고의 3차 침입을 틈 탄 것이다. 전라도 草賊 이연년이 原栗, 潭陽註 164 등 諸郡의 무뢰배를 모아 海陽 등 주현을 공격하였다. 이에 全羅道指揮使 김경손이 羅州에서 別抄軍을 모집하여 이들을 토벌하였다.註 165 토벌을 위해 동원된 별초는 나주성 내의 주현군註 166 가운데서 모집된 자들로 구성된 정예군으로서 임시로 조직된 부대였다. 別抄가 조직되었던 것은 羅州城 내의 주현군 군사력이 그대로는 봉기군과 대적할 수 없을 만큼 유명무실하였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봉기군의 토벌에 앞서 좌우에서 諸州軍兵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요청하였던 것이다.註 167 별초군의 조직은 몽고와의 전쟁으로 인해 기존의 주현군조직이 붕괴되고, 또 농민층이 몰락하여 군역 담당 층이 감소함에 따라 종래와 같은 군인징발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州縣軍의 붕괴 조짐은 거란과의 전쟁으로 民의 流亡이 심화되면서 이미 그 단서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 같다.註 168 그러나 이후 몽고의 침입시에 주현군이 출정군으로 동원되고 또 지방 곳곳에서 그 활동 모습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몽고의 침입 이전까지 주현군 조직의 결정적인 붕괴는 아직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高宗 초에 대규모의 거란군이 침입하자 이에 대응하여 고려정부는 3군 또는 5군으로 편성된 대규모의 防禦軍을 파견하였고註 169 이와 함께 지방의 주현군이 징발되어 동원되었다.註 170 또 고종 3, 4년 무렵에는 경상도 해안 일대에 소규모로 생각되는 왜적의 침입이 빈번하였는데 이때에는 중앙으로부터의 출정군 파견은 없었고 守令, 防護別監,註 171 地方軍 將校의 지휘하에서 州縣軍이 동원되어 격퇴하였다.註 172고종 18년 이후 30여 년간에 걸쳐 계속된 몽고 침입 이후 초기에는 중앙에서 출정군이 조직되고註 173 지방의 주현군도 방어군으로 동원되었다.註 174 그러나 3차 침입 이후에는 출정군 편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또 지방군의 동원도 없었다. 그 대신 중앙에서 각 지방에 (山城)防護別監이 파견되어註 175 지방의 요새(산성)를 중심으로 항전하였다. 이는 몽고군에 대항하는 戰術의 변화와 관련된 것으로서 정면대결로는 승산이 없었기 때문에 山城이나 海島로의 入保를 통해 방어 위주의 淸野전술로 전환하여 희생을 최소화 하려는 것이었다. 이후의 對蒙抗戰은 방호별감이나 지방관의 지휘하에 주현군과 지방민이 모두 참여하였다. 예컨대 몽고의 3차 침입시 竹州註 176는 방호별감의 지휘하에 城中軍士가 동원되어 항몽전을 수행하였다.註 177 죽주는 廣州의 속현으로 《고려사》 병지 주현군조에는 죽주의 주현군 군액이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竹州 자체적으로 주현군조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註 178 따라서 항몽전에 참여한 城中軍士는 바로 죽주에 소속된 주현군이었던 것이다.다음 몽고의 5차 침입시 東州의 경우 東州民은 이웃 고을인 金化郡註 179과 金城縣註 180의 주민들과 함께 東州山城에 입보하여 山城防護別監을 중심으로 東州副使, 判官, 그리고 金化監務, 金城縣令 등의 지휘하에 몽고군에 대응하였다.註 181 이때 방호별감이 동원한 정예군은 동주산성에 입보해 있던 諸郡縣의 주현군 중에서 선발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또 5차 침입 당시 치열한 항몽전을 벌였던 충주성의 경우 역시 방호별감의 지휘하에 주현군은 물론 官奴와 白丁 등이 모두 동원되어 항몽전에 참여하였다.註 182 즉 충주의 주현군은 물론 성중에 피난해 있던 모든 계층의 주민이 항몽전의 주체가 되어 충주성을 방어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지휘자인 山城防護別監은 물론 전투에서 軍功을 세운 州縣軍과 官奴, 白丁까지 모두 국가로부터 官爵을 받았다.註 183이처럼 거란이나 몽고군의 침략초기에 崔氏政權은 중앙에서 防禦軍을 편성하여 외적과 정면대결을 하였다. 이때는 중앙군과 함께 지방의 주현군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출정군으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몽고의 1차 침입시 양계 주진군체제가 붕괴되고 강화로 천도하면서 몽고침략에 대응하는 고려정부의 전술이 지역요새 중심의 방어체제로 전환하였다. 그에 따라 지방의 주현군은 兩界의 防戍軍이나 出征軍으로 동원되지 않고 지방에 머물러 있으면서 중앙에서 파견된 防護別監이나 地方官의 지휘하에서 山城 등의 요새지를 중심으로 주민과 함께 지역방어에 주력하게 되었다.그러나 高宗 40년 이후가 되면 지방에서 주현군의 활동상은 점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고 대신 別抄軍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장기간의 항전과정에서 주현군조직이 결정적 손실을 입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전쟁의 와중에서 고려정부와 지배층, 그리고 침략자 몽고로부터 이중, 삼중으로 수탈을 당한 농민층의 몰락으로 군역의 담당계층이 크게 감소하였고, 또한 파괴된 주현군 조직을 제건할 수 있는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지방의 말단까지 제대로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주현군 조직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붕괴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註 156
- 振威縣은 水州의 屬縣이었는데 明宗 2년에 監務가 파견되고 후에 縣令으로 승격되었다.
- 註 157
- 《高麗史節要》 高宗 4년 정월.
- 註 158
- 廣州의 州縣軍 軍額은 保勝 258, 精勇 546, 一品 536이었다(《高麗史》 兵志 州縣軍).
- 註 159
- 水州의 州縣軍 軍額은 保勝 175, 精勇 291, 一品 372이었다(《高麗史》 兵志 州縣軍).
- 註 160
- 忠州의 州縣軍 軍額은 保勝 241, 精勇 357, 一品 520이었다(《高麗史》 兵志 州縣軍).
- 註 161
- 淸州의 州縣軍 軍額은 保勝 538, 精勇 708, 一品 850이었다(《高麗史》 兵志 州縣軍).
- 註 162
- 楊州의 軍額은 保勝 133, 精勇 864, 一品 529였다(《高麗史》 兵志 州縣軍).
- 註 163
- 高宗 4년 정월에 將軍 奇允偉를 보내 本領軍과 神騎 2班을 거느리고 충청안찰사와 함께 南賊을 잡게 하였는데 여기서 남적이란 振威縣의 봉기군을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된다(《高麗史節要》 高宗 4년 정월조 참조).
- 註 164
- 原栗, 潭陽은 모두 羅州牧의 )屬縣이었다(《高麗史》 地理志 全羅道).
- 註 165
- 《高麗史節要》 高宗 24년.
- 註 166
- 《고려사》 병지에 기록된 羅州界 內의 주현군 軍額은 保勝 454, 精勇 848, 一品 922명이다.
- 註 167
- 《高麗史節要》 高宗 24년 봄.
- 註 168
- 《高麗史節要》 高宗 8년 윤 12월.
- 註 169
- 《高麗史節要》 高宗 3년 8월.
- 註 170
- 《高麗史節要》 高宗 4년 정월·5월·5년 9월.
- 註 171
- 防護別監은 高宗 23년 이후 몽고군에 대한 대응전술이 정면대결에서 지방 요지를 중심으로 하는 방어전술로 전환되면서 山城 등지에 파견되었는데 이미 그 이전부터 지방의 군사요지에 파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註 172
- 《高麗史節要》 高宗 13년 정월·14년 4월·5월.
- 註 173
- 《高麗史節要》 高宗 18년 9월·11월·19년 2월·22년 윤 7월.
- 註 174
- 《高麗史節要》 高宗 18년 8월.
- 註 175
- 《高麗史節要》 高宗 23년 6월·39년 2월·7월.
- 註 176
- 廣州의 속현으로 明宗 2년에 監務를 설치하였다(《高麗史》 권56, 地理 1).
- 註 177
- 《高麗史節要》 高宗 23년 9월.
- 註 178
- 《高麗史》 兵志 州縣軍條의 軍額은 지방관이 파견된 主縣, 즉 軍目道 만의 군액이 아니라 군목도 관내 모든 군현의 군액을 종합한 숫자이다.
- 註 179
- 東州의 속현으로 仁宗 21년에 監務를 두었다(《高麗史》 권58, 志 12 地理 3).
- 註 180
- 交州의 屬縣으로 睿宗 원년에 監務를 두었다가 후에 縣令을 두었으며 高宗 41년에 다시 낮추어 監務로 하였다 (《高麗史》 권58, 志 12 地理 3).
- 註 181
- 《高麗史節要》 高宗 40년 8월.
- 註 182
- 《高麗史節要》 高宗 40년 12월.
- 註 183
- 《高麗史節要》 高宗 41년 2월.
Ⅳ. 地方 別抄軍의 등장
무신집권기에 들어오면 기존의 중앙군이나 지방군 이 외에 중앙과 지방에는 별초군이라는 새로운 군사조직이 등장하고 있다. 별초군은 이미 무신집권 초기부터 그 존재가 나타나지 만 특히 대몽전쟁 후반기에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고 있다.그 동안 別抄軍에 대해 다양한 견해들이 발표되었다.註 184 먼저 別抄軍의 組織에 대해 임시적으로 편성된 특별부대라는 견해註 185와 常備兵이었다는 견해註 186가 있고, 또 組織動機에 대해서도 武臣政權의 안정이라는 對內的인 사정을 강조하는 견해註 187와 蒙古侵略에 대한 대응이라는 對外的인 사정을 강조하는 견해註 188가 있다. 그리고 별초군의 성격에 대해서도 私兵이라는 견해註 189와 公兵이라는 견해註 190가 대립되어 있다.필자는 이러한 기존의 연구성과들을 토대로 하여 地方 別抄軍의 조직시기와 동기, 임무와 성격, 조직과 지휘체제 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註 184
- 池內宏, 〈高麗의 三別抄에 대하여〉(《史學雜誌》 37-9, 1926;《滿鮮史硏究》 中世篇 3, 1963).
內藤雋輔, 〈高麗兵制管見〉(《靑丘學叢》 15·16, 1934;《朝鮮史硏究》 1961).
金庠基, 〈三別抄와 그 亂에 대하여〉(《展檀學報》 9, 10, 13, 1939∼1941;《東方文化交流史論攷》, 1948).
閔丙河, 〈崔氏政權의 支配機構〉(《한국사》 7, 국사편찬위원회, 1973).
金潤坤, 〈三別抄의 對蒙抗爭과 地方郡縣民〉(《東洋文化》 20·21, 1981).
金塘澤, 〈武臣政權時代의 軍制〉(《高麗軍制史》, 陸軍本部, 1983).
申安湜, 〈高麗中期의 別抄軍〉(《建大史學》 7, 1989).
- 註 185
- 金庠基, 池內宏의 앞의 논문.
- 註 186
- 申安湜, 金塘澤, 위의 논문.
- 註 187
- 金潤坤, 앞의 논문.
劉璟娥, 〈高麗 高宗·元宗時代의 民亂의 性格〉(《梨大史范》 23·24, 1988).
- 註 188
- 申安湜, 앞의 논문.
- 註 189
- 閔丙河, 앞의 논문.
- 註 190
- 金庠基, 申安湜의 앞의 논문.
1. 組織시기와 동기
別抄가 사료상에 처음 출현하는 시기는 趙位寵의 반란군 토벌시 출정군 중에 戰鋒別抄가 조직되는 明宗 4년이다.註 191 이때 별초는 기존 군조직에서 용감하고 목숨을 돌보지 않는 정예군들로 구성된 부대로서 반란의 효율적인 진압을 위해 임시적으로 조직된 것이었다. 이렇게 임시로 조직된 別抄軍은 이후 高宗 3년 9월의 거란군 토벌을 위해 파견되는 중앙의 출정군 조직속에서 神騎와 함께 별초가 一隊를 구성하여 선봉대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註 192地方別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神宗 5년의 慶州別抄註 193이다.註 194 따라서 이미 신종 5년 이전부터 지방별초는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地方別抄軍이 비교적 일찍부터 조직되었던 지역은 지방민의 봉기가 특히 심하였던 서북면, 충청도, 경상도 등지의 지방요지였다. 武臣政變 후에도 國王과 王朝支配體制가 부정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기존의 군사조직은 國王의 軍隊, 王朝의 軍隊로서 계속 존속하였다. 기존 군대의 주력인 2軍 6衛의 대부분과 지방의 州鎭軍, 州縣軍은 모두 국가에 의해 강제로 징발된 농민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農民層은 무신집권 후 이전보다 더 심한 억압과 수탈을 당하였고,註 195 따라서 이들은 武臣政權에 대해 강한 불만세력이 되었다. 또한 國王의 전통적 권위가 최고로 받들어지는 王朝지배체제하에서 불법적인 政變을 통해 집권한 무신정권의 정당성은 인정받기 어려웠을 것이다.무인집권기에 들어오면서 農民, 賤民 등 地方民의 蜂起가 집중되는데 이 시기 빈번하게 발생했던 봉기의 주력은 바로 農民들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무신정권은 反武臣政權 세력인 農民들로 조직된 기존의 軍隊를 신뢰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이들은 무신정권의 안정에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되었을 것이다.武臣政變 직후 西北面지역을 비롯한 전국에서 地方軍組織이 대거 참여한 反武臣政權 투쟁이 전개되었다. 趙位寵 亂을 계기로 한동안 계속되었던 서북면지역에서 봉기의 주력군은 그 지역의 住民들로 편성된 州鎭軍조직이었고 지도부는 주진군의 지휘부인 都領들이었다.註 196 서북면 지역에서 비교적 일찍부터 別抄軍의 존재가 확인되는 곳은 安北都護府, 渭州, 泰州 등의 州鎭인데註 197 이들 주진의 대부분은 청천강과 대동강 유역의 山谷간에 위치하여 서북면 주민의 봉기시 봉기군의 주 활동무대가 되었던 곳이다.註 198 봉기 후에 중앙정부는 봉기에 참여했던 이 지방 토착세력가와 주민들의 감시, 통제를 위한 방법의 하나로 기존의 州鎭軍組織과는 별개의 別抄軍을 중앙에서 파견하거나 지방에서 조직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서북면지역은 변경이라는 지역적 특성상 봉기에 가담했던 주민의 대부분이 주진군조직 속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입장에서는 反武臣政權的인 성향이 강한 기존의 州鎭軍組織을 신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親武臣政權的인 別抄軍을 새로이 조직하였던 것이다.그 밖의 南道 지방에서도 軍人들이 주도하거나 참여한 地方民의 蜂起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武臣政權은 중앙과 지방의 反武臣政權的인 세력들을 진압하고 이들을 계속 감시, 통제하기 위한 새로운 군사력(조직)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武臣執權 초기에 나타나는 地方別抄軍은 반무신정권적인 지방봉기를 진압하거나 반무신정권적인 지방세력에 대한 감시, 통제를 목적으로 조직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地方別抄는 지방민들의 봉기가 절정에 달하는 明宗代에서 神宗代에 걸쳐 京, 牧, 都護府 등 지방의 요지를 중심으로 조직되기 시작하였고 그 후 對蒙戰爭이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점차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對蒙戰爭 이후가 되면 기존의 地方軍制가 붕괴되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병력징발이나 동원이 어려운 상태가 된다. 이에 따라 대몽전쟁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던 地方別抄軍은 그 조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기존의 지방군조직은 무신집권 초기까지는 대체로 유지되었으나 몽고와의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양계 주진군조직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몽고의 1차 침입시 결정적인 피해를 입어 그 이후에는 제 기능을 발휘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南道의 州縣軍 역시 계속되는 몽고와의 장기전으로 파괴되어 더 이상 기존의 군조직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또한 무신집권 이후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동과 전국적으로 계속된 蜂起 그리고 연이은 외적과의 戰爭으로 農民層이 몰락하여 사방으로 유리 하였다. 이에 따라 軍役담당층이 크게 감소하게 되어 이전과 같은 강제징발방식에 의한 군인동원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몽고의 침입이 계속되는 급박한 상황속에서 새로운 군사동원체제가 필요하였는데 바로 別抄軍의 조직은 이전의 강제징발방식이 아닌 募軍 방식에 의해 선발하는 새로운 동원체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高宗 40년 이후가 되면 기존 州鎭軍이나 州縣軍의 존재는 기록상에서 사라지게 되고 대신 別抄軍의 활동만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전쟁 후기에는 별초군이 대몽전쟁의 주력이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註 191
- 《朝鮮金石總覽》 上, 崔忠獻 墓誌, 《高麗史》 권 129, 崔忠獻 列傳.
- 註 192
- 《高麗史節耍》 高宗 3년 9월, 《高麗史》 권103, 金就勵 列傳.
- 註 193
- 《고려사》 지리지에는 東京夜別抄로 표현되어 있다(《高麗史》 地理志 安東府).
- 註 194
- 《高麗史》 권21, 世家 神宗 5년 10월, 《高麗史節要》 神宗 5년 10월.
- 註 195
- 邊太燮, 〈農民 賤民의 亂〉(《한국사》 7, 국사편찬위원회, 1977).
尹龍爀, 〈高麗 對蒙抗爭期의 民亂에 대하여〉(《史叢》 30, 1986).
- 註 196
- 金南奎, 〈明宗代 兩界 都領의 性格과 活動〉(《高麗兩界地方史硏究》, 새문사, 1989).
金南奎, 〈武臣執權期 兩界 地方勢力외 政治的 動向〉(같은 책).
- 註 197
- 《高麗史節要》 高宗 18년 9월.
- 註 198
- 김석형, 《봉건지배계급에 반대한 농민들의 투쟁》 고려편(1960).
2. 别抄軍의 임무와 성격
別抄軍이 조직된 초기에 別抄軍의 주 임무는 중앙의 武臣政權의 안정을 위해 지방의 反武臣政權勢力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이었다. 무신정권의 私兵집단인 都房은 중앙에서 무신정권의 유지를 위한 무력기반의 역할을 하였지만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반무신정권적인 봉기를 진압하고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무신집권 이후에도 王朝體制의 유지로 高麗王室의 전통적 권위가 유지되는 상황하에서 執政武人의 私兵인 都房의 활동에는 명분상으로 많은 제약이 따랐을 것이다. 그리하여 전국적인 통제를 위한 무신정권의 公的인 무력기반이 필요하였고 그러한 필요에 의해 조직된 것이 地方別抄軍이었다. 따라서 都房이 執政武人의 私的 무력기반이었다면 새로이 조직된 別抄軍은 무신정권의 안정과 유지를 위한 公的 무력기반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對蒙戰爭 이후가 되면 地方別抄軍은 몽고침략에 대한 防禦軍으로 주로 활약하게 된다. 지방별초가 최초로 대몽전쟁에 참여한 것은 蒙古의 1차 침입시 龜州城 전투에서이다. 이때 서북면병마사 박서의 총지휘하에 安北都護別抄와 渭州, 泰州, 靜州別抄 등 諸城의 別抄가 對蒙戰에 참전하였다.註 199 몽고의 1차 침입시 兩界의 군사조직이 거의 와해되면서 이후에는 양계지역에서 防戍軍이나 州鎭軍의 활동은 자취를 감추고 別抄軍의 활동만이 간간이 나타날 뿐이다. 그런데 양계지역에서 활동한 별초군은 地方別抄보다는 중앙에서 파견한 京別抄가 더 많았다.註 200 이것은 양계 주진의 군사조직이 붕괴된 이후 양계 지역에서는 새로운 동원체제인 지방별초가 제대로 조직되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남도지역의 경우는 전쟁 초기부터 別抄軍이 기존의 州縣軍과 함께 대몽전에 참여하였다. 남도지역에서 지방별초군이 대몽전에 참전한 최초의 예는 高宗 19년 정월의 忠州別抄이다.註 201 당시 충주에는 兩班別抄와 奴軍雜類別抄가 조직되어 있었다.註 202 이후 전쟁이 장기화되어 州縣의 피해가 커지면서 기존 州縣軍의 활동은 점차 약화되고 대신 高宗 40년 이후부터는 別抄軍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당시 別抄軍의 주된 戰術은 山城이나 州城을 거점으로 하여 이곳에 入保한 지방민과 함께 방어 위주의 소극전을 전개한 州縣軍과는 달리 州縣 사이를 오가며 奇襲이나 遊擊戰을 전개하는 형태였다.註 203南道 지역 역시 양계 지역과 마찬가지로 地方別抄와 중앙 파견의 경별초(야별초)의 활약이 다 같이 나타나는데 양계지역에 비해 지방별초의 활약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남도지역이 몽고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은 양계지역에 비해 전쟁의 피해를 덜 받았고 나아가 기존의 주현군조직이 붕괴된 이후에도 새로운 동원체제에 의해 別抄軍을 조직할 수 있는 여건이 비교적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註 199
- 《高麗史節要》 高宗 18년 9월.
- 註 200
- 기록을 통해 나타나는 양계지역에서의 別抄軍의 활동을 분류해 볼 때 地方別抄로 생각되는 것은 高宗 42년 2월의 登州別抄 뿐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중앙에서 파견한 별초로 보인다(高宗 23년 7월 价州의 京別抄, 45년 5월 博州틀 鎭撫한 別抄, 46년 정월 成州 岐巖城에서 활약한 夜別抄와 金剛城을 구원한 別抄 3千, 46년 2월 寒溪城에서 蒙古兵을 섬멸한 夜別抄 등).
- 註 201
- 《高麗史節要》 高宗 19년 정월.
- 註 202
- 忠州에서 兩班, 奴軍雜類別抄 이외에 主 軍役擔當層인 農民으로 구성된 別抄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직 이때까지는 農民들이 기존의 강제징발방식에 의해 州縣軍으로 동원되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 註 203
- 《高麗史節要》 高宗 36년 9월·40년 11월·43년 4월·45년 10월조 참조.
3. 别抄軍의 조직 및 지휘체계
지방 별초군은 기존의 군목도와 관계없이 군현을 단위로 하여 조직되었고 섬을 단위로 조직된 경우도 있었다.註 204 지방별초가 일부 州縣에만 조직되었는지 또는 전 주현에 모두 조직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기록상으로는 別抄軍의 존재가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발견되기는 하지만註 205 모든 주현에서 조직되었던 것은 아닌듯 싶다. 지방별초는 일부 주현에만 조직되었던 것 같고, 또 그 兵力도 수십에서 수백 정도의 소규모였던 것으로 생각된다.별초군이 조직된 초기에는 기존의 동원체제에 의한 軍조직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임시적으로 기존의 군조직에서 정예군을 선발하여 조직하기도 하고註 206 군역담당계층이 아닌 兩班, 雜類, 奴婢 등 非農民層을 대상으로 하여 조직하기도 하였다.註 207 그러나 몽고와의 전쟁이 장기화되어 기존 지방군조직의 피해가 커지고 또한 軍役담당층이 감소하여 종래의 강제징발방식의 의한 동원체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자 農民을 비롯한 모든 계층을 대상으로 하여 강제징발방식이 아닌 募軍방식을 통해 별초군을 조직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別抄는 종래의 徵兵制가 아닌 募兵制에 의해 조직된 군대였다. 기존의 徵兵制가 붕괴된 상황에서 募兵制에 의해 조직된 別抄軍은 일종의 직업군인으로서 이들에게는 軍役에 대한 반 대 급부로 土地(田丁)가 지급되었다.註 208지방에서 활약하고 있는 별초군의 지휘체제는 대체로 3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 별초도령, 별초지유 등 별초군의 직속상관이 별초군을 지휘하는 형태인데註 209 이것은 중앙에서 파견된 경별초의 지휘하는 경우이다. 둘째, 교위, 산원 등 기존의 중앙군 장교가 별초군을 지휘하는 형태인데註 210 이때는 중앙 파견의 경별초를 지휘하는 경우도 있고 또 지방별초를 지휘하는 경우도 있었다.註 211 이러한 사실은 중앙군 장교들이 직접 京別抄를 거느리고 지방에 파견되어 활동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지휘관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地方別抄를 지휘하기도 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셋째, 州副使, 判官, 縣令 등의 地方官이나 防護別監이 지휘하는 형태인데註 212 이때는 지방관이나 방호별감이 직접 지방별초를 지휘하였다.- 註 204
- 大部島別抄의 경우이다. 大部島는 仁州의 屬郡인 唐城郡에 속해 있는 섬이었다(《高麗史節要》 高宗 43년 4월, 《高麗史》 권56, 地理志 仁州).
- 註 205
- 기록에서 地方別抄의 존재가 분명하게 확인되는 州縣은 安北都護府, 渭州, 泰州, 靜州, 慶州(東京), 忠州, 扶寧, 牛峯, 喬桐, 登州, 大部島, 北界 등이다. 이 밖에도 지방별초가 조직된 주현이 더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註 206
- 明宗 4년 趙位寵 亂 당시 조직된 戰鋒別抄의 경우(《高麗史》 권129, 崔忠獻 列傳, 《朝鮮金石總覽》 上, 崔忠獻 墓誌).
- 註 207
- 高宗 19년 정월 忠州외 兩班別抄와 奴軍雜類別抄의 경우(《高麗史節要》 高宗 19년 정월).
- 註 208
- 《高麗史節要》 元宗 12년 10월·14년 10월조 참조.
- 註 209
- 《高麗史節要》 高宗 36년 9월·40년 8월·45년 5월·46년 7월조 참조.
- 註 210
- 《高麗史節要》 高宗 40년 8월·40년 11월·41년 8월조 참조.
- 註 211
- 高宗 41년 8월 몽고병 척후가 槐州에 둔을 치자 散員 장자방이 別抄를 거느리고 격파하였는데 이보다 전인 高宗 40년 11월에는 校尉로서 平州城에서 喬桐別抄를 거느리고 몽고병과 싸운 적이 있다(《高麗史節要》 高宗 40년 11월·41년 8월).
- 註 212
- 《高麗史節要》 高宗 19년 정월·44년 9월·45년 8월·46년 2월, 元宗 12년 4월.
Ⅴ. 맺음말
지금까지 武臣執權期 軍制연구에서는 武臣政變 후 기존의 군제가 붕괴되거나 형해화되고 그에 대신하여 私兵이나 別抄軍이 등장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물론 이 시기 大土地所有의 발달, 국가의 과중한 수취와 지배층의 불법적인 수탈 등에 의한 농민층의 몰락으로 군역담당층이 감소하였고, 또 새로이 武臣이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기존의 軍制가 위기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武臣政變 이후에도 2軍 6衛의 中央軍이나 州縣軍, 州鎭軍 등 기존의 군사조직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武臣政變으로 武臣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도 國王과 王朝支配體制가 부정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기존의 군사조직은 國王의 軍隊, 王朝의 軍隊로서 계속 존속하였다.만약 기존의 군사조직이 붕괴하거나 형해화되었다면 기존 군사조직을 구성하는 지휘부의 임명이나 選軍이 계속될 수 없었고, 또 외적의 침입이나 지방민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중앙군이나 지방군의 동원이 이루어지거나 그 활동이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武臣政變 이후에도 蒙古와의 戰爭이 본격화되기 이전까지는 前期의 軍制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兩界 지역의 경우 蒙古의 침략으로 결정적인 피해를 받기 전까지 중앙으로부터 防戍將軍과 防戍軍이 파견되어 防戍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토착민들로 조직된 州鎭軍도 국경방어라는 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南道 州縣軍의 경우 역시 이전과 다름없이 州縣軍 본래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종래의 연구에서처럼 武臣政變 후 기존 군사조직이 형해화되거나 유명무실하게 되었다고는 보기 어렵다.그러나 蒙古침입 이후가 되면 기존의 地方軍組織은 붕괴되기 시작한다. 兩界 州鎭의 군사조직은 몽고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토착민들로 구성된 州鎭軍이 붕괴되고 중앙으로부터 防戍軍 파견도 중단되었다. 南道의 지방군도 몽고와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기존의 州縣軍 組織이 파괴되었을 뿐 아니라 軍役담당층이 감소하여 종래의 강제징발방식에 의한 군사동원체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武臣執權 초기부터 임시적 군사조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別抄軍이 점차 상비군화하여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別抄軍은 종래의 徵兵制에 의한 군사동원방식이 불가능하게 된 상황하에서 募兵制에 의한 동원방식으로 조직된 새로운 군사조직이었다. 그리하여 高宗 40년 이후가 되면 別抄軍이 붕괴된 기존의 군사조직에 대신하여 對蒙戰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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